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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유정의 ‘책 읽는 영화관’ | 삶을 등에 걸머진 고행길, <와일드> - 한 여자의 ‘특별한’ 94일 종주 

긴 거리의 여행을 가려면 배낭의 무게를 줄여라… 잉여의 짐은 불필요한 욕망의 증거일 뿐 

강유정 영화평론가
서른 살이 되던 해에 나는 설악산을 완주했다. 이유는 하나. 나이 서른이 되었는데 해놓은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이 불쑥 들었기 때문이다. ‘이립’(而立: 30세에 학문의 기초가 확립됐다는 공자의 말)이랬는데, 뜻을 세우기는커녕 이도 저도 아닌 인간으로 하루하루를 좀먹는다 싶었다. 그래서 비교적 젊고 건강한 몸으로 할 수 있는 기념비적인 일을 떠올렸다. 바로 설악산 등반 완주였다. 등산을 규칙적으로 하는 클라이머(climber)에게는 웃음거리가 될지도 모르겠지만 동네 뒷산에도 가보지 않은 내게는 에베레스트 등정만큼이나 두렵고 부담스러운 일이 틀림없었다. 7월의 어느 무더운 날 결국 설악산 등반을 결행했다. 양폭산장에서 하룻밤을 자고 새벽에 출발해 공룡능선을 넘고 서부능선으로 내려오는 험한 산행이다.

후들거리는 다리를 챙기면서 여러 가지 생각이 오갔다. 사실 몇 번이나 발을 헛디뎌서 다칠 뻔한 일도 있었다. 정상 부근에서 진통제를 먹고 하산하기 시작했더니 정신이 오락가락했다. 내려오는 그 긴 능선이 어찌나 길고 지루하게 느껴지던지. 어쨌든 서른 나이에 설악산 정상을 내 발로 밟았다. 이듬해에 우리 나이로는 서른하나. 만으로 스물아홉에 나는 문단에 나왔고 결혼을 했으며 박사학위도 받았다. 그때 설악산을 완주한 게 원동력이 되기라도 한 것일까? 선크림도 챙겨 바르지 못한 채 허덕이느라 오른쪽 광대뼈 위에 새끼 손톱만한 기미 자국을 얻었지만 그해 여름이 없었더라면 내 삶은 어땠을까? 결코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는 여름이다.

여자가 있기에 적합한 장소는 어디일까? 집일까? 아니면 바깥, 길 위일까? 아마도 여자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식탁 위에 아름다운 꽃병을 놓고 허리에 에이프런을 두른 채 가족을 위해 음식을 준비하는 모습의 그림일 테다. 집 안의 아름다운 피조물, 엄마 혹은 아내라는 명칭에 어울리는 그런 여자의 자리. 그런데 간혹 어떤 여자들은 집을 버리고 길 위로 나섬으로써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어떤 측면에서 보면 ‘집을 나서는 여자’는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 구태의연한 세계와 결별하는 출발의 상징과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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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호 (2015.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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