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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분석] 박근혜 정부 ‘구원투수’ 이병기 대통령 비서실장 - 포용력과 정무감각 갖춘 최강의 참모 

1960~70년대 김정렴 대통령 비서실장 같은 최적의 기능 수행 전망… 총선 앞두고 당청관계 재정립, 충돌보다는 조정을 통한 소통 기대 

남혁상 국민일보 정치부 차장

▎(왼쪽)중동 4개국 순방을 마친 박근혜 대통령이 3월 9일 오전 서울공항에 도착해 공군1호기를 나서고 있다. 박 대통령은 출국 사흘 전 이병기 대통령 비서실장을 임명했다. / (오른쪽)박 대통령의 신임 아래 정부의 요직을 두루 섭렵하게 된 이병기 대통령 비서실장.
지난 2월 말 ‘포스트 김기춘 시대’를 연 이병기 신임 대통령 비서실장. 박근혜 대통령이 그를 기용한 것은 일대 파격이었다. 이병기 실장 개인에 대한 평가보다는 현직 국가정보기관의 수장인 그를 불과 수개월 만에 비서실장으로 임명한 배경,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 등이 복합적으로 어우러진 결과다.

많은 이가 이병기 실장의 스타일을 볼 때 집권 3년차를 맞은 박 대통령의 국정운영 방식이 변화할 것으로 보고 있다. 물론 평가는 아직 이르다. 이 실장이 앞으로 당·정·청 소통의 가교 역할을 어떻게 해나갈지, 특히 야당과의 관계를 어떻게 풀어나가는지 살펴보고 판단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 대통령이 김기춘 비서실장과는 완전히 상반된 스타일의 이 실장을 낙점한 것 자체에 커다란 의미를 부여하는 시각이 많다. 앞으로 청와대 위주의 국정 조율보다는 당 중심의 정책 협의, 국정 조정이 더욱 활성화될 것이라는 전망 때문이다. 그런 측면에서 박 대통령이 왜 이병기 실장을 자신의 최측근 참모로 기용할 수밖에 없었는지, 그와의 개인적 인연은 무엇인지, 또 향후 박 대통령의 통치스타일에도 변화가 올 수 있을지 살펴보는 것은 의미있는 작업이다.

박 대통령의 집권 3년차인 2015년 새해는 출발부터 어려웠다. 2014년 연말 정국을 뜨겁게 달궜던 이른바 ‘정윤회 문건’ 파동은 가뜩이나 그해 거듭된 인사 실패와 소통 부재 논란을 겪었던 박근혜 정부에 커다란 타격을 줬다. 물론 그 진위는 검찰수사 결과 ‘사실무근’으로 밝혀졌지만, 어찌됐든 그 파문은 박 대통령의 국정운영에 심대한 차질을 빚은 것만은 분명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새해 연초부터 불거진 연말정산 세금 폭탄 및 건강보험료 부과체계 개선 백지화 논란은 박 대통령의 국정수행 지지도를 취임 이후 최저치인 20%대 후반까지 추락하게 했다.

이런 유례없는 국정 운영 위기를 반전시킬 선택지는 좁았다. 정치권과 여론이 요구했듯 인적(人的) 쇄신이야말로 박 대통령이 보여줄 수 있는 유일무이한 카드였다. 그리고 그 인적 쇄신의 상징은 바로 김기춘 비서실장 교체였다.

사실 김기춘 실장은 지난해부터 정치권, 특히 야권 공격의 집중 표적이 돼왔다. 세월호 참사 이후 정홍원 전 총리의 사의 표명과 신임 총리 지명과정에서 드러난 인사 난맥이 그 하이라이트였다. 안대희·문창극 전 총리 후보자의 잇따른 낙마는 청와대 인사위원회 위원장인 김 실장의 뼈아픈 실책이었고, 야권은 이런 틈을 놓치지 않았다. 어찌됐든 여러 고비를 겪으면서 결국 대세는 비서실장 교체 쪽으로 기울었다.

국정운영의 위기와 에이스 카드의 등장


▎3월 6일 서울 총리공관에서 열린 고위당정청 회의에 참석한 유승민 새누리당 원내대표(왼쪽부터), 김무성 대표, 이완구 국무총리, 이병기 대통령 비서실장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사실 김기춘 실장을 겨냥한 여야의 차가운 시선과 여론의 교체 요구는 과한 측면이 없지 않다. 70대 후반을 바라보는 고령을 무색하게 하는 탁월한 업무능력은 그를 보좌하는 참모진들도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카리스마 섞인 완벽주의는 박 대통령의 비서실장으로 최고의 카드였던 것이다.

하지만 박근혜 정부 2년차에 노정된 각종 인사 잡음, 불통(不通) 논란 등이 갈수록 심화되면서 이 문제를 책임져야 할 사람은 반드시 필요했다. 김기춘 실장은 그런 측면에서 책임을 피하기 어려운 자리에 있었다.

올해 1월 12일에 이뤄진 박 대통령의 신년구상 기자회견은 그런 점에서 초미의 관심사였다. 박 대통령은 먼저 신년 구상을 통해 경제혁신 3개년 계획, 통일준비, 각종 개혁과제 이행 등을 화두로 내걸면서 국민에게 역량을 모아줄 것을 호소했다. 중요한 이슈였지만 새로운 것은 아니었다. 정작 여론의 관심은 인적 쇄신에 있었던 탓이다.

청와대 기자들도 이를 잘 알고 있었다. 첫째 질문부터 인적 쇄신에 대한 강도 높은 질문이 이어졌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김기춘 실장의 교체 가능성을 콕 집어 묻는 기자 질문에 “당면한 현안이 많이 있어서 그 문제들의 수습을 먼저 해야 하지 않겠느냐. 그 일들이 끝나고 결정할 문제”라고 답변했다. 그러면서 김 실장에 대해선 “정말 드물게 보는 사심이 없는 분이고, 그렇기 때문에 가정에서도 참 어려운 일이 있지만 그냥 자리에 연연할 이유도 없이 옆에서 도와줬다”고 했다. 여론이 극도로 악화됐다. 김기춘 실장의 교체 가능성을 열어 놓으면서도 당분간 쇄신은 없다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기자회견 이후 민심은 오히려 싸늘해졌다. 박 대통령의 지지율은 하락세가 멈추지 않았다. 청와대는 물론 여권 내에서도 위기감이 증폭됐다. 결국 이른 시일 내 비서실장 교체 밖에 이런 상황을 반전시킬 카드가 없는 상황이 돼버린 것이다.

김 실장을 전폭적으로 신뢰하고 있었던 박 대통령의 고민은 여기서 여실히 드러난다. 여론의 집요한 요구도 그렇고 또 그동안 수차례나 사의를 표했던 김 실장의 교체가 어쩔 수 없는 외길 선택이라면, 후임자는 누구를 낙점해야 할까.

얼마 전 여권 고위 관계자는 박 대통령의 이런 고민이 이해가 간다고 했다. 이 관계자는 “김기춘 실장의 커리어를 보면 대통령이 그 후임자를 고르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며 “검사 출신으로 검찰총장, 법무부 장관, 3선 국회의원까지 거친 김 실장만큼 대한민국의 국회·정부·법조계까지 편하게 대할 수 있는 인사가 누가 있을까”라고 했다. 그만큼 김 실장의 존재감이 절대적이었다는 얘기다.

여권의 다른 관계자 역시 “김기춘 실장만큼 업무 측면에서 딱 부러지는 사람을 찾기는 쉽지 않다”며 “김 실장이 대통령의 눈높이를 올려 놓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고 표현했다. 김 실장의 사의 표명을 박 대통령이 수용한 지 10여 일이 지나도록 후임 인선이 이뤄지지 않은 유례없는 사태가 벌어진 것도 박 대통령의 후임 인선에 대한 고민을 잘 보여준다.

장고(長考)의 시간이 흐르는 우여곡절 끝에 등장한 인사가 바로 이병기 신임 청와대 비서실장이다. 이 실장의 커리어와 박 대통령과의 인연을 들여다보면 그가 왜 박 대통령의 낙점을 받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 실장은 커리어(직업) 외교관 출신이다. 그는 외무고시(8회)에 합격한 뒤 외교부(당시 외무부)에 입부했다. 8회 동기들 중에서도 그는 선두권이었다. 외교부 관계자들은 이 실장에 대해 “한마디로 에이스였다”고 말한다. 그는 1981년 케냐 주재 한국대사관에서 근무하던 당시 노신영 외무부 장관과의 인연으로 정무2장관을 맡았던 노태우 전 대통령의 비서로 발탁됐다. 노 전 대통령의 체육부 장관 재직 시절에도 가까이서 보좌했고 민정당 대표 역임할 때는 보좌역을 했다. 이후 노 전 대통령 취임 후 그는 청와대 의전비서관으로 발탁됐다.

“박정희 전 대통령 유족을 좀 돌보시라”


▎2007년 한나라당 박근혜 경선후보 캠프에서 회의를 갖는 친박계 인사들. 맨 왼쪽이 이병기 당시 여의도연구소 고문.
여기서 야인 생활을 하던 박 대통령과의 인연이 시작됐다. 당시 노태우 대통령에게 “박정희 전 대통령 유족을 좀 돌보시라”고 조언한 사람이 그였기 때문이다. 그 조언을 들은 노 대통령이 박 대통령을 청와대로 불러 위로했고, 당시 야인 박 대통령의 청와대 안내를 맡았던 사람도 이 실장이었다. 그는 이후에도 설이나 추석 명절 때마다 노 대통령을 대신해 인사를 전했다.

이 실장은 김영삼 정부 시절에도 요직을 맡았다. 국가안전기획부장 특보와 안기부 제2차장을 지내며 권력의 한가운데에 있었던 것이다. 그는 1997년에는 황장엽 씨 망명 사건이 발생하자 한국 망명을 위한 막후작전을 총괄하기도 했다. 대야·대북·외교까지 두루 겸비하는 경험과 경륜을 쌓게 된 것이다. 안기부를 끝으로 공직에서 물러난 뒤에는 일본 게이오대에서 객원 교수를 지냈다. ‘일본통’으로 알려져 주일대사로 간 것도 이때의 경험이 바탕이 됐다.

한동안 뜸했던 박 대통령과 이병기 실장의 인연은 다시 시작됐다. 박 대통령이 2002년 대선 당시 이회창 당시 한나라당 후보의 정치특보 활동을 하다가 선거 패배 후 야인생활을 하던 이 실장을 찾은 것이다.

2004년 당 대표 선거 때 박 대통령을 도우면서 신뢰의 깊이는 더욱 두터워졌다. 그해 박 대통령이 ‘차떼기당’ 오명을 쓴 한나라당 대표를 맡아 17대 총선을 치를 당시 천막 당사 아이디어를 냈던 것도 그였다. 이후 그는 한나라당 싱크탱크인 여의도연구소 고문으로 복귀했고, 2007년 한나라당의 대선 경선 때는 박근혜 캠프 선거대책 부위원장을 맡았다. 2012년 대선 때도 여의도연구소 고문으로 박 대통령의 ‘정치적 멘토’ 역할을 했다. 결국 박 대통령이 어려움을 겪고 도움을 필요로 할 때마다 그 곁에는 이병기 실장이 있었던 것이다. 이런 일련의 과정 속에서 박 대통령은 이 실장에 대한 개인적인 유대와 신뢰가 형성됐다고 보는 게 지배적인 관측이다. 신뢰할 수 있는 사람으로 이 실장을 평가한 것이다.

이는 매우 중요한 함의를 지닌다. 박 대통령은 신뢰와 원칙을 중시한다. 국정철학의 기조로 삼을 정도다. 박 대통령이 유독 배신자를 혐오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이는 박 대통령의 개인적 경험에 따른 것이기도 하다.

박 대통령이 2007년 펴낸 저서 <절망은 나를 단련시키고, 희망은 나를 움직인다>를 보면 박 대통령이 1979년 10·26 사태 이후 청와대를 떠나 생활할 때 겪은 배신에 대해 분노의 감정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박 대통령은 그 책에서 “사람이 사람을 배신하는 일만큼 슬프고 흉한 일도 없을 것이다. 상대의 믿음과 신의를 한 번 배신하고 나면 그 다음 배신은 더 쉬워지면서 결국 스스로에게 떳떳하지 못한 상태로 평생을 살아가게 된다”고 적었다.

어떤 직책 맡겨도 기대 이상의 실적


▎2013년 7월 일본 도쿄 미나토구 소재 새 청사에서 개관 행사를 연 주일 한국대사관 직원들. 가운데가 당시 주일 한국대사로 있던 이병기 비서실장이다.
또 1993년 발간한 책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났더라면>에서도 비슷한 말을 했다. 박 대통령은 이 책에서 “타인의 인격이 잘못돼 있다 해서 그리 속을 끓일 이유는 무엇인가. 그들의 옹졸함과 권모술수, 그들의 부정과 변신, 나약함, 비겁함은 그들의 문제이다. 나는 나의 길을 걸을 뿐이고, 그들은 그들 길을 가고 있을 뿐”이라고 했다.

그런 측면에서인지 박 대통령은 사람을 쓸 때 그만큼 신뢰를 중시한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 정확히 파악한 다음에 그를 쓴다는 것이다. 그런 만큼 20년 이상 곁을 지켜온 이 실장만큼 청와대 비서실장으로서 적임자는 없었을 것이다.

이 실장은 다채로운 이력만큼이나 비서실장 기용도 파격으로 여겨진다. 그는 2014년 7월 정보기관 수장인 국가정보원장에 취임했다. 국정원장 재임기간이 8개월밖에 되지 않은 그를 비서실장으로 기용한 것은 어지간한 고민이 없으면 안 되는 일이다. 정부 수립 이후 국정원장 출신이 대통령 비서실장에 오른 경우는 박 전 대통령 재임 시절 김계원 비서실장 밖에 없었다. 김계원 실장은 1969년 10월 중앙정보부장(현 국정원장)에 임명돼 1970년 12월까지 1년 2개월간 재임했다. 그는 이후 대만 대사를 거쳐 1978년 박 전 대통령의 마지막 비서실장으로 기록됐다.

이 실장 케이스와는 조금 궤를 좀 달리하지만 비서실장을 거쳐 국정원장이 된 인사도 있다. 이후락은 국가재건최고회의 공보실장을 거쳐 1963년 대통령 비서실장에 올랐고, 6년 간 재임했다. 이후 주일대사를 거쳐 1970년 중앙정보부장에 임명됐다.

물론 박 대통령이 자신과의 인연만으로 이 실장을 낙점한 것은 아니다. 여기엔 여러 요소가 복합돼 있다. 이 실장을 만나본 인사들은 그를 공통적으로 이렇게 평가한다. 신중하고, 배려 깊고, 온화하며 정무적 감각도 갖췄다는 것이다. 외교관 출신답게 ‘젠틀맨’이라는 평가도 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에게 어떤 직책을 맡겨도 기대 이상으로 임무를 해냈다는 세간의 평가다. 박근혜 정부 출범 이후 이병기 실장은 초대 주일대사를 거쳐 국정원장, 뒤이어 비서실장까지 단 한 차례도 쉬지 않았다.

먼저 주일대사 경력을 보자. 박근혜 정부 초대 주일대사에 오르기 전 한·일 양국 관계는 최악이었다. 2012년 8월 이명박 전 대통령의 독도 방문 이후 한껏 악화된 양국 관계는 좀처럼 풀리지 않는 상황이 계속 이어졌다. 아베 신조 총리를 비롯한 일본 정치지도자들의 왜곡된 역사인식을 바탕에 둔 정치적 도발이 가장 큰 문제였다. 이런 상황에서 임명된 이병기 대사는 그나마 한·일 관계가 추가로 악화되지 않도록 안정적인 관리를 해왔다는 평가를 받았다.

지난해 7월 국정원장에 임명됐을 때도 국정원은 위기였다. 국정원 대선 개입 댓글 사건의 여진이 계속 이어지는 위기상황에서 국정원 개혁론이 한창 힘을 받을 때 박 대통령은 그 해결사로 이병기 카드를 선택했다. 이 실장이 박근혜 정부의 위기 때마다 등장하는 ‘구원투수’로 불리게 된 것도 이때부터다.

이번 역시 예외는 아니다. 김기춘 실장이라는 위압감 있는 존재의 후임으로, 집권 이후 최악의 국정운영 위기 국면을 겪고 있는 박 대통령의 소방수 역할을 해줄 수 있는 인사는 이병기 실장 외에 적임자는 없었을 것이다.

어떤 이는 이 실장의 스타일에서 발탁 배경을 찾는다. 권력의 실세라기보다는 신중함과 정무감각을 갖춘 전형적 참모형인 그를 높이 평가했다는 의미다. 박 대통령은 자의든 타의든 대중에게 선친 박정희 전 대통령의 향수를 자극한다. 여권 일각에선 박 대통령이 영애(令愛)로 청와대에 있던 시절 부친 박 전 대통령의 비서실장이었던 김정렴 비서실장의 예를 든다. 김정렴 실장은 박 전 대통령의 집권 기간(18년 6개월) 중 절반인 9년여를 비서실장으로 재임한 인사다. 역대 최장수 청와대 비서실장이기도 하다. 상공부장관 출신인 그는 경제통으로서 경제를 챙겼고, 청와대 기강 확립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전형적인 참모형에 최적화됐다는 평가다. 얼마 전 여권에선 김기춘 실장의 사의 표명 후 후임 인선 작업이 길어지자 박 대통령이 김정렴 실장 같은 인사를 찾는다는 얘기가 나오기도 했다.

“대통령 비서실장 기사는 손바닥 만하게 나와야”


▎박근혜 대통령이 3월 16일 청와대에서 이병기 비서실장에게 임명장을 수여한 뒤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결국 박 대통령은 2월27일 자신의 3대(代) 비서실장으로 이 실장을 낙점했다. 그 과정은 드라마틱했다. 박 대통령은 그와 현명관 한국마사회장을 놓고 고심을 거듭했지만, 결국 현 회장에 대한 여권의 부정적 의견이 반영된 이후 이병기 카드를 선택했다.

이병기 실장은 박 대통령의 지명 소식을 접한 뒤 첫 일성부터 낮은 자세의 소통을 강조했다. 2013년 8월 비서실장 임명 직후 첫 공식 브리핑에서 “윗분의 뜻을 받들어~”라는 말로 시작했던 김기춘 실장과는 확연히 다른 행보다.

이 실장은 2월27일 “더욱 낮은 자세로 대통령과 국민의 소통의 가교가 되고, 여야를 막론한 정치권과 정부와도 더욱 활발하고 적극적으로 소통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첫 소감을 밝혔다. 특히 “대통령과 국민께서 지금 저에게 기대하시는 주요 덕목이 소통이라는 것을 저는 잘 인식하고 있다”고도 했다. 이어 “비서실장직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지대하고 그 역할이 더욱 중요해진 상황에서 저의 부족함 때문에 많은 고민의 과정을 거쳤다”며 거듭된 비서실장 제의를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음을 내비쳤다.

아직 초반이지만 그의 행보는 전임자와는 달라 보인다. 이 실장은 임명 다음날인 2월 28일 출근해 수석실 별로 업무보고를 받은 자리에서도 수석들에게 홍보와 소통을 중시하라고 주문했다고 한다. 그는 당시 한 수석실 업무보고에서 “청와대 비서실장 기사는 원래 손바닥 만하게 나와야 한다. 언론이 크게 다루는 게 비정상”이라고 했다. 이 실장은 사석에서도 이런 비슷한 취지의 얘기를 자주한다.

특히 그가 주문하는 것은 소통과 홍보다. 청와대 관계자들은 “그냥 하시는 말씀이 아니라 진정성 있게 하시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 실장에게 소통은 체화돼 있다는 것이다. 정치권에 몸담고 있을 때는 물론이고 주일대사 재임시절, 심지어 국정원장에 재직할 때에도 언론 등과의 접촉은 계속 해왔을 정도다.

김기춘 실장이 카리스마로 조직을 장악하고 압도했다면 이 실장은 상반된 케이스다. 청와대 관계자들은 이병기 실장에 대해 “온화하고 사려 깊으면서도 신중하신 분”이라고 말한다. 물론 그의 스타일에 대한 평가를 지금 내리는 것은 시기 상조다. 앞으로 업무 스타일이 어떻게 바뀔지 예단할 수 없는 상황에서 아직 그를 평가할 수는 없다는 얘기다. 하지만 지금까지 걸어온 그의 커리어, 소통방식으로 볼 때 김기춘 실장 체제와는 확연히 다른 분위기가 계속 이어질 것임은 분명해 보인다.

이 실장의 임명은 그동안 잡음이 끊이지 않았던 당청(黨靑) 관계에도 변화를 줄 전망이다. 보안주의와 상명하복식 문화에 충실했던 김 실장에 비해 이 실장은 수평적 소통을 우선한다.

여기에 현재 새누리당의 투톱인 김무성 대표와 유승민 원내대표와의 개인적 유대도 앞으로의 소통 전망을 더욱 밝게 하고 있다. 세 사람은 2004년 박 대통령 당 대표 시절부터 같이 일해 온 ‘원박(원조친박)’이다.

앞서 2002년 한나라당 이회창 대선후보 캠프에서 이 실장은 이 후보의 정치특보를 맡았다. 당시 김 대표는 이 후보의 비서실장이었고, 유 원내대표는 여의도연구소장으로 있었다. 박 대통령의 한나라당 대표 시절 김 대표는 사무총장, 유 원내대표는 비서실장, 이 실장은 여의도연구소 고문을 맡았다. 인연은 계속 이어져 2007년 대선 경선 때는 이 실장이 박근혜 캠프 선거대책 부위원장, 김 대표가 조직총괄본부장, 유 원내대표는 정책메시지단장을 각각 맡았다. 김 대표와 유 원내대표는 이런 이 실장을 사석에선 “형님”이라고 부를 정도로 막역한 사이가 됐다고 한다.

김 대표와 유 원내대표는 3월 2일 국회 당대표실에서 이 실장과 만난 자리에서 과거 인연을 언급하며 친밀감을 나타냈다. 김 대표는 “흔히들 장고 끝에 악수 둔다는 말이 있지만 이번엔 장고 끝에 홈런을 친 것 같아 마음이 참 푸근하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 비서실장은 저하고 유 원내대표하고 오랜 인연이 있다. 같이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 대통령 만들 때부터 식구로 일했고 또 박근혜 대통령 만들기 캠프 원조 멤버들로 다시 이렇게 만나게 돼서 감개무량하다”고 환영했다. 김 대표는 또 “(박 대통령) 임기가 3년 남아 있는 이 시점에서 당 대표, 원내대표, 청와대 비서실장이 박근혜 정권을 반드시 성공한 정권으로 만들 수 있도록 적극 협조할 수 있는 그런 체제가 갖춰진 것은 잘된 일”이라고도 했다.

그 전날인 3월 1일 박 대통령이 중동 4개국 순방을 위해 출국하던 서울공항에서 세 사람이 함께 환송에 나선 것도 예사롭지 않다. 과거 김 실장 시절에는 볼 수 없었던 풍경이다. 여권 내에서는 앞으로 박 대통령을 정점으로 이병기 실장과 이완구 총리, 김무성 대표, 유승민 원내대표 간 소통이 다 층적으로 이뤄질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앞으로 당청관계가 한결 소통이 원활하게 이뤄질 것이라는 기대감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현 여당 지도부로서도 내년으로 다가온 20대 총선을 앞두고 당청관계의 재정립은 환영할 만한 일이다. 특히 그동안 비주류라는 지적을 받아왔던 김 대표, 유 원내대표로서도 이병기 청와대 체제가 출범한 지금 부담은 한결 줄었기 때문이다. 새누리당이 당 중심의 당청관계를 요구하더라도 이 실장은 충돌보다는 조정을 택할 가능성이 높고, 이는 벌써부터 조금씩 현실화되고 있다.

야당의 평가도 그리 박하지 않다. 현직 국정원장의 대통령 비서실장 직행에 대한 따가운 시선을 논외로 치자면, 야당 역시 이 실장이 갖추고 있는 유연한 사고와 그에 따른 청와대의 원만한 대야관계를 기대하고 있다.

다만 이 모든 것이 이 실장의 힘으로만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대전제는 박 대통령의 통치 스타일 변화다. 박 대통령이 지금까지의 행보에서 벗어나 쌍방향 소통 행보를 본격화하느냐가 관건이라는 얘기다.

박 대통령의 스타일 변화로 이어질까?

하지만 현재까지의 행보를 보면 다행히도 집권 3년차에 들어선 박 대통령의 행보에는 약간의 변화가 느껴진다. 지난해 연말을 기점으로 소통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분위기가 감지되는 것이다. 박 대통령이 최근 국무위원이나 청와대 수석비서관들과의 회의에 앞서 티타임을 가지는 것이나 회의 때마다 “국민이 모르는 정책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며 장관, 수석들에게 정책 소통을 독려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여권 관계자들은 박 대통령의 이 실장 지명과 그 과정을 지켜보면서 조심스레 향후 박 대통령의 국정운영 방식에 변화를 점친다. 박 대통령이 장고 끝에 이병기 실장을 기용한 것이 당·정·청 소통을 강화하라는 정치권과 여론 요구에 부응했다는 것이다. 여권 관계자는 “그동안 여의도와 거리를 뒀던 박 대통령이 이 실장을 기용한 것은 앞으로 국정운영을 하는데 있어서 ‘나를 따르라’는 식보다는 협의와 조율의 정치를 중시하겠다는 메시지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어찌됐든 향후 이병기 비서실장 체제는 앞으로 김기춘 실장 체제와는 다를 것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카리스마를 유감없이 보여줬지만 보안의식 속에 폐쇄적으로 조직을 운영했던 김 실장과는 달리 소통에 무게를 두고 화합을 중시하는 이병기 실장 스타일이 조만간 본격적으로 드러날 것이라는 점 때문이다.

- 남혁상 국민일보 정치부 차장

201504호 (2015.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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