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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헌의 인물탐구 | 정치인의 기질과 운명론 ] 김부겸 새정치민주연합 대구 수성갑 지역위원장 - 풍찬노숙 역마살 인생이나, ‘큰 명분’ 휘어잡아 보무당당 

산을 넘고 바위를 뚫고 황무지를 건너 흐르는 물의 팔자… 지역감정 타파 못하면 국가 미래가 없다는 게 그의 신념 

글 조용헌 원광대 불교학 박사 / 사진 오상민 월간중앙 기자 〈oh.sangmin@joins.com〉
‘嶺中湖, 湖中嶺’의 존재가 필요하다. 피를 보지 않는 공존을 위해서 말이다. 김부겸이 바로 그런 ‘영중호’의 역할을 맡는 호걸 아닌가. 그가 만델라, 덩샤오핑이 보여준 유연한 사고와 배려의 정치를 실천할 수 있을까? 대중이 그의 정치적 장래에 주목하는 바 그 대의(大義)에, 그는 결연히 복무할 수 있을까?

▎김부겸 팔자의 특징은 ‘寅申巳 삼형(三刑)’ 사주로 족보에 있는 팔자다. 인신사(寅申巳)는 모두 역마살(驛馬殺)에 해당하며, 한마디로 팔자가 센 인물의 전형적인 사주다
선가(禪家)에서는 단도직입(單刀直入)과 직지인심(直指人心)을 선호한다. 서론과 잡설에 시달리고 지쳤기 때문이다. ‘단도직입’의 초식(招式)도 여러 가지가 있다. “너 나를 좋아하냐?”, “돈은 얼마나 줄 것이냐?”, “내 부탁 들어줄 거여, 안 들어 줄 거여?”, “한다는 거여, 안 한다는 거여?” 단도직입은 효율적이기는 하지만 부작용이 클 수 있다. 상처를 줄 여지가 많다. 그래서 에둘러가고 간접화법을 쓰는 것이다. 필자가 사람을 만났을 때 단도직입으로 쓰는 초식은 “생년월시가 어떻게 되느냐?”고 묻는 방법이다. “나 그런 거 안 믿어, 볼 필요 없어”라고 대답하는 사람은 두 가지 부류다.

하나는 기독교 신앙이다. 다른 하나는 죽을 만큼 고생을 안 해본 사람이다. 특히 후자. 자기 이성의 한계를 느껴볼 만큼 고생을 안 해본 사람들은 팔자 같은 것 우습게 안다. 우습게 알고 사는 인생도 보기에 좋다. 생각한 ‘와꾸’대로 인생이 풀렸다는 의미 아니겠는가. 그런 인생은 복받은 인생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되는 일이 하나도 없는 인생, 고생만 바가지로 하는 인생은 팔자에 관심을 갖게 되어 있다. 인생이 노력한 대로 되는 것도 아니고, 뜻대로 되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너무나 절절하게 체득했기 때문이다. 사업과 사기도 같은 ‘사’자 돌림이다. 한 끗 차이가 아니겠는가. 자기가 투자하고 노력한 만큼 보상이 돌아오면 사업이지만, 보상이 없으면 사기가 된다. 어떤 사람은 인생이 사업으로 여겨지겠지만, 어떤 사람은 인생 전체가 사기로 여겨지는 사람도 있다. 되는 일이 없고, 풀리는 일이 없는 인생은 무엇으로 위로삼아야 하는가?

정치인 김부겸(金富謙). 그는 멀리서 보기에 별로 풀리지 않는 인생이다. 왜 경상도 대구에 가서 DJ간판을 달고 다닌단 말인가? 왜 보수를 해야지 진보를 외친단 말인가? 왜 여당을 해야지 야당을 하고 다닌단 말인가? 이런 프레임은 풍찬노숙(風餐露宿)의 인생이 눈앞에 기다리고 있다는 것은 누구나 뽑아볼 수 있는 점괘다.

김부겸을 서울 프레스센터 뒤편에 있는 B급 호텔의 7층 객실에서 만났다. 아침 9시부터 시작해서 오후 3시까지 이어지는 인터뷰였다. 서울에 사무실도 없고, 집도 없는 김부겸과 필자가 만나서 이야기하기에는 편한 장소였다. 다른 사람도 옆에 없고, 침대도 있으니까 피곤하면 누웠다 앉았다 하면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객 들’끼리의 인터뷰에는 서울 도심 한복판에 위치한 그리 비싸지 않은 호텔 ‘객실’이 최적이었다.

“생년월일시가 어떻게 되느냐?”

“1956년 음력으로 12월 21일, 새벽이다.”

스마트 폰에 다운받은 만세력 앱으로 날짜를 조회해보니 ‘丙申, 辛丑, 癸巳, 甲寅’이 나온다. 어허! 팔자가 이렇게 생겼단 말인가! 어찌 이렇게 팔자 도망을 못 간단 말인가! “年月日時 旣有定인데 浮生이 空自忙(사주팔자 이미 정해져 있는데 뜬구름 같은 인생들이 공연히 스스로 바쁘다)”이라 했던가!

김부겸 팔자의 특징은 ‘寅申巳 삼형(三刑)’ 사주라는 점이다. 족보에 있는 팔자다. 한마디로 팔자가 세다. 인신사(寅申巳)는 모두 역마살(驛馬殺)에 해당한다. 역마살이 세 개나 된다. 이렇게 되면 유목민 팔자다. 농경사회에서 유목민으로 살아야 한다. 다른 사람은 텃밭에서 채소 가꾸고 농사짓고 ‘안전빵’으로 사는데, 인신사 삼형 팔자는 매일 짐을 쌌다 풀었다 하면서, 텐트를 쳤다가 다시 쌌다가 하면서 천하를 돌아다녀야 한다. 유목민의 특징은 앞날을 예측하기 힘들다는 점이다. 농사는 예측이 가능하지만, 유목민은 매일 보따리 싸가지고 돌아다니면서 새로운 상황과 직면해야만 한다.

무엇이 나타날지, 어떤 상황이 전개될지 항상 긴장해야만 한다. 긴장 안 하면 자빠지니까 말이다. 그래서 팔자가 세다는 말을 한다. 안정감이 곧 행복이라고 규정한다면, 인신사삼형 팔자는 ‘봉도사생(逢道死生)’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길에서 생사가 이뤄진다. 또 한가지 특징은 자기 신념과 주장이 강하다. 정착하면 될 것을 굳이 정착하지 않고 왜 길을 떠나느냐 말이다. 곧이 고생을 마다하지 않고 길을 떠난다. 모험심이 강한 것이다. 바꾸어 표현하면 지적 호기심이다. 그래서 샤프하고 머리가 좋다. 새로운 분야를 개척한다. 김부겸은 역마살이 세 개나 되는 삼형(三刑) 사주인 것이다.

형(刑)자가 들어간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 크다. 고생을 피할 수 없다. 팔자가 이렇게 되면 피할 수 없다. 고생을. 인신사 삼형 사주를 보니 박정희 전 대통령의 팔자가 오버랩된다. 박정희는 팔자에 ‘인신사해(寅申巳亥)’가 있다. 역마살이 네 개나 되는 셈이다. 역마살이 네 개나 되면 제왕격 사주라고 본다. 역마살의 극치인 팔자다. 제왕이 된다는 것은 엄청나게 바쁘고 유목적 기질이 강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한가하게 살려면 절대로 제왕 안 해야 한다. 제왕이 된다는 것은 자기 생활 없다는 말이다. 박정희 사주에 인신사해 역마살이 네 개나 되는 것을 보고 “당신은 초등학교 교사 하지 말고 장군을 해라”는 충고를 했을 것이다.

박정희가 문경에서 교사를 하다가 어느 날 우연히 사주를 보았는데, 그 사주쟁이가 교사 그만두라고 권유했다고 하지 않던가! 장군이 아니라 결국은 대통령이 되었으니까. 그것도 쿠데타로 되었다. 순순히 제왕이 된 것이 아니라 목숨을 걸고 쿠데타에 성공한 것 아닌가. 목숨 안 걸었으면 되었겠는가! 역마살 네 개인 인신사해 사주는 제왕격이다. 그 문경의 역술가가 당시 초등학교 선생 박정희에게 장군 되라고 한 것도 상당히 ‘디스카운트’ 해서 충고한 것이다. 역술가가 장군 되라고 권유했다고 해서 진짜로 직장 때려치우고 만주군관학교로 들어간 박정희도 결단력은 대단하다. 역마살 네 개는 결단력의 상징이다. 김부겸은 세 개다. 박정희보다 역마살이 한 개 모자란다. 산술적으로 비교해보면 김부겸은 박정희 팔자와 75% 일치한다. 사주상으로 놓고 볼 때는 박정희의 4분의 3은 되는 셈이다. 그러니까 영호남 지역감정 뚫겠다고 풍찬노숙의 삶을 살고 있다.

이후락, 이효상이 지역감정 원조


▎2012년 대선 한 달여 전 문재인 당시 민주통합당 대통령후보가 대구시당 선대위에 참석해 김부겸 공동선대위원장의 손을 들어주고 있다.
한국의 선거가 겉으로는 보수와 진보, 좌파와 우파 구도이지만, 한 꺼풀 벗기고 들어가면 영호남의 대결이 아닌가 싶다. 이 영호남 대결의 구도는 언제부터 시작된 것인가? 과연 얼마나 뿌리가 깊은 감정인가?

“생각하는 것만큼 뿌리가 깊지 않다. 내가 문익환 목사 모시고 비서를 했던 시절이 있었다. 1987년 6월항쟁 이후로 문 선생 모시고 1년간 여러 가지 이야기를 물어볼 수 있었다. 문익환은 만주 간도 출신이다. 일제 치하에서 독립운동가는 여러 지역 출신이 모여 있었다. 그때도 지역감정 있었느냐고 물어보니까, 문 선생이 답하시길 ‘없었다’였다. 물론 다소간의 친불친(親不親)은 있었겠지만, 요즘 같은 지역주의는 없었다고 들었다.”

영호남 원수(?) 감정은 언제부터 시작되었다고 보는가?

“1950년대 후반 치러진 국회의원 선거에서 전라도 출신인 조재천이 대구에서 당선된 바가 있다. 그것도 두 번이나 당선되었다. 전라도 출신이 대구에서 국회의원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가 하면 전라도 목포에서도 경상도 출신이 당선되기도 하였다. 1963년에 치러진 박정희·윤보선 대선이 있었다. 이때 전라도에서 윤보선보다 박정희 지지가 훨씬 높게 나왔다. 박정희가 35만 표 앞섰던 것이다. 당시 이슈가 빨갱이 논쟁이었다. 남로당 전력이 있었던 박정희에게 빨갱이 딱지를 붙였다. 윤보선 쪽에서 말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전라도에서만 35만 표가 더 나왔다는 것은 호남 민심이 압도적으로 박정희를 지지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윤보선은 호남 민심에 밀려서 대통령이 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왜 전라도는 경상도 출신인 박정희를 지지했단 말이냐? 이때만 해도 지역감정 없었다. 그러다가 1971년 대선에서 판도가 확 바뀌었다. 71년 대선에서 박정희·김대중이 붙었던 것이다. 이때부터 영호남 감정이 시작되었다.”

1971년 당시 대선은 정보부의 공작도 상당했다고 들었다. 이때 지역감정을 어떻게 조작했는가?

“근래에 나온 〈김형욱회고록〉에 보면 이 부분이 나온다. 당시에 이후락이 정보부장 했을 때인데, 선거에 이기기 위해서 지역감정을 조장했다. 산업화가 되면서 전라도 사람들이 서울 영등포, 부산 등지에 많이 이사 와서 살았다. 정보부에서 이런 호남 거주 지역에 삐라를 뿌렸다. ‘호남인이여, 단결하라!’ 같은 내용들이었다. 겉으로는 호남사람들 단결하라는 내용이지만, 결과적으로 이 삐라를 본 경상도 사람들이 더 큰 위기감을 가지고 똘똘 뭉치게 되었다. 이후락 못지않게 지역감정을 자극한 인물이 이효상이다. 이효상도 지역감정을 노골적으로 자극해서 당시 선거에 기여한 인물이다.”

한국 지역감정 조장사에 족적을 남긴 인물이 이후락과 이효상이라고 한다면 근래에는 어떤 인물이 있는가?

“부산 초원복국 사건의 김기춘이다. 1992년에 김영삼, 김대중, 정주영이 붙었던 대선에서 김기춘이 ‘우리가 남이가, 이번에 잘못되면 모두가 영도다리에 빠져 죽어야 한다’는 유명한 발언을 하지 않았던가. 이 부분 녹음을 정주영 쪽에서 했지만 결과적으로 영남 민심을 감정적으로 결속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최근에는 이완구 총리 청문회 때 터져 나왔다. 청문회에서 국회의원들이 추궁하니까 답변하러 나온 충청향우회장이 ‘왜 호남사람들만 그러세요’라고 내뱉었다. 청문회를 충청 대 호남의 지역구도로 전환시키는 고도의 정치적 발언이었다. 이건 완전히 계산된 발언이다. 그냥 내뱉는 말이 아니었다. 아니나 다를까 충청향우회장의 이 발언 이후로 이완구 지지 여론이 올라갔다. 효과를 톡톡히 본 셈이다. 지지율을 끌어 올리는 데는 지역감정 자극하는 발언이 아주 효과적이다. 선거는 우선 이기고 보자다. 그러다 보니 지역감정 자극하는 발언이 가장 값싸고 손쉽게 이기는 방법인 것이다. 당장 선거에는 이기겠지만 국가 장래에는 비전이 사라진다. 왜 비전이 사라지느냐? 어떤 정책대안이나 국가 현안을 해결해서 지지율을 올리는 게 아니라, 원초적인 패거리 감정에만 호소하니까 합의가 안 나온다. 서로 합의를 봐야 발전하는데, 양쪽이 계속 치고 받으면서 굴러가기만 한다. 합리적인 합의나 양보, 대안이 나오기 힘든 구조가 된다. 국가가 이런 식으로 흘러가게 되면 망조가 들 수 있다.”

배제의 구도로 가면 국가는 망한다


▎조용헌이 김부겸에게 물었다. “왜 경상도 대구에 가서 DJ간판을 달고 다닌단 말인가? 왜 보수를 해야지 진보를 외친단 말인가? 왜 여당을 해야지 야당을 하고 다닌단 말인가?”
사주팔자를 연구한 필자는 ‘미신종사업’에 많은 정력을 소모한 탓에 정치의 복잡한 구조는 아무래도 잘 모른다. 사회학적 상상력이 부족하다고 스스로 생각한다. 그렇지만 지역감정을 계속 자극하면 대·소 선거는 영남출신 후보가 대단히 유리할 것이라는 생각 정도는 할 수 있다. 인구 수가 훨씬 많고, 지금처럼 한국의 주류사회가 영남인맥으로만 포진이 된 상태라면 영구적인 영남정권 창출이 가능하다고 여겨진다. 지금처럼 영남이 인구 수도 많고, 산업시설이 집중되어 있고, 돈도 있고, 돈 있으니까 2∼3세들도 외국 유학을 많이 보낼 수 있다. 영남이 정계, 재계, 학계, 관계, 언론계, 문화계를 비롯한 주류사회의 핵심 자리를 장악하고 있는 상태에서 ‘이번 선거에서 지면 영도 다리에서 빠져 죽어야 한다’고 되뇌면 선거는 이기게 되어 있다. 정책? 공약? 대안? 통합? 이런 말은 모두 수사(修辭)에 불과하다. 선거는 최대한 지역대결 구도로 밀고 가는 게 지혜로운 리얼리스트가 선택할 전략이다. 지난정권 때까지만 하더라도 농림부장관이나, 총리 자리는 호남 출신에게도 가끔 배당을 했지만, 이번 정권에 들어서는 완전 배제다. 호남은 농림부장관도 하기 힘들게 되었다. 철저한 배제 원칙을 세운 것 같다. 배제가 선거에 유리하니까 배제하는 것이다. 헤겔의 말대로 현실적인 것은 이성적인 것 아니겠는가?


▎경북고 재학 시절의 김부겸. 당시 대구는 해방 전후의 진보적 사상의 잔영이 남아 있었고, 경북고의 학풍 역시 정권 비판 등에 대해 관대한 분위기가 형성됐다.
이렇게 배제의 구도로 가면 국가가 흥하는가? 북한에 공산정권이 들어서게 된 것도 돌이켜보면 조선조 500년 동안의 차별이 작용한 결과다. 조선조 500년 동안 이남에서 다 해먹었다. 평양감사는 이북 출신이 못했다. 이남 출신이 가서 했다. 군수 이상 되는 자리는 대부분 이남 출신이 했다. 이북 출신은 천대를 받았다. 홍경래 난도 그래서 났다. 서북차별이 컸다. 이 차별을 달래준 것이 기독교다. 그래서 서북의 중심인 평양이 조선의 예루살렘이 된 것 아니겠는가? ‘주님 앞에 양반 상놈 없다’는 게 기독교의 가르침이었으니, 내가 그때 평양에 살았더라면 당연히 기독교 믿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김일성이 들어와서 “내가 논밭을 주겠다”고 했으니 공산당주의로 몰려간 것 아니겠는가. 이남에도 300년 동안 영남 차별이 있었다. 1623년 인조반정 이후로 서인(노론)이 정권을 장기집권을 하면서 영남 인재를 차별했다. 당상관 이상은 조령을 넘어 한양으로 가기 힘들었다. 노론 정권에서 영남을 배제했던 것이다. 임진왜란 때 서애 류성룡 이후로 영남에서 영의정 나온 사례가 거의 없다. 영남이 300년 동안 밥 굶었다고 봐야 한다. 안동 사람들은 헛제사밥과 간고등어 먹으면서 그 차별을 견디었다. 가해자인 노론에서는 이 피눈물을 모른다.

그러나 피해를 본 영남 남인 측에서는 집안집안마다 노론 권력으로부터 당한 그 섭섭함과 억울함을 오늘날에도 후손에게 전해주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박정희의 5·16은 1623년 인조반정 이후 처음으로 영남 남인이 정권을 잡은 셈이다. 3백 몇십 년을 굶다가 처음으로 밥상을 받았다고나 할까. 역사는 인과의 반복이다. 오늘날 서쪽이 받는 차별은 조선조 독식 업보일지도 모른다. 5·16 이후 김대중 한 명만 빼고 모두 영남 사람이 대통령이 되었다. 이것이 노론 독재에 대한 인과(因果)가 아니라면 무엇으로 설명할 것인가.

진보적 대구 전통의 적자

조선조 내내 이북에 대한 차별이 공산주의를 불러와 분단상황을 초래하였고, 300년 넘게 영남 남인에 대한 차별이 오늘날 호남 차별을 불러왔는지도 모른다. 만약 급작스럽게 한반도가 통일이 된다면 이북과 호남은 똑같은 소외감정을 지니게 될 것이다. 통일 상황에서 투표로 선거를 하게 된다면 어떤 현상이 나타날까? 아마도 이북과 호남이 연대하는 상황이 올지도 모른다. 약자끼리 뭉치게 되어 있다. 물론 역사의 가정이지만 말이다. 이북과 호남이 연대해서 영남과 맞붙은 상황이 과연 국가 발전에 도움이 될까? 아니라고 본다. 그건 또 다른 업보의 시작이다.

세계사를 보면 지역감정은 전쟁으로 가는 경우가 많았다. 6·25도 강대국 타령만 할 게 아니라 우리 내부의 지역감정도 어느 정도 작용하였다고 필자는 본다. 전쟁은 너무 피를 많이 본다. 피를 보지 않고 해결하자는 게 문명 아닌가. 협상에 있어서는 역지사지가 너무 소중하다. 김부겸이 그런 인물이다. 필자가 30대 중반 주역 공부를 할 때, 당시 주역의 대가 선생에게 주역의 핵심이 뭐냐고 물었을 때, ‘음중양, 양중음’이라는 답변이 지금도 뇌리에 선하다. ‘嶺中湖, 湖中嶺’의 존재가 필요하다. 피를 보지 않는 공존을 위해서 말이다. 김부겸이 바로 그런 ‘양중음’이요, ‘영중호’의 역할 아닌가?

당신은 대구출신이다. 대구에서 초·중·고(경북고)를 졸업했다. 조선조 때 대구는 야당이었던 남인의 근거지였다. 해방 이후에도 좌파가 주동이 된 대구폭동이 발생해서 많은 사상자도 났다. 그런데 오늘날 대구는 보수의 본거지가 되었다. 그 과정을 설명해 달라.

“나는 경북 상주에서 태어났다. 영남 유림의 양반 집안은 아니고 평민 집안이다. 아버지는 직업군인이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대구로 전학 와서 쭉 대구에서 학교를 다녔다. 대학은 서울대를 다녔지만 말이다. 1972년 경북고에 입학을 해보니까 학교 분위기가 남달랐다. 경북의 빈부귀천 집안 학생들이 모두 섞여 있었다. 10월 유신에 대해서도 반대하는 학생들도 있었다. 〈세대〉 잡지를 읽는 애들도 있었고, 사회의식이 남다른 애들이 상당수 있었다. 1년 선배 가운데는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할 때 ‘왜 애국심을 강요하느냐’고 반발하는 이도 있었다. 흥미로웠던 장면은 이런 반골(?) 학생들을 당시 선생들이 심하게 꾸짖지 않았다는 점이다. 지금 생각해 보니 ‘이놈들은 이미 머리가 커서 꾸짖는다고 될 일도 아니다’고 판단했던 것같다. 그냥 두고 보자는 분위기가 있었다. 선생들의 수준이 상당히 높았다.

고3때인 1974년에 민청학련 사건이 발생했다. 그때 우리도 술렁거렸다. 경북지역에서 공부 좀 하는 애들이 모인 경북고의 분위기가 이처럼 자유로웠고, 진보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해방 직후 대구 인구가 대략 50만 명이었다. 당시로는 대도시였다. 당연히 인텔리도 많았다. 일제 때 고등교육을 받은 식자층은 좌파적인 분위기를 지니고 있었고, 대구 역시 마찬가지였다고 본다. 해방 이후 얼마 있다가 대구폭동이 났다. 박정희 대통령의 형인 박상희가 지도급이었다. 박상희는 신간회의 지도자였는데, 민족주의자에 가까운 좌파였다고 본다. 신망을 얻었던 지도자였다고 한다. 양쪽을 중재하려다가 뒤에서 경찰의 총을 맞아 사망했다고 들었다. 폭동 현장에서 약 100명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이와 관련되었다고 지목된 인사들이 대략 4천∼5천 명 정도 보도연맹에 가입되어 있다가 6.25 때 희생당했다. 4천∼5천 명은 적은 숫자가 아니다. 더군다나 이 5천 명은 하층민이 아니고 상당한 교육을 받은 인텔리였다고 가정할 때 그 파장이 큰 것이었다. 관련된 가족들이 얼마나 많은 상처를 안고 살았겠는가? 동시에 권력의 무서움도 실감했을 것이다. 저항했다가는 이렇게 죽는구나! 어찌되었든 대구는 야당 정서가 강한 도시였다. 저항적 인물들은 이쪽에서 많이 나왔다. 4·19 선언문을 작성한 이수정은 대구 출신이고, 서울대 민비연의 김중태도 대구다. 6·3 학생 데모를 주동한 현승일(후일 국민대 총장)도 대구, 역시 6·3의 리더였던 김도현도 이 근방이다.

5·16 이후에도 박정희와 대구의 저항적 엘리트 사이에는 끊임없는 충돌이 있었다고 본다. 대구는 그렇게 호락호락한 도시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1970년대 초반 유신이 시작되면서 박정희가 대구의 저항 엘리트를 흡수한 것으로 보인다. 적극적으로 기용한 것이다. 앞에서 말한 대로 이후락·이효상이 지역감정에 앞장선 효과도 컸다. 이렇게 되면서 대구가 보수여당 도시로 변모해 갔다. 대구에서 야당 간판으로 국회의원이 된 마지막 인물이 1985년 12대 선거에서 신민당으로 당선된 유성환 의원이다. 무소속이 아니고 야당 간판으로 당선된 마지막이 유성환이다. 그 이후에는 없다. 그렇지만 야당 세력이 약간은 남아 있었다. 내가 보기에는 YS와 3당 합당을 하면서 그나마 남아 있던 30%의 야당세력이 여당으로 융합되었다.

제정구, 노무현, 김대중이 정치인생의 스승


▎1. 지난해 6·4 지방선거에서 김부겸 새정치민주연합 대구시장 후보가 딸 윤세인(27·본명 김지수)씨와 함께 대구시 원고개시장을 찾아 상인과 시민을 상대로 지지를 호소하고 있다. / 2. 작년 7·30 재·보궐선거 순천-곡성에서 당선된 새누리당 이정현 의원(오른쪽)과 김부겸 전 의원은 영호남 지역 벽 허물기에 앞장선 정치인으로 호형호제하는 사이다. 2012년 4·11 총선 뒤 둘이 만나 어깨동무를 하고 있다.
허주 김윤환도 참 흥미로운 인물이다. 허주는 선산 사람이다. 양조장을 했던 집의 아들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허주의 아버지 김동석은 아나키스트였다. 아나키스트 아무나 하는 거 아니다. 일제 때 아나키스트는 아주 수준 높은 인텔리라고 봐야 한다. 허주도 아버지의 영향을 받지 않았겠는가? 허주가 평소 존경했던 인물이 주은래(周恩來)였다. 한중 수교 이전에 벌써 허주는 주은래를 존경할 만큼 사유의 폭이 넓었다. 허주가 노태우 정권 시절에 절친한 동창들과 토론했던 적이 있었다. 군 출신 친구들이었다. 친구들 사이에서 노태우 다음 대권은 누구냐? 정호용이 잡아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이야기가 나왔다고 한다. 그때 허주가 ‘아니다. 이제는 선거를 해야 하는 민주주의 시대다. 인구의 12%밖에 안 되는 TK가 어떻게 계속 대권을 잡겠느냐. 안 된다’고 설파를 해서 좌중을 설득시켰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허주도 TK본류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이지만, 이런 정도의 균형감각과 스케일은 있었다. 그 이면에는 아나키스트로서 폭넓은 사상적 섭렵을 했던 아버지의 영향도 작용하지 않았겠나?”

김부겸은 서울대 사회계열 76학번이다. 당시 계열별 모집이었다. 2학년 때 정치학과로 갔다. 같이 학교를 다녔던 동창들이 있다. 이명박 정권의 임태희·정두언, 홍보수석을 했던 〈중앙일보〉 출신의 김두우, 〈동아일보〉 출신의 이동관이 그들이다. 고시 3관왕 고승덕도 동기고, 김용덕 대법관, 〈조선일보〉 홍준호 발행인도 동기다. 대학 졸업 후에 재야운동가의 길로 접어들었다. 이길 또한 가시밭길 아닌가. 그러다가 1991년에 제도권 정당에 들어갔다. 꼬마 민주당이었다. 당수가 이기택이었고, 노무현·김정길·이철·홍사덕·박찬종·장기욱·장석화가 멤버였다. 이 꼬마 민주당이 DJ와 합쳐서 민주당이 되었다. 대변인이 노무현이었고, 부대변인이 박지원이었다. 그때 김부겸도 부대변인을 했다. 현재 인천남구청장을 하는 박우섭도 같이 부대변인을 했다.

김부겸의 정치인생에서 영향을 미친 세 명의 인물이 있다. 제정구·노무현·김대중이다. 제정구는 ‘상생정치’를 머릿속에 박아주었다. 1980년에 복학생인 제정구를 처음 만났는데 김부겸에게 강렬한 인상을 주었다고 한다. 나이는 제정구가 12년 연상인 띠동갑이었다. 다부진 체격에 호랑이 같은 기세가 있었다. 눈빛도 형형했다. 제정구가 고생을 많이 한 탓인지 폐암에 걸렸다. 어느 날 병문안을 갔더니 “너는 왜 정치를 하느냐?”고 물었다. 죽기 전에 유언으로 김부겸에게 “상생의 정치를 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자기 살자고 상대방을 밟아야 하는 것이 선거이고 정치이기도 하지만, 마음속 한구석에는 그래도 상대를 배려할 수 있으면 배려하는 것이 상생의 정치다. 현실에서 이걸 실천하기는 물론 어렵다. 그래도 밑바닥에는 여건이 허락하는 대로 상대방도 도망갈 구멍을 주는 것이 상생의 정치라고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철저하게 짓밟지는 말자. 양 진영이 서로 끝없이 돌팔매질만 하면 굴러가기는 하겠지만 건설적인 합의나 방향이 잡힐 수 없다. 망한다. 결국 서민만 손해 보게 되어 있다.

노무현도 김부겸에게 크게 영향을 미쳤다. 어떤 영향? 근성을 가지라고 주문하곤 했다. “왜 너는 용기가 없냐? 서울대도 나오고 운동권도 했다면서 왜 이렇게 용기가 없냐”고 힐책하곤 했다. 김부겸은 이 말에서 크게 깨닫는 바가 있었다. 좀 더 용기를 내서 도전해야겠구나.

김대중 밑에서는 부대변인을 했다. 경상도 말씨 쓰는 사람은 김부겸을 포함해서 당시 3명 있었다고 한다. 김대중은 사람에 대한 집중력이 대단했다. 한번은 김부겸에게 이런 말도했다. “어이, 이 사람아, 내 머릿속에는 4천∼5천 명 정도 각계 대표급 인사가 입력되어 있네.” 그러니까 어떤 사람을 만날 때 그 사람의 발언이나 행적, 특징들을 꼼꼼하게 조사하여 입력시켜놓는 것이다. 컴퓨터가 없던 시절이라 메모와 기억력에 의존하던 시절이다. 김대중은 당시 부대변인을 하던 김부겸의 논평이 신문에 실리면 반드시 피드백을 해줬다. “어이 그거 관점이 좋아, 앞으로도 계속 노력을 해봐” 하면서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김대중은 치밀하고 꼼꼼한 성격이었다. 초선, 재선 시절에는 술집에 가서도 자료조사를 했다고 한다. 국회재경위원을 할 때 재무부 관료들과 식사를 하러 가면 술을 한잔 하다가도 국장이나 차관을 옆으로 불러 경제와 관한 여러 가지 수치나 통계들을 끊임없이 물어보았다고 한다. 다른 의원들은 술 먹느라고 정신없는데 김대중은 “그 지표가 어떻게 된 거여? 그 개념이 어떤 맥락이여?” 하면서 끊임없이 메모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김부겸은 정치인이 지녀야 할 기본적인 태도를 김대중에게 배운 셈이다.

김부겸, 호랑이 목에 방울 달 수 있을까


▎김부겸 전 의원은 “선거에서 가장 값싸고 손쉽게 이기는 방법이 지역감정 조장”이라면서 “가장 시급하게 타파해야 하는 국가적 악폐 중의 악폐”라고 말했다.
김부겸이 영호남의 지역감정 타파에 자신의 정치노선을 걸게 된 계기는 1996년의 음식점 ‘하로동선(夏爐冬扇)’이다. ‘여름의 난로, 겨울의 부채’라는 뜻이다. 쓸모없는 물건들이다. 그렇지만 영남의 호남이 되고, 호남의 영남이 되자는 함축이 들어 있다. 지역주의를 넘어서자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멤버가 김원기·노무현·제정구·박석무·이철·김정길·유인태·원혜영이었다. 음식점 출자에 각기 3천만원씩을 내놓았다. 돈이 없었던 김부겸은 영업부장으로 참여하였고, 여기에서 김부겸의 지역주의 타파 철학이 좀 더 다듬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현재의 행보는 이 연장선상이라고 하겠다. 당시로는 영업부장이었지만 시간이 흐르다 보니까, ‘하로동선’의 정신적 계승자는 김부겸이 되었다. 의발(衣鉢)을 전수받았다고나 할까.

우리 정치는 타협을 못한다. 한국 사람은 타협을 못하는 민족인가, 갈등하던 두 세력이 타협을 하는 방식은 어떤 형태가 있을까. 김부겸은 등소평과 만델라를 예로 들었다. 중국도 모택동(毛澤東)이 정권 잡아서 많이 죽었다. 대약진운동 때 약 2천만 명, 문화혁명 때 3천만 명이 죽었다. 등소평도 탄압 받다가 겨우 살아남아 정권을 잡았다. 그러나 등소평은 보복을 하지 않았다. 모택동 때 죽은 사람들은 왜 원한이 없었겠는가? 등소평은 모택동에 대해서 ‘공칠과삼(功七過三)’으로 정리했다. 그리고는 개혁개방으로 이끌었다. 만약 등소평이 보복을 했더라면 중국도 복잡해졌을 것이다. 27년간 감옥살이했던 남아공의 만델라도 정권을 잡고 나서 12가지 방안을 놓고 격론을 벌였다고 한다. 강경 보복론에서부터 유화론까지. 12가지 안을 6개로 줄였고, 다시 3개로 줄인 다음에 이 세 가지 안을 국민투표에 붙였다. 만델라 부인이 강경파였다. 27년 옥바라지를 한 부인은 백인의 재산 몰수와 국외추방을 주장했다. 대타협과 관용을 염두에 둔 만델라와 의견이 갈렸다. 결국 만델라는 부인과 이혼했다. 이렇게 해서 남아공의 모델이 성립된 것이다.

김부겸은 지역감정 타파라는 매우 어려운 문제를 잡고 있다. 호랑이 목에 방울을 다는 작업이다. 여차하면 호랑이에게 물려 죽을 가능성이 높다. 이빨이 깊게 들어갈 수 있다. 그러나 한국이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미래가 없다는 게 김부겸의 신념이다. 물려 죽을 각오를 하고 있다. 영호남 상생을 해야만 그 에너지를 타고 남북 상생이 가능할 것이다. 30만 인구밖에 안되던 여진족의 누루하치는 문수(文殊·지혜)를 내세워 뿔뿔이 찢어져 있던 여진족을 통일했다.

‘만주(滿洲)’라는 이름은 여진족 발음으로 불교의 ‘문수’라는 의미라고 한다. 문수는 지혜를 상징한다. 지혜는 너와 나를 자꾸 나누기보다 서로 공통점을 찾아가는 것이다. 사물의 서로 다름에서 서로 같음을 발견하는 것이 지혜 아닌가. 공통점이 무엇인가를 찾는 것이 지혜로운 행동이다. 여진족은 지혜롭게 통합하여 30만 인구로 1억이 넘는 명나라를 정복했다. 천지도수(天地度數)는 한민족에게 기회를 주고 있다. 하늘이 준 이 기회를 받아먹느냐 못 받아먹느냐는 인간에게도 책임이 있다. 김부겸의 정치인생은 천지도수를 타고 있다. 민족사의 제일 큰 명분을 잡고 있는 것이다.

조용헌 - 원광대 불교학 박사. 지난 20여 년간 한·중·일 3국의 1천여 사찰과 고택, 영지(靈地)를 답사하는 과정에서 재야의 수많은 기인, 달사를 만나 교유했다. 이들과의 만남을 통해 천문·지리·인사 등 강호동양학의 3대 과목을 한국 고유의 문화 콘텐트로 자리매김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저서로는 〈조용헌의 사찰 기행〉 〈5백년 내력의 명문가 이야기〉 〈조용헌의 사주명리학 이야기〉 〈방외지사〉 등이 있다.

201504호 (2015.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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