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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격인터뷰] ‘전 안철수 멘토’ 최장집이 본 한국 정치 - “기울어진 운동장 탓 그만하고 정책으로 승부해야” 

 

글 전형우 월간중앙 인턴기자 사진 이원근 객원기자
■ 새누리당은 한국 정치를 지배하지만 도덕적 지도력은 미흡 ■ 체제붕괴가 흡수통일로 간다는 논리와 발상은 비현실적, 효과도 없어 ■ 중요한 결정이나 인사문제를 정당 결정이 아닌 여론조사로 판단하는 건 잘못 ■ 다음 대선, 야당이 합리적 분배정책 제시한다면 가능성 충분 ■ 안철수에겐 기대와 현실의 차이 실감… 여론과 언론 반응에 민감해 ■ 청년문제의 해법 또한 성장 중심의 경제정책을 변화시키는 데서 찾아야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는 “인문학의 위기보다 더 큰 문제가 정치학의 위기”라고 했다. 그는 정치학 이론이 학교 안에 갇혀 현실과 동떨어진 상황에 대해 우려를 나타냈다.
최장집(73)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명예교수가 입을 열었다. 그는 2013년 한때 안철수 당시 무소속 의원의 ‘멘토’ 역할을 했다. 안 의원이 ‘십고초려’ 끝에 최 명예교수를 ‘정책네트워크 내일’의 이사장으로 모셨고, 그는 안 의원에게서 대안의 정치를 모색했다. 그 실험은 얼마 가지 못했다. 고작 80일 만에 그가 안 의원의 곁을 떠났기 때문이다.

많은 이가 깜짝 놀랐다. 세기의 만남까지는 아니더라도 당대의 가장 드라마틱한 조합이 너무 허무하게 갈라선 탓이다. 그 원인을 두고 말들이 많았다. 누구는 노동문제를 중심에 놓고 사고하는 최 명예교수의 정당론과 보편과 합리를 추구하는 안 의원의 정책 노선이 불화했다는 해석을 내놓았다. 다른 이는 노선과 이념보다는 감정과 예법이 충돌했다는 관측도 나왔다.

이에 대해 최 명예교수는 어느 자리에선가 “정책을 연구하고 싶었는데 정치적 역할이 주어졌다”면서 “그게 좀 부담스러웠다”라고 갈라선 사유의 하나를 밝혔다.

안 의원과 결별함으로써 그의 제도 정치권에서의 실험은 일단 유보된 상태라 하겠다. 하지만 비(非)제도권에서의 그의 행보는 계속된다. 그는 정치 지망생들에게 정치 교육을 제공하는 ‘정치발전소’와 네이버 ‘열린연단’에서는 계속 강의한다. 그의 정치한 논리와 시대적 통찰력은 방향 감각을 상실한 한국 정치에 하나의 이정표를 제공하기도 한다.

3월 14일 서울 마포구 합정동 소재 정치발전소 사무실에서 최 명예교수를 만나 한국 정치의 과제와 미래에 대한 얘기를 들어봤다.

정치발전소의 강연에 참여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요즘 들어 한국 사회에 ‘인문학의 위기’라는 인식이 확산됐다. 인문학의 위기보다 더 큰 문제는 ‘정치학의 위기’다. 정치인들은 정치학적인 지식에는 별 관심이 없는 것 같다. 정치학은 학교 안에 갇혀 현실문제를 다루지 않고 사회와 동떨어진 ‘이론을 위한 이론’이 된 느낌이다. 한국 정치가 제대로 발전하지 못하는 것은 정치학과 현실 정치 사이의 괴리 때문이기도 하다. 정치발전소에서는 이론과 현실을 결합시키려 한다. 이러한 취지에 공감해서 참여하게 됐다. 정치학을 공부한 사람으로서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것이 정치 강연이므로, 이론이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 강단에 서는 것이다.”

김대중 정부 때 대통령자문 정책기획위원장으로 활동했다. 당시 정치학을 현실 정치에 어느 정도 투영시켰나?

“당시 자문역을 맡은 지식인들에게 실질적으로는 큰 비중이 주어지지는 않았다. 결정된 것을 사후에 이론화하거나 설명하는 역할이었지 정책 결정에 깊숙이 참여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자문기구에 그 이상의 비중을 두지는 않았다. 아마도 ‘내가 정치는 잘했기 때문에 대통령이 될 수 있었다’고 생각하셨던 것 같다. 하지만 조금 더 넓게 보면 정치학적 지식이 현실 정치에 필요하다.”

“북한 체제붕괴가 흡수통일로 이어진다는 발상은 잘못”


▎최장집 교수는 지난 2013년 안철수 당시 무소속 의원의 ‘멘토’ 역할을 했지만 80일 만에 그의 곁을 떠났다.
마크 리퍼트 주한 미 대사 피습사건 이후 한미동맹과 남북문제가 다시 이슈로 떠올랐다. 최 명예교수가 생각하는 북한문제의 해법은 무엇인가?

“한국에는 북한을 바라보는 두 가지 관점이 있다. 하나는 우리사회의 지배적인 대북관인 강경책이고, 다른 한쪽은 통일 중심적인 민족주의 그룹이다. 둘의 공통점은 통일이 지상 과제라는 생각이다. 방법은 정반대이지만 이상과 목표는 같다. 내가 생각하는 북한문제의 핵심은 ‘긴장완화’다. 냉전이 세계적으로는 끝났는데 한반도에는 여전히 냉전적 대결구조와 발상이 남아 있고 오히려 강화되고 있다. 냉전시기에 ‘데탕트’라는 말이 나왔는데 현재 남북한의 대치 상황에서 데탕트가 필요하다. 통일을 이야기하는 것은 시기상조다. 통일을 이야기하면 할수록 긴장이 고조되는 상황을 야기한다. 긴장이 줄어들었을 때 비로소 상호협력과 통일을 말할 수 있다. 또한 당장 북한의 체제붕괴를 말해서는 안 된다. 체제붕괴가 흡수 통일로 이어진다는 논리와 발상은 현실적이지도 않을 뿐더러 효과도 없다. 최근 발간된 이명박 전 대통령의 회고록에도 이런 발상이 담겨 있더라. 북한을 현실로 인정하고 대응책을 마련해야 한다.”

새누리당은 다양한 이슈를 선점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새누리당이 일본 자민당, 독일 기민당처럼 강고한 보수정당이 돼간다고 볼 수 있을까?

“최근 들어 한국 민주주의가 퇴행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가장 큰 이유는 야당이 약하기 때문이다. 여러 면에서 여당이 야당보다 우월한 조건을 갖췄다. 정책 면에서도 여당이 정당으로서 일관성이 있다. 야당은 정당의 조직기반과 정책의 대안적인 비전, 당의 인적자원 등 여러 측면에서 뒤처진다. 하지만 새누리당이 우월하다 해도 아직 ‘헤게모니’를 갖지는 못했다. 헤게모니란 도덕적 리더십을 갖추는 것을 의미한다. 도덕적 리더십이란 사회의 핵심적 사안에 있어서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내용을 내놓고, 정책과 비전을 통해 더 좋은 사회로 발전시키는 능력이다. 일본의 자민당은 헤게모니를 가진 정당이다. 자민당이 장기 집권할 수 있는 이유는 야당이 약한 측면도 있지만 도덕적 지도력을 가졌기 때문이다. 자민당은 사회를 통합하고 안정적으로 유지한다. 따라서 일본 국민 다수는 어느 정도는 자민당을 신뢰한다. 새누리당 또한 점점 지배적인 정당의 모습을 띠지만 아직 도덕적 지도력을 갖춘 헤게모니 정당은 아니다. 한국이 직면한 두 가지 문제인 대북정책과 경제정책에 있어서 새누리당이 잘하고 있다고 평가할 수는 없다. 야당에서 정부와 여당을 비판하고 공격할 허점이 매우 많다.”

다음 대선을 어떻게 전망하나?

“일부 전문가는 ‘새정치민주연합이 선거에서 계속 패배하는 등 지리멸렬한 데 반해 새누리당은 살아 움직인다’며 다음 대선에서도 여당의 승리를 점친다. 그럼에도 나는 정권 교체 가능성을 보고 있다. 앞서 말했듯이 새누리당은 정당다운 정당임에도 불구하고 도덕적 리더십이 없다. 지금은 경제성장만 이야기할 게 아니라 분배·복지·경제민주화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시점이다. 이런 면에서 새누리당은 잘하는 게 아니다. 또한 대북문제에서도 이성적으로 판단하지 않고 이데올로기적이고 구태의연한 방식으로 일관해 남북관계가 제자리걸음을 한다. 유권자들은 이런 상황을 수긍하지 않을 것이다. 다음 대선에서 야당이 합리적인 분배정책의 대안을 제시한다면 기회를 잡을 것으로 본다.”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가 최근 “여론조사를 통해 이완구 총리 부결을 판단하자”고 발언한 데 이어 박원순 서울시장은 시민이 참여하는 정치를 주장했다.

“대체로 여론은 특정 사안에 대해 즉흥적으로 반응한다. 여기에서 일관된 뭔가를 끌어내기 어렵다. ‘시민’을 거론할 때 항상 진보세력은 자신들이 다수라고 생각한다. ‘진보세력을 지지하는 것이 다수다. 다수가 정의의 편’이라는 생각인데 이는 현실과 다르다. 여론은 이슈에 대해 그때그때 표출되는 의견에 불과하다. 따라서 안정적이고 장기적인 관점에서 비전을 제시하는, 조직화된 정당이 필요한 것이다. 중요한 결정이나 인사문제를 정당의 결정이 아니라 여론조사로 판단하는 것은 정말 말이 안 된다.”

문재인 대표는 2월 13일 “국민 여론조사를 통해 이완구 국무총리 후보자 인준 여부를 묻자”고 제안했다. 문 대표는 이날 국회에서 열린 당 최고위원회의에서 “만약 새누리당이 우리의 주장(자진 사퇴)을 정치공세라고 여긴다면 공신력 있는 여론조사 기관에 의뢰해 여야 공동으로 여론조사를 할 것을 제안한다”며 “우리는 그 결과에 승복할 자세가 돼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문 대표의 이 같은 제안 직후 “야당 대표로서 무책임한 발언”이라는 비판이 거세게 일었다.

“노조는 정치보다 노동문제에만 전념해야”


▎최장집 교수는 자신의 적극적인 정치발전소 활동에 대해 젊은 세대들의 변화를 기대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보수도 합리적으로 변하고 진보도 실천력을 가져야 한다”고 했다.
안철수 의원의 새정치에 대해서는 어떻게 봤나?

“안철수 개인에 대한 외부의 요구와 실제 모습이 달랐다. ‘안철수 현상’은 새로운 인물을 불러들여 막혀 있는 기성 정치를 새롭게 바꿔달라는 요구에서 나타난 것이었다. 외부에서는 기성 정치가 하지 못하는 것을 해달라는 기대가 상당히 컸다. 하지만 실제로 안 의원을 보면 그런 것은 없고 언론과 여론에 반응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러다 보니 본인의 정체성이나 비전은 별로 의미가 없어져버렸다. 말하자면 박원순의 시민참여나 문재인의 여론조사 실시 주장과 하나도 다를 게 없는 거다. 그런 점에서 기대와 현실의 차이를 실감했다. 안 의원은 정책에 대해 논의할 때 언론에 어떻게 대응하느냐가 핵심이었고, 정책의 본질은 두 번째 문제였다. 옳은 방향으로 가려면 순서가 뒤바뀌어야 한다.”

이전의 제3정당, 진보정당 등 새로운 정치실험은 왜 대체로 실패 했다고 보나?

“민주주의를 민주화운동의 방식으로 이해했기 때문이다. 진보는 정치를 이해할 때 현실에 대한 반대, ‘안티테제(Antithese)’로 접근한다. ‘현실은 나쁜 것이고 우리가 하려는 것은 이상적인 좋은 정치’라는 대립구도다. 이런 이분법은 민주화운동을 할 때는 필수적이다. 민주화운동은 권위주의 독재를 타파하고 새로운 사회를 이상적으로 추구하는 것이니까. 하지만 민주화 이후에는 운동과 다른 논리로 정치가 이뤄져야 한다. 혁명과 민주주의는 다르다. 혁명은 현실을 뒤엎고 새로운 사회를 만드는 것인데 민주주의는 현실을 인정하는 데서 출발한다.”

최 명예교수는 이 대목에서 야권에 쓴소리를 아끼지 않았다. 그는 야당이 하는 정치가 학생운동의 방식을 탈피해야 한다는 입장을 강조했다. 야당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내세워 시민들의 표를 얻어내는 방법론을 고민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민주주의는 선거로 의사가 결정되므로 선거를 통해 표를 얻어야 한다”고 했다. 유권자들은 정당의 성향과 능력을 판단한 뒤 투표한다. 그런데 지금의 진보정당은 너무 추상적이거나 급진적이어서 표를 주기 어렵다는 게 그의 정치 진단이다. 야당이든 여당이든 사람들이 표를 줄 수 있는 문제를 다뤄야 한다는 것이다. “야당과 진보정당은 이 점에서 완전히 실패했다”고 그는 단정지었다.

기존의 노동운동과 진보진영이 변할 수 있을까?

“노동운동과 민주화를 경험한 세대들이 바뀔 가능성은 적다고 생각한다. 다만 내가 정치발전소 등에서 강연하는 이유는 젊은 세대들의 변화를 기대하기 때문이다. 한국의 노동운동은 상황이 심각하다. 소련의 몰락 이후 사회주의는 실패했다. 이런 상황에서 노동자들이 이념만으로 투쟁하는 것은 대안이 아니다. 현실 사회에서 노동자들의 권익을 얼마나 개선하느냐가 중요해졌다. 강경투쟁을 통해 얻은 것이 있다면 의미가 있겠지만, 한국의 노동운동은 민주화 이후 지금까지 30년 동안 얻은 것은 별로 없고 망하는 길을 걸어왔다.”

액션 플랜을 제시한다면?

“이제 얼마나 진보적이냐에 신경 쓰지 말고 민주적인 노사관계를 만드는 데 집중해야 한다. 재벌이나 대기업 등 자본주의 현실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해야 상대도 반응한다. 중산층을 포함한 여론의 지원을 받는 것도 필요하다. 항상 타협 없는 강경투쟁만 하면 사람들이 동의하지 않는다. 지금은 노동조합이 아니라 ‘투쟁운동본부’다. 또한 보수파들에게 ‘종북 공격’의 빌미를 주면 안 된다. 왜 노동운동이 민족문제까지 다 책임지려고 하는가. 남북문제는 정당에게 맡기고 노조는 노동이슈에 집중해야 한다.”

“지금 노사관계로는 세계경제 변화에 대응 못해”

한국 경제가 일본처럼 장기불황의 초입에 이르렀다는 진단이 있다.

“그동안 한국의 성장동력은 ‘캐치업(Catch-up)’경제였다. 선진국들을 따라가려는 경제였지 우리 스스로 한국의 성장모델을 만들지 못했다. 고도성장을 해오는 동안 한국의 경제 구조는 성장 초기와 완전히 달라졌다. 그런데도 정책과 구조는 그대로 있다. 이런 사이에 중국이 빠른 속도로 성장해서 경제대국으로 부상했다. 중국이 한국을 따라잡는 것은 쉬운 일이라고 본다. 이미 중국은 한국과의 국제시장 경쟁력에서 거의 차이가 없어졌다. 중국이 한국을 ‘캐치업’해서 한국식 ‘캐치업 경제’의 이점이 사라진 것이다. 한국은 그동안 기초과학 등의 인적자원을 배양해서 새로운 모델을 발전시켜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기 때문에 선진국과 중국 사이에 낀 샌드위치가 신세가 됐다. 지금의 경제운영방식으로는 지속적인 성장이 쉽지 않다. 그런 측면에서 장기 불황까지는 아니더라도 이전과 같은 성장은 어려울 것이다.”

저성장 시대의 기업과 노동은 어떤 관계설정을 모색해야 할까?

“지금의 낡은 기업 구조로는 고급 서비스 및 기술집약 시대에 경쟁력을 유지하기 쉽지 않다. 한국의 대기업은 국가의 일방적인 지원을 받으며 손쉬운 성장을 해왔다. 쉽게 성장하다 보니 인적 자원 개발을 등한시했다. 또한 정부와 대기업 중심으로 성장하면서 노사가 극단적으로 갈등하고 상호 협력을 이루지 못했다. 특히 1997년 IMF 외환위기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거치며 노동자들의 생활여건이 급속도로 악화됐다. 고용 기회가 줄어들고 노사관계는 뒤틀렸으며, 분배의 불평등이 심화됐다. 지금은 전근대적인 노사관계에서 완전히 새로운 노사관계로 변화가 요구되는 시점이다. 이런 구조가 해결되지 않고서는 한국 기업이 세계경제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다.”

최근 한 일간지에서는 일본의 ‘사토리세대(돈과 출세 등에는 관심이 없는 청년들)’에 빗대어 한국 청년들이 현실에 안주하는 ‘달관세대’라고 꼬집었다. 청년문제에 대한 해법은 무엇인가?

“취업이 어렵다 보니 먹고 사는 문제가 가장 중요해졌고 다른 문제를 생각할 여유를 갖지 못한다. 이런 현실의 표피만 보면서 청년들이 현실에 만족해 개인적인 생활을 즐기고 달관한다고 말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 청년세대는 한국사회의 성장중심 정책이 가져온 희생자다. 청년문제의 해법 또한 이러한 성장 중심의 경제정책을 변화시키는데 있다. 초유의 이익을 내는 대기업은 막대한 사내유보금으로 쌓아 두고서도 고용창출은 뒷전이고 값싼 비정규직을 선호한다. 이제는 기업이 사회의 고용확대에 기여해야 한다. 한국은 대기업 중심이다 보니 중소기업은 대기업의 하청업체 정도로만 여겨진다. 이윤도 적고 근무여건도 전체적으로 열악한 상태다. 정부는 중소기업을 발전시켜 더 많은 고용을 창출하는 쪽으로 경제정책의 무게중심을 이동해야 한다.”

선거관리위원회의 선거제도 개정안에 대해서 어떻게 보나?

“지구당 부활이나 비례대표제 확대 등 선관위의 개정안 내용 자체는 정치를 개방하고 확대한다는 점에서 바람직하다. 그동안의 정치개혁은 정당의 역할을 축소하고 억제하는 방향으로 진행됐다. 개혁이 오히려 유권자와 시민의 참여를 막은 것이다. 이런 오류들을 개선하려는 선관위의 개정안은 일단은 바람직하다. 다만 개혁안을 선관위가 만들어서 정치권에 던지는 방식은 민주적이지 못하다. 제도 개혁은 정당들끼리 협의해서 만들고 정치적으로 결정해야 한다. 선관위가 정당 행세를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선거구 개편과 관련해 국회의원들이 기득권을 내놓기 어려울 듯하다. 선거구 획정 문제는 어떻게 풀어야 할까?

“정치권은 갈등이 생기면 헌법재판소나 선관위 같은 제3의 기구에 의뢰해서 법적으로 해결하려 한다. 이에 따라 사법부와 행정부의 기능이 점점 더 확대되고 있다. 정치의 사법화라고 할까. 정당이 계속해서 자신의 일을 떠넘긴다면 국가는 커지고 정치 영역은 좁아진다. 이것은 굉장히 위험한 문제다. 민주주의를 운영하려면 비용을 지불할 각오가 돼 있어야 한다. 가장 효율적이고 빨리 해결할 수 있는 방법만을 요구해서는 전체주의에 가까워진다. 민주주의에는 효율성과는 다른 가치가 있다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 민주주의의 중심은 어디까지나 자율적인 정치 결사체로서의 정당에 있다고 본다.”

“여전히 노동문제를 중심으로 한 정당 탄생은 가능”

정치제도가 보수세력에 유리하므로 ‘기울어진 운동장’이라는 말이 나온다.

“지금의 새정치민주연합 등 야권은 엄연히 정권을 놓고 경쟁하는 정당이다. 야당이 잘한다면 정권을 맡길 준비가 돼 있는 유권자는 많다. ‘기울어진 운동장’이란 야당이 선거에서 진 것을 변명하는 ‘알리바이’ 만들기에 불과하다. 아무리 잘해도 구조가 기울어져 있어서 우리가 패배한다는 논리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뭐 하러 민주주의를 하나? 언제는 기득권을 가진 세력과 비주류가 평등한 적이 있었나? 그럼에도 선거를 통해서 정권이 교체돼왔고 그것이 민주주의를 움직이는 힘이다. 보수세력이 ‘어서 오십시오’ 하고 카펫 깔아놓고 기다리지 않는다. 정치제도가 불리할 수도 있겠지만, 야당이 현실적인 정책 대안을 내놓고 유권자들을 설득한다면 다수가 될 수 있다. 적어도 1987년 민주화 이후로는 정권교체는 평등한 게임이 됐으니 말이다.”

정당이 아닌 인물 중심의 선거가 이뤄지는 점을 비판한 적이 있다. 하지만 개혁을 위해서는 시대정신을 대변하는 인물이 필요한게 아닌가?

“그렇다. 한국뿐 아니라 모든 정치에서는 인물이 중요하다. 특정 정책과 이념이 인물로 구현되는 것이다. 이것이 정치의 본질 중 하나이긴 하다. 물론 한 인물이 모든 것을 해결해준다는 생각은 바람직하지는 않다. 정치는 인물과 정당이 결합돼 만들어내는 것이기 때문에 좋은 인물이 나오는 것은 물론 중요하다.”

요즘 눈여겨보는 인물이 있나?

“특별한 인물은 없다. 정당을 통해서 그런 인물들이 두각을 나타내기를 바랄 뿐이다.”

송호근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와의 인터뷰(2014년 7월 9일자 <중앙일보>)에서 최 명예교수는 노동문제가 중심이 되는 정당의 가능성을 포기했고 자발적 결사체에 희망을 건다고 말했다. 정당을 중요시하던 기존의 입장에 변화가 있는 것인가?

“의미가 조금 잘못 전달됐던 측면이 있는 것 같다. 인터뷰에서 한국사회에서 야당이나 진보세력이 약한 이유는 그 기초가 되는 결사체가 약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인터뷰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정당 이야기가 빠지다 보니 결사체만 강조됐다. 내가 말하고자 했던 바는 자발적인 생활 결사체가 바탕이 돼야 강한 정당이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한국적 토양에서 유럽의 사민당처럼 노동자를 기반으로 한 강한 정당이 가능한가?

“기존의 노동운동 세력이 정당으로 발전할 가능성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한국에서는 ‘노동’이라는 말 자체가 이념적이고 투쟁적인 운동을 떠올리게 한다. 노동의 범위를 생산직 노동자뿐 아니라 비정규직이나 청년 노동자를 포괄하도록 넓혀야 한다. 넓은 의미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연대가 정당으로 발전하는 것은 가능하다고 본다. 현대 자본주의사회에서 노동분야가 중심이 되지 않고 정치가 돌아갈 수 없다. 동아시아에서는 노동자가 제대로 대변되지 않고도 정치가 돌아가고 있다. 선진국에서는 불가능한 일인데 말이다. 유능한 ‘정치적 조직가’가 나온다면 노동문제를 중심으로 한 정당이 가능할 것이다.”

최 명예교수는 이어 ‘정치발전소가 대안적인 정치세력을 기를 수 있을 것으로 보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그런 희망을 갖고 젊은 사람들을 가르친다. 그래서 강연 준비를 더 열심히 한다”고 힘줘 말했다. 학교에서 강의하듯이 하면 준비도 쉬운데 한국 정치 현실에 접목하면서 강연하려다 보니 더 많은 노력과 시간을 들이게 된다고 그는 덧붙였다.

“젊은 수강생들이 대안 세력을 만든다고 합니다. 나는 그게 꼭 진보일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보수든 진보든 다 변해야 합니다. 보수도 합리적으로 변하고 진보도 실천력을 가져야 하니까요. 정치적 성향을 떠나 각기 정치 수준을 높이는 게 우선이죠. 정치의 품격과 눈높이가 높아져야 진보도 보수도 좋은 정치를 할 수 있습니다.”

- 글 전형우 월간중앙 인턴기자 / 사진 이원근 객원기자

201504호 (2015.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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