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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이모작을 여는 사람들] 농부가 된 ‘순악질 여사’, 김미화 - 예술과 농업이 어우러지는 실험무대에 서다 

용인의 산기슭에 예술공연 겸용 카페 열어 농사와 병행 … 농산물벼룩시장도 열어 도·농 직거래 대안장터도 모색 

글 고혜련 월간중앙 기획위원, 제이커뮤니케이션 대표 / 사진 김현동 기자

▎컨테이너를 개조해 만든 ‘농사와 예술이 있는 카페’ 호미 앞에서 김미화·윤승호 씨 부부가 함께 포즈를 잡았다. 그들이 열정을 갖고 경기도 용인에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가고 있는 카페 호미는 두 사람의 이름 한 자씩을 조합해서 만든 이름이다.
오래전, 야구방망이를 들고 억척스레 남편을 호통하던 그녀는 어디 갔을까? 천지에 봄을 재촉하는 햇살이 화사하게 쏟아지는 초봄의 주말. 그녀는 매스미디어의 무대가 아닌 일상에서 ‘순악질 여사’의 기억을 지펴내고 있었다. 한동안 텔레비전에서 장난기와 심술 가득한 목소리로 방망이를 휘두르며 시청자들을 웃음짓게 했던 개그맨 김미화(51)의 일상은 농촌생활이다.

서울을 벗어나 영동고속도로 양지나들목을 나와 갖가지 시골풍경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좁은 산길 15㎞를 달려서 당도한 용인시 원삼면 목신리 구봉산 끝자락쯤에 자리한 예농(藝農) 카페 ‘호미’. 고라니와 반딧불이를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는 그곳에서 운동화에 청바지, 방울 털모자를 쓰고 화장기 없는 얼굴로 손님에게 피자와 스파게티를 내어오는 김미화는 영락없는 한적한 레스토랑 주인장의 모습이다. 요즘의 생활이 좋은 듯 볼살이 오르고 중년의 몸집도 한결 여유로워졌다.

그녀는 무대 위의 그 옛날을 잊은 듯, 시간의 한 모퉁이를 돌아 열기를 식히고 다시 돌아와 앉은 듯 담담함을 담아내고 있었다. 하지만 ‘오래된 미래’로 향하는 농부, 그녀의 말은 단호했고 어느새 단단한 표정이 살아났다.

“창밖의 저 배추밭 좀 보세요. 지난가을 내내 힘들게 농사지은 것들을 수확도 못한 채 내버려 썩힌 농부들의 마음이 오죽했을까요. 이전 같으면 배춧값이 싸져 좋다며 신나 했겠죠. 배춧값 폭락사태를 보면서 다른 한편에선 아파하는 사람들도 있음을 깨달았으니 이곳 농촌과 자연이 고마운 스승이요 학교일 수밖에요.”

김씨가 배추밭 안쪽에 컨테이너형 카페를 세운 것은 1년 반 전인 2013년 여름이다. ‘언젠가 그때’를 생각해 8년 전에 사두었던 그 땅과 주변의 논밭 1800평을 임대해 이웃 농부들의 도움을 받아 함께 농사를 시작했다. 부부와 아이들이 사는 집도 이곳과 멀지 않은 한적한 곳에 자리하고 있다.

“새로운 시도를 하되 성취감이 있고 즐거운 일을 하자는 게 우선 목표였어요. 이제 농부님들과 어울리면서 제가 하고 싶은 일은 고생하는 농부들이 정당한 대가를 받는 사회를 만드는 데 작게나마 보탬이 되고 싶다는 거예요.”

이웃 농부들이 가꾼 농산물 직거래 카페 열어


▎1. 김씨는 거의 종일 이 카페에서 손님을 맞고 직접 커피를 만들기도 한다. / 2. 카페 뒷산에서 내려다본 호미의 안쪽 모습. 여름이면 나무로 된 데크에서 야외음악회가 열린다.
혹자는 ‘순악질 여사’라는 옛 브랜드를 팔아 돈을 벌려는 방편 아니냐고 얘기하지만 “그건 방송에서 뜰 때 나 적합한 얘기”라며 고개를 가로젓는다. 카페 한켠에서 손님인 듯 악보와 기타, 노트북을 펼쳐놓고 악상을 고민하던 그의 남편 윤승호 교수(56·성균관대 스포츠과학부)가 아내의 말을 거든다. “무역자유화 협정을 통해 당장은 싼값에 농작물을 수입해 먹고 있지만 나중에는 아마 식량주권을 잃고 우리 후세들은 저급한 것을 비싼 값에 사먹는 날이 오지 않을까요? 우리 부부는 이 땅의 연로한 어르신들이 힘들게 짓는 농산물들을 제값에 팔아 농부가 갑으로 대접받는 사회를 만드는 데 기여하고 싶어요.”

그런 노력의 일환으로 이 카페 안 피아노 옆에는 근처 농부들이 지은 각종 농산물이 전시돼 판매되고 있다. 김씨 부부가 직접 생산한 검은 찹쌀과 인근 농부들이 생산한 유정란과 초란, 서리태와 무말랭이, 단호박, 된장 등이다. 그녀는 작년에 검은 쌀 15가마를 수확했다고 한다. 볍씨를 뿌리고 이앙기로 모를 심고 트랙터로 밭을 가는 일들은 근처 농부들의 도움을 받았으니 협업의 즐거움과 가치도 만끽했다. 카페 이름 ‘호미’도 농기구를 의미하면서 동시에 이 부부의 이름에서 한 글자씩 따서 지었다.

어렵게 키운 작물을 대접한다는 의미로 최대한 예쁜 나무상자에 담아놓아 카페 손님들의 구미도 당기고 그들이 실험 중인 ‘농사와 예술이 있는 카페’임을 한눈에 전해주니 일석이조다. 알록달록하고 먹음 직한 농산물들은 실내 분위기를 부드럽고 정감 있게 만드는 소도구의 장식역할을 단단히 해내고 있었다.


▎아직 날씨가 풀리지 않았는데도 외진 곳에 있는 이 카페에는 그녀를 보려는 손님들로 붐빈다.
이곳에서 판매되는 것들은 농협에서 친환경HACCP(식품위해요소 중점관리기준) 인증을 받은 단지를 경작하는 근처 작목반 농부들이 키워낸 작물이다. “과연 얼마나 팔려야 도움이 될까?” “전시효과에 그치는 건 아닌가?” 때론 의구심의 눈초리를 보내는 이들도 있지만 대답은 예상 밖이다.

“날씨가 따뜻해지면 이 구석진 곳에 매달 2천여 명의 도시인이 찾습니다. 카페 안팎으로 가득 쌓인 농산물이 무섭게 팔려나가죠. 농촌을 중심으로 이런 장소들이 곳곳에 생긴다면 농산물 제값 받는 일이 그리 어려운 것도 아닐 거예요.” 이들이 시도하는 농부 벼룩시장(FFM=Farmer’s Flea Market)이 농산물 값을 후려치는 대형 슈퍼(SSM)에 맞서는 대안이 될 수 있다는 얘기다.

날씨가 풀리면서 이 외진 곳에 농부들과 카페 손님들의 발걸음이 잦아진다. 따뜻해지면 주말마다 열리는 재즈 콘서트 등의 공연이 외부인들을 빨아들인다고. 오래전의 ‘순악질 여사’를 아직 기억하는 중년층 들이 주류를 이룬다.

주변이 조용하고 아직 목가적인 분위기가 살아 있는 이곳, 을씨년스러운 배추밭을 끼고 돌면 컨테이너의 뒷모습이자 카페의 출입구가 나타난다. 삭막한 금속질의 컨테이너와 달리 그 안의 풍경은 사뭇 예상 밖이다. 카페임을 알리는 상호와 조형물을 부착한 컨테이너의 벽면은 카페를 알리는 큰 안내 광고판이나 다름없었다. 이곳은 ‘순악질 여사’가 하는 곳이고 ‘농산물카페’이니 편하게 들어오라는 손짓이었다.

그 안은 여느 전원카페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손님들이 커피나 피자, 스파게티를 들면서 안쪽의 대형 유리창 밖으로, 혹은 나무 데크의 테이블에 앉아 자연을 즐길 수 있는 소박하면서 정감 있는 장소다. 설치미술가인 친구의 도움을 받아 폐선박이나 폐건물의 낡은 파이프, 부서진 문짝 등을 인테리어 공사에 투입해 ‘오래된 기분’을 자아내려고 했다.

김씨가 요즘 하루를 온전하게 바치는 이 카페는 지난해 봄부터 주말마다 다양한 종류의 음악콘서트를 개최해왔다. 문화행사 쪽은 남편 윤씨가 기획을 담당하고 있다. 대학에선 전혀 다른 분야를 가르치는 교수이면서 재즈 음악가인 그가 이끄는 호세윤밴드의 공연 외에도 홍서범·조항조·임형주·웅산·김한국 등 음악인들이 무대에 섰다. 개그쇼도, 인도전통무용과 브라질 뮤직, 아카펠라 그룹의 노래도 마련됐다.

30년 방송활동 접고 방황하다 농부로 변신


▎카페 호미 한쪽에는 근처 농부들이 판매를 의뢰한 각종 농산물이 전시돼 있다. 판매대금은 고스란히 농부들에게 되돌아간다.
청년시절부터 음악활동을 한 남편 윤씨는 재즈의 본고장으로 알려진 뉴올리언스에서 박사공부를 하면서 재즈에 대한 공부도 병행하는 기회를 얻었다. 색소폰과 기타 연주 솜씨도 선보인다. 수익금의 일부는 어려운 곳에 기부한다고 알려져 있다. 그 외에도 귀농·귀촌 및 인문학에 대한 강의, 색소폰 동호회 모임 등 이곳을 열린 문화 공간으로 개방하고 있다. 카페 안팎을 이용한 야외공연 때마다 수백 명씩 찾아와 농산물도 함께 사가니 김씨 부부의 소망이 차츰 이루어질 것으로 기대된다.

지난 세월, ‘쓰리랑부부’, ‘개그콘서트’, ‘세계는 그리고 우리는’ 등의 방송 프로에서 개그맨 또는 방송사회자로 바쁘게 살아온 김씨가 느닷없이 농촌 카페를 연 것은 그녀에게 찾아온 ‘아픈 휴지기’가 계기가 된 듯하다. 코미디언이면서 라디오 시사프로인 진행을 8년 넘게 맡았고, 각종 사회단체의 홍보대사, 사회자로 활동하던 그녀의 언사가 다분히 정치적 목적을 깔고 있다는 구설수에 휘말리면서부터. 일부 언론, 논객들과의 공방전이 벌어지고 명예회복을 위한 갖가지 송사에 얽히면서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한동안 방송 활동을 접게 됐던 것이다.

19세의 어린 나이에 KBS 공채 2기 코미디언으로 발탁돼 30년간 억척스럽게 방송활동을 해온 그녀에게는 뼈아픈 시련이었다. 남편 윤씨는 집안에 틀어박혀 방황하는 아내의 방송활동 재개를 호소하는 글을 한때 온라인에 올려 아내를 독려했다. 용인 집 근처에 사둔 땅에 농산물 카페를 열어 새로운 길을 모색해 보자고 먼저 제안한 것도 남편 윤씨다. 마흔이 넘어 대학을 졸업(사회복지학)하고 석사(언론정보학) 과정까지 마친 그녀에게 공부를 더할 것을 권하기도 했다. 그녀는 지금 사람과 자연의 이치를 탐구하는 ‘동양철학’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사람의 마음을 15초 만에 낚아채야 하는 코미디와 통하는 구석이 많단다.


▎스포츠과학을 전공한 교수이자 ‘호세윤 재즈밴드’를 이끄는 음악가로 다양한 삶을 살고 있는 남편 윤승호 씨가 피아노 치는 모습을 김미화 씨가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바라보고 있다.
절박한 시간의 어느 한 모퉁이를 돌아 나온 시련의 담금질이 그녀에게서 느껴졌다. 시련은 그를 더 성숙하게 하고 이제 그 아픔을 감사함으로 치환하며 어둠의 터널을 벗어나고 있는 듯했다. 담담하게 때로는 단호하게 그는 긍정적 자기 암시에 자신을 내 맡긴 듯했다.

“농부님들이 제 값에 농산물이 팔리는 것을 보고 자부심도 느끼면서 힘이 나 합니다. 우리 부부는 이분들의 가르침으로 농사를 지으면서 기쁨과 보람도 얻고요. 또 그분들이 문화공간에서 많은 사람을 만나고 하시는 일을 펼쳐 보이고 멋진 공연으로 모두의 마음을 울리니 이만하면 행복한 삶 아닌가요?”

농사 수입은 없다고 했다. 농부들이 가져다 놓은 것은 수수료 없이 판매대행만 하고 있지만 카페를 통해 종업원들과 아르바이트 인건비를 주고 억울하지 않을 정도의 급여만 부부 손에 떨어진다.

남편의 내조로 새 인생 개척 나서


▎1. 김씨는 배추밭 안에 있는 카페 주변에 빈 땅이 있으면 무언가를 가꾸는 재미가 크다면서 봄이 오면 농사를 지을 생각에 벌써 들떠있다. / 2. 농부들이 재배해 정갈하게 포장한 열무. 겨울 김장이 다 떨어져가는 봄철 입맛을 돋우는 데 아주 제격이라고 한다.
아담한 체구, 수더분한 옷차림, 차분한 목소리와 표정이 생활인인 그녀의 현주소를 말해준다. 남편 역시 물심양면으로 그녀를 돕는다. 식사 준비나 설거지 등 집안일은 서로 남녀를 따지지 않고 틈이 나는 사람이 하고 있다. 가수 홍서범 씨 부부가 다리를 놓은 후 같은 캠퍼스에서 학생과 교수로 자주 마주치면서 친숙해져 늦은 나이에 부부의 연을 맺어 올해로 10년째 잉꼬부부로 살아간다. 두 사람 사이에 있는 아이는 모두 넷. “시청자, 청취자들로부터 오랜 사랑을 받았는데 이제 시골에 와서도 농부님들과 손님들이 사랑을 해주시니 감사할 따름이죠. 살면서 열심히 갚겠습니다.”

한창 농사철에는 이곳에 농부들과 작물들이 수시로 드나들어 진짜 농부가 된 기분도 들고 자연이 주는 신선하고 풋풋한 치유의 선물을 즐길 수 있으니 더없이 좋다고 한다. 처음에는 거리감이 있었으나 혼연일체가 돼 농사를 지으면서 이제는 서로 마음을 열어 동네 대소사에 불려 다닐 정도로 가까워졌다. 지난 10여 년간 벌어졌던 파란만장한 일상사를 담은 자전적 수필집 <웃기고 자빠졌어>를 펴내기도 했던 김씨는 “코미디언이 그런 소리를 들으면 성공 아니던가” 하며 프로다운 농담을 건넸다. 자신의 묘비명 역시 그것이라니 촌철살인의 기지가 엿보인다.

그는 지금 ‘좌전우답(左田右畓)’을 거느리고 ‘오래된 미래’를 향해 비상하고 있다. 그가 어디까지 비상해 농촌에 밝은 웃음을 선사할지 기대해 볼 일이다. ‘예농’ 문화의 새 물결이 온 천지에 일렁이는 그날을!

고혜련 - 칼럼니스트. 이화여대에서 국문학을, 미국 뉴저지주립대에서 국제정치학을 전공했다. 중앙일보 기자, 차장을 거쳐 파이낸셜 뉴스 문화부장과 런던특파원을 지냈다. 저서로 〈신문, 취재와 기사작성〉 〈자연에 산다〉 〈매스커뮤니케이션개론〉 등이 있다. 현재는 홍보 및 콘텐트 기획회사인 제이커뮤니케이션 대표다.

- 글 고혜련 월간중앙 기획위원, 제이커뮤니케이션 대표 / 사진 김현동 기자

201504호 (2015.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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