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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이 사랑하는 아티스트] ‘보헤미안의 완벽주의 감성’ 여배우 손예진 - “관객과 늘 연애하는 기분이에요” 

‘해’와 ‘달’이 공존하는 여배우의 털털한 눈웃음… 맑은 눈동자에 천 개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듯 한 절정의 순수(純粹) 

글 김포그니 월간중앙 기자 / 사진 김현동 기자
바야흐로 아티스트의 시대다. 무형의 가치가 유형의 세계를 선도하는 원천이 된다. 무형의 힘은 바로 문화에서 나온다. 문화를 선도하는 이가 바로 아티스트다. <월간중앙>은 창간 47주년을 맞아 ‘한국인이 사랑하는 아티스트’를 선정해 그의 삶과 예술세계를 탐험한다. 그 첫 테이프를 끊은 주인공은 충무로를 대표하는 여배우 손예진이다. 그는 브라운관과 충무로를 오가며 시청자와 관객을 사로잡은 ‘청순의 대명사’이자, 시대의 획을 그은 대표적인 문화예술인이다.

▎손예진은 제51회 대종상영화제에서 <해적>으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벌써 두 번째 수상이다. 그는 “상보다 관객의 마음이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풍성한 결실을 맺을 단 하나의 독자만 얻는다 해도, 이 씨앗을 받아들여 자기 안에 지닐 단 하나의 영혼만 얻는다해도, 나는 만족할 것이다.”(헤르만 헤세) 배우 손예진은 “단 한 명의 관객이 남더라도 기꺼이 연기하겠다”고 말한다.

“내가 별을 따달래, 달을 따달래, 그냥 남편 하나 더 갖겠다는 것뿐인데.”

한국 사회에서 ‘남편 한 명을 더 갖겠다’는 발칙한(?) 역을 맡고도 손예진의 인기는 식을 줄 몰랐다. 심지어 그는 이 문제적 영화 <아내가 결혼했다>로 생애 첫 여우주연상을 수상한다. 고작 스물여섯 나이였다.

손예진은 2015년 새해를 가장 기분 좋게 시작한 여배우일 것이다. 그는 올 초 영화 <해적>으로 대종상 여우주연상을 거머쥐었다. 남들은 하나 받기도 어려운데 서른을 갓 넘은 나이에 벌써 주연상만 두 개다. 이쯤되면 우쭐해질 법도 한데 들려오는 뒷소문은 하나같이 ‘털털하고 사람 괜찮다’는 내용이었다. “그게 가능해? 과연 사실일까?” 호기심이 생겼으니 당장 알아봐야 했다. 3월 27일 서울 부암동의 한 카페에서 그를 만났다.

최근 대종상 여우주연상 수상하셨죠? 축하드려요.

“제겐 과분한 상이었어요.”

왜 그렇게 생각해요?

“보통 액션이나 로맨틱 코미디 장르로는 상을 타기 어렵거든요. 게다가 <해적>에선 저보다는 주·조연 배우 분들과 스텝 분들의 공이 더 컸어요.”

영화 <아내가 결혼했다>도 로맨틱코미디 장르인데 여우주연상을 탔잖아요?

“‘남편 두 명을 갖는 여자’라는 파격적인 역을 어린 나이에 맡았다는 거에 좋은 점수를 주신 것 같아요.”

남편 두 명이라니…. 전 그 영화, 극장에서 두 번 봤어요.

“약간 그런 스타일이시구나.”(함께 웃음)

이번에 여우주연상 수상소감이 굉장히 차분했어요. 보통 상 받으면 울거나 감정 표현이 격하잖아요?

“감정을 뒤늦게 토해내는 편이에요. 그래서 ‘왜 기뻐하지 않느냐’며 오해도 받고 그래요. 상을 주셔서 감사하고 기쁘죠. 그런데 그걸로 인해서 크게 달라지는건 없어요. 사실 관객의 마음이 가장 중요하거든요.”

상투적인 질문이지만 왜 배우가 되고 싶었어요?

“막연히 꿈 꿨어요. 그렇다고 화려함이라든지 스타, 이런 걸 추구했던 건 아니에요. 그냥 어릴 때부터 생각이 많았어요. 쉽게 말해 내 안에 내가 너무 많이 있는 것 같았어요. 표출하고 싶던 뭔가가 늘 내부에서 꿈틀꿈틀하곤 했죠. 그래서일까요? 주변으로 스쳐 지나가는 모든 공기들이 ‘배우’라는 이름으로 다가왔던 것 같아요. 상념을 배우라는 이름으로 구체화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스타보단 배우가 되고 싶었던 문학소녀


▎영화 <아내가 결혼했다>의 한 장면. 한국 사회에서 ‘남편 한 명을 더 갖겠다’고 말하는 발칙한(?) 역을 맡고도 손예진의 인기는 식을 줄 몰랐다. 그는 이 작품으로 생애 첫 여우주연상을 수상한다.
심오한 대답이네요. 학창 시절은 어땠나요?

“어땠을 것 같아요?”(웃음)

전 이미 영화 <백야행> <공범>을 접했기 때문에 예진 씨의 실체를 압니다.(웃음) 물론 드라마 <여름향기>가 워낙 강렬하다 보니 예진 씨가 아마도 밝은 여고생이었을 거라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러기엔 영화 <무방비도시>도 강했죠. 역시 고독한 문학소녀였지 않았을까요?

“문학소녀까진 잘 모르겠고요.(웃음) 산을 바라보곤 한참이나 서있기도 하고. 타자와의 관계에서 감정의 괴리를 느끼기도 해서 외로웠던 기억은 나요. ‘예진아, 넌 왜 이리 심각하니?’ 그런 말도 듣곤 했죠. 두루두루 친하기보단 정말 가까운 소수의 친구하고만 깊은 소통을 했어요. 최근 그 친구들과 주고받은 일기장을 다시 읽어 봤는데….”

뭐라고 적혀 있던가요?

“글쎄 이렇게 적었더라고요.(웃음) ‘음…. 난 슬픔을 갖고 태어난 것 같아. 남들에 비해 열등의식이 있는 걸까?’”

역시 문학 소녀였군요.

“돌이켜보면 그런 복잡한 감성을 써내려 갔던 경험이 결국 배우로서 밑거름이 됐던 것 같아요. 원래 되게 내성적인 사람이었어요. 발표하는 걸 싫어하고 낯선 사람한테 자신을 어필하는 것도 두려워했었죠. 그래서 연기를 한다는 게 처음엔 힘들었어요. 음… 여기까진 ‘앓는’ 소리고요. 기본적으론 배우로서 수월하게 왔다고 생각해요. 제게 기회를 준 모든 분께 감사해요.”

무명시절이 되게 짧았어요. 처음 굵직한 역을 맡았을 때 기억나나요? 기분이 어땠어요?

“‘열심히 해야지’ 처음부터 지금까지 늘 이 문장을 가슴속에 담아뒀던 것 같아요. 저한텐 연기밖에 없었거든요. 완벽한 연기를 하고 싶어서 힘들기도 했고요.”

연기를 위해 평소 어떤 노력을 하시나요?

“연기는 노력해도 안 되죠.(웃음) 무작정 노력이 아니라 고민을 많이 해야 하는 것 같아요. 그런데 연기를 하면 할수록 ‘고민하는 능력도 타고나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돼요. 가끔 소름 끼치게 연기하는 몇몇 배우를 보면 확실히 타고난 재능이랄까? 그런 게 있는 것 같아요. 아무리 노력한들 관객의 마음을 흔들 수 없다면 과연 의미가 있을까요?”

고민을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

“우선 캐릭터의 속성을 찾아내는 관찰력이 중요한 것 같아요. 내가 한 번도 살아보지 않은 어떤 인물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하고요. 번민의 연속이죠. 정말 연기는 배우에겐 영원한 숙제인 것 같아요.”

벌써 여우주연상을 두 번이나 수상한 걸 보면 숙제를 굉장히 잘한 것 같아요. 어떠세요? 아직도 본인의 연기에 대해 고민하나요?

“배우라는 직업이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을 만족시키기 위해 존재하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관객의 마음을 위로하고 울고 웃기고, 그렇게 해야 만이 배우 아닌가요? ‘나 이렇게나 노력해서 이런 연기를 했어’라고 아무리 스스로 만족한다 한들 관객이 그 연기에서 감정적으로 아무것도 얻어간 게 없다면…. 글쎄요. 그래서 때론 관객과 연애하고 있는 기분이에요. 사랑이라는 게 원래 그렇잖아요. 항상 최선을 다해도 늘 내가 부족한 것 같고, 상대를 더 만족시키고 싶은….”

예진 씨가 스물다섯 어린 나이에 드라마 <연애시대>에서 이혼녀 은호 역을 맡았던 게 아직도 기억에 생생해요. 그전까진 원조 첫사랑에 청순의 대명사였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갑자기 그런 역을 들고 나온 거예요?(웃음)

“직업이 ‘배우’인데 역할을 가릴 수 있나요.(웃음) 비단 <연애시대>뿐만 아니라 영화 <외출> <아내가 결혼했다>에서도 20대 초·중반에 유부녀 역을 맡았어요. 그 때문인지 언제부턴가 주변에서 저를 제 나이보다 더 많이 보시더라고요. 결과적으로 크게 좋은 일은 아니었던 것 같아요.(웃음) 그래도 어쩔 수 없는 것 같아요. 언제나 딥(deep)한 연기를 하고 싶었거든요. ‘20대 초반이니까 난 대학생 역할만 할 거야’ 그러고 싶진 않았어요.”

꽃무늬 롱 치마에 하얀색 카디건, 양 갈래 머리에 밀짚모자까지 쓰고 나와선 직업은 꽃집 아가씨란다. 가녀린 몸매에 안색마저 창백해 ‘에이, 설마 아니겠지’라며 시청자는 불안감을 느끼면서도, 이 아름다운 여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결국 이 여인은 얼마 지나지 않아 ‘사실 심장병이 있어요’라고 말한다. ‘세상에나….’

21세기를 여는 시점에 등장한 캐릭터였다. 당시 동시간대 방영했던 드라마 <다모>에서 여형사라는 파격적인 여성 캐릭터가 등장해 호평받고 있던 시대적 상황에서 대중은 이 ‘심장병 걸린 꽃집 아가씨’의 등장에 적잖이 당황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이 모든 조합을 납득하게 된다. 외모만으로 이 말도 안 되는 배역을 말이 되게 만든 배우가 있었기 때문이다.

배우 손예진은 2003년 드라마 <여름향기>로 대중에게 이른바 ‘비주얼쇼크’를 선사하며 순식간에 톱스타로 떠올랐다. 그러나 아름다운 여인의 숙명이었던가? 그는 <여름향기>를 계기로 청순의 대명사, 국민 첫사랑이란 애칭을 얻었으나 여성 팬들의 마음은 좀처럼 얻기 힘들었다. 그랬던 그는 현재 가장 많은 여성 팬을 보유한 것으로 유명한 여배우가 됐다. 그 계기엔 2006년 드라마 <연애시대>가 있었다. 그는 이혼녀 ‘은호’ 역을 맡아 “산다는 건 어차피 외로움을 견디는 것”이라고 말하며 수많은 여성 시청자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피클 뚜껑이 안 열리자 “왜 이렇게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 없느냐”며 서럽게 우는 은호의 모습은 아직도 많은 여성 팬 사이서 회자되고 있다.

별명이 ‘소처럼 일하는 배우’란 걸 아세요? 유명 여배우로선 드물게 무려 15년간 공백기가 아예 없더군요. 쉴새 없이 작품을 하는 이유가 있나요?

“일에 대한 욕구가 강한 것 같아요. 아무리 쉬려고해도 관성처럼 열정이 다시금 생기거든요. 더군다나 인생은 한 번이잖아요. 딱 그 나이대에 할 수 있는 역할들이 있고요. 그 순간만이 보여줄 수 있는 감정선들을 놓치고 싶지 않아요.”

여성 팬에게 가장 사랑받는 캐릭터 ‘은호’


▎손예진은 2003년 드라마 <여름향기>로 대중에게 이른바 ‘비주얼쇼크’를 선사하며 순식간에 톱스타로 떠올랐다.
여우주연상도 받았겠다, 좀 더 까다롭게 유명 감독하고만 일할 수 있었는데 대부분 신인감독과 작품을 했네요?

“신인감독님들과 많이 일한 건 맞아요. 한 때 별명이 ‘감독 입봉시키는 전문배우’였으니까 말 다했죠. 영화 <첫사랑사수궐기대회> <연애소설> <무방비도시> <백야행> <오싹한 연애> <공범> 등 정말 많네요.”

예전에 배우 최민식 씨가 영화 <파이란>에 출연할지 고민했다고 해요. 송해성 감독이 당시엔 신인이었거든요. 그만큼 배우 입장에선 신인감독과의 작업을 결정하기가 쉽지 않다는 거죠. 그런데 예진 씨는 왜 그랬어요?(웃음)

“아무래도 유명한 감독님과 함께 작업하는 게 흥행이나 작품성 측면에서 안전하긴 하죠. 그래도 시나리오를 읽다 보면 흥미를 끄는 작품 대부분이 신인 감독님의 것들이더라고요.”

흥행 실패의 두려움은 없었어요?

“인생의 굴곡은 누구에게나 있잖아요. 두려움을 버리고 주어진 기회에 임하고 싶어요. 물론 연속으로 작품이 망하면(?) 배우로서 잃는 게 크겠죠. 그래도 인생을 길게 보면 더 배울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해요.”

청순의 대명사인데 행동은 그렇지 않은 것 같아요.

“제 속에 남자도 있는 것 같아요.”

뭐라고요?

“하하, 아시다시피 도전하는 걸 좋아해요.”

예진 씨의 옷을 보면 알 수 있어요. 아방가르드적인 패션을 좋아하는 것 같아요.

“개인적으로 그런 스타일을 정말 좋아해요. 가끔은 너무 ‘오버’해서 한 소리 들을 때도 있죠.(웃음) 괜히 내 옷 입고 갔다가 욕먹고. 막, ‘패션 테러했다’고.(웃음) 그런데 난 너무 좋은 거야, 그 옷이 괜히.”

충무로의 ‘잭슨 폴락’ 연기에 몸을 맡기다


▎영화 <클래식>의 한 장면. 관객은 이 아름다운 여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손예진은 이 작품을 계기로 ‘국민 첫사랑’ 아이콘으로 오랫동안 자리매김했다
다시 연기 얘기로 돌아가서, 이번에 촬영한 영화 <행복이 가득한 집>은 어땠나요?

“장르는 미스터리 스릴러에요. 정계에서 촉망받는 신인 정치인의 아내로 나와요. 그러다 갑자기 큰 사건에 휘말리죠. 이번 영화에서 연기 변신을 한 것 같아요.”

늘 연기 변신을 해오지 않았나요? <해적>처럼 대중성 있는 작품에서 <외출> <백야행> 등 작가주의 작품까지 있잖아요.

“이제까지의 변신은 변신이 아니었다고 말하고 싶어요. 이번 작품에서 그간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연기를 했어요. 개인적으로 촬영하면서 심적으로 너무 힘든 나머지 내려놓은 작품이기도 해요. 영화 <공범>때에도 힘들었는데 이번이 가장 심했던 것 같아요.”

정치인의 아내 역이다 보니 정치인 관찰을 많이 했을 것 같아요. 그들만의 특수성이란 게 있잖아요.

“캐릭터적인 면도 그렇지만 우선 연기적으로도 많이 변화했어요. 자세히 말하고 싶은데 스포일러가 될 것 같네요. 그나저나 정치에 관심 있어 보이는데 혹시 전공이?”

정치요?(웃음) 기자 생활하는데 하등 도움 되지 않고 있어요. 매일 ‘키신저, 키신저’ 하며 아는 척은 하는데 문제는 키신저가 누군지 몰라요.(웃음)

“단어가 입에 붙어 있는 게 진정한 앎일 수도 있어요.(웃음) 제 연기도 그렇게 혼연일체가 돼야 할 텐데.”

혼연일체를 위해 대본 연습이라든지, 캐릭터 연구는 어떻게 하나요?

“혼자 연습해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현장에 가서 상대 배우와 호흡하면 더 좋은 것들이 나오는 경우가 있어요. 캐릭터와 대본을 제 것으로 만들고 나가더라도 현장에선 또 달라지거든요. 일종의 앙상블이라고 해야 할까…? 다양한 색을 가진 배우들과 흐름을 타는 거죠. 작품이 혼자 연기한다고 되는 게 아니잖아요. 머릿속에 대강의 상황을 그려놓고 카메라가 돌아가면 그 순간에 맡겨요. 강물에 몸을 풍덩 던지는 거죠.”

즉흥성을 추구하는 것 같아요. 실수가 두렵진 않나요?

“언제나 작품을 함께 하는 배우들과 감독님, 스텝 분들에 대한 강렬한 믿음이 있어요. 이런 믿음이 연기하는 데 큰 도움이 돼요.”

뜬금없는 질문인데 혹시 좋아하는 미술가 있으세요?

“추상화나 액션페인팅? 막 물감 뿌리는 거 있잖아요. 그래서 잭슨 폴락을 좋아해요.”

그럴 줄 알았어요.(웃음) 미술도 즉흥성을 추구하네요?

“하하, 그런 작가들의 작품을 보면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싶어요. 하얀 캔버스에 상상하기 어려운 것들을 즉흥적으로 채워 넣잖아요. 그 순간을 그대로 담아내니까. 그래서 자꾸 들여다보고 당시 작가의 감정을 상상하게 돼요.”

어떤 면에서 손예진의 연기와 비슷하네요. 자신의 연기가 어떻게 변화해왔다고 보세요?

“어릴 땐 감정을 표현하다 잘 안되면 어떻게든 쥐어짜서 다시 가고 그랬어요. 결국엔 잘 안되죠.(웃음) 그럴 땐 패배감도 들고 자책감도 들고. 그런데 언제부턴가 ‘오늘은 감정이 여기까지 나오겠다’고 예견이 되더라고요.”

연기적으로 성장하게 된 계기가 있나요?

“인간에 대한 어떤 깨달음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극적인 감정이라도 그걸 표현하기 위해 굳이 과도해질 필요가 없다는 거죠. ‘으! 으!’ 이러면서 막 고통스럽다는 듯이 쥐어짜고, 감정적으로 너무 많은 걸 보여주면 관객이 버거워할 수 있어요. 보면요, 우리가 살면서 극적인 상황에 놓였을 때 막 감정을 토해내면서 울기보다는 그냥 머릿속이 하얗게 될 때가 더 많잖아요. 연기적 측면에서 그런 고민을 많이 했어요.”

감독에 대한 존경심, 연기에 도움돼


▎드라마 <여름향기>의 한 장면. 손예진은 심장병에 걸린 꽃집 아가씨 혜원 역을 맡았다.
돌이켜봤을 때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이 뭐에요?

“배우한테는 진짜 다 소중해요. 진짜로. 내 나이 스물셋, 서른에 맡은 역할이 다 다르잖아요. 정체든 진화든 제 자신의 가치관이나 시선의 변화가 있었을테고 그게 고스란히 연기에 반영됐을 거예요. 그 나이 때에만 할 수 있는 역할도 있고요. 예를 들어 영화 <클래식>이 제대로 된 첫 주연작이었는데요. 잘 찍고 싶으니까 힘들었어요. 완벽주의였던 거죠. 그래서 감독님께 ‘2~3년 후에 찍으면 더 잘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더니 ‘지금의 풋풋함과 설익음은 딱 지금의 너만이 표현할 수 있는 거란다’라고 하시더라고요.”

드라마와 영화를 꾸준히 오가며 작품 활동을 해왔어요. 두 분야의 차이점이 있나요?

“체감이죠. 드라마 경우 시청률이 바로 나오잖아요. 그런 면에서 최근 했던 드라마 <상어>는 제게 상처였어요.”

예상보다 시청률이 좀 낮게 나왔죠? 그런 것에 상처받으세요? 의왼데요.

“그럼요. 특히 <상어>는 좀 아픔이 컸던 것 같아요. 타사 드라마와 경쟁하며 실시간 시청률을 보면 자존심도 상하고….”

여배우로서 말하기 힘든 부분일 텐데….

“누구나 다 아는 얘기인데 굳이 내가 안 한다고 감춰지는 건 아니잖아요.(웃음) 그래도 앞으로도 드라마, 영화 구분 없이 다양한 작품을 하고 싶어요. 기회가 주어진다는 건 늘 감사한 일이거든요.”

배우로서 직접 남의 작품을 보기도 하잖아요. 좋아하는 작품이 있나요?

“최근엔 영화 <폭스캐쳐>도 좋았고요. <우리가 사랑일까>, 특히 이 영화는 잔상이 오래 갔어요. 작가님이나 감독님들이 정말 존경스러운 게 머릿속 생각들을 어떻게 그런 장면으로 섬세히 표현하는지 경이로울 때가 많아요. 기본적으로 감독님들에 대해 존경심이 있어요. 그래서 신인감독님들 하고도 두려움 없이 작업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인간 손예진도 궁금해요. 후회되는 건 없나요?

“어느덧 30대네요. 20대 시절엔 치열하게 일만 했죠. 일 외에 나의 삶은 없었던 것 같아요. 지금도 사실 ‘넌 왜 이렇게 쉬지 않고 일하니?’라는 말을 듣곤해요. 치열하게 일했던 흔적들이 필모그래피로 쌓였지만 저도 인간이잖아요. 한편으론 허무하기도 하거든요? 일적으론 행복했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나를 좀 챙기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작품 쉴 때 항상 여행을 가요.”

기억에 남는 여행지가 어디였나요?

“쿠바에 두 번 갔어요. 푸에르토리코도 가고. 정말 좋았어요. 사실 아프리카에 가는 게 꿈이에요. 특히 마다가스카에 가고 싶어요. 바오바브나무, 동물들을 좋아하거든요. 두 달 정도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혼자 살아보고 싶기도 해요.”

그런 외모를 갖고선 쿠바, 마다가스카라니요.(웃음) 파리·런던 이런 게 나와야 하는 거 아닌가요?

“일종의 반전매력? 이게 매력이면 다행인데.(웃음) 보헤미안적인 삶을 동경하나 봐요.”

요즘 뭐, 고민이라도 있나요?

“아, 마침 그 이야기를 하려 했어요. 신인 시절 완벽하게 연기를 하고 싶어서 스스로를 옥죄였을 때가 많았는데, 나이 들면서 내면적으로도 여유가 생겼어요. 처음엔 좋다가도 이게 또 고민이 되더라고요. ‘너무 느슨해진 건 아닐까? 다시 나를 채찍질해야 하지 않을까?’”

마치 프란츠 카프카의 고민 같네요. ‘나의 모든 고독은 문학의 원천이다.’

“그러게요. 요즘은 너무 마음이 편해져서 불안하더라고요.”

원래 삶이 고통이잖아요. 조만간 고통이 올 겁니다.(웃음)

“으악.”(웃음)

이 비열한(?) 바닥에서 ‘의리’로도 유명하던데요. 10년 넘게 한 기획사하고만 일하게 된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고등학교 3학년 때 우리 대표님을 만났어요. 간혹 성접대, 매니저 사기 고소 등 연예계 사건·사고 소식이 들려올 때가 있잖아요. 그런 면에서 저는 다른 세상에 있었던 것 같아요. 오로지 배우로서만 성장할 수 있게 도와주신 지금 대표님의 은혜를 잊을 수 없죠. 더군다나 같은 여자라서 소통도 잘되고요.”

쉬는 동안에는 주로 뭘 하나요?

“다큐멘터리 보는 걸 좋아해요. <인간극장> <다큐공감> <다큐3일> 등은 거의 다 봤어요. 진짜 현실을 담았으면서 영화보다 더 영화 같잖아요. 사람 사는 이야기를 지켜보며 위로도 받아요.”

이번에 <해적>에서 액션을 선보였잖아요. 앞으로 또 어떤 스타일의 연기를 해보고 싶나요?

“다큐를 좋아한다고 했는데, 영화 <비긴 어게인> <원스>처럼 일상적이고 자연스러운 연기를 해보고 싶어요. <블루 재스민>같은 로맨틱코미디도 다시 한 번 해보고 싶어요. 우디 알렌 감독의 연출도 좋았지만 배우 케이트 블란쳇이었기에 그런 특별한 캐릭터가 나온 것 같아요.”

어느덧 충무로의 터줏대감이 돼가고 있는데요. 한국 영화계에 바라는 점이 있나요?

“충무로가 여배우의 잠재력을 충분히 이용했으면 좋겠어요. 현재 여배우가 나올 만한 다양한 작품이 많지 않아요.”

관객은 가장 소중한 존재


▎영화 <해적>의 한 장면. 해적단 단주 여월 역으로 처음 액션 연기에 도전했다. 손예진은 몸을 사리지 않는 연기를 선보이며 800만 관객 영화의 배우 대열에 올랐다.
어떤 내용의 작품이 만들어지면 좋을까요?

“모성과 우정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델마와 루이스> <싱글즈>처럼 여자들이 공감할 만한.”

롤모델이 있나요?

“메릴 스트립. 어떻게 그런 연기를 하죠? 한편으로는 다양한 연기를 선보일 수 있는 할리우드 시스템이 부럽기도 해요. 앞서도 말했지만 우리도 여배우들이 할 수 있는 작품의 폭이 지금보다 넓어지고 배역도 다양해졌으면 해요. 물론 배우로서도 색다른 노력이 필요할 것 같아요. 사실 저부터가 쉽진 않더라고요. 그래도 주연이나 어떤 한 작품에 몰입하기보다는 조·주연 따지지 않고 다양한 역에 도전하고 싶어요.”

이번에 중국 영화 <나쁜 놈은 반드시 죽는다>로 세계무대에 진출한다고 들었어요.

“사실 이전에도 중국이나 글로벌 작품 제의는 자주 받았었는데 사실 그렇잖아요, 연기할 때 언어가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하거든요. 한 예로 제가 중국어를 잘하지 못하는데 섣불리 글로벌 작품에 도전했다간 미완성인 연기를 보이기 십상이죠. 그래서 망설였던 거죠.”

그런데 이번은 왜 생각이 달라졌나요?

“맡은 역이 제주도에 사는 한국 여자에요.(웃음) 언어적인 부분도 해결됐고 무엇보다도 요즘 배우들이 글로벌 작품에 도전하잖아요. 굉장히 멋지다고 생각해요. 새로운 세상에서 또 다른 사람들과 함께하는 거니까요. 그리고 저도 이젠 나이도 들었고 여유가 생긴 것 같아요. 즐길 수 있는 상황이 된 거죠.”

네? 아직 30대 초반이잖아요.

“젊은 걸까요?”

왜 이러세요. 여기서 무너지시면 안 됩니다. 그럼 저는 어쩌라고요.

“하하.”(웃음)

배우로서 특별히 조심하는 부분이 있나요?

“우리나라는 한 번의 실수가 평생을 좌우하는 것 같아요. 특히 여배우에겐 단순 가십이 죄가 되어버릴 수도 있거든요. 그래서 언제부턴가 모든 행동에서 절제하는 게 습관이 됐어요. 안 좋아질 수 있는 상황을 애초에 차단한다고 할까? 그래도 20대 시절보단 많이 편해진 것 같아요. 다행히 지금은 관객과 어느 정도 신뢰가 쌓였다는 느낌이 들어요. 앞으로 연기적인 측면에서도 그렇고 인간적으로도 신뢰를 줄 수 있는 배우가 되고 싶어요.”

<연애시대>가 있는 한 기존의 여성 팬들은 늘 예진 씨를 응원할 것 같은데요. 일단 저부터가.(웃음) 지금도 예진 씨가 <연애시대>의 은호로 보여요. 앞으로 ‘친일’만 하지 않는다면 거지발싸개 같은 실수를 해도 용서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거지발싸개? 오랜만에 듣네요.(웃음) 그러게나 말이에요. 저도 <연애시대> 같은 작품은 다시 한 번 해보고 싶어요.”

그러고 보니 딱 이 맘 때였네요. 2006년 4월 초에 방영했으니까. 그때 그 작품 보면서 참 행복했는데. 예진 씨는 행복이 뭐라고 생각해요?

“행복이라…. 그런 거 아닐까요? 어딘가의 오아시스마냥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일상 속에 어우러져 있는 것 같아요. 조카가 여섯 살, 일곱 살이거든요. 조카들이랑 놀 때가 제일 행복해요. 친한 언니들과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도 정말 좋아해요.”

행복에 대해 말하는 좋은 기운이 느끼네요. 그 기운 그대로 담아, 끝으로 관객에게 하고픈 말이 있다면?

“배우랍시고 제 멋대로 저 하고픈 연기만 할 순 없다고 생각하거든요. 관객이 허락해주지 않으면 배우는 연기적 공간을 잃게 돼요. 감사하게도 관객께서 제가 찍은 영화를 외면하지 않으셨다고 생각해요. 모든 배우 마음이 마찬가지겠지만 단 한 명의 관객이라도 그분의 공감을 이끌어낼 수 있도록 늘 성장하고 싶어요. 관객은 제게 참 소중한 존재에요.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인터뷰이를 만나면 여러 감정을 느낀다. 좀 더 이야기하고 싶은 사람이 있는 반면 글의 재료만 찾고는 서둘러 일어나고 싶은 사람도 있다. 그런 면에서 손예진은 완벽한 전자에 속한다. 왜 그럴까?

그가 동경한다던 보헤미안. 세상의 풍랑에 몸을 맡긴다는 이들의 눈동자에는 천 개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고 한다. 인터뷰 내내 기자에겐 손예진의 눈동자가 그러했다. 밝은데 어둡고, 어두운데 밝았다. 진지한 이야기엔 웃음이 있었고, 가벼움 안엔 무거움도 있었다.

그와의 인터뷰를 마치고 되돌아가던 부암동 내리막길, 3월 말의 공기는 차가웠다가도 어느새 햇볕이 갑작스러운 선의의 반전을 보이고 있었다. 가방 안 수첩에는 ‘손예진, 해와 달이 공존하는 배우’라고 적혀 있었다.

- 글 김포그니 월간중앙 기자 / 사진 김현동 기자

201504호 (2015.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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