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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이슈] 박근혜 정부의 ‘성완종 리스트’ 대처법 - “목숨을 거는 분께 어떻게 물러나라고 하겠나” 

당사자들 결백 주장하는 이상 여론 뭇매 맞더라도 검찰 수사 지켜보기로… 당청 관계 균열, 여론의 이반, 주요 국정과제 추진 차질 등 정치적 타격 예상 

전직 국회의원이자 기업의 오너가 국무총리를 비롯한 여권 핵심 실세에게 거액을 건넸다는 메모와 육성을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에 총리도 목숨을 내놓겠다며 결백을 호소하는 우스꽝스러운 사태가 대한민국에서 벌어진다. 집권 3년차에 접어든 박근혜 대통령에게 최악의 상황이 조성되고 있다.

▎지난 2월 17일 청와대 총리 임명장 수여식 후 행사장을 나서고 있는 박근혜 대통령과 이완구 국무총리. 불과 두 달 만에 이 총리는 직무 정지 및 총리직 사퇴 요구에 직면했다. / 사진·중앙포토
“인적 개편? 현재 그 문제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검찰에서) 뭐가 나와야지 개편을 하든가 말든가 하지. 총리는 (돈 받은 게 사실이면) 자기 목숨을 내놓겠다고 하지 않았나. 그런 분께 자리에서 물러나라고 하는 건 얘기가 안 된다. 현재로서는 총리는 둘 중 하나다. 계속 가든지, 목숨을 내놓든지….”

박근혜 대통령이 남미 순방에 나서기 하루 전인 4월 15일 밤 청와대의 한 핵심 관계자는 다소 격앙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청와대가 ‘성완종 리스트’의 최대 쟁점 인물로 떠오른 이완구 총리의 사퇴를 종용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말이다. 본인이 사퇴하면 몰라도 대통령이 사퇴를 언급할 계제가 아니라는 뉘앙스가 깔렸다. 박 대통령 의중에 정통한 것으로 알려진 이 관계자는 꽉 막힌 ‘성완종 리스트’ 정국에 아주 답답하다는 듯 대화 도중에도 여러 번 한숨을 내쉬었다. 총리의 자진 사퇴 여부에 대해서는 “모르겠다”고 말끝을 흐린 그는 향후 대응방침과 관련해 “우리는 거리낌이 없으며 정도(正道)로 갈 것”이라고 단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이번 파문에 연루된 여권 관계자들의 거취를 일방의 주장과 소문에 근거해 결정하진 않을 것이며, 검찰의 수사 결과를 지켜보면서 문책 여부를 결정한다는 것이다.

청와대는 사건 초기 리스트에 오른 당사자들에게 사실 여부를 심도 있게 확인했다고 전해진다. 특히 이병기 대통령 비서실장,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은 박 대통령과 가장 가까운 관계이므로 정확한 석명(釋明)이 요구됐을 법하다. 거론된 인사들은 펄쩍 뛰었다고 한다. 처음 언론에 이름이 나던 날 김기춘 전 실장은 청와대로 먼저 전화를 걸어와 “내가 참 기가 막힌다. 명백하게 말하건대 결단코 받지 않았다”며 결백을 호소했다는 것이다. 청와대는 당사자들이 혐의를 강하게 부인하는 마당에 섣불리 조치를 내릴 수 없는 입장에 서게 된 듯하다. 청와대 한 관계자는 “전화상으로 전해지는 당사자들의 음성과 발언을 들으면서 ‘아, 이것은 (거짓이) 아니구나’라는 느낌이 와 닿았다”고 말했다.

4월 9일 고(故)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이 스스로 목숨을 끊기에 앞서 했던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와 ‘성완종 리스트’로 불리는 메모에서 현 정부의 핵심인사들의 금전수수 의혹을 제기함으로써 여권이 발칵 뒤집혔다. 제 1의 타깃인 이완구 총리를 비롯해 이병기 대통령비서실장, 김기춘·허태열 전 대통령비서실장, 유정복 인천시장, 홍문종 새누리당 의원, 홍준표 경남도지사까지 도매금으로 도마에 올랐다. <경향신문>이 인터뷰 녹취록 전문을 인터넷에 공개한 4월 15일까지 전 국민의 눈과 귀는 온통 ‘성완종 리스트’ 에 쏠렸다. 이 과정에서 여론의 직격탄은 청와대가 맞았다. 도덕성에 심대한 타격을 입은 것은 물론이고, 집권 이후 최대 위기로까지 내몰리는 듯했다. 지지율도 떨어졌다. 여론조사기관 리얼미터가 공개한 4월 둘째 주 여론조사 결과 박 대통령 국정지지율은 5주 만에 40% 밑으로 내려갔다.

청와대 발목 잡는 현기환 제명 트라우마


▎‘성완종 리스트’ 파문이 불거진 4월 15일 국회에서 열린 새누리당 최고중진연석회의. 이재오 의원 (오른쪽)이 이완구 총리의 사퇴를 요구했다. / 사진·중앙포토
세상의 관심은 박 대통령의 입장 표명에 집중됐다. 그 답은 4월 15일 또렷한 윤곽을 드러냈다. 박 대통령은 이날 세월호 1주기 관련 현안점검회의에서 ‘성완종 리스트’ 의혹과 관련, “부정부패에 책임이 있는 사람은 누구도 용납하지 않을 것이고, 국민도 그런 사람은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나아가 “이번 기회에 우리 정치에서 과거부터 현재까지 문제가 있는 부분은 정치개혁 차원에서 완전히 밝힐 필요가 있다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부패척결’과 ‘정치개혁’이 키워드다. 박 대통령은 이 총리 거취 문제는 언급하지 않았다. 더불어 박 대통령은 “한편으로는 국민의 혈세를 낭비하는 부패문제를 뿌리 뽑고 그것을 계속해서 중단 없이 철저하게 진행해야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정치개혁을 이루는 이 두 가지를 제대로 해내는 것이 우리의 소명”이라고 강조했다.

이와 관련해 청와대측은 “이 총리를 비롯해 ‘성완종 리스트’에 올라 있는 측근 인사의 비리가 드러날 경우 예외 없이 법과 원칙에 따라 처리하겠다는 정면돌파 의지를 강하게 표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청와대측은 또 “리스트에 오른 인사들 중 비위 사실이 드러나면 감싸지 않겠다는 뜻이거니와 불필요한 의혹이 확대재생산되는 걸 차단하겠다는 뜻도 담겼다”고 덧붙였다. 강하게 혐의를 부인하는 당사자들의 주장을 일단 존중하되 검찰수사 결과에 따른 책임은 엄정히 묻는 쪽으로 가닥을 잡은 것이다. 총리를 비롯한 당사자들이 억울함을 호소하면서 스스로 진퇴를 결정하지 않는 마당에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말로도 들린다. 박명호 동국대 교수는 “대통령은 이 총리로 하여금 버티게 하기도 그렇고, 그렇다고 대안도 없어 물러나게 하기도 어려운 처지”라고 말했다. 이런 상황을 뒤로하고 박 대통령은 4월 16일 9박12일간의 남미 4개국 순방길에 올랐다.

이 같은 대응 방침이 나오기까지는 과거 박 대통령과 새누리당이 겪은 시행착오에 대한 반성도 일정한 영향을 줬다는 전언이다. 다름 아닌 현기환 전 의원의 3억원 수수 의혹사건과 그 후의 제명조치다. 친박계인 현기환 전 의원은 2012년 4월 총선 과정에서 현영희 당시 국회의원(비례대표)으로부터 공천 대가로 3억원을 받았다는 의혹을 받았다. 이때는 박근혜 대통령이 비대위원장으로서 실질적으로 당을 이끌던 즈음이다. 현 전 의원은 선관위에 의해 검찰에 수사의뢰됐다. 이에 새누리당은 그해 8월 최고위원회의 결정으로 현 전 의원을 제명했다. 12월 대선을 앞둔 새누리당이 입게 될 타격을 최소화하려는 취지였다. 그런데 나중에 사태가 엉뚱하게 흘렀다. 현 전 의원이 검찰수사에서 무혐의로 판명 난 것이다. 새누리당은 생사람을 잡은 게 되고, 이듬해 4월 현 전 의원도 복당 절차를 밟는 해프닝이 있었다. 새누리당 지도부는 제보자 말만 믿고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른 게 된다. 청와대 관계자는 “당시에도 현 전 의원은 의혹이 하나라도 사실로 밝혀지면 자결하겠다며 펄쩍 뛰었다”면서 “지금도 당사자들이 똑같이 그런 심경을 호소한다”며 신중 대응모드로 돌아선 배경을 설명했다.

사면초가에 빠진 청와대의 고독한 전쟁


▎1. 지난해 7월 김기춘 당시 대통령 비서실장(왼쪽)과 이병기 국가정보원장이 청와대에서 인사를 나누고 있다. 두 사람은 최근 ‘성완종 리스트’로 인해 곤욕을 치르고 있다. / 2. 2013년 7월 청와대에서 만난 허태열 당시 대통령 비서실장(왼쪽)과 유정복 안전행정부 장관(오른쪽). 두 사람 또한 ‘성완종 리스트’에 이름이 올랐다. / 사진·중앙포토
게다가 박 대통령 측근들은 ‘성완종 리스트’ 파문을 비리 정치인의 실패한 구명로비 관점에서 보기도 한다. 청와대 홍보수석을 지낸 이정현 새누리당 의원이 국회 대정부 질문에서 “이번 논란은 박근혜 정부에서는 로비가 통하지 않았다는 증거”라고 주장한 게 대표적이다. 그는 “한 정부는 로비가 잘 통하는 정부, 또 다른 정부는 로비가 전혀 안 통하는 정부가 있으며 이 차이를 국민은 보고 있다”고도 말했다. 노무현 정부에서는 성 전 회장 특별사면이 두 차례가 가능했던 데 반해 현정부에서는 로비 자체가 원천 차단됐음을 부각시키는 발언이다.

청와대의 한 인사도 “흥분을 가라앉히고 이성적으로 생각해보면 성 전 회장은 결국 여권 실세들이 검찰에 압력을 넣어 자신을 수사선상에서 빼달라고 요구한 것”이라고 규정했다. 그는 이어 “하지만 박근혜 정부에서 그런 압력을 넣었다가는 무사하지 못하다는 점을 다 알기에 그 누구도 감히 나서지 못했던 것”이라고 말했다. 역대 어느 정부가 현정부처럼 특정기업, 특정인 청탁에 이렇게 단호할 수 있었는지 묻고 싶다고 그는 덧붙였다. “심지어 노무현 정부에서도 통한 것으로 보이는 성 전 회장 로비가 박근혜 정부에서는 통하지 않았다는 점에 유의해달라.”

여권은 ‘박근혜 정부에서 실패한 로비’라는 데 방점을 찍는다. 박 대통령의 시선도 같은 방향을 향했다. 박 대통령은 4월 15일 세월호 1주기 관련 현안점검회의에서 ‘과거에서 현재까지 문제가 있는 부분’을 언급함으로써 ‘성완종 리스트’ 검찰수사를 현 정부의 사안으로만 국한하진 않겠다는 의향을 내비쳤다. 여권에서는 성 전 회장이 두 차례의 사면을 받은 노무현 정부 시절의 문제점도 들여다봐야 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인다. 과거정부를 포함하는 정치권 적폐를 일소하겠다는 의지이자, ‘성완종 리스트’를 정쟁의 도구로 활용하려는 야권에 보내는 경고의 메시지로도 풀이된다.

이제 청와대는 사면초가의 고독한 전쟁을 벌어야 한다. 망자의 죽기 전 발언을 산 자의 해명보다 더 신뢰하는 국민여론과 맞서야 한다. 총리 사퇴 등 신속한 사태 수습을 요구하는 새누리당과도 힘겨운 줄다리기가 예상된다. 부정부패 척결이나 공무원 연금개혁, 노사개혁, 공공부문 구조조정, 경제활성화 법안 처리와 같은 박 대통령이 의욕적으로 밀어붙이는 국정 현안은 부득이하게 뒷전으로 밀려난다. 선거 없는 집권 3년차에 국정과제 추진에 매진하려던 박 대통령의 정치 구상도 헝클어지는 등 치러야 할 대가가 엄청나다.

불법 대선자금에 대한 도의적 책임론


▎경찰이 4월 9일 오후 북한산 형제봉 매표소 부근에서 목을 매 숨진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의 시신을 옮기고 있다. / 사진·중앙포토
이번 사건이 박 대통령에게 더욱 뼈아픈 건 대선 자금으로까지 불통이 튀면서 집권 정당성에 대한 시비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이다. 성 전 회장의 언론사 인터뷰 녹취록에는 “대선 자금으로 홍문종 의원에게 2억원의 현금 전달했다”는 대목이 나온다. 성 전 회장이 여타 인물들에게도 돈을 건넨 시점이 2012년 대선과 맞물린다는 의혹도 제기된다. ‘성완종 리스트’가 2012년 대선 자금 문제로 비화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이에 홍 의원은 “전혀 사실에 기반하지 않은 황당무계한 소설”이라고 반박했지만 검찰이 진위를 명쾌하게 규명하지 못한다면 세간의 의혹은 수그러들지 않으리란 전망이다.

성 전 회장의 돈이 대선자금으로 흘러들었다면 박 대통령은 ‘신뢰’라는 정치적 자산의 상당부분을 상실할지도 모른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그를 보수진영의 지도자로 우뚝 서게 한 2004년 총선 당시의 천막 당사 기억을 더듬으면 더욱 그러하다는 것이다.

새누리당의 전신인 한나라당은 2002년 대선을 앞두고 국내 대기업 여러 곳으로부터 수백억 원의 돈을 차떼기로 불법 수수, 검찰수사에서 된서리를 맞았다. 탄핵 역풍까지 더해진 2004년 총선을 앞두고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한 당을 구한 이가 당 대표에 오른 박 대통령이다. 박 대통령은 호화 당사를 버리고 천막 당사로 옮기면서 “한 번만 기회를 달라”고 읍소, 121석이라는 의석을 건졌다. 당시 대기업의 돈은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의 대선자금으로 흘러 들어갔다. 이제 성 전 회장의 주장대로라면 적지 않은 돈이 회계장부에 오르지 않은 채 박 대통령의 2007년 경선자금, 2012년 대선자금으로 들어갔을 수도 있다. 황태순 정치평론가는 “검찰 수사에서 일부가 사실로 밝혀진다면 박 대통령이 설령 그 사실을 몰랐다고 쳐도 도의적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고 말한다.

이를 의식한 듯 당청은 대선자금의 경우 야당도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며 반격을 꾀한다.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는 “대선자금은 여야가 없다”며 “야당도 같이 조사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청와대측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2003년 12월 한 발언을 상기시킨다. “노 대통령은 당시 불법 대선 자금 규모가 한나라당의 10분의 1을 넘으면 대통령직을 걸겠다고 했는데 검찰 발표에 따르면 그 규모가 113억원에 달했다. 그런 야당이 2012년 대선자금 운운하는 게 황당할 따름이다.”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는 게 아닌 남의 허물을 들추는 접근법이다. 이는 ‘깨끗한 정치인’, ‘원칙의 정치인’의 이미지를 가진 박 대통령과는 어울리지 않는 군색한 대응 논리다.

당청 관계도 험로를 예고한다. 청와대와 새누리당 소장파는 현실인식에서 극과 극을 달리기 시작했다. 청와대가 ‘성완종 리스트’ 검찰수사를 지켜보자는 입장인데 반해 새누리당 소장파는 관련자들의 즉각적인 직무정지를 요구한다. 새누리당 소장파 김용태 의원은 이병기 대통령 비서실장과 우병우 청와대 민정수석의 직무정지를 박 대통령에게 요청했다. 김 의원은 4월 15일 국회 기자회견에서 지금이 비상한 결단과 단호한 행동이 요구되는 시점임을 강조하면서 “박근혜 대통령은 검찰의 완벽한 독립조사를 위해 대통령 비서실장과 민정수석의 직무를 즉각 중단시켜야 한다”고 밝혔다. 새누리당 소장파 의원들 사이에서는 우병우 민정수석이 무리한 검찰 수사의 몸통이라는 인식이 흐른다. 여당의 한 재선 의원은 “지난해 말, 올 초 이른바 ‘정윤회 문건’ 파동 당시에도 박 대통령 측근 3인방이 실제로 법적으로 문제되는 일을 한 것으로 드러나지 않았지만 계속 시간을 끌다가 상황을 더 악화시켰다”면서 박 대통령이 속전속결식의 사태 수습에 나서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반면, 청와대는 새누리당 일각과 야당이 요구하듯 당장 리스트에 거명된 이들의 직무를 정지하거나 사퇴를 유도하진 않는다는 입장이다. 박 대통령의 한 참모는 “검찰 결과가 나올 때까지 일방적인 주장을 따라 움직이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못박다시피 했다.

“대통령 당내 추종세력 얼마 안 돼”


▎박근혜 대통령은 4월 16일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와 만나 ‘성완종 리스트’ 의혹과 관련해 특검 도입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 사진·중앙포토
앞으로는 여권이 단일대오를 형성하기가 쉽지 않아 보인다. 내부의 동조 세력이 그리 많지 않다는 말이다. 예전엔 ‘정윤회 문건’ 파동과 같은 청와대발 악재가 터져도 새누리당에까지는 직접 불길이 옮아가지는 않았다. 청와대 주도의 정국운영 구조에서 여당은 상대적으로 뒷전이었고 정서적으로 분리돼 있었던 까닭이다. 하지만 이번 건은 파장이 워낙 클 뿐만 아니라 현 정권을 만드는 과정에서 발생한 일이어서 정부 여당의 존립기반을 흔든다. 의혹을 받는 주체가 대부분 새누리당 소속 인사들이어서 대통령에 대한 평가가 당의 대한 평가에 직결된다. 여론조사기관 리얼미터의 4월 둘째 주 여론조사 결과 새누리당은 2012년 이후 최저수준인 33.8%를 기록, 야당에 4.2%포인트 차로 추격당했다. 윤희웅 오피니언라이브 여론분석센터장은 “새누리당 내에서 청와대, 친박계와 결별을 시도하거나 선긋기를 통해 당이 입을 타격을 최소화하려는 흐름이 나타날 것”이라고 전망했다. 즉 여당이 주요 의사결정에 목청을 높이게 되면서 당정 간 갈등이 심화된다는 것이다. 이는 여권 전체 지지기반의 이완, 위축으로 이어질 공산이 크다는 게 윤 센터장의 분석이다.

새누리당의 고위 관계자는 얼마 전 익명을 전제로 당내 여론을 다음과 같이 전했다. “앞으로 보수가 굉장히 힘들어지는 것 아닌가. 새누리당에 150명이 넘는 의원이 바보가 아닌 이상 누구나 느끼는 바다. 당의 변화 나아가 당청 관계의 변화에 대한 욕구가 아주 강하다. 박 대통령과 친박 핵심인사들의 스타일로 볼 때 이런 변화 욕구를 계속 억누를 것이다. 친박계는 전당대회에서 패배하고도 아직도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하려고 뭉개고 미적거린다.” 이 고위 관계자가 한 다음 말이 불안한 당내 사정을 더 웅변적으로 말해준다. “박 대통령의 리더십과 노선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세력은 새누리당에 얼마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당이 조용한 건 바로 박 대통령의 국정지지율이 갖는 힘에 눌리기 때문이다. ‘성완종 리스트’ 파문이 터지기 전만 해도 박 대통령의 지지율은 40%선을 웃돌았다. “이 정도면 새누리당 지지자의 상당수가 박 대통령 쪽에 몰려있다고 봐야 한다”는 게 이 관계자의 진단이다. 새누리당 의원들이 박 대통령에게 끊임없이 실망하고, 좌절하면서도 박 대통령 쪽에 설 수밖에 없었던 배경이다.

지지율이 무너지면 당청 관계는 당연히 전환점을 맞는다. ‘성완종 리스트’ 여파가 네 곳에서 펼쳐지는 4·29 재·보선에만 국한될까? 여권 실세들의 대선자금 게이트로 발전하게 되면 내년 총선에 미치는 충격파를 걱정해야 할 판이다. 가뜩이나 판세가 어렵다는 수도권 의원들에게는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다. 새누리당 초재선 의원 모임인 ‘아침소리’ 소속 김영우·강석훈·박인순·이완영·하태경 의원이 공동성명을 통해 “검찰은 성 전 회장의 죽음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통한 문제제기에 절대 눈을 감아서는 안 된다”면서 “검찰은 ‘성완종 리스트’에 대해 즉각적으로 철저히 수사해야 한다”고 반응한 것도 이런 위기의식과 맞닿아 있다.

외부의 시선에 아랑곳 없이 청와대 내부의 표정은 결연하다. 청와대 입장에서도 딱히 방법이랄 게 없다. ‘성완종 리스트’ 사건은 돈을 줬다는 사람이 숨을 거뒀다. 받은 사람이 부인하면 줬다는 사람이 추가 증거를 제시해야 수사에 진척을 보는데 이 사건은 받은 사람이 부인해버리면 더 이상의 추궁이 불가능하다. 검찰의 진실 규명에는 구조적 한계가 있다. 여론은 실세들의 항변보다는 죽음을 앞둔 성 전 회장의 발언을 더 믿는 경향이 있다. 검찰이 처벌할 근거는 없는데 여론이 비등하다면? 정권이 그 화살을 고스란히 맞아야 한다.

만약 검찰이 혐의점을 발견해서 여권 핵심인사를 사법처리할 경우 정권이 회생 불능 상태에 빠진다. 다음 수순은 극심한 레임덕이다.

정권이 검찰권력 과도하게 행사하다 화 불러

반대로 검찰이 ‘성완종 리스트’ 관련자들을 무혐의 처리한다고 해도 국민 여론은 기본적으로 정치적 고려가 깔린 결정이라고 거부하기 십상이다. 시중에는 경남기업이 그 정도의 돈을 뿌릴 정도면 국내 다른 대기업들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을 것이란 추론이 나돈다. ‘성완종 리스트’가 진실이든 거짓이든 지지율 하락은 불가피한 상황이다. 청와대측도 “그게 현실이고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다”고 수긍한다. 유창선 정치평론가는 “리스트 관련자들의 사법처리 여부와 무관하게 박근혜 정부는 이번 파동을 거치면서 재기 불능의 폐허가 될 것”이라고 전망하기도 한다.

왜 이런 사단이 벌어진 걸까? 과거정권과의 무리한 차별화와 이른바 ‘기획 사정’이 화(禍)를 불렀다고 여권에서는 본다. ‘기획 사정’이란 게 본디 부정부패 척결을 통해 집권 3년차 권력 누수를 막고 국정운영 동력을 확보하는 수단이다. 박근혜 정부의 경우 이른바 ‘정윤회 문건’ 파동의 출구 전략이자 과거 정부 길들이기 전략의 일환이기도 하다는 게 정치권의 시각이다.

이와 관련해 이명박 정부 청와대의 최고위직을 지낸 한 인사는 “레임덕은 누구도 피할 수 없는 현상”이라며 자신의 경험을 이렇게 설명했다. “레임덕은 대응 여하에 따라 당길 수도, 늦출 수도 있다. 청와대와 정권이 ‘일’을 갖고 움직인다면 레임덕은 늦어진다. 반대로 ‘권력’에 의해 움직인다면 당겨지게 마련이다. 박근혜 정부가 성공하려면 청와대가 ‘일’에 의해 움직여져야 한다.”

지금 국면은 청와대가 ‘일’에 의존하기보다는 검찰이라는 ‘권력’에 과도하게 의존하면서 일파만파의 사태를 불러온 측면이 더 도드라져 보인다는 말이다. 물론 성 전 회장이라는 개인의 돌발적인 행위와 진위 규명이 필요한 메모와 육성이 사태를 걷잡을 수 없이 몰아간 건 사실이지만 이른바 무리한 ‘기획 사정’이 지금과 같은 파문을 촉발했다는 점은 부인하기 어렵다.

박 대통령 만들기에 적극 나섰던 이들도 근심스러운 시선으로 현 상황을 주시한다. 박 대통령의 자문그룹으로 불렸던 이른바 ‘7인회’의 한 원로는 현재의 상황을 “정권 최대 위기”라 간주하면서 “예전에는 이런 경우가 없었다”고 안타까워했다. 과거 정권에는 대통령의 아들이 검은 돈을 먹은 일은 있었지만 이처럼 국정 전체의 근간이 흔들리는 상황까지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이 원로는 “오랜만에 총리를 바꾸고, 소통 잘하는 비서실장을 선임해서 안심했는데 ‘성완종 리스트’ 파문이 터지고 보니 박 대통령도 어떻게 보면 참 운이 따르지 않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고 혀를 찼다. 박근혜 대선 캠프에서 활동한 이상돈 중앙대 명예교수는 “박근혜 정부가 3년차에 아무 일을 못하는 사실상 식물정부가 되는 게 아닌가 걱정이 된다”면서 “이번 사건으로 뿌리부터 흔들리는 것 같은데, 내가 생각해도 대통령이 어떤 대책이 별로 없을 것 같다”고 우려했다. ‘성완종 리스트’의 종착역은 어디일까? 이례적이라 할 정도로 장기간의 순방외교에 나선 박 대통령의 고민은 깊어만 간다.

- 박성현 월간중앙 취재팀장

201505호 (2015.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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