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사회.북한.국제

Home>월간중앙>정치.사회.북한.국제

[정치이슈] 비극(悲劇)으로 끝난 ‘1천원의 성공신화’ - ‘떠난’ 성완종, 이완구·반기문 두 잠룡을 쥐락펴락하다 

2003년 경남기업 인수, 한때 2조원대 매출도 기록… 정경유착의 희생양, 대선판도까지 영향 미칠 수도 

최경호 월간중앙 차장 최경호 월간중앙 기자
검찰은 이명박 정부 자원외교 비리의혹의 수사 대상으로 새누리당 의원을 지낸 고(故) 성완종(64) 전 회장의 경남(京南)기업을 겨눴다. 경남기업이 해외석유개발사업 등의 명목으로 정부에서 빌린 330억여 원과 일반융자 130억여 원 가운데 수십억 원이 성 전 회장의 가족 계좌로 흘러 들어갔는지 살폈다. 성 전 회장은 4월 8일 기자회견을 열고 억울함을 거듭 호소하더니 이튿날 오후 서울 북한산 형제봉에서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됐다. 그는 자살하기 직전 <경향신문>과의 전화 인터뷰에서 이완구 국무총리에게 저주에 가까운 비난을 퍼부었다. 그는 또 반기문 유엔사무총장과 친하다고 주장했다. 성 전 회장, 이 총리, 반 사무총장 모두 충청 출신으로 묘한 관계를 연출한다.

▎고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이 4월 8일 서울 명동 은행연합회관에서 진행된 자원외교 비리의혹 등 검찰조사와 관련된 입장발표 기자회견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다. / 사진·중앙포토
성완종(64) 전 경남기업 회장은 숨지기 전날인 4월 8일 오후 이용희(67·여) 태안군의회 부의장 등 지역 인사 두 명과 만나 1시간쯤 이야기를 나눴다. 이 부의장 등은 성전 회장과는 30년 지기(知己)다.

이 부의장은 “성 전 회장이 이완구 국무총리의 이름을 여러 차례 언급했으며 박근혜 대통령에 대해서도 섭섭한 감정을 드러냈다”고 언론 인터뷰를 통해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성 전 회장은 여러 차례 “난 아니야”라며 결백을 호소했다. 또 “이완구를… 이완구를… 어떻게…”라며 이 총리에 대한 서운함을 감추지 못했다.

4월 14일 추가 공개된 성 전 회장과 <경향신문>의 전화 인터뷰 녹취록(錄取錄)에 따르면 그는 2013년 4월 이완구 총리에게 3천만원의 선거자금을 건넸다. 당시 이 총리는 부여·청양 국회의원 재선거에 새누리당 후보로 출마했다. 이에 대해 이 총리는 “6하 원칙에 따라 돈 받은 증거가 나오면 총리직 정도가 아니라 제 목숨을 내놓겠다”고 강하게 부인했다.

새누리당 관계자는 사견을 전제로 “두 사람이 인간적으로 얼마나 친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모르는 사이는 아닐 것”이라며 “다만 고시 출신의 초(超)엘리트였던 이 총리와 초등학교 중퇴 학력의 사업가였던 성 전 회장 사이에 ‘정서적 간극’은 작지 않았던 것으로 안다”고 귀띔했다.

성 전 회장은 이완구 총리가 충남지사를 맡고 있던 시절(2006년 7월~2009년 12월) 충남도가 발주한 안면도 개발사업에서 경남기업 컨소시엄이 2위에 그치자 충남도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성 전 회장 측 사람들은 이 총리가 ‘부패와의 전쟁’을 선포한 뒤 자신이 검찰 수사를 받게 된 상황을 ‘보복’이라고 말한 적도 있다고 전했다. 이에 대해 이 총리 측은 “성 전 회장이 ‘검찰 수사와 부패와의 전쟁 대국민 담화가 관련 있는 것 아니냐’고 오해한다는 얘기는 들었다”고 밝혔다.

이와 함께 충청권 지역정가에서는 “성 전 회장이 차기 유력 대선주자 중 한 사람으로 거론되는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과의 친분 때문에 해를 입은 것 아니냐”는 이야기가 나돌고 있다. 반 총장의 동생 기상 씨는 7년째 경남기업의 고문을 맡고 있다. 녹취록에서 성 전 회장은 “내가 반기문을 도우니 이완구가 수사를 한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불우했던 어린 시절, 드라마 같은 자수성가


▎4월 14일 국회 본회의 대정부질문 때 상념에 잠겨 있는 이완구 국무총리. / 사진·중앙포토
야당 일각에서는 “성 전 회장이 반 총장의 대선 출마와 관련해 역할을 자청하면서 정권의 표적이 됐다”는 주장도 나온다. 동교동계 맏형인 권노갑 새정치민주연합 상임고문은 지난해 가을 ‘반기문 야당 대선후보론’을 제기하면서 자신과 접촉했던 인물로 성 전 회장을 지목했다. 같은 당 박지원 의원은 “성 전 회장은 ‘뉴 DJP연합’의 형태로 호남과 충청이 손잡으면 차기 대선에서 승리할 수 있다며 우리 쪽(동교동계)을 잡으려 했지만 내가 틀었다(반대했다)”고 말했다.

성 전 회장의 수사를 맡았던 임관혁(사법연수원 26기) 서울중앙지검 특수1부장이 논산 출신이라는 점도 충청권 지역 정가에서는 큰 관심사였다. 임 부장은 지난해 말 ‘정윤회 문건 유출사건’ 수사를 담당한 뒤 사실상 대검중수부 성격을 띠고 있는 특수 1부로 영전했다.


▎눈을 감은 채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는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 사진·중앙포토
임 부장은 4월 3일 성 전 회장 소환조사 당일 조사 전 사무실에서 차를 한 잔 내며 “고향 사람끼리 이렇게(검사와 피의자 사이) 만나 안타깝다”고 말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이에 성 전 회장은 “제 생명을 걸고라도 제 이름 석자를 더럽히지 않겠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익명을 원한 새누리당 관계자는 “성 전 회장은 사업가답게 여야 가리지 않고 두루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려 했던 사람이지 특정 정파의 사람이 아니었다”며 “그런데도 최근 들어 자신을 친이계로 낙인 찍고 벼랑끝으로 몰아붙이려 했던 사람들에 대해 원망과 분노를 금하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말했다.

성 전 회장의 어린 시절은 불우했다. 아버지가 새어머니를 들인 바로 다음해, 성 전 회장은 초등학교 중퇴를 선택했다. 서울로 ‘식모살이’를 하러 간 엄마를 찾아나선 그의 호주머니에 든 돈은 달랑 100원뿐이었다.

그는 서울에서 신문배달, 약국 심부름 등을 하며 7년 동안 모은 돈을 쥐고 고향으로 돌아와 집을 마련했다. ‘1천원’을 밑천삼아 화물차 영업을 시작한 성 전 회장은 26세 때 200만원을 마련해 건설업에 뛰어들었다. 1982년 대아건설, 2003년 경남기업을 인수하면서 한때 매출 2조원을 기록하기도 했다. 성 전 회장의 이름 석자 앞에는 이때부터 ‘입지전적 인물’이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충남 서산 태생인 성 전 회장은 충청의 맹주(盟主)였던 김종필 전 국무총리와도 가까웠다. 그는 김 전 총리의 호를 딴 ‘운정회(雲庭會)’의 창립(2013년) 부회장이다. 김 전 총리가 지난 2월 부인상을 당했을 때 빈소를 가장 오래 지킨 사람들 중 한 명이 바로 성 전 회장이다.

사업이 잘되자 성 전 회장은 정치권과 자연스레 교분을 맺었다. 2007년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20대 후반의 젊은 나이에) 사업이 커져 서산의 자가용 4대 중 1대를 내가 타고 다녔다. 나를 지역 유지로 알아주면서 지역 국회의원들과 친해졌고 이들이 편의를 봐줘서 충청에서 대표 건설업체로 커갔다”고 했다.

실제로 1992년 9월 국정감사에서는 김충조 전 민주당 의원이 성 회장이 대표로 있던 대아건설이 1988년부터 1992년까지 만 4년 동안 충남지역 관급공사 51건을 땄다는 자료를 발표했다. “대아건설이 정·관계의 도움으로 경쟁사들을 따돌리고 관급공사를 독식하다시피 한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됐던 것이다.

몇 차례 위기에도 큰 흔들림이 없었던 성 전 회장은 2000년 16대 총선부터는 여의도 입성을 타진했다. 한 정치권 인사는 “자수성가형 기업인들은 더 큰 꿈을 위해 정치권력까지 쥐고 싶어하는 경우가 다반사”라며 “충남지역 계룡건설 회장이었던 이인구 씨가 13·15대 국회의원을 지낸 것도 성 전 회장에게는 자극제가 됐을 것”이라고 귀띔했다.

야야 가리지 않은 ‘마당발 인맥’ 쌓아


▎2012년 10월 25일 국회 정론관에서 이인제 선진통일당 대표와 황우여 새누리당 대표를 비롯한 양당 의원들이 합당 기자회견 후 서로 손을 맞잡고 있다. 앞줄 왼쪽부터 당시 선진당 성완종 원내대표, 염홍철 대전시장, 이인제 대표, 새누리당 황우여 대표, 정우택 최고위원, 서병수 사무총장.
1991년부터 서산장학재단을 운영한 성 전 회장은 그동안 2만8천여 명의 학생을 도왔다. 덕분에 지역에서는 신망이 매우 높다. 2000년부터 그가 회장을 맡고 있는 충청포럼은 폭넓은 인맥을 다지는 발판으로 기능했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이회창·정운찬 전 총리, 심대평 지방자치발전위원장, 안상수 전 인천시장 등은 충청 출신 정·관·언론계 인사로 구성된 ‘충청포럼’의 주요 회원이다.

2000년 결성된 충청포럼은 회원 수 3500명에 전국적으로 10개 지부와 100여 개의 지회를 갖추고 있다. 새정치민주연합에서는 박병석 의원, 권선택 대전시장 등이 이 모임의 회원이다. 성 전 회장이 남긴 비망록에 따르면 그는 충청포럼을 이끌었을 뿐 아니라 ‘백소회(百笑會, 백제의 미소)’ 모임에도 적극적이었다. 이 모임은 1992년 출범한 충청권 인사들의 친목단체로 이회창·강창희·이인제·김용태·정진석·홍일표·권선택·오제세·박병석·윤여준 등 전·현직 의원이 주요 회원이었다.

반기문 총장은 올해 2월 모임 때 총무(임덕규 전 의원)를 통해 새해 메시지를 보냈고, 안희정 충남지사는 3월 모임을 후원했다. 충청지역 잠룡(潛龍)들에게 백소회는 반드시 챙겨야 할 모임으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다.

이완구 총리와 그의 측근인 최민호 총리 비서실장도 이 모임에서 활동했다. 이 총리는 충남지사 시절이던 2007년 1월 모임에 나와 지역 현안인 서천·장항 산업단지 개발문제와 관련해 “정부가 못하겠다는 입장인데 결코 호락호락 넘어가지 않겠다”고 말해 눈길을 끌었다. 이 총리는 충청포럼과는 거리를 뒀지만 백소회에는 참여했다.

신한국당 재정위원을 지낸 성 전 회장은 2000년 16대 총선에서 당을 바꿔 김종필 총재의 자유민주연합에 공천(서산·태안)을 신청했다. 말을 갈아타면서까지 금배지를 달려 했으나 공천 과정에서 낙마하고 말았다. 그는 2004년 17대 총선에서 김종필 총재가 이끄는 자민련 비례대표 두 번 공천을 받았지만 정당 득표율 저조로 또다시 배지를 다는 데 실패했다.

보수세력과 가까운 성 전 회장이지만 고 노무현 전 대통령시절 두 번이나 특별사면을 받았다. 성 전 회장은 2002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자민련에 불법 정치자금 16억원을 준 혐의로 구속기소돼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그는 2005년 5월 노 전 대통령의 측근인 고 강금원 전 창신섬유 회장 등과 함께 특별사면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당시 참여연대는 “기업인 사면은 특혜”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노 전 대통령의 임기 마지막 해이던 2007년에는 ‘행담도 개발 비리사건’에 연루돼 징역 6개월과 집행유예 1년을 선고 받았지만 한 달 뒤 다시 특별사면 대상자가 됐다. 이를 두고 새누리당은 “참여정부 실세였던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가 직접 나서 진실을 밝혀야 한다”고 주장하는 반면 새정치민주연합은 “당시 한나라당의 의견을 반영한 결과였다”고 반박한다.

이명박·박근혜 대통령 당선 위해 매진


이명박 전 대통령 시절 해외순방에 동행하며 주요 인사들과 두루 교분을 나눈 성 전 회장은 2012년 새누리당 공천(서산·태안)을 신청했다 고배를 들었다. 당시 민주통합당 일각에서는 “차라리 성 전 회장을 민주당 후보로 영입하자”는 말까지 나왔다.

무소속 출마를 결정한 그는 후보 등록 하루 전날 자유선진당 ‘명찰’을 달게 됐다. 당초 지역구 후보는 변웅전 전 의원이었지만 당은 돌연 성 전 회장으로 후보를 바꿨다. 변 전 의원은 비례대표 4번 공천을 받았지만 선진당의 지지율을 봤을 때 당선은 극히 어려웠다. 충청권 의원들 사이에서는 “역시 성완종”이라는 말이 나왔다.

2012년 4·11 총선을 통해 꿈에 그리던 배지를 달았지만 기쁨을 누린 시간은 2년 남짓이었다. 대법원은 지난해 6월 26일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성완종 의원에 대해 벌금 500만원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공직선거법 위반 등의 혐의로 벌금 100만원 이상을 선고받을 경우 의원직을 상실하게 된다. 그는 2012년 4월 총선을 앞두고 서산·태안지역 주민들을 대상으로 무료 음악회를 열고, 충남 자율방범연합회에 1천만원을 기부한 혐의로 기소됐다.

성 전 회장의 빼어난 수완 덕분인지 경남기업은 ‘사업 확장→경영 부실→워크아웃(기업구조 개선작업)을 통한 채권단의 자금 지원’을 반복했다. 2009년 1월부터 2011년 5월까지 진행된 워크아웃을 졸업한 지 2년5개월 만인 2013년 10월 또다시 워크아웃을 요청했고, 주채권은행인 신한은행은 다시 승인을 결정했다.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다른 부실 건설사의 대표들이 지위를 박탈당한 채 법정관리를 받은 것과 달리 성 회장은 대주주 자격을 유지하면서 채권단의 추가지원을 끌어냈다.

감사원은 최근 감사에서 금융감독원이 경남기업의 세 번째 워크아웃을 승인하도록 신한은행에 압력을 행사한 정황을 포착했다. 세 번째 워크아웃 승인 당시 성 전 회장은 금융감독원 등을 담당하는 국회 정무위원회 소속 의원이었다. 부실기업의 회장이 자신이 경영하는 기업의 회생과 밀접한 국회 상임위에 배치된 것이었다.

숨진 성 전 회장에게서 발견된 메모에 거론된 8명의 인사 가운데 홍준표 경남지사를 제외하면 7명이 친박계다. 이를 두고 정치권에서는 “성 전 회장이 검찰 수사를 받는 상황에서 구명(救命) 로비 대상이었던 친박 핵심들만 적어놓은 것 아니냐”는 말이 나온다.

성 전 회장은 4월 8일 기자회견에서 “난 MB(이명박)맨이 아니다. MB정부의 피해자”라면서도 “저는 (2007년) 대선(본선)에서 이명박 후보 당선을 위해 열심히 노력했고, 그 결과 이명박 정부가 출범했다”고 말했다.

마당발답게 성 전 회장은 친박계와도 교분이 두터웠다. 그는 기자회견에서 “2012년 대선 과정에서 박근혜 후보를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다”며 간접적으로 서운함을 드러냈다.

파렴치범으로 몰리자 ‘결심’ 굳힌 듯


▎고 성완종 전 회장의 발인식이 4월 13일 충남 서산의료원 장례식장에서 엄수됐다. 성 전 회장은 서산시 음암면 도당리에 있는 부모 묘소 옆에 묻혔다. / 사진·중앙포토
성 전 회장은 2012년 대선 정국 때 선진통일당 원내대표를 맡고 있었다. 당시 이인제 당대표는 새누리당과의 합당에 반대했던 반면 성 전 회장은 적극적인 ‘합당파’였다. 지역구 3석, 비례대표 2석에 불과한 ‘미니정당’에 머물기보다는 새누리당과 합쳐 보다 큰 그림을 그리는 게 당의 미래를 위해 도움이 될 거라는 판단이었다. 합당 추진 때 카운터파트(Counterpart)가 서병수 사무총장(현 부산시장), 이한구 원내대표였다.

성 전 회장의 주변인사들에 따르면 그는 검찰의 칼끝이 자신은 물론, 가족들까지 겨냥해오자 3월부터 죽음을 준비하는 듯한 행동을 했다고 한다.

한 측근에 따르면 성 전 회장은 4월 8일 기자회견을 마친 후 가족들에게 잇따라 전화를 걸어 급히 만난 것으로 전해졌다. 성 전 회장은 눈물의 기자회견을 마친 그날 밤 11시쯤 자신을 수행한 측근에게 휴대폰을 건네며 “큰아들의 번호를 찍어달라”고 요청했다.

성 전 회장이 당시 소지한 휴대폰에는 큰아들 승훈 씨의 전화번호가 저장돼 있지 않았던 터라 측근을 통해 통화한 뒤 서울 청담동 자택으로 불러 한 시간 가량 만난 것이다. 승훈 씨는 다음날 아버지가 영장실질심사 후 본격적인 검찰 조사를 받게 되면 당분간 만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하고, 아버지와 함께 식사하기 위해 아내와 4월 9일 오전 청담동으로 이동하던 중 유서 발견 소식을 들은 것으로 알려졌다.

성 전 회장은 4월 8일 오후 셋째 동생 일종 씨에게도 전화를 걸어 오후 5시30분부터 1시간가량 서울 신정동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성 전 회장은 동생을 붙들고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한 것으로 전해졌다.

성 전 회장은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 수일 전부터 가까운 이들을 챙겼다. 한 측근은 “일이 있기 며칠 전, 수행하는 이들에게 ‘비서들한테 밀린 월급이 있으면 잘 챙겨줘라’고 말했다”고 밝혔다. 이어 난데없이 “요즘 해가 몇 시에 뜨느냐”고 물었다. 이 측근은 “갑작스러운 질문에 답을 못했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해가 뜨기 전에 집을 나설 생각으로 물어본 것 같다”고 말했다.

측근·지인들 “수사기관 믿기 어려워”


성 전 회장은 현금 50만원을 뽑아달라고도 했다. 이 측근은 “항상 운전해주시는 분이 있기 때문에 택시를 타는 것도 아닌데 현금을 달라고 해 의아했다”고 말했다. 성 전 회장은 자살 당일 택시를 타고 이동했으며 성 전 회장의 지갑에서는 현금 8만원이 발견됐다.

앞서 성 전 회장은 3월 21일 어머니 19주기에서 평소처럼 서산 중앙성결교회가 아닌 어머니 산소 옆에서 추모 예배를 드렸다. 추모제에 참석한 한 인사는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어 성 전 회장의 비서에게 ‘어르신 잘 모시라’고 당부했는데 그예 이런 일이 벌어졌다”며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 추모제 3일 전인 3월 18일 검찰은 경남기업을 압수수색했고, 이튿날인 3월 19일 성 전 회장은 경영권 포기를 전격 선언했다.

이 같이 자살을 암시하는 행동을 수일 전부터 보인 것은 성 전 회장이 메모지에 올라 있는 인물을 비롯해 친분 있는 인사들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이 외면당한 데 따른 좌절감으로 분석된다. 실제로 성 전 회장은 메모지에 있는 인물들뿐 만 아니라 유력 인사들과 직접 만나거나 통화를 시도했다.

하지만 대부분 답이 없거나 “조사에 성실하게 임하라”는 말뿐이었다. 메모지에 이름이 올라 있는 이병기 청와대 비서실장은 “전화통화에서 성 전 회장이 도움을 요청했지만, ‘당당하게 수사를 받으라’고 했더니 섭섭함을 드러냈다”고 밝혔다.

허태열 전 청와대 비서실장에게는 수 차례 통화를 시도한 뒤 ‘급합니다. 전화 받아주세요’라는 문자메시지까지 남겼으나 답이 없었다. 성 전 회장은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에게도 호소했다. 김 대표는 4월 11일 기자회견을 통해 “성 전 회장이 사망 4, 5일 전 전화를 걸어 ‘억울한 일을 당하고 있다’고 했다”며 “검찰이 없는 일을 뒤집어씌울 수 있겠느냐, 변호사 대동해서 잘 수사받으라고 얘기했다”고 밝혔다.

성 전 회장의 측근과 지인들은 수사기관에 극도의 불신을 품고 있다는 후문이다. 한 지인은 “<경향신문> 기자와의 인터뷰 녹취가 없었다면 검찰이나 경찰이 성 전 회장의 상의 주머니에서 발견된 메모지를 공개했을지도 의문”이라며 “검찰이 메모지와는 무관한, 해외 쪽 건설을 맡았던 경남기업 전 대표를 소환·조사한 것도 ‘보여주기식’ 수사에 그치는 것 아닌지 모르겠다”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성 전 회장의 한 지인은 “검찰과 정치권 일부에서 성 전 회장을 몰염치한 사람으로 취급하자 극단적인 선택을 결심한 것 같다”면서 “특히 자신이 직접 장학금을 전달한 2만8천여명의 학생에게 파렴치범으로 각인됐다는 자괴감을 이기기 어려웠을 것이다. 필생의 과업인 장학재단과 학생들을 생각해서 ‘항거’했다고 본다”고 덧붙였다. 재계와 정계를 넘나들며 마당발 인맥을 관리해온 그가 정작 세상을 떠날 때는 혼자 쓸쓸하게 생을 마감했다는 점은 씁쓸함을 남긴다.

- 최경호 월간중앙 기자

201505호 (2015.04.17)
목차보기
  • 금주의 베스트 기사
이전 1 /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