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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리포트] 한일 갈등의 최전선 야스쿠니 신사를 가다 - 총리 공식참배 이어 천황도 참배하나 

A급 전범 합사에 반대한 천황도 일본 내 여론에 고심 … 한국, 반대 앞서 논리와 팩트로 압도하고 세계 여론을 주도할 역량 다져야 

유민호 월간중앙 객원기자·‘퍼시픽21’ 디렉터

▎야스쿠니 신사 정문. 언덕 위에 자리해 아침·저녁으로 햇살을 느낄 수 있다. 천황의 거주지에서 걸어서 불과 10분 거리다.
벚꽃 개화일은 봄을 알리는 신호탄에 해당된다. 해마다 3월이 되면, 신문·방송을 통해 실시간으로 ‘중계’된다. 개화와 만개에 관한 예상 일자가 지역에 따라 미리 공개된다. 벚나무의 미래를 족집게처럼 집어내는 역할은 기상청에 있다. 표준목과 표준지역은 벚꽃 개화 시기를 얘기할 때 주목해야 할 부분이다. 벚나무는 서울 곳곳에 흩어져 있다. 수많은 벚꽃 가운데 어느 지역 어느 나무가 개화일의 표준으로 활용되는 것일까? 답은 종로구 송월동에 있는 서울기상관측소 내 표준목이다. 관측소 내 벚꽃 한 개체에서 3송이 이상의 꽃이 피는 시기를 서울 벚꽃 개화일로 정한다.

필자는 한국의 벚꽃 표준목이 서울기상관측소에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 한국인에게 벚꽃은 예민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다. 아름답고 애잔한 꽃이지만, 식민시대 당시의 고통을 떠올린다. 장년층이라면 일본제국주의의 상징이란 꼬리표와 함께 선뜻 마음을 내주기가 어렵다. 1945년 해방 직후 수많은 벚나무가 도끼의 칼날에 사라져 갔다. 벚꽃을 찬미할 경우 나라 팔아먹을 친일파로 분류됐다. ‘사꾸라(さくら)’라는 말은 표리부동 기회주의란 의미를 갖고 있다. 사실 서울에서 벚나무가 가장 많은 곳은 남산 여의도 경복궁 주변이다. 모두 한국을 상징하는 뜻깊은 곳이다. 벚나무가 아무리 많아도, 개화일 관련 표준목으로 삼기는 어려운 ‘의미있는’ 장소다. 국회가 있는 여의도를 벚나무 표준목 공간으로 지정할 수 있을까? 좁은 서울기상청 내 벚나무가 표준목으로 지정된 것은 그 같은 복잡한 심정의 결과가 아닐까?

그렇다면 일본 벚꽃의 표준목은 과연 어떤 공간을 기반으로 하고 있을까? 장소는 천황의 거주지인 황거(皇居)에서 5㎞ 정도 떨어진, 치요타쿠 큐단키타 3초메 1-1(千代田区 九段北3丁目1番1号)이다. 관내 3개의 벚나무가 표준목이다. 도쿄 벚꽃의 개화와 만개에 관한 정보의 출발점은 큐단키타 3초메 벚나무다. 바로 야스쿠니 신사(靖国神社) 내의 표준목이다. 19세기 중엽 막부시대 이래 지금까지 246만6532명의 전몰자를 합사(合祀, 2004년 10월 기준)한 야스쿠니가 도쿄 내 벚꽃 개화와 만개를 알리는 표준공간이다. 한국의 벚꽃 표준목이 여의도나 남산이 될 수 없는 이유는 바로 일본 벚꽃의 표준목이 야스쿠니에서 출발한다는 점에 있다고 볼 수 있다. 남산을 표준목 공간으로 잡을 경우 야스쿠니와 동격으로 처리될 수 있다.

도쿄 벚나무를 대표하는 표준목이 야스쿠니 안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을 때, 한편으로 놀랐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너무도 당연하게도 느껴졌다. 더불어 야스쿠니라는 것이 전몰자 합사(合祀) 공간으로서만이 아닌, 큰 그림으로서의 일본과 일본인을 이해할 수 있는 장소란 판단도 들었다. 간단히 말해, ‘야스쿠니=일본과 일본인, 일본 문화 전체의 압축판’이라 볼 수 있다. ‘벚꽃=일본, 일본인, 일본 문화’이기 때문이다.

야스쿠니에는 전몰자 위패가 없다


▎야스쿠니 신사 본당. 가운데 흰 천의 국화가 천황 문양이다. 전체적인 분위기는 가라앉아 있으며, 어둡고 침울하다.
야스쿠니에 대한 한국인의 심리와 반응은 간단히 집약될 수 있을 듯하다. 크게 보아 두 가지 정도 아닐까?

첫째, A급 전범이 묻힌 곳에 일본 정부관료가 공식 참배한다는 것은 식민지 지배나 전쟁의 책임을 무시하는 태도다. 둘째, 강제로 끌려간 한국인 군인, 군속들을 한국 내 가족이나 한국정부의 허락도 없이 제멋대로 합사해서 운영하고 있다.

야스쿠니에 대한 필자의 관심은 이상의 두 가지 입장에서의 바라본 ‘모범적 역사관’과 무관하다. 과거사에 근거해 야스쿠니를 불온시·적대시하고, 일본 정치가를 비난하는 근거로서의 관심이 아니다. ‘한국과 중국이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야스쿠니 참배를 왜 일본 정치가들은 줄기차게 하는 것일까, 왜 일본인들은 그 같은 정치가들의 행보를 그냥 바라보고만 있을까’라는 것이 주된 관심사다.

사실 한국인이 아는 야스쿠니는 지극히 단편적이다. 가령 야스쿠니를 비난하는 근거로 삼는 한국인 전몰자 합사에 관한 부분을 보자. 한국 내 민족주의 단체들은 한국인 전몰자의 위패(位牌) 반환을 꾸준히 요구해왔다. 이미 세상을 떠난 영혼을 고향에 모시기 위해서다. 그러나 야스쿠니에는 사자(死者)의 이름이나 행적을 적은 위패라는 것이 아예 없다. 합사는 한국인에게는 낯선 의식이다. 복수의 사자(死者)를 하나로 모을 경우, 보통 합장을 하는 것이 한국 문화다. 합장은 합골(合骨)이다. 부모의 합장에서 보듯, 두 사람의 유골을 하나로 합쳐서 만드는 무덤이다. 야스쿠니의 합사는 뼈를 하나로 합치는 것이 아니다. 246만6532명의 전몰자들은 ‘영새보(霊璽簿, 레시보)’라는 명부에 이름을 올리는 수준에서 야스쿠니에 실리게 된다. 뼈가 묻히는 것이 아니라 이름만 실리는 것이다. 명부에는 생전의 소속·계급·직위·훈장 등에 관한 간단한 정보가 실린다.

일본인들은 전쟁에서 죽은 모든 사람을 신(神)으로 받아 들인다. 야스쿠니의 멤버가 되기 전에는 ‘인령(人靈)’이지만, 야스쿠니 멤버에 오르는 순간 ‘신령(神靈)’으로 해석된다. 신분·지위·성별·연령·출신지 관계없이 레시보를 통해 야스쿠니에 실리는 순간 인간에서 신으로 변한다. 한국, 중국에서 야스쿠니 A급 전범자를 신으로 모신다고 비난하지만, 내막을 알고 보면 조금 다르다. A급 전범자만이 아닌, 태평양전쟁에서 억울하게 사라진 한국 출신 군속(軍屬)도 신으로 올라가 있다.

야스쿠니를 대하는 관점으로 필자가 주목하는 부분은 국제무대에서도 통하는 논리와 주장 그리고 팩트다. 한국 내에서나 통하는 우물 안 주장이 아니라, 다른 나라들도 함께 응원하고 동의할 논리·주장·팩트다. 2월 초 야스쿠니에 들른 이유는 바로 그 같은 관점에 기초한 야스쿠니 연구에 있다. 단편적으로 알려진, 한국인의 입맛에 맞는 얘기만이 아니다. 한국인에게 불편하고 듣기 싫은 얘기지만, 세계무대에 통하는 주장을 확산하기 위해서는 먼저 상대를 자세히 알아야 한다. 상대의 논리를 갈파할 경우 대응책이 한층 더 견고해질 수 있다.

야스쿠니를 찾은 것은 평일 오후다. 이미 20여 년 전에 두 차례 들른 적이 있지만, 기억나는 것은 가미카제(神風)에 관한 부분이다. 죽은 조종사 명부를 통해 김(金), 최(崔) 같은 한국인 성(姓)을 발견했다. 사실 당시만 해도 야스쿠니 문제는 동아시아 외교의 중대 현안은 아니었다. 야스쿠니 문제는 간헐적으로 터져 나오는 우익의 정신 나간 소리로 해석됐다. 야스쿠니에 가기 위해 내린 곳은 이다비시(飯田橋)역이다. 야스쿠니 북동쪽에 위치한 역으로, 걸어서 20분 정도 걸린다. 멀리 떨어진 곳에 내린 이유는 야스쿠니 바로 위에 위치한 ‘후지미(富士見)’를 거쳐가기 위해서다. 후지미는 말 그대로 후지산(富士山)이 보이는 전망 좋은 동네란 의미다.

일본 육군의 아버지가 만든 야스쿠니


▎20세기 초의 야스쿠니 신사. A급 전범의 합사는 1978년 10월 이뤄진다. 이후 천황은 발길을 끊는다.
야스쿠니는 지리적으로 볼 때 천황의 황거(皇居)와 후지미 사이에 끼어 있다. 살아 있는 일본의 상징과 일본이란 나라의 정체성에 해당되는 후지산 전망대가 남북으로 걸쳐져 있다. 도쿄 대부분이 평지지만, 야스쿠니는 비교적 높은 언덕에 들어서 있다. 평일인 탓도 있겠지만, 야스쿠니로 가는 길은 조용하다. 후지미 근처에서 만난 유치원, 학교가 유일하게 와 닿은 인적이다. 가는 길 전체가 침묵에 휩싸여 있다.

멀리서 검붉은 모습의 초대형 ‘도리이(鳥居)’가 눈에 들어왔다. 도리이란 엔(円)자형 문으로, 성(聖)과 속(俗)을 가르는 신사의 대문에 해당된다. 야스쿠니의 도리이는 오오도리이(大鳥居)라 불린다. 초대형 도리이다. 야스쿠니 도리이는 크게 세 개가 있다. 중간의 청동형 도리이, 그리고 본당 바로 앞의 중간 도리이다. 크기는 안으로 들어갈수록 작아진다. 정문 도리이에서 본당까지는 전부 500m 정도다. 벚나무 길이 양쪽에 이어져 있다. 본당 뒷마당을 합칠 경우 1㎞에 달하는 초대형 신사(神社)다.

신사는 일본 전통종교인 신도(神道)의 예배당에 해당된다. 신도란 세상 모든 것을 신으로 받아들이는 사상이다. 나무·돌·태양·소·고양이도 신도의 범주에 들어간다. 천황은 그 모든 것의 정점에 선 존재다. 불교가 부처나 인간의 수양을 전제로 한 종교인데 비해, 신도는 8만 개에 이르는 삼라만상 모든 존재를 신으로 받든다. 신도가 종교인지 아닌지에 관한 논의는 영원한 숙제다. 도리이에서 본당까지 이어지는 길, 즉 ‘산도우(参道)’는 도쿄를 대표하는 벚꽃 명소다.

산도우를 걸어가면서 눈여겨봐야 할 부분은 우뚝 솟은 일본 최초의 서양식 청동조각이다. 일본 육군의 아버지로 통하는 오무라 마스지로(大村益次郎)의 전신 청동상이다. 1893년에 세워져 야스쿠니에 기부된 것으로, 천황군대의 사령관으로서 적을 내려다보는 모습이다. 오무라는 메이지(明治)유신 당시의 풍운아 10인 중 한 명이다. 하급 사무라이 출신으로, 의학·네덜란드학·교육학·군사학을 독학으로 공부한다. 청년들을 위한 사설학교 즉 숙(塾)도 세워서 교육에 앞장선다. 20대 후반부터 천황세력 확장을 위해 일하던 중, 8명의 사무라이로부터 공격을 당해 암살된다. 45세였다. 천황에 반대하던 막부(幕府)군과의 전투에 참가한 군인인 동시에, 군제(軍制)를 근대식 서양군으로 바꾼 근대 일본군의 설계자에 해당된다. 오무라가 있었기에 일본군이 탄생됐고, 이어 야스쿠니도 만들어졌다.

오무라 청동상은 한국인이 간과하기 쉬운 부분을 일깨워준다. A급 전범자만이 아닌, 멀리 150여 년 전의 메이지 풍운아들도 야스쿠니 멤버란 사실이다. 연혁이나 배경이 태평양전쟁만이 아닌, 19세기 중반으로 거슬러올라간다는 의미다. 메이지유신은 열도 전체를 아우르는, 일본이란 정체성을 확보하고 확대해 나간 초대형 친위쿠데타다. 250년간 이어진 에도(江戸) 도쿠가와(徳川) 막부와 반황(反皇)세력들을 몰아낸 뒤, 서양식 네이션 빌딩(Nation Building)으로 나아간다. 야스쿠니는 일본이란 나라가 네이션 빌딩에 나설 때의 기억에서 출발한다.

사무라이 정수 초혼사로 출발


▎야스쿠니는 중국인 관광객을 위한 필수 사진코스로 자리 잡고 있다. 2월 초 연휴 때는 중국인 관광버스 수십 대가 몰려들었다고 한다.
야스쿠니의 전신은 1869년에 세워진 도쿄 초혼사(東京招魂社)다. 당시 막부군과 싸웠던 천황파 군인과 군속 3588명이 합장된다. 원래 지방에서 간헐적으로 이뤄지던 합사였지만, 오무라가 천황의 본거지인 도쿄에 만들 것을 건의해 급히 창건된다. 일본이란 정체성을 구축하고, 천황의 권위를 과시하자는 것이 창건 목적 중 하나다. 따라서 천황에 반대했던 막부파의 군인이나 지도자들은 야스쿠니 합사에서 제외된다. 천황에 맞설 경우, 죽어도 야스쿠니에 들어갈 수가 없다. 천황은 야스쿠니의 창건은 물론, 이후 유지 발전되는 모든 과정에 관여한다. 당연하면서도 잊기 쉬운 사실이지만, 야스쿠니의 배경에는 늘 천황이란 존재가 드리워져 있다. 1945년 이전에는 천황의 하사금이 야스쿠니 운영비로 충당됐다.

관동군 제5사령부 생존자 일동, 군함 무사시(武蔵)회, 중국 주둔 보병 제1연대 철병(鐵兵), 전차 제3사단 중병(重兵) 연대 유족회, 육군사관학교 제 59기생회…. 야스쿠니의 본당에 가까워질수록 특이한 벚나무를 볼 수 있다. 헌목(獻木)이란 이름과 함께, 벚나무 중간 부분에 흰 글씨의 작은 현판이 걸려 있다. 생존자 유족회, 동기(同期) 같은 단어와 함께, 언제 어떤 전투에 참가했는지에 대한 설명도 있다. 생존자의 경우 본인이, 전물자의 경우 유족회나 동기생들의 이름이 적혀있다.

벚꽃은 사무라이의 정신적 기상으로 받아들여진다. 벚꽃은 조용히 소리 없이 피지만, 질 때는 한순간 바람에 날려 허공으로 사라진다. 붉은색의 꽃잎은 정열과 피를 상징한다. 사무라이가 세상을 마감할 때 남기는 최후의 유시(遺詩)로 ‘지세이(辞世)’라는 것이 있다. 할복에 앞서 볼 수 있는 의식 중 하나로, 보통 한두 문장으로 끝나는 짧은 글이다. 전국시대 다이묘(大名)였던 모리 모토나리(毛利元就)는 숨지기 직전 “친구를 얻어 한층 더 기쁘고, 어제의 벚꽃이 변해 오늘은 엷은 분홍빛으로…(友を得て なほぞうれしき 桜花 昨日にかはる 今日のいろ香は)”라는 지세이를 남긴다. 야스쿠니에 바쳐지는 헌목의 99%는 벚꽃이다. 야스쿠니는 일본 사무라이의 정수(精粹)이기도 하다.

전몰자를 추모하는 본당은 흰 천에 검은색의 국화 문양 커튼이 드리워져 있다. 국화 문양은 오직 한 사람만이 사용할 수 있다. 천황이다. 마음대로 쓸 수 없고, 천황이 지정한 곳에서만 사용 가능하다. 야스쿠니는 천황이 직접 방문할 것을 전제로, 천황용 마차 휴게소를 본당 앞에 마련해놓고 있다.

그러나 1975년 소화(昭和)천황이 야스쿠니에 들른 것을 마지막으로 지난 40년간 천황의 방문은 끊어졌다. 이유는 A급 전범자에 있다. 천황을 보호하는 궁내청(宮內廳) 전직장관이 수기를 통해 밝힌 사실이다. A급 전범의 합사는 1978년 10월에 이뤄진다. 당시 야스쿠니 집행부는 교묘한 방법으로 A급 전범자의 합사를 추진한다.

상대는 로마 교황청이다. 야스쿠니 간부들은 1970년대 초 교황 바오로 6세에게 편지를 보낸다. 도쿄재판에서 전범으로 사형되거나 감옥에 간 사람들을 위한 미사 요청이다. 야스쿠니는 형식상 종교단체다. 종교기관으로서 A급 나아가 B, C급 전범자를 용서하고 기리는 의식을 교황에게 부탁한다. 로마 교황청은 국가를 위해 죽은 사람은 승자, 패자에 관계없이 존경받고 용서돼야 한다고 말한다. 바오로 6세는 전범자를 위한 미사를 약속한다. 교황이 1978년 숨지면서 무위로 끝나지만, 후임자인 요한 바오로 2세가 전범자를 위한 미사를 집전한다. 1980년 5월 21일이었다.

교황청의 권위에 기댄 A급 전범 합사


▎1. 유슈칸 전쟁기념관 앞에 세워진 일가족 동상. 일본의 전쟁기념관은 승리의 함성이 아닌, 부모와 형제자매, 고향에 대한 그리움으로 채워진, 슬픔과 애환의 공간이다. / 2. 유슈칸에 설치된 제로기. 전쟁기념관 내 가장 유명한 전시물로 미군 전투기를 무력화한, 빠르고 멀리 나는 전투기로 소개된다.
미사가 예정된 상태에서 이미 1618명의 전범자가 야스쿠니에 합사된다. 교황도 용서하고 인정한다는 명분과 함께, 물타기로 A급 전범자를 야스쿠니에 슬쩍 끼워 넣는다. 화해와 용서라는 명분과 바티칸의 권위를 빌려 야스쿠니를 A급 전범자의 안식처로 둔갑시킨 것이다. 비록 교황의 인정 하에 이뤄졌지만, 천황은 그 이후 야스쿠니를 멀리한다. 따라서 천황은 야스쿠니의 A급 전범 합사에 가장 먼저 반대한 인물이라 볼 수 있다. 천황을 최고의 신으로 받드는 곳이기는 하지만, 정작 천황의 뜻에 거슬리는 행동을 한 곳이 바로 야스쿠니다.

야스쿠니가 국제적 문제가 된 것은 이후 5년이 지난 1985년 8월 14일이다. 중국이 문제를 제기한다.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曽 根康弘) 총리가 공식 일정으로서 야스쿠니에 참배한 데 대한 반발이다. 중국측은 A급 전범자를 위한 참배는 과거 중국에 대한 침략을 정당화하는 것이라 말한다. 사실 나카소네는 총리 재임 뒤 이미 10회에 걸쳐 야스쿠니를 다녀갔다. 이전의 총리 대부분도 야스쿠니 참배를 정례화했다. 1985년과의 차이점은 공식 여부다.

사실 중국의 야스쿠니 관련 반발은 단순히 나카소네 총리의 공식 참배 때문만은 아니다. 당시 개방정책으로 나아가려던 후야오방(胡耀邦) 총서기에 대한 반발로 일본을 끌어들인 것이다. 후야오방은 일본 자본을 통해 중국 개방을 촉진하려 했다. 1984년 10월 1일 건국 기념 35주년을 맞아, 일본 청년 3천 명을 천안문광장에 초대해 중일 협력체제를 모색하자고 강조한다. 나카소네 총리와의 개인적 우정도 유명하다. 후야오방의 친일정책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공산당 원로들은 나카소네를 적으로 하면서 더불어 후야오방을 밀어낸다. 이후 150㎝ 단구의 덩샤오핑(鄧小平)이 미는 장쩌민(江澤民)이 총서기에 오른다. 장쩌민은 한국의 김영삼 대통령과 함께 반일 공동전선을 편 인물이다. 친일정책을 편 후야오방을 몰아낸 인물이란 점을 감안하면 너무도 당연한 결과다.

중국의 권력투쟁과 일본 나카소네의 야스쿠니 공식 참배는 닭과 달걀과의 관계라 볼 수 있다. 한국 입장에서는 후야오방 실각보다 나카소네의 야스쿠니 참배가 한층 더 피부로 와 닿을 듯하다. 그러나 놓치지 말아야 할 부분은 중국이 문제를 제기하고, 권력투쟁 속에서 문제를 확산시키는 과정에서 한국이 뒤늦게 수동적으로 합세했다는 점이다. 종군위안부 문제가 일본 지식인들 사이에서 논의되기 시작해 한국으로 넘어왔듯이, 야스쿠니 문제도 한국 내에서 먼저 제기된 것이 아닌 중국을 따라가는 과정에서 확대됐다. 한국은 독자적 판단 없이 중국의 주장에 동조하는 과정에서 야스쿠니가 외교 이슈화된다. 총론 차원에서, 일본에 대한 한국·중국의 과거사 해석은 비슷하다. 그러나 각론으로 들어가면 다르다. 중국은 일당 독재 공산국가다. 민주주의 국가 한국과 다른, 한두 명에 의해 결정되는 밀실 속의 방침과 원칙이 중국식 외교의 기본이다.

중국과 함께 갈 경우 더 큰 목소리를 낼 수는 있다. 그러나 만약 중·일 간에 합의가 이뤄질 경우 한국은 ‘닭 쫓던 개’ 꼴이 된다. 야스쿠니 문제는 중요한 외교 현안이다. 그러나 중국과의 공조형태로 이뤄질 경우 언젠가 치명적인 손해를 볼 수도 있다. 중국의 대일외교가 한국의 입장을 고려하면서 이뤄질 것이라는 것은 엄청난 착각이다.

한국에서 보는 야스쿠니는 우익의 경연장으로 와 닿는다. 그 같은 모습은 매년 열리는 8월 15일 특별 이벤트에 한한다. 야스쿠니 정문 앞에 있는 일본무도관(日本武道館)에서 8·15 전몰자 추모식 직후 벌어지는 상황이다. 무도관 공식행사에 참가한 총리와 각료들이 돌아가는 길에 야스쿠니에 들른다. 우익들이 몰려들고, 이에 맞서 공산당·사회당 중심의 야스쿠니 반대 데모도 동시에 벌어진다. 헌법 9조 사수회(死守會), 헌법개정 지지연합회, 천황제 반대모임, 북방5도 반환 촉구회, 원발(原發) 반대모임 등이 뒤얽혀 하루 종일 시끄럽다. 전 세계 매스콤이 전부 모이는 것은 물론이다. 이날은 최소한 10만 단위의 전몰자 유족이 참배하는 날이기도 하다. 8월 15일 대형 이벤트가 끝나면 야스쿠니는 조용한 신사로 돌아간다. 수백 명이 떼로 몰려오는 중국인 관광객을 위한 도쿄의 관광명소로 변해간다. 전쟁 경험자나 전쟁에 관한 얘기를 듣고 자란 사람들이 사라지고 있다. 야스쿠니에 대한 지원금이 줄어들고, 위상도 한층 더 약해지고 있다. 야스쿠니를 성역시하려는 사람이 늘어난다는 것은 거꾸로 야스쿠니를 잊어가는 사람이 많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기능상 야스쿠니는 한국의 동작동 국립묘지에 비견된다. 두 장소는 한일 간 문화의 압축판에 해당되기도 한다. 앞서 살펴봤듯이 야스쿠니는 레시보에 명부를 올리면서 합사가 공식화된다. 계급·출신·지역 심지어 국적에 관계없이 등록되는 ‘집단’으로서의 합사다. 사성(四星) 장군이라 해서 특별히 추모되는 것이 아니다. 나라를 위해 싸우다 숨진 모든 사람이 ‘신(神)’으로 추앙된다. 살아 있을 때와 달리, 야스쿠니 멤버로 등록되는 순간 모두가 평등해진다. 집단으로서의 전몰자만 있을 뿐, 개개인의 모습은 없다.

한국의 경우 대통령과 장군은 사후에도 존경받는다. 동작동 국립묘지에 들러 베트남 참전 군인과 대통령의 묘를 비교해보라. 필자의 관심사는 한국과 일본 사이의 평등 여부에 관한 것이 아니다. 두 나라의 문화다. 일본은 개개의 전몰자가 아니라, 집단으로서의 죽은 이 전부를 기린다. 살아서도 집단이고 죽어서는 더 한층 집단이다. 한국의 지도자는 살아서도, 죽어서도 국민을 지도한다. 각각 장단점이 있지만, 한국은 지도자를 중심으로 한 단기전에, 일본은 집단으로 움직이는 장기전에 강한 문화라 볼 수 있다. 좋은 지도자를 만나면 한순간 정상에 도달할 수 있는 나라가 한국이다. 일본의 경우 좋은 지도자 여부와 무관하다. 집단으로 움직이기에 크게 비약하는 것도 없지만, 잘못된 지도자를 만난 추락할 가능성도 없다.

생명을 향한 필사의 몸부림, 전쟁기념관


▎야스쿠니 신사 내 기념품 판매상에 진열된 천황 부부 사진. 야스쿠니의 최고 정점에 천황이 자리 잡았다
추정컨대 야스쿠니의 위상과 권위는 한층 더 약화될 것이다. 그러나 한순간 없어지지도 않을 것이다. 힘은 약화되지만, 꾸준히 그리고 지속적으로 이어지는 것이 야스쿠니다. 천안함 사건 이후 달아오른 순국 애국자 추모붐이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버리는 한국적 상황과는 구별된다. 집단에 기초하기 때문에 천천히 꾸준히 오래간다. 따라서, 야스쿠니 문제는 앞으로도 계속될 외교 현안이 될 것이다.

야스쿠니 본당 오른쪽으로 걸어가면 ‘유슈칸(遊就館)’이란 이름의 상설전시관이 마련돼 있다. 전몰자들을 되새기는 전쟁박물관에 해당된다. 19세기 말부터 태평양전쟁 나아가 최근의 중동 평화유지군 파견에 이르는 일본전쟁사 관련 자료 전부가 전시돼 있다. 야스쿠니 문제의 핵심인, 태평양전쟁 당시 대본영 수장(首將) 도조 히데키(東條英機)를 비롯한 A급 전범자들에 관한 사진과 자료도 접할 수 있다.

본당에서는 모두가 하나의 집단으로 움직이지만, 유슈칸에서는 개별화된 전쟁 지도자를 만날 수 있다. 유슈칸 입구에는 태평양전쟁 당시 활약했던 제로기·대포·열차가 전시돼 있다. 제로기가 얼마나 우수한 비행기였는가라는 얘기는 유슈칸에서 울려 퍼지는 유일한 승전보가 아닐까 싶다.

보통 다른 나라의 전쟁기념관은 자국 군대의 우수성과 승리를 기념하는 공간으로 활용된다. 워싱턴 스미소니언 내 전쟁 관련 기념관에 가면 미국 창공에 휘날리는 성조기의 함성이 귀를 찌르는 듯하다. ‘항상 전진하고 승리한다’는 것이 워싱턴 전쟁기념관이 주는 인상이다.

일본은 다르다. 뭔가 슬프고 어두운 그림자가 유슈칸 전체에 흘러 다닌다. 원자폭탄을 2발이나 맞은 패전국이기 때문이라 볼 수도 있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일본이 승기를 잡았던 19세기 말과 제1차 세계대전을 전후한 전시관을 둘러봐도 승리감에 도취한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승자의 자신만만함보다는, 뭔가에 쫓기고 어쩔 수 없이 밀려서 앞으로 나아가는 듯한 느낌이다. 당시 군인들이 집에 보낸 편지를 봐도 승리를 목적으로 하기보다, 패하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서바이벌 군대처럼 느껴진다.

일본이 시행한 전투는 엄청난 병력을 퍼부은 결과에 불과하다. 인해전술(人海戰術)은 중국만이 아니라, 일본군에도 해당된다. 이길 때도 질 때도 엄청난 손실이 뒤따른다. 1945년 1월부터 8일 15일 종전일까지 계속된 필리핀 루손(Luzon)섬 전투를 보자. 좁은 섬에 무려 25만 명의 일본군이 주둔했다. 전사자는 일본군 21만7천 명, 미군 3만8천 명이다. 거의 떼죽음이다. 섬을 무대로 한 일본군의 전사자의 비율을 보면 보통 90%가 넘는다. 전시된 생전에 쓴 편지를 보면 먼저 죽은 전우를 생각하며, 곧 저세상에서 만나자는 얘기가 주류다. 죽은 전우를 생각하면, 살아서 집에 돌아갈 수 없다고 단정한다. 살기 위한 전쟁이 아니라, 죽기 위한 싸움이다. 전시관 분위기 전체가 숨쉬기 어려울 정도로 비장하다. 무운장구(武運長久)를 비는 일장기 혈서나 친구들의 격려문도 살기 위한 것이 아닌, 영광스럽게 죽기 위한 액세서리로 느껴진다.

군대 행진국도 전시관 곳곳에서 울려 퍼지지만, 슬프고 애절하다.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적에 대한 증오심을 높이는 군가가 아니다. 어머니·형제·자연·친구 같은 것들을 가사로 한, 슬픈 멜로디 속의 서정시로 와 닿는다. 이미 사라졌는지 모르겠지만, 1990년대 말까지만 해도 서울 한복판에서 1940년대 일본 군가를 들을 수 있었다. 동대문 일요시장 주변이다. 일본군을 찬미하기 위한 노래가 아니다. 일제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가슴속에 남아 있던 ‘애잔한 기억’이 재현됐을 뿐이다. 동심이 접했던 유일한 음악들이다. 필자도 동대문 거리를 걷다가 몇 번 들었지만, 애절하고 슬픈 군가로 기억된다. 상대를 압도하는 힘이 아니다. 최악의 상황 하에서도 가족·친구·고향을 그리며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군가에 투영돼 있다.

야스쿠니 반대는 일본과의 전방위 싸움

일본은 세계에서 단조(短調)로 이뤄진 국가(國歌)를 가진 유일한 나라다. 천황의 만수무강을 비는 기미가요(君が代)는 시작도 끝도 음울하고 쓸쓸하다. 유슈칸 내 기록영화로 1944년 가미카제 출격에 앞선 의식이 있다. 기미가요 제창이다. 노래를 부르면서 눈물을 참는 어린 조종사들의 모습이 인상 깊다. 죽음에 앞선 공포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조종사들의 슬픈 모습은 적개심이 아닌 스스로에 대한 다짐과 주변 정리로 해석된다. 적을 공격하고 증오하기에 앞서, 자신을 단련하고 주변을 고려하는 과정에서의 슬픔이다.

야스쿠니는 총리의 공식 참배, A급 전범에 국한되는 공간이 아니다. 일본 전체를 압축한 일본 문화의 결정판이다. 야스쿠니에 반대한다는 것은 일본을 상대로 한 ‘전방위 싸움’에 나선다는 얘기다. 일본과의 전쟁이 아니라, 일본에 관한 모든 것에 대한 철저한 연구와 대응책이 이뤄지지 않는 한 ‘코끼리 다리 더듬는’ 수준에 일단락될 뿐이다. 올해 8월 15일의 전후 70년 야스쿠니는 지금까지 볼 수 없던 상황을 연출할 것이다. 주저하고 머뭇거리는 모습이 아닌, 아예 밖으로 드러내 놓은 상태에서 야스쿠니 찬미로 나갈 것이다. 정치가의 공식 참배 수준이 아니다. 현재 일본의 공기로 본다면, 천황의 야스쿠니 참배도 곧 이뤄질 전망이다. 전방위로 싸울 자세는 돼 있는가? 싸워 이길 만한 역량은 갖추었나? 논리와 팩트라는 측면에서 상대를 압도하고 세계의 여론을 주도할 자신이 있는가? 2015년 8월 15일, 해방 70주년을 맞은 한국인에게 묻는 질문이다.

- 유민호 월간중앙 객원기자·‘퍼시픽21’ 디렉터

201505호 (2015.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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