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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유정의 ‘책 읽는 영화관’] 시대가 요구한 여성상의 변천사 <신데렐라>의 함정 - ‘자기어필’하는 신데렐라, ‘악녀’ 계모의 속사정 

샤를 페로의 동화에선 왕자와의 결혼을 꿈꾸는 순종적인 ‘신데렐라’… 원작 민담에선 재산권을 되찾으려 노력하는 주체적 여성 

<신데렐라>는 세상에서 가장 잘 알려진 이야기 중 하나다. 아버지를 잃은 한 여자가 계모와 이복 언니에게 괴롭힘을 당하다가 멋진 남자를 만나 인생의 반환점을 맞는다는 이 이야기는 세계 곳곳에 퍼져 있다. 우리 전래민담 <콩쥐팥쥐>만 봐도 그렇다. <신데렐라>의 스토리텔링과 거의 비슷하지 않은가? <신데렐라>와 비슷한 스토리텔링이 문자로 기록돼 처음 발견된 곳은 9세기 중국이었다. 중국의 한 기록에서는 작은 발과 진귀한 재료로 만들어진 구두가 중요한 미덕으로 여겨졌다.

신데렐라는 왜 콤플렉스 갖게 됐을까?


고대부터 주요한 미덕으로 일컬어졌던 <신데렐라>의 주된 내용은 현대에 와서는 그 의미가 달라져 눈길을 끈다. 현대의 서사적 맥락 속에서는 심리학 용어인 ‘신데렐라 콤플렉스’로도 표현되기 때문이다. 신데렐라의 서사가 워낙 보편적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인간의 심리를 설명하는 용어가 될 정도라면 신데렐라는 그만큼 대표적 고유성을 갖고 있는 문화어로써 인정할 만하다.

또 하나 주목할 대목은 신데렐라가 남자를 잘 만나서 팔자를 바꾼 운 좋은 여자를 지칭하기보다 주로 여성 비하적인 용어로 쓰이기도 한다는 사실이다. 자신보다 사회적 계층이나 지위가 훨씬 더 우월한 남자를 만나 신분상승을 꿈꾸는 여자를 ‘신데렐라’로 부르는 경우가 근래에 와서 잦아졌기 때문이다. 신데렐라, 어느새 그 이름은 여성에 대한 호평이라기보다 혹평에 가까운 용어가 되고 말았다.

콤플렉스라는 용어가 이미 암시하듯이 신데렐라의 스토리텔링은 다분히 정신분석학적 면모를 갖고 있다. 우선 구두라는 소재만 봐도 그렇다. 예로부터 구두는 거의 공공연하게 성적인 암시로 활용돼왔다. 좀 더 구체적인 예를 보자. 동화를 정신분석의 대상으로 삼는 것으로 유명한 심리학자 브루노 베텔하임 역시 신데렐라의 스토리텔링에 주목했다. 그는 이 동화 안에서 ‘형제간 경쟁’, ‘새어머니의 등장’을 눈여겨 봐야 한다고 말한다. 여러 형제가 있을 경우 다른 형제들에 비해서 사랑을 덜 받는다고 느낄 때 그 불안이 신데렐라의 이야기로 해소될 수 있다는 게 베텔하임의 주장이다. 다른 형제 자매들보다 자신은 훨씬 더 착하고 아름답다고 여기는 것, 이러한 자기 독려가 아이들의 영혼을 쑥쑥 자라게 해준다는 것이다.

결국 이 심리학자의 주장에 따르면 동화 속의 계모는 현실에서의 친모로 변이 해석될 수 있다. 모든 것을 허용하고 허락하고 내어주던 친엄마가 어느 날 하나둘씩 금기와 법칙을 제시할 때 아이들은 엄마를 다른 엄마 즉, 계모로 여긴다는 것이다. 이는 <신데렐라>의 최초 판본이자 이탈리아 작가 바질레의 동화 <재투성이 고양이>만 봐도 알 수 있다. 이 동화 속에서 계모는 ‘딸이 깜짝 놀랄 정도로 매섭게 노려봤다’고 말한다. 깜짝 놀랄 정도로 매섭게 노려보는 것, 이는 친엄마가 자녀를 양육하는 과정에서 제 아무리 자상하게 대하더라도 필연적으로 한두 번씩은 경험하게 되는 ‘엄격한 어머니’의 이미지와 겹쳐 있다.

사실 우리가 <신데렐라>의 원형으로 알고 있는 이야기는 엄밀히 말해 미국의 제작사 디즈니가 만들어 낸 애니메이션 <신데렐라>일 뿐이다. 그렇다면 원래 <신데렐라>의 이야기는? 대체 어떤 내용이기에 전 세계 각지에 흩어져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었던 걸까? 이를 위해 우선 수많은 신데렐라의 이본(異本)을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신데렐라는 프랑스의 동화 수집가였던 샤를 페로의 <신데렐라>와 이를 만화화한 디즈니의 그것이다. 페로는 입으로 전해지는 민담과 설화를 모아 독자들에게 교훈을 줄 수 있는 이야기로 각색한 인물이다. 신데렐라를 부지런하고 겸손하며 집안일을 열심히 하는 소녀로 표현한 것도 그의 솜씨다.

원조 신데렐라의 신발은 유리구두 아닌 가죽구두


▎영화 <신데렐라>의 한 장면. 현대판 <신데렐라>에서는 계모의 캐릭터가 선천적 악인이 아니라 나름의 사연 있는 입체적 인물로 그려졌다. 남편과 그 친딸의 돈독한 관계에서 소외감을 느끼며 악인으로 변모하게 된 계모의 속사정이 묘사돼 눈길을 끈다.
페로는 인내심과 자제력을 가진 여성을 만인이 추구해야 할 이상형으로 제시했다. 이상형의 남성이 나타날 경우 그가 자신을 아내로 삼아줄 때까지 참고 기다리는 여인, 그런 수동적 여인을 훌륭한 여인의 전범으로 그려낸 것이다. 페로의 동화 속에서 여성의 유일한 꿈은 결혼이다. 목적 역시 결혼이며 여성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남성을 기다리는 것뿐이다. 페로는 여자란 자고로 남편에게 전적으로 순종해야 한다는 철학을 당시의 민담과 설화 속에 심었다. 우리가 동화라고 알고 있는 대개의 이야기가 그의 손을 거쳤다. 신데렐라 콤플렉스라는 이름에 걸맞은 신데렐라가 창조되는 순간이었다.

그렇다면 페로의 손을 거치기 전 입으로 전해져온 민담 <신데렐라>의 내용은 어땠을까? 이른바 ‘원조’격인 이 민담에서 신데렐라는 놀랍게도 적극적이며 주체적이다. 원작에서는 계모에게 자신의 권리와 재산을 모두 빼앗긴 신데렐라가 이를 적극적으로 되찾아내는 과정을 보여준다. 우리가 디즈니 만화에서 보았던 모습과는 정반대인 것이다. 왼뺨을 맞으면 오른 뺨을 내밀고 자신에겐 일만 시키는 새 언니들의 무도회 준비를 자발적으로 도와주는 모습과 달리 원작 속 신데렐라는 재기 발랄하다. 그는 결혼이 아니라 자신의 재산권을 되찾기를 원할 뿐이다. 즉 스스로 주권을 가진 여성이 되고 싶어 하는 것이다. 심지어 그 과정에서 피비린내 나는 폭력도 동반된다.

페로는 이러한 잔혹성이 교육용 동화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그는 자신이 판단하기에 잔혹하거나 부도덕한 부분은 모두 빼버린다. 페로가 신데렐라 이야기에서 바꾼 부분 중 가장 유명한 것이 바로 ‘유리구두’ 부분이다. 사실 이상하지 않은가? 유리로 만든 구두라니 도대체 신고 걸을 수나 있느냐는 말이다.

이에 대해서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그중 하나는 프랑스어로 가죽(VAIR)이었던 것을 페로가 오인해 유리(VERRE)로 바꿨다는 설이다. 하지만 이야기를 꼼꼼히 들여다보면 이 설명도 그다지 와 닿지 않는다. 원작인 민담에서는 새 언니가 억지로 구두를 신기 위해 발을 잘랐다는 내용이 있다. 발을 자르고 신발에 억지로 발을 끼우니 피가 구두에 젖게 된다. 하지만 왕자는 전혀 눈치 채지 못했고 이를 고발하는 새들의 노래를 듣고 나서야 발을 잘라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만약 페로의 동화대로 투명한 유리 구두였다면 왕자가 피를 발견하지 못했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아마도 페로가 보기에 멋진 왕자의 아내가 되기 위해 발까지 잘라내는 적극성이 지나치다 못해 혐오스러운 욕망으로 여겨졌나 보다. 자고로 현숙한 여인으로 길러내기 위한 동화에서 극악한 여성의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그 결과 페로는 <신데렐라>의 여성 캐릭터들을 무기력하고 어리석은 여성형으로 바꿔놓는다. 신데렐라의 새 언니들은 자신의 욕망을 관철시키기 위해 도전하는 인물이 아니라 멍청한 인물로 변형된다. 여기서 또 한 가지 문제적인 것은 그녀들의 그다지 아름답지 않은 외모도 중요한 결함 중 하나로 제시돼 있다는 점이다.

2015년, 외면받는 순종적 여성상


▎영화 <신데렐라>의 한 장면. 소설의 영화화가 주는 가장 큰 혜택은 바로 마법의 현실화다. 요정 대모가 호박을 마차로 바꾸는 순간은 마법이 바로 눈앞에서 실현되는 환상적 사실감을 선사한다.
페로는 정숙한 처녀의 전형을 신데렐라를 통해 소개한다. 신데렐라는 자신의 욕망에 무지하며 집안일에 부지런하고 도덕적이며 헌신적인 데다 친절하다. 그는 잿더미 난로 곁으로 쫓겨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잿더미로 걸어간다. 심지어 ‘해야 할 일을 모두 끝내자, 난로의 한쪽 구석으로 가서’라고 중얼대며 잿더미 청소를 시작하는 한편 새 언니들의 무도회를 위해 손수 이들의 머리를 단장해준다. 물론 무도회에 갈 엄두도 못 낸다. 마법의 힘을 가진 요정 대모가 나타나 ‘너도 가보고 싶지?’라며 적극적인 권유를 해주고 나서야 비로소 가고 싶은 마음을 갖게 된다. 게다가 이 요정 대모는 재투성이 옷을 아름다운 드레스로 바꿔주기까지 한다. 여성이 왕자를 만날 때에는 가장 아름다운 치장을 마친 모습을 하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지금의 잣대로 생각하면 너무나 보수적인 내용이라 우스꽝스러울 정도이지만 안타깝게도 페로가 새롭게 제시한 신데렐라의 모습은 지금도 정숙한 처녀의 전형으로 여겨진다. 여전히 여성의 정숙함이나 부지런함, 욕망에 대한 무지는 좋은 것이고 그 반대의 것들은 나쁘고 더러운 것으로 취급된다. 페로가 1697년에 순종적인 여성상을 그려 놓은 지 300여년의 시간이 흘렀다. 하지만 그동안 세상은 여성이 순종을 버리기를 원치 않았던 모양이다.

페로의 동화를 고스란히 따른 판본이 바로 디즈니의 고전 애니메이션 <신데렐라>다. 그림 형제, 바질레, 프랑스 민담과 같은 여러 이본이 있었지만 디즈니는 페로의 고전 동화를 애니메이션의 원작으로 채택한다. 순종적인 여성상을 그린 부르주아적 가치관은 보수적인 디즈니의 세계에도 제법 잘 부합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지난 50여 년간의 변화가 격렬했다는 것이다. 1950년대 제작된 디즈니 애니메이션 <신데델라>는 보수적 색채를 그대로 드러냈음에도 불구하고 시대적 상황상 아름다운 동화로써 모두 용납됐다. 그러나 2010년대에 들어서서 이 보수성은 자칫 불평등의 요소로 받아들여질 수 있게 됐다. 자신의 욕망이나 생각 없이 전적으로 수동적인 신데렐라는 이젠 시대착오적이며 비이상적 인물형이 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디즈니가 2015년 관객들에게 선보인 영화 <신데렐라>는 1950년대에 제작된 애니메이션 <신데렐라>의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작품으로 보인다. 디즈니는 이 영화에서 자신의 브랜드성을 유지하면서 신데렐라의 주체적 여성상을 동시에 살려냈다. 주목해서 볼 부분 중 하나는 감독이 바로 케네스 브레너라는 사실이다. 케네스 브레너는 이미 여러 편의 영국문학 작품을 스크린으로 각색해낸 바 있다. 게다가 케네스 브레너는 최소한의 변형을 추구하는 원전주의자이기도 하다. 원작 동화에 가까운 버전의 실사 영화를 추구한다는 것을 이미 수차례 드러냈다.

자, 스토리는 제대로 구현됐다. 유일한 복병은 바로 과거 애니메이션이 보여준 시각적 환상을 실제 배우가 얼마나 충족시켜 줄 수 있는지 여부다. 이를테면 과거에 애니메이션 <미녀와 야수>를 실제 배우들이 등장하는 실사 애니메이션으로 바꿨을 때 우리가 느꼈던 당혹감이 또다시 재현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다. 2D 평면 속에 그려진 신데렐라의 외모는 어떤 점에서 비현실적인 순수와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그 어떤 배우가 연기한다고 해도 그림 속 신데렐라의 청순한 아름다움을 재현해내기는 힘들다. 그런 점에서 할리우드 영화계에 얼굴이 알려져 있지 않던 신인 여배우 릴리 제임스를 기용한 것은 꽤나 현명한 선택으로 여겨진다. 말 그대로 신데렐라처럼 관객에게 새로운 이미지로 받아들여질 수 있기 때문이다.

소설의 영화화가 주는 가장 큰 혜택은 바로 마법의 현실화다. 요정 대모가 도마뱀을 시종으로, 호박을 마차로, 생쥐를 말로 바꾸는 순간은 마법이 바로 눈앞에서 실현되는 환상적 사실감을 선사한다. 지름이 2m가 넘는 신데렐라의 드레스 역시 마찬가지의 감탄을 선사한다. 오히려 신데렐라의 미모보다 드레스의 아름다움이 더 압도적인 수준이다. 영화 <신데렐라>의 절정은 무도회라는 듯 무도회 역시 화려한 파티의 형태로 연출됐다.

새엄마가 악녀가 된 사연

시대착오적 드라마를 시대의 흐름과 맞추기 위해 제작진이 가장 고심한 부분은 무엇일까? 바로 악역의 입체화다. 디즈니는 이미 영화 <말레피센트>를 통해 마녀, 악녀의 성격을 입체화하는 작업을 시작한 바 있다. 그리고 그 시도는 꽤 성공적인 결과를 거두기도 했다. 아무런 이유 없이 단순히 악역으로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이 악녀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꽤나 설득력 있게 설명하는 것이다.

영화 <신데렐라>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지점은 바로 악역인 계모의 캐릭터를 둘러싼 스토리텔링이다. 이 영화에 계모는 처음부터 신데렐라를 미워하는 선천적 악인이 아니라 남편과 그 친딸 사이에서 소외감을 느꼈던 새엄마로 그려진다. 즐거운 파티 시간임에도 자신의 곁이 아니라 딸 곁에서 죽은 아내 이야기를 나누는 남편을 보며 계모는 소외감과 배신감을 느낀다. 오이디푸스적 갈등을 전면에 부각시킨 것이다.

한편 계모가 이미 남편을 잃고 빚에 시달리다 신데렐라의 아버지와 도피성 결혼을 했다는 이유라든지 신데렐라에 대한 이물감도 꽤나 인상적으로 그려진다.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에 빛나는 배우 케이트 블란쳇은 눈빛만으로 그 복합적 감정을 보여준다. 케이트 블란쳇은 그 연기적 존재감만으로도 입체적인 계모를 완성해낸다. <신데렐라> 이야기가 인류사에 유통된 이후 최초로 계모의 악함이 설명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신데렐라 역시 꽤나 적극적인 인물로 그려진다. 그는 친엄마가 남겨둔 드레스를 수선해 파티에 참석하기 위해 나서고 적극적으로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도 한다. 게다가 그는 자신의 장점을 최대한 살려 왕자에게 자신의 가치를 호소하기도 한다. 따뜻한 배려와 성실이라는 중세적 덕목이 강조되기는 하지만 애니메이션 속 신데렐라보다는 훨씬 더 인간적으로 보이는 게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화는 애니메이션으로 머무는 게 가장 적절하지 않을까 싶다. 애니메이션은 때묻지 않은 상상에서 태어난 환상을 보존하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애니메이션이 실사로 바뀌는 순간 거위가 변신한 마부나 도마뱀 시종은 환상이라기보다 분장의 영역에 닿는다. 사물들이 살아 움직이는 환상을 믿는 아이들에겐 실사 영화의 그 경계가 무척이나 서걱거릴 것이다. 때문에 동심의 번역, 그것은 꽤나 어렵고 까다로운 일이다.

강유정 - 영화·문학평론가. 강남대 국문과 교수. 2005년 <조선일보> <동아일보>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동시 당선돼 평론 활동을 시작했다. 고려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현재 KBS <박은영, 강유정의 무비부비2> 프로그램을 진행 중이다. 저서로 <스무살 영화관> <사랑에 빠진 영화, 영화에 빠진 사랑> 등이 있다.

201505호 (2015.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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