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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셜 리포트] 세계 명문가(名門家)의 조건 - 셀리브리티가 무조건 명가(名家)일 수는 없다 

사회적 공헌 여부가 명가로 부상할 수 있는 ‘결정적’ 근거… 2016년 미국 대선은 양대 명문 클린턴가와 부시가의 격돌 가능성 높아져 

유민호 월간중앙 객원기자, ‘퍼시픽21’ 디렉터

▎1. 힐러리 클린턴 전 미 국무장관은 2016년 대선 출마선언과 함께 강력한 민주당 대선후보로 주목을 받고 있다. / 2. 젭 부시 전 미국 플로리다 주지사도 ‘부시가’의 후광을 업고 대선에 도전할 예정이어서 두 정치 명가의 대결 가능성에 시선이 집중된다.
재벌 관련 소식은 한국의 신문·방송에 등장하는 주된 뉴스원이 된 지 오래다. 재벌 총수의 사법처리에서부터 외국 방문, 재벌 딸의 출산과 심지어 군입대와 같은 소식까지도 핫 뉴스로 처리된다. 텔레비전 드라마에서도 재벌을 둘러싼 신데렐라 스토리가 대세를 이룬다. 일반인들은 재벌에 대한 반감으로 가득 찬 듯하지만, 드라마 속의 ‘가난한’ 주인공의 상대는 ‘어김없이’ 재벌 후계자다. 재벌이란 말이 남발되면서 최근에는 지역 단위의 재벌도 탄생한다. ‘준(準)재벌’이다.

언제부터인지는 몰라도, ‘가(家)’라는 접미사로 끝나는 재벌들도 등장하고 있다. 신문을 통해 이미 상식어로 정착된, 삼성가·현대가·LG가와 같은 것이다. 직계가 아닌, 방계를 포함할 경우 ‘범(凡)’이라는 접두사를 넣어 범현대가, 범삼성가, 범LG가로 나타난다. 대통령이란 호칭에 ‘님’자가 붙은 것이 대략 10여 년 전부터가 아닐까 싶다. “고객님 자동차께서 고장이 나셨습니다”라고 말하는 시대니까 대통령에 ‘님’자 하나 붙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듯하다. 재벌이라고해서 ‘가’를 붙이지 말하는 법은 없다.

믿거나 말거나 ‘돈의, 돈에 의한, 돈을 위한’ 삶이 최상의 성공담으로 받아들여진다. 양귀비와 소피아 로렌을 합친 콜라병 비너스도 돈을 통해 창조될 수 있다. 기부금 100만 달러만 내면 미국 명문대학에서의 학위 세탁도 가능하다.

재벌은 자본주의 체제의 최종 승리자에 해당한다. 세계 100대 부자에 들어가는 한국 재벌들에게 어마어마한 접두사, 접미사를 붙인다고 해서 크게 문제될 것은 없다. 그렇지만, 뭔가 불편하다. 그 이유는 ‘가’라는 단어가 갖고 있는 고상한 이미지 때문일 것이다. 품위·전통·역사와 같은 형이상학적 가치가 ‘가’라는 단어 속에 투영돼 있다. ‘집안·뼈대·근본’이란 말은 어릴 때부터 귀에 못이 박히게 들어온 말로 ‘가’와 비슷하지만, 다른 점도 있다. ‘집안·뼈대·근본’은 가족 내부의 결속을 강조하는 결의나 신념에 해당된다. ‘가’는 이미 완성된 결속체로서, 속세를 떠나 구름 위에 떠있는 신성한 존재다. 혼담 상대가 ‘OO가의 장손’이라고 하면 분위기부터가 달라진다.

다른 나라는 어떨까? 영어수업에서 열심히 배웠겠지만, 한국식 ‘가’를 의미하는 말은 관사 ‘The’다.

성(姓)앞에 ‘The’를 붙이는 식이다. The Kennedys 라고 하면 케네디가라는 의미다. 케네디 가족(Kennedy Family)이란 표현도 있지만, 뭔가 공식적으로 표현할 때는 ‘The Kennedys’라는 말로 대치된다. 그렇지만, 미국인 대부분은 ‘The’라는 말에 대해 거부감을 갖는다. 모두가 평등하다고 믿는, 민주주의에 기초한 생각이라 볼 수 있다. 돈이 많다는 이유로, 스티브 잡스 아들을 ‘잡스가(The Jobs)’, 팀 쿡의 손자를 ‘쿡스가(The Cooks)’라 부르지는 않는다.

명문(名門)·명가(名家)는 ‘가(The)’를 좀더 노골적으로 풀어 설명한 단어다. ‘가(The)’가 그러하듯, 명문과 명가도 ‘권위와 존경’ 그 자체다. 한순간이 아니라, 장기간에 걸쳐 완성된 전통과 역사의 상징이다. 선대(先代)부터 모두가 존경하고 따르는 지고지상(至高至上)의 가치다.

명가는 오랜 전통과 역사의 상징


▎메디치 가문의 후원으로 르네상스 시대를 이끈 이탈리아 피렌체의 산타 크로체 광장.
명문와 명가 다같이 통용될 수 있겠지만, ‘케네디가’처럼 특정 가족을 지칭할 때 애용되는 말은 명가다. 명문은 보통 학교나 단체를 대상으로 한다. 누가 처음 번역해냈는지 모르겠지만, 명품은 샤넬·프라다 같은 브랜드(Brand) 제품을 의미한다. 명문·명가의 이미지가 브랜드 마케팅에 접목돼 명품이란 용어로 둔갑한 것이다. 군소리 말고 그 가치에 승복해야만 한다. 비싸든, 디자인이 어떻든, 수량이 제한돼 있든, 살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만 하는 존재로서의 명품이다.

지난 4월 13일은 가족·집안·가문으로서의 명가라는 말이 글로벌 톱 뉴스로 군림한 날이다. 내년 11월 이뤄질 미국 대통령선거 후보로 나선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 때문이다. 남편과 더불어 ‘클린턴가(The Clintons)’에서 대통령이 다시 나올지 여부가 주된 관심이다. 힐러리만이 아니라, 맞상대로 공화당 대통령 후보자 경선에 나설 젭 부시 전 플로리다 주지사도 명가 열기를 창조해낸 주역이다. 젭 부시의 아버지인 41대 대통령 조지 부시, 형인 43대 대통령 조지 W. 부시를 잇는 ‘부시가(The Bushes)’의 새로운 기대주다. 따라서 클린턴가와 부시가의 대결은 2016년 대통령 선거의 하이라이트에 해당된다. 공화·민주당의 최종 대통령 후보도 결정되지 않은 상태지만, 판세는 이미 힐러리와 젭의 양자대결 체제로 나아가고 있다. 다른 후보자들이 보면 뚜껑도 열리기 전에 이뤄진 여론몰이 판세라 말하겠지만, 명가·명문 나아가 명품에 넋이 나가는 것이 세상사다.

사실 미국인만큼 무지하고 무식한 국민도 세상에 없다. 텔레비전 토크쇼 앵커가 거리로 나가 ‘마하트마 간디’의 얼굴을 보여주면서 누구인지 물어봤다. 누군지 아는 사람은 10명 중 한두 명에 불과하다. 힙합 가수, 뇌수술 의사, 월가의 펀드매니저, 미슐랭 원스타 레스토랑 주인 같은 답이 쏟아진다. 부대통령 이름을 기억하는 미국인도 극소수다. 미국에서 유명해진다는 것은 돈과 명예로 이어진다는 의미다. 이른바 셀리브리티(Celebrity)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돈방석에 올라선다. 대통령에 당선된다는 것은 미국 내 최고의 셀리브리티가 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원래부터 셀리브리티로 활약해온 인물이라면 미국 최고의 셀리브리티로 당선되는 것이 한결 더 간단하다. 따라서 4년마다 열리는 미국 대통령 선거는 정치만이 아니라 경제·사회·문화 모든 면에 걸쳐 미국을 대표하는, 최고의 셀리브리티가 벌이는 집단향연쯤에 해당된다. 그러나 모든 셀리브리티가 명가일 수는 없다. 반대로 모든 명가가 셀리브리티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셀리브리티와 명가는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한국에도 들른, 호텔 힐튼의 상속녀 패리스 힐튼은 셀리브리티이긴 하지만, 힐튼가(家)라는 명가로 진화할 수는 없다. 다이이몬드와 샴페인으로 세계 곳곳에서 화제를 일으키지만, 사람들의 눈을 끄는 유명한 여성에 불과하다. 명가의 필수적인 조건인 권위와 존경이 없다.

고만고만한 수준의 셀리브리티가 명가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특별한 노력이 한 가지 필요하다. 공공의 선(善), 즉 공익이다. 삼대(三代)에 걸쳐 아카데미상을 받은 셀리브리티 집안이 있다고 해도 명가로 부상할 수는 없다. 자신의 영광이나 출세에 국한되기 때문이다. 얼마나 사회적으로 많은 공헌을 했는지 여부가 명가로 부상할 수 있는 ‘결정적’ 근거다. 공헌의 내용은 크게 볼 때 두 가지로 나눠진다. 직접 현장에 가서 공공의 선을 구현하는 봉사활동과 공공의 선을 위해 일하는 단체에 대한 경제적인 지원이다. 봉사는 교회·학교·지역 나아가 글로벌 차원의 활동으로 이뤄진다. 정신적·육체적·직접적 활동이다. 단체에 대한 지원은 경제적 도움, 즉 돈을 통해 이뤄지는 간접적인 활동이다. 갖가지 명분을 위해 일하는 단체를 지원하면서 응원하는 식이다.

인구 6만 도시에서 르네상스 이끈 메디치가


▎하늘에서 내려다본 일본 황궁. 일본 황실은 125명의 천황이 대를 잇는다고 말한다.
연방세법 501(C)조는 미국 명가 모두가 알고 있는 명가 자격 라이선스에 해당된다. 공익을 목적으로 하는 단체나 개인에 대한 지원양식이 501(C)의 골자다. 메트로폴리탄 오페라하우스에 1천만 달러 기부, 페이스북 마크 저커버그의 뉴저지주 교육기관 1억 달러 지원 같은 것이 범주에 들어간다. ‘쾌척(快擲)’이란 어려운 한자와 함께 한국에서도 붐이 인, 이른바 기부다. 501(C) 주무부처인 연방국세청(IRS)은 공익을 구현하는 기부의 대상이 누구인지를 명확히 규정하고 있다. 어떤 목적, 활동, 회계를 필요하는지를 아주 구체적으로 분류한다. 한국에도 부분적으로 도입됐지만, 501(C)는 세금 감면 혜택의 대상이다. 기부한 만큼 세금 감면이 가능하다. 교회에 가서도 헌금 영수증을 받는 이유는 세금 감면을 받기 위함이다. 세금 감면 혜택을 누리기 위해 자식에게 돈을 물려주는 편법으로 가짜 공익단체가 동원될 수도 있다. 미국, 나아가 유럽에서 명가로 불리는 곳이라면 기부를 얼마나 많이 했느냐가 관건이다. 연방국세청은 매년 누가 어떤 분야에 기부를 많이 했는지, 구체적인 랭킹을 발표하고 있다. 전 세계 공익단체는 랭킹순위를 보면서 지원금 모금에 나선다. 종교·문화·체육·인권·환경·과학·여성 등 각종 공익사업의 승패는 바로 기부금 모집이 얼마나 순조로운가에 달려 있다. 대의명분을 앞세우는 과정에서 초대형 파티나 의식도 벌어진다. 기부금을 많이 낸 사람일수록 상석(上席)을 차지한다. 모두가 참석한 자리에서 명가가 탄생하고, 기부활동을 확장하면서 명가로 인정받게 된다.

메디치가는 동서고금을 통해 최고의 명가 중 하나일 듯하다. 잘 알려진 대로, 15세기 초 르네상스 창조에서부터 관여해온, 문화·예술 지원의 대부(代父)다. 메디치가에 대한 얘기는 하루 종일 해도 모자랄 정도로 깊고도 방대하다. 대를 이어 지속된 메디치가의 문화 지원사업은 왜 서양의 문화가 동양의 문화를 압도하게 됐는지를 이해하게 만드는 단서이기도 하다. 동양의 문화는 최고통치자의 돈과 취향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소수를 위한, 소수에 의한 예술활동이다. 관심의 영역이나 깊이가 극히 제한적이다. 메디치가가 지원한 르네상스는 황제나 교황의 돈이나 취향이 아닌, 15~16세기 피렌체의 정서를 반영한 것이다. 성(聖)의 로마 교황과 속(俗)의 유럽 왕들을 연결하는 도시인 피렌체 시민들의 세계관이 메디치가를 통해 나타난다. 보티첼리·미켈란젤로·다빈치·라파엘로·밧사리·브루넬레스키는 메디치가를 통해 탄생된 르네상스의 화신들이다.

르네상스의 거목들이 인구 6만 명에 불과한 15세기 피렌체에서 한꺼번에 나타날 수 있었던 이유는, 성과 속의 결합을 통한 범시민적 가치관의 발현에 있다고 볼 수 있다. 그 같은 세계관과 가치관은 예술을 생활의 일부로 받아들이게 만든다. 특별한 사람을 위한 문화가 아니라, 시민 모두가 생활 속에서 즐기는 예술이다. 파리의 루브르박물관, 뉴욕의 메트로폴리탄뮤지엄에 가면 유럽과 아시아의 문화예술품이 자리를 차지한다. 양적으로 볼 때 서양이 압도적이다. 서양의 작품들은 많은 사람들의 손을 거친 시민의 예술에 해당된다. 아시아의 작품은 왕이나 귀족을 위한 특권층의 액세서리에 제한된다. 한국이 자랑하는 고려청자는 서민을 위한 작품이 아니다. 르네상스의 그림과 각종 예술작품들은 피렌체 시민들의 기호를 대변한, 당시 시민들의 얼굴에 해당된다. 메디치가는 그 같은 업적을 창조해낸 파이오니아다. 미국에서 말하는 명가의 조건은 기부액의 정도에 있다. 유럽발 명가의 경우 기부액도 중요하겠지만, 문화 창조에 대한 기여도가 한층 더 중시된다. 돈이 얼마나 많으냐보다, 예술을 얼마나 이해하느냐가 관건이다. 메디치가는 유럽이 내세우는 명가의 모범에 해당된다.

필자의 개인적인 체험이지만, 중요한 역사적 인물을 만나기 위해 3년 전 피렌체에 들른 적이 있다. 대상은 메디치가의 후손이다. 도쿄(東京)에도 자주 들르는 인물로, 피렌체 현지에서 이탈리아 요리 관련 단체를 운영한다는 정보를 일본인 친구로부터 얻어냈다. 그러나 만나러 가기 직전에 그만둬야 했다. 메디치가 후손을 만나러 간다고 하자, 이탈리아인 모두가 웃었기 때문이다. 메디치가 직계라 주장하는 사람이 전 세계에 1만 명은 넘을 것이라 알려줬다. 그럴듯한 외모에다 품격을 자랑하지만, 전부 가짜라는 것이다.

현존 ‘최고(最古)’의 로열패밀리 일본 황실


▎1. 프랑스 파리의 로스차일드 은행. 이 은행은 과거 직원을 해고하지 않는 것으로도 유명했다. / 2. 1960년대 회사 집무실에 둘러앉은 로스차일드 가족들. 로스차일드 가문은 유럽뿐만 아니라 미국의 경제계에도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고 알려져 있다.
메디치가는 1743년 ‘안나 마리아 루이저(Anna Maria Luisa de’ Medici)’의 죽음과 함께 사라졌다고 한다. 이탈리아 역사가가 공인한 역사적 사실이다. 메디치가는 유럽 실권자들 모두와의 정략결혼에 들어간다. 자신들의 재산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그 과정에서 정작 자신들의 피를 잇지 못하는 우를 범한다. 메디치라는 성을 가진 인물은 안나 마리아 루이저가 마지막이다. 따라서 이후 나타난 메디치 후손은 전부 가짜다.

필자가 만나려던 메디치가의 후손은 일본 코미디 프로그램에 자주 출연하는 전속배우일 뿐이라고, 피렌체 현지인들이 귀띔해줬다. 메디치가가 역사에 나타난 것은 14세기 중엽, 조바니 메디치(Giovanni de’ Medici)를 통해서다. 안나 마리아 루이저가 세상을 뜬 1743년까지 약 300년간 지속됐다. 유럽, 나아가 세계 문화의 수준을 한 단계 올리는데 공헌한 명가지만, 한순간 빛을 발하고 사라진 유성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300년 역사가 남긴 명가로서의 품격과 권위 그리고 자격조건은 이후 세계인 모두의 교훈으로 남게 된다.

역사적으로 볼 때, 명가의 대부분은 황제·교황·귀족과 같은 지배계급을 배경으로 한다. 메디치가의 경우 세 명의 교황을 만들어낸, 당대 최고의 지배계급이다. 문화 지원은 지배계급으로서의 권위를 지키고 이어가기 위한 수단에 해당한다. 나만 잘 먹고 잘사는 것이 아니라, 시민들에게 품위 있는 볼거리를 제공하면서 존경받는 식이다. 최고 지배계급으로서의, 세계 역사의 중심에 선 명가를 들라면 크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을 듯 하다. 먼저 20세기 이전에 번성한 역사로서의 명가다. 합스부르크·부르봉·메디치·로마노프·오스만이 대표적이다. 이어 21세기까지 이어지고 있는 현재진행형으로서의 왕실이나 최고 권위다. 영국·스페인·네덜란드·일본·바티칸이다. 과거 현재의 명가를 전부 합치면 10개에 달한다. 이들 명가 10선(選)중, 일본은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로열 패밀리에 해당한다.

기원전 660년 1대 천황 신무천황(神武天皇)이래 지금까지 전부 125명의 천황이 대를 이어왔다고 주장한다. 일본은 장수대국이다. 명가로서의 천황의 역사도 최장수다. 전 세계를 통틀어 200년 이상 역사를 가진 기업의 수는 5586개다(2014년 기준). 일본은 3146개로 전 세계 200년 장수기업의 58%나 차지하고 있다. 500년 이상 기업도 147개, 1천 년 이상 기업은 21개에 달한다. 일본에서 장수기업이 엄청 많이 존재한다는 데 대한 분석이 분분하다. 기술 혁신, 소비자 중심 경영과 같은 얘기도 있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는 다른 데 있다. 최소한 1500년 이상의 역사를 자랑하는, 천황이란 존재가 장수기업을 만든 가장 큰 동인(動因)이다. 지배계급이 변하지 않고 이어가는 한, 관련된 먹이사슬들도 장수만세로 나아갈 수 있다.

명가를 얘기할 때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으로 로스차일드가(The Rothschild)를 빼놓을 수 없다. 앞서 살펴 본 지배계급으로서의 명가 10선과 확연히 구별되는, 21세기 현존 명가로서의 로스차일드가다. 특별히 왕이나 귀족과 연결된 ‘통뼈’가 아니라, 보통 집안에서 시작돼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글로벌 명가다. 로스차일드의 역사는 18세기 후반부터 시작된다. 독일 프랑크푸르트 내 게토(Getto)가 출발지다. 게토란 유대인 집단촌이다. 유럽에서 유대인은 예수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이교도로 받아들여진다. 자신들만의 문화와 언어를 가진 선민의식(選民意識)으로 가득 찬 별종이다. 보통 도시주변 북쪽 빈민가가 게토의 주거지다.

‘장사꾼’에서 명문가로 거듭난 로스차일드


▎2013년 11월 존 F 케네디 전 미국 대통령의 장녀인 캐럴라인 케네디 신임 주일 미국 대사는 부임 당시 일본 황실이 마련해준 마차를 타고 황궁에 도착하고 있다.
로스차일드를 세상에 알린 처음으로 알린 인물은 ‘마이어 아무셀 로스차일드(Mayer Amschel Rothschild)’다. 마이어의 출세는 프랑크푸르트 공국의 궁중 유대인이란 직함에서 출발한다. 궁중 유대인이란 궁중 내 특급 신용대출업자라 보면 된다. 실력자의 보호 아래 궁중 내 귀족들을 상대로 돈놀이를 하는 식이다. 셰익스피어의 소설 <베니스의 상인>에서 보듯, 유대인 샤일록의 직업은 고리대금업자다. 고리대금업, 은행, 보석상은 유대인이 살아가는 가장 보편적인 방식이다.

18세기 말 프랑크푸르트는 오늘날의 중국 상하이(上海) 정도에 해당된다. 투자가 몰려들고 전 세계로부터의 정보도 흘러 넘쳤다. 마이어 사후 자식 5명이 유럽 전역에 분산 배치된다. 프랑크푸르트를 본부로 하면서, 비엔나·런던·나폴리·파리가 분점으로 활용된다. 유럽이 식민지 개발에 본격적으로 나서던 19세기 초, 로스차일드는 유럽 전역을 대상으로 한 돈벌이 나선다. 은행업이 주지만 무역과 밀수에도 손을 댄다. 나폴레옹과 런던 왕실과의 갈등을 이용한 영국과 유럽을 오가는 장사로 엄청난 부를 축척한다. 런던의 싼 물건을 유럽에, 유럽의 싼 물건을 런던에 넘기는 식이다.

19세기 초 로스차일드가 구축한, 독자적인 아날로그 인터넷 망은 단기에 부를 축척할 수 있게 된 가장 큰 이유다. 비둘기 통신망이다. 로스차일드는 비둘기를 훈련시켜 5개 도시를 연결하는 독자적 정보망을 구축한다. 유대인만이 판독 가능한 히브리어로를 통한 아날로그 정보망이다. 나폴레옹과 영국이 격돌한 워털루 전쟁 때의 비둘기 전령사 일화는 널리 알려져 있다. 로스차일드가 신속하고도 정확한 독자적 정보망을 갖고 있다는 것은 당시 런던 경제계의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워털루 전쟁에서 영국이 졌다는 정보를 비둘기를 통해 받았다고 외부에 흘린다. 곧바로 영국 국채가 폭락한다. 로스차일드는 기다렸다는 듯, 영국 국채를 대량 매입한다. 워털루 전쟁에서 나폴레옹이 졌다는 소식을 알고 있었지만, 거짓 정보를 흘려 뒤통수를 친 것이다.

단기간에 유럽 최고의 부자로 올라선 로스차일드는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가와 연결돼 귀족으로 변신한다. 19세기 중엽부터는 당시의 신문명인 철도에 투자한다. 유럽 전역 철도가 로스차일드의 휘하에 들어간다. 산업화가 가속화되면서 첨단 에너지로 자리 잡은 석유에도 손을 대고, 러시아 투자를 주도한다. 1904년 러일전쟁 때는 일본의 국채 발행을 돕고, 국채도 직접 구입한다. 로스차일드가 없었더라면 러시아를 상대로 한 일본의 전비(戰費) 조달이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이후 제1, 2차 세계대전을 통해 우여곡절을 겪지만, 21세기의 로스차일드는 런던을 중심으로 한 투자기업으로 남아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주로 스위스에서 활동하면서 세계 부자들의 재산 관리에 주력하지만, 미국을 움직이는 ‘돈의 화신’에도 깊숙이 관련돼 있다. 투자은행 모건스탠리는 로스차일드가 투자한 미국 내 ‘구멍가게’에 해당된다.

미국 내 로스차일드의 영향력과 권위의 출발점은 미국 경제, 나아가 세계 경제의 좌표가 되는 ‘특별한 기관’에서 시작됐다.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다. 흔히들 FRB는 정부기관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형식적으로 볼 때는 투자가들의 돈에 기초한 주식회사 형태로 운영된다. FRB의 원조에 해당되는 미국 중앙은행이 주식회사 형태에서 출발했기 때문이다. 로스차일드는 미국 독립운동 직후 만들어진 미국 중앙은행의 주식을 절반 이상 보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주식을 갖고 있다고 FRB 정책에 영향을 주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FRB 내부 인선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힘을 발휘할 수 있다.

캐럴라인 케네디가 아베 방미의 ‘보증수표


▎1. 케네디가의 전성기를 이끈 존 F 케네디 전 미국 대통령과 가족들. / 2. 석유왕으로 불리는 존 D 록펠러의 록펠러가는 미국을 대표하는 명문가로 꼽힌다.
로스차일드가 명가로 손꼽히는 이유는 단순히 돈에 있지 않다. 유대계를 대표하는 글로벌 기업으로, 근현대사의 초대형 사건에 깊숙이 관여한 인류 역사의 증인이기 때문이다. 유대인을 탄압한 러시아 공산당과 독일 나치와의 불협화음에서 보듯, 돈벌이에 나서면서도 유럽의 양심이자 정의로 활동해왔다는 점도 로스차일드 신화를 만들어낸 가장 큰 이유다. 부분적으로 들어가면 로스차일드의 이중성도 드러나지만, 큰 흐름을 보면 유럽이 함께 만들어낸 명가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로마 교황이 2차대전 당시 무솔리니·히틀러 정권과 결탁했던 것처럼, 명가란 이름을 가진 집안치고 100% 깨끗한 곳은 단 하나도 없을 듯하다.

미국은 지배계급과 무관한 명가가 가장 많은 곳이다. 왕이나 귀족 자체가 없는 자본주의 총아가 미국이다. 보는 각도에 따라 다르겠지만, 명가의 대명사로 불리는 집안은 크게 두 군데로 압축될 듯 하다. 케네디가와 록펠러가다. 케네디가는 정치계, 록펠러가는 경제계를 주름잡는 집안이다. 4월 말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가 미국 의회에서 연설할 당시 케네디가의 장녀에 해당되는 인물이 의회 단상에 앉아 있었다. 아베가 초대손님으로 가장 먼저 소개한 인물로, 주일본 미국 대사인 캐럴라인 케네디다. 1963년 11월 22일, 텍사스주 댈러스에서 암살된 케네디 전 대통령의 장녀다. 아베는 일본에서 일한 전직대사들의 이름을 하나씩 열거하면서 케네디 현직 대사를 상하 양원의원들에게 소개했다. 모두가 기립박수로 그녀를 맞이했다.

아베의 퍼포먼스는 치밀히 계산된 것이었다. 모처럼 의회에 가서 연설을 하면서, 자국에 재임했던 미국 대사를 호명하는 지도자는 아베밖에 없을 듯하다. 이유는 케네디가라는 명가에 있다. 케네디가 출신이란 이유 하나만으로 만병통치약이다. 아베 연설에 대한 한국의 신문·방송의 평가를 보면, 가장 중요한 부분을 놓치고 있다. 명가의 장녀인, 캐럴라인 케네디가 지지하고 보장한 연설이란 점이 아베 방미의 하이라이트 중 하나다. 케네디가는 공화당·민주당 관계없이 모두 지지하는 집안이다. 캐럴라인 케네디는 본인만 원한다면, 상원의원, 국무장관 나아가 부대통령에도 ‘간단히’ 오를 수 있다. 카우보이 나라에서 탄생된, 명가 중의 명가가 케네디가다. 일본을 끼고 도는 미국 내 최선봉 친일의 역할을 케네디가가 맡고 있는 셈이다.

역사가 미천한 미국 역사에서 보듯, 록펠러가도 100년을 약간 넘긴 역사를 가진 신흥 명가다. 출발점은 석유왕으로 불리는 존 록펠러(John Davison Rockefeller)다. 오하이오주의 석유를 통해 19세기 말 등장한다. 이후 20세기 들어 뉴욕을 거점으로 하면서 급성장한다. 은행업과 부동산이 주된 비즈니스 영역이다. 뉴욕을 상징하는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을 시작으로, 2001년 9·11동시테러 당시 희생된 세계무역센터, 체이스맨해튼 플라자 등 뉴욕 요지의 대부분이 록펠러 소유다. 모마(MOMA: Museum of Modern Art)로 불리는 뉴욕 현대미술관, 뉴욕 문화의 상징인 링컨센터, 1961년 11월 17일 박정희 혁명군 의장이 미국에 들렀을 때 연설했던 아시아문화센터도 록펠러가 소유다.

하버드·프린스턴·예일 등 미국의 명문대학들도 록펠러의 지원을 받지 않은 곳이 드물다. 국제관계평의회(The Council on Foreign Relations)와 브루킹스연구소와 같은, 미국과 세계를 움직이는 워싱턴 싱크탱크의 지원도 엄청나다.

미국의 정신을 창조해낸 록펠러가의 활약상

록펠러가가 명가로 추앙받는 이유는 바로, 록펠러 재단을 통해 벌인 갖가지 공익사업에 있다. 엄청난 자금력을 바탕으로 미국 전체의 문화·교육·지식사업에 투자한다. 물론 예술활동에 대한 남다른 관심도 빼놓을 수 없다. 간단히 말해 미국이란 나라가 갖는 소프트와 하드 양면을 지지하고 새롭게 창조해낸 집안이다. 케네디가가 정치에 특화한 ‘급소형’ 명가인데 비해, 록펠러가는 미국 사회 전체를 커버하는 ‘사방팔방형’ 명가에 해당된다. 미국의 이념과 이상을 전 세계에 퍼뜨리는 데 공헌한, 아메리칸 드림과 프리덤의 상징이 바로 록펠러가다.

한국의 명가는 돈 많은 통뼈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그러나 록펠러가의 경우에 비교할 때, 공익에 대한 공헌도는 ‘새 발의 피’ 수준이다. 명가가 많이 나타난다는 것은 문화·예술·사회적 측면의 품격이 높아진다는 의미다. 한국 자본주의 역사는 100년을 막 넘긴 상태다. 시기적으로, 전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는 한국의 명가가 탄생할 때도 된 듯하다. 명품에 대한 집착도 좋지만, 명가를 통한 품(品)과 격(格)으로 채워진 풍요로운 세상을 기대해본다.

- 유민호 월간중앙 객원기자, ‘퍼시픽21’ 디렉터

201506호 (2015.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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