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생활

Home>월간중앙>문화. 생활

[강유정의 ‘책 읽는 영화관’] 변해가는 것의 공포… 영화 <스틸 앨리스> - “삶의 모순(矛盾) 속에서도 우리는 존재한다.” 

노화와 병으로 훼손된 육체를 가진 인간이 존엄성을 찾기 위해 떠나는 마지막 여행… ‘촉각·시각·청각으로 분화(分化)되는 제 2의 탄생’ 속으로 

강유정 영화평론가
잘나가는 소설이 드라마나 영화화되는 일은 흔하다. 실패한 경우도 많지만 폭발적인 흥행 성공을 거둔 사례도 적지 않다. 원작이 영화로 만들어지는 과정에는 테크놀로지와 컨텐트의 다양한 변주가 이뤄진다.

▎완벽한 삶을 살아온 하버드 대학 여교수 앨리스. 그러나 50세 되던 해 조발성 치매라는 진단을 받은 후 그녀는 혼돈에 빠진다. 그는 흐려지는 기억 속에서도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꿋꿋이 자신을 지켜나간다. 영화 <스틸 앨리스>의 한 장면.
나이가 든다는 것은 변해가는 것이다. 말랑말랑 보드랍던 피부가 조금씩 단단해지고 어느 순간이 지나면 단단함도 허물어진다. 방금 젖을 먹었음에도 향긋한 침 냄새를 풍기던 아기의 입은 조금씩 참기 힘든 냄새를 가진 구멍으로 변해간다. 머리카락도 윤기와 색을 잃고 뼈의 밀도도 약해지며 장기의 기능도 부실해진다. 걷는 것도 먹는 것도 심지어 잠자는 모습도 어릴 때와는 다르다.

사회학자 노베르트 엘리아스는 저서 <죽어가는 자의 고독>에서 ‘노화란 죽음에 대한 공포이며 불쾌와의 싸움’이라고 말했다. 피부 각질이 떨어진 채 오줌주머니를 찬 노인을 떠올려보라. 말하자면 우리가 생활의 영역과 분리하고 싶어 하는 어떤 것과 노년은 너무 가까이 있다.

‘질병’이 만들어낸 삶의 아이러니

사람들은 병을 두려워해 그것을 병원이라는 비일상적 공간에 격리하고 배설물의 냄새를 위생구역 밖으로 밀어낸다. 그런데 늙게 되면 당연히 병들고 나쁜 냄새도 몸에서 떨쳐내기 힘들다. 그게 바로 노화의 증후이며 죽어가는 증거다. 갓 태어난 아이처럼 노인들 역시 기저귀를 차지만 아이의 경우처럼 그것을 경이롭고 아름답게 바라봐주지 않는다. 노인에게는 이미 그것을 행복하게 처리해줄 절대적 보호자, 부모가 없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가 두려워하는 노년은 젊음의 상실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젊을 때 누렸던 인간적 위엄의 상실에 대한 공포이기도 하다. 누군가의 도움 없이 가고 싶은 곳을 가고 먹고 싶은 것을 먹으며 배설할 수 있는 것, 최소한의 비밀을 스스로 지킬 수 있는 능력,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인간의 최소 위엄이며 품격이다.

그 어떤 노인성 질환보다 치매를 두려워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치매는 말하자면 육체보다 정신을 침략하는 질병이다. 인간의 존엄은 육체적 자율성으로 체험되지만 결국 육체는 정신의 처소일 수 밖에 없다. 정신의 온전함이 훼손된다면 육체는 통제되지 않는 에너지 덩어리에 불과하다. 어떤 점에서는 오히려 몸이 쇠잔해 세상을 떠나는 게 더 행복해 보일 수도 있다. 적어도 마지막 순간까지 부끄러움과 염치를 알고 인간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품위 있는 이별도 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육체보다 먼저 정신이 세상을 떠나는 질병, 알츠하이머에 대한 공포는 바로 여기에 있다. 인간성과의 결별 말이다.

영화 <스틸 앨리스>는 바로 이 지독한 질병, 알츠하이머에 걸린 한 여자의 이야기이다. 게다가 그는 알츠하이머와 가장 거리가 멀어 보이는 지적으로 매우 우수한 여성이다. 육체적으로 뛰어난 운동선수가 난치병에 걸린다는 게 무척 의아하듯 지적으로 우수한 여성의 알츠하이머 발병 역시 아이러니하다. 게다가 지적으로 우수한 사람에게 알츠하이머의 악화 속도, 즉 나빠지는 정도가 평균의 사람들보다 훨씬 더 빠르고 심각하다는 데에 이르면 이 아이러니는 더욱 심화된다. 똑똑하기 때문에 알츠하이머에 강한 게 아니라 뇌 활동이 왕성하기 때문에 병의 악화 속도가 더 빠르다는 것이다. 이쯤 되면 우리는 인정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병을 선택하는 게 아니라 병이 우리를 선택하는 것이라는 사실 말이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겐 죽음의 방식을 선택할 권리도 힘도 없다. 그것을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죽음, 그 자체뿐인 것이다.

영화 <스틸 앨리스>의 출발은 극명한 모순이다. 이 영화는 작가 리사 제노바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리사 제노바는 하버드 대학 인지심리학 박사과정에서 수학하던 할머니의 알츠하이머 발병에 충격을 받고 소설을 기획한다. 소설의 주인공 앨리스가 인지심리학의 대가로 설정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소설 속에서 앨리스는 하버드 대학의 종신교수다. 전 세계 최고 대학의 지성답게 그는 무척 냉정하고 오만하다. 자신의 학업에서 두드러진 성과를 내는 한편 건실하고 똑똑한 남편에 세 남매까지 두었다. 엄마로서 여자로서 교수로서 그의 인생 학점은 A+ 만점처럼 보인다. 그 스스로도 자신이 인생의 우등생임을 잘 알고 있다.

하버드 출신 중산층의 A+ 학점 삶

앨리스의 오만함은 자신의 인생에 큰 실패나 낙오, 좌절이 없었다는 데서 비롯된 자신감이기도 하다. 이처럼 실패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은 때로 타인에 대한 이해나 배려가 부족하다. 모두 다 누린 자들이 보이는 특유한 오만함은 앨리스가 자기 자녀들에게 고집하는 확신과 욕심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앨리스의 첫째 딸 안나는 로스쿨을 졸업한 변호사이며 둘째 아들은 의사다. 미국 사회가 추앙하는 ‘완벽한’ 가정의 꿈에 두 아이들이 훌륭한 각주가 되어준 것이다. 종신 교수직을 성취한 남편과 아내, 그리고 세상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직업을 가진 아들, 딸.

이쯤 되니 언니, 오빠보다 더 똑똑해서 큰 기대를 모았던 막내딸 리디아의 선택을 두고 앨리스의 심기는 불편해질 수밖에 없다. 앨리스는 지적인 중산층 부모의 이상을 리디아에게서 실현하고자 한다. 크게 간섭하지 않고 되도록 많은 기회를 줌으로써 균형 있는 중산층 아이로 키우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의 ‘이상’은 속물성을 감춘 위선이기도 하다. 이는 리디아가 대학을 거부하고 배우로서의 삶을 선택한 것에 대해 앨리스가 갖는 불편함에서 잘 드러난다. 앨리스는 막내딸이 대학을 포기하자 무척 속상해 하고 어떻게든 딸을 대학에 보내고자 한다. 배우로서의 삶을 착실하게 계획하고 있다고 아무리 말해도 하버드 종신교수인 앨리스의 눈에는 백수의 변명에 불과하다.

앨리스는 하버드 종신교수로서의 삶, 하루치의 조깅, 완벽한 두 자녀라는 그림 속에 행복한 나날을 보낸다. 학생들에게도 늘 완벽한 교수로 칭송받고 학회에서도 유능한 동료로 인정받는다. 남편 존과 여전히 경쟁심을 느낄 정도로 스스로를 현역으로 여긴다. 그의 나이 이제 겨우 50세, 아직 늙었다 해도 은퇴해서 세상과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은거 하기엔 너무 빠른 나이라고 생각되는 것이다.

‘치매’에 걸린 젊은 여교수의 속사정


▎치매에 걸려 딸의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할 만큼 상태가 나빠진 어느 날, 앨리스는 우연히 자신이 쓴 영상편지를 발견한다. 영상 속에서 그는 “지금이 내가 나일 수 있는 마지막 시간일 거야”라고 말한다.
그런데 완벽한 앨리스에게 드디어 문제가 생겼다. 매일 습관적으로 달리던 길에서 행선지를 잃고 자신이 집필한 책의 제목을 기억해내지 못하며 중요한 약속을 아예 잊기 시작한다. 단어로 적어둔 메모를 보고는 암호를 들여다보듯 심각해 한다. 앨리스가 병을 발견하고 인정하고 결국 앓게 되는 과정은 육체적 질병을 선고 받은 자들의 고통보다 훨씬 더 복잡하게 표현된다.

앨리스는 우선 자신의 증상을 갱년기 우울증으로 믿으려 한다. 조발성 치매라는 진단을 받고 나서도 유전자 검사를 통해 치매가 아닐 가능성을 찾고자 노력한다. 심지어 그는 자신이 차라리 암에 걸렸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적어도 지적인 앨리스의 모습은 끝까지 지켜낼 수 있기 때문이다.

소설 속에서 앨리스의 당혹감과 자멸감은 매우 구체적인 심리 묘사를 통해 드러난다. “하버드 교수가 아닌 자신을 상상하기조차 두려웠다”라고 말하는 앨리스. 딸 안나의 “제 아이들은 돌연변이 유전자를 갖고 태어나지 않을 거예요”라는 말에 우선은 안심하다가도 씁쓸함을 느낀다. 그는 그래선 안된다는 걸 알면서도 자신의 딸 안나의 건강함을 무의식 중으로 시샘하고 있었던 것이다. 소설 속에 묘사된 앨리스는 모성애 넘치는 따뜻한 엄마라기보다는 자기주장이 강한 인간에 가깝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병 앞에서 하릴없이 무너진다.

학교생활을 관두자 무너짐이 더욱 가속화되었다는 것도 이와 연관된다. 학교의 복잡한 시간표가 하루를 마디지어 주는 일종의 경계였다면 무한대 휴식이 주어지자 하루가 묘연해 진다. 먹고 자고 일어나는 단순한 생활이 그에게는 오히려 거대한 혼돈으로 다가온다. 규칙적인 운동과 휴식으로 건강해진 육체는 이러한 혼돈을 더욱 가중시킨다. 그는 더 이상 자기 스스로를 자기 자신이라고 말하기 어려워진 것이다. 인생의 기록, 논문과 학위의 과정, 바로 그러한 것들이 바로 자신의 모습이라고 믿고 있었기에 앨리스의 고통은 더욱 심각해진다.

혼돈과 공포, 질투와 낙담. 이 섬세한 감정의 부분들은 배우 줄리앤 무어의 연기를 통해 구체화된다. 지적 월등함에 대한 자긍심, 그리고 그것을 잃어감으로써 사라진 자존감과 같은 추상적 단어들은 사실 대사로만 전달된다면 무미건조한 ‘사실’에 불과할 기록이다. 소설이 병에 걸린 당사자의 입장, 그 내면을 서술해냈다면 영화는 줄리앤 무어, 그의 시선으로 그려진다. 주목해야 할 것은 그가 유심히 바라보는 세상이 바로 자신이라는 것이다. 앨리스는 거울 속 자신을 보며 거듭 누구인지 묻는다. 마침내 그 스스로의 얼굴을 낯설어 하게 될 것을 알기에 더욱 열심히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흩어진 ‘조각’ 속에서 ‘나’를 찾기


▎앨리스의 첫째 딸 안나는 로스쿨을 졸업한 변호사이며 둘째 아들은 의사다. 똑똑해서 큰 기대를 모았던 막내딸 리디아(사진 오른편)는 대학을 거부하고 배우의 길을 걷겠다고 하자 앨리스는 심난해진다
소설 속에서는 소소하게 다뤄졌지만 영화 속 연설장면이 명장면이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줄리언 무어는 연설 중 방금 읽었던 부분을 다시 읽지 않기 위해 즉 알츠하이머 환자가 아닌 한때 하버드 교수로 일했던 알츠하이머 환자로서 위엄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앨리스의 모습을 무척 인상적으로 보여준다. 그가 연설문 뭉치를 바닥에 떨어뜨리고 말 때 관객들의 가슴도 쿵 하니 떨어지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애쓰는 여자, 현재의 상태에 만족하지 않고 조금이라도 더 나은 사람이고자 애쓰는 사람, 바로 그가 앨리스임을 줄리언 무어는 본능적으로 파악하고 있었던 셈이다.

신약 임상실험에 자원했지만 1년 반의 시간이 별 의미가 없었음이 밝혀진다. 결국 시간 앞에서 앨리스는 하루하루 더 나쁜 상태의 알츠하이머 환자가 되어가는 수밖에 없다. 그는 자신 앞에 앉은 젊은 여자가 첫째 딸 안나라는 것을 잊고 독백을 연기하는 젊은 여배우가 막내딸 리디아라는 사실도 잊어 간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앨리스다. 우리의 육체가 모두 훼손되어 사라진다고 해도 그게 곧 우리 자신인 것처럼 기억이 마멸되었다고 해서 그가 앨리스가 아닐 수는 없는 것이다. 그가 자신을 잊어도 주변 사람들이 그를 기억해주는 한 그는 관계 속에서 앨리스로 존재할 수 있다.

영화의 연출을 맡은 리처드 글랫저 감독은 루게릭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영화 <스틸 앨리스>는 리처드 글랫저의 유작이 됐다. 근육의 기능이 하나하나 소멸되어 마침내 숨조차 쉴 수 없는 감독의 병은 하나둘 기억을 잃어가는 앨리스의 병과 묘한 대조를 이룬다. 앨리스도 감독도 관객들에게 눈물을 요구하지 않는다. 당당하고 똑똑한 학자가 앨리스였듯이 지금 통제 불가능한 병에 시달리는 환자 역시 앨리스다. 병, 노화, 죽음 이 모든 것은 삶의 문제다. 훼손된다고 해도 그 자체로 인간은 존재한다. 두뇌의 대뇌피질이 굳고 뇌세포가 사라진다고 해도 기억은 촉각으로, 시각으로, 청각으로 남는다. 어떤 방식으로든 우리는 존재하는 것이다.

강유정 - 영화·문학평론가. 강남대 국문과 교수. 2005년 <조선일보> <동아일보>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동시 당선돼 평론 활동을 시작했다. 고려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현재 KBS <박은영, 강유정의 무비부비2> 프로그램을 진행 중이다. 저서로 <스무살 영화관> <사랑에 빠진 영화, 영화에 빠진 사랑> 등이 있다.

201506호 (2015.05.17)
목차보기
  • 금주의 베스트 기사
이전 1 /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