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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갈피] 끝없는 소모전에 스러진 사무라이 

중일 두 나라가 모든 것을 걸고 맞붙은 진검승부 … 거의 모든 전투의 뒷이야기, 병사들의 피눈물 나는 생과 사의 기록 


중일전쟁의 가장 끔찍한 장면은 난징대학살이다. 일본 당국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동아시아인의 기억에 아프게 각인돼 있다. 난징 대학살의 가장 극적인 고발은 1990년대 말에 국내 번역돼 출간된 아이리스 장(Iris Chang, 중국명 장춘루, 1968~2004)이 쓴 <난징 대학살>이다. 이 책을 읽은 사람들이 받은 충격은 대단했다. 난징 시민을 구하러 나섰던 외국인과 희생자들의 일그러진 모습이 담긴 30여 장의 사진이 함께 실렸다. 일본 군인들에 의해 잔인하게 희생된 이들의 처참한 모습은 이루 다 형언할 수 없다.

아이리스 장은 미국에서 출생한 중국계 2세다. 결혼 후 전업 작가의 길을 걸었던 그가 3년여에 걸쳐 심혈을 기울여 쓴<난징 대학살>은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됐다. 아이리스 장 역시 이 한 편의 작품으로 일약 세계인의 이목을 끌었다. 그는 2004년 11월, 캘리포니아주 고속도로변 차 안에서 머리에 총을 맞아 숨진 채 발견됐다. 1997년 <난징 대학살> 출간 후, 일본 우익분자들의 협박에 줄곧 시달려온 것으로 전해졌다. 당국은 증언자의 말을 토대로 자살로 추정했다. 미국인 남편과 아들을 남겨둔 채 마감한 36세의 짧은 생애였다. ‘잊힌 홀로코스트(Holocaust)’를 일깨우려 한 용기가 결국 그녀를 죽음으로 내몬 것이다.

<중일전쟁>의 저자는 울산광역시 동구청의 현직 7급 공무원인 권성욱(41) 씨다. 울산 출신으로 울산대 조선공학과를 졸업했다. 학창 시절부터 전공보다 전쟁사(史)를 더 좋아했다. 네이버 ‘밀리터리 군사무기 카페’의 운영진을 맡고 있는 ‘군사 마니아’다. 권씨 역시 도서관에서 우연히 아이리스 장의<난징 대학살>을 읽고 중일전쟁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됐다고 한다.

방대한 자료의 섭렵이 이 책을 탄탄하게 받쳐준다. 인터넷을 비롯하여 국내외 관련 서적과 기사, 200편 이상의 학술논문을 검색하고 각각의 자료를 꼼꼼하게 비교 대조하면서 집필한 결과물이다. 그래서 자료수집부터 책 완성에 이르기까지 4년 반이란 시간이 걸렸다. 원고 분량은 3500매(916쪽). 지금껏 나온 국내에서 출간된 중일전쟁 관련 책 가운데 가장 풍부한 자료를 갖췄다고도 볼 수 있다.

중일전쟁에 대한 주류의 평가를 뒤집어본 것도 눈길을 끈다. 중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장제스(蔣介石)에 대한 재평가다. 장제스의 최대 공적으로 ‘일본군의 주요 전력을 중국 대륙에 묶어둔 것’으로 꼽는다. 장제스가 소위 ‘내선작전(內線作戰)’을 통해 막강한 일본군을 광활한 중국 대륙에 묶어둔 덕택으로 미군이 태평양전쟁에서 결정적 승기를 잡을 수 있었다는 시각이다.

이미 ‘책갈피’에서 소개한 위텐런 저 <대본영의 참모들>에서도 잘 드러난 것처럼, 저자가 포착한 당시의 일본 군부는 결코 국가의 수족이 아니었다. 천황은 물론 전시 최고 사령부였던 대본영과 내각은 군부를 제어할 수 없었다. 장교들은 누구의 명령 없이도 이미 충분히 제국주의적이었다. 일선의 지휘관들은 마치 폭주하듯이 사건을 일으켰고, 전투를 개시했다. 2천만 명 이상이 사망한 이 거대한 전쟁을 한줌도 안 되는 관동군의 장교가 기획했다니, 참으로 허망하고 어리석은 역사의 전개다.

- 한기홍 월간중앙 선임기자

201506호 (2015.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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