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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현장취재] ‘메르스 포비아’(PHOBIA)에 구겨진 강남스타일 

삼성서울병원 발 ‘대공황’… 감염 공포에 약국·부동산·학교·학원 등 침묵의 시가지 

박지현 월간중앙 기자 김종태 인턴 기자
“또야?” 항간에 떠돌던 ‘D’병원 괴담부터 부분폐쇄에 이르기까지 연일 인터넷뉴스 실시간 검색어 1위에 올랐다. ‘의료 명가’ 삼성서울병원의 몰락인가? 메르스 환자가 마치 판도라의 상자가 열린 것처럼 속출하며 병원은 아예 전쟁터가 됐다. 최고의 방역시스템을 갖췄다는 삼성서울병원에서 빠져나간 메르스 공포는 인근 주민들의 삶까지 공포로 몰아넣었다. 그 현장을 본지 기자가 취재했다.

▎삼성서울병원이 직격탄을 맞았다. 전국 메르스 환자들이 꾸준히 증가하는 가운데 삼성서울병원에서 감염된 사람이 절반이 넘는다. ‘메르스 공포’는 강남 주민들의 삶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 사진·김성룡
1994년 11월 9일. 서울시 강남구 일원동에 ‘최선의 진료, 첨단의학 연구, 우수 의료인력 양성을 통해 국민보건 향상에 기여’한다는 설립이념을 앞세운 대형 병원이 개원했다. 지하 5층, 지상 20층 6만여 평의 규모의 건물 꼭대기에는 삼성그룹 고유의 파란색 로고가 선명하게 나붙었다. 국내 빅3 대형병원으로 꼽히는 삼성서울병원의 탄생이다. 삼성서울병원은 개원 이후 국내 최초 회진로봇 도입, 첨단의료시스템 구축, 국내 최초 지역의료계와의 진료의뢰 체계 등 일류의 길을 걸어왔다. 지난해에는 순이익 287억원을 기록해 국내 정상의 자리를 지켰다. 삼성다운 거침없는 성장이었다. 올해 1월에는 최고 수준의 병원만 받을 수 있는 상급종합병원 인증을 따냈다. 인증은 2019년 1월까지 4년간 유효하다. 의료서비스의 질은 물론 환자 안전 관리의 우수성을 공식 인정받은 쾌거였다.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지난 5월 말 국내에 불어닥친 ‘메르스(MERS-CoV: 중동호흡기증후군) 쓰나미’가 이 병원을 초토화시켰다. 그동안 쌓아 올린 명성은 순식간에 물거품이 됐다. 결국 응급실을 비롯한 주요 병원 시설을 부분 폐쇄하는 초유의 사태를 맞았다. 이 모든 게 불과 약 2주 만에 벌어진 일이다.


▎삼성서울병원이 부분 폐쇄를 밝힌 6월 14일, 본관 1층 로비 바로 옆에 있는 정형외과 외래진료실. 3일 전에 이곳 정형외과에서 진료를 받은 환자가 확진 판정을 받고 난 뒤 폐쇄됐다. / 사진·중앙포토
6월 14일. 10일간 부분 폐쇄 결정을 내린 삼성서울병원은 마치 ‘유령병원’을 떠올리게 했다. 평소에는 방문객들과 차량으로 북새통을 이루던 정문에는 드나드는 사람을 찾아보기가 힘들 정도였다. 응급실 건물 입구는 회색 가림막으로 가려져 있다. 근처를 지나던 시민 한 명이 병원 안쪽을 기웃하며 힐끗 쳐다보더니 입을 가린 마스크를 고쳐 쓰고 잰 걸음으로 병원을 지나쳤다. 간혹 보이는 의료진은 방호복과 마스크, 장갑으로 온몸을 가린 채 바쁘게 움직였다.

메르스가 병원을 덮치면서 전체 병동의 40%가 격리됐다. 이 병원 암센터에 간암으로 입원해 있는 아버지를 면회하러 온 정모(45·여) 씨를 입구에 선 보안요원이 제지했다. 간병인 1명 외에는 출입할 수 없다고 했다. 정씨는 분통을 터뜨렸다. “가족면회까지 막는 게 말이 되느냐. 이러다 아버지가 가족들도 못보고 갑자기 잘못되시기라도 하면 병원이 책임질 거냐?” 정씨의 날 선 항의에 보안요원은 “죄송하다”는 말을 반복했다. 정씨는 “아버지를 다른 병원으로 모시고 싶어도 나갈 수도 없고, 삼성병원에 있던 환자를 받아줄 병원도 없다”며 “만날 수조차 없으니 불안해서 잠도 못 이룬다”고 말했다.

강남을 휩쓴 삼성병원발(發) 메르스 공포


▎6월 11일 용인보건소 구급차량이 삼성서울병원 응급실 앞에 섰다. 차량에서 내린 여성은 방호복을 입고 입원실로 향했다. / 사진·중앙포토
21년 동안 국내 최정상에 서있던 삼성서울병원은 곤두박질치는 위상에 그저 망연자실할 뿐이었다. 6월 16일 현재까지 메르스 확진자는 154명. 삼성서울병원에서 감염된 사람만 75명에 달한다. 국내 최고 시설과 의료진을 구축한 3차 종합병원이 ‘메르스 진원지’란 오명을 쓰게 됐다. ‘관리의 삼성’으로 불리며 그동안 쌓아온 명성이 송두리째 무너졌다. 삼성병원에서 시작된 공포는 주변인 도곡동 일대로 번지며 지역을 패닉 상태로 몰아가고 있다. 진앙지인 삼성병원과 가까이 있는 상점과 약국, 학원, 주택가는 메르스 공포에 속수무책으로 타격을 입고 있었다.

삼성병원이 메르스에 뚫린 것은 5월 27일. 이날 응급실로 찾아온 메르스 14번 환자를 치료한 35번 의사가 확진 판정을 받은 이후부터 순식간에 감염자가 불어났다. 삼성병원은 정부가 6월 7일 감염자 발생 병원의 명단을 공개하기 전까지 ‘D’병원으로 불렸다. ‘D병원은 삼성서울병원’이란 주장과 ‘설마 삼성병원이겠느냐’는 주장이 온라인에서 맞섰다.


▎6월 11일 찾은 삼성서울병원의 장례식장 모습. 정상 운영되고 있었지만 손님이 없어 전광판 불이 모두 꺼져 있다. / 사진·김종태
SNS상에서 ‘의료계 지인’, ‘모 의대 내부소식’이라는 모호한 출처와 함께 떠돌던 병원 명단에 삼성병원이 들어있을 때도 반신반의하는 분위기였다. 일부 매체는 아예 ‘루머’로 단정지을 정도였다. “명단에 나온 대형병원들은 메르스 환자가 대규모로 감염된 평택 성모병원과 달리 초동 조치를 취해 감염 위험성이 전혀 없다”고도 했다.

6월 3일. 강남 대치초등학교가 학부모들의 요구에 따라 임시휴교 결정을 내리자 “강남 아줌마들의 유난스러운 호들갑”이라는 비아냥이 쏟아졌다. 6월 4일에 만난 삼성병원 관계자는 기자의 질문에 대해 “취학 아동을 둔 주부들이 불안한 마음에 추측내용이 사실인 것처럼 떠도는 것일 뿐”이라고 일축했다. 김남중 서울대병원 감염내과 교수는 “(메르스는) 공기로 전파되지 않는다”며 “비말(미세한 물방울)을 통해 2m내에서만 감염이 되기 때문에 학교를 휴업하는 것은 과한 느낌이 있다”고 말했다.


늘어나는 확진자 수와 비례한 메르스 공포


▎서울의 최고 부촌 도곡동 일대도 여느 때와 달리 한산하기만 하다(우). 메르스 ‘괴담’이 돌았던 대치동 S아파트에 붙어 있는 공지사항. / 사진·박지현
4일 오전 8시30분. 삼성서울병원은 전보다 눈에 띄게 인적이 드물었지만 방문객의 발걸음이 띄엄띄엄 이어졌다. 병원 입구에는 열 감지기가 설치돼 드나드는 이들의 체온을 색깔로 보여줬다. 문 옆에는 손 세정제 네 개가 놓여 있었다. 방문객 중에는 메르스 발생이 ‘유언비어’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엑스레이 검진을 받으러 왔다는 최모(70·여) 씨는 마스크를 쓴 채 마치 옆 사람들에게 들으라는 듯 큰소리로 가족과 통화하기 시작했다. “괜찮아, 별 일 없었어. 검사받고 지금 병원 나서는 길이야. 걱정 마.” 최씨는 “삼성병원이 메르스에 위험하다며 자녀들이 절대 가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다”며 “진료가 미뤄질 것이라 생각했는데 (병원에서) 문자가 와서 정상 진료한다고 하길래 나왔다”고 말했다. 그는 “그렇게 말들이 많은데도 병원이 정상 운영하는 건 이유가 있지 않겠느냐”고 되물었다.

하지만 그날 밤 삼성병원 주변은 발칵 뒤집혔다. 메르스 확진 판정을 받은 삼성병원 의사(35번 환자)가 1565명이 참석한 개포동 재개발구역 조합 행사와 의료 심포지엄 등에 참석했다는 박원순 서울시장의 긴급 기자회견이 나왔기 때문이다. 행사 장소였던 양재동 L타워는 이튿날 이른 아침부터 건물 전체 소독에 들어갔다. 행사 예약 취소 전화도 빗발쳤다. 개포동 주공아파트 주민들은 불안감을 감추지 못했다. 단지 내 A초교는 긴급회의를 열어 6월 8일까지 휴교를 결정했다. 확산 당사자로 지목된 35번 환자는 언론 인터뷰를 자청해 박원순 시장의 발표를 강하게 반박했다. 이날 메르스 대책반이 개최한 세미나에서도 감염병 전문가들은 “의료진의 감염 위험은 우려할 수준이지만 지역 사회에 대한 전파는 우려할 만한 수준이 아니다”라고 입을 모았다. 강남 주민들은 다시 혼란에 빠졌다.

기분 나쁜 예감은 여지없이 들어맞았다. 7일 오전 정부는 메르스 확진자 14명 중 10명이 D병원에서 감염됐다고 발표했다. 온라인에서 삼성병원으로 지목됐던 곳이다. 5시간 뒤 정부는 병원명단을 전격적으로 공개했다. 영락없이 D병원은 삼성서울병원이었다. 루머가 사실로 드러난 순간이었다. 삼성병원은 정부 발표보다 3시간 일찍 기자회견을 열고 5월 30일 14번 환자의 메르스 감염 확인 후 의료진과 환자 등 수백 명에 대해 필요한 격리 조치를 취했다고 밝혔다.

6월 8일 오전. 병원은 더 썰렁해졌다. 삼성병원과 일원역을 7분 간격으로 운행하는 셔틀버스는 40여 석 중 30여 석이 비어 있었다. 마스크를 쓴 셔틀버스 기사는 “평소 오전에는 버스 이용자들이 줄을 서서 기다렸는데 절반 정도 줄어든 것 같다”고 말했다. 삼성병원 앞에서 승객을 기다리는 택시들도 평소보다 눈에 띄게 줄었다. 대부분 시동을 끈 채 삼삼오오 모여 메르스를 화제로 삼고 있었다. 한 택시기사는 “수시로 차 내부를 닦고 소독을 했지만 병원 방문자가 없어서 손님이 없다”고 말했다.

본관 1층 접수대 앞 230개에 달하는 의자를 채운 곳은 15개 정도뿐이었다. 평소에는 앉을 자리가 부족할 정도였다. 수납창구도 비어 있었다. 평소 삼성병원에는 하루에 8천여 명 정도의 외래환자가 다녀간다. 병원 관계자는 “진료 예약이 취소돼 지금은 평소보다 외래진료환자가 절반 정도로 줄어든 상태”라고 말했다. 본관에서 운영하는 커피숍 매장 직원은 “매출이 평소의 3분의 2 수준으로 떨어졌다”고 말했다.

메르스의 진원지인 응급실은 출입구 1개를 제외하고 모두 폐쇄됐다. 주변에는 바리케이드가 설치됐다. 유일한 출입구 앞에는 임시 진료소를 마련했다. 병원에서 원래부터 치료를 받던 환자 중에 응급치료가 필요한 환자만 메르스 감염조사를 받은 뒤 응급실에서 진료를 받았다. 처음으로 내원하는 환자, 다른 병원에서 진료를 받다가 온 환자는 아예 출입이 허용되지 않는다.

삼성서울병원 응급실은 연간 6만 명의 환자가 내원한다. 응급환자 이송담당자인 김모(50·남) 씨는 요양병실에 있는 환자를 재활실로 옮기는 중이었다. 김씨는 “현재 대부분의 응급환자들은 다른 병원으로 이송해 진료를 계속 받도록 하고 있다”며 “이곳은 정상적인 응급실 운영이 불가능한 상황”이라고 전했다.

이날 삼성병원에선 국내에서 처음으로 10대 청소년 환자(67번)가 나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이 환자는 뇌종양 수술을 받기 위해 5월 27일 삼성서울병원 응급실에 방문했다가 메르스에 노출됐다.

마지막 자존심마저 내려놓은 삼성병원


▎대치동의 학원가. 학생들이 줄었지만 학원이 휴강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 사진·뉴시스
6월 11일 병원을 다시 찾았다. 병원 의료진과 내원객들은 마스크를 쓰고 TV 모니터를 심각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TV에는 메르스 사태와 관련한 속보가 이어졌다. 삼성병원에서 40대 임신부가 10일 확진 판정을 받았다는 뉴스였다. 5월 27일 밤 어머니의 소화장애 증세로 삼성병원 응급실을 들렀다가 ‘슈퍼 전파자’ 14번 환자에게서 감염된 환자다.

“응급실 외 감염은 없다”고 호언장담했던 삼성병원에서는 이날 뜻밖의 확진 환자도 발생했다. 5월 27일 정형외과 외래진료를 본 환자 이모(77·여) 씨였다. 그는 응급실은 들르지 않았으며, 일반촬영실에서 엑스레이 검사를 받고, 정형외과 진료를 받은 것으로 확인됐다. 병원 측은 “응급실 근처의 남녀 공용 장애인 화장실에서 14번 환자와 동선이 겹쳤을 가능성이 있다”고 설명했다. 병원 측은 ‘응급실 내 감염’이란 기존 입장이 ‘병원 내 감염’으로 확대될까 봐 노심초사하는 빛이 역력했다. 비난이 쇄도했다. 보건의료단체연합은 이날 기자회견을 통해 “지금이라도 병원 전체에 대한 전면 조사가 필요하고 역학조사 결과가 시급히 공개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확진자와 격리자 수가 늘어날수록 병원의 공기는 더욱 냉랭해졌다. 입구에 방호복을 입은 의료진이 며칠 전보다 5~6명 더 늘어나 있었다. 병원으로 들어가던 외국인 한 명을 의료진이 막아 섰다. 미열이 감지돼 정확히 체온을 재기 위해 한쪽으로 안내했다. 정형외과 진료를 받으러 온 김모(63·도곡동) 씨는 “집 앞에 있는 큰 병원에서 매일 일이 터지니 동네로 확산되지나 않을까 겁이 난다”며 “마스크를 쓰면 정말 안전한 거냐”고 물었다.

병동으로 이어지는 엘리베이터 앞에는 ‘메르스 관련 면회 적극 자제 요청’이라는 입간판이 세워져 있었다. 병동 13층에 내리자마자 직원이 다가와 병실 호수와 환자 조회를 했다. 취재목적을 말하자 “안 된다”며 엘리베이터 쪽으로 등을 떠밀었다. 살짝 본 병동 복도에는 환자도, 문병객의 모습도 전혀 보이지 않았다.

본관을 돌아 안쪽 깊숙이 위치한 장례식장은 아예 개점휴업이었다. 빈소 안내 전광판은 모두 꺼져 있었고 9개 빈소는 텅텅 비었다. 청소를 하던 장례식장 관계자는 “운영은 하는데 병원 명단이 나온 뒤에 문의전화마저 끊겼다”고 했다.

6월 14일 오전 10시. 삼성병원 회의실에 송재훈 병원장과 마스크를 쓴 의료진들이 줄지어 입장했다. 송 원장은 “삼성서울병원이 메르스 확산의 중심 병원이 되어 머리 숙여 사죄 드린다”고 말하고 고개를 숙였다. 삼성병원은 이날부터 24일까지 부분폐쇄에 들어갔다. 응급실 환자 이송요원이 메르스에 감염된 것으로 뒤늦게 확인됐기 때문이다. 이 요원은 메르스 증상이 나타난 뒤에도 9일 동안 근무하며 456명과 밀접 접촉한 것으로 밝혀졌다. 사설구급차 운영자 2명이 의료기관 밖에서 감염됐고 삼성병원 비뇨기과를 다녀간 외래환자 보호자도 확진판정을 받았다. 4차 감염이 삼성병원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외래진료와 입원, 응급을 제외한 수술, 응급환자 진료가 중단됐다. 자발적 조치가 아니었다. 정부에 의한 강제 폐쇄 조치였다. 20년 동안 쌓아 올린 일류병원의 자존심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어쩌면 ‘최고’라는 자만이 화를 부른 것인지도 모른다. “진료와 입원, 수술을 제한하면 의료기관으로서의 존재가치가 없다”는 명분을 내세워 극약처방을 피하려 했지만 허사였다.

침묵의 강남… 학교·상권 줄줄이 타격


▎메르스 여파로 휴업 중인 강남구의 한 초등학교. 메르스로 인해 휴업한 학교 수는 6월 12일 기준 전국 2788곳이다. / 사진·중앙포토
삼성서울병원 발 공포 바이러스는 주변 학교와 상권을 휩쓸었다. 일원동을 비롯한 개포동·대치동·도곡동 등 병원 주변의 강남 부촌이 직격탄을 맞았다. 6월 10일 메르스 확진자의 70.5%가 이곳 거주자였다. 서울시에 따르면 강남 3구(강남·송파·서초구) 주민 1355명이 의심환자로 분류돼 자택과 병원에 격리됐다.

삼성병원의 부분 폐쇄 조치에 가장 먼저 타격을 입은 건 인근 약국이다. 병원 주변 20여 개 약국은 조제 매출이 주 소득원이었다. 하루 1만 명이 넘는 외래 환자가 근처 약국에서 약을 조제했다. 병원에서 첫 감염자가 발생했을 때 처방 건수가 최고 50%까지 줄었다. 매출 감소는 약국을 운영하는 개인 약사들에게 치명적이다. 수천만 원씩 하는 월 임대료가 제일 큰 문제다. W약국 약사는 “폐쇄는 상상도 못했다. 당장 인건비와 임대료를 어떻게 충당할지 걱정스럽다”고 했다.

인근 학교들은 모두 휴업했다. 서울시교육청은 6월 7일부터 강남·서초구의 유치원과 초등학교에 휴업령을 내렸다. 삼성병원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일원동 영희초등학교 학부모 이모(40) 씨는 “아예 바깥 출입을 삼간 채 하루 종일 아이를 데리고 집안에서만 지낸다”고 말했다.

병원 주변의 상점들도 도미노처럼 타격을 입었다. 초등학교 인근 문구점 사장 강모(57·남) 씨는 “준비물을 사거나 문구류를 사려는 학생들조차 일주일 내내 코빼기도 안 보인다”고 푸념했다. 학교 앞 KFC 매장도 한산하긴 마찬가지다. 매장 직원은 “학부모들이 아이를 데리고 나오거나 학생들이 햄버거를 사가기도 했는데 지금은 아예 발길이 뚝 끊겼다”고 말했다. 해외 관광객들이 자주 찾는 명소로 유명한 대치동 은마아파트 지하상가에도 마스크를 쓴 상점 주인들만 서성이며 손님을 기다렸다.

‘사교육 1번지’로 불리는 강남구 대치동 학원가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어린 학생들은 아예 눈에 띄지 않았다.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보습학원들은 ‘휴관 안내문’을 붙이고 문을 닫았다.

입시학원만은 예외다. 메르스 한파도 ‘입시지옥’의 불 앞에선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대치동에서도 규모가 큰 M학원 홍보실장은 인터뷰를 거절했다. 다른 학원들도 말을 아꼈다. 6월 3일에 급속히 퍼졌던 ‘괴담’ 때문인 듯했다. 삼성병원 의사의 아내가 자가격리기간 중 골프장에 갔고, 앞집에 사는 초등학생이 귀가조치됐다는 내용이었다. 개포동에 사는 학부모 박모(39·여) 씨는 “학원 이름과 무슨 아파트 몇 동 몇 호인지까지 자세히 나와있어 믿을 수 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대치동 학원가에 휴업을 요청하는 학부모들의 전화가 쇄도했다고 한다. 대치동 주민 장모(43·여) 씨는 “실제 이 근처 학교들은 의사들 자제가 절반 이상이다. 삼성병원에서 의사까지 메르스가 옮았으니 그 가족한테 전염될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는 것 아니냐”고 했다.

하지만 학원의 입장에선 수업 중단의 피해가 이만저만한게 아니다. 반환수강료와 휴업손실비용은 물론, 수강생들의 성적이 떨어지기라도 하면 명성에도 큰 타격을 입기 때문이다. 학원들은 수업을 정상 진행하는 대신 학생들의 동선을 최소화하고 있다고 했다. 재수생이라고 밝힌 박모(20·남) 씨는 “수업시간 이외에도 밖에 나가지 말라고 해서 될 수 있으면 학원 안에 있다가 집에 간다”고 말했다. 재수생 김모(20·여) 씨도 “걱정되지만 수능도 얼마 안 남은데다 수업을 하루 빠지면 놓치는 범위가 너무 많아 조심하면서 수업을 듣고 있다”고 말했다.

메르스 괴담이 파다했던 S아파트 관리사무소를 찾아가니 안내문이 붙어있었다. 관리사무소 관계자는 “자가격리조치를 받았던 주민이 밖에 나갔던 건 맞지만 (메르스) 음성 판정을 받았고 아주 건강한 상태라고 들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아파트에는 인적이 끊긴 채 적막했다.

이런 와중에도 주민들의 가장 큰 걱정은 ‘집값’이다. 전셋값이 천정부지로 뛰어오르며 모처럼 강남 부동산시장이 활기를 띠고 있던 터다. 대치동의 한 부동산중개업소 관계자는 “메르스 이후로 확실히 (거래량이) 많이 줄었다. 한때 쏟아지던 문의도 뜸해졌고 이사를 계획했던 사람들도 취소하거나 계약을 미루고 있다”며 “혹시 시세가 떨어지지나 않았는지 물어보는 주민이 많다”고 말했다.

주민들은 잔뜩 웅크린 채 몸을 사리고 있다. 외국이나 지방으로 ‘피란 여행’을 떠나기도 한다. 도곡동 타워팰리스 지하상가의 푸드코트에서 만난 이 아파트 주민 정모(38·여) 씨는 “이웃 중 휴가를 내서 아예 해외로 나가거나 지방의 별장으로 간 사람들도 꽤 있다”고 했다. 그날 저녁 다시 찾은 타워팰리스 건물에는 불이 꺼진 집이 많았다.

끝 모를 공포가 삼킨 한국적 자본주의의 상징


▎송재훈 삼성서울병원장(왼쪽 둘째)이 6월 14일 기자회견에서 “응급실 이송요원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것은 전적으로 우리 책임이고 불찰”이라며 고개 숙여 사과했다. / 사진·중앙포토
산책하는 주민들로 늘 붐비던 양재천도 썰렁하다. 도곡동에 있는 롯데백화점 강남점의 오후 풍경은 마치 쇼핑객들이 모두 빠져나가고 난 폐장 직전 같았다. 모든 층에서 쇼핑객보다 점원의 수가 더 많았다. 옷깃이 스치거나 몸을 부딪치는 것쯤은 예사롭게 여기던 예전과 달리 텅 빈 공간을 오가면서도 상대의 몸에 닿을까 봐 옷을 여미는 모습이 역력했다. 롯데백화점 측은 오프라인 매장쇼핑의 타격을 줄이기 위해 6월 15일 온라인쇼핑 70% 할인행사를 시작하기도 했다.

대신 인터넷쇼핑은 그나마 현상유지를 한다. 주부 이모(45)씨는 6월 6, 7일 예정됐던 집들이를 연기하고 가전제품 수리를 위한 방문예약도 취소했다. 슈퍼마켓을 가는 대신 인터넷으로 장을 보고 배달을 시킨다. 대치동 학원가와 학교 근처에는 수업이 끝날 때쯤이면 예전보다 시동을 건 채 아이들을 기다리는 학부모들의 자가용이 부쩍 늘어났다.

고즈넉했던 부촌의 공원은 한가해졌다. 강남 일대는 항체없는 연약한 몸처럼 메르스 타격에 활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부가 몰리고 태어나는 강남에서 경제의 물줄기가 얇아지고 있었다. 지독한 가뭄이면서 끝을 가늠하기 어려운 쓰나미다.

다시 6월 4일. 국내 최고의 감염전문가로 꼽히는 송재훈 삼성서울병원원장은 한 언론 기고문에서 메르스 대책에 대해 이렇게 운을 뗐다. “누가 메르스 환자이고, 밀접한 접촉을 했는지 어떻게 알 것인가가 중요하다. 공포보다 빨리 전파되는 것은 없다(Nothing spreads like fear). 메르스를 이기기 위해서는 먼저 공포부터 이겨내야 한다.” 국민들 앞에 두 번 머리 숙여 사과를 하기 전이었다.

- 박지현 월간중앙 기자 / 김종태 인턴 기자

201507호 (2015.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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