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사회.북한.국제

Home>월간중앙>정치.사회.북한.국제

[정치기획] 길을 잃은 486 정치의 자화상 

‘젊은 피’에서 기득권 세력으로 

일부 486, 당권 경쟁에 기여하는 대가로 요직 독식하고 공천권에 눈독… 집권이라는 정당 목표보다 철학과 개인의 스타일에 더 치중했다는 목소리도

▎2008년 6월 촛불시위 당시 서울 시청앞 광장에 다시 등장한 전대협(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깃발. 전대협은 1980년대 후반 민주화운동의 구심점이었다. / 사진·뉴시스
비판적 지식인 집단이 정치권에 진입하는 건 한국의 오랜 전통이다. 언제부터인가 1980년대 학생 운동권이 한국 정치의 주류를 점하기 시작했다. 이른바 486 정치권이다. 하지만 요즘 야당에서는 이들이 청산 대상으로 거론된다. 아직 40~50대에 불과한 486 정치권에 조로 현상이 온 걸까?


▎1989년 10월 미 대사관저에 침입한 서총련 소속 대학생들이 경찰에 연행되면서 ‘노태우 방미 반대’ 등 반미 구호를 외치고 있다. / 사진·중앙포토
“2부로 구성된 에피소드는 전체적으로 나에게는 전형적인 한국인의 행동이라는 강한 인상을 남겼다. 처음에는 격렬한 항의, 나중에는 극진한 사과가 그것이다.”

도널드 그레그 전 주한 미국대사(1989~1993년)는 최근 펴낸 회고록 <역사의 파편들>에서 기이한 인연을 맺은 한국의 젊은이들에 대한 인상을 이렇게 적었다. 그가 말한 ‘2부로 된 에피소드’란 1989년 전대협(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소속 학생들의 미 대사관저 농성 사건과 17년 뒤인 2006년 국회의원이 된 그 학생들과의 재회를 일컫는다.

1989년 10월 13일 그레그 대사가 달콤한 잠에 빠져 있던 오전 6시 서울 중구 정동의 미 대사관저. 서울지역총학생회연합 산하 ‘반미구국결사대’ 소속 대학생 여섯 명이 이곳으로 뛰어들었다. 미리 준비한 사과탄을 터뜨리며 대사 공관으로 접근해 쇠파이프를 휘둘러 현관 유리창을 깨뜨렸다. 학생들은 공관 내 접견실에서 소파로 바리케이드를 치고 ‘그레그 취임 반대’, ‘노태우 매국 방미 반대’, ‘수입 개방 압력 철회’ 등을 구호를 외치며 농성을 벌이다 출동한 경찰에 연행됐다. 갓 부임한 그레그 대사 부부는 침실 밖에서 나는 소리에 깜짝 놀라 창문으로 빠져나가 대사관저의 다른 건물로 피신하는 소동을 겪었다. 이게 그레그 전 대사가 말한 1부 에피소드다.

그로부터 17년이 지난 2006년 12월 공직에서 은퇴한 그레그 전 대사와 반미를 외쳤던 그때 그 농성 학생들이 서울의 한 호텔에서 다시 만난다. 그중 1명은 대한민국의 국회의원이 돼 있었다. 바로 정청래 새정치민주연합 국회의원이다. 정 의원은 “점거 농성 당시 그레그 대사는 불평등한 한미관계를 요구하는 미국의 상징이었다”면서 “하지만 자연인 그레그 전 대사와 그의 부인에게는 당시 무단침입에다 소란까지 일으켜 많은 시간이 지났지만 참 미안한 마음”이라고 말한 것으로 언론에 보도됐다. 그레그 전 회장은 회고록에서 “정 의원을 포함한 그들 중 세 명이 우리가 묵은 호텔로 찾아와 모두들 진심으로 사과했다”고 기록했다. ‘에피소드 2’다.

그레그 전 대사는 회고록에서 에피소드 1을 ‘격렬한 항의’로, 에피소드 2를 ‘극진한 사과’로 표현했다. 이어 별도의 일본 사례를 들어 반미 사건을 대하는 한국과 일본의 극명한 차이를 비교했다. “내가 도쿄에 근무할 때도 극도로 위험한 일본인 테러단체가 도검으로 무장한 채 미국 대사관에 난입한 적이 있었다. 그중 몇 명은 감옥에 갔지만 여전히 위험하고 회개할 줄 모르는 인간들로 남아 있다. 이 두 개의 사건은 두 나라의 완전히 다른 극명한 차이로, 한국인이 좀 더 낫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레그 전 대사는 정 의원의 사과를 ‘회개’의 일종으로 받아들였음을 알 수 있다.

전직 주한 미국대사와 486 정치인의 회개


▎1985년 5월 서울 5개 대학 70여 명의 학생이 서울 을지로 미문화원을 기습 점거,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미국 책임 인정과 사과 등을 요구하며 농성을 벌였다. / 사진·중앙포토
그런데 그레그 전 대사가 정 의원이 몇 년 전 인터넷 언론에 올린 글도 꼼꼼히 읽어봤을지 궁금하다. 2002년 10월 2일 인터넷 언론 <오마이뉴스>는 ‘정청래 기자’가 작성한 ‘13년 전 미 대사관저를 점거했던 선배가’라는 제목의 글을 올렸다. 이때는 한국 여중생 두 명이 미군 탱크에 치여 숨진 사건(2002년 6월)으로 한국 사회에 반미 감정이 고조될 즈음이다. 이와 관련해 10월 1일 한 대학생이 서울 세종로 미 대사관 안으로 들어가 성조기를 불 태우려다 경찰에 연행된 사건이 벌어졌다. 바로 다음날 정청래 기자는 <오마이뉴스> 에서 “13년 전 1989년 10월 13일 ‘전대협 반미구국결사대’의 일원으로 그레그 미 대사관저 점거농성을 했던 대학생 6명 중 한 사람”이라고 자신을 소개하면서 “오늘 한겨레신문 사회면에 ‘반미의 횃불’을 낚싯대에 매달아 성조기를 불태우려 시도하는 후배들의 투쟁을 보았다”고 운을 뗐다. 그는 이어 “‘반미횃불’ 투쟁을 보면서 13년 전의 오늘을 생각했다. 건국대를 출발해 비장한 각오로 죽음을 무릅쓰고(정말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안개 낀 군자교를 넘으며 두려움을 달래고자 불렀던 ‘애국의 길’이란 노래를 읊조렸다”고 부연했다. 정 기자의 글을 이렇게 이어졌다. “이 땅 한반도는 미국의 지배 내지 영향력에서 벗어나고 있지 못하고 그 불이익과 피해를 고스란히 답습하고 있다. (…) 저희 미대관저 점거 투쟁이 헛되지 않았듯이 여러분들의 오늘의 이 거사는 분명 외로운 투쟁은 아니다.” 정청래 기자는 이로부터 1년 6개월 뒤인 2004년 4월 총선에서 열린우리당 후보로 당선된다. 운동권 후배의 반미 투쟁을 격려하던 그가 몇 년 뒤에는 취재진을 대동하고 전직 미국대사를 찾아가 사과 의사를 표명한 것이다.

정 의원의 사과는 제1 야당인 새정치민주연합(이하 새정연)의 최고위원이 되고서도 계속된다. 4·24 재·보선에서 새정연이 참패한 뒤에 열린 최고위원회의(5월 9일)에서 주승용 최고위원이 당내 친노 패권주의를 비난하면서 당직사퇴 불사 의지를 밝혔다. 이에 정 의원은 “사퇴하지도 않으면서 사퇴할 것처럼 공갈을 친다”며 주 최고위원을 공박했다. 이에 격분한 주 최고위원은 당직 사퇴를 선언한 뒤 지역구 여수로 내려가 칩거했다. 4·24 재·보선 참패 후 가뜩이나 어수선한 당내 분위기가 걷잡을 수 없는 혼돈상태로 빠져들었고 분란을 야기한 정 의원에게 비난의 화살이 쏟아졌다. 정 의원은 결국 ‘공갈’ 발언을 사과하고자 주 최고위원의 지역구까지 찾아가는 등 사태 수습을 시도해야 했다. 새정연 윤리심판원은 당의 신뢰를 실추시켰다는 이유로 정 의원에게 ‘당직 자격 정지 1년’ 결정을 내렸다. 최고위원직과 지역위원장직(서울 마포을)을 정지시켰다. 정 의원의 ‘막말’ 파문은 당의 이미지에 먹칠을 하고 지지도를 떨어뜨렸다는 비판을 받는다.

정치권 486세대의 등장과 성장, 좌절을 쭉 지켜와 온 야권의 한 원로는 486 정치권에게 진정성이 부족한 게 아니냐는 화두를 던졌다. 정치권에 온 486세대 중 일부는 편하게 말하고 쉽게 물러서는 신중치 못한 언행으로 화를 부른다고 했다. 어떤 때는 486 정치인들이 옳다고 믿고 추구하는 게 진정 존재하는지조차 의문이라고도 했다. 그래서 정청래 의원이 ‘공갈’ 발언을 사과한 것도 마뜩잖다. 차라리 개인적 불이익을 감수하더라도 발언과 소신을 굽히지 않는 모습이 더 나았으리라는 이유에서다. 이 원로는 “일부 486 정치인은 신념을 굽히지 않는데 따르는 피해를 감수할 의지가 약해 보인다”고 말했다.


▎1. 5월 9일 새정연 최고위원회의에서 정청래 의원의 “사퇴도 하지 않으면서 공갈 친다”는 발언에 격분한 주승용 최고위원이 좌석을 박차고 나가고 있다.사진·중앙포토 / 2. 6월 12일 새정연의 대대적 혁신과 창조적 재구성의 임무를 부여받은 혁신위원회 1차 회의가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렸다. / 사진·뉴시스
“386인사의 정치권 진입은 굉장히 개인적인 사건”


▎1987년 6월항쟁 당시 시민·학생 수백 명이 명동성당에 집결, 철야농성에 돌입했다. 이후 명동성당은 민주화의 성지로 떠올랐다. / 사진·중앙포토
1965년생인 정 의원은 이른바 ‘486세대’정치인으로 인식된다. 대학 시절 학생운동을 한 ‘40대, 80년대 학번, 60년대생’이라 정치권은 그렇게 부른다. 486세대는 1980년대 권위주의 정권의 혹독한 탄압에 맞서 민주화를 진전시킨 직·간접의 경험과 공동의 기억을 갖고 있다. 486세대는 1996년, 2000년 총선에서 DJ(김대중)의 ‘젊은 피’ 수혈로, 2004년 총선에서는 ‘탄핵역풍’을 타고 화려하게 제도 정치권에 등장했다. 정 의원처럼 1980년대 한국의 민주화와 반미 운동을 이끌었던 학생운동 지도자 여럿이 제도 정치권에 진입했다.

정치권은 왜 486 인사들을 끌어들인 걸까? 그들이 민주화를 앞당겼고 사회정의를 구현했기 때문일까? 그런 점도 평가받았겠지만 선거의 흥행요소라는 점도 고려됐다는 게 유시민 전 보건복지 장관의 진단이다. 이들이 정치권의 열렬한 러브콜을 받던 1999년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이 진중권·김정란 씨와 함께한 언론 매체 대담에서 그 본질을 짚었다. 당시 시사평론가로 활동하던 유 전 장관은 “386세대(지금의 486세대)가 뜨는 순간 이들에게 가장 먼저 관심을 가지는 건 당연히 정치권“이라고 했다. 지식인 집단을 지칭하는 용어가 탄생하면 그 집단과 이해관계를 갖는 쪽에서 자기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끌어당기려 한다고 부연했다. “사람들이 모여 있다는 것 바로 표와 직결된다.”

운동권 386의 정치 참여를 진보 진영에서는 처음부터 냉랭하게 바라보았다. 진중권 동양대 교수도 1999년 당시 대담에서 386세대의 정치권 입문과 관련해 “제도권 정치로 들어간다고 해도 최소한 독자적인 정강정책을 갖고 가야 하지 않나”면서 “그런 점에서 일부 386들이 정치권에 들어가는 건 굉장히 개인적인 사건일 뿐”이라고 평가했다. 심지어 “노선 싸움을 하다가 386이 어떠네 하면서 정치권에 들어간다는 것은 웃기는 얘기다. 그런 사람들은 정치적으로 독자세력화도 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면 힘이 드니까.”

같이 운동을 했던 인사도 정치권으로 가는 동료들의 미래에 회의적이었던 같다. 그 시절에 발행된 자료를 보면 당시의 정서가 더 생생하게 살아온다. 2000년 고려대 학내 자치언론을 표방하는 <고대문화> 51호에는 이원재 ‘문화개혁을 위한 시민연대(현 문화연대)’ 정보팀장의 글이 실렸다. 이 팀장은 “현재 통용되는 386세대라는 호칭은 민주화 투쟁의 역사성이나 사회 변혁에 대한 신념은 완전히 거세당한 채 주류사회의 성공지상주의를 위한 호칭으로 남용된다”면서 “보수 정치판의 수혈을 위해, 벤처산업의 성공을 위해 386이 호명된다”고 견제구를 날렸다. 그는 제도정치권에 진입한 인사들에게 호된 질책을 가한다. “기성 정치권은 386세대가 가진 개혁성, 참신성, 도덕성 등의 이미지를 활용하고, 386세대 출신 정치인은 민주화운동의 경력을 팔아먹는 일종의 정치적 거래가 이뤄진다.” 심지어 2000년 4월 총선을 즈음해 제도정치권에 들어간 386세대를 일러, “민주투사라는 꼬리표를 단 150여 명의 386세대가 보수 정치판에 투항했으며, 그중 40여 명은 열성 학생운동권 출신이었다”고 혹평을 하기하기도 했다. 보수 정치인과 진보운동의 주체를 ‘386세대’라는 동일한 용어 속에 똑같이 불러줄 하등의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참신성 아이콘에서 외연 확대의 걸림돌로


▎1987년 6월항쟁은 연세대 이한열 씨가 경찰이 쏜 체류탄에 맞아 숨을 거두면서 시위가 전국으로 확산됐다. / 사진·중앙포토
10여 년이 지난 요즘도 이런 기류에는 큰 변화가 없어 보인다. 1986년 서울대 총학생회장을 역임한 김지용 씨(소설가)는 486 정치권에 대해 “애초부터 많은 기대를 안 했다”고 말했다. 그들이 학생운동의 요구가 아닌 정치권의 요구에 응해 개별적으로 정계에 입문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우리 때만 해도 운동을 하다가 현장으로 가는 걸 당연시했기에 정치권에 들어가는 일을 미안해하고 마음의 짐으로 여겼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정치 입문이 자랑이고 무슨 큰일이나 하는 것처럼 포장됐다.” 지금 486 정치권의 기반이 허약한 것도 이런 과정과 결부돼 있다고 했다. 김씨는 “486 정치권은 어떤 가치의 깃발을 들어야 할지 모르거나 잊어버린 상태로 보인다”면서 “당내에서 패권적 형태로 뭉치는 것도 기본적으로 자기 동력이 없기에 그런 것”이라고 일침을 가했다.

이런 분류법에 운동권의 모든 이가 동의한다고 보기 어렵다. 하지만 진보 진영에서는 제도정치권 386과 자신들을 분리하려는 의지가 강했음을 알 수 있다. 진보 진영은 이른바 ‘386 정치인’을 그들이 원하든 원치 않든 ‘루비콘강을 건넌 사람’으로 간주했던 것이다.

2007년 대선 패배 이후 대부분의 큰 선거에서 새누리당에 밀린 새정연에서는 ‘486 물갈이론’이 공공연하게 제기된다. 김상곤 전 경기교육감을 위원장으로 하는 혁신위원회가 출범하면서 내년 총선에서 호남 다선 의원과 486의원들에 대한 ‘물갈이’를 주요 내용으로 하는 혁신안을 추진한다는 관측이 나오기도 했다.

더구나 혁신위원으로 선정된 조국 서울대 교수는 “현재 모습의 새정연은 천천히 죽는 길이 남았다”며 경각심을 불어 넣었다. 그는 “내과적 처방과 외과적 처방이 동시에 필요한 상황으로 지금 필요한 것은 자멸적 안주가 아니라 창조적 파괴”라고 대대적인 인적 개편을 기정사실화했다. 야세가 강한 지역구 출신 의원으로서 활동이 부진한 486 의원도 1차 표적이 되리라는 인식이 당 안팎에서 퍼져나간다.

전대협 초대 의장으로 야권 내 대표적 486 의원으로 분류되는 이인영 의원은 1999년 당시 여당인 새천년민주당 창당 발기인에 참여하면서 본격적인 정치의 길로 접어들었다. 그는 정치권에 몸담은 10여 년의 세월을 “영욕의 시간”으로 표현했다(62쪽 인터뷰). 그는 “1997년 정권교체 이후에는 촉망받는 정치개혁의 한 주체였다가, 2007년 역(逆)정권교체 이후에는 정치혁신의 중심으로 발돋움하지 못했다”고 돌이켰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핵심적인 문제는 정당의 대안 주체로 집단화하지 못한 것”이라며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 “개별 정치집단 혹은 유력정치인의 보조자로 분산되고 말았다. 특히 기성 정당에서 이른바 ‘하청(下請) 정치’, ‘계파 정치’의 실행자가 된 것이다. 여기서 가장 큰 비난에 직면하게 됐다.”

그의 말대로 486 정치인들이 요즘 초유의 위기를 맞고 있다. 486 정치인에 대한 비판은 총천연색이다. 누구는 집권세력의 틀 안에 안주하면서 유권자 기대감을 충족시키는 데 실패했다는 평가한다. 또 민주화운동 경력을 일종의 ‘훈장’으로 내세우는 배타주의와 내부에서는 학번과 학생단체 서열을 앞세우는 권위주의는 당 내외에서 반감을 샀다는 이도 있다. 길게는 20년, 짧게는 10여 년의 기간 동안 정치권 486이 기득권화되면서 고립을 자초했다는 말도 있다. 소수의 마니아 지지층을 의식한 몇몇 486 정치인의 강경 일변도 발언과 막말 파동이 새정연 경쟁력을 치명적으로 잠식한다는 우려도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새정연 내부의 얘기를 들어보면 486 정치에 대한 거부감은 생각보다 뿌리가 깊다는 걸 알 수 있다. 민감한 사안이라는 이유로 익명을 요구한 새정연의 한 주요 당직자는 “486 정치인들은 과거엔 당의 참신성, 선명성의 아이콘이었다면 이제는 수권정당으로서의 외연 확대에 걸림돌이 된다. 그게 노무현 정부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말한다.

새정연 불안한 리더십의 원천, 486


▎1980년대 학생운동권은 권위주의 정권의 탄압을 이겨내고 민주화를 쟁취하는 원동력이 됐다. 1987년 6월항쟁 당시의 주역인 연세대 우상호 총학생회장(왼쪽)과 1989년 전대협 임종석 의장(오른쪽)은 훗날 국회에 진출한다. / 사진·중앙포토
“언제부터인가 야당 내에서는 투쟁으로 얻는 결과물은 정당하고, 타협과 절충의 반대급부는 부당하다는 인식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툭하면 2중대니 뭐니 하는 논리에 지배당하다 보니 어떤 지도부가 들어서더라도 국회 운영이나 정국 현안에 강성 대응 기조로 흐르기 일쑤였다. 정당은 국민과 같이 가야 한다. 정당은 국민보다 반보(半步) 정도 앞서가야 한다. 너무 쳐져서도 안되지만 너무 앞서가면 국민이 따라 오지 못한다. 노무현 정부 시절 너무 앞서가는 바람에 국민이 지치고 피로감이 쌓였다. 집권이라는 정당의 목표보다는 철학과 가치관이라는 개인의 스타일에 더 치중한 486 정치인들의 책임이 크다. 문제는 최근까지도 이런 일이 벌어진다는 것이다.” 자기 것만 고집하는 486 정치인들이 현실 정치에서 요구하는 유연성, 포용성, 승복 정신 등과는 거리를 둔 채 선명성만 앞세우는 비타협적 노선으로 치달았다는 비판이다. 그러다 보니 언제부턴가 새정연(과거 민주당)의 전체 이미지도 불안한 리더십으로 고착화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486발 난맥상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486 정치인들의 외부를 향한 선명성, 비타협성이 당의 울타리 안에서는 전혀 다른 식으로 발현되는 게 더 큰 불행이라고 이 당직자는 목청을 높였다. “486 정치인들은 조직적인 학생운동을 해서 그런지 당내 권력을 쟁취하는 데는 탁월한 수완을 발휘했다. 결속력도 대단한 데다 기득권을 가진 계파의 수장과 연대하고 타협하는 능력은 우리도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특정 계파의 수장이 당권을 잡는 데 기여하는 대가로 당직, 국회직을 차지하고 공천권을 거머쥐었다. 당권 주고 주요 보직을 받는 거래와 다를 바 없다. 계기가 있을 때마다 당내 권력자와 손잡고 실리를 챙기는 모습에 이제 웬만한 당원들은 넌더리를 낸다.” 그는 특히 “대외적으로는 명분, 개혁을 앞세우면서도 당내에서 잇속을 챙기는 그룹이 바로 486 정치인”이라며 미간을 찌푸렸다.

반세기 이상 정통 야당의 맥을 이어온 새정연이 486 정치인들에게 꽉 잡혔다는 말로도 해석된다. 이런 상황에 이르게 한 당내 계파의 수장들도 함께 도마에 오른다. 자신의 기득권 유지에 486 정치인들을 활용했다는 비판받아 마땅하다는 의원들도 없지 않다.

486 정치권을 향한 지탄의 목소리는 비단 새정연 내에 국한되는 게 아니다. 새정연이 창출한 정권에 기능적으로 참여했던 전문가 그룹도 후한 점수를 주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노무현 정부에서 386 인사들과 손발을 맞춰본 전직 고위인사는 그들에게서 아무런 정체성도 느끼지 못했다고 돌이킨다. “386 정치권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게 별로 없다. 이 말은 정권에 특별한 기여를 한 게 없다는 말이다. 외부에서 생각하는 바와 달리 정부와 국회에 진출한 386은 특정한 지향이나 일체감, 응집력을 가진 것 같지 않았다. 개인으로는 몰라도 집단으로 두드러지는 성과를 냈다고도 보기 어렵다.” 이 인사는 당시 386세대의 외교·안보 분야의 아마추어리즘도 질타했다. “386들은 국제 정치의 엄중함을 이해하지 못했다. 본의 아니게 무책임한 결과를 낳았다. 국제정치, 외교라는 게 내 생각대로 되는 게 아니다. 모든 게 힘의 논리에 좌우됨에도 386세대는 도덕과 윤리가 적용되는 걸로 착각하곤 했다.”

1987년 전남대 총학생회장으로 전대협 부의장을 지낸 김승남 새정치민주연합 의원(고흥·보성)은 2012년 19대 총선을 통해 국회에 진출했다. 정치권 486세대의 정치적 유산과 책임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그는 현 세대에 여전히 남겨진 과제인 사회·경제적 민주화를 486 정치권이 완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486 정치권이 과거 운동권 시절의 이상과 대의에 충실하냐는 질문에 “한마디로 많은 기대에 비해서는 턱없이 부족했다”고 평가했다. 물론 김 의원은 학생운동 시절의 이상과 대의를 40~50대를 살면서 그대로 간직하고 행동해 나간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이라는 점은 인정한다. 그럼에도 “1990년대 초 동구권의 몰락 등 거대한 쓰나미 같은 국제질서의 변화에 주체적으로 대처하지 못했다”고 안타까움을 표했다.

신자유주의 물결 위에 좌우 균형추 역할


▎1. 6월항쟁의 거점이었던 명동성당을 1999년 다시 찾은 전대협동우회 회원들. 이들 전대협 세대가 특히 제도 정치권에 많이 진입했다. / 2. 1995년 청년단체 회원들이 국가보안법으로 구속된 이인영·함운경·허인회 씨의 석방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이들 3인도 모두 제도 정치권에 몸을 담는다. / 사진·중앙포토
보수 양당체제에서 486이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하는 데 실패한 이유는 이렇게 분석했다. “3김 시대 이후에 바로 486의 시대를 예상한 적도 있었다. 결과는 그렇지 못했다. 첫째는 제도권에 들어온 486이 구심점을 만들지 못했고, 둘째는 목표 설정에 대해서도 명확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즉 분명한 비전의 설정과 비전을 해결해나가려는 전략적인 노력이 부족했다. 그렇다 보니 양당체제의 구심력에 자기중심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1987년 6월항쟁 이후 지금의 대한민국의 문제점을 예상하고 독일, 북유럽 국가처럼 전 분야에 걸친 사회·경제적 대타협을 지속적으로 조직화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크다.”

486 정치권이 한국 사회와 정치의 발전에 기여한 측면도 있다. 1987년 당시 연세대 총학생회장으로 6월항쟁 지도부를 구성했던 우상호 의원도 당내 486 그룹의 주요 인사로 분류된다. 그는 “486 정치인들은 특히 두 가지 이슈에 주도적으로 나섰다”며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하나는 세월호 참사와 보편적 복지와 같은 정치사회적 이슈다. 상임위와 당내 활동에서 이를 환기시키고 진보적 가치를 부각하는 데 두각을 나타낸 건 사실이다. 또 민주와 진보로 구성되는 범 야권의 소통과 조정자로서의 역할을 했다.” 이인영 의원도 “역사적 정의를 지키고 정당 내의 진보 이념, 진보 가치에 편견을 두지 않았다”면서 “보편적 복지, 사회경제적 민주화를 선도하고 확산하는 집단으로서의 역할을 했다”고 강조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지난 대선 당시의 경제민주화 의제다. 경제민주화는 오랜 세월 야당의 화두였다. 대선을 앞두고 이 문제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고조되면서 보수당인 새누리당 박근혜 대통령 후보는 경제민주화 의제를 공약의 전면에 내세우기에 이르렀다. “486 정치권은 신자유주의의 물결 속에서도 한국 정치권이 좌우의 균형을 잡는 데 일익을 담당했다”고 우 의원은 말한다.

새누리당 내 대표적인 소장파로 ‘486’ 출신 정치인으로 분류되는 원희룡 제주지사도 “486의 정치권 진출은 그들의 이상과 대의의 실현여부에 관계없이 그 존재만으로 대한민국의 정치 발전에 어느 정도는 이바지했다”고 존재의의를 부여했다. 원 지사는 486 정치권이 정치권 내 권위주의를 배격하고 나쁜 관행을 척결한 노력도 평가돼야 한다고 강조한다. 특히 “지금도 각기 운동권 시절의 이상과 대의를(저마다 조금씩은 달랐겠지만) 실현해 나가는 과정에 있다고 본다”고 전제한 뒤 “이제는 대한민국의 기본을 어떻게 세울지에 대해 486 정치인들이 함께 머리를 맞대야 한다”고 소통과 협력의 필요성을 제기했다.

이런 노력마저도 정치권 외곽의 486에게는 자기변명으로 들릴지도 모른다. 1985년 서울대 총여학생회장을 지낸 이진순 씨는 2013년 국내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386세대가 정치분야에서 실패한 이유에 대해 “기성정당의 논리와 자기를 구별하는 정체성이 없기 때문”이라고 일갈했다. 이씨는 “기존 문법을 따라가는 과정에서 모두들 상상력을 잃어버렸다. 끊임없이 자기 상상력을 반납하면서 기존 페이스를 따라간 것”이라며 486 정치권이 주류 사회에 동화되는 과정에서 최초의 지향과 정체성을 상실했음을 꼬집었다.

박경철이 말하는 안철수의 ‘100% 자기 희생’


▎2011년 전국을 돌며 ‘ 청춘 콘서트’를 통해 젊은이들과 소통한 안철수 서울대 교수(오른쪽)와 박경철 안동신세계연합병원장. / 사진·중앙포토
486 정치 공과에 대한 논란이 분분한 가운데 486 정치의 퇴조를 가져오는 결정적 사건이 발생한다. 바로 1962년생 의사 출신의 안철수 서울대 교수(현 새정연 의원)의 급부상이다. 안 교수는 ‘시골의사’ 박경철 씨와 함께 전국을 돌며 ‘청춘 콘서트’를 열어 아픈 청춘들을 위로하더니 2012년 대선 국면에 즈음해서는 국민적 지지율에서 기존 정치인들을 압도했다. 여야를 통틀어 486 인사 중 지지율이 가장 높은 이가 안철수 의원이다. 대중은 정치 사회적 진보 가치를 부각하고 민주화를 선도한 486 정치권보다 안철수 교수에게 더 열광했다.

그 원인의 일단을 2011년 박경철 씨의 발언에서 유추해볼 수 있다. “원래 승률이 높은 게이머는 이기는 게임에서도 자신의 모든 것을 걸지 않는 법이다. 안철수 교수도 평생을 살아오면서 거의 지는 게임을 하지 않았다. 그런 그가 이번 대선을 앞두고는 질 수도 있는 게임에 전부를 걸려고 한다. 그런데 이겼을 때 얻는 것이 자신이 원하는 게 아니다. 그게 비극이다. 안 교수는 대통령을 할 생각이 1%도 없다. 정치에 뜻이 없었음에도 그게 자신의 길이기에 간다.” 박경철 씨는 이를 “100% 자기 희생”이라고 규정했다. 물론 박씨의 진단이 당시 안 교수의 의중과 얼마나 일치하는지, 또 지금도 안철수 의원이 같은 마음가짐으로 정치에 임하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안철수 교수와 친구처럼 지내던 박경철 씨는 어느 시점엔가 안 교수에게 이런 내면을 포착했을 법하다. 마찬가지로 안 교수의 그런 이미지가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았을 지도 모를 일이다.


▎참여정부 당시 노무현 대통령의 386 측근 인사들이 광주를 방문, 국립 5·18묘지에 참배하고 있다. 노무현 정부의 일부 386은 이상과 철학을 앞세우다 대중과 유리됐다는 평가를 받는다. / 사진·중앙포토
운동권 486도 학생 시절 몸을 사리지 않고 불의한 권력과 싸웠다. 사회의 거의 모든 영역에서 기존의 가치관에 반기를 들고 몸을 던져 대안을 모색했다. 지금도 486세대 중에는 시대와의 불화로 힘겹게 사는 이가 많다. 묵묵히 굳은 일은 다 했으면서도 아무런 경력도 없고 당시 운동권 활동 때문에 인생을 망친 이도 많다. 그런데 안 교수가 더 잘 나간다?

이와 관련해 1988년 연세대 총학생회장을 지낸 정명수 씨는 486 정치권에게는 안 교수와 구분되는 사명이 있다고 말한다. 현재 새정치민주연합 언론홍보대책특위 기획단장으로 일하는 그는 “80년 학생운동 세대는 개인기와 인기로 성장한 세대가 아니다”며 이의를 제기했다. 그는 “당시 운동권은 순순한 열정과 역할 분담에 의한 집단성의 힘으로 성장한 세대다. 그래서 안철수 의원과 문제를 푸는 방식이 다르다”고 강조했다. 개인기가 아닌 집단의 힘으로 시대적, 정치적 과제를 푸는 게 486세대의 정치요, 미래라는 것이다. “486 정치권의 기본 가치와 정신은 역할 분담에 의한 협력의 힘에 있다”는 게 그의 486 정치관이다. 하지만 아직 성과가 미흡하다는 점은 인정한다. “자신들의 목소리를 모아 현실 정치의 변화를 견인해내지 못했기 때문에 좋은 점수를 주기는 어렵다. 486 정치권이 현실정치에 포섭돼 정치개혁의 과제에 충실을 기하지 못했고 기존 패권적 계파정치의 틀을 깨지 못했다. 마지막이라는 각오로 본인의 기득권을 버리고 패권적 계파정치의 틀을 깨는데 노력해야 한다. 그게 아니면 스스로 물러나 후배 양성에 힘을 보태야 한다.”

한국의 민주정치는 운동가를 타락케 하는 제도?


▎1997년 대선에서 집권한 김대중 대통령에 의해 대거 발탁된 386세대 정치인들. 이들이 지금의 새정연 486의 중심이다. / 사진·중앙포토
학생운동권에 뿌리를 둔 486 정치권은 여야에 두루 포진해 있다. 새누리당의 경우 19대 총선을 거치면서 일부 486 정치인이 국회를 떠났지만 지방자치단체장 등에 다수 진출해있다. 새정연과 여타 진보 정당에는 국회와 지자체에서 주류적 목소리를 내는 파워 집단으로 자리한다.

그러다 보니 서로가 서로를 평가하기도 한다. 서울대 86학번인 하태경 새누리당 의원은 학창시절 전대협 조국통일위원회에서 활동하는 등 민족해방계열의 운동권이었다.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수감되기도 한 그는 탈북자들을 돕는 과정에서 북한의 실상을 체감하고 북한 민주화 운동가로 전향했다. 하 의원은 새정연 내 486 운동권 출신 정치인들을 일러 소신·용기·능력을 못 갖춘 ‘3무(無) 세대’라고 신랄하게 비판한다. 그는 “같이 운동을 한 486세대 중에는 경제계, 학계, 사회 분야에서 성공적으로 활동하는 이가 많다”면서 “유독 정치권, 특히 야권에 몸 담은 486 정치인들은 비전도 혁신도 없는 무풍지대에 놓여 있다”고 말했다. 하 의원은 1989년 전대협 대표로 평양축전에 참가해 옥고를 치른 임수경 새정연 의원이 변절자’로 지탄했던 인물이다. 운동권의 정통성 측면에서 변방으로 밀려난 하 의원의 486 정치권 비판은 그래서 더 아이러니하다.

새누리당 김영우 의원도 이런 관점에서 486 정치권이 주류적 경향을 대변하는 사회 각계의 486과 접점을 찾는 노력을 강화해야 한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김 의원은 “지금의 대한민국은 산업화와 민주화 단계를 지나 한 단계 도약이 필요한 시점”이라며 “486 정치권이 대한민국을 실질적으로 이끌어가는 외부의 486 그룹과 소통과 교류를 확대해 새 형태의 제도·의식·문화를 창출해야 한다”고 말한다. 김 의원은 이런 작업이 수반되지 않으면 국회는 앞으로도 산업화, 민주화라는 낡은 프레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얘기했다.

이런 정치권 논란을 지켜 봐온 학계의 원로 인사는 젊은 시절 민주화를 넘어 체제변혁까지 꿈꾼 486 정치권이 제도권에 너무 쉽게 동화되는 것 같다며 우려를 표명하곤 했다. 기성정치권을 모방하는 데서도 너무 약삭빠르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한국의 민주정치는 운동가들을 타락케 하는 제도라는 생각이 든다. 정치는 선거에서 이겨야 하므로 표를 많이 얻어야 한다. 당에 잘 보여야 하고 유권자들에게 예쁘게 보이려면 뭐든 해야 한다. 또 필연적으로 돈이 든다. 이러다 보면 운동의 순수성은 퇴색한다. 그래서 민주주의는 혁명을 방지하는 좋은 제도라는 말이 나온 것 아니겠느냐.” 486세대는 제도 정치권에 입문한 뒤로 게임의 룰에 줄곧 순응한 듯 하다. 계속 그 룰에 끌려 다니느냐, 아니면 그 룰을 바꾸느냐에 따라 486 정치권의 진로가 결정될 전망이다.

- 박성현 월간중앙 취재팀장




201507호 (2015.06.17)
목차보기
  • 금주의 베스트 기사
이전 1 /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