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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호의 ‘조선왕조 스캔들’(7)] 광해군의 비극, 왕비와 세자 내외 자살사건 

인조반정으로 궁궐에서 쫓겨난 뒤 함께 유폐돼 … 절망적인 삶 이기지 못하고 잇달아 ‘자진(自盡)’ 선택 

신명호 부경대 사학과 교수

▎광해군은 재위기간(1608~1623) 정적들을 대상으로 수 차례 옥사(獄事)를 일으켰고, 외교에서는 실리주의 노선을 걸었다. 그러나 인목대비 폐비사건 등 도덕적 결함으로 인해 결국 축출되고 말았다. MBC 사극 <화정>에서 광해군 역을 맡은 배우 차승원.
1623년(광해군 15) 3월 12일 한밤중에 인조반정이 거사됐다. 김류 등이 거느린 1천여 명의 반정군은 창덕궁 동쪽의 단봉문을 열고 몰려 들어갔다. 광해군이 함성 소리에 잠을 깼을 때 시위(侍衛)하던 신하들은 대부분 도망가고 없었다.

놀란 광해군은 처자식을 챙길 겨를도 없이 북쪽 후원의 소나무 숲으로 달아났다. 얼마나 급했던지 가져가던 옥새도 흘려버렸다. 궁녀 1명과 환관 1명이 광해군을 인도해 소나무 숲으로 들어갔다.

궁녀는 은밀하게 숨겨둔 사다리를 찾았다. 평상시 궁녀들이 궁 밖으로 나갈 때 이용하던 사다리였다. 이 사다리를 이용해 광해군은 궁성을 넘었다. 젊은 환관에게 업힌 광해군은 궁녀의 뒤를 따라 안국신의 집에 숨어들었다. 동궁에서 잠자던 광해군 세자는 왕을 뒤쫓다가 찾지 못하자 장의동 민가로 숨어들었다.

광해군은 안국신의 집에 갔을 때까지도 누가 반정을 일으켰는지 알아차리지 못했다. 광해군은 안국신의 친척 정담수를 시켜 주모자를 알아오게 했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왕의 은신처를 밀고해버렸다. 능양군의 지시를 받고 이중로가 광해군을 체포하기 위해 도착했을 때 왕은 초상난 사람의 복장으로 변장해 있었다.

그러나 이중로는 대뜸 알아보고 앞으로 나가 절을 올렸다. “너는 누구냐?”는 광해군의 질문에 “신은 이천부사 이중로입니다”라고 대답한 그는 왕을 번쩍 안아 말에 태웠다. 광해군은 창덕궁의 약방에 갇혔고 세자 역시 잡혀와 도총부에 갇혔다.

광해군은 이중로에게 사로잡힐 때 “혼매한 임금을 폐하고 현명한 사람을 세우는 것은 옛날에도 있었지만 어찌하여 궁녀와 환관들을 보내주지 않고 나를 이리 박대하는가”라고 따졌다. 비록 반정으로 왕위에서 쫓겨났지만 그래도 최소한의 예우는 해줘야 되지 않느냐는 항변이었다.

보고를 받은 능양군은 궁녀 한 명과 후궁 한 명을 보내주었다. 반정 당시 광해군에게는 최소한 7명의 후궁이 있었다. 그중에서 광해군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후궁은 소용 임씨와 소용 정씨였는데, 정씨는 반정 당일 자살했다. 그래서 능양군은 소용 임씨를 광해군에게 보내주었다. 광해군은 소용 임씨를 본 후 마음의 안정을 되찾았다.

그런데 반정 당시 광해군의 왕비 유씨와 세자빈 박씨는 궁 밖으로 도망치지 못했다. 수십 명의 궁녀들이 따라왔기 때문이다. 왕비 유씨와 세자빈 박씨 그리고 수십 명의 궁녀는 창덕궁 후원의 어수당(魚水堂)으로 도망가 숨었다.

반정군은 어수당을 몇 겹으로 둘러쌌지만 난입하지는 않았다. 안에 왕실 여성들이 있기 때문이었다. 왕비 유씨와 세자빈 박씨 그리고 수십 명의 궁녀는 어수당 문들 걸어 잠그고 버텼다. 반정군에게 포위된 어수당은 완전히 고립됐다. 그 안에는 먹을 것, 마실 것도 없었다. 급하게 도망해 오느라 챙길 겨를이 없었다.

“어찌 전왕의 왕비를 굶어 죽게 하려 하오?”


▎실학자 서계 박세당의 아버지인 박정에게 내려진 인조반정 공신교서.
그렇게 하루가 지나고 또 이틀이 지나자 궁녀들은 굶주림으로 아우성쳤다. 왕비와 세자빈 역시 굶주림으로 고통받기는 마찬가지였다. 생각 끝에 자수하기로 결심한 왕비는 궁녀를 시켜 문밖으로 나가 “중전이 여기에 있습니다”라고 외치게 했다.

그러나 궁녀들은 두려움에 한 명도 문밖으로 나서려 하지 않았다. 결국 한보향이라는 여인이 나가 “중전이 여기에 있습니다”라고 외쳤다. 그러자 반정군은 포위를 풀고 약간 뒤로 물러났다. 왕비 유씨는 한보향을 시켜 “주상은 이미 나라를 잃었으니 새로선 분은 누구시오”라고 묻게 했다. “선조대왕의 손자인데 누구라고는 감히 말하지 못합니다”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왕비는 다시 “오늘 이 일이 종묘사직을 위한 것이요, 부귀를 위한 것이요?”라고 묻게 했다. “종묘사직이 거의 망하게 됐기에 우리들이 새 임금을 받들어 반정하지 않을 수 없었으니, 어찌 스스로 부귀를 위한 것이겠소”라는 대답을 들은 왕비는 “의거(義擧)라고 말한다면 어찌하여 전왕의 왕비를 굶어 죽게하려는 것이요”라고 묻게 했다.

이 소식을 들은 능양군 즉 인조는 당장 명령을 내려 광해군·왕비·세자·세자빈 등에 대한 음식 공급을 부족함 없도록 하게 했다. 이에 왕비 유씨와 세자빈 박씨 그리고 수십 명의 궁녀는 사흘 만에야 배를 채울 수 있었다.

12일 한밤중에 거사해 창덕궁을 장악한 능양군은 인정전 서쪽 뜰 위에 호상(胡床)을 놓고 앉아 반정군을 지휘했다. 능양군은 유희분·이이첨·박승종 등 광해군 측근들을 체포하기 위해 군사들을 파견하는 동시에 조정 중신들을 입궐하게 했다. 아울러 김자점·이귀 등 반정 주역들을 서궁으로 보내 인목대비를 모셔오게 했다. 능양군은 인목대비를 안심시키기 위해 창덕궁 후원에서 찾은 옥새를 대비에게 올리게 했다.

그러나 서궁의 인목대비는 한밤중에 군사들이 들이닥치자 혹 광해군이 정명공주를 뺏으려 보낸 사람들은 아닌가 의심했다. “공주는 이미 죽어서 담 밑에 묻었다”고 말하며 인목대비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능양군이 직접 서궁을 찾았다.

13일 저녁, 능양군은 말을 타고 창덕궁을 떠나 서궁으로 갔다. 뒤에는 남색의 작은 가마에 태워진 광해군이 따르고 있었다. 흰색의 개가죽 남바위를 쓴 광해군은 고개를 숙이고 눈물만 흘릴 뿐이었다. 서궁에 도착한 능양군은 말에서 내려 걸어 들어갔다. 인목대비를 만난 능양군은 꿇어 엎드린 채 한참을 통곡했다.

“통곡하지 마시오. 종묘사직의 큰 경사인데 어찌 통곡을 하시오”라는 인목대비의 말에 능양군은 “큰일이 아직 안정되지 않아 날이 저물어서야 비로소 왔으니 신의 죄가 막심합니다”라고 대답했다.

인목대비는 “무슨 죄가 있단 말이오”라고 반문하고는 “내가 기구한 운명으로 불행하게도 인륜의 큰 변고를 만났소. 역적 광해군이 선왕에게 유감을 품고 나를 원수로 여겨 나의 부모를 도륙하고 나의 친족을 어육으로 만들고 나의 어린 자식을 살해하고 나를 별궁에 유배시켰소. 이 몸이 오랫동안 깊은 별궁 속에 처해 인간의 소식을 막연히 들을 수 없었는데 오늘날 이런 일이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소”라고 했다.

인목대비의 피맺힌 복수는 시작되고


▎경기 남양주시 진건면에 있는 광해군의 묘.
인목대비는 옥새를 능양군에게 전해주며 “역적 광해군 부자는 지금 어디에 뒀는가”라고 물었다. “모두 궐 안에 있습니다”라는 대답에 인목대비는 “한 하늘 아래 같이 살 수 없는 원수요. 참아온 지 이미 오랜 터라 내가 친히 그들의 목을 잘라 돌아가신 분들의 영령께 제사하고 싶소. 10여 년 동안 유폐돼 살면서 지금까지 죽지 않고 살아온 것은 오직 오늘날을 기다린 것이니 쾌히 원수를 갚고 싶소”라고 했다.

원한이 골수에 사무친 인목대비는 반드시 광해군을 죽이고자 했다. 그러나 신하들은 아무리 축출된 왕이라고 해도 죽이는 것은 너무 심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중종반정의 경우에도 연산군을 죽이지 않았던 전례를 들어 죽음만은 면하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간신히 마음을 안정시킨 인목대비는 “내가 상심한 지 이미 오래돼 사리에 맞지 않는 말을 많이 했소. 바라건대 여러분들은 용서하시오”라고 하고는 능양군을 왕으로 책봉했다. 이날 능양군은 서궁의 서청에서 즉위식을 올렸다.

다음날 인목대비는 광해군을 폐서인하고 능양군을 왕으로 삼는다는 교지를 공포했다. 이후에 인목대비는 광해군의 죄악을 38가지로 조목조목 나열하고 속히 엄벌에 처할 것을 요구했다. 10년 전 광해군이 내세웠던 폐비 명분보다 무려 4배나 많은 죄악을 거론한 것이었다.

처음 인목대비는 자신이 직접 나서서 광해군을 국문하겠다고 했다. 만약 그렇게 됐다면 광해군을 비롯해 측근 관리들과 궁녀들 모두 참혹한 고문을 당하고 죽었을 것이다. 그러나 인목대비가 아무리 대비라고 해도 남자인 광해군과 측근 관리들을 국문하는 것은 유교 윤리에 맞지 않았다. 그래서 인조반정 주체들은 결사적으로 반대했다.

이에 인목대비는 다른 방법으로 복수하고자 했다. 3월 15일 인목대비는 ‘광해군과 폐세자를 극변(極邊)에 안치하고, 그들의 처 역시 각각 다른 곳에 위리안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광해군, 폐비 유씨, 폐세자, 폐세자빈 박씨를 각각 나눠 삼수·갑산·아오지 같은 변경(邊境)에 유배하라는 뜻이었다. 물론 이런 뜻은 광해군을 죽이지 못하게 된 인목대비가 처자식이라도 보지 못하게 만들려는 의도에서 나왔다고 하겠다.

인조는 인목대비의 뜻대로 하겠다고 했다. 그런데 정말로 그렇게 하면 인정상 너무 야박하다는 문제 이외에 감시 곤란이라는 문제도 있었다. 이에 반정 주역들은 감시 편의를 위해 가까운 섬으로 유배하고 그것도 광해군과 왕비 유씨를 함께 또 세자와 세자빈 박씨를 함께 유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구체적으로 강화도에는 광해군과 왕비 유씨를 유배하고, 교동에는 세자와 세자빈 박씨를 유배하자는 주장이었다. 결국 인조는 이 의견을 받아들였다.

한편 반정이 거사된 지 8일이 되는 20일까지도 광해군은 창덕궁에 갇혀 있었다. 이 사실을 확인한 인목대비는 곧바로 비망기(備忘記)를 작성해 빈청에 내렸는데 이런 내용이었다.

“역적 괴수인 폭군 혼(渾, 광해군)이 아직도 대궐 안에 있다고 한다. 천지간에 잠시도 용납할 수 없는데 어찌하여 역적 괴수가 편안히 앉아 있는가? 경 등은 위로 종묘사직을 위하여 속히 처치하라. 역적 괴수가 창덕궁을 떠난 뒤에야 나는 서궁에서 창덕궁으로 옮길 것이다. 경 등은 나를 위하여 반드시 소홀히 하지 말라. 나는 경 등을 향하여 두 번 절하고 요청한다.” [<승정원일기> 인조 원년(1623) 3월 20일]

뿌린 대로 거두게 되는 광해군


▎인조는 반정을 통해 광해군을 몰아내고 옥좌에 올랐지만 청(후금)을 적대하다 씻을 수 없는 굴욕을 당한다. 인조가 청 태종에게 항복하고 서울 송파구에 세운 삼전도비(三田渡碑, 대청황제공덕비).
위의 내용 그대로 인목대비는 광해군과 같은 궁궐에 있다는 사실 자체도 견디지 못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죽여버리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래서 속히 처치하라고 했던 것이다. 이 같은 인목대비의 명령에 의금부에서는 “자전(慈殿)의 하교가 또 이르렀으니 속히 결정을 내려 오늘 안으로 보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보고했다.

이에 대해 인조는 “대장 1명을 골라서 내일 아침에 보내도록 하라”고 명령했다. 결국 광해군은 인목대비의 재촉에 의해 3월 21일 강화도로 유배의 길을 떠나야 했다. 그 길은 임해군이 갔던 길이기도 했고 영창대군이 갔던 길이기도 했다. 광해군은 자신이 뿌린 그대로 되돌려 받고 있었다.

3월 23일 광해군과 폐비 유씨는 강화도에 도착했고, 폐세자와 폐빈 박씨는 교동에 도착했다. 그들이 거처할 곳 주변으로는 가시덤불이 쳐지고 밖에는 군병들이 배치됐다. 소용 임씨 역시 광해군을 수행해 강화도에 왔다.

이에 따라 광해군, 폐비 유씨 그리고 소용 임씨는 강화도 적소(謫所)에서 함께 머물게 됐다. 아마도 적소 안에서 광해군과 소용 임씨가 같은 건물에 머물고 폐비 유씨는 다른 건물에 머물렀을 것으로 짐작된다. 물론 광해군이 원해서였을 것이다. 반정 이후 광해군은 소용 임씨에게 더 매달렸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이 폐비 유씨에게 더 큰 서러움을 주지 않았을까 싶다.

<승정원일기>에 의하면 가시덤불로 둘러진 집에 갇히던 날, 폐비 유씨는 거의 숨을 쉬지 못해 위중했으며 통곡소리가 밖에까지 들렸다고 한다. 분명 폐비 유씨는 목을 매 죽으려 했을 것이다. 그것을 함께 있던 궁녀가 발견하고 풀어줘 살아났던 것이다. 그 와중에 폐비 유씨와 궁녀가 다 같이 대성통곡하는 바람에 울음소리가 밖에까지 들렸음이 분명하다. 아마도 폐비 유씨는 죽고 싶은 마음뿐이었던 듯하다.

이런 마음은 폐세자와 폐빈 박씨 역시 마찬가지였다. 가시덤불로 둘러진 집에 갇히던 날, 폐세자와 폐빈은 함께 죽기로 약속했다. 그래서 명목(暝目)·악수(幄手) 등 시체를 염습하는 데 쓰는 물건들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음식은 물론 물 한 방울 마시지 않았다. 그렇게 보름 정도 지나자 두 사람은 죽기 일보직전이 됐다. 때가 됐다고 생각한 폐세자와 폐빈은 함께 목을 맸지만 궁녀에게 들켜 되살아나게 됐다. 그때가 4월 10일쯤이었다.

동반자살하려다 실패한 폐세자와 폐빈은 장차 어떻게 할까 궁리했을 듯하다. 반면 감시는 더 심해졌을 것이 분명하다. 시중을 들기 위해 함께 거처하는 궁녀는 하루 종일 감시의 눈을 번뜩였을 것이다. 마음대로 자살도 못하게 된 폐세자와 폐빈은 다른 대안을 생각해냈다. 탈출이었다.

마침 그 즈음 한양에서 살림살이에 쓸 가위와 인두 등을 보내왔다. 폐세자와 폐빈은 이것을 이용하기로 했다. 으슥한 밤이 되자 궁녀는 인두를 가지고 땅을 파기 시작했다.

폐세자와 폐빈은 흙을 자루에 담아 방으로 들여갔다.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기 위해 폐세자와 폐빈이 직접 땅굴 작업에 참여한 것이었다. 궁녀는 이들과의 오랜 인연으로 땅굴 작업에 참여하였다. 그때가 4월 24일쯤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땅굴은 점점 더 길어졌다.

세자 내외는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데

그런데 폐세자와 폐빈이 탈출에 성공하려면 배가 있어야 했다. 교동은 섬이었기 때문이다. 폐세자와 폐빈은 감시병들의 지휘자인 별장 권채를 포섭했다. 권채의 도움으로 땅굴 작업은 성공적으로 진행됐다. 뿐만 아니라 권채는 배도 마련해뒀다.

드디어 5월 21일 한밤중에 땅굴이 담 밖에까지 연결됐다. 땅굴의 총 길이는 대략 20여m였다. 폐세자와 폐빈은 그날 밤에 탈출하기로 결심했다. 먼저 폐세자가 은자와 쌀밥을 챙겨 땅굴 속으로 들어갔다. 궁녀가 뒤에서 밀어줬다. 폐빈은 나무 위에 올라가 상황을 주시했다. 그런데 땅굴 밖으로 나온 폐세자는 방향을 몰라 헤매다가 감시병에게 들키고 말았다. 그것을 나무 위에서 보던 폐빈은 놀라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

체포된 폐세자는 다시 적소 안으로 들여보내졌다. 이와 함께 대대적인 조사가 시작됐다. 폐빈은 절망에 빠져들었다. 폐세자 역시 절망에 빠져들었다. 폐세자와 폐빈은 굶기 시작했다. 그렇게 사흘을 굶던 폐빈은 결국 스스로 목을 매 죽었다.

그러나 폐세자는 자살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한 달 여 후에 자진(自盡) 처벌을 받은 폐세자 역시 스스로 목을 매 죽었다. 그동안 폐세자는 거의 굶다시피 했으므로 사실상 굶어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광해군과 폐비 유씨는 비록 쫓겨난 왕과 왕비라 해도 폐빈 박씨와 폐세자의 죽음을 통보받았을 듯하다. 어쨌든 큰아들이고 큰며느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광해군과 폐비는 장례식에 참여할 수 없었다. 그래서 광해군과 폐비는 적소 안에서 개인적으로 큰아들과 큰며느리의 상을 치러야 했다.

<계축일기>에 의하면 폐비는 글재주도 있고 재치 또한 겸비해 마음 씀씀이가 고운 면이 있었다고 한다. 이런 폐비는 광해군과 인목대비의 갈등을 겪으면서 궁중생활 자체를 혐오하게 됐다. 비록 상황에 떠밀린 폐비가 광해군과 함께 인목대비를 핍박하기는 했지만, 그런 상황 자체가 폐비에게는 혐오스러웠던 것이다.

그래서 폐비는 항상 “후생에는 다시 임금의 집 며느리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라고 하늘에 빌었다고 한다. 궁중에 일상화된 암투와 음모 등이 너무도 싫어서였을 것이다. 이 같은 폐비의 감성을 큰아들 폐세자가 빼 닮았다. 강화도로 끌려오던 배 위에서 폐세자는 이런 시를 지었다고 한다.

“속세의 흥망성세는 사뭇 미친 물결 같으니/ 걱정한들 무엇 하리? 마음 스스로 평안하다./ 26년의 내 인생이여, 참으로 한바탕 꿈이어라./ 나는 기꺼이 가리라, 흰 구름 사이로”

이 시에는 폐세자의 여린 감성이 유감없이 표현돼 있다. 미친 듯 출렁이는 파도를 보며 폐세자는 속세의 흥망성쇠를 연상한다. 그런 그에게는 세자였던 자신의 지난날도, 부왕 광해군의 지난날도 모두 미친 듯 출렁이는 파도처럼 헛될 뿐이다. 가시덤불로 휘둘린 적소에서의 생활 역시도 잠시 지나가는 파도에 지나지 않게 느껴진다. 그래서 폐세자에게는 인생살이 자체가 한바탕 꿈처럼 느껴진다.

아들 내외 보낸 지 100일 만에 폐비도 자진

큰아들과 큰며느리의 죽음을 알았을 때, 폐비는 죽을 결심을 했다. 하지만 곧바로 죽지는 않았다. 상을 치르기 위해서였다. 유교식으로 상을 치른다면 최소한 3년을 살아야 했지만 폐비는 유교를 좋아하지 않았다. 유교국가 조선의 심장인 궁궐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질리도록 봤기 때문이다.

그래서 폐비는 불교에 심취해 대궐 안에 금부처를 모셔두고 친히 기도하며 받들어 섬겼다. 또 나무로 새기고 흙으로 빚은 불상을 여럿 만들어 사찰에 내려주기도 했다.

이런 폐비였기에 폐세자와 폐빈의 상 역시 불교식으로 치렀다. 우선 49재를 지내면서 큰아들과 큰며느리의 명복을 빌었다. 그리고 100일째 되던 날 상을 마쳤다. 이미 죽기로 작정한 폐비 유씨는 탈상 전부터 곡기를 끊은 상태였다.

10월 8일 폐비는 강화도 적소에서 사연 많은 인생을 마무리했다. 폐세자가 목매 죽은 6월 27일부터 계산하면 101일째 되는 날이었다. 폐비의 죽음을 알리는 강화부사의 보고서가 한양에 도착한 시점은 10월 9일이었다.

이 보고서에는 폐비 유씨가 병사(病死) 했다고 기록됐지만 사실은 굶어 죽은 것이었다. 인조는 “폐비가 병으로 죽었다니 내가 매우 놀랍고 슬프다. 염습할 때 쓸 옷과 관 등의 물자를 속히 내려 보내도록 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아울러 폐비에게 문성군부인(文城郡夫人)이라는 작호도 내렸다. 남자들의 정치투쟁에 휘말려 허무하게 죽어간 폐비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였다.

얼핏 생각하면 광해군의 왕비 유씨와 세자빈 박씨가 굶어 죽은 것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 아니었을까 싶다. 조선시대를 살아간 왕비 유씨와 세자빈 박씨에게는 삼종지도(三從之道)의 굴레가 있었다. 조선시대 여성의 몸으로 그런 굴레를 깬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광해군의 폭주를 왕비 유씨와 세자빈 박씨는 막을 수 없었다. 그런 광해군 때문에 폐비가 되고 폐빈이 된 상황에서 여성인 그들이 더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겠는가? 특히 큰아들과 큰며느리가 죽은 상황에서 왕비 유씨가 더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비 유씨와 세자빈 박씨의 자살은 정당화될 수 없다. 예나 지금이나 자기의 목숨이라고 해도 그 목숨을 자기 마음대로 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자기의 목숨은 가까이로는 부모에게서 받은 것이고 더 멀리로는 조상을 너머 조물주에게서 받은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삶 또는 생명에 관련된 <대학연의>의 가르침은 ‘숭경외(崇敬畏)’에 함축돼 있다. 하늘을 공경하고 두려워해야 한다는 가르침이 ‘숭경외’다. 나의 목숨을 비롯해 사람의 생명 나아가 우주만물의 생명은 궁극적으로 하늘의 명을 받았다.

그런 생명이기에 자기의 것이나 남의 것이나 공경과 두려움이 대상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남의 생명을 마음대로 해서도 안 되지만 자기의 생명도 마음대로 해서는 안 된다.

진정 하늘을 공경하고 두려워한다면 자기의 생명과 남의 생명을 다 공경하고 두려워해야 한다. 그럼에도 고금에 걸쳐 자기 생명은 물론 남의 생명까지도 함부로 여기는 사람들이 적지 않으니 크게 슬퍼할 일이다.

신명호 - 강원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부경대 사학과 교수와 박물관장직을 맡고 있다. 조선시대사 전반에 걸쳐 다양한 주제의 대중적 역사서를 다수 집필했다. 저서로 <한국사를 읽는 12가지 코드> <고종과 메이지의 시대> 등이 있다.

201507호 (2015.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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