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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혜련의 인생 이모작] 샌드위치로 일어선 ‘서민 갑부’ 정주백 씨 

“죽기 살기로 버티니 안 될 일 없더군요” 

글 고혜련 월간중앙 기획위원, 제이커뮤니케이션 대표 / 사진 전민규 기자
잘나가던 영업사원으로 회사 나왔지만 과일 도매사업 실패 후 좌절… 프리미엄 샌드위치 ‘멜랑제’로 재기해 연매출 70억원 기업 ‘우뚝’

▎하루 6천 개의 샌드위치를 만들어 4곳의 직영점과 백화점 등에 납품하는 ‘멜랑제’의 공장에서 정주백 대표가 매일 새로 만드는 빵의 맛과 위생상태를 점검하고 있다.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자동차 내비게이션에서는 몇 번이고 목적지 도착을 알려주는 안내가 나오는데도 도통 모르겠다. 서울 양천구 목동 736-3번지.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거지?

서울 한복판인데도 번지수를 찾기가 쉽지 않다. 좁은 골목을 몇 번이나 뱅뱅 돌다가 결국 부동산중개소의 도움을 청했다. 세상에나! 이곳이 ‘샌드위치 대부’ 정주백(57·SLB Korea 대표) 씨의 사무실이라고?

미리 주소를 알려준 그에게 전화를 걸어 다시 물어보기도 민망했다. 간난고초 끝에 성공을 일궈 ‘서민 갑부’라는 수식을 달게 된 그 아니던가! 우여곡절 끝에 그의 사무실에 도착하고 보니 고개가 자연히 끄덕여졌다. 사무실은 목동 재래시장 입구의 허름한 건물 안에 있었다. 아래층은 작은 이불가게이고, 위층이 그의 사무실이다. 옆 건물에는 떡방앗간과 각종 약초를 달여주는 건강원이 있다. 피식 웃음이 났다. 마치 서민 동네를 촬영하기 위해 일부러 만들어놓은 세트장을 보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신도시 목동에 이런 곳이 있으리라곤 꿈에도 몰랐다.

그래, 항상 선입견이 문제인 거다. ‘갑부’ 소리를 듣는데 대로변의 번듯한 건물에 사무실을 갖고 있겠지 하는 지레짐작이 모든 걸 헝클어놓았다. 한 사람이 겨우 올라갈 만한 비좁은 계단을 올라가 보니 계단 중간쯤에 회사 문패가 보였다. 빼꼼 열려 있는 문으로 들여다보니, 초로의 살집 있는 아저씨가 몸을 일으켜 세웠다.

프리미엄 샌드위치 전문 브랜드인 ‘멜랑제’의 본사인 셈이다. 그가 필자를 안내한 곳은 역시 방바닥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야 하는 직원식당. 밥상을 사이에 두고 그와 마주앉았다. 그의 누나가 부엌에서 열심히 직원들의 점심식사를 준비하고 있다.

프리미엄 샌드위치 브랜드 ‘멜랑제’는 하루 6천 개의 수제 샌드위치를 일부 호텔, 시내 백화점, 멜랑제 단독 매장 4곳에 공급한다. 수제 샌드위치라 가격도 비싼 편이다. 하지만 ‘멜랑제’는 가장 서민적인 모습으로 ‘프리미엄 고객’들을 공략한다. 정씨가 이름을 붙였다는 ‘멜랑제’ 브랜드 명은 새로운 맛을 내기 위해 여러 가지를 ‘섞어 만든다’는 뜻의 프랑스어라고 했다.

자신만만했던 40대에 찾아온 시련들


▎정 대표가 서울 서초동 등에 자리한 멜랑제 직영점에 나와 매장상황을 둘러보고 있다.
연간 매출 1조원대에 이르는 국내 샌드위치시장은 편의점에 공급하는 1500원대의 저가 샌드위치가 90% 이상을 장악하고 있고, 중견기업이 하는 프랜차이즈 업소가 나머지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그가 만드는 햄 모짜렐라치즈 빠니니, 불고기 치아바타 등의 샌드위치는 개당 가격이 7천∼1만2천원이나 한다.


▎샌드위치 공장 입구에는 위해요소중점관리 기준 적용업소, 기술평가보증기업, 벤처기업확인서 등의 각종 인증서가 걸려 있다.
“겸손해야 돼요. 인생 자체가 배움의 과정인데 겸손하지 않으면 알 턱이 없어요. 막연히 뭔가 되겠지 하는 안이한 생각을 버려야죠. 헛똑똑이는 디테일한 똑똑함에 지게 돼있습니다.” 겉모습에 신경 쓸 때가 아니라는 듯, 정작 중요한 것은 다른 데 있다는 듯 그의 목소리에 힘을 실었다. 그도 그런 원칙을 깨닫기까지 오랜 세월이 흘렀다. 정씨가 그간의 실패담을 성공담처럼 담담하게 들려준다.

그는 한때 H화장품회사 영업사원으로 잘나갔다. 그러나 회사를 나온 뒤로 얼마 안 가 그는 빈털터리 신용불량자가 됐다. 입사 후 짧은 기간에 회사 내 최고 실적을 냈던 마당발 영업사원의 지나친 자신감이 그를 망쳤다. 그가 회사를 나오기로 한 것은 “이 정도면 뭘 못하겠느냐”는 자만심 때문이었다. 술 접대 영업에 지친 그는 30대 중반에 ‘을의 구차함’을 내팽개치고 ‘당당한 갑’이 되자고 선언했다. 주변 사람들의 만류도 호기롭게 뿌리쳤다.

회사를 나오고 나서 처음엔 날아갈 듯했으나 머지않아 막막함이 찾아왔다. 퇴사 후 3일 만에 후회가 물밀듯이 밀려왔다. 그러나 버스가 떠난 뒤였다. 무엇을 해야 할지 사업 아이템 정하지 못하고 백수건달의 생활이 한동안 이어진 것이다.

고민고민 끝에 퇴직금으로 중고차를 구입해 과일 행상 일부터 시작했다. 화장품회사 영업사원 시절 거래처 술 접대 과정에서 알고 지내던 룸살롱의 인맥이 과일 판매처를 늘리는 데 도움을 주었다. 업소마다 독점적으로 월 1천만원어치의 과일을 외상으로 대주면서 공급처가 차츰차츰 늘어났다. 신바람이 났다.

그러나 그런 기쁨도 잠시. 시간이 갈수록 문제가 하나둘 불거졌다. 외상으로 과일을 구매한 영업상무들이 술집을 수시로 옮기다 보니 판매대금을 받아 내지 못한 경우가 늘어난 것이다. 외상값을 받기가 하늘의 별 따기만큼이나 어려웠다. 아예 사람을 찾을 수 없는 경우도 많았다. 결국 정씨는 맞벌이를 하며 마련한 집까지 날렸고, 잦은 부부싸움 끝에 부인과 이혼까지 하는 비극을 맞았다. 그에게 남은 거라곤 코흘리개 두 아들과 빚더미뿐이었다. 화불단행이라 불운은 한번으로 그치지 않는다고 했던가. 부모님마저 연이어 돌아가셨고 그에게 액운이 잇따랐다.

당장 먹고 살아야 하니까 시장길 한켠에서 빵도 팔아보기도 하고, 김밥을 말아 대학 구내식당을 들락거려보기도 했다. 액세서리 납땜 아르바이트도 하면서 재기를 꿈꿨지만 가족들의 입에 풀칠하기도 힘들었다. 남의 공장 지하에서 아이들과 먹고 지내면서 재기를 모색했으나 하는 일마다 번번히 좌절됐다. 지인의 도움을 얻어 무상으로 차렸던 빵가게도 망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많은 빚을 걸머져 신용 불량자가 돼 재기할 수 있는 희망도 사라졌다. 그의 나이 45세까지 그랬다.

그래도 죽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직 십대인 두 아들이 아버지만 쳐다보며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빵을 다시 만들어보기로 결심했다. 그는 어느 날 한 잡지에서 읽은 ‘샌드위치의 달인’을 무턱대고 찾아갔다. 빵 장사 경험을 살려 샌드위치로 승부를 걸어보자는 생각에서였다. 목포에 사는 ‘달인’의 가르침을 받으려고 통사정을 해서 그를 집 근처의 여관으로 모셨다. 그는 그때 한 달 동안 집중적으로 50여가지 샌드위치 요리 노하우를 전수받게 된다. 여관비를 내고 빵의 재료를 구입하기 위해 연습용으로 만든 빵을 들고 길거리로 가지고 나가 팔았다. 살아가는 것이 아슬아슬했다.

샌드위치 행상으로 마지막 승부수


▎정 대표의 사무실은 서울 양천구 목동의 전통시장 입구에 있는 허름한 건물에 자리 잡았다. 정 대표가 2층에 있는 사무실 계단을 내려오고 있다.
하지만 당초 약속했던 강사료를 제때에 지급하지 못해 한겨울에 얼어붙은 시장 바닥에 무릎을 꿇고 ‘달인’에게 빌어야 하는 서러움을 겪기도 했다. 물론 나중에 누이에게 돈을 꿔서 간신히 돈을 갚았지만 말이다. 샌드위치 기술을 습득한 그는 투자금 마련을 위해 부자로 소문난 4촌형 집을 찾아가 매달렸다. 하지만 그를 믿어주지 않았다. 빈손으로 강남에서 아이들과 함께 살고 있는 화곡동까지 버스비가 없어 터벅터벅 걸어서 돌아오는데 생을 아예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이럴 바에야 생을 끝내버리자’는 극단적인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단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마지막 순간 오기가 발동했다. ‘이왕 죽을 바에는 제대로 된 샌드위치나 한번 만들어보고 죽자”는 생각에 이르렀다. 그는 그동안 식재료를 사면서 안면을 익힌 가게들을 찾아 나섰다. 한 번만 기회를 달라고 매달렸다. 궁하면 통한다 했던가. 그동안 갈고 닦은 실력과 정성을 다해 만든 각종 샌드위치를 들고 대학 구내식당을 찾아갔다. 그런 그에게 납품을 허락할 리 없다. 당시 대학 구내식당 국밥 한 그릇에 1500원 하던 시절인데 2500원짜리 샌드위치를 팔아달라니 먹혀들 리 만무했다.

그렇다고 쉬 포기할 수 없는 일. 핏속에 흐르던 최고 영업사원의 열정과 끈기가 발동했다. 그는 그동안 쌓아온 영업 노하우를 총동원해 결국 납품에 성공한 것이다. 조건은 외상 납품. 팔리지 않으면 도로 가져가서 폐기하기로 했다. 그런데 웬걸, 구내식당에 샌드위치를 내놓자마자 모두 팔려나간 것이다. 다음날치 추가주문이 들어온 것은 당연지사다. 그의 사업에 햇볕이 드는 순간이었다. 정씨는 그 사실을 다른 대학 구내식당의 영업에 활용하니 그때부터는 일이 술술 풀려나갔다. 서울 소재 대학들이 차례차례 그의 납품처가 됐다. 가나다 순으로 공략을 했는데 한결같이 ‘오케이’였다. 대학 식당에서 일이 풀리자 뜻밖에 편의점 납품까지도 그에게 떨어졌다.

그때가 2000년쯤의 일이었다.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정씨의 가슴은 터질 듯했다. 1년 넘게 그는 미친 듯이 뛰어다녔다. 그러던 중 그에게 특별한 기회가 찾아왔다. 정씨가 애당초 생각했던 프리미엄급 샌드위치에 도전해볼 기회가 온 것이다. 서울 소공동에 있는 한 고급 호텔에서 그에게 납품을 제안해온 것이다. 그렇다고 덥석 받아들일 수도 없는 제안이었다. 자칫하다간 요리법만 뺏길 것 같다는 걱정이 앞섰다. 처음엔 그 제안을 거절하다 일곱 번 만에 호텔 관계자를 만나기로 했다. 호텔 측은 호텔 소속 조리원들이 만든 샌드위치와 정씨의 샌드위치를 비교 시식하는 평가회가 열렸는데 즉석에서 오케이 사인이 났다. 그는 계약을 체결하고 나서 아주머니 직원들과 낡은 봉고차를 타고 돌아오던 때의 기쁨을 아직까지도 못 잊은 듯하다.

“그때 한 분야에서 10년은 해야 진정한 전문가가 될 수 있고 무슨 일이든 맥을 잡아갈 수 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문리가 트인다는 말이 있잖아요? 조급한 마음에 이일 저일 7∼8번이나 아이템을 바꿀 정도로 쉬 포기한 것이 문제였음을 그제서야 깨달았다고 할까요.”

백화점 납품으로 프리미엄 샌드위치 시장 선점


▎재기에 성공한 기업인으로 소문나 요즘 대학이나 지자체가 주최하는 창업관련 강의에 연사로도 초청을 받는 정 대표는 평소 공부도 게을리하지 않는다.
2004년부터 시작된 특급호텔 납품은 그의 사업에 순풍에 돛을 달아주었다. 사방에서 주문이 밀려왔다. 그는 프리미엄 샌드위치에 승부를 걸기 위해 대학 구내식당의 납품을 포기했다. 현재는 서울 서초동과 수원 롯데백화점, 광명 프리미엄 아울렛 등 4곳에 직영점을 열었고 대기업 직영 커피전문점인 아티제에도 납품한다. 올해 매출 목표치는 70억원. 정 씨는 자신감에 찬 어조로 말했다.

“샌드위치는 신선한 재료를 쓰는 것이 물론 첫째지만 빵과 배합물이 어우러지는 맛이 무엇보다 중요해요. 단지, 속에 토핑을 넣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요리를 접목시킨 것이므로 저는 이 사업이 외식이 아닌 패션사업이라는 생각으로 임합니다.”

하지만 그는 요즘도 외형상으로는 ‘옛날의 그 초라함’을 그대로 유지한다. 두 아들과 함께 사는 집부터 마련할 듯한데 그의 가족들은 사무실과 가까운 시장통의 허름한 빌라에 살고 있다. 방 두 개를 장성한 아들 둘(28, 25세)에게 내어주고 자신은 거실을 쓴다. 정씨가 이런 ‘호사’를 누린 것도 불과 1년여 전부터란다. 방에는 번듯한 가구 하나 없다. 이제는 다 자란 아들 둘(28, 25세)을 포함해 남자 셋이 식사도 사무실 식당에서 모두 해결하니 나머지는 사치나 다름없다고 생각한다. 더구나 하루 종일 밖에서 사니 집은 단지 잠자는 곳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정 씨에게 “그럼 돈을 버는 목적이 무엇이냐?”고 묻자 “아직 호사할 때가 아니다”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아니, 물질적인 호사에는 관심이 떠나버렸단다. 10평짜리 집에 사나 100평짜리 집에 사나 다를 바가 없다는 얘기다. 그는 “사업을 잘 이루고자 하는 게 생의 줄기고 나머지는 모두 곁가지”라고 말한다.

그의 명함에는 평소 간직해온 자신의 포부가 적혀 있다. 첫째, 세계를 지향하는 국내 최고의 샌드위치를 만드는 사람. 둘째, 성공적인 창업을 꿈꾸는 사람들을 돕고 일자리 창출을 도모하는 사람. 셋째, 안전한 먹거리를 만들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제 신나게 돌아가고 있는 샌드위치 공장과 함께 그의 하루도 신명으로 가득하다. 새벽 4시쯤 일어나 하루 일과를 계획한다. 그리고 그의 조언을 원하는 창업동아리 밴드에 들어가 창업을 꿈꾸는 수백 명의 회원이 쏟아내는 질문들에 일일이 답하는 걸로 하루를 연다.

그 다음, 사무실과 1분 거리에 있는 아파트 지하공장에 들러 직원들과 함께 하루의 업무를 챙긴다. 가끔 시장에 나가 식품재료를 구매하거나, 두 아들이 맡고 있는 직영점에 나가 매장을 점검하기도 한다. 80여 명의 직원도 그의 눈초리를 벗어나지 못한다. “요즘 젊은이들은 무엇을 제대로 알기 전에 무조건 사람을 부릴 생각부터 해요. 인생은 처음부터 배우면서 사는 과정인데 겸손한 마음이 없으면 알 턱이 없게 되죠. 스스로 바보라고 생각하고 처음부터 배운다는 자세로 임해야 합니다. 그래야 책이건 사람이건 자신의 멘토가 돼줍니다.” 직영점 관리를 맡고 있는 두 아들을 향한 그의 질책에서는 무한한 애정도 묻어난다.

프랜차이즈 사업으로 제2도약 준비


▎1. 공장에서 사원들과 함께 포즈를 취한 정씨. 그는 늘 위생관리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 2. 정 대표가 직접 샌드위치 만드는 법을 선보이고 있다.
그의 샌드위치 공장은 작고 허름하지만 위생관리만큼은 철저하기로 소문났다. 마치 실험실 같은 통제 구역에서 소독한 가운과 모자, 마스크를 착용한 직원들이 샌드위치 만드는 일에 집중하고 있다. 공장 문밖에 걸려 있는 위해요소 중점관리기준(Haccp) 적용업소, 기술보증기금의 기술평가 보증기업, 벤처기업 확인서 등이 최고 샌드위치 만들기에 승부를 건 그의 노력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그는 요즘 또 다른 꿈에 부풀어 있다. 내년에 용인 기흥에 2500평짜리 공장을 지으면서 샌드위치 프랜차이즈 사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들 계획을 세웠기 때문이다. 이미 태스크포스팀을 구성해 70% 정도 일을 성사시켰고 조만간 가맹점 모집을 시작한다. 우선은 가맹점 100곳을 목표로 삼고 있다. “어떤 점주를 모시는가가 가장 중요합니다. 한때 신용불량자로 극한의 어려움을 겪은 제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스티브 잡스가 ‘stay hungry, stay foolish’라고 말했듯 헝그리 정신이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무엇이든 배울 수 있는 겸손함이 필수라고 봅니다. 그런 분들을 점주로 모실 겁니다.”

그간의 노력이 하나둘 결실을 맺어가면서 그의 도움을 청하는 사람도 많아졌다. 우선 그의 성공 노하우를 들으려는 강의 요청이 줄을 잇는다. 대학이나 지차체의 창업 관련 강의에 단골강사로 나선다. 그는 서울시의 실패 창업사례 공모전에서 장려상을 수상한 불명예스러운(?) 경력도 있다. 하지만 그는 화려하게 자신의 삶에서도 재기했다. 그의 성공은 그의 명함에 찍힌 각종 직함이 말해준다. 성남고등학교 총동창회장, 회원 수 1만여 명인 서울시 통상산업진흥원 창업학교 동문회장, 서울대 식품영양산업 최고경영자 총교우회 사무총장 등을 맡고 있다.

그는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면서 도움을 주고 정을 나누는 것이 삶의 재미와 의미를 더해준다”며 이렇게 말했다. “한때 포기할까도 생각했지만 인생은 살만한 가치가 있더군요. 이제 전 세계인이 즐겨먹는 샌드위치 전문기업을 만들어 세계시장 진출도 꿈꿀 수 있게 됐어요. 그 꿈을 위해서는 더 열심히 공부하고 뛰어야 합니다.”

고혜련 - 칼럼니스트. 이화여대에서 국문학, 미국 뉴저지주립대에서 국제정치학을 전공했다. 중앙일보 기자를 거쳐 파이낸셜뉴스 문화부장과 런던특파원을 지냈다. 저서로 <신문, 취재와 기사작성> <자연에 산다> <매스커뮤니케이션개론> 등이 있다. 홍보 및 콘텐트 기획사 ‘제이커뮤니케이션’과 블로그(www.우리들이사는법.com)를 운영하고 있다.

201507호 (2015.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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