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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언론 공동기획] 긴박했던 한일 관계 개선 막전막후 

“한국이 내민 손 일본이 잡을 때” 

수교 50주년 리셉션 양국 정상 교차참석은 한국 정부의 작품 … 위안부 명예회복 위한 최소한의 의사표시가 양국 정상회담의 단초

▎6월 22일 서울에서 열린 ‘한일 국교 정상화 50주년 기념 리셉션’에 참석한 박근혜 대통령이 누카가 후쿠시로 일한의원연맹 회장이 아베 일본 총리의 축사를 대독하자 박수치고 있다. / 사진·중앙포토
6월 22일 오후 2시 국회 의원회관에서 한일수교 50주년 기념 토론회를 개최한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최재천 의원은 하루 전 일본 대사관으로부터 예기치 않은 전화를 한 통 받았다. 토론회 축사를 하기로 했던 벳쇼 고로 주한 일본대사가 부득이한 사정으로 참석할 수 없게 됐다며 양해를 구해온 것이다. 그 사정이란 아베 총리 특사 자격으로 방한하는 누카가 후쿠시로 일한의원연맹 회장 일행을 영접·수행하는 일이었다.

누카가 회장은 22일 오후 박근혜 대통령을 예방한 뒤 주한 일본대사관이 서울 웨스틴조선호텔에서 주최한 ‘한일 국교 정상화 50주년 기념 리셉션’에 참석해 아베 총리의 축사를 대독했다. 비슷한 시각 한국의 윤병세 외교부장관도 사실상 박 대통령 특사 자격으로 일본을 찾아 아베 총리 면담과 주일 한국대사관 주최 ‘한일 국교 정상화 50주년 기념 리셉션’ 참석 일정을 소화했다. 이날은 박 대통령과 아베 총리가 서울과 도쿄에서 각기 열린 기념 리셉션에 교차 참석하는가 하면, 특사를 교환함으로써 양국 관계 개선에 대한 기대감이 한껏 높아진 날이기도 했다.

하지만 최 의원은 좀 다른 각도에서 특사 교환을 조망했다. 주한 일본대사가 오래전에 잡힌 한국 국회의원과의 약속을 불과 하루 전에 특사 방문을 이유로 전격 취소했기 때문이다. 결국 아베 총리 특사 파견과 축사 대독이 뭔가에 쫓겨 급작스럽게 결정됐으리라는 심증을 갖게 한다는 것이다. 그는 “관계 개선의 하이라이트라 할 특사 이벤트가 왜 이렇게 ‘번갯불에 콩 구워먹듯’ 급조된 것인지 의아했다”며 석연치 않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로부터 10여 일 뒤인 7월 10일 일본 도쿄에서 열린 제38차 한일·일한의원연맹 합동총회에는 그동안 빠지지 않고 참석해오던 일본 총리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총회가 열리는 시각 일본 의회에서 야당의 집중 질의에 총리가 답변을 해야 하는 관계로 참석을 못했다고 알려졌다. 합동총회에서 양국 의원들은 공동성명을 채택했다. 성명에는 “한국측은 (무라야마 담화를 비롯해 고노 담화, 칸 나오토 담화 등이 확인한) 침략과 식민지배에 대한 반성과 사죄, 올바른 역사 인식 위에 미래지향적 관계를 구축하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일본측은 이러한 역대정권의 입장을 계승해 나갈 것을 재확인했다”는 구절이 나온다. 당초 일본측은 공동성명에 침략, 식민지배, 반성, 사죄 같은 단어를 넣지 않는 게 좋겠다는 입장을 전해왔다고 한다. 이에 한국측이 “그러면 공동성명을 채택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강수를 두면서 의사를 관철했다고 공동성명의 대표 서명자인 한일의원연맹 강창일 간사장이 말했다. “한일·일한의원연맹 공동성명도 적지 않은 진통을 거쳐 탄생했다.”

박근혜 정부 들어 2년 넘게 냉각기에 접어든 한일 관계는 양국 정상이 수교 기념 리셉션에 교차 참석함으로써 일단 변화의 숨통을 틔웠다는 데 양국이 모두 공감하는 기류다. 양국 국회의원들도 도쿄의 일한·한일의원연맹 합동총회, 서울의 한일 의원 친선 바둑대회 개최 등을 통해 우호적 분위기 조성에 앞장섰다.

반전 꾀하는 한국 정부, 무덤덤한 일본 정부


▎유네스코에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미쓰비시중공업의 나가사키현 하시마 해저 탄광(일명 군함도). / 사진·중앙포토
하지만 양국 간 해빙 무드의 이면을 들여다보면 갈등과 긴장의 요소가 곳곳에 잠복해 있음을 알 수 있다. 종군위안부 문제, 강제징용 등 과거사를 둘러싼 양국의 인식은 외견상 여전히 평행선을 달린다. 단적인 예가 7월 일본의 근대산업시설의 유네스코(UNESCO) 세계유산위원회 등재를 둘러싼 논란이다. 독일 본에서 열린 세계유산위원회의 등재 결정문에 명기된 ‘against their will’, ‘forced to work’와 관련해 일본 정부가 ‘조선인의 강제 노동을 인정하지 않았다’고 밝히자, 한국 정부는 “영문이 정본”이라면서 강제 노동을 인정하지 않는 일본 측 주장을 공박했다. 불과 며칠 전 국교 정상화 50주년 행사에서 양국 정상이 유화적인 발언을 주고 받던 모습과는 판이한 장면이다.

이게 양국 관계 본연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과거 20년의 역사가 그렇다. 윤병세 외교부장관은 7월 9일 서울 관훈토론회 모두 발언에서 “정부 출범 초기에는 관계 개선을 위한 여러 조치가 줄을 잇다가도 중반으로 넘어가면서 위기 요소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해 갈등이 재연·증폭되고, 급기야 임기 말에는 파탄으로 끝을 맺던 게 어제오늘의 일 아니다”라고 돌이키기도 했다. 조세영 동서대 특임교수는 이와 관련해 “기본적으로 한일 관계는 숙명적 갈등 관계”라고 설명했다. “한일 관계는 일거에 반전이라는 등식이 성립하지 않는다. 세계유산 등재 건만 해도 국제무대에서의 합의와 자국내 설명이 다르다. 우리는 이에 반발한다. 이런 일은 계속 되풀이돼왔다.”

올해는 이른바 ‘꺾어지는 해’인 국교 수립 50주년이다. 박근혜 정부 출범 후 양국은 정상회담은 물론 외교장관 회담조차 못 갖는 등 고위급 외교 채널이 단절된 상태였다. 수교 40주년인 2005년 당시엔 양국 정상이 상대국 정부가 주최한 수교 40주년 기념행사에 교차 참석하는 것으로 우의를 다졌다. 이런 마당에 수교 50주년 행사가 제각각 따로 열린다면 모양새가 아주 우스워진다. 미국 언론도 이런 정황에 주목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최근 “한일 양국은 6월 22일 열린 한일 국교정상화 50주년 기념 행사에 막판에 부랴부랴 양국 정상들이 직접 축사를 전달하는 쪽으로 계획을 변경했다”면서 “양국이 이 상징적인 날을 기념하기 위해 무언가 하지 않을 수 없다고 느꼈기 때문”이라고 보도했다.

분위기 반전에 무게를 싣는 한국 정부와 달리 일본 정부는 상대적으로 무덤덤해 하는 분위기다. 일본 정부의 표정엔 변화가 읽히지 않는다는 게 외교부 동북아국장을 역임한 조세영 교수의 관전평이다. “한국이 국면 전환의 기대감이 감돈다면 일본은 불행 중 다행이라면서도 그저 쿨(cool)한 것 같다. 국가간 관계가 하루아침에 바뀌고 하는 것은 아니다.”

<주간현대>의 보도는 일본 본심?


▎서울 종로구 중학동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 설치된 위안부 소녀상. 일본은 소녀상의 철거를 요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 사진·중앙포토
일본의 주간지 <주간현대>의 최근 보도가 이런 경향을 대변하는 지도 모른다. 이 잡지는 윤병세 외교부장관의 일본 방문에 즈음한 아베 총리의 발언이라며 일부 내용을 소개했다. 아베 총리가 수교 50주년을 하루 앞둔 6월 21일 기시다 후미오 외무상과 만나 비보도를 전제로 윤 장관 방일과 관련해 “내가 말했잖아, (단지) 기다리고 있으면 한국이 스스로 찾아올 것”이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또 “위안부 문제는 3억 엔이면 모두 해결할 수 있다. 그러나 이건 돈 문제가 아니다”는 말도 나왔다고 <주간현대>가 밝혔다. 일본은 이미 판을 주도하고 있으며 한국은 결국 따라올 수밖에 없다는 다소 오만해 보이는 인식이 깔린 발언들이다. 노광일 외교부 대변인은 “필요할 경우 일본 정부 측에서도 입장 표명을 해야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갖고 있다”는 논평을 내놓았다.

이렇게 외교적으로 민감한 사안은 진실공방으로 흐르거나 진위가 확인되지 않은 채 흐지부지 되곤 하는 게 과거의 경험이다. 하지만 <주간현대>의 보도가 일본의 일말의 본심을 반영하고 있다고 보는 이도 적지 않다. 최재천 의원은 “양국 정상의 수교 기념 리셉션 교차 참석이 국민적 동의를 얻는 절차를 생략하는 등 전격적으로 성사된 과정부터가 그렇다”면서 “그런 정황으로 미뤄볼 때 <주간현대>의 보도 내용이 신빙성이 있어 보인다”는 입장을 피력했다.

양국 정상의 수교 기념 리셉션 교차 참석안은 한국이 먼저 했던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부터 한일 외교 당국은 국교정상화 50주년 관련 행사를 위한 실무단을 각각 발족, 서울과 도쿄를 오가며 시기별 세부 계획을 협의해왔다고 한다. 실무단은 2015년 양국 정부와 민간 차원의 각종 행사를 조직하고 지원하는 조직으로 사무국 형태로 운영된다. 2005년 노무현 대통령, 고이즈미 총리가 그랬듯 수교 기념행사에 양국 정상이 교차 방문하는 방안이 검토됐고, 한국의 제안에 일본이 호응하면서 급진전을 보게 됐다고 외교 소식통이 전했다. 이 과정에서 한미일 3각 협력 체제를 바라는 미국도 상당한 역할을 했으리라는 관측도 나왔으나 정부 당국자는 “미국과 관계 없는 한일 양국의 결정 사안”이라며 선을 그었다. 이 당국자는 “양 정상이 그런 결정을 내렸고, 실무진은 이를 실행에 옮기는 역할을 한다”면서 “이는 양국 관계 발전을 바라는 의지의 표현”이라고 강조했다.

대화의 물꼬가 트인 이상 남은 문제는 종군위안부 문제와 8월 15일에 즈음한 아베 총리의 담화로 압축된다. 이 또한 한국이 보다 전향적인 입장을 견지하는 것으로 관측된다.

박근혜 대통령은 6월 12일 미국 <워싱턴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위안부 문제에 있어 상당한 진전(considerable progress)이 있었으며 현재 (일본과) 협상의 마지막 단계(final stage)에 있다”며 현안 해결에 대한 기대감을 높였다. 박 대통령은 “군 위안부 피해자들이 돌아가시기 전에 그들의 상처를 치유하고 명예를 회복시킬 의무가 일본에 있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며칠 뒤인 6월 18일 일본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위안부 문제 해결 방안과 관련해 양국 정부의 협의 내용 일부를 보도했다. 예컨대 일본 정부가 위안부 할머니들에 대한 재정 지원을 하고, 아베 총리의 사죄와 책임에 대한 언급이 포함된 성명을 발표하는 방안이 거론된다는 것이다. 또 한국 정부는 박 대통령이 위안부 문제가 최종 해결됐다는 점을 보증하는 내용 등이 논의 중이라고 했다. 이는 이명박 정부 시절인 2012년 3월 민주당 노다 정부의 사사에 겐이치로 외무차관이 제시했다는 3개 합의 방안과 맥을 같이한다. 이는 위안부 문제에 대해 ▷일본 총리의 공식 사죄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인도주의 명목의 배상 ▷주한 일본 대사가 위안부 피해자들을 방문해 총리의 사죄문을 읽고 배상금 전달 등을 담고 있다. 당시 한국 정부는 일본이 법적인 책임을 명시하지 않아 국내 여론을 설득하기 어려울 것으로 봤고, 일본 정부 또한 내부 이견과 함께 의회가 해산되면서 논의의 진전을 보지 못했다.

역사 문제와 다른 차원의 협력


▎6월 22일 일본 도쿄에서 열린 ‘한일 국교 정상화 50주년 기념 리셉션’에 참석한 아베 총리가 축사하고 있다. / 사진·중앙포토
이와 관련해 여권의 외교 소식통은 <월간중앙>에 “사사에 안은 참고가 될 수 있지만 그 안이 초안으로 쓰인다고는 할 수는 없다”는 입장을 전해왔다. 이 소식통에 따르면 위안부 해법과 관련해 한국 정부 내에서도 이견이 조율되는 과정이며 일본과도 논의가 진행 중이라고 한다. “정부 내에서는 시간은 한국 편이므로 협상이 지연되더라도 우리의 요구 수준에 최대한 근접하는 방안을 고수하자는 의견이 있는가 하면, 위안부 할머니들이 살아 있는 동안 미흡하나마 성의 있는 조치를 끌어내 명예를 회복하도록 해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 박 대통령이 후자에 힘을 실어줄 경우 한일간 논의도 진전을 볼 가능성이 크다.” 여권에서는 박 대통령이 이런 기조 위에서 <워싱턴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상당한 진전’을 언급한 것으로 해석하는 기류가 강하다.

양국 관계 개선의 공은 이제 일본으로 넘어갔다는 게 한국의 시각이다. 지금까지 한국 정부는 아베 총리가 역사 수정주의적 노선을 취하는 동안에는 양국간 타협의 여지가 없다는 입장을 견지해왔다. 일본군 위안부 강제동원 사실을 최초로 인정한 ‘고노 담화’, 일본의 침략과 식민지지배의 사과를 담은 ‘무라야마 담화’를 수정하거나 부정하려는 듯한 태도를 덮어두고 갈 수는 없었기에 분명하고 강경한 대응에 나섰다는 것이다. 그 결과 최근 3년 동안 양국의 인적·물적 교류가 매년 10~20% 감소했다. 이를 개선하기 위한 노력은 역사 문제와는 다른 차원에서 당연히 경주돼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다는 전언이다. 여권의 한 관계자는 “지난해 한일 관계는 더 이상 나빠질 수 없을 정도로 바닥을 쳤다. 한일 관계는 양국에 국한되는 게 아니라 미국·중국과의 관계에도 영향을 주는 만큼 동북아 메인 플레이어들과 잘 지내야 한다”고 말했다.

아베 총리도 과거사 관련 발언의 톤을 완화해가는 추세다. 4월 방미 도중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는 고노 담화를 계승한다. 그것을 수정할 의사가 없다”고 밝혔다. 상투적인 수식어를 통해 계승하지 않을 구멍을 남겨 두던 그간의 어법과는 달리 명백한 의사를 밝힌 것이다. 무라야마 담화도 ‘전체적으로 계승한다’고 말해 사실상 부인하던 언행도 주춤하는 등 도발과 자극의 강도가 줄었다는 게 외교 관계자들의 시각이다.

한일의원연맹 회장대행으로 활동하는 김태환 새누리당 국회의원은 “일본의 경제, 외교의 일정한 성과에 자신감을 회복한 아베 총리와 그 주변에서도 한국과 보다 긴밀한 협력을 추구해야 한다는 정서가 점차 강화되는 추세”라고 일본 정부 내의 기류를 진단했다. 김 의원은 박 대통령과 만나는 자리에서 이런 정황에 기초해 교착상태가 오래가서는 좋지 않다는 건의를 몇 차례 했다고 알려졌다. 그러면서 그는 “문제는 아베 총리”라고 못박았다. 박 대통령이 아베 총리의 역사인식 문제 제기에 앞서 위안부 문제의 근본적 해결 쪽으로 방향을 튼 만큼 일본도 성의를 보일 차례라는 말이다.

“일한의원연맹 간사장 등 일본측 파트너에게 한국이 유연해진 정도에 비례하는 일본의 호응이 있어야 한다는 점을 누차 지적했다. 아베 총리가 최소한 위안부 명예회복과 관련해 박 대통령과 진지하게 협의하고 지혜를 모을 용의가 있다는 의사 표시를 한다면 양국 정상 회담이 조속히 열리게 될 것이다.”

- 박성현 월간중앙 취재팀장

201508호 (2015.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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