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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취재] 멀고도 가까운 섬… 대마도의 한국, 한국인 

아픈 역사가 서린 섬 희망의 싹이 자란다 

권주리애 월간중앙 객원기자, 전기 작가
태평양전쟁 때 수많은 조선인이 강제노동을 했던 슬픈 역사 현장… 연간 입도(入島)하는 한국인 20만 명, 한국어 간판 곳곳에 눈에 띄어
“과거도 미래도 현재를 이길 수 없다. 세계를 움직이는 것은 바로 지금이라는 일순간이며 그것은 ‘열정’이 부딪쳐 일으키는 스파크 그 자체다. 과거에 사로잡히지 않고 미래를 꿈꾸지 않는다. 현재는 점이 아니라 영원히 계속돼가는 것이라는 깨달음이 내 가슴을 때렸다.” <냉정과 열정 사이>(쓰지 히토나리 & 에쿠니 가오리 저)는 2001년 나카에 이사무 감독이 영화로도 만든 일본 소설이다. 앞서 인용한 대목은 10년 전의 약속을 지켜 재회한 주인공 쥰세이가 연인 아오이를 애잔하게 기차역에서 떠나보내고 난 뒤의 독백으로 마음속에는 이미 새로운 열정이 싹트는 걸 볼 수 있다. 나라와 민족 사이에도 ‘냉정과 열정’은 존재하는가?


▎대마도는 한국에서 가장 가까운 외국으로 쾌청한 날에는 부산에서도 한눈에 들어온다. 가미자카 전망대에서 바라본 대마도의 내해(內海)인 아소만의 전경.
바다에 자신의 오른팔을 내어준 박성규(47) P&Point 대표는 9년 전 대마도(大馬島·쓰시마)에 정착했다. 낚시 실력으로 치면 한국에 있을 때부터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뛰어난 그는 코리아오픈 바다낚시대회에서 세 차례나 입상했다. 일본에 와서도 낚시대회에서 수차례 수상한 화려한 경력을 지녔다.

경남 산청이 고향인 박씨는 2남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를 따라 낚시 다니기를 좋아했다. 어깨 너머로 배운 것이지만 나이가 들어가면서 그의 낚시 실력도 거침없이 늘었다. 나이 마흔이 되면서 낚시에 관한 한 국내가 좁다고 느껴질 무렵 그는 밖으로 눈을 돌렸다. 그때 정착을 결심한 곳이 지리적으로도 가깝고 쓰시마 난류가 흘러 겨울에도 어종이 풍부한 대마도였다.

대마도 정착한 낚시광 박성규 씨


▎바다에 오른팔을 내어준 박성규 P&Point 대표는 9년 전 대마도에 들어와 정착했다.
이곳에서 사업을 하기로 결심한 뒤 그는 사업 구상차 섬 구석구석을 6개월간이나 훑고 다녔다. 일본말도 못했지만 낚시에 대한 집념과 열정만으로 이곳저곳을 탐색하던 그의 눈에 말 그대로 ‘그림 같은 민숙(여관)’이 들어왔다. 바닷가 갯바위 위에 파이프를 박아 2층으로 지은 것이었다. 잘 익은 홍시의 색깔을 한 일본 투구 형태의 건물이었다. 그는 두 말 않고 그 집을 구입하기로 결심했다.

“이곳에 정착하면서 처음엔 일본 낚싯배들과 많이도 싸웠죠. 한국인이 자기 바다에 와서 고기를 잡으니 가만 있을 턱이 없지 않나요? 하지만 같은 관심과 흥미를 가진 것을 알게 되고 난 뒤로는 다들 친구가 됐어요.”

그는 주식회사를 만들었다. 보험도 들었고, 5t짜리 하얀 배도 마련했다. 일본인 선장과 요리사, 요리사 보조, 아르바이트생이 함께 일한다. 돌돔이 좋아 대마도에 눌러앉은 또 한 명의 ‘낚시 고수’ 최현택(44) 실장은 한국인 직원이다. 최 실장은 “집에 한 번 가려면 배 타고, 전철 타고, 버스 타고, 대중교통은 모두 이용해서 간다”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대마도에서 박씨를 만나러 간 날은 마침 아침부터 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궂은 날씨에도 개의치 않고 용감무쌍하게 한국에서 낚시하러 온 사람이 있었다. 박씨의 단골손님인 창원의 황명문 씨(우성치과기공소 사장)다. 그가 반갑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대마도가 일본이지만 입국수속을 마치고 들어오면 마치 한국같이 편안해요. 여기에서 자리 잡고 가이드 역할을 해주는 박성규 사장님 덕분이죠. 지난달에도 주말에 가족이 다 함께 낚시하러 이곳에 왔거든요. 저는 아들 녀석과 낚시를 하고, 아내는 대마도 관광을 했어요. 그때 엄청 큰 대물을 낚았어요.”

박씨의 집에는 딸린 ‘식구’가 많다. 들고양이 4마리와 집 바로 아래 바다에 청둥오리 16마리도 함께 살고 있다. 물고기를 낚은 뒤 손질할 때는 산에 있는 수리들이 이를 지켜보다가 100마리 넘게 날아와 먹이를 먹는다. 최 실장이 옆에서 거들며 말했다.

“물고기를 손질하고 있으면 저 산에서 수리가 날아들어요. 산 너머 수리들까지도 원정을 오고요.”

91세 정복년 할머니의 삶


▎1. 올해 91세인 아사카 할머니의 한국 이름은 정복년이다. 그녀의 부모는 경남 함안이 고향이다. / 2. 렌터카와 자동차정비 사업으로 성공한 재일동포 오야마 부부.
대마도에서 91세의 아사카 씨를 만난 건 행운이었다. 그녀는 재일교포로 한국 이름은 정복년. 조선왕조 26대 고종의 비극의 왕녀 덕혜옹주와 1931년 쓰시마 번주(藩主) 소 타케유키(宗武志) 백작과의 비극적인 결혼을 축하하는 내용을 적은 ‘덕혜옹주결혼봉축기념비’가 있는 이즈하라에서 살고 있다.

아사카 씨를 만나러 가는 날, 필자는 설레는 마음을 안고 민단(民團)에서 받은 전화번호를 전날 묵었던 대아호텔 박재원 과장에게 내밀었다. 12년간 이 호텔에서 근무했다는 박 과장은 유창한 일본말로 택시를 불러 기사에게 주소가 적힌 메모지를 건네고, 도착하면 아사카 씨에게 전화를 걸어달라고 부탁해주었다.

혼자서 택시를 타고 30분쯤 한적한 시골길로 들어가니 잡초와 이름 모를 들꽃이 피어 있는 개울가 작은 이층집이 나타난다. 1층은 시멘트로 된 빈 창고인데 자전거가 몇 대 있었다. 그녀는 남의 집을 빌려서 산다.

아사카 씨의 고향은 경남 함안.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부모의 고향이다. 그의 부친은 1905년 살기가 팍팍한 시대에 농민의 자식으로 태어나 18세 때 동갑내기 아내와 함께 무작정 일본의 나가사키현으로 왔다. 그래서 아사카 씨가 태어난 곳은 나가사키다. 그녀의 남편은 한국인이다. 결혼 후 남편이 대마도에 목탄제조업에 종사하러 건너올 때 함께 왔다.

대마도에는 산이 89%나 된다. 태평양전쟁 때 끌려온 많은 한국 사람이 대마도에서 목탄을 만들고 길을 냈다. 전쟁이 끝나자 대부분의 사람이 조국으로 돌아갔다. 그때 아사카의 부모와 남동생(정근)도 함안으로 갔단다. 그때 아사카 씨도 한국으로 들어가고 싶었지만, 남편의 반대로 이즈하라에 눌러앉은 게 지금에 이른다.

“전쟁 때 남편은 길 닦고 도랑 파고, 굴(방공호) 파고, 목탄 만들고 열심히 일했어. 전쟁이 끝난 다음엔 공구를 만들어 팔았는데 잘 팔리지 않아서 근근이 자식을 키웠어요.”

일거리가 없어지자 남편은 술독에 빠져 살았다. 91세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단아한 아사카 씨의 모습에서 신고의 세월을 찾아보기가 힘들 정도로 편안한 모습이다. 누추하지만 깨끗한 다다미방도 정겹게 느껴진다.

아사카 씨에게는 아들이 한 명 있는데 사세보에서 따로 산다. 아사카 씨는 며느리가 집을 나가는 바람에 손자·손녀들을 맡아서 키웠다고 한다.

요즘 생활은 어떻게 하세요? 아드님이 생활비를 주세요?

“아니, 시청에서 매달 8만 엔씩 줘. 8만 엔 중에서 집세 4만 엔 내고, 공과금 내고 나면 겨우 한 달을 나지. 젊었을 때 세금을 많이 내서 야쿠바(쓰시마시청)에서 주는 거야.” 쓰시마시청에서는 나이 60세가 넘으면 개인에 따라 연금 시기와 금액을 차등 지급한다고 한다.

몸은 편찮은 데 없으세요?

“와(왜), 여기저기 쑤시고 아프지. 한 달에 한 번씩 일본인 의사가 왕진을 와.”

아사카 씨는 학교를 다니지 못했다. 그 시절에 동생들을 업고서 대마도에 일하러 온 한국인들의 밥을 짓느라 학교 갈 시간이 없었다고 했다. 그녀가 자란 나가사키현 사세호광업소에는 전쟁으로 많은 한국인이 징용으로 끌려와 있었다. 그곳에서 그의 부모는 밥장사를 했는데 10남매 중 맏이였던 그녀는 밥하랴 동생들 보살피랴 학교 갈 시간이 없었다.

그래도 처녀 시절은 재미나게 보냈다고 말한다. ‘이쁜이’ 아사카는 한국인 청년들에게 인기가 좋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결혼하고 나서 상황이 달라졌다. 남편의 질투가 이만저만 아니었다.

한국에는 가보고 싶지 않으세요?

“왜 안 가고 싶겠어, 가고 싶지. 남동생이 몇 년 전까지는 용돈을 주러 오더니 이젠 안 와. 가보고 싶어도 연락이 안 돼. (울먹이면서) 아는 사람이 없으니까 어찌 가노?”

그녀에게 따뜻한 밥 한끼를 같이하고 싶었지만 거동이 불편해 약간의 식사값을 이온음료가 담긴 유리컵 옆에 놓고 나왔다. 전쟁은 한국에 48명(2015년 7월 6일 현재)의 생존하는 위안부만 남긴 게 아니다. 바다 한가운데 섬에도 가고 싶어도 못 가는 고국을 그리워하는 아사카 씨가 있다.

30년간 히타카츠에 위치한 재일본대한민국민단 대마도 지방본부에서 일하는 63세의 민단 사무국장은 끝내 이름 밝히기를 꺼려했다. 그녀는 한 달에 한 번씩 연로한 재일동포들에게 드릴 선물을 사서 가가호호를 찾아다닌다.

“나이 드신 재일동포들은 차별을 많이 받고 살았죠. 그분들은 고국이 해준 게 없다고 생각해요. 인터뷰하자고 하니까 나랑 무슨 상관이냐고 하잖아.”

대마도에 사는 재일동포 50명 남짓


▎대마도(쓰시마)의 슈젠지법당에 안치된 최익현 선생의 영정.
그녀의 설명에 따르면 대마도에는 거류민단이 파악한 재일동포가 50명쯤 된다고 한다. 최근에는 음식점, 민숙(여관)등의 사업을 하러 들어온 젊은 사업가들과 호텔직원들, 면세점 직원들을 포함하면 100여 명의 한국인이 대마도에 살고 있다. 대마도의 전체 인구는 약 3만2천여 명에 이른다.

“요즘 대마도에 사업하러 들어오는 한국 사람들은 민단에 관심이 없어.” 그녀는 얼마 전에 넘어져 고관절을 다치는 바람에 지팡이에 의지하고 있었다. 한 손으로 지팡이 짚고 뒤뚱거리면서도 다른 한 손으로 따스한 차를 내밀었다.

대마도의 재일동포 1세대는 대부분이 죽고 2세들도 어느덧 중년이나 초로의 나이가 됐다. 재일동포 2세인 무라오카 자동차, 진 렌터카 사장인 시게루 오야마(64) 부부도 그중의 한 사람이다.

오야마(64) 사장은 대마도에서도 성공한 지역 유지로 꼽힌다. 부지런함과 성실함이 그의 가장 큰 자산이다. 자동차 수리공장으로 시작해 최근 한국인 관광객들이 늘어나자 렌터카 사업에도 뛰어들었다. “교포분들을 보고 싶다”고 하자 민단 사무국장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고, 얼마 되지 않아 오야마 사장이 눈앞에 나타났다.

원래 후쿠오카에 살았던 그는 “대마도에 참한 아가씨가 있다”는 중매인의 말에 대마도로 들어와 36년째 살고 있다. “스물여덟 살 때 세 살 위 형님이랑 같이 왔어요. 부모님께서 돌아가시고 변화를 바라던 차에 이곳으로 왔죠.”

그는 대마도에서 살면서 일본인 친구도 많이 사귀었다. 성격 좋고 성실한 사람 주변에는 사람들이 모이기 마련이다. 이젠 한국인보다 일본인들과 더 친하게 지낸다고 한다.

부인인 오야마 준코(63) 씨는 오야마 사장을 대마도에 눌러 앉게 만든 주인공이다. 그녀는 남편의 일터에서 전화 받고 메모하며 부지런히 움직였다.

“아내는 한국말을 잘 못해요. 시마네현에서 살다가 여섯살 때 부모님을 따라 이곳으로 왔어요.” 그는 2남 2녀의 자녀가 모두 후쿠오카로 출가한 바람에 적적함을 느끼는 듯하다. 며느리와 사위 한 명은 일본인이다. 분위기가 무르익자 그는 손녀 자랑도 했다. 스물여덟 살 때 대마도에 와서 뿌리 내렸고 손자까지 봤으니 그는 삶에 보람을 느낄 만하다.

쾌청한 날 대마도 최북단이라고 할 와니우라의 한국전망대에서는 부산의 야경을 쉽게 볼 수 있다. 여기서 부산까지는 49.5㎞ 거리. 후쿠오카까지 거리가 132㎞이니 지리적으로는 한국과 훨씬 더 가깝다. 예부터 대마도 사람들에게 휘황찬란한 부산의 야경은 마음을 빼앗길 만큼 흠모의 대상이었다.

대마도 북단서 바라본 부산의 야경


▎1. 대아고속해운 김석진 부장. / 2. 출장을 다니다가 대마도에 눌러앉은 부영순 사장.
대마도에는 한국인이 운영하는 음식점이 몇몇 있다. 그중의 하나인 ‘귀온’의 여사장인 부영순(47) 사장은 대마도에 정착하기 전에 여행업에 종사했다. 대마도에 정기여객선이 취항하자 선배와 출장을 몇 번 왔다가 이곳에 눌러앉기로 결심한 경우다.

“와? 대마도까지 와 가는데?” 한 친구가 물었을 때도 그녀는 “좋다. 정말 좋다!”는 말만 해줬다고 한다. 대마도는 섬 전체가 자연휴양국립공원으로 지정돼 깨끗한 자연과 풍광을 자랑한다.

처음 하는 음식점이라 마음고생도 많이 하고 손해도 봤지만, 점차 자리를 잡고 있다. 직원들은 모두 현지인이다. 여행사와 협업해서 단체손님만 받는 식당인데 이곳을 찾는 한국 관광객이 올해로 20만 명에 이른다고 한다. 부씨처럼 대마도에서 사업하는 한국인들은 1년 기한인 ‘투자경영비자’를 발급받아 매년 연장을 하는데, 6년 정도를 거주하면 ‘영주권’을 받게 된다.

쓰시마 부산사무소 김경일(43) 부소장이 보여준 부산-대마도 한국인 입국통계에 의하면 지난해에만 대마도를 찾은 한국인은 19만4032명에 달했다. 부산에 있는 쓰시마 부산사무소는 대마도시청의 부속기관으로 한국인 직원들이 상주하면서 대마도 관련 정보를 제공해준다. 2003년 부산사무소 개설 때부터 줄곧 근무해온 김 부소장은 이렇게 말했다.

“한국인 방문객 수가 연간 20만 명에 이르다 보니 쓰시마 시청에서도 신경을 쓰기 시작했어요. 음식점, 민숙 등의 간판에 한국어를 병기(倂記)하도록 한 거죠. 간혹 그 표지판을 보고 ‘한국어 표기’가 잘못됐다고 지적해주시는 한국인들도 계시죠.”(웃음)

김 부소장은 한국 관광객들의 에티켓에 대해 한마디 언급하기도 했다.

“이곳 주민들은 한국 관광객들이 큰소리로 떠들고 양주를 가져와 음식점에서 먹는 것을 이해하지 못해요. 그래서 초창기엔 ‘한국인은 받지 않는다’는 문구를 써 붙인 식당들도 있어요. 대마도 주민들은 예의 바르고 깍듯해요. 일본사람들의 친절함과 남에 대한 배려는 어릴 적부터 받아온 교육의 힘 같아요.”

1999년 7월 14일은 대마도로서는 역사적인 날이다. 대아고속해운 여객선 씨플라워호가 부산에서 대마도로 첫 항해를 시작한 날이기 때문이다. 대마도는 가장 가까운 외국이지만 대아고속해운에서 정기여객선을 운항하기 전에는 대마도를 가기 위해서는 부산에서 후쿠오카를 경유해 비행기를 타고 들어가야 했다.

당시 대마도 주민은 외부인에게는 숙박도 잘 허락하지 않는 폐쇄적인 섬이었다. 당시에는 대마도가 어디에 붙어 있는지조차 모르는 여행사가 대부분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개통 후 6~7년 동안 부산-대마도간 정기여객선은 적자를 감내해야 했다. 10명 남짓을 태우고 배를 띄워야 하는 날도 있었다. 하지만 대마도 노선에 애착을 갖고 있던 황인창 회장이 뚝심 있게 밀어붙인 덕에 점점 관광객이 늘어났고 경영상황도 좋아졌다. 마침내 2005년 일본관광비자가 면제되자 대마도를 찾는 관광객의 발길이 부쩍 늘어났다. 대아고속해운의 자부심은 대단하다. 이 회사의 김석진 부장은 “옛 조선통신사 행렬을 재현하고 현대에 와서 그 행렬을 연결시키는 데 이바지했다고 자부한다”고 말했다. 대아고속해운은 2002년에 대마도 북쪽에 위치한 히타카츠 항구를 국제항 수준으로 업그레이드시키기도 했다.

도둑·아가씨·욕심 없는 3무도(無島)


▎2년 전부터 히타카츠에서 우리들펜션을 운영하는 최용오 사장은 일본특파원을 지낸 신문기자 출신이다
대마도에는 없는 것이 세 가지 있다고 한다. 도둑이 없고, 아가씨가 없고, 욕심이 없다. 많은 것도 세 가지 있는데 자판기, 물고기, 산이 많다.

대마도 남서쪽의 이즈하라에서 북부 쪽의 히타카츠를 버스로 왕복하는데 2시간 30분 남짓이 걸렸다. 대부분의 승객은 노인이다. 1천 엔 하는 승차권은 하루 종일 버스를 탈 수 있는 프리패스(Free Pass)다. 대마도에는 전체 도로의 절반가량이 왕복 1차로의 좁은 길이다. 그 길을 지날 때마다 버스기사는 클랙슨을 100번쯤 울린 것 같다. ‘먼저 가시라’고 빵빵! ‘안녕하냐’고 인사하면서 빵빵!

대마도에는 꿈 많은 젊은 오피니언 리더가 살고 있다. “대마도는 한일관계의 축소판이죠. 잘 오셨어요”라며 반갑게 필자를 맞아주는 우리들펜션의 최용오(46) 사장이다. 그가 운영하는 펜션은 히타카츠의 아름다운 편백나무숲에 둘러싸여 있다. 그는 2년 전까지만 해도 신문사의 기자를 지내다가 이곳에 정착했다.

그도 대마도의 매력에 흠뻑 빠져 직업까지 바꾼 경우다. 신문사 국제부에 근무하면서 일본 특파원 생활도 오래한 터라 그에게 대마도는 그리 낯설지 않게 느껴진다. 가깝게 지내던 일본인 친구가 대마도에 공무원 연수원이던 건물이 싸게 나왔는데 민숙이 부족하니 한 번 해보라고 권유해서 별 망설임 없이 이곳을 구입해 펜션으로 꾸렸다.

“특파원으로 후쿠오카에서도 지낸 터라 대마도의 상황을 잘 알고 있었어요. 사업을 하거나 돈을 벌러 온 게 아니라 대마도 주민의 마음을 얻으려 왔어요.”

퇴직 후 대마도의 청정한 자연환경이 좋아 이곳에 이주하고자 하는 사람이 적지 않지만 부동산을 구입하는 것은 쉽지가 않다. 법적으로는 외국인의 부동산 취득이 자유이지만 이곳 주민들은 한국인에게 땅을 팔지 않으려는 성향이 강하기 때문이다. “21세기는 전쟁으로 땅을 뺏는 시대가 아니다. 무엇보다도 대마도 주민의 마음을 얻어야 한다”고 최씨는 말했다.

“무엇보다 정서적 유대감이 중요한 것 같아요. 한일관계도 져주는 게 이기는 것이죠. 마음이 넓은 사람이 형이 될 수 있고 용서도 할 수 있는 거예요.”

우리들펜션에는 예쁜 일본 아가씨와 결혼해 천사 같은 아기를 낳았다는 황진하(33) 씨가 함께 일한다.

“대마도를 (일본으로) 입양 보냈다고 생각해봐요. 입양 보낸 자식한테 왜 부모를 몰라보냐고 따지지 말고 잘살기를 바라고 잘해줘야 해요. 마음을 얻어야죠.”

열변을 토하는 최씨의 안경 너머로 보이는 밝은 눈빛이 마음을 환히 밝혀주는 듯했다. 한때 재일동포들이 차별을 받으며 중노동을 했던 대마도에 젊은 한국인들의 열정이 살아 숨쉬고 있다.

- 권주리애 월간중앙 객원기자, 전기 작가

201508호 (2015.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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