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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유정의 ‘책 읽는 영화관’] 싱글을 향한 궁극의 질문 <결혼하지 않아도 괜찮을까> 

여자 나이 서른다섯, 또 하나의 성장통? 

강유정 영화·문학평론가
외면할 수 없는 ‘삶의 숙명적 문제’ ... 여성에게 결혼은 선택 아닌 성장의 계기일 뿐

잘나가는 소설이 드라마나 영화화되는 일은 흔하다. 실패한 경우도 많지만 폭발적인 흥행 성공을 거둔 사례도 적지 않다. 원작이 영화로 만들어지는 과정에는 테크놀로지와 콘텐트의 다양한 변주가 이뤄진다.

가지 않은 길, 인생의 숙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의 절대요소 중 하나로 선택을 들었다. 선택을 한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포기한다는 것을 전제한다. 결혼을 선택했다면 미혼 혹은 비혼의 삶을 포기한 것이다. 반면 미혼을 선택했다면 결혼을 포기한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선택한 것 말고 포기한 것들의 세목엔 어떤 것들이 놓여 있을까? 가령 결혼을 선택한 자에게는 자기만의 삶으로 설명될 개체적 삶의 항목들이 사라졌을 확률이 높다. 반대로 결혼을 포기한 자에게는 남편, 아내, 아이와 같은 얼핏 평범해 보이는 삶의 요소들이 빠져 있을 경우가 많다.

하지만 어떤 것을 선택했다고 한들 100% 만족은 없다. 그래서 우리는 그 가보지 않은 길을 자꾸만 돌아보고 또 생각해본다. 그런다고 해서 되돌아갈 길은 없지만 말이다.

여자 나이 서른다섯은 어떤 나이일까? 소설가 오정희는 어린 소녀를 가리켜 ‘무엇이든 될 수 있는 나이’라고 말한다. 엄마의 자궁에서 빠져나와 시간의 그물에 걸린 이후부터 소녀·소년은 뭐든 될 수 있는 나이를 지나버린다. 결국 지금은 그 자신이 그 무엇도 될 수 없는 나이에 이르고 만다.

작가 마스다 미리의 만화 대부분은 이제 다시 선택하기가 두려워지는 서른다섯 즈음의 여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다. 이제는 정말 오도가도 못하는 나이, 뭔가 지금 가고 있는 길의 딱 중앙에 섰지만 그래도 여전히 선택의 여지가 남아 괴로운 나이, 그래서 아직은 성장하는 중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서른다섯 살 말이다.

그래서인지 마스다 미리의 만화들의 제목은 의문형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 <결혼하지 않아도 괜찮을까?> <지금 이대로 괜찮은 걸까?> <내가 정말 원하는 건 뭐지?> 등의 제목 말이다.

아주 어렸을 땐 서른다섯 살쯤이 되면 의문이 사라지고 감탄이나 종결만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정작 서른다섯 살이 되고 나니 의문부호가 사라지지 않는다. 특히 서른다섯 살의 여자에게 가장 고민되는 것은 바로 결혼 아닐까? 다른 무엇보다 왠지 결혼이라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든지 선택의 영역처럼보이니 말이다.

나이를 먹어야 생기는 고민들


▎1. 마이짱은 오늘도 오지 않는 남자를 묵묵히 기다린다. 가정이 있는 남자와 사랑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상처받은 그녀는 결국 불륜관계를 정리하고 급하게 선을 봐서 결혼하게 된다. / 2. 사와코는 노인성 치매로 기억을 잃은 할머니, 그리고 그를 돌보는 엄마와 함께 살고 있다. 사와코는 만약 자신이 결혼하게 되면 두 사람만 두고 도망가는 기분이 들어 고민이 많다.
원작 만화 <결혼하지 않아도 괜찮을까>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바로 나이를 먹고 나서야 비로소 보이는 사실들이다. 가령 성희롱은 남자가 여자에게만 하는 게 아니라는 것. 만화 <결혼하지 않아도 괜찮을까>는 주로 사와코와 수짱이라는 두 인물의 일상을 소재로 하고 있다. 어느 날 생리통으로 고생하는 사와코에게 출산을 경험한 한 직장 동료로부터 “아이를 낳으면 좋아지니, 사와코도 빨리 낳아”라는 말을 듣게 된다. 결혼은커녕 애인도 없는, 아니 13년간 섹스도 못한 사와코에게 이런 충고는 남자들의 노골적인 성희롱보다 더 불쾌하게 다가온다.

이런 장면도 있다. 사와코는 노인성 치매로 기억을 잃은 할머니, 그리고 그를 돌보는 엄마와 함께 살고 있다. 사와코는 만약 자신이 결혼을 하게 되면 할머니와 엄마, 이 두 사람만 두고 도망가는 기분이 들어 고민이 많다. 할머니는 치매의 영향 탓으로 엄마를 자신의 딸이 아니라 언니로 여긴다. 문득 사와코는 ‘엄마가 자신의 엄마를 잃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엄마는 아직 살아 있는 엄마로부터 자식으로 대접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일상 속에서 소소한 철학을 찾는 것, 그게 바로 마쓰다 미리 만화의 장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꼭 대단한 깨달음만 있는 것은 아니다. 어느 날 자신의 발꿈치에 각질이 푸실푸실 일어났다는 것을 알게 되고, 또 어느 날은 물끄러미 아이의 손을 잡고 걸어가는 동년배 여자를 바라보는 자신을 발견하기도 한다. 가지 않은 길에 대한 일종의 상상인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렇듯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을 발견하는 데에 멈추지 않고, 자기 자신에게 다시 질문을 던진다는 것에 있다. 수짱은 눈에 자꾸만 아이와 엄마가 밟히는 자신이 이상하다. 고민해보니 자신이 독거노인으로 늙어갈까 봐 무의식적으로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녀는 단순히 혼자 있어서 외로운 게 아니라 앞으로까지 혼자 있게 될까 봐 두려워한 것이다. 이 두려움은 매우 현실적인 논리에 기인한 것이기에 수짱은 노후연금과 적금에까지 그 생각이 미친다. 단순히 감상적인 문제는 아닌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이가 든다는 건 아버지나 어머니의 탓이 아니듯이’ 누구라도 나이를 먹으면서 할 수 없는 많은 것이 생긴다. 사실 이런 고민은 꼭 결혼을 하지 않아서 생기는 것 때문만은 아니다. 늙어간다는 것은 선택이 아니기에. 다만 수짱과 사와코는 결혼이라는 일상에 치일 현실적인 일이 적기에 이런 존재론적 질문을 자아에 대고 직접 던질 수 있었던 것이다. 때문에 나이 먹는 것에 대한 불안을 자식의 미래에 대한 강박과 구분할 수 있는 것이다.

“결혼이 ‘만사형통’은 아니다”


▎1. 영화 <결혼하지 않아도 괜찮을까>의 세 인물은 수시로 만나 서로의 연애 고민과 싱글로서의 외로움을 나눈다. ‘결혼은 만사형통이 아니다’라는 게 이들의 생각이다. / 2. 주인공 수짱은 결혼보다는 직장에서의 승진을 선택한다. 경제적인 이유로 결혼하지 못하는 서른다섯 살 여성은 없다. 자발적으로 비혼의 상태를 선택한 여성들이 있을 뿐이다
누구나 한 번쯤 해볼 만한 고민들이 이렇듯 조심스럽게 찬찬히 수짱과 사와코를 통해 전달된다. 전달은 공감이 되고 공감은 수긍으로 다가온다. 마쓰다 미리의 작품들이 어떤 점에서는 일상적인 동어반복처럼 보이고 다른 한편 달콤한 위안에 불과해 보이지만 그럼에도 힘을 갖는 이유가 이 때문이다.

영화 <결혼하지 않아도 괜찮을까>는 마스다 미리의 만화를 원작으로 하고 있지만 여러 면에서 다른 색깔을 가지고 있다. 일단 원작이 주로 내면적 독백과 잠언으로 이루어져 있다면 영화는 필연적으로 갈등을 중점으로 진행된다. 원작의 등장인물이 수짱과 사와코였던 것에 보조적인 인물이 한 명 더 등장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원작에는 수짱이 한동안 직장 동료였던 마이짱과 점심 한 끼 정도 나누는 것으로 되어 있지만 영화 속에서는 오히려 그녀가 수짱의 베스트 프렌드처럼 묘사된다.

마쓰다 미리의 작품 속에 수짱과 사와코는 한때 아르바이트를 함께 했지만 완전히 친하다고 말할 수 없는 사이로 묘사된다. 하지만 영화에서 세 사람은 떼놓을 수 없는 친구들이다. 이들의 관계는 영화<결혼하지 않아도 괜찮을까>보다는 영화 <주말엔 숲으로> 등의 다른 작품에 등장하는 세 명의 친구 관계와 더 닮아 있다. 수짱이 아예 변변한 연애 사건이 없었던 데 비해 영화에서는 소위 ‘썸’만 타다 직장 동료에게 빼앗기고 만 한 남자 매니저와의 관계가 비중 있게 다뤄진다. 이런 연애문제를 두고 세 사람은 수시로 만나 서로의 고민을 나누고, 싱글로서의 외로움을 나눈다. 세 사람 중 한 사람은 과감하게 유부남과 사랑에 빠져 있기도 하다.

영화라는 틀을 완성케 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갈등을 좀 더 부각시켰기 때문에 좀 더 잘 보이는 부분도 있다. 이를테면 싱글인 그녀들의 사회적 위치와 함께 직장생활 속 독신 여성의 모습이 구체적으로 비춰졌다는 것이다. 원작에서 마이짱은 꽤나 능력 있는 커리어 우먼으로 등장한다. 비록 상사나 후배의 불합리한 요구에 정면으로 대적하지 못하지만 오히려 그런 모습이 우리에겐 훨씬 더 공감 어리다. 사회 초년병의 고군분투가 만화 <미생>에서 그려졌다면 마이짱의 삶은 서른다섯 살이 된 독신 여성이 등장하는 일본판 <미생>이라 할 수 있다.

세 사람의 인물을 통해 보여주는 미혼의 삶은 어떨까? 결혼을 하지 않거나 못하는 이유 역시 제 각각이다. 눈여겨봐야 할 것은 영화 속에서 결혼이 여느 로맨틱 코미디처럼 낭만적 결론으로 제시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홍상수 영화의 소제목처럼 ‘결혼만 하면 만사형통은 아니다’라는 뜻이다.

선택권이 박탈된 대한민국 ‘삼포세대’

적어도 영화 <결혼하지 않아도 괜찮을까>의 세 인물에게 결혼은 선택의 문제다. 또 다른 등장인물 마이짱이 유부남과의 불륜관계를 정리하고 선을 봐서 후다닥 결혼을 해치우는 것은 이를 잘 보여준다. 특별히 운명의 상대를 기다리지 않아도 결혼하고프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 그런 선택의 여지가 보이는 것이다.

수짱이 결혼에 대한 고민보다 점장으로서의 승진을 선택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한마디로 그녀들은 결혼하지 못했다기보다 자발적으로 비혼의 상태를 선택한 사람들로 그려진다. 적어도 영화 속에서는 경제적인 이유로 결혼하지 못하는 서른다섯 살은 없다. 결혼하지 않는 것을 선택했을 뿐이다.

어느 새 우리에게 ‘삼포세대’라는 말이 신조어를 지나 유행어가 됐다. 연애, 결혼, 출산 이 세 가지가 바로 포기한 3종 세트란다. 연애를 하지 못하니 결혼은 자연스럽게 미루게 된다. 결혼을 포기하니 출산이 없다. 취직을 했다 해도 막대한 결혼 비용을 치르기엔 아직 갚아야 할 학자금 대출이 너무 많다. 가까스로 결혼까지 했다 쳐도 아이를 낳자니 주택 대출이 발목을 잡고 만만치 않은 육아의 덫도 무섭다. 어느 샌가 우리에겐 이 세 가지가 무척이나 벅찬 것이 되고 말았다. 선택이라는 말 자체가 사치스러운 엄살이 되고 만 것이다.

때문에 일부 서른다섯의 미혼에게 결혼은 ‘자아’의 문제라기보다는 생존의 문제로 여겨진다. 선택의 대상조차 될 수 없는 이 안타까운 상황 앞에서 ‘자아 문제’는 슬그머니 가장 나중에 생각해도 될 것으로 미뤄지고 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른다섯 살도 여전히 성장해야 하는 나이”라는 원작과 영화가 주는 메시지는 모든 것을 포기했다고 말하는 우리에게도 위안이 된다.

결혼은 포기나 선택이라는 거창한 명사로 설명하고 묘사해야 할 만큼 중요한 일임에는 분명하다. 외면할 수 없는 삶의 문제이자, 현실을 염두에 놓고 보면 내면의 목소리는 자꾸 모른 척하게 만드는 결혼. 바로 그 결혼에 대해 진지한 질문을 던져 주는 작품이 바로 <결혼하지 않아도 괜찮을까>다.

강유정 - 영화·문학평론가. 강남대 국문과 교수. 2005년 <조선일보> <동아일보>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동시 당선돼 평론 활동을 시작했다. 고려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현재 KBS <박은영, 강유정의 무비부비2> 프로그램을 진행 중이다. 저서로 <스무살 영화관> <사랑에 빠진 영화, 영화에 빠진 사랑> 등이 있다.

201508호 (2015.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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