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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함정임의 ‘바닷가 서재’] 첫 소설집과 독자의 시선 

초승달 같은 신인 작가, 치기 어린 초목의 길 걷는 그들에게 아낌없는 박수를 

함정임 소설가, 동아대 한국어문학과 교수

내가 진행하는 전공 수업의 경우, 최종 도달점은 학생 자신의 소설을 쓰게 하는 데 있다. 문청(문학청년)이 한 편의 소설을 완성하기까지 동고동락하다 보면, 단순히 문장의 기본기와 자세, 작품의 완성도에 그치지 않고, 창작자의 평소 기질과 고민, 더 깊게는 가족관계와 유년기의 삶까지 거슬러 올라가기도 한다. 그런 과정을 통해 생산되었기에, 완성도 여부를 떠나, 마치 오래 함께 부대껴온 것처럼 습작마다 애틋해질 수밖에 없다. 문청에게 갖는 이러한 감정은 갓 등단한 신인 소설가에게도 동일하게 작동된다. 소설가의 데뷔작과 첫 소설집의 의미를 누구보다 소중하고 애틋하게 기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남우가 바닥에 떨어졌을 때 복도 창틀에 매달려 그 모습을 지켜본 수많은 학생 틈에 그녀도 끼어 있었다. 학생들은 일제히 비명을 질렀고 붙잡은 것이 무엇이든 간에 더 꽉 움켜잡았다. 창틀이나 창턱, 친구의 손이나 맞잡은 손, 아무것도 잡지 않았던 손은 그냥 꽉 주먹이 쥐어졌다. 아마 그것은 저기서 떨어지는 사람이 순간적으로 자기 자신이라는 착각이 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녀도 마찬가지였다.”(김종옥, <거리의 마술사>, 2012 문화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2012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인 김종옥의 <거리의 마술사> 첫 문장과 첫 단락 일부다. 새해 첫날 각종 신문의 신춘문예를 통해 당선자들은 똑같은 출발선에 서지만 12월이 되면 각자 발표 상황에 따라 도달점은 전혀 다른 양상을 띤다. 김종옥의 경우, 그해 데뷔작 포함 5편의 단편을 발표함으로써 다양한 문예지의 선택을 받아 당선자들 중 가장 왕성한 창작 활동을 발휘했다. 소설가 등용문은 신춘문예뿐 아니라, 문예지의 신인상 제도도 있다. 한은형의 경우, 계간 <문학동네 2012> 신인상 당선자이다.

“이 이야기는 내가 미카엘을 만난 그 짧았던 여름 저녁에 있었던 일이다. K는 숲에 두 갈래 길이 있다고 말하지 않았다. 연결이 되지 않는다는 안내음을 듣고서야 전화가 되지 않을 거라던 K의 말이 떠올랐다. 양쪽 다 흙길이었고 너비도 비슷했으므로 나는 어떤 길을 택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길과 길 사이는 깊이 파여 하천이 흐르고 있었는데 무성하게 자라난 잡풀들 때문에 물이 보이지는 않았다. 잡풀들은 싹을 틔운 이래 한 번도 사람의 손길을 타지 않았는지 의젓한 초목이었다. 숨을 한껏 들이마신 후 나는 왼쪽 길로 걷기 시작했다.”(한은형, <꼽추 미카엘의 일광욕>)

소설가가 된다는 것은 익명의 지망생에서 공식 지면에 이름을 걸고 작품을 발표하는 공인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첫 소설집은 데뷔 후 3년 내외의 기간 동안 문예지에 발표한 작품들을 중심으로 엮는다. 일반적으로 8편 내외의 단편들로 구성된다. 김종옥의 <과천, 우리가 하지 않은 일>의 경우 미발표작 포함 12편이 수록되어 있고, 한은형의 <어느 긴 여름의 너구리>의 경우 역시 미발표작 포함 8편이 수록되어 있다. 소설가는 데뷔작으로 문단의 일원이 되지만, 첫 소설집을 출간하면서 비로소 한 권의 저자로서 소설가가 된다. 첫 소설집에는 별도의 의미부여가 필요한데, 한국 소설 현장에서 신인의 데뷔 소설부터 원로의 최후 소설까지 발표되는 작품 읽기에 평생을 바쳐온 김윤식의 전언을 되새겨볼 만하다.

신인, 가능성의 영역

“한 신인의 창작집이란 초승달과 흡사하다. 눈썹처럼 가느다란 윤곽이 그러하고, 애벌레 모양의 숨소리가 그러하며, 아직 그의 이웃인 다른 별들의 빛을 식별하지 못하는 점에서 그러하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는 보름달을 그 자체로 머금고 있기에, 마리 로랑생의 당나귀와 새와 여우와 함께 있어도, 또는 청색 홍색 녹색 한가운데 놓여 있어도 어색하거나 부끄럽지 않다. 작가 함정임의 경우가 특히 그러하다.”(김윤식, 함정임의 첫 소설집 <이야기, 떨어지는 가면>해설)

보통 신인 소설가의 데뷔작은 잘 읽히지 않는다. 심지어는 실망스러울 때도 많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치기와 패기로 오랜 시간 골방에서 희망과 좌절, 황홀과 환멸을 겪으며 쓰고 지우고, 고쳐 쓰기를 거듭한 것을 환한 세상으로 끌고 나와 생판 모르는 사람들 앞에 내놓는 것이니 어딘지 불편하고 어색할 수밖에 없다.

한은형의 경우, <꼬마 미카엘의 일광욕>이 당선작으로 결정되기까지 심사위원들의 의견이 분분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그만큼 일상에서 쉽게 만날 수 없는 도발적인 소재와 그것을 다루는 문장과 단락 전환에서 비약이 컸다. 그러나 그것은 창작 관점에 따라, 단점이 되기도 하고 장점이 되기도 한다. 매끈한 문장에 안정적인 결말이 신인에게 미덕은 아니다. 한은형에 비해 김종옥은 데뷔작 <거리의 마술사>로 평자들의 전폭적인 호응을 얻었다. 문학동네와 문학과지성사에서 등단 7년 또는 10년 미만의 신진 작가들의 작품들만을 대상으로 매달 우수 단편을 선정하여 상을 주고 책으로 묶는데, 그의 <거리의 마술사>가 대상을 차지한 것이다. 이번 그의 첫 소설집에 수록된 작품들은 이 데뷔작을 제외하고 대부분 자잘한 연애의 기억, 또는 증언이다. 특히 표제작인 <과천, 우리가 하지 않은 일>은 그동안 한국 독자들이 만나왔던 남성 작가들의 연애담과는 다른 흐름과 분위기를 거느리고 있다. 만났다 헤어졌던 여자들에 대한 환기와 집중, 그리고 이별 과정이 불러일으키는 뻔한 감정이 감상에 함몰되지 않고 빗겨가며 체념도 냉소도 환멸도 아닌 담담하면서도 아릿한 회상의 여운을 남긴다.

문장이든 주제든 능숙하게 잘 쓰고 관철하면 신인이 아니다. 신인은 미래의 세계, 가능성의 영역이다. 신인 소설가가 자기만의 문장으로 세상을 진실하고 아름답게 표현하기까지 독자들은 애정을 가지고 지켜보고 기다려주어야 한다. 그런 독자들만이 한국문학에 대해 무엇이든 말할 자격이 있을 것이다. 상품 진열대에 눈에 띄게 포장해놓은 베스트셀러만을 액세서리 취하듯 쉽게 구하지 말고, 갓 생겨난 초승달 같은 신인 소설가들의 첫 소설집을 아낌없이 응원하고 어디서든 기꺼이 펼쳐보아야 할 것이다.

함정임 - 소설가, 동아대 한국어문학과 교수.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이화여대 불문과와 중앙대 문예창작학과 대학원 박사과정을 마쳤다. 소설집〈버스, 지나가다〉〈네 마음의 푸른 눈〉, 장편소설〈춘하추동〉〈내 남자의 책〉, 예술기행서 〈인생의 사용〉〈나를 사로잡은 그녀, 그녀들〉〈소설가의 여행법〉〈먹다 사랑하다 떠나다〉, 번역서〈불멸의 화가 아르테미시아〉〈행복을 주는 그림〉 등을 썼다.

201508호 (2015.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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