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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 공개] 美 비밀문건서 확인한 이승만의 결단 … 1953년 반공포로 석방 막전막후 

 

글·자료제공 남보람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소령
이승만 정부, 미국측 반발에 전시작전권 환수 불사 입장 밝히는 등 ‘초강수’ 둬… 경제 지원뿐만 아니라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이라는 안보 초석을 다지는 계기로 활용했다
휴전협정이 한창이던 1953년 6월 18일 남한 4개 지역의 포로수용소에서 반공포로 2만여 명이 탈출을 감행했다. 이승만 정부가 미국의 의지를 꺾고 강행한 반공포로 석방사건이다. 당시 한미 수뇌부 간에는 전쟁 마무리와 이후의 안보 협력 방식으로 두고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이 사건 이후 미국은 이승만 정부가 요구해온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에 응하는 등 전후(戰後) 한반도 안보의 틀을 정립하는 한 계기로 작용했다는 평가가 따른다. 당시의 상황을 미 합동참모본부의 비밀 해제된 문건을 통해 확인한다. 국방부가 <월간중앙>을 통해 처음 공개하는 이 문건은 극적이면서도 숨가빴던 시대 상황을 여과 없이 보여준다.


▎112명의 반공포로들이 유엔군과 한국군이 지급한 옷을 입고 대한민국 군인으로서 충성맹세를 하고 있다.
1953년 5월 27일 한국 정부는 더 이상 휴전 협상에 참가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미국에 공식 통보했다. 그 사유는 유엔사령부가 1953년 5월 25일 공산국가로의 송환을 거부하는 포로들을 즉각 석방하지 않겠다고 공산군측에 양보했기 때문이다.

왜 한국은 포로 문제에 대해 이토록 민감했던가? 가장 단순한 이유는 거기에 ‘대한민국 국민’이 섞여 있었기 때문이다. 1951년 12월 당시 유엔군이 억류하던 포로 중에는 공산군에게 억지로 끌려간 남한 국민이 포함돼 있었다. 그 수가 무려 3만5천 명을 넘었다. 다시 말해 이들은 기습 남침한 공산군이 남한에서 징집해간 병력이었던 것이다.

공산군은 ‘강제송환 원칙’을 운운하며 대한민국 국민을 공산군측으로 송환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이는 이승만 정부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요구였다. 포로의 처리를 두고 남북한이 격론을 벌인 핵심 쟁점의 하나였다.

1953년 5월 들어 유엔군은 공산군으로 송환을 거부하는 포로 3만5천 명을 휴전과 동시에 즉시 석방한다는 조항을 협정문에서 삭제했다. 정전협정을 빨리 체결하려고 공산군과 타협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1953년 6월 18일 이승만 대통령은 공산군으로의 송환을 거부하는 이른바 ‘반공포로’ 석방을 단행한다. 이때 상무대·논산·마산·부산의 4개 포로수용소에 있던 3만5698명의 포로 중 2만7388명이 탈출에 성공했다. 다음은 합참 문서를 사건 발생 시간대(한국시간)별로 정리한 것이다.

최루탄 세례 받은 반공포로들의 정전협정 반대 시위


▎<자료1> 1953년 6월 16일 마크 클라크 유엔군사령관이 보낸 전문
# 1953년 6월 16일 오전 10시

1953년 6월 중순, 유엔군과 공산군 양측은 정전협정을 조인할 모든 준비를 끝내가고 있었다. 특히 휴전회담 초기부터 문제로 불거진 양측의 군사분계선이 거의 확정돼 대표단의 승인만을 앞둔 상황이었다.

이는 유엔군이 포로교환 방식을 놓고 공산군에게 양보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당시 유엔군은 자원(自願) 송환, 공산군은 강제 송환을 주장했는데 자원 송환방식에 대한 공산군의 반발이 워낙 강했기 때문에 유엔군은 1953년 5월 25일 공산군으로의 송환을 거부하는 포로들을 즉각 석방하는 대신 별도의 심사를 거치겠다고 상당부분 양보한 것이다. 이 때문에 한국은 5월 27일부터 휴전회담 참가를 거부한 상태였다.


▎<자료2> 이승만 대통령과 테일러 장군의 만남을 보고한 전문
문건(<자료1>)은 1953년 6월 16일 유엔군사령관 마크 클라크(Mark W. Clark) 장군이 유엔군 수석대표 해리슨(William Kelly Harrison, Jr.) 장군에게 보낸 전문이다. 군사분계선 결정의 공식적, 비공식적 협상 전권의 위임에 관한 것이다.

“귀하에게 북한강을 따라 형성돼 있는 현 접촉선에 대한 의사결정권을 수락함. 따라서 오늘 있을 비공개 회담에서 군사분계선의 최종결정을 밀어붙일 것.”

이어 1953년 6월 16일 오후 다음과 같은 전문이 다시 미국 정부에 전해진다.

“방금 비공개 회담에서 군사분계선에 대한 합의를 마쳤음. 6월 17일 20시에 이에 대한 정식 대표단 의결이 있을 예정임.”

# 1953년 6월 17일 오전 11시

앞서 본 문건에 따르면 정전협정 서명이 일사천리로 진행될 것 같다. 하지만 회담장의 순조로운 분위기와 달리 한국에서는 전정협상을 반대하는 시위와 집회가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포로수용소에서도 연일 소요와 폭동이 일었다. 이는 후속 문건에도 잘 나타나 있다.

“포로수용소에서는 연일 정전협정 반대 집회가 열려 최루가스 살포를 통해 강제로 해산시켜야 했다.”

“6월 16일 약 2천 명의 학생과 1천 명의 상이군인 및 예비역이 마산에 집결해 정전협정 반대행진을 벌였다. 서울에서는 동시에 여덟 곳에서 집회가 열렸다. 부산에서도 아침부터 2천 명이 모여 집회 중이다. 대구에서는 6월 17일 오후 1시부터 5천 명의 피란민이 밴드와 함께 통일 행진을 할 예정이다.” 이 보고는 당시 남한에서 실제로 벌어졌던 반대 시위, 집회, 행진의 극히 일부일 뿐이었다.

# 1953년 6월 17일 오후 6시

반공포로 석방을 이틀 앞둔 6월 16일, 한국군 제2군단 사령부에서 이승만 대통령, 미 제8군사령관 테일러(Maxwell D.Taylor) 장군, 미 제10군단장이 만났다.

이 자리에서 이 대통령은 먼저 통상적인 현 정세에 대한 우려, 유엔군에 대한 감사 등으로 대화를 풀어나간다. 그리고 대화는 현재 남한 전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시위, 집회, 행진의 배경과 정당성에 대한 설명으로 이어진다.

이 대통령은 전정협정은 한국 국민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으로 ‘집단행동을 취하지 않을 수 없다’고 세 번이나 말한다. 이 점을 테일러 장군도 이상히 여겨 유엔군사령관인 클라크 장군에게 ‘뭔가 의심쩍은데 명확하게 이야기하지 않았다’고 보고(<자료2>)한다.

이 대통령의 연막작전에 뒤통수 맞은 미군 수뇌부


▎휴전회담장 테이블에 나란히 올려진 유엔기와 북한의 인공기.
이 회동에서 이 대통령은 비밀리에 준비해온 반공포로 석방 작전을 미군측이 인지하고 있는지를 감지하고자 했던 흔적이 역력하다. 흔히 하는 얘기로 ‘슬쩍 떠본 것’이다. 한 발 더 나아가 이 대통령은 대담하게도 원용덕 헌병감의 이야기를 꺼낸다. 6월 18일 포로수용소 문을 열고 반공포로를 탈출시키는 임무가 바로 원용덕 장군에게 맡겨져 있던 상황이었다.

“지금 불순분자들이 많이 있지만 이들은 대부분 체포되었소. 그리고 현재 원용덕 장군을 옆에 두고 불순분자들을 계속 체포하도록 임무를 주었소.”

대화의 중간에 ‘원용덕’이라는 인물이 등장할 개연성이 전혀 없는데도 불구하고 이 대통령은 테일러 장군 앞에서 태연히 원용덕의 이름을 꺼내고 있는 것이다. 이 회동을 통해서 이 대통령은 반공포로 석방 계획이 탄로나지 않았다고 확신할 수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 1953년 6월 18일 오전 9시

반공포로의 탈출을 최초로 타전한다. 반공포로의 실제 탈출 시각은 6월 18일 새벽 2시였다. 내용은 아래와 같다.

“포로들이 상무대·논산·마산·부산의 수용소에서 탈출했다. 1953년 6월 18일 새벽 2시10분에 시작됐으며 현재시각 오전 9시에도 계속되고 있다. 수천 명의 포로가 탈출 기회를 계속 엿보고 있으며 몇몇 포로는 재수감되었다.

이 탈출은 수용소 내에 있는 반공청년단(Anti Communist Youth League)에 의해 획책된 것으로 보인다. 남한의 치안대와 마산, 부산의 포로들이 공모한 증거도 발견됐다.

현지에서 체포된 탈출자의 숫자는 다음과 같다. 상무대:50~100명. 논산: 7천 명. 마산: 3천 명. 부산: 3천 명. 탈출에 대비한 계획은 즉각 발령되었음. 세부사항 추후 보고”

이 보고를 보면 현지에서 탈출의 징후를 사전에 몰랐으며 이후에도 한동안 그 배후가 누구였는지 확인하는데 실패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 1953년 6월 18일 오전 10시

이 대통령은 6월 19일 아침에 반공포로 석방과 관련된 담화문을 발표한다. 이 내용은 각종 채널을 통해 미국 정부에 중복 보고되었는데, 워낙 중요한 사안이었기 때문에 가장 신뢰성이 높은 채널로 들어온 게 바로 국무부장관을 거쳐 대통령에게 보고된 내용이다. 이 채널은 주한 미대사관-국무부 장관실-백악관으로 통하는 것이었다.

“제네바 협정과 인권 원칙에 의거해 반공 6·25전쟁 포로들은 일찍부터 석방됐어야 했다. 이 반공포로 석방의 문제를 놓고 나와 대화한 유엔 회원국의 주요 인사들은 모두 공감하면서 원칙에 동의했다. 하지만 국제 정세의 복잡성으로 인해 우리는 이들을 너무 오랫동안 부당하게 잡아두었다. 더군다나 유엔이 공산주의자들과 이 복잡한 문제를 더 나쁘게 만들고 있는 이 마당에 반공포로의 문제는 우리 적들에게는 만족스럽고 우리 국민에게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심각한 결과로 이어질 것이다.

이러한 파멸적 결과를 피하기 위해서 결론적으로 나는 고유의 권한에 따라 1953년 6월 18일에 반공 한국인 포로의 석방을 지시했다.

내가 이 조치를 유엔사령부나 여타 다른 기관과의 완전한 협의 없이 단행한 이유는 이것이 너무나 타당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각 지방과 경찰의 관료에게는 석방된 포로들을 최대한 보살피라고 지시해놓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 국민과 우리의 친구들이 이에 대해 계속 협력해줄 것을 믿으며 또한 불필요한 오해가 전혀 없기를 희망한다.”

망연자실한 유엔군 사령관의 편지


▎1953년 7월 휴전협정을 앞두고 기자회견을 하는 마크 클라크 유엔군사령관.
# 1953년 6월 18일 오후 3시

유엔군사령부에서는 최초 보고를 수합, 즉각 언론에 보도자료를 배포한 후 사후적으로 워싱턴에 해당 내용을 보고한다. 초유의 사태에 직면해 이 반공포로 탈출 사태와 유엔군은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점을 신속하게 밝혀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세계여론의 향방에도, 진행되고 있는 휴전회담의 속행에도 매우 중요한 포인트였다. 이날 오후 8시쯤에는 이 문건이 그대로 공산군 측에 전달되기도 한다.

“오늘 자정에서 새벽 사이에 약 2만5천 명의 반공 북한군 포로가 상무대·논산·마산·부산에 있는 유엔사령부 포로수용소를 탈출했다.

이는 대한민국 고위급 관료들에 의해 사전에 비밀스럽고 치밀하게 계획된 것으로 추정되며 이들이 이번 탈출을 외부에서 도왔다. 포로수용소 경비책임을 맡은 대한민국 치안대는 탈출 제지에 소극적이었으며 오히려 이들과 포로들이 공모한 증거도 있다.

지난 몇 년간 이 대한민국 치안대는 포로수용소 관련 임무를 수행하는 특수교육을 받았으며 이들이 아니었다면 미국과 한국의 전투부대 1만3천 명 이상이 포로 관련 업무에 투입돼야 했을 것이다. 대한민국 치안대는 반공포로를 수용·관리하는데 무엇보다 특히 적합할 것으로 판단했다.

이들 송환 거부자를 모아놓은 수용소에서 일하고 있는 미국 인원들은 수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오늘 이러한 대량 탈출 사태를 막으려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대한민국 치안대와 포로들이 공모한 이상 어쩔 도리가 없었습니다. 대량으로 살포된 비독성 자극제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한밤중이었고 탈출하려는 포로가 너무 많아서입니다. 총기발사로 9명이 죽고 16명이 다쳤습니다. 이 중 미국인의 사상은 없습니다.“

“공적인 임무와 우리 개인의 우정을 분리하자”


▎<자료3> 미 극동사령부에서 워싱턴에 보고한 반공포로 석방 관련 전문
# 1953년 6월 18일 오후 6시

사태가 이 지경이 되자 유엔군사령관이었던 클라크 장군은 이 대통령에게 서신을 보낸다.

“존경하는 대통령님,

1950년 여름, 대통령님이 유엔에서 북한군의 침략으로부터 대한민국을 지켜달라고 호소했을 때 유엔은 대한민국 모든 육·해·공군에 관한 작전권을 전쟁기간 동안 유엔군사령관에게 부여한다는 메시지도 함께 받았습니다.

유엔군사령부는 대한민국 국군의 유엔사령부 참여와 관련된 그 어떤 조약이나 약속을 요청하거나 심지어 그것에 관해 고려해본 적도 없습니다. 따라서 나 역시 대한민국의 모든 육·해·공군에 대한 전적인 작전권을 행사해왔습니다.

이 사태는 제 권한에 대한 명백한 위반입니다. 1953년 6월 18일 아침 동안 대한민국의 몇몇 장교와 관계자가 여러 곳에 수용된 전쟁포로가 탈출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용인했습니다.


▎<자료4> 마크 클라크 유엔군사령관이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낸 편지
이들은 그러한 포로의 구금과 시설의 보안에 책임이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무엇보다 나는 이 행동이 대통령님의 지시에 의해 시작되었으며 내 지휘 아래 있지 않은 부대들에 직접 공식지휘를 내렸다는 것을 방송매체들을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나는 대통령님께 충심에서 조언하고자 합니다. 나는 대통령님이 개인적으로 약속하신 것을 완전히 어긴 것에 깊이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대통령님 스스로 자원해서 하신 약속 아닙니까. 사실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대통령님은 최근 몇 주 동안 수차례 브릭스(Ellis O. Briggs) 대사와 저에게 ‘집단 행동’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해오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나의 통제 아래 있는 한국군에 관한 문제라면 솔직하고 완전한 토의 전에는 행동하지 않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오늘 대통령님의 행동들은 이러한 보증들을 모두 위반한 것입니다.

나는 대통령님 측의 이 무모한 행동이 가져올 극단적 결과에 대해 예측하지 못하겠습니다. 또 최근 몇 년 동안 우리가 그토록 희생하면서 이룩해온 결과들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지도 현재로서는 알 수 없습니다.

미 합중국 육군대장 마크 클라크 배상”

이 편지에서도 알 수 있듯이 클라크 장군은 이 대통령에게 항상 최상의 예우를 갖추었고 인간적으로도 친밀감을 갖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 그에게까지 비밀로 숨기고 감행할 수밖에 없었던 반공포로 석방이다.

이 서신만 보자면 이 대통령이 클라크 장군의 믿음에도 불구하고 약속을 저버린 채 독단행동을 감행한 것으로 비친다. 하지만 그렇게 해석할 일만은 아니다. 한 국가의 명운이 걸린 휴전회담의 모든 안건과 진행전략을 그동안 클라크 장군은 이 대통령에게 철저히 비밀로 해오고 있었다. 이 대통령이나 클라크 장군이나 모두 서로 흉금을 터놓고 말할 수 없는 위치에 있었던 것일 뿐이다. 두 사람의 이런 관계에서 불거져 나온 빅 이슈가 바로 반공포로 석방이었던 것이다.

# 1953년 6월 18일 늦은 밤

클라크 장군에게 서신을 받은 이 대통령은 장문의 답장을 보낸다. 부드러운 어투에 전하고자 하는 바를 돌려 말하지만 내용을 알고 읽으면 새삼 분노를 애써 삼키고 있는 서슬퍼런 대통령의 의지가 꿈틀대는 것만 같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어떤 고난이 있더라도 갈 길은 가야”


▎<자료5> 이승만 대통령이 마크 클라크 유엔군사령관에게 보낸 답장
“여기에 영예로운 한국인 전쟁포로를 석방한 것에 대한 담화문의 사본을 같이 보냅니다. 귀하의 이 문제에 대한 개인적 관점과 귀하가 이 복잡한 국제적 문제에 달리 어찌할 바가 없는 것을 압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내가 이 문제를 미리 귀하에게 말했다면 당신은 매우 난처해졌을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몇 차례 귀하에게 이 무고한 대한의 자녀들을 더 이상 그 비좁은 곳에 구금해선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나는 이 문제를 해결할 여러 방안을 고심해왔고 그 결과로 신중히 오늘 이 행동을 취한 것입니다. 나는 내가 권한을 갖고 있는 대한민국 치안대, 경찰대에 지시했던 바 여기에 문제가 된다면 부디 알려주시기를 바랍니다. 이 조치에 문제가 있었다면 함께 해결하고 싶습니다.

당면한 문제는 단 하나, 이 기회를 악용해 이익을 얻으려는 사람들은 양측 진영을 가리지 않고 언제든지 존재한다는 점입니다. 귀하 쪽의 사람들에게 안 그래도 안 좋은 상황을 더 나쁘게 하지 말라고 조언해주기 바랍니다. 나는 내 할 일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게 현 상황에서의 최선입니다.

그리고 내가 귀하에게 ‘집단적 행동’을 하지 않겠다고 한 것에 대해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그 ‘집단적 행동’은 오늘의 일을 뜻한 것이 아닙니다. 나는 아직도 우리가 거기까지는 가지 않기를 바랍니다.

한 가지 걱정은 정전협정 서명 후, 양측이 2㎞씩 후퇴하기로 되어있는데 나는 한국군이 그렇게 하지 않을까 봐 걱정입니다. 나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지만 말입니다. 개인적으로 이런 말을 하고 싶지는 않지만, 나는 어쩔 수 없이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경우에는 귀하로부터 한국군의 작전통제권을 가져올 것입니다. 알다시피 우리는 각자 나름의 상황이 있는 것이고, 어떤 고난이 있더라도 갈 길은 가야 합니다.

또 한가지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유엔군이 후퇴하고 한국군이 자리를 지킬 때 발생하는 틈으로 적이 쳐들어오지 않을까 하는 점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 서로 확실하게 해두는 것이 좋으며 귀하로부터 의견을 듣고자 합니다.

부디 우리 공적인 임무와 우리 개인의 우정은 분리하도록 합시다. 당신도 나도 서로의 주인은 아닙니다. 우리는 그저 임무를 다하고 그러다 보면 서로의 국가를 위해 피할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하는 겁입니다. 이 서신은 비밀에 붙여두길 바랍니다.

당신의 친애하는 이승만 드림”

이 서신이 밝혀주듯이 이 대통령은 반공포로 전격 석방에 이은 정전 이후 군사를 뒤로 물리는 조치의 불이행, 나아가 작전통제권 환수까지 거론하며 미국을 압박해 들어간다. 그와 함께 유엔군 철수 이후의 공산군 재침 가능성 및 안전조치 강구를 강조한 점이 훗날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과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를 검증하는 작업도 남은 과제라고 하겠다.

통치권 차원의 외교적 성과


▎반공포로 수용소를 시찰하고 있는 이승만 대통령 내외와 수행원들을 포로들이 만세를 부르며 열렬히 환영하고 있다.
당시 변영태 외무장관도 클라크 장군에게 공식 서한을 보냈다. 이 대통령이 클라크 장군을 달래는 듯한 뉘앙스의 편지를 썼다면 변 장관은 사실관계를 따지며 엄중히 훈계하는 편지를 썼다. 대통령과 장관이 각자 역할분담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대한민국 정부는 오래전부터 누차에 걸쳐 반공포로 석방 문제에 관한 입장을 표명해왔습니다. 이는 또한 유엔이 일전에 스스로 공표했던 것이기도 합니다. 1953년 5월 13일 해리슨 수석대표가 발표한 내용으로 ‘개인 의지와 무관하게 징집된 전쟁포로들은 정전협정이 효력을 발휘하기 전에 석방돼야 한다’는 골자였습니다. 우리는 이를 충실히 믿었건만 포로에 관한 내용을 한꺼번에 뒤집은 것은 유엔입니다.

우리 국민 3만4천 명을 커다란 ‘평화의 게임’에 희생시킬 수는 없습니다. 인간으로서 할 일이 아니죠. 반공포로 대부분이 포로로 잡힌 뒤 억지로 전쟁에 투입된 대한민국 군인이라는 점은 다시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한국 정부는 그동안 인내심을 가지고 반공포로 문제가 잘 처리되길 기다려왔습니다.

우리가 이 문제를 (정전)협상의 수단으로 삼는다면 그것은 부끄러운 평화가 될 것이며 신의 저주를 받게 될 것입니다.”

훗날 반공포로 석방은 통치권 차원의 외교적 성과라 평가되기도 한다. 반공포로 석방을 통해 보여준 결연한 의지, 과감한 행동력으로 휴전 후 한국에 대한 경제 및 군사원조 약속을 받아내고, 양국이 상호방위조약을 맺는다는 명시된 입장을 이끌어냈기 때문이다.

반공포로 석방은 한 국가의 대통령으로서 ‘국민의 보호’라는 물러설 수 없는 가치를 지키려는 결단이었다. 이 대통령은 동시에 그 결단을 국가의 미래를 위한 안전조치를 마련하는 데에도 지혜롭게 사용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반공포로 석방은 유엔군 특히 미군에 큰 충격을 주기는 했지만 결과적으로 1953년 6월 25일 월터 로버트슨 국무차관보가 대통령의 특사로 한국을 방문하는 결정적 동기가 됐다. 이후 한미 간의 본격적인 협상이 이루어지고 1953년 7월 12일에는 ‘한미상호방위조약’을 맺을 것이라는 공동성명을 발표하게 된다.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미국측은 ‘휴전이 되고 나면 긍정적으로 논의해보자’는 정도에 머물렀다.

- 글·자료제공 남보람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소령

201509호 (2015.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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