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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호의 ‘조선왕조 스캔들’(9)]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내몬 부왕(父王) 영조의 금주령 

 

신명호 부경대 사학과 교수
길 가다 개미조차 밟지 못했을 만큼 마음 여렸던 어진 임금… 그러나 소통·신뢰 부재 탓에 아들 죽이는 비극의 주인공으로

▎조선 제21대 임금 영조는 조선왕조 500년을 대표하는 성군(聖君)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 동시에 아들을 뒤주에 가둬 죽였다는 오명을 남겼다. 서울 창경궁에서 열린 조선시대 궁중연회 재현행사에 참석한 영조대왕.
정조가 지은 <행록(行錄)>에 의하면 조부(祖父)인 영조는 길을 걷다 개미가 있으면 밟지 않고 피해 갈 정도로 마음이 여렸다고 한다. 영조 역시 ‘내가 일찍이 차마 미물들을 밟지 못해 개미같이 하찮은 것 역시 밟지 않았고 밤 등불에 나방이 달려들면 손으로 휘저었다’고 회상했다. 그런 영조는 감정이 복받치면 펑펑 울기도 했으며, 감정대로 행동하다 나중에 한없이 후회하기도 했다.

그런데 영조는 마음이 여린 반면 체면을 아주 중요시했다. 그런 영조인지라 주변 사람들의 시선과 평가에 민감하게 반응하곤 했다. 이 같은 여린 마음과 체면 중시를 빼놓고 영조의 치세 50여 년을 제대로 이해하기는 불가능하다.

예컨대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죽인 사건을 생각해보자. 조선 500년 동안 왕실에서는 갖가지 사건이 일어났다. 그중에서도 뒤주사건은 조선왕실 최대의 비극이며 스캔들이라 할 만하다.

어떻게 아버지가 아들을 뒤주에 가둬 죽일 수 있었는지, 그것도 무더운 여름날 8일이나 굶겨서 죽일 수 있었는지 도무지 놀라울 뿐이다. 이런 놀라운 스캔들 이면에는 영조의 여린 마음과 체면 중시가 있었다. 이는 영조의 치세 50년을 관통했던 3대 국정지표 중 하나인 ‘계숭음(戒崇飮)’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조선시대의 국왕은 공식적으로 선왕의 3년 국상(國喪)이 끝난 후부터 명실상부하게 자신의 정치노선이나 정책을 드러낼 수 있었다. 부모가 돌아가면 최소한 3년상 동안은 부모의 가르침을 따라야 한다는 유교적 가르침 때문이었다. 조선의 21대 국왕이었던 영조 역시 다르지 않았다.

영조는 이복형(異腹兄)인 경종의 독살 의혹 속에서 1724년 8월 30일 왕위에 올랐다. 이어서 영조 2년(1726) 10월 13일 새벽, 종묘에서 경종의 부묘제(祔廟祭)가 거행됨으로써 3년간의 국상이 종료됐다. 이를 기념해 영조는 자신의 3대 국정지표가 명시된 교서를 반포했는데 계붕당(戒朋黨)·계사치(戒奢侈)·계숭음(戒崇飮)이 바로 그것이었다. 붕당을 경계한다는 ‘계붕당’은 정치적 국정지표였고, 사치와 과음을 경계한다는 ‘계사치’와 ‘계숭음’은 사회적 국정 지표였다.

큰 흉년 이후 모든 술이 금지되고


▎사도세자의 빈(嬪)인 혜경궁 홍씨가 자신의 한 많은 삶에 대해 쓴 회고록인 <한중록>.
선조 8년(1575) 동서분당으로 당쟁이 시작된 이후 150여 년에 걸쳐 붕당 간 당쟁이 격렬하게 진행됐기에 ‘계붕당’은 당연한 국정지표였다. 이와 함께 ‘계사치’와 ‘계숭음’이 3대 국정지표에 포함된 이유는 당시의 사치와 과음이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했기 때문이었다. 특히 과음의 문제점을 영조는 이렇게 지적했다.

“아! 술은 맛난 음식이 아니라 진실로 광약(狂藥)이다. 옛날 대우(大禹)의 깊은 염려와 우리 열성(列聖)의 경계가 앞에서 환하고, 또한 숙종대왕의 계주윤음(戒酒綸音)이 지극하지만 오히려 구습을 고치지 못하므로 내가 일찍이 마음속으로 개탄스럽게 여겼다. 아! 사람의 천성은 진실로 본래부터 착하게 돼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비록 더러 기질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또한 변화시켜서 착해지게 하려고 해야 할 것인데 더구나 맑은 기질을 혼탁하게 만들고 아름다운 기질을 악하게 만드는 것이 술 때문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제부터는 마땅히 더 자신들을 가다듬어 깊이 경계해야 하지 않겠는가?” [<영조실록> 권10, 2년(1726) 10월 13일]

위의 내용을 찬찬히 음미하다 보면 영조의 여린 마음이 여실히 느껴진다. 영조는 술 때문에 망가지는 사람을 여러 번 봤다. 점잖던 사람이 술 때문에 엉망이 되는 것은 물론 유순하던 사람도 술 때문에 난폭해진다. 술에서 깨어난 후에는 한없이 부끄러워하며 쥐구멍을 찾지만 또다시 술을 마시고 망가진다.

그런 그들을 비난할 수도 있지만 불쌍한 마음으로 볼 수도 있다. 영조는 ‘구습을 고치지 못하므로 내가 일찍이 마음속으로 개탄스럽게 여겼다’고 했는데 이는 술 때문에 망가지고 후회하는 사람들을 보며 불쌍하게 생각했다는 뜻이다. 불쌍하게 생각하는 마음은 분명 여린 마음의 소치(所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위의 내용 중 ‘옛날 대우의 깊은 염려’란 “옛날에 제녀(帝女)가 의적(儀狄)으로 하여금 술을 빚어 우(禹)에게 바치게 했는데 우가 마시고 달게 여겼으나 우가 의적을 멀리하고 지주(旨酒)를 끊으며 말하기를 후세에 분명 술 때문에 그 나라를 망치는 자가 있을 것이라고 했다”는 <전국책(戰國策)>의 고사를 지칭한다.

여기서 우가 마셨다는 지주(旨酒)는 증류주를 의미한다. 그 이전에는 도수 낮은 발효주만 있었는데 의적이 도수 높은 증류주를 만들어 바치자 우는 이 증류주 때문에 망국의 폐해까지 생길 것이라 깊이 염려했다는 것이다.

또한 ‘열성의 경계’는 술의 폐해를 경계한 세종의 교지를 위시해 중종의 계주윤음 등을 의미한다. 영조는 자신의 ‘계숭음’에 대한 정당성의 근거로 술에 대한 대우의 깊은 염려 그리고 세종의 교지, 중종의 계주윤음, 숙종의 계주윤음 등을 들고 이를 근거로 강력한 ‘계숭음’ 정책 즉 금주령을 추진할 것임을 선포했던 것이다.

조선건국 이후 금주령은 거의 모든 국왕에 의해 추진됐다. 예컨대 <조선왕조실록>으로 확인해보면 조선의 창업군주인 태조 이성계의 경우 2년(1393) 12월, 3년(1394) 1월, 4년(1395) 2월, 5년(1396) 4월, 7년(1398) 5월 등 거의 매년 금주령을 공포했다. 대부분의 이유는 가뭄 또는 홍수로 인한 곡물 품귀 때문이었다. 태조 이후의 정종·태종·세종 등도 유사한 이유에서 금주령을 공포하곤 했다.

하지만 영조 이전의 금주령은 가뭄이나 홍수 같은 특정 상황이 해소되면 곧바로 해제되곤 하는 한시적 정책이었다. 영조도 재위 중반까지는 한시적 금주령을 공포하곤 했다. 이런 상황이 영조 31년(1755) 가을에 큰 흉년이 들면서 확 바뀌게 됐다. 그 해 9월 8일 영조는 내년 즉 영조 32년(1756) 정월부터 모든 제사에서 예주(醴酒)를 쓸 것이며 모든 술은 금지하고 위반자는 엄벌한다는 금주령을 공포했다. 이런 금주령이 공포된 이유를 <승정원일기>에서는 이렇게 전한다.

“주상전하가 이르기를 ‘금주(禁酒)의 일이 누워 있다가 문득 생각났는데 좋은 생각이 떠올라 경을 불렀다. 경은 일찍이 예주를 마셔봤는가? 옛사람은 아악에서 예주(醴酒)를 쓰고 속악에서 시주(時酒)를 썼다’고 했다. 호조판서 이철보가 답하기를 ‘신은 예주의 맛을 모릅니다’라고 했다. 주상전하가 이르기를 ‘예주는 냉수는 아니지만 또한 맛이 있다. 현주(玄酒)는 예주의 조상이고 예주는 시주의 조상이다. 옛날에 예락(醴酪)이 있었는데 의적이 술을 빚었다. 우가 마셔보고 달다 여기며 말하기를 후세에 분명 술로 나라를 망치는 자가 있을 것이다 하고 드디어 의적을 멀리했다. 의적 이전에 예주가 이미 있었고 그 맛이 비록 담백하나 현주보다는 나으니 울창(鬱蒼)으로 쓰지 못하겠는가?’라고 했다. 호조판서 이철보가 답하기를 ‘예주는 오늘날의 감주이니 또한 울창으로 쓸 수 있습니다’라고 했다.” [<승정원일기> 영조 31년(1755) 9월 10일]

영조가 금주령을 엄격하게 추진하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종묘 제사 때문이었다. 종묘 제사에서는 술을 쓰면서 일반 백성들에게는 술을 못 쓰게 하는 것은 원칙에 맞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에 영조는 즉위 후 30년 동안 금주정책을 철저하게 추진할 수 없었다.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영조가 누워 있다가 문득 생각해낸 것이 바로 예주였다.

금주령 어긴 자는 사형에 처하는데


▎사도세자가 갇혀 죽은 뒤주.
예주는 감주(甘酒), 즉 단술이었다. 당시의 예주는 이름이 술이지 사실상 식혜와 유사한 음료로 색깔도 맑지 않고 냄새와 맛도 좋지 않아 맹물보다 조금 나을 뿐이었다. 영조가 현주는 예주의 조상이고 예주는 시주의 조상이라 언급한 의미가 그것이었다. 영조는 이 같은 예주를 이용해 시주를 완벽하게 금지하는 정책 즉 금주정책을 시행하고자 했다.

영조는 예주가 의적의 술 발명 이전부터 있던 술이기에 오히려 고례(古禮)에 적합하며 그렇기에 종묘 제사에서도 아무 문제없이 쓸 수 있다고 확신했다. 만약 종묘에서 예주를 이용할 수 있다면 백성에게 엄격한 금주를 요구해도 문제될 것이 없었다. 이런 확신에서 영조는 기왕의 제사·연향·호궤(犒饋)·농주(農酒) 등에서 쓰던 일체의 술을 금지하고 오로지 예주만 쓰게 했다.

영조 31년(1755) 9월에 이처럼 엄격한 금주령이 공포된 이후 처벌조항도 더욱 정비됐다. 우선 영조 32년(1756) 1월부터 금주령이 발효됨과 동시에 한양 술집의 주등(酒燈)을 금지하는 것으로 했다. 또한 금주령 위반자는 엄형(嚴刑) 후에 섬으로 유배하는 것으로 했다.

아울러 술을 마신 자는 잔읍의 노비로 소속시키고, 선비는 청금(靑衿)에서 삭제한 후 3차례 형신(刑訊)해 도배(島配)하고, 중서(中庶)는 수군에 충정하게 했다. 이 처벌규정이 1년 후에는 더욱 엄격해져서 금주령을 어긴 양반관료는 10년 금고(禁錮)되고, 유생은 10년간 과거응시가 금지되며, 서민과 천민은 본토에서 10년간 종이 되게 했다. 금주령의 엄격한 처벌규정은 영조 38년(1762) 9월 4일에 위반자를 사형시키는 것으로 절정에 올랐다.

금주령을 공포한 후 영조는 처벌규정을 강화하는 한편, 양반관료와 백성들에게 금주령의 취지를 널리 알리려는 훈계 노력도 함께 기울였다. 예컨대 영조는 자신이 강력한 금주령을 시행하기로 결심한지 2년째가 되던 동왕(同王) 33년(1757) 10월 25일 창경궁의 명정전 월대에 나가 5부의 부로(父老)들을 모아 계주윤음을 발표했다. 이어서 11월 1일에는 대소신료들에게 다시 계주윤음을 발표했다.

이 두 차례의 계주윤음은 영조가 강력한 금주를 결심한 지 만 2년이 되는 시점을 기념해 그동안 금주령 위반으로 체포된 700여 명을 석방하면서 금주령의 취지를 널리 알리는 내용이었다.

또한 영조는 금주령의 취지를 백성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계주윤음을 언해하고 나아가 예문관으로 하여금 목판으로 인쇄해 5곳의 사고·승정원·홍문관·예문관·춘방·의정부·육조·한성부·사헌부·사간원·8도·3유수부(留守府)에 배포하게 했다. 이어서 영조 34년(1758)년 9월 16일에는 영조가 직접 창경궁의 홍화문에 나가 한양의 백성들에게 금주윤음을 선포했고, 영조 38년(1762) 9월에 14일에도 어제경민음(御製警民音)을 공표했다. 어제경민음은 지난 9월 4일에 금주령 위반자를 사형시키기로 결정한 후에 발표된 것으로 백성들에게 경각심을 주기 위해 공포됐다.

주량도 적고 술의 폐단도 잘 알았던 세자


▎사도세자가 장인 홍봉한에게 보낸 편지. ‘안부하여(安否何 如)’는 ‘어떻게 지내십니까’ 정도의 의미다.
그런데 엄격한 금주령이 발효되던 영조 32년(1756)은 대리청정(代理聽政) 중이던 사도세자와 영조 사이에 갈등이 본격화되던 시점이기도 했다. 그 시점에서 금주령은 영조와 사도세자 사이의 갈등을 더욱 악화시키는 역할을 했으며, 그럴수록 영조는 금주령 위반자에 대해 점점 더 엄한 처벌규정을 내놓았다. 바로 이런 모습에서 체면을 중시하는 영조의 모습을 읽어낼 수 있다. 그 결과 영조와 사도세자의 관계가 또다시 악화되는 악순환이 반복됐다.

영조가 동왕(同王) 31년(1755) 9월 8일에 엄격한 금주령을 공포하던 당시 사도세자는 21세였다. <한중록>에 의하면 사도세자는 주량이 적었다고 한다. 또한 사도세자 스스로도 술의 폐단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예컨대 사도세자의 <계주만필(戒酒漫筆)>에는 “관혼상제는 선왕의 법이니 공경히 현주를 쓰면 신령이 통한다네. 내가 들으니 우임금은 성인인데 한번 순주(醇酒)를 마시고 의적을 멀리했다네. 의적이 떠난 지 3천 년, 그 사이에 화란이 없을 때가 없었네”라는 내용이 있다. 이런 내용은 기본적으로 영조의 금주정책과 일치한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영조의 엄격한 금주령이 사도세자에게 문제가 되지 않았을 듯도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영조의 엄격한 금주령이 발효된 지만 4개월째인 영조 32년(1752) 5월 2일 오후 4시쯤, 왕은 숭문당에서 조정중신들을 접견했다. 숭문당은 영조가 거처하는 환경전과 사도세자가 공부하는 낙선당의 중간쯤에 위치한 건물이었다. 영조는 이곳에서 신료들을 접견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영조는 숭문당에서의 접견이 끝나자 갑자기 낙선당으로 행차했다. 사도세자의 근황이 궁금해서 간 것인데 <승정원일기>에는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록돼 있지 않다. 다만 낙선당에 갔던 영조가 환관 신치하와 궁녀 해정을 유배하라고 명령한 내용이 기록돼 있다.

신치하는 ‘보고할 때 두서가 없었다’는 것과 해정은 ‘금주하는 때 대궐 안에서 술을 빚었는데 물을 때 거짓말하며 사실대로 답하지 않았다’는 것이 이유였다. 낙선당에 간 영조가 사도세자와 관련해서 무엇인가를 물었는데 신치하와 해정이 명쾌하게 답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어 삼경(三更)에 사도세자가 낙선당에서 조정중신들과 춘방관들을 만났고 뒤이어 그곳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이때 사도세자와 조정중신들 간에 오고 간 대화가 <승정원일기>에는 삭제돼 있다. <승정원일기>에는 ‘병신년(1776, 영조 52)의 하교로 말미암아 세초했다’고 기록돼 있을 뿐이다.

병신년의 하교란 당시 세손이던 정조가 ‘<승정원일기>의 내용 중에서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죽게한 사건과 관련 있는 내용들을 삭제할 것’을 요청하자 영조가 허락한 하교였다. 따라서 이날 사도세자와 조정중신들 사이에 오간 대화는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죽게 한 사건’과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었다고 하겠다.

체면 먼저 생각한 아버지, 반항심을 술로 푼 아들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가 함께 묻힌 융릉(隆陵). 서울 휘경동에 있던 능을 정조가 ‘천하제일의 길지’라며 경기 화성으로 이장했다.
사도세자가 삼경에 낙선당에서 조정중신들과 만나 무엇인가 대화한 직후에 화재가 발생했다는 사실은 방화범이 사도세자일 수도 있음을 암시한다. 실제로 영조는 그렇게 의심했다. 그날 영조와 사도세자 사이에 심각한 일이 있었던 것이다. <한중록>에 의하면 그날의 일이란 이런 것이었다.

영조가 갑자기 낙선당에 들이닥쳐 사도세자를 불렀을 때 세자는 얼굴도 씻지 않고 옷차림도 단정치 않았다. 영조는 혹시 사도세자가 밤새 술을 마시고 지금껏 자다 온 것이 아닌지 의심했다. 자신은 백성들을 상대로 엄격한 금주령을 시행하는 중인데 세자가 밤새 술을 마시다니…. 격노한 영조는 세자가 술을 마셨는지 또 누가 술을 들였는지 책망하듯 물었다. 그때 사도세자는 술을 마시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밧소주방 큰 나인 희정이가 주어 마셨다고 대답했다. 영조는 가슴을 두드리시며 ‘네가 이 금주하는 때 술을 먹어 광패(狂悖)하게 구느냐?’라고 엄히 책망하고는 술을 들인 책임을 물어 환관 신치하와 궁녀 해정을 유배하게 했던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날 한밤중에 낙선당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사도세자의 방에 있던 촛대가 넘어져 일어난 화재였지만 영조는 세자가 홧김에 방화한 것이라 의심했다. 사도세자를 부른 영조는 ‘네가 불한당이냐? 불은 어이 지르나?’ 하며 전후 사정을 묻지도 않고 호되게 꾸짖었다. 사도세자 역시 변명하지 않고 자신이 방화했다고 대꾸했다. 이런 일은 근본적으로 불신과 불통에서 나타난 현상이었다. 영조와 사도세자는 명색이 부자간인데도 불구하고 서로 믿지도 않았고 소통하지도 않았던 것이다.

영조는 자신이 엄격한 금주령을 내린 지 4개월 만에 다른 사람도 아닌 사도세자가 술을 마셨다고 생각하자 크게 상심했다. 사도세자를 직접 벌할 수 없어 대신 환관 신치하와 궁녀 해정을 처벌했지만 스스로 면목이 없던 영조는 ‘지난날의 일은 나의 허물이다. 지난날의 일은 나의 허물이다. 오늘날 나랏일은 어찌할 수 없다고 말할 지경이니 심장이 떨어지는 듯하다’라고 스스로를 자책하는 하교를 내렸다. 이런 하교에는 마음 여리고 체면을 중시하는 영조의 진면목이 여실히 드러난다. 영조는 사도세자와의 소통에 앞서 자신의 체면을 먼저 생각했던 것이다.

이때의 사건으로 사도세자는 크게 변했다. 이후 사도세자는 술이 약한데도 불구하고 정말로 과음하기 시작했다. 과음은 술주정과 폭력 그리고 살인으로 이어졌다. 이러면서 사도세자는 아예 영조와 상종도 하지 않으려 했다. 억울하고 답답한 마음 그래서 솟아나는 반항심을 그렇게 풀었지만 그 결과는 불신과 불통의 심화였다.

당시 사도세자는 창덕궁에서 영조와 함께 살고 있었는데 영조만 경희궁으로 옮겨가게 하고 자신은 그대로 창덕궁에서 살고자 했다. 이 목적을 위해 영조가 총애하는 화완옹주를 이용했다. 영조 36년(1760) 7월 1일 사도세자는 화완옹주를 불러 ‘아무래도 한 대궐 속에서 살 길이 없으니 웃 대궐을 보자 하거나 아무 계교로나 뫼시고 가라’고 했다.

비극으로 막을 내린 부자관계

7월 6일 영조는 중전만 데리고 경희궁으로 이어(移御)하겠다고 선언했다. 국왕의 이어는 매우 중요한 문제이므로 신료들과 논의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영조는 일방적으로 선언했다. 영조는 ‘한밤중에 생각이 났다. 나는 다만 중전과 함께 경희궁으로 이어해 예전에 중전과 함께 대비를 모셨던 것처럼 몇 달 머물다 돌아오겠다’고 했다. 중전과 함께 오붓하게 지내기 위해 경희궁으로 이어한다는 명분이었다.

영조가 경희궁으로 옮겨간 후 왕과 세자 사이의 불신과 불통은 더 깊어졌다. 창덕궁에서 함께 살 때는 영조가 세자를 불시방문하기도 하는 등 접촉이 있었고 대화도 있었다. 그러나 경희궁으로 옮긴 이후 그나마 그런 것도 사라졌다. 영조는 사도세자를 전혀 믿지 않았고, 그렇다고 믿음을 회복하기 위한 적극적인 노력도 보이지 않았다.

이런 상황은 사도세자를 더욱 악화시켰다. 영조 38년(1762)부터 사도세자는 억울하고 답답한 마음이 치솟을 때마다 끔찍한 말을 내뱉기 시작했다. <한중록>에는 그런 끔찍한 말들이 ‘부도지설(不道之說)’, ‘불공지언(不恭之言)’으로 표현되는가 하면 ‘병화(病火)로 아무리(어떻게) 하려노라’ 또는 ‘협검(狹劍)하고 가 아무리 하고 오고 싶다’로 표현돼 있다. ‘협검을 하고 가, 아무리 하고 오고 싶다’는 말은 앞뒤 정황으로 볼 때 칼을 가지고 가서 영조를 찔러 죽이고 싶다는 의미다.

사도세자는 아버지 영조에게 심한 욕설을 퍼붓다가 마침내는 죽여버리고 싶다는 말까지 입 밖으로 내뱉게 됐던 것이다. 그 결과가 영조 38년(1762) 윤(閏) 5월의 뒤주사건이었다. 그리고 5년 후인 영조 43년(1767) 1월 왕은 사연 많던 금주령을 폐지했다.

돌아보면 영조의 엄격한 금주령은 근본적으로 여린 마음에서 시작됐다. 그런 금주령이 사도세자와의 관계를 악화시키고 뒤주사건으로까지 치달은 이유는 불신과 불통 때문이었다. 아무리 좋은 취지의 정책이라도 신뢰와 소통이 없다면 비극을 벗어나기 어렵다는 역사적 교훈이라 할 것이다.

이와 관련된 <대학연의>의 가르침은 ‘찰민정(察民情)’이다. 국가 정책이 실제 백성에게 약이 되는지 아니면 독이 되는지를 통치자의 입장이 아닌 백성의 입장에서 살펴보는 것이 ‘찰민정’이고, 그래서 ‘찰민정’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백성의 입장을 하늘의 입장으로 공경하는 소통 정신이 필요하다.

그러나 역사상 위대한 통치자 중에도 ‘찰민정’을 내세우며 불통의 늪에 빠진 경우가 비일비재하니 슬픈 일이다.

신명호 - 강원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부경대 사학과 교수와 박물관장직을 맡고 있다. 조선시대사 전반에 걸쳐 다양한 주제의 대중적 역사서를 다수 집필했다. 저서로 <한국사를 읽는 12가지 코드> <고종과 메이지의 시대> 등이 있다.

201509호 (2015.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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