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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함정임의 ‘바닷가 서재’] 피서지에서 ‘짧은’ 소설읽기 

해변의 ‘노벨라 파라디소’(novella paradiso: 중편소설 천국) - 휘몰아치듯 부서지는 파도 같은 서사의 향연 

함정임 소설가, 동아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바캉스 시즌에 맞춰 프랑스의 에디터들은 다양한 분야의 책을 기획 출판하는데, 단연 눈에 띄는 것은 소설 장르다. 오래전 나는 지중해 서쪽의 작은 항구도시 세트에 갔다가 해변 가판대에서 아니 에르노의 신작 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바캉스 소설이라고 하면, 여가에 적합한 킬링타임용 추리 소설이나 SF 장르가 차지했기에, 아니 에르노의 경우는 의외였다. 아니 에르노는 라는 중편소설 분량의 작품으로 프랑스의 권위 있는 문학상인 르노도상을 받았고, 카뮈나르 클레지오 계열의 순문학 소설가로 평가받고 있었다.

나는 자신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삶을 투시해 사회역사적인 맥락으로 가족자전서사를 풀어낸 이 여성 작가의 담담한 문체에 매료되었던 터라 쏟아지는 햇빛을 아랑곳 않고 그녀의 소설을 펼쳤다. “작년 9월 이후로 나는 한 남자를 기다리는 일, 그 사람이 전화를 걸어주거나 내 집에 와주기를 바라는 일 이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아니 에르노, , 최정수 옮김, 문학동네)

이국의 낯선 피서지 해변 가판대에서 만났기 때문인지, 에르노의 소설은 첫 문장부터 도발적이었다. 내가 알던 에르노의 문장이 맞는지 눈을 비비고 다시 보았다. 첫 문장을 읽고 그 다음 문장으로 넘어가기가 무섭게 그 다음 문장을 탐할 정도로 소설에 빠져들었다. 불어오는 바닷바람에 페이지들이 펄럭였다. 글자들은 빛살들에 하얗게 표백되어 신기루처럼 사라져버릴 것 같았다. 나는 갈 길이 멀었다. 니스로, 아비뇽으로, 파리로 열차는 달렸고 나는 자주 현기증에 휩싸이며 에르노의 문장을 아껴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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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호 (2015.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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