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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갈피] 신라는 어떻게 대제국 당(唐)을 물리쳤나 

 

나당전쟁의 해석 틀을 7세기 유라시아 지역으로 확대… 800쪽짜리 방대한 고대 동아시아 전쟁사로 완성

1970년 대에 중고등학교 시절을 보낸 사람들은 잘 안다. 국사 시간에 유난히 강조됐던 ‘신라 삼국통일의 위업’에 대해서 말이다. 대학에 입학하고 나서야 삼국통일의 왜소함과 불철저성을 주장하는 학계의 이설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교과서를 통해서만 역사를 봤던 학생들에겐 아마도 대단한 충격이었을 것이다.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의 옛 땅 가운데 대동강 이남 일부만 차지할 수 있었는데, 이것을 두고 어떻게 통일이라 부를 수 있느냐는 논리다.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가 존재했는데, 발해 없는 통일을 어찌 통일로 볼 수 있는가? 이렇게 전개된 ‘부정적’ 신라 삼국통일론은 신선하고 매혹적이었다.

대학 2학년 쯤 올라가서는 이 삼국통일 논쟁에 매우 치열한 정치적 함의가 숨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영호남 갈등의 뿌리를 건들기도 하고, 남북 정권의 정통성과 대표성 문제로도 확대되었다. 보수와 진보를 가르는 역사 인식이었으며, ‘만주가 우리 땅’이란 극단적 우파 민족주의 논리의 텃밭이 되기도 했다. 이 논쟁은 현재진행형이다. 무수히 변주되어 나타나는 학계의 해묵은 시빗거리로, 잊을 만하면 튀어나오는 역사의 테마가 되었다.

당시 학생들이 가장 궁금하게 생각했으나, 감히 묻지 못했던 대목이 있다. 막대한 군사력을 가진 세계 최강국 당나라를 신라가 어떻게 이길 수 있었느냐는 것이다. 서영교(48·한국학) 중원대 교수의 신간 <고대 동아시아 세계대전>이 이 의문에 대한 적확한 해답을 제시한다. 모두가 알고 있는 역사적 사실이지만, 누구도 이유를 명확히 설명하지 못하는 역사적 진실. 서 교수가 밝혀낸 진실은 이렇다.

“당나라는 나당전쟁에 힘을 집중할 수 없었다. 바로 직전 당나라 최정예 군대 11만 명이 티베트 고원 대비천에서 토번군에 전멸당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참패한 장군은 고구려를 멸망시키는 데 큰 공을 세운 설인귀였다. 신라는 그걸 알고 싸움을 건 것이다.”

요즘식으로 말하면 정보전의 승리였는데, 신라가 그 같은 고급정보를 어떻게 손에 넣을 수 있었을까 궁금해진다. 어쨌거나 서 교수는 나당전쟁의 해석 틀을 7세기 유라시아 지역으로 확대했다. 이 시기 중국의 수·당, 한반도의 고구려·백제·신라, 중앙 초원의 토번·돌궐·고창국, 해양의 왜 등 각국은 서로 물고 물리면서 흥망성쇠를 거듭했다. 그는 “각 국이 벌인 전쟁은 모두 유기적으로 연결돼 있어 독립적인 분석이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 전쟁은 국제적인 역학관계 속에서 유라시아 패권을 두고 붙은 ‘세계대전’의 형태를 띨 수밖에 없다. 나당전쟁의 궁금증을 풀어나가는 과정에서 방대한(800쪽) 고대 동아시아 전쟁사가 완성된 것이다.

그렇다면 당이 고구려를 멸망시킬 수 있었던 이유는 뭘까? 그것은 앞서 돌궐을 물리쳐 돌궐의 기병을 전투에 활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당이 고구려 등 만주지역 점령에 병력을 집중하는 동안 돌궐은 부활하고, 토번은 타클라마칸 사막의 전략적 요충지를 차지한다. 그래서 당은 서역에 국력을 집중할 수밖에 없다. 당이 토번과 실크로드를 놓고 150년간 다툼을 벌이는 사이, 통일신라는 평화를 구가했다. 참으로 논리적인 역사의 전개에 감탄하게 된다.

- 한기홍 월간중앙 선임기자

201509호 (2015.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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