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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주의 ‘日常반추’] 일하고 사랑하고 놀 시간을 허하라 

중산층의 몰락은 자본주의 궤멸의 징후… ‘저녁이 있는 삶’은 일과 삶이 균형을 이루고 있다는 것 

장석주
많은 사람이 돈·권력·지위·물질을 좇아 삶의 대부분을 일하는 데 바친다. 여가 시간이나 놀이 시간은 상상도 하지 못한다. 자신과 가족의 삶은 언제부터인가 ‘일’에 우선 순위를 뺏겼다. 그렇다고 빚과 가난에서 벗어나거나 행복해지는 것도 아니다.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지금 이 순간의 삶을 향유하자. ‘행복’의 가치는 물질에서 오는 것은 아니다. 물질을 좇는 낡은 삶의 방식을 버리고 느긋하게 살면서 사유하고 성찰하는 ‘미니멀 라이프’로 삶의 방식을 과감하게 바꾸자.

▎물질을 좇는 것은 어리석고 낡은 삶의 방식. ‘행복’은 느긋하게 살면서 사유하고 성찰하는 삶에서 시작한다.
여느 주일과 마찬가지로 평이하게 시작되는 월요일 오전이다. 침대 머리맡에 놓아둔 알람시계가 ‘빨리 일어나라’고 자지러지게 비명을 지른다. 골수에 쌓인 피로감이 부르르 떨며 진저리를 친다. 무겁고 어두운 잠에서 깨어나 일어나야 한다. 편의점들 입구에 노란 아침 햇살이 떨어지고, 우체국과 은행과 빵집이 제 시각에 맞춰 문을 연다. 월요일 아침의 고속도로로 진입하는 차량들이 길게 늘어서며 교통 지체가 시작한다. 하늘은 잿빛으로 흐려 있고, 도로가 패인 데 괴어 있는 흙탕물 위로 빗방울이 후두두 떨어진다. 대기에 습도가 높아 거실이 눅눅하다. 빨래 건조대에 널린 빨래들은 더디 마른다. 빨래가 더디 마르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낯익은 불행이 문밖에 와 있다. 아, 그 불행을 묵묵하게 견디는 자가 실은 그 불행의 제조자다! 빨래가 마르기를 기다리며 거실 소파에서 책을 읽는다. 거실은 책 읽는 공간으로 변하고, 거실의 시간 역시 책 읽는 시간으로 바뀐다. 거실에는 고요라는 커다란 새가 날개를 접고 내려앉는다.

소파, 작은 탁자, 화분 몇 개, 텔레비전, 오디오 기기, 스피커, 벽시계 따위가 정적에 빠진 거실을 구성하는 물건들이다. 나는 소파에 피로한 몸을 의탁하고, 탁자 위에 차나 방금 읽다 만 책, 그리고 과일을 올려놓는다. 눈을 뜨면 오디오 기기로 음악을 듣거나 텔레비전을 켜고 뉴스를 시청한다. 이것들과 날마다 시간을 보내며 더불어 산다. 이 익숙한 물건들이야말로 내 삶에 관여하면서 그것을 일구는 조력자들이다. 이 낯익은 거실과 사물들이 저마다 시간들을 뿜어낸다. “물건들은 어떤 식으로든 우리를 강제하지 않으면서, 물질세계에 대한 최소한의 경의, 시간 속의 개방성을 암시한다.”(로버트 그루딘, <당신의 시간을 위한 철학>, 145쪽)

물건들은 필요가 생길 때마다 우리의 부림을 받는다. 우리는 물건들과 함께 물질세계의 삶을 일궈 나가지만, 물건이 우리를 강제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산다는 것은 곧 물질세계를 향한 존재의 [시간 속의] 개방이다. 물건들이 그 쓰임을 빌려줄 때, 우리는 그 물건들을 향해서도 존재를 개방한다. 다시 거실로 돌아가자. 거실은 물건들에게 자리를 내주는 공간이면서 그 공간에 놓인 물건들과 사람에게는 시간적 감각을 형성하고 존재의 리듬을 낳게 만든다. 사물들은 저마다 제 시간으로 내 삶에 관여한다. 거실에서 책을 읽거나 휴식을 취할 때 우리는 공간과 더불어 공간의 시간들을 쓴다.

시간의 호젓한 만(灣)에서


▎대부분의 직장인은 자신의 일정에 대한 통제권이 없다. 그 통제권은 그를 고용한 기업이 갖고 있다. 늦은 밤까지 환하게 불을 밝히고 있는 서울 시내의 한 오피스 빌딩.
일상이란 공간과 공간을 지배하는 시간이 어우러져 만드는 삶의 받침대다. 이 받침대는 조화의 토대이자 그 조화 속에서 만들어진 협주곡이다. 젖은 빨래가 천천히 마른다. 시간이 내 몸을 관통하며 지나간다. 이 시간은 무심함과 고요로 직조된 시간이다. 이 시간은 비산되고, 방향 없이 휩쓸려가고, 어느 찰나 덧없이 무(無) 속으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주체를 향해 모여들며 그 중심에서 응집한다. 시간이 어지럽게 난비(亂飛)하지 않고 하나의 중심점으로 응집할 때 주체는 내면 깊은 데서 평화로움을 느낀다. 시간의 난비 속에서 삶은 평화로울 수가 없다. 삶은 받침대 없이 흩어져 균형과 조화를 잃는다. 삶은 방향 없이 이리저리 내닫는다. 이때 주체가 의미의 존재라는 실감도 미약해진다. 하지만 받침대 위에 가지런히 정렬된 시간 속에서는 홀연 존재에의 응시가 이루어진다. 내면과 자아가 확장되고 있다는 느낌도 한결 또렷해진다. “우리에게 드리워진 어떤 제한도 없이, 우리 존재를 찔러대는 어떤 가시도 없이, 시간의 호젓한 만(灣)에서 자신이 확장됨을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 그 안에서 우리는 더 크고 더 게으르고 더 웅대하다.”(로버트 그루딘, 앞의 책, 142쪽)

“자본주의는 악마의 배설물이다”


▎거실은 우리에게 휴식과 사색의 시공간을 내어준다. 그런 면에서 거실은 시간의 호젓한 만(灣)이라고 할 만하다.
나는 좀 더 오래 거실에 머무른다. 죽음 없는 삶을 열망하는 자가 머무는 거실은 시간의 호젓한 만(灣)이다. 시간의 흐름은 느릿해지고 그 느린 흐름 속에서 만물은 정렬한다. 이 정렬 속에 조화 깃든다. 이 일상의 호젓한 만(灣)으로 시간은 밀물같이 밀려 들어왔다가 썰물같이 빠져나가기를 반복한다. 이 여백의 시간을 애써 의미로 환원하려고 시도하지 않는다. 그저 오고 가는 물의 도(道)를 따를 뿐이다. 오전 시간이 잘게 부서지며 흩어진다. 정오가 지나면 시간은 급격하게 오후로 미끄러진다. 이 미끄러짐은 곧 존재의 미끄러짐이기도 하다. 비가 더 와도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좋은 음악이 있다면 더욱 좋겠다.

7월 중순, 아침 텔레비전 뉴스 화면에 본 교황께서 하신 “자본주의는 악마의 배설물이다”라는 말씀이 머릿속에서 쉬이 지워지지 않는다. 인류가 만든 거대한 배설물이 지구를 덮어간다. 이 배설물이 일으킨 죽음의 규모는 실로 대단하다. 수많은 생물 종이 이 배설물의 독성에 의해 지구 위에서 사라지고 있다. 일찍이 노자는 “천지는 어질지 않다(天地不仁)”라고 했다. 천지자연은 어질지도 악하지도 않다. 천지는 그저 존재하니 만물을 편애하거나 미워하지 않고 그저 추구(芻狗)와 같이 여긴다. ‘추구’는 제사 때 바치는 제물로, ‘짚으로 만든 개’다. 우리는 자본주의의 제단에 받치는 ‘짚으로 만든 개’다. ‘추구’는 제사가 끝나면 가차없이 버려진다.

근대적 가치들을 다 탕진해버린 채 배설물이 되어버린 자본주의 세계에서 우리는 아등바등하며 산다. 불가피하게 우리 삶에 배설물이 뒤섞이고 곰팡이 균의 일생보다 더 나은 의미를 찾기 어렵다. 차라리 삶 자체가 배설물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인류의 개인 자아가 아니라 집단 자아가 이 배설물에 오염된 것으로 보인다. 이 자본주의라는 오물은 치워질 것이다. 자본주의 궤멸은 이미 징후적이다. 중산층의 몰락과 카지노화하는 자본주의가 그 징후들이다. 이 자본주의는 모든 걸 도박으로 만든다. 교황께서는 이 배설물이 결국은 모든 종교까지 삼켜버린다는 사실을 아셨을까? 배금주의에 속속들이 물든 기성 종교들에 가까이 가면 갈수록 악취가 진동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이 아이러니라니! 한 철학자는 우리에게 남은 유일한 진짜 종교는 하나뿐이라고 말한다. “미래에 대한 얕은 신념”(존 그레이, <하찮은 인간, 호모 라피엔스>, 206쪽)이 그것이다.

도박판으로 변질된 이 자본의 사회에서 미래는 불확실하다. 그것이 우리에게 무엇을 줄지는 아무도 모른다. 심지어 미래가 올지 안 올지도 모른다. 장기적 관점을 가져라? 그런 말 따위는 개나 물어가라고 해라! 미래를 위해 오늘의 행복을 유예하라는 속삭임은 사기꾼의 감언이설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 모두는 어느 틈엔가 이 카지노 자본주의 사회 한복판으로 내몰렸다. 도박판의 세계에서는 아무리 고되게 일해도 안전은 보장되지 않는다. 어마어마한 부를 쌓은 아주 소수의 사람만 안전하다고 느낄 것이다. 성실하고 부지런한 누군가가 어느 날 갑자기 파산하거나, 몰락한다 하더라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보통 사람의 유일한 명제는 어쨌건 죽지 않고 살아남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재화이건 인간이건 잉여를 토대로 한다. 재화와 시간을 끊임없이 빨아들인다. 그리고 새로운 생산을 한다. 필요가 있기 때문에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생산을 하고 수요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는 당연히 생산의 잉여다. 잉여를 위한 잉여다. 잉여의 생산은 또 다른 잉여를 낳으려고 매진한다. 어디에나 과잉은 차고 넘친다. 철학자 존 그레이는 이런 점을 날카롭게 꿰어보고 “과잉이라는 유령이 오늘날의 경제를 떠돌고 있다”(존 그레이, 앞의 책, 208쪽)고 쓴다. ‘과잉이라는 유령’이 나타난 것은 이미 오래 되었다. 이 ‘과잉이라는 유령’에 저항자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1960년대 히피들은 일하지 않고 마리화나와 연애, 록음악에 취한 채 빈둥거림으로써 이 과잉의 유령들에게 저항했다. 1968년 혁명 당시 파리의 한 벽에 나타난 “절대로 일하지 말라”라는 낙서도 마찬가지다. 혁명의 열기에 동참한 젊은이들은 태업이 과잉에 대한 저항의 유력한 방식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들은 금지를 금지하라고 외쳤다. 맘껏 사랑할 수 있는 자유, 일하지 않을 수 있는 자유를 누리려고 했다. 자유로운 사랑은 과잉의 노동에 대한 유력한 태업의 방식이다. 잉여의 생산은 죄악의 생산이다. 어디에나 물건들이 차고 넘쳐나는데, 이는 결과적으로 지구를 쓰레기더미로 만든다. 이는 지구 생물들의 터전을 뭉개고 생명들을 약탈하는 짓이다. 하지만 그 잉여 생산을 멈추는 순간 자본주의는 끝난다. 그러니 자본주의 스스로는 작동을 멈출 수가 없다.

필연적으로 자본주의는 효율성을 따진다. 자본주의는 풍요를 생산한다고 말하지만 이는 거짓말이다. 자본주의는 욕구를 생산하고, 그 욕구가 만드는 낭비를 장려한다. 필요 이상으로 물건을 만들었으니, 시장에서 소비해야 한다. 소비가 위축된다면 자본주의는 금세 위기에 직면한다. 자꾸 소비를 독려해야 한다. 더 많이 사고 더 많이 써라! 이것이 자본주의가 내리는 명령이다. 소비 천국을 선전하는 자본주의 세계에서는 실제와 당위의 거리가 점점 커진다. 나중에는 그 간격이 너무 커서 좋은 삶을 나을 수 있는 여러 조건들을 삼켜버린다. 자본주의는 제 안에 포획된 자들을 과잉의 욕구 속에서 허우적거리다가 죽을 때까지 몰아간다. 이 욕구는 우리의 것이 아니다. 이런 생각은 착시에서 빚어진 오류다. 우리의 욕구는 이 타락한 자본주의 세계에서 우리는 과잉에서 과잉으로 이어지는 욕망-기계, 소비-기계, 정보처리-기계일 따름이다.

자본주의는 잉여와 욕구를 생산한다


▎커피 한 잔, 빵 한 조각, 책 한 권 같은 익숙한 물건들이야말로 우리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는 조력자들이다
자본주의는 생산성과 효율성을 새로운 신으로 섬긴다. 그렇다면 이 ‘생산성’이 자본주의 경제를 움직이는 진짜 동력일까? 철학자는 그 물음에 다음과 같이 답한다. “오늘날의 자본주의는 엄청나게 생산성이 높지만, 경제를 움직이는 동력은 생산성이 아니다. 경제의 동력은 지루함을 몰아내는 데 있다. 풍요가 지배하는 사회가 직면하는 심각한 위험은 욕망의 상실이 아니다. 욕망이 너무 빨리 충족되어버리기 때문에, 경제가 돌아가려면 더 색다른 욕구를 만들어내야 한다.”(존 그레이, 앞의 책, 208쪽)

놀라워라, 작금의 자본주의 경제를 움직이는 동력은 지루함을 몰아내는 오락이다. 왜 오락일까? 분명 과거에 견줘 우리는 더 많은 오락을 필요로 한다. 과거에 견줘 자주 번아웃에 빠지기 때문이다. 잉여 생산에 내몰린 사람들은 대부분 과로 상태다. 주체 내부에 축적된 과로를 지워내려면 반드시 휴식과 오락이 필요하다. 아울러 늘 같은 것은 쉽게 질려버리는 사람들은 계속 색다른 욕구를 만들어내야 한다. 과로와 권태와 무기력으로 허덕이는 사람들을 번쩍 깨울 만한 색다른 물건을 만들어내라! 색다른 물건이 색다른 욕구를 창조한다. 시장은 계속 기업들에 내부 조직을 ‘혁신’하라고 압박하며, 좀 더 ‘색다른 물건’을 만들어내라고 명령한다. 그래야만 자본주의가 망하지 않고 유지될 수 있으니까.

많은 사람이 자기 자신과 가족의 삶을 희생하면서까지 하루 대부분을 일하는 데 바친다. 직장인들에겐 자신의 일정에 대한 통제권이 없다. 그 통제권은 그를 고용한 기업이 거머쥐고 있다. 자신의 일정에 대한 통제권이 없으니 여가와 놀이를 위한 시간은 꿈도 꾸지 못한다. 그들은 일하고 사랑하고 놀 시간 없이 오로지 업무·프로젝트·출장·잔업 등을 위한 노동-기계로 살아간다. “하루의 3분의 2를 자기 마음대로 쓰지 못하는 사람은 노예다”라고 단호하게 말한 니체의 기준에 따른다면 그들은 그저 노예다. 직장에 나가고 집으로 돌아오는 시간, 법정 근로시간을 초과하는 잔업에 들이는 시간, 가사노동 시간을 더하면 남는 건 빠듯한 수면시간이다. 피로한 몸을 뉘는 순간 그들은 혼수상태와 같은 잠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간다. 잠은 노동으로 방전된 자신을 위한 절대적 휴식과 충전의 시간이다. 이마저도 충분치 않다. “반드시 취해야 할 이 휴식조차도 기상 알람으로 대뜸 중단된다. 귀청이 떨어질 듯한 알람 소리는 그 옛날 프롤레타리아들에게 고삐를 바짝 조이라고 명령하던 사이렌 소리 같다.”(프리데리크 시프테, <우리는 매일 슬픔 한 조각을 삼킨다>, 24쪽)

천둥 같은 알람 소리가 단잠을 깨운다. 우리를 일터로 내모는 것은 고용주들의 고함이 아니라 알람시계들이다. 불행은 그렇게 일하면서도 빚과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데 있다. 주택담보대출이나 제 소득을 넘는 신용카드 사용액을 메우지 못해 연체를 하고, 그것을 갚으라는 압박을 받는다. 자본주의는 모든 걸 도박으로 만든다. “저축은 도박이고, 미래를 위한 경력 관리나 연금은 판돈이 큰 도박이다.”(존 그레이, 앞의 책, 206쪽) 카지노 자본주의 세계에서는 1%의 부자와 99%의 빈곤 계층으로 나뉜다. 한때의 중산층이 속수무책으로 무너지며 빈곤 계층으로 전락하는 것은 세계적 현상이다. 미국과 서유럽에서 중산층은 다 망했다. 일본도 마찬가지다. 한국에서 중산층은 실체 없는 정치가들의 워딩이거나 미디어 용어로 잔존할 뿐이다. “중산층은 자본주의가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는 사치다.”(존 그레이, 앞의 책, 206쪽) 1%를 제외하고 나머지 99%는 빈곤층이다. 중산층이 빠르게 몰락하며 사라진다. 중산층이 사라지는 현상은 자본주의의 궤멸 징후 중의 하나다.

중산층은 자본주의가 감당할 수 없는 사치


▎직장인들은 자본주의 시스템에 말려들어가면서 하나둘 타임 푸어로 전락한다. 과로는 타임 푸어의 삶에 따라붙는 일종의 옵션이다. 한 직장 남성이 사무실에서 지친 표정을 짓고 있다.
지구상에서 중산층이 잔존하는 것은 스웨덴·노르웨이·핀란드·덴마크와 같은 북유럽 국가뿐이다. 그들이 특별한 능력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적어도 그들은 ‘진보의 신화’ 따위에 홀리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양과 규모보다는 삶의 질을 추구하고, 그보다는 실질적인 삶에서의 평화와 조화를 더 높은 가치로 여기고 그것에 충실한 삶을 살았다. 덴마크 사람들의 예를 보자. “덴마크는 노동시간이 길지 않은데도 생산성이 높은 나라로서 생산성 순위가 미국 바로 다음이다. 실업률은 낮은 편이고 삶의 질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브릿지 슐트, <타임 푸어>, 348쪽)

삶의 질이 높다는 것은 일과 삶이 균형을 이루고 있다는 뜻이다. 많은 덴마크 사람이 삶을 에워싸는 가속도를 늦추고 제 생체 리듬에 맞춰 단순하게 살아간다. 하루 일정에 대한 통제권을 남에게 주지 않고 스스로 거머쥔다. 많은 나라에서 사람들은 ‘저녁이 있는 삶’을 잃어버린 채 살지만 덴마크 사람들은 집중해서 일하고 더 많은 저녁 시간을 가족과 함께 보낸다. 그들은 ‘저녁이 있는 삶’의 시간을 신성불가침의 것으로 만들고 온전하게 누린다. “덴마크 사람들에게 오후 5시부터 8시까지의 시간은 신성불가침에 가까운 가족의 시간이다.”(브릿지 슐트, 앞의 책, 340쪽) 덴마크에서 상점들은 오후 7시가 넘으면 문을 닫고, 일요일에는 문을 열지 않는다. ‘저녁이 있는 삶’은 사회공동체의 합의로 만들어낸 것이다. 그들은 단순하고 소박한 삶을 꾸리면서 ‘지금 이 순간’의 삶을 누린다. 지금 이 순간에 몰입하는 것, 덴마크 사람들은 이것을 ‘휘게(hygge)’라고 부른다. 가족과 함께 지낼 때는 그것에 충실하고, 차를 마실 때는 진짜로 차를 즐긴다. 행복은 멀리 있지 않다. 지금 이 순간을 뒤로 유예하지 않고 온전하게 누리는 게 행복이다. 덴마크 사람들이 누리는 행복의 비결은 단순하다.

‘휘게’, 지금 이 순간을 누려라


▎1. 1960년대에 등장한 히피들은 잉여와 욕구로 대변하는 자본주의에 저항했다. 1969년 8월 미국 뉴욕 주에서 열린 우드스톡 페스티벌에 15~25세 히피족들이 떼를 지어 모여들고 있다. / 2. 덴마크·스웨덴 같은 북유럽 국가는 아직도 중산층을 보유하고 ‘저녁이 있는 삶’을 누린다. 물질보다 삶의 질을 추구한 결과다. 한 가족이 야외에서 음식을 먹으며 소풍을 즐기고 있다.
왜 우리는 이런 방식들을 잃어버리게 되었을까? 타임 푸어로 전락한 탓이다. 타임 푸어들은 일상에서 항상 시간의 압박을 받으며 산다. 항상 시간이 부족하고 시간에 쫓기는 탓에 나만의 여가 시간이나 놀이 시간은 상상도 하지 못한다. 자본주의와 첨단기술은 항상 삶의 속도를 더 높인다. 이 시스템에 말려 들어가면 누구나 타임 푸어로 전락하는데, 과로는 타임 푸어의 삶에 따라붙는 일종의 옵션이다. 이때 삶은 마치 “달리는 기차에 매달려 있기”와 같이 위태롭다. 초당 1400만 비트 정도로 정보를 처리하는 이 가속도의 세계 속에서 과도한 일에 쫓기고 피로가 누적되고 건강은 나빠진다. 이 속도는 속수무책으로 우리 생체 리듬을 초과한 것이다. 당장 심장과 간, 뇌와 신장 등에 과부하가 걸릴 게 분명하다. 이것에 맞서려면 삶의 방식을 과감하게 바꿔야 한다.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일하고 사랑하고 놀 시간이다. 하루하루에 의미를 부여하라. 행복이란 거창한 것이 아니다. 좋아하는 꽃 한 묶음, 음반, 책 한 권을 사는 따위의 작은 사치를 주저하지 마라. 평범한 날들에 겪는 사소한 일들에서 만들어지는 아늑한 감정의 총체가 곧 행복인 것을! 물질을 따르고 규모를 키우는 삶의 압력들에 저항하라. 대부분의 사람이 이 길을 따라가다 막다른 골목과 마주친다. 무엇보다도 시간을 낭비하지 마라. 돈·권력·지위·물질만을 따르고 그것에 몰입하는 것은 어리석고 낡은 인생의 방식이다. 그것이 공허함에 대한 좋은 대안이 아니라면 그것과 과감하게 작별하라. 모든 형태의 두려움·걱정·속박에서 벗어나라. 이것들은 영혼만을 갉아먹을 뿐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다.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지금 이 순간의 삶을 향유하라. 지금 이 순간의 삶이야말로 진짜 삶이다. 삶의 하중을 더 무겁게 만드는 과잉에의 유혹에서 벗어나라. 적게 벌고 적게 써라. ‘미니멀 라이프’, 즉 단순한 방식을 따르라. 느긋하게 살면서 사유하고 성찰하라.

장석주 - 전업작가. 충남 논산 출생. 1979년 조선일보·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와 문학평론 당선으로 등단했다. <월간문학> 신인상(1975년)과 해양문학상(1976)을 수상했다. ‘고려원’ 편집장을 거쳐 청하출판사를 운영했다. 지금까지 시집, 비평집, 인문서 등 70여 권을 펴냈다. 대표 저서로 <일상의 인문학> <마흔의 서재> <철학자의 사물들> 등이 있다.

201510호 (2015.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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