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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중분석 와이드 인터뷰] 이광재가 말하는 문재인·안희정의 대권 경쟁력 

“열망 강하고 연설문 직접 쓰는 사람이 기회 잡을 것” 

한기홍 월간중앙 기자 사진 김현동 기자
독자적 책임에 대한 자각은 연설문을 직접 쓰는 행위에서 비롯… 안희정·남경필·원희룡 등과 보수·진보 연정의 정치 탐구하기도

▎이광재 전 강원도지사는 인터뷰를 통해 “개혁은 좋지만 난장판은 안 된다는 생각이 확고해야 진보의 미래가 있다”고 말했다.
고(故) 노무현 대통령의 오른팔로 불렸던 이광재 전 강원도지사가 <월간중앙>과 4시간에 걸친 인터뷰에 응했다. 그는 2011년 1월 지사직에 물러난 이후의 삶과 한국 정치의 내일을 말했다. 재선 국회의원을 지낸 이 전 지사는 2010년 6월 강원도지사에 당선됐다. 2011년 1월 정치 자금법 위반 혐의에 대한 대법원 확정판결을 받으면서 지사직을 잃었다.

2011년 홀연히 중국 베이징으로 유학을 떠난 그는 이듬해 7월 중국 고위인사와 학자 등 중국의 ‘실세’들과 인터뷰한 내용을 정리한 <중국에게 묻다>를 펴내기도 했다. 그는 노무현 대통령이 집권한 2003년 무렵부터 중국 공산주의청년단 출신 젊은 지도자들과 교류를 갖기 시작했다. 2013년에 <중앙선데이>에 연재한 릴레이 인터뷰 ‘원로에게 묻다’를 정리해 지난해에 <대한민국 어디로 가야 하는가>란 제목의 단행본을 펴내기도 했다.

이 전 지사는 향후 한국정치의 활로를 ‘연정의 실현’에서 찾는다. 좌우, 진보와 보수의 통합을 지향하는 바, “그 문제의식은 안희정 충남지사, 남경필 경기도지사, 원희룡 제주도 지사 등과의 오랜 토론과 교유를 통해 더욱 심화됐다”고 그는 밝혔다. 최근에는 자신의 학문적 에너지를 ‘세계 각국의 흥망사’란 주제에 쏟고 있다. 성균관대·연세대 등에서 강의하며, 그 내용을 집대성한 대작의 단행본을 기획 중이다.

노무현 대통령의 일급 기획통답게 그는 교육, 삼림, 군개혁 등에 대해서도 다양한 아이디어를 쏟아냈다. 현실정치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지만 비슷한 연배의 ‘대권주자급’ 동료들과 한국정치의 미래에 대한 토론을 이어가고 있다. 그가 차세대 리더들과 구축한 정치 네트워크가 어떤 내용의 정치 혁신을 견인해낼지 지켜볼 일이다. 이광재 전 강원지사는 강원도 평창 출신으로 연세대 법학석사, 대통령비서실 국정 상황실장, 제17·18대 민주당 국회의원, 제35대 강원도지사를 지냈다.

아시아인으로 살아가고 싶다


▎이광재 전 지사는 “저출산 고령화의 문제도 결국 남북협력의 틀 안에 해결의 실마리가 있다”고 주장했다.
도지사 직에서 물러난 후 어떻게 지냈나?

“도지사 직을 그만두고 매일 산을 다녔다. 어느 날 아침 화장실에 가니 입 안에 피가 가득 고였다. 잠잘 때 이를 너무 악물고 자다 보니 이가 깨진 것이었다. 몇 달간 임플란트 수술을 받았다. 이렇게 살아선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미뤄둔 중국 공부를 하기로 결심하고 중국 베이징 칭화대에 적을 뒀다. 사마천과 덩샤오핑의 삶을 깊이 들여다봤다. 죽음과 궁형 중 무엇을 택한 것인가 고민했던 사마천의 인생에서 깨달음을 얻었다. 한탄만 할 게 아니라 어려움을 딛고 사마천이 <사기>를 쓰기로 결심했듯, <국가의 흥망론>을 써보자고 결심했다. 책도 많이 읽었고, 연세대에서 강의도 열심히 했다. 조만간 그 결실이 책으로 엮어져 나올 것 같다.”

중국을 택한 이유는?

“우리나라에 미국 전문가는 많다. 그러나 중국에 대한 이해는 아직 부족하다. 2002년 인수위 시절부터 중국과 러시아에 관심이 많았다. 2차대전 때 처칠 영국 수상은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에게 830통의 편지를 보냈다. 우리도 우방국의 지도자와 ‘실질적인’ 네트워크를 형성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중국과 중국인이 거대한 산처럼 눈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 산의 실체를 알고 싶었다. 여야 의원들과 함께 중국의 젊은 지도자를 많이 만났다. 내치에 대한 견해는 달라도 외교·국방 문제에 대해서는 여야가 인식을 공유하는 것이 국익에 부합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간 강원도에서는 진보 정치인이 나오기 힘들었다. 소중한 정치자원이 사라졌다는 아쉬운 평가도 있다. 올해 광복절 특사 가능성도 거론된 적도 있다. 정치권 복귀를 도모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현실정치에는 관심이 사라졌다. 해보는 말이 아니란 걸 알아줬으면 좋겠다. 강원도 평창이란 벽촌에서 태어나 젊은 나이에 청와대 국정상황실장, 국회의원 두 번, 도지사까지 지냈다. 강원도민들에게 과분한 사랑을 받은 것이다. 그것으로 족하다. 꿈이 있다면 남북한 인구 1억이 되는 통일한국에서 죽고 싶다는 것, 아시아인으로 살아가고 싶다는 것이다. 정치권 복귀는 아직 가능하지도 않고 그럴 생각도 없다.”

5개월간의 짧은 재직이었지만 강원도지사로서의 회한이 깊다고 들었다. 보람을 느꼈던 일, 후회가 되는 일을 꼽는다면?

“임기를 못 마친 것이 도민에게 우선 송구한 일이다. 그분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지만 제대로 보답하지 못했다. 재직 중 구제역 때문에 많은 소를 살처분한 것에 대한 죄의식도 깊다. 중앙정부의 방침에 따른 것이었지만 생명에 대한 사랑과 존중을 훼손한 일임에는 틀림없다. 뿌듯하게 생각하는 건 동계올림픽 유치와 관련해서다. 유치 캠페인 방식에 감동이 부족하다는 점에 착안해 도민 남녀노소를 구성된 합창단을 만들자는 제안을 했다. 실사단장이 스웨덴 사람이어서 스웨덴의 인기 팝그룹 ‘아바(ABBA)’의 ‘I have a dream’을 부르자는 아이디어를 생각해냈다. 실사단이 온 날 평창에 폭설이 내렸는데 그들이 체육관 문을 여는 순간 2018명의 도민이 부른 장엄한 합창이 시작됐다. 실사단과 도민이 엉켜 모두 울었다. 이 아이디어가 유치에 작은 보탬이 되었을 것이란 뿌듯함이 지금도 있다. 실사단이 오기 직전 대법원 최종 판결이 나와 현장에는 가보지도 못하고 멀리서 이 광경을 보았다.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던 기억이 난다.”

‘ 내버려둬, 그 사람도 프랑스다’


▎2010년 민주당 광역시도지사 정책간담회에서 만난 이광재 강원도지사(왼쪽)와 안희정 충남도지사. / 사진·중앙포토
공약 잘 지킨 정치인으로 자주 거론됐다. 강원도지사에 도전할 때 강원도를 어떻게 변화시키고 싶었나?

“아버님 함자가 ‘강’자 ‘원’자다. 자연스럽게 나는 ‘강원의 아들’이 되었다. 유세 때 이런 말을 했다. ‘국민 밥 먹여주는 것은 여당·야당도 아닌 식당이다’, ‘공부시키는 것은 서당이고 노인복지는 경로당이다.’ 결국 내 이웃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정치의 본질이라고 봤다. 일자리·복지·교육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교육이라고 봤다. 기회의 평등을 주는 것이 교육이니까. 폐교 위기에 몰렸던 초등학교를 부활시키고 대학 캠퍼스를 개방해 중고생의 학습공간으로 만들었던 실험이 대성공을 거뒀던 생각이 난다. 강원도에 조례를 제정해서 자체 수익의 10%를 교육에 투자하도록 했는데, 그 모델은 전국의 거의 모든 지자체가 따라 하고 있다. 다른 거창한 공약보다 교육에 투자하겠다는 사람을 뽑는 게 좋다. 사교육의 폐해가 도를 넘었고, 사람은 결국 교육이란 사다리를 통해 주어진 운명을 극복하니까 말이다.”

박근혜 대통령 취임 이후의 국정운영은 긍정과 부정, 양극단의 평가가 나온다. 어떻게 보고 있나?

“대통령께서 프랑스의 보수주의 정치인 드골을 참고했으면 좋겠다. 마음의 넉넉함이다. 진보적 성향의 앙드레 말로를 문화부장관으로 오래 기용했다. 알제리 독립운동이 격화되었을 때 사르트르가 알제리 독립자금 전달 루트라는 것을 알고도 그를 용인했다. 강경론자가 사르트르의 처벌을 건의하자 ‘내버려둬, 그 사람도 프랑스다’라고 했던 말이 지금도 회자된다. 큰 틀 안에서 국가를 운영하는 대범함이 아쉽다.”

남북관계의 진전이 이뤄지지 않은 것에 대한 비판적 관점도 존재한다.

“박 대통령의 통일대박론, 유라시아 이니셔티브의 기본방향은 옳다고 본다. 남북문제 푸는 건 보수가 유리하다. 남남갈등을 잠재울 수 있는 쪽이 보수다. 닉슨도 한때 극우에 가까운 정치인이었지만 결국 중공과 수교하는 데 성공했다. 정경 분리적 관점이 필요하다. 남북간에도 그렇고 주변국에도 적용된다. 지정(地政)학에서 ‘지경(地經)학’으로의 이행이다. 6자회담이 별 성과가 없는데 이 틀을 경제 6자회담으로 전환해보면 어떨까? 한·중·일 에너지 협력사업 같은 것은 결실이 클 것이다. 남북정상회담도 하긴 해야 하는데 마땅한 루트가 없다면 교황이나 유엔 사무총장을 메신저로 활용하는 방법이 있을 것이다. 임기 끝나기 전 반드시 전환점이 있을 것으로 본다.”

러시아 가스관의 북한 통과 아이디어 등은 상당한 현실성과 함께, 파급력도 굉장히 큰 것으로 평가된 바 있는데….

“러시아 가스관을 통한 국내 공급은 우리에게 주는 이익이 크다. 많게는 에너지 비용을 15∼20%까지 줄일 수 있다고 한다. 러시아 가스를 전체 사용량의 10∼20%를 사용한다면 북한에 가스 통관비로 매년 1천억~2천억원을 줘야 한다. 퍼주기 아니냐는 논란에 휩싸일 것을 걱정하는데 그것을 극복할 아이디어로 북한에 가스발전소를 지어주는 방안이 있다. 철도와 가스관을 북한과 연결하면 부산이 동북아 최고의 도시로 다시 태어날 것이다.”

통일은 어느 날 갑자기 새벽처럼 온다는 말도 있다. 박 대통령의 통일대박론 속에서도 그런 뉘앙스가 감지되지 않나?

“중국 사람들은 통일을 너무 서둘지 말라고 조언한다. 대만과 중국처럼 안정적으로 가는 편이 좋다는 조언이다. 그 말에 공감한다. 급격한 통일은 위험하다. 남북한을 두 개의 회사로 본다면 북한주식회사가 어느 정도 부채를 줄이고 이익이 남아야 합병의 효과가 있다. 북한 경제가 좋아질수록 통일비용은 줄어든다. 경제가 좋아지면 북한에도 베이비붐이 일 것이다. 젊은 한반도의 인구가 1억이 될 수 있다.(중국 조선족과 고려인 포함) 저출산 고령화의 문제도 결국 남북협력의 틀 안에서 해결의 실마리가 있다.”

중대선거구 해야 큰 정치인 나온다


▎2007년 4월 2일 노무현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한·미 FTA 타결 대국민 담화를 하기에 앞서 밝은 표정을 짓고 있다. 노 대통령은 지지자들의 거센 반대를 무릅쓰고 한·미 FTA를 적극 추진했다. / 사진·중앙포토
남북의 철도 연결은 양측의 의지만 있다면 적은 비용으로 시작할 수 있는 일 아닌가? 부족한 상호 신뢰가 아쉬운 국면이다.

“일본 지도자 중엔 홋카이도와 러시아를 철도로 연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매우 힘든 과정일 것이다. 그러나 남북한을 연결하는 철도보다 먼저 홋카이도-러시아 철도가 열린다면 그건 우리 입장에서 굉장히 뼈아픈 역사의 변곡점이 될 것이다. 지도자는 이런 큰 흐름을 유심히 관찰하고 결단이 필요할 땐 결단을 내려야 한다.”

유승민 전 새누리당 원내대표의 행보가 최근 국내 정치권의 빅 이슈다. 그는 보수 정치권 안에서 나름 독자적인 행보를 보여 줬다. 우선 박 대통령과의 관계설정에서도 헌걸찬 모습을 보여준 게 인상적이다. 외교안보는 보수적인 스탠스로, 경제에 있어서는 복지중심의 정책을 내걸고 있다. 그가 과연 내년 총선에서 살아 돌아올 수 있느냐가 초미의 관심사가 됐다. 유승민 의원의 그간 행보를 어떻게 봤나?

“국내정치의 정파적 갈등과 그 흐름에 대해서는 크게 할 말이 없다. 다만 일본의 경제학자 오마에 겐이치가 했던 말이 생각난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일본이 소선구제를 하면서 큰 정치인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한국도 소선구를 하면서 정치인의 스케일이 작아졌다. 중대선거구의 도입을 이제 검토할 때가 됐다. 중대선거구를 도입하면 당론에 반대되는 주장을 펴도 자기 색깔만으로 당선될 가능성이 커진다. 당론에만 충실해야 살아남는 지금의 폐해를 극복할 수 있다. 요즘에 툭하면 나오는 소리가 여당은 경상도, 야당은 전라도 물갈이론이다. 경상도·전라도 국회의원이 무슨 죄를 지었나? 공천만 하면 안정적으로 당선되니까 소위 전략공천이란 외피를 쓰고 물갈이에 대한 의혹도 더 커진다. 소신을 지키는 정치인이라면 정당이라는 굴절 과정 없이 제대로 평가받을 수 있는 시스템이 나와야 한다.”

선거를 의식한 타협의 길 아닌가?


▎2010년 7월 1일 이광재 강원도지사 취임식. 당시 이 지사는 교육정책을 최우선으로 강원도정의 밑그림을 그렸다. / 사진·중앙포토
소선구제가 진보적 역할을 수행했던 시기가 있지 않았나? 전두환 체제의 균열에도 큰 역할을 했다.

“산업사회에서는 자본과 노동의 대결이라는 이분법이 유용했다. 그러나 지식정보사회에서는 다양성과 다원화가 본질이다. 그런 의미에서 다당제가 올바른 방향이라 본다. 합치고 연합할 수 있는 완충지대가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경제에서는 중산층이 중요하고, 정치에서는 중도가 중요한 시대다. 그래야 국가가 정치, 경제적으로 안정된다. 중선거구제 하면 야당에 불리하다는 분석도 있다지만 나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국민의 성숙한 정치의식을 이제 신뢰해야 한다.”

야당인 새정연 안에는 소위 친노와 비노의 갈등이 첨예하다. 2012년 대선에서 패배한 문재인 대표의 정치적 책임론은 여전히 잠복해 있다. 결코 질 수 없는 선거에서 패배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안희정 충남지사에 대한 기대감이 나온다. 물론 그 기대감이 아직 ‘용출’의 단계는 아니다. 문재인과 안희정, 어떻게 경쟁해야 하며 누구를 주목해야 하는가?

“결국 야당 후보 그룹은 문재인, 박원순, 김부겸, 안희정 등이 아닌가 싶다. 문재인과 안희정의 대권 경쟁력을 논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지도자라는 사람은 원래 고독하다는 것을 먼저 말하고 싶다. 왜 고독한가? 현실에서도 이겨야 하고, 역사에서도 승자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두 길 모두 쉽지 않다. 굉장한 단련과 통찰이 필요한 길이다. 정치인 시절 간혹 선거를 도와달라고 부탁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나는 그들에게 자신이 왜 그 선거에서 당선돼야 하는지를 A4용지 한 장으로 써오라고 했다. 과연 절실함이 담겨 있는가를 보기 위함이다. 대통령도 마찬가지 아닐까? 내가 왜 대통령이 되어야 하는지 그 꿈이 간절한 사람이 대통령이 된다. 그리고 자기 연설문을 자기가 쓰는 사람이 기회를 잡을 것이다. 문재인 대표와 안희정 지사 두 사람을 놓고도 마찬가지다. 더 강렬한 열망을 가진, 연설문을 스스로 쓰는 사람이 목표에 근접했다고 본다. 결국은 자기와 대화, 역사와 대화해야 한다. 고독한 자신과 직면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이 파악한 시대정신을 직접 써서 대중과 소통해야 한다. 직접 쓰지 않은 연설문은 아무런 힘이 없다. 다만 매끄럽기만 할 뿐이다. 그 두 가지를 가진 사람이 시대의 주인공이 된다고 본다.”

안희정 지사와는 오랜 우정을 나눴다. 과연 차기냐 차차기냐에 대한 설왕설래가 있지만 안 지사는 차기 출마를 결심한 것으로 보는 사람이 많다.

“어느 구름에 비가 들어 있는지 알 수가 없다. 드골 대통령은 11년간 은둔 생활을 하다가 정계에 복귀하기도 했다. 덩샤오핑은 세 번이나 실각했다. 마오쩌둥의 감시 아래 매일 집안을 맴돌아 그곳엔 풀이 나지 않을 정도였다고 한다. 깊은 사색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안 지사도 지금 그렇게 하고 있을 것이다. 작은 배터리를 자꾸 소진하면 곤란하다. 에너지는 선거공간에서도 생길 수 있지만 역시 자신과 응시하는 용기와 힘을 통해 축적된다. 유권자들은 이제 담론만으로 설득할 수 없다는 점을 안 지사도 아마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대통령 꿈 있어야 골프장 덜 간다


▎이광재 전 지사는 “여야의 지도자들 중 누가 집권하더라도 서로 연정을 이루게 하는 것이 꿈”이라고 말했다.
한국정치에서 열망의 강도가 높지 않은 사람이 대통령 자리에 오른 경우는 없다. 그런데 연설문을 직접 써야 한다는 말은 좀 생소하다.

“1988년 노 대통령이 초선 의원 시절 대정부질의를 할 때 기가 막힌 연설을 한 적이 있다. 우리가 자료를 챙겨드렸지만 연설문은 직접 쓰더라. 그때 노 대통령이 그 말을 했다. ‘연설문을 직접 쓰는 사람이 지도자다.’ 지도자와 지도자가 아닌 사람의 차이는 직접 쓰느냐 대필시키느냐의 차이라고도 했다. 스스로 구상할 줄 아는 능력, 독자적 책임에 대한 자각이 연설문을 직접 쓰는 행위에서 비롯된다고 보는 시각이다.”

안희정 지사의 유연한 행보가 눈길을 끈다. 이승만과 박정희 두 대통령의 역사적 공헌에 대해서도 일정부분 평가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그의 이런 변화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시각도 있다. 선거를 의식한 타협의 길을 가고 있다는 비판이다. 문재인 대표도 2012년 대선 때 조금만 더 오른쪽으로 갔더라면 승리했을 것이란 생각을 갖고 있는 것 같다. 두 사람이 좌와 우의 산술적 평균을 추구하는 측면이 보인다는 지적에 대해서는?

“미 루스벨트 대통령은 대공황을 맞아 반독점법 등 케인스적 정책을 추진해 위기를 극복했다. 물론 아니라는 주장도 있긴 하다. 당시 루스벨트의 왼쪽에는 사회당과 공산당이 있었다. 그런 사람들이 있었기에 루스벨트의 진보적 정책은 성공할 수 있었다. 아마도 그가 더 왼쪽으로 갔으면 실패했을 것이다. 문재인과 안희정을 회색인으로 보는 시각엔 찬성하기 어렵다. 중도와 중용은 다르다. 보수·진보 모두 시대의 낙오자가 되지 않으려면 변해야 한다. 보수는 복지를 생각해야 하고 진보는 성장과 생산성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보수는 통일을 생각해야 하고, 진보는 통합을 생각해야 한다. 개혁은 좋지만 난장판은 안 된다는 생각이 확고해야 진보의 미래가 있다. 국제관계에 있어서도 보수는 중국을 연구해야 하고 진보는 미국을 연구해야 한다. 미국 실리콘밸리의 연간 매출은 2조7천억 달러다. 한국 GDP 1조4천억 달러의 두 배에 가깝다. 미국의 힘과 역동성을 진보가 배워야 한다. 막연히 섞는 것은 아니지만 수렴돼야 하는 것만은 분명하다.”

안희정 지사가 차기 대선에 출마하겠다, 이렇게 치고 나올 때 그것을 진보 세력 안에서의 하극상이라고 볼 수도 있을까?

것을 진보 세력 안에서의 하극상이라고 볼 수도 있을까? “정치는 뭐든 결단의 문제다. 결국은 깊이의 문제라고 본다. 멀리, 정확히 보는 능력이다. 김부겸, 안희정, 송영길, 김영춘, 임종석 그리고 내가 10년 전에 만나 나눈 말이 있다. ‘정치를 왜 하느냐. 결국 대통령에 도전해 나라의 운명을 바꿔보려 하는 게 아니냐. 대통령에 도전하는 꿈을 갖고 대통령의 관점에서 정치를 봐야 사고가 단련되고 진화하는 것이다. 그런 각오가 있어야 공부를 하고, 그런 각오가 있어야 골프장을 덜 간다’라고 했다. 2010년 지방선거 이후 안희정 지사 공관에 도지사·시장이 모인 자리에서는 내가 제안했다. ‘나중에 한번 멋지게 경선하자, 전국 단위 경선이 가능한 게 아니냐….’ 대통령에 나가겠다는 생각을 갖는 게 불손한 게 아니다. 대통령의 자리만을 탐내는 게 아니라면 부단히 자신을 훈련하고 도전하는 것은 기본이다. 안희정 지사 역시 지금 열심히 학습하고 준비하지 않을까?”

김무성 대표는 문재인 대표와 함께 대권에 가장 근접한 후보로 평가된다. 그런데 최근 김 대표 부친의 친일행적 의혹이 제기되어 곤혹스러워 한다. 정치인과 그 윗세대의 친일, 마치 연좌제와 같은 이 논란을 어떻게 봐야 할까?

“친일의 문제, 엄혹한 식민지 시대를 겪었기 때문에 뭐라 정의하기 쉽지 않다. 그러나 누군가에게 친일 낙인을 찍는 것은 자칫 테러행위가 되기 쉽다. 종북좌파, 수구꼴통, 친일파 이런 말이 횡행하는 현실에 개탄한다. 서로에 대한 존중감이 없다. 기억해야 할 사례들이 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 입구엔 ‘용서하자, 그러나 잊지는 말자’는 말이 적혀 있다. 베트남전을 감내한 베트남 지도자들은 ‘미래를 보자’고 말한다. 1985년 빌리 브란트 독일 총리는 폴란드를 방문해 유태인 희생자 위령탑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의 이런 행위는 독일을 비루하게 만든 것이 아니라 위대하게 만들었다. 지나간 과거와는 이렇게 화해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정치하고 담을 쌓았다고 했지만 그 말을 온전히 믿지는 않는다. 언젠가 기회는 올 것이고, 아이디어가 풍부하고 기획능력이 출중한 만큼 정치현장의 유혹이 있을 듯하다.

“정치를 꼭 내가 해야 한다는 생각은 없다. 나 없으면 안 된다는 건 없다. 대한민국 정치 그래서 많이 망했지 않나? 지금은 내가 무엇이 되겠다는 꿈은 접었다. 평창동계올림픽이 열리면 고향인 평창에서 연설하는 꿈을 접었다. 지금 나의 꿈은 여야의 지도자들이 경쟁하고 누가 집권하더라도 서로 연정을 이루는 것이 꿈이다. 김부겸·원희룡·안희정·남경필 등과 같은 분이 여야가 함께하는 기회를 가졌으면 좋겠다. 내치에 대한 구상은 달라도 외교와 남북문제는 같은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공감대가 있다. 그런 분들이 함께 모이고, 잘 되는 일을 만들 수 있다면 나는 그분들을 돕고 싶다. 여야가 함께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

“연정 하면 나라가 바뀐다”는 말이 신선하다. 무슨 뜻인가?

“우선, 우리 정치엔 간절한 꿈이 없다. 꿈이 없으니까 싸움이 잦다. 둘째는 권력과 정치가 이혼한 상태다. 권력을 잡는 데 모든 역량이 집결된다. 35%(70% 투표율의 51%) 지지로 당선된 후 권력은 100% 휘두른다. 이걸 극복해야 한다. 권력은 있어도 무엇을 할 것인가를 제대로 결정하지 못하는 것이다. 권력과 정치가 재결합하는 게 중요하다. 독일처럼 해야 한다. 독일은 세 번의 대연정을 했다. 독일은 누가 정권을 잡든 일관된 정책의 흐름이 있다. 그게 연정의 힘이다. 예측 가능한 정치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보수는 복지 문제를, 진보는 생산성 향상을 각각의 의무로 삼아야 한다. 그게 연정의 정신이다.”

노 대통령, “박근혜 대표에게 총리 자리 주자”고 제안


▎2010년 7월 6일 이광재 강원도지사가 2018평창동계올림픽 유치 결의대회에 참석해 홍보대사들과 건배하고 있다. / 사진·중앙포토
35% 지지로 100%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데 누가 연정을 하려 하겠나?

“메르켈 총리는 최근 두 번에 걸친 대연정을 했다. 100대 0의 권력구도를 만들어 국회에 연일 싸움판 만들고 대통령은 하고 싶은 일 30%밖에 못하는 게 낫나? 30%의 권력을 내주고 60%의 일을 하는 게 나은가? 후자가 낫다고 본다. 매출액 100억짜리 회사의 주식 100%를 갖기보다 매출액 100조 짜리 회사의 60% 주식이 나은 법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임기 중 연정을 제안했던 것이 떠오른다. 정치적 노림수를 의심한 당시 야당이 받지 않았다. 연정 제안과 실패는 굉장히 큰 정치적 상처로 남았다. 당시 상황을 어떻게 보았나?

“처음 당선자 시절 고건 씨를 초대 총리로 임명하겠다고 한 것도 야당 협조에 대한 불안감 때문이었다. 참여정부와는 색깔이 다른 인물 아니었나? 당시 노무현 당선자는 이회창 후보를 만나고 싶어 했다. 대선 당시의 갈등을 털려고 했는데 이 후보는 안 만나주고 대선 재검표에 들어갔다. 냉랭한 관계로 대화가 안 풀렸다. 야당은 대북송금 특검 안 하면 고건 총리 인준 안 하겠다고 했다. 정부는 출범시켜야 하고…. 서리 체제로 막 나갈 수는 없었다. 남북대화 의지가 없다는 비판도 받았지만 어쩔 수 없이 대북송금 특검요구를 받아야 했다. 노 대통령은 결국 권력의 일부를 내놓기로 결심했다. 나와 안희정 등 측근 몇 사람을 불렀다. 연정 제의를 하겠다고 해서 모두 반대했다. 일주일 후 다시 부르더니 울리히 벡의 <적이 사라진 민주주의>란 책을 나눠줬다. 노 대통령은 ‘한나라당 협조 없으면 정국 운영 안 돼. 그러지 말고 박근혜 대표에게 총리 자리 주자. 상임위원장과 장관도 주자. 100%를 다 가질 수 없다’ 이렇게 말했다. ‘자신이 바라는 대로 100% 바꿀 수 있는 그런 세상은 없다’는 것이 노 대통령의 오랜 지론이었다.”

베스트 프렌드를 꼽는다면?

“안희정 충남지사, 남경필 경기도지사 두 사람이다. 선배지만 김부겸 전 의원은 각별히 좋아한다.”

안희정과 김부겸, 남경필과 원희룡 등의 연대와 결합은 굉장한 이슈가 될 것 같은데, 결국 각 당의 세대 교체가 필요한 것일까?

“세대교체처럼 대결적인 이슈는 의미가 없다. 지금도 일정부분 자신이 속한 당에서 힘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다. 나이가 많고 적고는 의미가 없다.”

차기 대선에서 안희정과 남경필이 협력할 가능성은?

“알 수 없는 일이다. 나는 연정을 이루려고 하는 사람에게 한 표를 던지겠다. 왜냐면 지금 한국사회의 위기가 너무 절박하기 때문이다.”

연정은 노 대통령 시절에 갖고 있던 문제의식의 연장인가?

“그때는 연정이 현실성이 없다고 봤다. 지금은 중국 러시아 일본 다니면서, 또 각국의 흥망사를 연구하면서 연정의 풍부한 함의를 잘 이해하게 됐다. 미국·중국이 한마디하면 휘청휘청하는 나라다. 여야가 힘을 모아 연정을 통해 멀미하지 않는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 운전대를 잡은 사람은 멀미를 하지 않는다. 회색이 되자는 게 아니다. 수렴되지만 더 스마트하고 합리적인 쪽이 승리를 거둔다. 그래서 좋은 정책을 위한 경쟁은 계속되는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실체가 아닌 표상으로 존재

동계올림픽이 2년 후 개막된다. 그것도 고향 평창에서. 올림픽 때 도지사 자격으로 스피치하고 싶었던 꿈이 사라졌다. 아쉽겠지만 올림픽 성공을 위한 제언이 있다면?

“그간 한국에서 치러졌던 수많은 국제 행사 중 하나로 보면 안 된다. 이 행사를 통해 동북아의 스위스가 되어야 한다. 알프스를 하나 만든다는 생각으로, 정부가 지원해줬으면 좋겠다. 동계스포츠는 중산층 이상의 운동으로 장비가 모두 고가다. 관광은 물론, 기본 브랜드파워를 극대화할 수 있는 계기다. 2017년에는 대통령 선거가 있어 개막식은 박 대통령이 하고 폐막식은 새 대통령이 한다. 개폐막식에 맞춰 시진핑이 두 번 올 수도 있다. 인천 아시안게임에서 보듯 중국 관광객의 대거 방한이 예상된다. 소치올림픽 때는 남북한 봅슬레이 팀을 보내기 위해 많이 노력했다. 반기문 사무총장 밑의 독일인 체육특보도 만났고, 러시아에도 갔다. 체육특보는 북한 관계자들을 모나코에서 접촉했다. 결국은 성사되지 못했다. 남북한 모두 사정이 여의치 않았다. 평창올림픽 폐막식은 한·중·일·러가 같이하는 아이디어를 구상한 적이 있었다. 폐막식은 장예모 감독의 도움을 받아 중국의 ‘인상 시리즈’를 남기면 큰 올림픽 유산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정치인 노무현 대통령을 평가한다면?

“모든 지도와 마찬가지로 좋은 평가와 나쁜 평가가 공존한다. 정치가라기보다 사상가였다. 정치개혁과 서민들의 아이콘으로 계속 살아남을 것 같다. 노 대통령은 스웨덴의 팔메 수상을 좋아했다. 팔메는 국민들의 존경과 흠모를 한 몸에 받았다. 그의 생활은 매우 검소하여 평범한 일반 국민과 다르지 않았다. 팔메는 항상 ‘나는 국민의 일원입니다’라고 되뇌었고, 이는 곧 그의 인생 신조였다. 노 대통령은 지도자가 언제든지 시장통에서 사람들과 토론할 수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인간의 얼굴을 한 정치인의 모습, 그리고 자신의 지지자와 싸우기도 하는 모습이 내 마음에 각인됐다. 노 대통령이 아니었으면 한·미 FTA는 추진하기 어려웠다. 서민들의 삶이 어려워지고 정치에 대한 불신이 커질 때 국민은 그를 찾을 것이다. 그러나 노 대통령은 실체로서가 아니라 표상으로 존재한다. 그래서 친노세력이란 말도 성립되지 않는다. 노무현의 적자라는 말도 성립되지 않는다. 링컨을 좋아하는 사람은 있지만 링컨파가 있는 게 아니듯 말이다.”

- 글 한기홍 월간중앙 선임기자 사진 김현동 기자

201512호 (2015.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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