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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 핫이슈] 아베 총리가 위안부 문제 해결에 미온적인 이유 

‘중국 포위’에만 관심 집중, 차기 좌파 정부와 협상해야 결실 

콘도 다이스케 일본 <주간현대> 부편집장
TPP 가입과 위안부 문제 해결 맞바꾸는 방법도 있어… 한국은 중·일 패권다툼 소용돌이를 지혜롭게 활용해야

▎11월 2일 청와대에서 취임 후 처음으로 정상회담을 가진 박근혜 대통령과 아베 신조 일본 총리. 기대를 걸었던 위안부 문제 해결의 진전은 이뤄지지 않았다. / 사진·중앙포토
한국의 박근혜 대통령과 일본의 아베 신조 총리가 11월 2일 오전, 청와대에서 드디어 2개국 간의 단독 정상회담을 개최했다. 아베 총리는 2012년 12월의 정권 출범 이후, 집무실에 대형 지구본을 두고 지구본에 핀을 꼽듯이 세계를 순방하는 ‘지구본 외교’를 표방해왔다. 그리고 2013년 1월 동남아 4개국 순방에서 ‘아베 독트린’을 발표한 이후, 3년 남짓한 사이에 5대륙을 빠짐없이 섭렵했다. 그가 방문한 나라는 무려 61개국에 이른다. 그런데 우호국 중에서 지금까지 방문하지 못하고 있는 나라가 단 한 곳 있었으니, 바로 이웃인 한국이었다.

11월 1일 정오를 조금 앞둔 시각, 아베 총리는 62번째 순방지로 드디어 한국 서울의 공군기지에 내려섰다. 박 대통령의 마중이나 의장대의 환영 의전도 없이 쓸쓸한 방문이었지만 어떻든 결국 한국을 방문할 수 있었던 것이다. 여기까지의 3년 남짓한 여정은 얼마나 험난했던가!

2013년 2월 25일,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 광장에서 열린 대통령 취임식의 취임 연설에서 박근혜 신임 대통령은 외교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소신을 피력했다.

“미국, 중국, 그리고 일본과 러시아 등과도 우호관계를 쌓아 갈 것입니다.”

지금까지 이명박 대통령을 포함해 역대 한국 대통령의 취임 연설에서 외교에 관한 문구는 다음과 같이 정해져 있었다.

“미국, 일본, 그리고 중국과 러시아 등과도 우호관계를 쌓아 가겠습니다.”

박 대통령은 중국과 일본의 순서를 바꿔 넣어 ‘중국은 미국에 이은 두 번째’이며, ‘일본은 중국에 이어 러시아와 함께 세 번째’라는 점을 명확히 한 것이다. 이때 아베 총리의 특사로서 매서운 겨울바람이 몰아치는 여의도 국회의사당 광장에 앉아 있던 아소 다로 부총리 겸 재무장관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고 한다.

아소 부총리는 자신이 총리로 재임하던 2008년 12월에 고향인 후쿠오카에서 처음으로 3개국 회의를 개최했다. 방일한 이명박 대통령과 원자바오 총리에게 특대 사이즈의 하카타 인형을 선물하고, 자신이야말로 3개국 간의 조정자라는 자부심이 있었다. 그런데 박대통령의 취임식에서 일본이 중국의 후진(後塵, 뒷먼지)이 된 것이다. 이것은 아소 부총리로서는 ‘있을 수 없는 사태’였다.

아소 부총리가 당한 수모가 강경노선의 도화선?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9월 2일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한·중 정상회담을 마친 후 오찬장인 인민대회당 서대청으로 향하고 있다. / 사진·중앙포토
대통령 취임식 이후 해외에서 온 귀빈들은 청와대를 방문해 취임 축하인사를 담은 친서를 신임 대통령에게 건네주는 관습이 있다. 아소 부총리가 청와대에 도착하자 “지금 박근혜 신임대통령께서는 먼저 오신 귀빈과 만나고 계시다”라는 말과 함께 대기실에서 마냥 기다리게 했다. 그런 체험도 일본의 총리특사로서는 처음 당하는 푸대접이었다.

한국으로서는 최고 귀빈인 미국 대통령은 오지 않았다. 그럴 경우 이명박 대통령 취임식까지는 일본에서 온 총리나 총리특사가 최고 귀빈이었다. 아소 부총리도 당연히 자신이 제일 먼저 박근혜 신임 대통령에게 인사를 전할 생각으로 청와대를 방문했지만 일이 그렇게 되지 않은 것이다.

“먼저 온 귀빈은 누구인가?” 아소 부총리의 물음에 “태국의 인락 총리”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도대체 왜 일본 총리의 친서를 지닌 내가 태국총리에게 밀린단 말인가?” 아소 부총리는 예상치 못한 푸대접으로 인해 굳어버린 얼굴로 박 대통령을 만나고 돌아갔다. 아소 부총리는 귀국하자마자 아베 총리 앞에서 분통을 터트렸다. 이것이 그해 봄에 열린 정기국회에서 아베 총리와 아소 부총리가 역사문제와 관련해 강경 발언을 쏟아내게 하는 복선이 되었다. 박 대통령의 취임식 장면에서부터 박 정권과 아베 정권의 단추는 엇갈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박 대통령은 취임 초기 “가장 중요한 과제인 위안부 문제의 해결 없인 아베 총리와 정상회담을 갖지 않겠다”라고 공언했다. 즉 위안부 문제를 한일관계의 ‘입구’에 둔 것이다. 반면 아베 총리는 “대화의 문은 언제나 열려 있으며, 전제조건 없이 일한 정상회담을 하고 싶다”라는 입장을 견지했다. 즉 일본은 위안부 문제를 ‘출구’에 둔 것이다. 여기서도 또 한번 두 나라의 지도자는 ‘입구론’과 ‘출구론’으로 대립하게 됐다.

아베, ‘한중 밀월’에 대한 질투심 느낀다


▎10월 18일 아베 일본 총리가 미 항모 레이건호에 탑재된 FA-18 전투기 조종석에 앉아 있는 모습. 안보법제 통과 후 미일동맹을 강조하기 위한 제스처로 보인다. / 사진·중앙포토
이런 가운데 아베 총리는 2013년 9월 5일과 6일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열린 G20 회의에 맞춰 박 대통령과의 친선을 꾀하려고 했다. G20 회의에서는 취임한 날짜 순으로 착석하는 관습이 있었는데, 이 관습에 따르면 아베 총리의 취임일은 2012년 12월 26일, 박 대통령의 취임일은 2013년 2월 25일로, 양국의 정상은 옆 자리가 될 것이었다. 옆자리임을 이용해 아베 총리는 박 대통령에게 자연스러운 형식으로 말을 걸고 개인적 관계를 쌓으려고 한 것이다.

그런데 주최국 러시아가 개최 직전에 “국가원수와 비 국가원수의 자리를 구별한다”고 결정했다. 일설에 의하면 이것은 2013년 3월 15일에 취임한 시진핑 주석이 아베 총리와 가까운 자리에 앉고 싶지 않다고 푸틴 대통령에게 부탁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아무튼 이로 인해 비 국가원수인 아베 총리는 국가원수인 박 대통령의 옆자리에 앉을 수 없게 되어버렸다.

이때 아베 총리는 하나의 계책을 생각해냈다. G20회의가 열리는 주 회장에는 비 국가원수가 먼저 도착하고, 대기실에서 국가원수의 도착을 기다린다. 그때, 아베 총리는 대기실 입구를 맴돌다 박 대통령이 입장하자마자 달려들어 악수를 구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아베 총리는 ‘첫 악수’를 획득했지만, 박 대통령은 굳은 표정을 누그러뜨리지 않았다고 한다. 박 대통령 입장에서는 위안부 문제의 해결책을 가져오지 않으면 양국관계를 개선할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그 다음으로 아베 총리가 기회를 노린 것은 2014년 3월 27일에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핵안전보장 회의다. 이때 아베 총리는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을 끼워 들여 한미일 3개국 정상회담을 실현시켰다.

37분 만에 3개국 회의를 마친 후 기자회견에서, 오른쪽에 선 아베 총리는 중앙의 오바마 대통령을 건너 왼쪽에 서 있는 박 대통령에게 “박근혜 대통령님 만나서 반갑습니다”라고 한국어로 인사를 건넸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이 인사를 완전히 무시해 버렸다. 이 영상이 일본에서 반복적으로 방송되면서 일본 국내에서는 박 대통령에 대하여 ‘전례 없이 무례한 한국 대통령’이라는 비난여론이 고조됐다. 어렵사리 실현된 양국정상의 만남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역효과가 나버린 것이다.

같은해 7월 3일과 4일에는 중국의 시진핑 주석이 한국을 방문했다. 이때 한국에서는 중국 국가주석이 처음으로 군사 동맹국인 북한보다 먼저 한국을 방문한 일에 대해 커다란 화제가 됐다. 실제로 북한의 김정은 제1위원장은 이를 갈면서 시진핑 주석의 방한을 지켜보고 있었음이 틀림없다.

그런데 이때 또 한 사람, 시진핑 주석의 일거수일투족을 이를 갈고 지켜보던 인물이 있었다. 바로 일본의 아베 총리다. 일본보다 먼저 중국의 국가주석이 한국을 방문했기 때문이다. 최근 아베 정권이 북한과의 외교에 매진한 것에는 ‘한중 밀월’에 대한 질투심이 상당부분 작용하고 있다.

지난해 11월 10일 베이징에서 열린 APEC(아시아 태평양 경제 협력체)의 만찬에서 일본 측은 박근혜 정권의 ‘변화’를 느끼게 되었다. APEC에서는 나라 이름의 알파벳순에 각국 정상의 자리가 마련되는 관습이 있다. 전년도의 인도네시아 APEC에서는, ‘Japan’의 아베 총리와 ‘Republic of Korea’의 박 대통령은 상당히 떨어진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런데 1년 후 베이징 APEC에서는 박 대통령이 아베 총리의 바로 옆자리에 앉게 된 것이다. 나라 이름을 나타내는 표에는 ‘Korea’라고 쓰여 있었다. 이날 낮, 아베 총리가 시진핑 주석과 최초의 일중정상회담을 진행한 것이 영향을 준 것이라고 일본 측은 이해했다. 일중 관계가 일한 관계를 앞서가는 것에 대해 한국 측이 초조해 하고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아베 총리는 이 시그널을 확인하기 위해 박 대통령에게 자꾸만 말을 걸면서 양국관계 개선의 단서를 은연중에 살핀 것이었다.

2015년 3월 한중일 외무장관회담이 서울에서 실현됐다. 그러나 어떤 사안에서나 위안부 문제가 장벽이 되면서 한일 관계는 한걸음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6월 22일은 한일 양국의 국교정상화 50주년이 되는 기념일로, 이날이 가까워짐에 따라 결국 양국의 ‘비공식 외교루트’가 개입하게 됐다.

양국의 ‘공식 외교루트’는 말할 것도 없이 일본 외무성과 한국 외교부다. 양쪽 부서를 책임지고 관리하는 인물은 사이키 아키타카 외무차관과 윤병세 외무장관으로 양쪽 모두 강골의 강경파다. 이 강경파 지휘관의 관리 아래 지금까지 9차례나 국장급 회담이 진행됐지만, 양국의 깊은 골을 메워지지 않았다.

그래서 총리관저의 야치 쇼타로 국가안전보장 국장과, 청와대의 이병세 대통령비서실장(전 주일대사)이라고 하는 온건파끼리의 ‘비공식 루트’ 교섭이 시작된 것이다. ‘공식 루트’가 위안부 문제를 전면에 내세우며 평행선을 더듬어가고 있었던 것에 비해 ‘비공식 루트’에서는 위안부 문제를 우선 옆으로 비켜두고 양국이 합의할 수 있는 문제부터 상담을 진척시킨 것이었다.

이 ‘비공식 루트’가 훌륭한 성과를 낸 것이 6월 22일 치러진 한일수교 50주년 기념식이었다. 한국대사관 주최로 열린 도쿄의 기념식에는 아베 총리가 출석했고, 일본대사관 주최의 서울에서의 기념식에는 박 대통령이 출석하는 정교한 하모니를 보여준 것이다. 이를 통해 “한국과 일본은 결코 대립 관계에 있는 것은 아니다”라는 메시지를 세계에 보여주는 데 성공했다.

한중일 정상회담, 막후 신경전 치열했다


▎2013년 2월 25일 박근혜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한 일본 아소 다로 전 외상(왼쪽)과 모리 전 총리. 취임식 때 자신이 푸대접을 받았다고 생각한 아소는 이후 역사문제와 관련한 강경발언을 거듭 쏟아냈다. / 사진·중앙포토
이 성공을 토대로 ‘비공식 루트’는 다음 단계로 옮겨갔다. 박 대통령은 9월 3일 베이징에서 개최된 ‘항일전쟁 승리 70주년 기념 군사 퍼레이드’에 참가해 시진핑 주석과 회담이 예정돼 있었는데, 이때 중국을 설득하여 3개국 회의를 서울에서 개최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기회로 ‘내친 김에’, 박 대통령과 아베 총리와의 첫 정상회담을 갖는다는 시나리오를 갖고 있었다. 7월 16일에는 야치 국장이 베이징으로 날아가서 중국 측 카운터파트인 양제츠 국무위원(전 외무장관)과 5시간 반에 걸쳐 사전교섭을 했다. 3년 반 만에 이뤄진 3개국 회의에 대해 중국은 “한국이 리커창 총리만 국빈대우로 초청한다”라는 조건 아래 동의했다.

그런데 이에 일본 외무성이 발끈했다. “어디까지나 3개국이 평등한 것이 개최의 전제조건”이라는 주장이었다. 외무성의 한 관계자는 노골적으로 분노를 나타내면서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국빈 대우를 받는 리커창 총리가 청와대에서 박 대통령과 성대한 만찬을 즐기고 있을 때, 아베 총리는 혼자 명동에서 불고기나 먹고 있으라는 말인가? 이런 무례한 나라에 우리나라 총리를 보낼 수는 없다.”

이 3개국 회의의 일정과 형식을 둘러싸고 한국과 일본은 마지막까지 대립했다. 결국 “10월 31일에서 11월 1일 점심시간까지는 박 대통령은 리커창 총리와 보낸다. 그 후, 오후부터 3개국 회의와 일중 정상회담을 개최한다. 그리고 11월2일 오전에 청와대에서 한일정상회담을 개최한다”라는 방향으로 정리됐다. 단 한국 측의 의향으로 한일정상회담은 공동성명 발표 없음, 공동 기자회견 없음, 회담 후 오찬도 없음이라고 하는 ‘3무회담’이 됐다. 서울 공군기지에서 아베 총리에 대한 마중도 없었던 것을 포함시키면 ‘4무회담’인 셈이다.

덧붙이자면 이때, 아베 총리와 리커창 총리와는 일중 정상회담을 둘러싸고도 대격돌이 일어났다. 그것은 개최 장소에 관해서였다. 일본 측은 아베 총리가 숙박하는 웨스틴조선 호텔에서 개최할 것을 주장했다. 이에 대해 중국 측은 리 총리가 숙박하는 신라 호텔을 개최장소로 주장, 결국 마지막까지 개최장소가 조율되지 못한 채 양국 정상이 서울에 도착했다.

막판에 중국 측이 “아베 총리가 신라 호텔까지 오지 않는다면 이번 중일 정상회담을 개최하지 않겠다”는 최후통첩을 날렸다. 때문에 아베 총리는 정상회담을 취소할지, 신라호텔에 갈 것인지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입장이 돼버렸다. 결국 아베 총리가 한 발 양보하여 신라 호텔까지 갔다. 그 대신 다음 기회에는 일본 측이 장소를 결정할 것이라는 중국 측의 약속을 받아냈다. 회담이 끝난 후에도 리커창 총리는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박 대통령이 주최하는 만찬에 함께 가자는 아베 총리의 권유를 거부했다. 일본 입장에선 한일 관계도 큰일이지만 일중 관계 역시 쉽지 않은 상황에 봉착해 있다.

11월 2일 오전 청와대에서 열린 한일정상회담은 이례적인 형식을 취했다. 우선은 서로 4인 대 4인의 소수회담을 한다. 그리고 나서 전체회담을 한다는 것이다. 소수회담의 일본 측 배석자는 아베 총리와 기시다 후미오 외무장관, 야치 쇼타로 국가안전보장 국장, 그리고 새로 취임한 ‘아베의 대변인’인 하기우다 고이치 관방부장관이다. 그리고 한국 측은 박근혜 대통령, 윤병세 외무장관, 이병기 대통령 비서실장, 김규현 외교안보수석이다.

‘아시아의 맹주’ 다투는 일본·중국의 외교전 꿰뚫어야


▎지난 8월 항일전쟁 승리 70주년 기념 열병식을 앞두고 중국인민해방군 여군 의장대가 시진핑 국가주석의 사진 앞을 행진하고 있다. / 사진·중앙포토
이 ‘8인 회담’의 포인트는 야치 국장과 이병기 비서실장이라는 ‘비공식 교섭 루트’의 주역인 두 사람이 모두 참석한 점이다. 한 시간에 걸친 ‘8인 회담’에서는 위안부 문제가 주로 다뤄졌다.

일본 정부 소식통으로부터 새로 전해들은 이야기에 따르면 박 대통령은 아베 총리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는 47명만이 생존해 계시는데 현재 상당한 고령이다. 한일국교정상화 50주년인 올해 안에 일본 측이 선처해줬으면 좋겠다.”

이에 대해 아베 총리도 “국가의 배상은 50년 전에 이미 해결이 완료됐지만, 일본이 인도적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를 신속히 생각하겠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아베 총리로서는 일본 국내 여론까지 고려했을 때 이 선이 최선의 발언이었다.

앞으로 위안부 문제 진전을 목표로 할 때 한국 측이 생각했으면 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아베 정권이 이 문제에 관해서 왜 이처럼 강경한 자세를 지켜왔느냐는 점이다. 여기에는 조금 긴 설명이 필요하다.

섬나라인 일본은 사방을 바다가 지켜주고 있기 때문에 2000년 가까운 역사 속에서 타국에 영토를 침범당한 일은 단 세 번밖에 없었다. 첫 번째는 1274년과 1281년에 몽골 제국이 규슈에 상륙한 ‘원구(元寇)’였는데, 두 번 모두 태풍의 도움을 받아 몽골 대군은 해상에서 자멸했다.

두 번째는 1419년에 조선이 쓰시마(대마도)를 공격한 ‘대마도 정벌’이다. 그러나 이때 역시 습격당한 것은 일본본토가 아닌 쓰시마였고 게다가 싸움은 열흘 만에 종료됐다.

세 번째는 1945년 3월에서 4월에 걸쳐 미군과 벌인 오키나와 전쟁이지만, 이때도 침공을 당한 곳은 본토에서 멀리 떨어진 오키나와만이었다. 그해 여름에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이 투하됐지만, 일본인은 일본 본토에서 타국의 병사와 싸운 경험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없다.

즉 섬나라 일본은, 장기적 평화를 누려온 세계에서도 희귀한 국가다. 그 때문에 일본 민족은 전통적으로 반도국가인 한국 등과 비교하면 타국에의 공포심과 경계심이 부족하다. 그것이 21세기에 들어서면서 돌연, 지금까지 면역도 없던 공포심과 경계심이 싹텄다. 그것은 부상하는 이웃나라 중국에 대한 공포와 경계심이다.

그러한 일본인의 심층심리를 배경으로, 2012년 연말에 등장한 인물이 아베 신조 총리다. 아베 총리는, 메이지 유신을 일으킨 야마구치현이 배출한 정치가이며, 아베 정치철학의 원점은 바로 메이지 유신에 있다. 아베 총리가 야스쿠니신사 참배를 고집하는 것도, 야스쿠니신사가 메이지 유신의 내전으로 전몰한 야마구치현 출신 병사를 모시기 위해 세워진 신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베 총리는 메이지 유신에 의해 ‘아시아의 맹주’가 된 일본의 지위를 무슨 일이 있어도 유지하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다. 아베 총리는 ‘보수의 정치가’라고 불리지만, 아베 총리에게 ‘보수’란 ‘아시아의 맹주’라는 말과 같은 의미다.

한편 중국의 시진핑 정권 역시 ‘아시아의 맹주’ 자리를 목표로 삼고 있다. 사방이 트인 광대한 대륙에 사는 중국인은 ‘주위에서 침략당하는 공포심’이라는 DNA가 근본적으로 내재되어 있다. 중국은 고대로부터 다수의 국가에 둘러싸여 있으며 현재는 14개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다. 타국의 침공에 대한 공포심이 해소된 것은 21세기에 들어섰을 때부터다. 그렇지만 아직까지도 인도와 북한과의 사이에는 국경이 획정되어 있지 않다.

위안부 문제는 대중국 카드의 종속변수


▎2011년 12월 14일 제막된 위안부 평화비의 소녀상이 일본 대사관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 사진·중앙포토
중국인은 이 ‘공포심의 DNA’가 강하기 때문에 지도자들은 한결같이 군비 확장에 매달렸으며 남지나해에서는 7곳의 암초를 매립하고 3개의 활주로까지 만들었다. 이것이 주변국에 엄청난 위협을 주고 있지만 중국 입장에서 보면, 이러한 행위는 ‘공포심의 DNA’ 때문이며, 타국을 공격하기 위한 준비라는 의도는 가지고 있지 않다.

원래 ‘무(武)’라는 한자는, ‘창(矛)’과 ‘멈춘다(止)’라는 한자를 합친 것으로, 외부의 공격을 멈추게 한다는 의미다. 고대에 건설한 7300㎞나 되는 만리장성도 어디까지나 방어용 성벽이며 공격용이 아니다. 중국이 현재 남지나해에 구축하고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바다의 만리장성’이지 공격 목적은 아니다.

중국은 대륙을 둘러싼 주변국에 공격당하지 않기 위한 지혜로서 문명을 발전시키고 경제력을 강화해왔다. 그리고 주변국을 경제적으로 압도해서 종속시킨다는 외교전략을 전개했다. 그것이 바로 고대 동아시아 질서였던 중국이라는 ‘중심국’과 주위 속국으로 이루어진 ‘권봉체제(冊封體制)=화이질서(華夷秩序)’다. 시진핑 정권은 말 그대로 이 고대의 권봉체제를 21세기에 부활시키려고 하는 것이다.

일본은 독자적으로 중국에 대항하는 것이 불안하기 때문에 미국을 끌어 들여 ‘일미 VS 중국’의 구도를 만들어가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지역 패권다툼의 소용돌이 속에서 한국이 속수무책으로 말려들고 있다. 그것이 2015년의 동아시아정세의 ‘기본형’이다.

취임 후 박근혜 정권은 대일외교에 있어서 위안부 문제를 우선적으로 생각했다. “위안부 문제의 진전 없이 아베 총리와의 정상회담은 의미가 없다”고 단정해왔다. 단호함을 조금 낮추고 11월 2일 아베 총리와 첫 번째 단독 정상회담을 개최했지만, 역시 주요 의제는 위안부 문제였다.

그런데 아베 정권은 완전히 다른 각도에서 대 한국 외교를 바라보고 있다. 대단히 유감스럽지만 아마도 아베 총리의 머릿속에 47명의 위안부 피해자들에 대한 생각은, 100만분의 1 정도도 차지하지 않을 것이다. 그가 생각하는 것은 오직 어떻게 시진핑 정권에 맞서야 할지에 대한 것이며, 이를 위해 한국을 어떻게 끌어들이는 것이 유리한가이다. 즉 아베 정권에게 한국 위안부 문제는 중국 문제의 일부에 불과하다.

‘폭탄’ 안고 있는 아베 총리와 협상은 난망

어쩌면 한국인들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울지 모르겠지만, 일본정부의 입장에서 보면 그것이 현실이다. 만일 박 정권이 요구하고 있는 것처럼 위안부 피해자 여성에게 일본 정부가 국가로서의 사죄와 배상을 한다고 해보자. 아베 정권은 이 경우 시진핑 정권과의 대결이라는 관점에서 장단점을 헤아려볼 것이다.

일본이 그렇게 해서 위안부 문제를 한국에 전면 양보하면 한국군은 미군, 자위대와 3군 일체가 되고, 동지나해와 남지나해에서 중국의 인민해방군 일소에 착수해줄 것인가? 삼성전자와 현대자동차는 대규모 공장을 중국 대륙에서 철수해 줄 것인가? 박 대통령은 지금까지 아베 총리에게 보인 ‘쌀쌀맞은 태도’로 시진핑 주석을 대할 것인가? 아베 정권이 박근혜 정권에 추구하는 ‘메리트’란 바로 이러한 것이다.

반대로 ‘디메리트’란 위안부 문제를 한국에 양보함으로써, 시진핑 정권의 기를 살려주는 것이다. 최악의 시나리오는 일본이 한국에 보상을 지불한 것에 의해, 일중 간에서도 동일하게 위안부 문제가 공식 제기되는 것이다. 아베 총리 측근인 한 국회의원이 개인적으로 말한 의견서에 의하면, 이후 중국 내에서도 최대 1만 명 정도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라고 자칭하는 여성이 출현할 우려가 있다고 한다.

이럴 경우 시진핑 정권이 ‘47명의 한국인’과 동일한 보상을 아베 정권에게 요구해오면, 한 사람 당 보상액수를 500만엔으로 쳐도, 총 500억 엔의 보상금이 필요하다. 그 국회위원은 나에게 울분을 토하며 말했다. “일본에서 중국에 건너간 보상금이 센카쿠 제도를 일본에 약탈하기 위한 군사비로 사용된다고 생각하는 것만으로 분통이 터진다.”

같은 산을 오를 때도 올라가는 방향에 따라 보이는 풍경이 다르다. 마찬가지로 같은 위안부 문제를 논의함에 있어서도 아베 정권이 생각하고 있는 것은 이러한 것이다. 이 점을 이해한다면 위안부 문제의 해결책도 보이게 된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한국 측에서 ‘위안부 문제 해결이 중국에 조금도 이롭지 않은 상황’을 만들어내면 좋은 것이다. 예를 들면 “이후 다른 나라가 같은 위안부 문제를 제기해왔을 경우, 한국 정부는 일본과 타국과의 해당 문제에 일체의 영향을 미치지 않겠다”라는 문안을 넣는 등의 것이다. 혹은 한국이 TPP(환태평양 파트너십 협정)에 가입하는 것을 위안부 문제 해결과 맞바꾸는 방법도 있다. 아베 정권에 있어서 TPP란 ‘경제적인 중국포위망’ 외에 다른 용도가 아니기 때문이다.

어쨌든 필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일본 입장에서 보면 위안부 문제는 중국 문제의 일부”라는 것이다. 그리고 한국 측이 이 관점을 이해하는 날이 위안부 문제 해결의 날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안부 문제 해결이 어렵다면 반드시 우파인 아베 정권과 해결해야 할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자민당 정권의 경험으로부터 말하자면 우파정권 뒤에는 좌파정권이 수립된다. 한국은 다음 번에 출범할 일본의 좌파정권의 도래를 기다리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여러가지 ‘폭탄’을 안고 있는 아베 총리의 ‘운’이 이제 거의 다하기 시작했다고 보고 있기 때문이다.

- 콘도 다이스케 일본 <주간현대> 부편집장

201512호 (2015.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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