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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좌담] 대학의 미래, 미래의 정치를 위한 제언 

대학은 ‘지식공장’이 아니다 

김민웅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도구적 이성과 ‘담대한 미래’사이에서 방황하는 한국의 대학교육… 더 나은 개인과 사회, 문명의 미래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고민해야

▎9월 22일 제34회 ‘세계평화의 날’을 맞아 경희대 서울캠퍼스에서 열린 특별좌담회에 염재호 고려대 총장(왼쪽),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가운데), 조인원 경희대 총장이 참석했다. / 사진제공·경희대학교
“대학들이 국내외 랭킹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 높은 랭킹을 받아서 나쁠 건 없겠지만, 너무 휘둘리는 것 같다. 영국의 대학평가 기관 QS(Quacquarelli Symonds) 랭킹은 주의해서 봐야 한다. 10개 대학 중 4개 대학이 영국 대학이고, 25개 대학 중에서는 10개 대학, 50개 대학 중에서는 20개 대학이 항상 영국 또는 영연방 대학이다. 이 같은 사실은 영국 또는 영연방의 대학교육 서비스를 수출하기 위해 만들었다고 하는 의심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국내 랭킹도 낮게 받으면 교육부에서 여러 가지 제재를 가하는 것 같은데, 하루빨리 고쳐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서울대 총장을 지낸 정운찬 전 총리의 발언이다. 9월 22일 경희대 서울캠퍼스 평화의전당에서 전·현직 총장 세 명이 자리를 같이했다.

1981년 경희대가 제안하고 UN이 제정한 ‘세계평화의 날’을 기념하는 ‘피스 바 페스티벌(Peace BAR Festival)’의 일환으로 마련된 특별좌담이다. 이 자리에는 정운찬 전 총장, 염재호 고려대 총장, 조인원 경희대 총장이 참석했다. 대학과 정치가 안고 있는 문제점을 다양한 각도에서 진단하고, 이를 바탕으로 더 나은 미래를 만들기 위한 방안을 모색했다.

“대학이 경고음을 내지 못하고 있다”


▎사진제공·경희대학교
‘대학의 미래, 미래의 정치: 21세기, 우리가 꿈꾸는 세계는 무엇인가’라는 주제의 이번 좌담은 경희대가 6월 발간한 <미래대학리포트 2015>와 무관하지 않다. 경희대는 지난해부터 다양한 조사 기법을 통해 대학 구성원의 꿈과 희망을 수렴했다. 설문조사에 전체 재학생 절반에 조금 못 미치는 1만4천여 명이 참여했다. 이외에도 포커스 그룹 인터뷰, 소셜 픽션 등 심층 토론을 통해 대학의 현재와 미래에 대한 큰 그림을 그렸다. 보고서의 결론 중에 이런 구절이 있다. “이것은 학생들의 절규다. 이제 대학이 답해야 한다.”(보고서 전체 내용은 경희대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특별좌담은 <미래대학리포트 2015>에 대한 참석자들의 ‘독후감’을 나누는 것으로 시작됐다. 정 전 총장은 “대학이 경고음을 내지 못하고 있다”고 밝혔고, 염 총장은 “대학은 사회보다 앞서나가며 문제를 제기할 의무가 있다”고 말했다. 조 총장은 “우리 사회가 근래들어 단 한 번이라도 진지하게 대학이란 무엇인가, 왜 존재하나를 물은 적이 있는가”라고 반문했다.

대학 현실을 말할 때 가능성보다 문제점이 먼저, 그리고 훨씬 더 많이 제기되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 답을 찾으려면 대학이 걸어온 길부터 살펴보는 게 순서일 것이다. 우리의 역사에서 소수의 민족주의 교육기관과 미션 계통을 제외하고, 일본 제국주의가 주도한 근대 고등교육은 ‘본국’과 ‘반도’를 분명하게 구분했다. 일본 내의 제국대학은 독일을 모델로 견실한 기초학문을 강조했다. 반면 한반도에 일본이 세운 대학은 실용교육을 우선했다. 식민지 교육정책의 지배하에 놓인 대학은 당장 동원할 수 있는 자원의 공급처로 여겨졌다.

일본 제국주의가 주도한 근대 대학은 해방과 분단 이후로는 미국식 고등교육을 모범으로 삼았다. 산업화, 근대화가 국가 주도하에 압축적으로 진행되는 동안 교육도 국가의 성장 정책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해방된 지 70년. 우리의 고등 교육은 여전히 성장을 위한 실용교육이라는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인간과 사회, 역사와 문명에 대한 근본적 성찰, 우주와 지구, 자연에 대한 본질적 탐구와 같은 주제는 일종의 지적 사치로 치부된다. 더 나은 인간, 더 나은 세계를 위한 교육과 연구가 시장 위주의 정책과 사회 분위기에 의해 위축되고 있다. 시장이 원하지 않는 학문 분야는 대학에서 ‘퇴출’된다.

일본의 대학들도 시장 논리의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대학 본연의 역할과 책임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 일본의 역대 노벨상 수상자가 이를 증명한다. 일본의 대학과 연구소는 기초학문 분야에서 끊이지 않고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하고 있다. 기능교육, 실용교육이 무가치하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칼을 예로 들어보자. 조각, 의학, 생물학, 검도 등 이 모든 분야는 칼을 잘 다뤄야 한다. 필수적인 능력이다. 그런데 칼에 대한 윤리적 성찰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우리는 너무도 잘 안다. 독재자의 동상을 세우는 조각가, 환자를 인간이 아니라 소비자로 보는 의사, 생화학 무기 개발에 몰두하는 생물학자, 승패에만 전념하는 무술인 등은 실력이 탁월할수록 반사회적 존재가 된다.

독일은 천재의 나라, 철학의 나라로 불렸다. 그런 독일에서 나치즘이 발호할 수 있었던 이유를 밝혀낸 학자가 한나 아렌트였다. 아렌트는 유태인 학살 주범 중 하나인 아이히만에 대한 재판을 지켜보면서 “생각하지 않는 평범한 인간이 저지르는 악”, 즉 “악의 평범성 (banality of evil)”을 고발한다. 국가, 종교, 기업 그리고 언론이 ‘생각하는 일’을 독점하는 순간, 그리하여 일반 시민들이 그 생각이 내리는 명령에 익숙해지는 순간, 그 사회는 ‘악의 평범성’에 길들여질 수 있다. 그런 사회는 악과의 싸움에서 이길 수 없다. 모든 국가와 종교, 기업, 언론이 악이라는 뜻은 물론 아니다. 그러나 국가는 때로 부당한 권력을 정당화하려 하고, 종교는 교리를 독선으로 만드는 일에 익숙하다. 기업은 탐욕을 부추기는 습관을 지니고 있다. 언론은 여론 주도, 조작이라는 함정에 빠지기도 한다. 대부분의 권력, 다시 말해 나쁜 권력의 공통점은 자기성찰 능력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스스로를 객관화하지 못한다. 세계사의 비극은 대부분 자기 정화 장치가 없는 나쁜 권력에서 비롯됐다.

국가·종교·기업·언론이 ‘생각하는 일’을 독점


▎사진제공·경희대학교
문제는 생각하는 능력, 생각의 힘이다. 이것은 인간의 생존과 인류의 미래를 위해 반드시 요구되는 권리이자 책무이다. 그러나 그 생각은 도구적 차원의 생각이 아니다. 프랑크푸르트학파의 태두 막스 호르크하이머(Max Horkheimer)가 1947년 출간한 <이성의 상실(Eclipse of Reason)>의 독일어 제목이 <도구적 이성비판 (Zur Kritik der instrumentellen Vernunft)>이라는 사실은 의미하는 바가 크다. 호르크하이머는 위 책이 출간되던 해, 테오도르 아도르노(Theodor Adorno)와 함께 펴낸 <계몽의 변증법(Dialectic of Enlightenment)>에서도 도구적 이성을 문제삼았다. 두 책은 실증과 실용이 지배한 사회에서 만들어진 결과물이 나치즘이었다는 역사적 경험에 대한 철학적 반성이었다.

대학이 존재해야 하는 근본 이유 중 하나는 도구적 이성의 지배를 따져 묻고 극복하는 것이다. 대학이 도구적 이성의 거대한 그늘을 직시하지 못한다면, 대학 자체가 인간의 인간다움을 훼손하는 도구로 전락할 수 있다. 현실 정치도 마찬가지다. 정치가 장기적 관점에서, 또 지구적 차원에서 더 나은 미래를 설계하고 실천할 능력이 없다면, 현실 정치는 ‘막강한 도구’ 수준에서 벗어날 수 없다. 50년 전, 토인비가 세계대학총장회(IAUP) 창립 기념 연설에서 말했듯이 정치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한다면 대학이 나서야 한다.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의 ‘대학이 경고음을 내야 한다’는 요지의 발언도 같은 맥락으로 들렸다.

“대학 교수와 대학이 사회에 대해 경고음을 발할 시간이 거의 없다. 서울대의 경우만 해도 사회과학 교수들이 대사회 발언이 너무 없다. 평가 때문이다. 대학 교수들도 평가를 받아야 하는데, 평가 기준이 논문 수, 특히 외국 학술지에 실리는 논문 수가 거의 전부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 사회에 대해 큰 관심을 기울일 수 있겠는가? 이과에 대해서는 잘 몰라도, 문과 특히 사회과학 계통은 우리 문제를 다뤄야 한다. 우리 문제와 별 상관이 없는 외국 학술지에 논문을 몇 편 게재했느냐로 평가를 받아서 되겠는가?”

평가 체계가 ‘논문을 위한 논문’을 양산하도록 부추기고 있는 것이다. 학자 자신이 발 딛고 있는 현실과 무관한 연구에 치중한다면, 그 연구가 교육으로 이어진다 한들 무슨 의미를 가질 수 있겠는가. 그런 학자와 교육자로 구성된 대학에게 ‘사회를 보는 눈’, ‘미래에 대한 상상력’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학자로서, 교육자로서 연구와 교육에 대한 진정성을 되찾아야 한다. 대학이 먼저 외부 압력에 대한 면역력을 키워야 한다.

염재호 고려대 총장은 최근 경험을 통해 교육과 연구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최근 대학은 교육보다는 연구에 치중하고 있다. 교수들이 평가에 몰려 자기 연구에만 빠져버렸다. 연구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지난해 고려대 총학생회장과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는데, 시니컬하게 이런 얘기를 했다. ‘저희들이 내는 등록금으로 교수님들 연구시켜드리는 것 아닌가요?’ 고등교육기관임에도 불구하고 교육에 대해 관심을 쏟지 못하고 연구소처럼 되어버리고 말았다. 그런 곳에서 이루어지는 연구가 정말 의미 있는 연구인가?”

대학은 교육기관이 아닌 연구소가 돼버렸다


▎근시안적인 지식공장이 아니라 공동체 미래를 이끌 인재를 키우는 곳이 대학이다. / 사진·중앙포토
신임교수를 뽑는 과정에서 염재호 총장이 겪은 사례는 대학의 미래와 관련해 시사하는 바가 크다.

“뛰어난 연구자와 인터뷰하는 과정에서 있었던 일이다. 외국의 유명 학술지에 좋은 논문을 많이 쓴 사람이었다. ‘왜 이 논문을 썼는가’라고 질문했더니, 이렇게 답했다. ‘미국에 있는 지도교수가 관련 자료를 많이 가지고 있어서 분석하기가 좋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두 번째 질문을 던졌다. ‘한국의 공무원 사회나 관료 사회의 문제점은 무엇인가? 그걸 어떻게 개선할 것인지, 그리고 그에 대한 문제의식은 무엇인가?’ 이에 대해 그 연구자는 이렇게 답했다. ‘그런 문제에 대해서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염 총장은 이어 ‘영혼 없는 탁월성’의 문제를 지적했다. “몇 년 전 조인원 총장이 내게 하버드대 인문대 학장을 지냈던 해리 루이스(Harry R. Lewis) 박사가 쓴 <영혼 없는 탁월성: Excellence Without a Soul>이라는 책을 보내줘 흥미롭게 읽었다. 영혼이 없는 탁월성이라는 것이 과연 의미가 있는가. 영혼 없는 탁월성을 추구하다 보니 우리 모두 지식공작소 같은 공장에서 근무하는 노동자가 된 것은 아닌가. 그 결과 교수들은 연봉이나 업적에만 신경 쓰고, 학생들은 취업에만 관심을 갖게 된다. 결국 대학은 공공적인 엘리트에게 요구되는 가치를 치열하게 고민하는 장이 되지 못하고 있다. 이것이 과연 대학인가. 이에 대해 깊이 고뇌하면서 개혁을 해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논문에만 신경 쓰는 교수, 취업이 미래의 전부인 학생들로 이뤄진 대학은 자칫, 예일대학의 윌리엄 드레즈비치(William Deresiewicz) 교수가 경고했듯이 ‘탁월한 양(excellent sheep)’을 길러내는 ‘거대한 목장’이 될 수 있다.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삶을 추구하지 않고, 기성 사회의 기득권을 획득하기 위해 몰두하는 교육과 연구는 타자의 존재를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결국 정의, 평화, 배려, 공생과 같은 공동체적 가치를 외면하게 된다. 대학이 기존 질서에 순응하는 ‘똑똑한 양떼’를 길러내는 데에만 치중한다면, 우리에게 지금과 다른 미래는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조인원 총장은 정 전 총장과 염 총장의 견해에 동의하면서 사유의 전환을 강조했다.

“체코의 억압적 상황을 극복하는 데 기여한 바츨라프 하벨이 좋은 예라고 본다. 전체주의(totalitarianism)의 포악성에 문제가 있다는 생각을 한다면, 그 체제가 만들어내는 문화와 제도, 이념을 뛰어넘도록 해야 한다. 그와 함께 새로운 것을 영접해야 한다. 새로운 것이 없으면 그 체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민주주의와 시장문명 역시 신과 같은 절대적 존재는 아닐 것이다. 오류도 있고, 모순도 있다. 이에 대해 우리가 끊임없이 사유하고 상상하고 창조할 때,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다.”

“인간과 시민의 가치, 글로벌 연대에 관심 가져야”


▎사진제공·경희대학교
도구적 이성을 강조하는 기능교육에서는 사유혁명이 일어나기 어렵다. 시장으로 대표되는 사회가 도구적 이성, 실용적 기능을 우선한다면, 대학은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 미래 대학은 어떤 지향점을 가져야 하는가.

조인원 총장은 대학의 공적(公的) 기여에 관한 사유를 촉구했다.

“대학은 자신이 몸담고 있는 공동체에 기여해야 한다. 인간과 시민의 가치, 글로벌 연대(global solidarity)에 깊은 관심을 갖는 순간, 대학의 존재 가치는 크게 달라진다. 우리는 어떤 가치를 공유할 것인가? 그 가치가 침해될 때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이런 질문의 답을 위해 대학인 스스로 함께 지혜를 모아야 한다. 물론 대학은 나라 발전과 경제를 위해 기여해야 한다. 그러나 경제와 성장, 시장의 무게에 억눌리면, ‘진리(Veritas)와 가치 창조의 전당’ 대학은 그 존재 이유를 잃게 된다. 그런 나라엔 인간의 ‘인간적 미래’가 없다. 대학 스스로가 더욱 치열하게 성찰해야 한다. 대학이 지향하고 보존해야 할 교육·연구 철학과 비전은 무엇인가. 더 나은 개인과 사회, 문명의 미래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하루 속히 대학인 모두가 존중하고 권위를 인정하는 평가 체제로 전환해야 한다. 이와 같은 문제의식이 우리 사회에서 더욱 활발히 제기될 때, 대학다운 대학의 미래가 펼쳐질 것이다. 우리가 세계 최정상의 대학을 존중하는 것은 논문을 많이 생산하고, 프로젝트를 많이 수주해서가 아니다. 그 대학들의 교육, 연구, 실천이 탁월하고, 그 탁월성이 인간과 사회, 문명의 미래를 지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6월 세계적 경제전문지 <포브스(Forbes)>가 ‘아시아에서 인문교양대학의 성장(the rise of liberal arts college in Asia)’이라는 제하의 기사를 통해 국내 4개 대학을 아시아 교양대학 톱 10으로 꼽았다. 예일, 싱가포르 국립대, 일본의 도쿄대와 와세다대 등이 톱 10에 함께 선정됐다. 미국 대학의 관점에서 보면, 아시아 대학의 인문교양에 대한 관심은 예상치 못한 변화다. 이에 앞서 <포브스>는 지난 5월 “미국 교육이 창조성과 모험적인 기업가정신을 죽이는 교육으로 가고 있다(How America’s Education Model Kills Creativity and Entrepreneurship)”면서, 미국 대학의 인문교육 퇴조를 비판한 바 있다. 급속한 경제 성장에 치중했던 동아시아가 새로운 지적 환경의 창출로 선회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한 것이다. 다시 말해, 미래를 주도하는 교육의 핵심을 인문·교양교육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하버드대 드루 파우스트(Drew Faust) 총장은 “대학 교육의 탁월성이란 공적 기여에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공적 기여는 “미래에 대해 책임지는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의 말대로 근시안적인 지식공장이 아니라 공동체의 미래를 이끌어나갈 인재를 길러내는 것이 대학이다. 이제 우리는 더 나은 대학의 미래를 위해 대학, 정부, 기업, 시민사회가 머리를 맞대야 한다. 그 과업은 시급하다.

대학이 달라져야 미래가 달라진다. 대학이 바뀌어야 세계가 움직인다. 세 분 전·현직 총장의 특별 좌담을 지켜보면서, 세계적 석학 지그문트 바우만의 한마디가 떠올랐다. “희망은 살아 있는 자의 의무다.” 대학이 희망의 산실이 되어야 한다. 대학의 희망이 정치와 시장, 시대와 문명의 희망과 만나야 한다. 그 희망이 ‘담대한 미래’를 만들어가는 핵심 동력일 것이다.

- 김민웅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201512호 (2015.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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