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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주의 ‘日常반추’] 사랑은 아무나 하나! 

 

장석주 전업작가
타자(他者)의 매력이 실종돼가는 사회, 에로스와 타나토스를 오가는 사랑은 없고 음란한 포르노만 남아… “이것은 사랑이다”라고 선언하고 사랑의 지속성을 담보해야 그 놀라운 세계의 문이 열린다

▎1945년 8월 14일 제2차 세계대전 종전일에 타임스스퀘어에서 <라이프(LIFE)> 기자가 촬영한 작품 <키스(The Kiss)>. 사랑은 나와 성별이 다른 타자를 사랑하는 것이다. ‘다름’은 사랑의 전제조건이다.
예전에는 사랑이 그다지 어려운 게 아니었다. 지나간 시대에는 누구나 열정적인 사랑에 빠지곤 했다. 사랑은 좋은 것을 집약하는 모든 것이고, 사랑은 아무나 빠질 수 있는 것이었다.

인생의 가장 깊은 행복의 노래는 사랑에서 울려퍼져 나오고, 사랑은 고귀하고 신성한 것이지만 동시에 보편적인 것으로 널리 향유되었다. 사랑은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다. 우연의 형태로 찾아오는 사랑은 위험하다. “사랑은 영혼을 건드리고 교란시켜 재편하기 때문이다.”(로버트 롤런드 스미스, <이토록 철학적인 순간>, 176쪽)

사랑이 위험하다고 해서 사람들은 사랑을 피하지 않았다. 사랑이 올 때 사람들은 그것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다소곳이 따랐다. 사랑에 따르는 것은 숨막히는 떨림과 경이, 그리고 행복에 이르는 길이고, 올바른 자기실현의 한 방법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더러는 사랑을 위해 죽음마저도 마다하지 않고, 사랑을 위해 전 재산을 걸기도 했다.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나,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 그리고 나보코프의 <롤리타>에 펼쳐지는 사랑이 좋은 예다. “나라는 존재는 아직 나의 것, 아니 당신의 것입니다! 오, 사랑하는 로테, 당신의 것입니다! 그런데 한순간에 갈라지고 이별하게 되다니―어쩌면 영원히 말인가요? 아닙니다. 로테, 아니에요.”(괴테,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179쪽) 이 구절은 사랑하는 자는 혼란에 빠진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노란색 조끼와 푸른색 연미복을 즐겨 입는 청년 베르테르는 사랑의 혼란 속에서 낭만적 자살을 선택한다. 그 극단적인 자기 파괴라는 형식으로 제 사랑을 완성한다.

현대가 낳은 사랑의 실패작 ‘포르노’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의 <키스>. 키스는 봉인된 타인을 여는 행위다. 키스를 통해 타인을 무장해제시키고 존재의 내밀함을 알아내는 것이다. / 사진·중앙포토
사랑은 기이하고 부조리한 통제 불가능의 정열이기도 하다. “롤리타, 내 삶의 빛, 내 몸의 불이여. 나의 죄, 나의 영혼이여. 롤-리-타. 혀끝이 입천장을 따라 세 걸음 걷다가 세 걸음째에 앞니를 가볍게 건드린다. 롤. 리. 타.”(블라디미르 나보코프, <롤리타>, 17쪽)

사랑하는 대상은 삶의 빛이고, 내 몸의 불이다. 사랑이 불안과 혼란의 중심에 있었지만 낭만주의적 전설에 감싸였던 그 시절에는 누구나 거침없이 사랑을 했다. 그런데 그 쉬웠던 사랑이 오늘날 어려운 게 되고, 그 많았던 사랑이 자취를 감춰 희귀한 것이 되어버렸다.

오늘날 사랑은 아무나 할 수 없다. 사랑은 돈, 신체, 재능과 크게 상관이 없는, 갈증과 욕망으로 촉발된 사랑을 그 무엇도 아닌 사랑으로 향유하는 능력이다. 사랑은 숭고한 것이고, 그것은 유한한 인생의 시간 속에서 거의 유일하게 영원성을 체험할 수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오늘날 에로스와 타나토스를 오가는 사랑은 죽었다. 살과 살의 스치고 부빔, 혀의 엉긺, 젖가슴의 움켜쥠, 허리와 엉덩이를 쓰다듬기, 서로의 몸을 핥고 물어뜯기 등과 같은, 흥분과 열락으로 몸을 떠는 에로스 없는, 사랑과 본능이 하나로 결합하여 몸이 팽팽해지고 저절로 떨고 움직이는 열정 없이 메마른, 혼 없이 나누는 사랑만이 남았다. 그 혼 없는 사랑의 본질은 다만 성애화되어 소비되는 섹스, 전시되는 상품으로서의 포르노다.

사랑은 ‘나’와 성별이 다른 타자를 사랑하는 것이다. 사랑은 타자의 매혹에 이끌림에서 비롯한다. 사랑의 촉매가 되는 매력에 불을 붙이는 것은 타자의 다름이다. 타자에게 다름이 없다면 사랑도 일어나지 않는다. 타자의 다름은 사랑의 전제조건이다. 에로스에 불길을 당기는 것, 즉 가장 강렬하게 경험되는 타자의 매혹은 입술, 눈동자, 젖가슴, 허리, 엉덩이 등등의 육체의 매혹이 선사하는 섹스에의 욕망이다.

사랑의 전제조건이 되는 것, 꼭 필요한 단 하나의 매혹은 무엇인가? 필립 로스의 소설 <죽어가는 짐승>에서 화자는 이렇게 말한다. “꼭 필요한 매혹은 섹스뿐이야.”라고! 매혹적인 육체의 움직임들, 나이든 교수와 사랑에 빠지는 스물네 살짜리의 여자의 행동은 어떤 것인가? “구체적이면서도 신비했고, 묘하게도 놀랄 만한 작은 것들이 가득했어.” 사랑이란 종종 대상에 대한 과장이고 과잉의 의미 부여다. 모든 사랑은 크건 작건 간에 “전략적인 상호 기만에 의존한다”(로버트 롤런드 스미스, 앞의책, 176쪽)는 사실은 비밀이 아니다. 상대의 단점은 축소하고 장점은 확대한다. 상대를 매혹의 존재로 새롭게 빚어내는 것이다. 만약 이런 빚어냄이 없다면 많은 사랑은 시작하기 전에 시들고 말 것이다.

에로스가 사라진 사회에서는 포르노가 판을 친다. 포르노는 한마디로 속화된 현대의 사랑이다. 포르노는 섹스의 과잉이 아니라 섹스의 부재를 가리킨다. 포르노에는 성기의 결합만이 있을 뿐 에로스가 깃들 여지가 없다. 포르노는 섹스의 공회전이다. 아무리 액셀레이터를 밟아도 앞으로 전진하지 않는 자동차나 마찬가지다. 포르노의 음란함은 바로 성애의 부재에서 비롯한다. 죽음까지 치달을 수 있는 욕망의 뜨거움이 제거된, 차가운, 오직 성적 긴장을 해소하기에 급급한, 그렇게 소비되는 섹스와 포르노그라피는 진짜 사랑을 침식하고 파괴한다.

사랑은 행복이고 고통이며 혼란이다. 사랑이 초래하는 혼란은 그것이 “인간의 영역과 신의 영역을 넘나들고 유한과 무한 사이에서 방황하는 경험”(로버트 롤런드 스미스, 앞의책, 177쪽)이기 때문이다. 사랑을 갈망하지만 이상할 정도로 사랑을 얻지 못한 사람은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느낌에 빠진다. 그것의 병적 징후가 우울증이다. 철학자 한병철은 이 나르시시즘적 우울증에 빠진 자는 “자기 자신 속으로 침몰하고 그 속에서 익사한다”고 말한다.

성형한 그녀를 사랑할 수 없는 이유


▎사랑에 빠진 사람은 사랑하는 이의 얼굴에서 눈을 떼기 어렵다. 상대방의 얼굴이 사랑을 명령하기 때문이다. / 사진·중앙포토
에로스가 없다면 사랑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에로스만이 “타자를 타자로 경험할 수 있게 하고, 이로써 주체를 나르시시즘의 지옥에서 해방시킨다.”(한병철, <에로스의 종말>, 김태환 옮김, 20쪽) 무엇보다도 사랑의 위기는 타자라는 절대성이 휘발되는 사태에서 비롯한다.

“사랑의 위기를 초래하는 것은 단순히 다른 타자의 공급이 넘치기 때문만은 아니다. 오히려 문제는 오늘날 모든 삶의 영역에서 타자의 침식 과정이 진행되고 있다는 점, 이와 아울러 자아의 나르시시스트화 경향이 강화되어가고 있다는 점에 있다. 타자가 사라진다는 것은 사실 극적인 변화이지만 치명적이게도 다수의 사람은 이러한 과정이 진행 중이라는 사실조차 눈치 채지 못하고 있다.”(앞의책, 18쪽)

타자가 사라지고 있다. 사랑이 없는 사회에서는 나르시시즘의 총량이 증가한다. 타자는 나와 다른 자, 그리고 나와 거리를 둔 채 떨어져 있는 자다. 우리는 다름이 없는 타자를 사랑하지 못한다. 타자의 이질성이 제거되면 우리는 그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 소비할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나와 타자 사이의 거리, 이것을 마르틴 부버는 ‘근원거리’라고 했다. 이 근원거리는 “타자성이 성립할 수 있는 초월적 전제”다.(앞의책, 42쪽)


▎영화 <롤리타>의 한 장면. 서른일곱 살 교수 험버트는 치명적인 마력을 지닌 열두 살 소녀 롤리타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 사진·중앙포토
얼굴은 신체 중에서 바로 이 타자성이 득시글거리며 번창하는 자리다. 얼굴은 저마다의 개성으로 빛난다. 이 다름이야말로 에로스의 촉매제다. 타자의 얼굴에 다름이 제거된다면 그 얼굴은 이미 전시된 상품에 지나지 않는다. 사랑을 낳지 못하는 얼굴인 성형한 얼굴이 매력 없는 이유는 다름의 진정성을 담보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모든 것을 소비의 대상으로 삼기 위해 도처에서 이질성을 제거한다.”(앞의책, 48쪽) 한병철에 따르면 오늘날의 자본주의는 타자가 타자로 존재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동일자의 지옥이다.

얼굴은 단순히 감각적 형태와 조형적 이미지가 아니다. 자기 앞에 내놓는 존재의 전면 그 자체다. 겉모습과 속 모습 사이, 세계와 세계 사이의 경계인 것이다. 때문에 얼굴이라는 경계 밖에 타인이 있다.

“얼굴은 신체 중에서도 특히 영혼이 나타나고 변장하는 장소다. 사람들은 얼굴을 만들어낸다.”(알렝핑켈크로트, <사랑의 지혜>, 27쪽) 사람은 누구나 자기하며 세계에 참여한다. 삶은 곧 얼굴의 실존을 통해 구현된다. 타자의 얼굴이 내게 사랑을 명령한다. 타자는 항상 얼굴로서 명령한다. 그리고 사랑에 빠진 자는 필연적으로 사랑하는 타자의 얼굴을 욕망한다.

타자는 무엇보다도 먼저 얼굴로 온다. 철학자 레비나스는 “‘내 안에 있는 타자의 관념’을 뛰어넘는 타자가 나타나는 방식, 우리는 그것을 얼굴이라고 부른다”라고 말한다. 얼굴은 사랑의 끄나풀, 사랑의 메신저다. 타자의 부름에 가장 먼저 응답하는 것도 얼굴이다. 사랑은 얼굴의 끌림에서 시작한다. “처음에는 서로의 거죽에 이끌리지만 동시에 직관적으로 전체를 다 파악해.”(필립 로스, 앞의책, 27쪽) 타자가 출현하는 거죽으로서의 얼굴. 이 거죽은 수수께끼와 같은 사랑으로 들어가는 지리를 펼쳐준다.

애무, 사랑하는 자의 신성불가침 특권


▎연극 <베르테르>의 한 장면. 청년 베르테르는 사랑의 혼란 속에서 낭만적 자살을 선택한다. 그 극단적인 자기 파괴로 사랑을 완성한다. / 사진·중앙포토
사랑에 빠진 자는 자기가 사랑하는 이의 얼굴에서 눈을 떼기 어렵다. 그것은 얼굴이 사랑을 명령하기 때문이다. 얼굴은 사랑을 명령하고 가까이 접근하면 달아난다. 타자의 얼굴은 침투할 수 없고 사적 소유로 거머쥘 수도 없다. 이 불가능성은 곧 사랑의 불가능성과 등가를 이룬다. 이 얼굴은 나를 부르면서도 내게서 도망간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자신을 사로잡고 있는 얼굴을 기억할 수 없는, 이상한 사람이다.”(알렝 핑켈크로트, 앞의책, 50쪽) 사랑하는 이의 얼굴을 더할 나위 없이 생생하지만 그것은 도망가면서 지워진다. 그래서 그 얼굴을 기억하지 못한다.

연인들은 키스를 한다. 키스는 아무런 생물학적 이득을 생산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공허하지만 사랑의 서약이고 촉매제라는 점에서 그 존재감은 또렷해진다. “키스는 비단 자락의 스침이나 모래 위의 발자국처럼 거의 들리지도 않든가 매우 부드러울 수 있다. 마침내 입술이 떨어질 때 공기는 분리된 연인 속으로 쇄도해 들어간다.”(대니얼 맥닐, <얼굴>, 83쪽)

키스는 봉인된 타인을 여는 행위다. 키스를 통해 타인을 무장해제시키고 그의 봉인을 뜯어낸다. 그리하여 존재의 내밀함을 알아내는 것이다. 키스는 조만간 있을 애무의 전조(前兆)다. 연인들은 서로의 몸을 만진다. 얼굴을, 목덜미를, 젖가슴을, 허리를, 엉덩이를 쓰다듬는다. 키스에서 시작해서 애무로 치닫는다. 애무는 연인의 몸을 달구고 에로스의 중심으로 안내한다. 애무는 사랑하는 자의 신성불가침의 특권이다. 사랑은 상대를 애무로 초대하는 것이다.

“그 아이는 거기에, 소파에 대놓고 엎드린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엉덩이 짝을 반쯤 내게 돌린 자세로 거기 있었어. 콘수엘라처럼 자기 몸을 의식하는 여자, 그런 여자가 그러는 것은 시작하라고 하는 초대다. (…) 나는 아이의 두 엉덩짝을 애무하기 시작했고, 아이는 그걸 좋아했어.”(필립 로스, 앞의책, 37~38쪽)

애무를 위해서는 누군가의 앞에 자기 전부를 내놓아야 한다. 애무는 사랑을 위한 일종의 제의다. 연인들은 애무를 통해 사랑을 위한 몸을 빚어낸다. “애무는 단순히 쓰다듬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가공이다. 타인을 애무함으로써, 나는 나의 애무에 의해 내 손가락 아래에서 타인의 육체를 태어나게 한다. 애무란 타인에게 육체를 부여하는 의식의 총체다.”(장폴 사르트르, 알렝 핑켈크로트, 앞의책, 22쪽에서 재인용)

애무는 타인의 몸을 빚는 행위이자 만질 수 없는 것을 만지는 것이다. 아직 오지 않은 미래로서의 타자가 우리 앞에 있다. 우리는 그 불가능성을 쓰다듬는다. 애무는 두 몸의 교합으로 가는 과정이 아니라 사랑 그 자체다. 사랑은 애무에서 절정으로 솟구친다. 성교는 복잡하게 펼쳐졌던 사랑에 마침표를 찍고 그것을 거두는 의식이다.

연인은 ‘신도’, 사랑은 ‘신흥종교’


▎영화 <위대한 개츠비>의 한 장면. 과거 사람들은 사랑을 피하지 않았다. 그것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다소곳이 따랐다. / 사진·중앙포토
누구에게나 사랑의 가능성이 활짝 열려 있던 시대에 사랑은 ‘신흥종교’로 재발견되었다. 사랑과 종교는 둘 다 완벽한 행복을 약속한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이끌려 헌신하고 숭배하는 신도로 거듭난다. 이 신흥종교에 다른 신도는 필요 없다. 이 신흥종교는 두 신도만으로도 충분하다.

사랑이 신흥종교로 여겨지던 시대에는 사랑이 위력을 발휘했다. “연인들은 서로를 다르게 보고, 그래서 달라지고 다르게 되어 서로에게 새로운 현실을 열어준다.”(울리히 벡·엘리자베트 벡 게른샤임, <사랑은 지독한 그러나 너무나 정상적인 혼란>, 300쪽) 사랑에 빠진자들은 제 안에 숨겨져 있던 동물적 본성을 거침없이 드러내고 일상의 질서를 격렬한 방식으로 무너뜨리기도 한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너무나 쉽게 예전과는 달라진 존재가 된다. 사랑은 타자가 내게 주는 분에 넘치는 선물이자, 불확실한 미래의 유토피아를 향해 떠나는 위험한 여행이다. 그것이 위험한 것은 검증할 수 없는 미지를 향해 내딛는 발걸음이기 때문이다. 그 앞에 무엇이 있을지 알 수가 없다. 두 사람은 오로지 사랑의 힘에 의지해 앞으로 나아간다.

“사랑은 연인들이 서로에 대한 낯섦을 극복하고 두 사람의 관계를 역사적인 것으로 만들기 위해 사용하는 상징들을 재료삼아 둥지를 만든다. 이 둥지는 함께함의 중심점으로 장식되며, 둘이 함께하고 있는 꿈을 담은 나는 양탄자로 바뀐다.”(앞의책, 310쪽) 사랑은 두 사람이 함께할 수 있는 둥지를 만드는 과정이다. 사랑하는 이들은 이 둥지가 ‘꿈을 담은 나는 양탄자’이기를 바라지만 날기 위해 떠오르는 순간 땅으로 곤두박질치며 좌초한다.

사랑은 도덕과 통계적 수치와 전통, 합리적 이성과 논리의 길에서 벗어나 광란에 이를 만큼 한 사람의 의식을 사로잡는 강렬한 체험이다. 이 강렬함, “특수하고 감정적이고 열중하게 하고 피할 수 없는 체험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앞의책, 306쪽), 이것이 사랑의 가치와 위력의 배경이다.


▎사랑은 우리 본성에 새겨진 것이지만 그것은 우발적 사건에서 시작한다. 사랑이 운명이 될 때 ‘이것은 사랑이다’라고 선언된다. / 사진·중앙포토
사랑은 우리 본성에 새겨진 것이지만 그것은 우발적 사건에서 시작한다. 사랑은 계산이나 예측 너머에 있다는 점에서 ‘파생상품’이다. 이렇게 불거진 만남-사건으로 주요 성분인 우연이 운명으로 바뀌면서 사랑이라는 사태가 촉발된다. 사랑이 운명이 될 때 ‘이것은 사랑이다’라고 선언된다. 이 선언이 간단한 것은 아니다. 사랑은 길고 복잡한 우여곡절과 여러 난관을 거쳐야만 사랑으로 선언될 수 있다.

마침내 사랑이 사랑으로 선언될 때 에로스, 육체, 난관, 기적, 에피소드, 지속성, 시간성과의 투쟁들을 두루 품는다. ‘이것은 사랑이다’라고 선언되지 않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아무리 복잡하고 혼란스럽더라도 사랑은 거듭해서 선언되는 것이다. 알랭 바디우는 사랑이 “삶의 재발명”이라고 언명한다.(알랭 바디우, <사랑예찬>, 44쪽) ‘이것은 사랑이다’라는 선언을 사실로 공증하는 것은 지속성이다. 사랑은 지속될 만한 것이어야 하며 지속되어야 한다. 사랑은 지속성을 담보한 뒤에야 사랑으로 선언되고 놀라운 것으로 탈바꿈한다.

장석주 - 전업작가. 충남 논산 출생. 1979년 조선일보·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와 문학평론 당선으로 등단했다. <월간문학> 신인상(1975년)과 해양문학상(1976)을 수상했다. ‘고려원’ 편집장을 거쳐 청하출판사를 운영했다. 지금까지 시집, 비평집, 인문서 등 70여 권을 펴냈다. 대표 저서로 <일상의 인문학> <마흔의 서재> <철학자의 사물들> 등이 있다.

201512호 (2015.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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