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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호의 ‘조선왕조 스캔들’(13)] 기록문화 지평 넓힌 정조, 역사기록을 ‘왜곡’하다 

세손 시절 정치적 불안 상황에서 생존 위해 시작한 일기 쓰기 습관… 불리한 부분 말소·개작으로 공식 기록의 권위와 신뢰 떨어트려 

신명호 부경대 사학과 교수

▎정조는 조선왕조 500년을 대표하는 성군으로 평가된다. 하지만 그런 그도 <승정원일기>를 자신의 입맛대로 고쳤다는 비판을 받는다. 정조가 건설한 우리나라 최초의 계획도시 수원의 방어용 성곽인 화성(華城)의 서쪽 관문인 화서문과 서북각루(왼쪽). / 사진·중앙포토
조선시대의 기록문화라는 측면에서 볼 때 정조는 특이한 존재였다. 정조는 세손 시절부터 스스로 <존현각 일기>라는 개인 일기를 작성했고, 즉위 후에는 그것을 <일성록>으로 발전시켰다. 이는 기록의 객체였던 국왕을 기록의 주체로 만든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정조는 기록의 주체로서 기념비적인 기록문화를 여럿 남겼다. 앞의 <존현각일기>와 <일성록>을 위시해 조선왕실의 대표 의궤인 <원행을묘정리의궤(園行乙卯整理儀軌)>, 조선 국왕 문집의 대표작인 <홍재전서(弘齋全書)> 등이 그것이었다.


▎이길범 화백이 2004년에 그린 정조의 어진(御眞). 정조는 생전에 세 차례 어진을 그렸지만 현재 남아 있는 것은 없다. / 사진·중앙포토
정조가 기록의 주체성을 강조하게 된 이유는 세손 시절 정치적 불안 상황에서 생존을 위해 쓰기 시작한 일기 습관이 결정적이었다. 이런 경험으로 정조는 조선시대 그 어느 국왕보다도 기록의 주체성·정치성·실천성을 강조했다. 이 같은 정조의 태도는 일장일단을 가졌다. 정조는 정치적으로 불리한 기록은 말살하기도 하고 개작하기도 함으로써 <승정원일기>같은 공식기록의 권위와 신뢰성을 크게 약화시켰다는 면에서 기록문화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반면 실천적 목적을 위해 개인 일기를 작성하고 그것을 발전시킴으로써 조선시대 기록문화의 지평을 넓혔다는 면에서는 대단히 긍정적이었다. 예컨대 혜경궁 홍씨의 회갑과 사도세자의 구갑(舊甲)을 기념해 거행된 을묘년(1795, 정조 19)의 현륭원 행차는 정조에게 그 무엇보다 중요한 실천적 행사였다. 그러므로 이 행사의 전말을 기록한 <원행을묘정리의궤>에는 기록의 실천적 측면을 강조하는 정조의 기록정신이 집대성됐다고 할 수 있으며, 그 같은 기록정신에서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의궤가 탄생할 수 있었다.

반면 정조의 개인적 입장 또는 정치적 측면이 강조되면 그 반대의 상황이 나타났다. 사도세자의 아들로 태어난 정조는 8세 때 왕세손에 책봉됐다. 이후 23세 때 대리청정을 함으로써 정치적 실권까지 장악했다가 24세 때 즉위했고, 재위 24년 만인 1800년에 49세 나이로 승하했다.

이 같은 정조의 49년 인생에서 크나큰 분수령은 역시 8세 때의 왕세손 책봉과 24세 때의 국왕 즉위였다. 특히 정조의 인생에서 결정적인 분수령이 되는 왕세손 책봉과 국왕 즉위 사이에 존재하는 17년 동안은 차기 왕으로서의 준비 기간임과 동시에 정조의 즉위를 방해하던 인사들과의 갈등 기간이기도 했다. 이 시기에 정조는 개인 일기를 쓰는 습관이 들었는데 이 습관이 정조의 기록정신에 큰 영향을 끼쳤다.

정적 숙청의 정당성 부각하는 데 개인기록 이용


▎춘천시 공지천에 만들어진 주교(舟橋). 정조가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묘소에 가기 위해 한강을 건널 때 이용한 배 다리로 조선시대에 사용하던 나룻배 25척을 복원해 이은 것이다. / 사진·중앙포토
조선시대 원자 또는 세자의 일기는 거의가 보양청이나 시강원에서 공식적으로 기록했다. 이는 마치 국왕의 일기를 국왕 자신이 기록하지 않고 승정원이나 춘추관에서 기록하던 것과 마찬가지로 원자나 세자 또는 국왕의 일기를 공식기관에서 기록함으로써 신뢰도를 높이려 한 것이었다.

이에 따라 조선시대의 원자·세자·국왕과 관련된 일기는 개인 일기가 아니라 공식일기인 <보양청일기> <동궁일기> <승정원일기> 등이 대표하게 됐다. 이런 전통에서 원자 또는 세자가 개인적으로 일기를 작성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원자나 세자가 개인 일기를 작성한다는 사실 자체가 예외적인 일인데 바로 그런 예외적인 사례를 정조가 보여줬다. 정조는 조선시대 왕들 중에서는 유일하게 어린 시절부터 직접 일기를 썼던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세손에 책봉된 8세부터 <존현각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그 이유는 세손의 처지가 남달랐기 때문이다.

세손 정조의 생부 사도세자는 세자에 책봉돼 대리청정을 하면서 영조와 격심한 갈등을 겪었다. 사도세자는 영조 33년(1757) 가을부터 살인을 하기 시작했고, 영조 34년(1758)에는 그것이 영조에게 발각되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영조는 사도세자의 대안으로 정조를 염두에 뒀고 그 결과 정조가 8세 되던 영조 35년(1759) 2월 왕세손에 책봉했다. 이렇게 왕세손이 된 정조는 자신의 언행에 각별히 조심해야 했다. 말 한마디나 행동 하나라도 자칫 잘못하다가는 자신의 신변은 물론, 생부 사도세자의 신변에도 크나큰 위험을 초래할 수 있었다.

훗날 정조는 자신의 일기 습관에 대해 ‘내가 춘저에 있을 때 일기를 쓰는 것이 곧 일과가 됐으므로 탁자 위에 항상 작은 책자를 비치했는데, 이는 조변(趙抃)이 매일 저녁 향불을 피우고 하늘에 고했던 뜻과 같다’고 회상했다.

세손 시절의 정조는 자신의 말 한마디 또는 행동 하나라도 혹 잘못된 것이 있을까 두려워하며 일기를 썼던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해 세손 정조가 두려워한 것은 바로 할아버지 영조였다. 세손 정조는 자신의 말 한마디나 행동 하나하나에 반응하는 영조의 대답, 표정 등등을 곰곰이 생각해보며 영조의 진짜 속마음이 어떤 것인지를 확인하고자 했다.

세손 정조는 낮에 많은 사람이 모인 자리에서 표출됐던 자신과 영조의 언행들을 일기에 기록하고 낮에는 미처 파악하지 못했던 영조의 속마음을 깊이 생각하며 자신의 언행을 반성한 것이었다. 이는 당시의 위험한 정치 상황에서 세손 정조가 살아남기 위한 방편으로 일기를 썼음을 의미한다.

이런 면에서 세손 정조의 개인 일기는 다분히 정치적이라고 하겠다. 이런 체험으로 정조는 즉위한 이후에도 기록에 대해 정치적 측면을 강조했다. 특히 정조는 대리청정 시기 및 즉위 초에 기록의 정치적 측면을 크게 중요시 여겼다.

세손 정조의 대리청정은 영조 51년(1775) 12월 7일에 공식화됐고, 그때로부터 채 3개월도 되기 전인 1776년 3월 10일에 세손은 국왕에 즉위했다. 세손 정조의 대리청정이 공식화되기까지 정후겸·홍인한 등의 방해가 극심했는데 정조는 즉위 직후 정후겸·홍인한 등을 역적으로 몰아 숙청했다. 정후겸은 정조가 즉위한 지 보름 만에 함경도 경원으로 유배됐고, 또 10여 일 후에는 홍인한이 여산에 유배됐다. 그리고 3개월 후 정후겸과 홍인한은 사약을 받고 죽었다.

정치적 목적 위해 <승정원일기>도 손대


▎1. 정조의 장례를 치를 때 능으로 가는 당시의 행렬을 세밀하게 묘사한 그림. 정조의 국장 과정을 담은 기록물인 <정조대왕국장의궤>에 실려 있다. 2. 조선시대 왕명 출납을 관장하던 승정원에서 매일매일 취급한 문서와 사건을 기록한 <승정원일기>. / 사진·중앙포토
이렇게 숙청된 정후겸·홍인한은 정조의 척족(戚族)이었다. 정후겸은 정조의 고모인 화완옹주의 양자였으며, 홍인한은 정조의 생모인 혜경궁 홍씨의 작은 아버지였다. 따라서 이들은 정조의 정치적 라이벌이자 척족이라는 두 가지 성격을 갖고 있었다. 정조는 이들의 숙청이 정당했음을 여러 방식으로 천명했는데 그중의 하나가 자신의 개인기록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정조는 정후겸과 홍인한을 숙청한 직후에 <명의록(明義錄)> <속명의록(續明義錄)> <명의록언해> 등을 간행해 자신의 숙청이 정당했음을 널리 알렸다. 그런데 이들 책들의 첫머리에 실린 자료가 바로 정조가 세손시절 직접 썼던 <존현각일기>였다.

<명의록>에 실린 <존현각일기>는 영조 51년(1775) 2월 5일부터 영조 52년(1776) 2월 28일까지의 대략 1년간의 기록이다. 세손 정조가 영조 51년 12월 7일에 대리청정을 시작하고, 영조 52년 3월 5일에 영조가 승하했으며, 3월 10일에 세손 정조가 즉위했으므로 1775년 2월부터 1776년 2월까지는 세손의 대리청정과 즉위에 관련해서 정후겸·홍인한의 방해가 절정에 달하던 시기였다.

정조는 이같이 결정적인 시기에 정후겸과 홍인한이 했다고 하는 온갖 역모 혐의를 다른 자료도 아닌 자기 자신의 개인 일기를 이용해 증명했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정조의 <존현각일기>는 정치적으로 활용된 대표적인 기록이라 할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정조는 정치적인 목표를 위해 <승정원일기>를 개작·말살하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예컨대 홍인한이 세손 정조의 대리청정을 반대한 역적으로 몰리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영조 51년(1775) 11월 20일에 있었던 영조와 홍인한의 만남에서 홍인한이 ‘세손은 세 가지를 알 필요가 없습니다’라는 ‘삼불필지(三不必知)’를 주장했다는 것이었는데 정조는 이와 관련된 <승정원일기> 내용을 개작하게 했던 것이다.

영조 51년(1775) 10월 7일에 영조는 거의 1년 만에 상참(常參)을 했다. 그날 오전 8시쯤에 영조는 경희궁의 금상문(金商門)에 전좌(殿座)하고 조정 중신들을 만났다. 초겨울의 아침 날씨에 영조는 끊임없이 기침을 해댔다. 당시 영조는 이미 82세였다. 기침이 너무 심해 영조는 상참을 제대로 하지도 못하고 방으로 돌아가야 했다. 하지만 기침은 그치지 않았다. 영조는 밤새껏 기침에 시달려 잠을 자지 못할 정도였다.

그날 영조는 자신의 목숨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실감한 듯하다. 당시 노인성 치매 증상을 보이던 영조는 정신이 온전할 때 후계 작업을 마무리짓고자 했다. 영조는 10월 7일 당일로 세손에게 ‘대리청정’을 명령하는 한편 화완옹주에게도 그 뜻을 밝혔다.

세손은 자신의 입장이 있는지라 자기 입으로 ‘대리청정’을 받아들이겠다고 할 수는 없었다. 실록에 의하면 대리청정 명령을 받은 세손은 ‘감히 대답하지 못했다’고 한다. 하겠다고 할 수도 없었고 못하겠다고 할 수도 없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누군가가 대신 나서야 했다. 노년의 영조를 편안히 살게 하기 위해서는 세손에게 대리청정을 맡기는 것이 순리라는 상소를 올려야 했다. 하지만 이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자칫하다가는 대역무도로 몰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 영조를 늙었다고 괄시하며 세손에게 아부하는 간신배라고 공격하면 꼼짝 못하고 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영조의 본심이 중요했다. 영조가 진정으로 대리청정을 원한다면 대역무도가 아니라 충신이 될 기회이기도 했다.

영조는 화완옹주를 통해 자신이 진정으로 대리청정을 원한다는 사실을 알리도록 했다. 당시 화완옹주가 영조의 편애를 받는다는 사실은 만천하의 사람들이 알고 있었다. 영조가 대리청정을 진정으로 원한다는 사실이 화완옹주의 입을 통해 전해진다면 많은 사람이 믿을 것이었다. 그렇다면 대리청정을 요청하는 상소를 올리겠다고 서로 나설 판이었다.

왕위 후계구도가 화완옹주의 ‘입’에 달렸는데


▎경기 화성시 안녕동에 있는 정조와 부인 효의왕후 김씨를 합장한 건릉(健陵). 사도세자 묘소인 융건릉 곁에 있다. / 사진·중앙포토
당시의 상황으로 본다면 영조의 후계구도는 화완옹주가 영조의 본심을 어떻게 전하느냐에 달려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조선왕조 500년 역사에서 왕의 후계구도가 일개 옹주의 입에 달렸던 적이 없었다. 오직 화완옹주만이 조선왕조에서 가장 심각하고도 중요한 왕위계승을 좌우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화완옹주는 처음에 대리청정을 늦출 수 없다고 하며 동의했다고 한다. 영조의 진심도 그렇고 또 영조의 상태도 잘 알기에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화완옹주는 곧바로 뒤로 물러서고 말았다.

<한중록>에는 ‘영조께서 대리하실 하교를 하신 후 안으로 화완옹주는 나라 큰일이니 모르노라’고 했다는 언급이 있다. 영조의 본심이 무엇인지 자신은 모른다는 말이었다. 당시 상황에서 이보다 더 무서운 말이 없었다. 대리청정을 명령한 영조가 진심으로 그랬는지, 아니면 괜히 충성심을 시험하려 그랬는지 화완옹주조차도 모른다면 아무도 알 수 없었다. 당연히 그 누구도 대리청정을 요청하는 상소를 올리려 들지 않았다.

영조는 자신이 대리청정을 명령한 지 한 달 보름이 가깝도록 누구도 상소를 올려 대리청정을 요청하지 않자 초조해졌다. 조선시대의 정치관행으로는 누군가의 상소가 있은 후 이를 가지고 논의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정치과정이었다. 상소가 올라왔다는 것은 곧 양반들 사이에 그런 여론이 형성되었다는 뜻이나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조의 본심을 확신하지 못한 당시 양반들은 그 누구도 대리청정을 요청하는 상소를 올리지 않았다.

영조 51년(1775) 11월 20일 오전 10시쯤에 영조는 경희궁 안에 있는 집경당으로 갔다. 그곳에는 원로대신들을 비롯해 영의정 한익모, 좌의정 홍인한 등이 있었다. 이 자리에서 영조는 자신이 노쇠해 더 이상 국정을 살필 수 없으므로 세손에게 대리청정을 시키겠다는 뜻을 밝혔다.

만약 사전에 미리 의견교환이 있었다면 이 문제는 금방 끝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사전에 논의된 것은 전혀 없었다. 10월 7일 이미 영조가 대리청정을 명령하기는 했지만 신료들은 그것이 본심인지 아닌지 알 길이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자칫 대리청정을 찬성하다간 역적으로 몰릴 수 있었다. 영의정 한익모와 좌의정 홍인한을 비롯한 모든 신료는 대리청정을 반대했다. 그들은 ‘주상의 건상이 점점 좋아집니다’라며 반대했다.

당시 영조는 82세였기에 언제 세상을 떠날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지만 82세까지 장수한 영조가 몇 년 더 살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다. 영조가 82세라는 이유만으로 대리청정을 찬성한다면 곧 영조가 속히 죽기를 바란다는 공격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므로 영조의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마음으로 대리청정을 반대한다는 주장도 가능했다. 영조가 신하들의 충성심을 떠보기 위해 대리청정 문제를 꺼냈다면 반대하는 사람이 곧 충신이었다.

반면 82세의 영조가 진정으로 쉬고 싶어서 대리청정 문제를 꺼냈다면 찬성하는 사람이 충신이었다. 노쇠한 영조를 조금이라도 편하게 해주는 것이 왕을 위하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문제는 영조의 본심이었다.

영조는 신료들이 자신의 본심을 모른 채 세손의 대리청정을 계속 반대하자 드디어 12월 7일 공식적으로 대리청정을 명령했다. 그로부터 4일 후인 12월 11일에 세손 정조는 동부승지 박상건을 시켜 11월 20일자 <승정원일기>를 전부 읽게 했다.

그런데 영조의 대리청정 명령 부분이 완전히 빠져있었다. 당시 <승정원일기>의 기록을 담당한 사람은 가주서(假注書) 박상집이었다. 의심이 든 세손은 ‘그때 사관으로 참석했던 자가 있는가?’ 하고 물었다. 그러자 11월 20일에 박상집과 함께 입시했던 기사관 성정진이 나서서 ‘대신이 삼불필지(三不必知) 등의 설로 대답하는 것을 신이 들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이를 근거로 세손 정조는 박상집에게 ‘삼불필지’ 라는 내용을 <승정원일기>에 써넣으라고 강요하였다. 하지만 박상집 자신은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없다고 주장하며 <승정원일기> 개작을 거부했다.

“고쳐주지 않으면 세손 사퇴하겠다”

현재 상황에서 누구 말이 맞는지 전혀 알 수 없지만 당시 박상집은 체포돼 문초를 받았고 <승정원일기>에는 홍인한이 ‘동궁은 노론이나 소론을 알 필요가 없고, 이판이나 병판도 알 필요가 없으며, 더더욱 조정의 일은 알 필요가 없습니다’라는 ‘삼불필지’ 발언을 한 것으로 기록됐다.

이렇게 세손 정조의 강요로 개작된 <승정원일기>의 내용이 진실인지 아닌지는 전혀 알 수 없다. 왜냐하면 정조는 그날의 대화를 자신이 직접 들었다고 주장했지만 정작 11월 20일자의 <존현각일기>에는 그날의 대화 내용을 생략하고 개작된 <승정원일기>의 기록만을 수록했기 때문이다.

그 이유를 세손 정조는 ‘<승정원일기>에 기록하지 않은 것을 내가 들은 것만으로 기록한다면 신중히 처신하는 도리가 아니므로 <승정원일기>의 기록만을 따른다’라고 했다.

하지만 이를 액면 그대로 믿을 수 있을까? 세손 정조는 박상집을 강압해 <승정원일기>를 개작하게 하고는 그 개작의 근거가 되는 자신의 개인 견문과 개인 일기는 삭제했는데 그 이유는 세손 정조의 해명 때문일 수도 있지만 아닐 수도 있기 때문이다. 현재의 입장에서 무조건 세손 정조는 정직하고 가주서 박상집은 부정직하다고 판단할 수는 없다. 분명한 사실은 당시에 세손 정조가 박상집을 강압해 <승정원일기>의 기록을 자신이 원하는 내용으로 개작하게 했다는 것이다.

한 발 더 나아가 정조는 즉위 후에 자신의 개인 일기를 공적인 기록인 <일성록>으로 확대시킴으로써 자신의 개인 일기의 권위와 신뢰는 높이고 <승정원일기>의 권위와 신뢰를 추락시켰다. 뿐만 아니라 정조는 자신에게 불리한 <승정원일기>의 기록을 무수히 말살했다. 정조의 기록말살은 주로 사도세자와 관련된 내용이었다. 예컨대 사도세자가 폐서인 되던 당일의 <승정원일기> 기록이 그런 사례였다. 세손 정조는 이런 명분으로 <승정원일기>의 기록말살을 요구했다.

“<승정원일기>로 말하면 그때의 사실이 모두 실려 있기에 모르는 사람이 없고 못 본 사람이 없으며, 본자는 전하고 들은 자는 의논해 세상에 퍼지고 사람들의 이목을 더럽히니 신의 사사로운 마음이 애통해 거의 곤궁한 사람이 돌아갈 데가 없는 것과 같습니다. (…) <승정원일기>가 없으면 임오년의 처분(영조 38년(1762)에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둔 처분)에 대해 진실을 밝힐 수 없을 것이라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대저 국조의 전고는 모두 간첩(簡捷)에 실려 있으며 쇠 상자와 돌집에 넣어 명산에 감추어 천추 만대가 지나도 옮길 수 없게 했습니다. 그러니 <승정원일기>를 어디에 쓰겠습니까? 아! <승정원일기>를 그대로 두고 안 두고는 전하의 처분에 달려 있습니다. 다만 신이 스스로 할 수 있는 처신은 오직 저위(儲位)를 손피(遜避)하고 죽을 때까지 숨어 살면서 다만 하루에 세 번 삼가 문안드리는 직분을 닦는 일 뿐일 것입니다.” -<영조실록> 권 127, 52년(1776) 2월 4일

세손 정조는 만약 자신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세손에서 사퇴하겠다는 배수의 진을 치면서까지 <승정원일기>의 임오년 처분 기사를 삭제해줄 것을 요구했다. 이런 요청을 받은 영조는 결국 <승정원일기>의 임오년 처분기사를 삭제하도록 했다.

길게 보면 역사의 죄인이자 패배자일 수도

만약에 세손 정조가 <승정원일기> 기록 자체에 대한 존중심이 있었다면 삭제요구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세손 정조는 <승정원일기>가 단순한 역사기록이 아니라 승정원의 업무와 관련된 기록이므로 정치적 측면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고, 그런 판단에서 <승정원일기>의 임오년 기사는 정치적으로나 실천적으로 유용하기보다는 혼란만 부추기므로 삭제해야 한다고 요구했던 것이다. 그래서 <승정원일기>를 개작하고 말살한 정조는 짧게 보면 승자라고 할 수 있으나 길게 보면 역사의 죄인이자 패배자라 할 수 있다.

<대학연의> ‘제왕위학지본(帝王爲學之本)’ 중에 ‘요순우탕문무지학(堯舜禹湯文武之學)’이 들어 있는데, 그중에 무왕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은나라를 멸망시킨 무왕은 즉위한 지 2일째 스승 강태공을 불러 황제(黃帝)와 전욱(顓頊)의 도에 대해 물었다.

그러자 강태공은 그들의 도는 단서(丹書)에 있다고 했다. 단서란 문왕의 침실 출입문에 붉은 새가 날아와 놓고 갔다고 하는 글이었다. 강태공은 그 단서를 보고 싶다면 3일간 목욕재계하라고 요구했다.

3일간 목욕재계를 끝낸 무왕이 받아본 단서에는 ‘공경하는 마음이 게으른 마음을 이기는 자는 길하고, 게으른 마음이 공경하는 마음을 이기는 자는 멸하며, 의로운 마음이 욕심을 이기는 자는 오래가고, 욕심이 의로운 마음을 이기는 자는 오래가지 못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하늘에 대해, 세상에 대해 그리고 역사에 대해 진정 공경하는 마음과 의로운 마음이 없다면 결국 패망의 천벌을 받을 것이란 경고라 할 것이다. 그럼에도 게으른 마음과 욕심에 빠져 역사를 왜곡하고 말살하려는 일들이 고금에 적지 않으니 두려운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신명호 - 강원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부경대 사학과 교수와 박물관장직을 맡고 있다. 조선시대사 전반에 걸쳐 다양한 주제의 대중적 역사서를 다수 집필했다. 저서로 <한국사를 읽는 12가지 코드> <고종과 메이지의 시대> 등이 있다.

201601호 (2015.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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