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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입수] 라종일 교수 秘파일 - 장성택의 죽음 둘러싼 미스터리 

“김정일도 원치 않았던 권력세습, 장성택의 참화 불렀다” 

박성현 기자 psh@joongang.co.kr
■ 김정일, 집권 초기엔 “우리 집안은 국가의 정체성이자 상징으로 남는다”며 3대 세습에 불가 의사 밝혀
■ 김일성, 측근 10명에게 은제(銀製) 권총 나눠주며 “김정일 주체노선에서 일탈하면 사살하라” 명령
■ 장성택, 1980년대 “북한 경제는 이미 파탄 났는데 또 어떻게 나겠느냐”고 황장엽에게 절망감 토로
■ 장성택, 1990년대 “조국은 수만 명씩 굶어 죽어가고 있다. 술을 마시지 않고는 견딜 수 없다”고 절규
■ 장성택 휘하 무장병력, 김정은 지시에 불응하면서 대대적인 피바람 숙청 불러


▎김정은 북한 국방위 제1위원장 집권 초기의 장성택 전 노동당 행정부장(왼쪽)은 정권의 2인자로서 자리매김했다. / 사진·중앙포토
국가정보원 해외·북한담당 1차장을 역임한 라종일 한양대 국제학부 석좌교수(75)가 장성택 전 북한 노동당 행정부장의 행적과 관련한 증언록을 펴낸다. 김일성의 사위이자 김정은 체제의 2인자였던 장성택의 비참한 최후는 소문만 무성했을 뿐 그 과정이 제대로 규명되지 않았다. 라 교수는 거의 20년 동안 김정일-김정은으로 이어지는 북한 후계구도에 관한 정보를 추적, 수집해왔다. 그 과정에서 북한의 내부 사정에 정통한 중국·일본·한국의 전문가 40여 명의 증언을 확보했다. 이들은 공·사적 인프라를 통해 북한 권부의 기밀을 접할 수 있는 인물들로 북한 내 궁중암투의 비하인드 스토리와 자료를 제공했다. 장성택 죽음의 비밀과 함께 김정일·김정은 세습체제 이행과정의 비사(秘史)를 담은 라 교수의 증언록을 <월간중앙>이 입수했다. 신국판 변형 280여 쪽에 이르는 증언록의 주요 부분을 발췌·공개한다. (주요 등장 인물의 육성은 컬러 서체로 처리했다.)

#“이대로 가다가는 우리의 경제가 파탄하지 않겠는가? 이 일을 어찌하면 좋겠는가?”

“그런 일은 절대로 없을 것입니다.”

“무슨 좋은 방책이라도 있는가?”

“우리 경제는 이미 파탄이 나 있는데 또 어떻게 파탄이 나겠습니까?”



▎북한이 수소폭탄 실험에 성공했다고 발표한 이틀 뒤인 1월 8일 평양 시민들이 거리로 나와 춤을 추고 있다. / 사진·중앙포토
1980년대 중반 북한 권력의 핵심에 있던 황장엽 북한 노동당 비서와 김일성 주석의 사위 장성택이 나눈 내밀한 대화의 한 토막이다. 북한은 1980년대 말부터 1990년대 후반까지 곡물 생산량이 급감하면서 배급제도가 붕괴하기 시작했고 국가의 근간도 흔들린다. 이런 사태를 미리 예감한 황장엽이 김일성종합대학 제자인 장성택에게 자신이 느끼는 위기감을 토로하자 장성택은 한술 더 떠 자포자기하는 반응을 보인다. 북한의 경제위기는 1990년대 들어 본격화하지만 장성택과 황장엽 등 두 권부 핵심은 1980년대 중반부터 북한 경제의 파탄을 미리 감지했던 셈이다.

#"또 한번의 세습에 의한 권력 승계는 없다. 김씨 가문은 앞으로 국가의 정통성과 정체성을 담보하는 상징이고 인민들의 충성의 대상으로만 남도록 할 것이다.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언젠가 정권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인사 열 명을 소집해 이런 말을 남겼다. 능력 있는 자들로 하여금 경쟁을 통해 권좌에 오를 기회를 준다는 뉘앙스를 풍겼다. 결과적으로 아들 김정은에게 권좌를 물려주기는 했지만 김 위원장조차 한때는 자식들에게 권좌를 물려주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유일영도체제를 철칙으로 하는 북한도 한때는 근대적이고 보편적인 권력 이양의 가능성을 모색했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라종일 한양대 국제학부 석좌교수가 가까운 시일 내에 펴 낼 <장성택의 길: 신정(神政)의 불온한 경계인(가제)>(알마출판사)은 이와 같은 북한 관련 생생한 정보를 가득 담고 있다.


▎미 항공우주국(NASA) 소속 우주비행사가 국제우주정거장에서 촬영한 한반도 야경 사진. 불빛이 뚜렷한 남쪽과 달리 북쪽은 어둠에 묻혀있다. / 사진제공·스콧 켈리 트위터
라 교수는 1998년 황장엽과 정례적으로 만나 북한 체제의 특성과 권력의 작동방식에 관해 많은 대화를 나눴다. 앞서의 문답도 당시 황장엽의 증언에 바탕을 둔 것이다. 라 교수의 장성택 관련 저서는 이 같은 황장엽 증언을 포함해 북한을 잘 아는 중국과 일본의 안보·경제 관계자들의 증언과 자료를 상당수 담고 있다. 그 수가 40~50명에 이르는 증언자 중에는 북한에 정통한 국내 인사도 있다. 이들은 일반인들이 쉽게 접하지 못하는 대북 정보통들이다.

라 교수는 1972년 경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로 학자의 길에 접어든 이래 1995년 새정치국민회의 지도위원으로 정치권과 공식적인 인연을 맺었다. 이후 김대중 정부 출범 당시인 1998년 3월 국가안전기획부 제1차장에 임명됐으며 노무현 정부가 출범한 2003년 2월엔 대통령비서실 국가안보보좌관으로 발탁됐다. 주 영국 대사(2001년), 주 일본 대사(2004년)에 임명되는 등 청와대, 국정원, 외교부 등 외교안보 분야 요직을 두루 섭렵했다. 2007년부터 2011년까지 우석대 총장을 역임한 데 이어 2011년부터는 한양대 국제학부 석좌교수로 재직 중이다.

한국 외교와 안보의 최일선을 걸어온 그는 20년 동안 습득한 정보의 진위와 경중을 가려 책을 썼다고 밝혔다. 오랜 집념의 산물인 셈이다. 그는 “출처를 밝히기 어려운 자료들을 구하면서 가능한 한 실제로 일어났던 일에 충실하려고 했다”고 설명했다. 구하기 어려운 단편적인 자료들을 근거로 주인공(장성택 전 북한 노동당 행정부장)이 처한 상황과 처신 그리고 특히 그의 내면생활을 재구성해 이야기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정보를 준 인사들은 지금도 북한에서 활동하거나 북한과 접촉하고 있어 철저하게 신분을 가렸고, 이 책에서는 주로 ‘자문인’이라는 명칭으로 등장한다. 이 책에 등장하는 자문인은 총 11명이지만 라 교수가 취재한 인사는 40~50명에 달한다. 자문인 11명은 그나마 자문인이라는 익명으로 인용하는 걸 허락한 이들이다. 나머지 인사는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신분이 드러날 가능성을 경계해 자문인이라는 명칭조차도 허락하지 않았다. 대신 이들의 증언은 특정 카테고리로 묶이지 않은 전체 원고에 녹여 쓰는 선에서 반영됐다. 라 교수는 “특별한 자료를 제공해준 분들은 대개 자신의 신분을 밝히기를 꺼렸고, 어떤 경우는 특별히 자신의 신분 노출을 막아 달라는 부탁을 했기 때문에 근거를 밝힐 수 없었다”고 익명 증언의 불가피성을 설명했다. 나아가 라 교수는 자문인들의 증언을 그대로 채택하기보다는 가능한 한 증언들을 교차 검증하려 했고, 사실 확인을 위해 여러 방법을 동원했다고 덧붙였다.

<월간중앙>이 입수한 원고는 상상은 했지만 확인할 수 없었거나, 상상 자체를 훌쩍 뛰어넘는 엄청난 얘기를 전한다.

북한 수소폭탄 실험과 공포정치의 뿌리


▎2014년 7월 신의주에서 제막식을 가진 북한 김일성 김정일 동상. / 사진·중앙포토
장성택 “핵무기와 경제발전 동시 추진할 수 있나”

북한이 최근 들어 수소폭탄 실험에 나서고 김정은이 극도의 공포정치를 펴는 배경에도 장성택의 죽음과 그의 부재가 있다. 증언에 따르면 장성택은 북한 권부 내에서도 핵 실험이나 장거리 미사일 개발에 시종일관 반대입장을 폈던 인물이기 때문이다. 장성택은 김정은의 고모이자 부인인 김경희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중국과 러시아를 포함해 세계의 거의 모든 나라가 북한 정권의 핵무기 개발을 반대하고 제재에 동참하고 있는 상황에서 핵무기와 경제 발전을 동시에 추진할 수 있겠는가?”

그는 또 2013년 2월 제 3차 핵실험이나 2012년 말 은하 3호 장거리 로켓 발사에도 비록 공개적으로 반대하진 않았지만 부정적인 입장이었다. 3월 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경제 건설과 핵 무력 병진 노선’을 채택할 당시에도 역시 정면으로 반대하지는 않았지만 개인적으로 유보적이거나 내지는 부정적이었고 측근들에게는 이런 문제들에 관한 우려를 이야기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특히 장성택은 유엔을 비롯한 국제사회 대부분이 북핵을 반대하는 상황에서 경제발전은 불가능하다는 확신을 가졌다는 증언이 이어진다. 다음은 장성택의 발언과 취지를 표현한 대목들이다.

“중국은 13억 명의 인구를 잘 먹여 살리고 있을 뿐 아니라 일본이나 미국과 견주는 혹은 그보다도 앞서는 발전을 이룩하지 않았는가?”

“우리가 조금만 생각을 바꾸면 무한한 외국의 자본과 기술을 끌어들여 단시간에 남한과도 견줄 수 있는 발전을 이룩할 수 있다.”

“우리는 왜 그렇게 할 수 없는가? 우리도 언젠가는 그렇게 해야 하지 않겠는가?”



▎1980년대 소련을 방문하기 위해 평양역을 출발하는 김일성을 환송하기 위해 나온 김정일과 황장엽(김일성으로부터 오른쪽 둘째). / 사진·중앙포토
2011년 12월 김정일이 숨을 거두자 김정은 국방위 제1위원장의 시대가 도래했다. 당시 라 교수는 김정은 체제에서 가장 큰 위험을 느껴야 하는 인물로 장성택을 지목했다. 이 때만 해도 장성택은 새 지도자의 후견인으로 부인 김경희(김일성 주석의 딸)와 함께 군의 대장 계급까지 받는 등 당과 군에서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다. 대규모 방문단을 이끌고 중국을 방문해서는 중국 정부로부터 국가 수반급의 대우를 받는 등 새 정권의 2인자 자리를 예약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런 점들이 역설적으로 장성택을 위험에 빠뜨리는 요인이 된다.

라 교수는 장성택 몰락의 조건은 이미 이때 완비돼 있었다고 안타까움을 표했다.

“정치의 세계에는 일반적으로 일정한 행태의 유형이 있다. 즉, 어느 권력 체제에서도 2인자로서의 처지는 매우 미묘하게 곤란한 것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행태는 특히 권력이 한 인물에 집중되어 있는 경우 그리고 권력 승계에 관한 공개적인 규칙이 결여된 체제에서 특히 그런 경향이 있다. 말하자면 북한 그리고 새 지도자의 권력 승계 이후 그 기반을 다지는 과정에서 장성택이 처한 상황이야말로 전형적으로 이 유형에 해당되는 일이었다. (…)그가 숙청을 당한 후에 나온 설명들은 이것이 경제적인 자원 분배를 둘러싼 권력 투쟁의 결과이었다거나 혹은 장성택이 김정은과는 달리 핵과 경제의 이른바 병진노선에 반대하고 개혁과 개방을 추진하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 등이었다. 이런 설명들이 모두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이런 구체적인 이유들과는 별개로 그가 처한 일반적인 상황만 보아도 그는 새로운 정권하에서 가장 눈에 뜨이는 숙청 후보 1호로서의 조건을 모두 갖추고 있었다.”

이쯤 되면 장성택은 자구책을 마련했어야 한다. 이를테면 정변을 통해 정권을 탈취하거나, 낙향하거나 위상을 크게 낮춰 정치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도 있다. 하지만 장성택은 어느 것 하나도 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북한은 손톱만큼이라도 정권에 위협이 될 만한 소지는 철저하게 통제하였기에 정변이란 생각도 할 수 없는 선택이다. 권력에서 멀어지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다. 우선은 의심을 받지 않고 은퇴를 하려면 건강상의 문제 같은 그럴듯한 명분이 필요한데 그렇지 않은 경우 오히려 의심을 살 수도 있다. 라 교수는 “장성택 스스로가 아마도 이런 선택을 생각할 만큼 슬기롭거나 여유가 있는 처지가 아닐 것”이라고 진단했다.

이후에 벌어진 장성택 처형 과정은 요즘 들어 극단으로 치닫는 김정은 공포정치의 예고편이었다.

고사총 등으로 총살의 강도를 높이는 이유


▎2013년 12월 처형 직전 군사재판정에 끌려나오는 장성택. / 사진·중앙포토
장성택의 최후는 처참했을 뿐만 아니라 측근들이 눈앞에서 참혹하게 사라지는 광경을 목도해야 했다. 라 교수에 따르면 김정은은 장성택의 최측근인 리룡하 행정부 제1 부부장과 장수길 부부장 체포 명령을 내렸다. 두 사람은 10시간도 버티지 못하고 장성택 관련 혐의를 모두 토해냈다. 보고서를 접한 김정은은 반혁명 분자들을 장성택 면전에서 총살하라고 명한다. 라 교수는 증언을 토대로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오전 10시경 군용차 한 대가 연병장 무대 옆에 와서 섰다. 그곳에서 온몸이 결박된 리룡하와 장수길이 나왔다. 국가안전보위부 특별 재판관이 판결문을 읽었다. ‘개인적 간부(장성택을 뜻함)를 맹종맹동하며 반당, 반혁명, 종파행위를 한 전 행정부 제1 부부장 리룡하와 장수길에게 사형을 언도하며 사형은 즉시 집행한다.’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두 사람을 겨누고 있던 기관총이 불을 뿜었다. 두 사람의 처형에 사용된 무기는 4신 고사기관총이었다. 북한의 처형 무기로 최근에 자주 보도되는 4신 기관총은 구경 14.5㎜ 소련제 ZSU 방공용 고사 기관총을 복사한 것이다. 보통은 중요한 시설에 대항공용으로 비치해 놓는데 이즈음 이 무기를 사형 집행용으로 쓴다.”

개인화기나 소화기로 총살이 가능함에도 파괴력이 큰 무기를 사용하는 것은 보는 이로 하여금 공포감을 극대화하려는 의도가 있기 때문이다. 총살형에 자주 노출되면 죽음에 둔감해진다. 총살의 강도를 높여야 공개 처형의 효과도 비례해서 커진다. “두 사람의 사형수는 시신을 알아볼 수 없이 찢겨 나갔다. 그리고는 이미 찟겨져 남은 잔해는 화염방사기로 불태워 없어졌다. 가깝게 지내던 측근 두 명이 그렇게 잔인하게 살해당하는 장면을 목격한 장성택은 앉은 채로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라 교수가 이 책을 쓰게 된 동기도 장성택의 죽음과 맞물린다. 그는 책의 서문에서 “그의 숙청 소식과 함께 그가 처참한 방식으로 사형을 당하여 시신의 보존이나 무덤도 없다는 매체들의 보도를 보고 그에 관한 책을 쓸 생각을 하였다”고 적었다. 그는 “우리에게도 깊은 관련이 있는 특이한 상황에서 특이한 생애를 살다간 사람이다. 그런 사람에 관한 기억과 증언은 그 사람의 육신이 사라지는 것과 함께 없어지면 아니 되기 때문”이라고 부연설명을 하고 있다.

장성택의 시대정신과 위험한 곡예


▎북한을 탈출한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왼쪽)와 김덕홍 전 노동당 자료실 부실장이 1997년 4월 20일 서울 김포공항에 도착하고 있다. / 사진·중앙포토
“(북중) 두 나라 헤어져도 적은 되지 않도록 하자”

수령의 사위에서 시신을 수습하지도 못할 정도의 비참한 죽음을 맞이한 장성택은 현실을 직시하고 시대를 앞서간 몇 안되는 북한 엘리트로 기록된다.

그는 1988년 서울올림픽이 치러질 당시 중국의 지인에게 한중 수교를 예상하는 발언을 했다. 심지어 중국이 북한과 단교하는 사태로까지 관계가 악화될 수도 있음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당시 남한은 88 올림픽을 통해 국제적 위상을 높여가고 있었다. 이 무렵 장성택은 연수차 북한에 장기간 머물던 중국 공안 부문 고위층 출신 인사와 가까이 지냈다. 이 인사가 연수를 마치고 귀국할 즈음 장성택은 아주 인상적인 말을 남긴다. 공항까지 환송 나온 장성택은 이 인사가 비행기에 탑승하려던 순간 소곤소곤 귓속말로 메시지를 전했다. 이 인사는 두 귀를 의심해야 했다. 장성택은 주변에 들리지 않을 정도의 낮은 음성으로 이렇게 말했다. “우리 두 나라가 헤어지게 되더라도 최소한 적은 되지 않도록 노력합시다.”

북·중은 자타가 공인하는 혈맹이자 사회주의 동맹국이다. 난데없는 ‘헤어지더라도’, ‘적’과 같은 단어에 이 인사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이때는 한중 수교가 공식적으로 거론되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북한 내부의 누군가가 이런 그림을 그린다는 것도 상상하기 어려웠다. 더구나 수령의 사위되는 사람이 그런 말을 입에 올렸다. 장성택은 이때 이미 중국이 남한과 외교관계를 맺으라는 것을 내다보고 있었고 어쩌면 사태가 북·중 간에 단교까지 갈 수도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 중국 인사는 훗날 장성택 처형 소식을 접하고는 “김정은 정권에서 계속 중요 인사들의 숙청과 처형극이 이어질 것”이라고 예상했다.

장성택의 활동반경도 남달랐다. 예고 없이 북한의 해외 거점에 나타나곤 했다. 주로 유럽 그중에도 프랑스나 이태리, 스위스, 북유럽 국가를 제 집 드나들듯 했다. 유럽 출장 중 장성택은 유네스코의 북한 대표부 참사로 등록된 덕분에 외교관 여권을 사용했다. 장성택은 자기 이름의 한두 자를 고친 가명을 사용하곤 했는데 ‘장승택’, ‘장상택’ 등으로 행세했다.


▎2002년 경제시찰단을 이끌고 남한을 찾은 장성택(오른쪽 둘째)이 에버랜드를 방문해 어린 백호(白虎)를 보고 있다. / 사진·중앙포토
외부 세계와 수시로 접촉하는 관계로 국내에 갇혀 지내는 사람들과는 세상과 북한을 보는 눈이 달랐고 북한 내부 현실에 괴로워했다는 증언도 나왔다. 해외 출장길에서 그의 본심이 여과없이 표출되기도 했다. 특히 만취 상태에서 그런 일이 잦았다고 한다.

해외 출장에 나선 장성택은 술을 마시면 정신을 잃을 정도로 만취하기도 했다. 평소 같으면 마음속 깊이 눌러뒀을 갈등과 고민이 이성이 이완된 틈을 비집고 나왔다. 그를 호텔 방까지 부축한 북한 외교관은 그가 쏟아내는 말을 듣고 기겁했다. 거의 인사불성에 빠진 그의 옷을 벗기고 넥타이를 풀어주자 장성택은 눈을 뜨고는 미쳐 뭐라고 할 새도 없이 폭포수 같은 말을 쏟아냈다.

“동무, 큰일났어. 술을 마시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어. 조국은 지금 말이 아니네. 사람들이 수만 명씩 굶어 죽어가고 있네. 그야말로 진짜 고난의 행군이네. 조국에서 굶어 죽어가는 당원들, 간부들, 인민들을 생각하면 잠이 아니 오네. 술이라도 마셔야지. 굶어 죽는 사람들 불쌍해서 어떻게 하면 좋은가. 우리도 중국처럼 개혁 개방을 하면 얼마나 좋겠는가.”

‘원수님 지시’ 앞서는 ‘1호동지(장성택) 승인’이 화 불러

장성택은 믿을 만한 지인들에게는 북한 경제의 절망적 미래를 얘기하곤 했다. 경제를 회복해 국가 발전의 새 전기를 마련하고 싶다는 포부도 밝혔다. 하지만 이 말을 듣는 이들은 공감은 하면서도 후환을 걱정해야 했다. 장성택이 실각하고 처형되기 전부터 그의 측근이라는 이유만으로 위험이 닥칠 것을 우려한 사람들도 있었다는 게 북한 전문가들의 전언이었다.

이처럼 폐쇄적이며 유일영도체제를 생명으로 하는 북한에서 장성택은 자신의 명운을 건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해왔다.

장성택은 자신이 생각하는 개혁에 유리한 환경을 만들고자 국가 안전보위부, 군부와 같은 권력기관을 견제하는 한편으로 노동당에 개혁 성향의 인사들을 포진시킨다. 또 권력 행사와 유지에 필수적인 자금을 확보하는 방편으로 외화벌이 사업에 간여한다. 이 과정에서 군부 등과 갈등을 빚으면서 끝내 김정은의 심기를 건드리는 상황에 이른다. 당시의 정황을 라 교수는 이렇게 전한다.

“2013년 후반기 김정은이 서해안 군부대를 시찰할 때 군의 수뇌부들이 수행했다. 이들은 현장에서 군이 자금난으로 매우 어렵다고 했다. 그 원인은 서해의 외화벌이 양식장을 당의 행정부가 관할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런 보고를 접한 김정은은 그 시설을 군에게 돌려주도록 지시를 하였지만 잘 이행되지 않았다. 장성택이 이 지시를 바로 이행하지 않고 시간을 끌었기 때문이다. 이 사건은 측근이 체포되는 것으로 끝났지만 더욱 큰 사고가 기다리고 있었다. 김정일 시대에 조성된 기존의 비자금을 39호실로부터 당 행정부 산하의 54국으로 모아 행정부가 관리하는 승리무역회사의 연유사업소에 지원되도록 했다. 실제 문제의 발단은 이렇게 작은 곳에 있었다.”

나쁜 일은 이렇게 겹쳐서 일어나는 걸까? 2013년 어느 날 회계장부를 들여다보던 김정은은 금액이 너무 작다고 여겨 서기실 부부장을 불러 다음과 같이 경위를 추궁했다.

“어째서 비용이 이렇게 빈약한가? 선대에서는 어떻게 관리했었는가?”

가뜩이나 장성택에 불만이 있었던 서기실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해 김정은의 언짢은 심경에 불을 붙였다.

“장군님은 39호실에 자금을 모아 장군님의 혁명사업에 쓰게 하셨는데, 지금은 당 행정부에서 자금을 관리하고 마음대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잡지 않으면 안 됩니다.”

당시 김정은은 상세한 내막을 알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하지만 여러모로 마음에 부담을 주던 장성택이 등장하자 모든 자금을 다시 39호실로 돌려놓으라고 지시한다.

그러나 지시를 받고 현장에 도착한 병력들이 승리무역회사 연유사업소로 진입하려다 무장 경비원의 제지를 받는다. ‘원수님의 지시’라고 해도 통하지가 않았다. 다음은 양측의 대화록이다.

“들어가려면 1호동지의 승인을 받아 오라.”

“1호동지란 누구인가?”

“장 부장 동지다. 그분의 지시를 받고 와야 들어갈 수 있다.”


마침내 곪아가고 있던 문제가 터지게 된 셈이었다.

다음은 이 장면과 관련한 라 교수의 기록이다. “이 보고를 받은 김정은은 불같이 화를 냈다. 당장 호위사령부에 무력을 동원해서 현장을 진압하고 보고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중무장한 호위사령부 병력이 사업소를 점령하고 이 사실을 보고했다. 김정은으로서는 한동안 마음속 깊은 곳에서 잠복해 있던 복잡한 감정들이 한순간에 정리가 되는 계기였다.”

김정은은 조직지도부의 조연준 제1부부장에게 연락해 장성택을 검열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행정부와 오랫동안 반목해오던 조직지도부는 기다렸다는 듯이 두 팔을 걷어붙였다. 유일영도체제에 걸림돌이 되는 요인을 제거하는 것을 존재 이유로 하는 조직지도부는 장성택의 비리와 월권, 종파행위 등 각종 비위 사실이 기록된 보고서를 작성한다. 여기에는 국가안전보위부도 한몫을 한다.

라 교수는 김정은으로의 권력 이양이 장성택 처형이라는 참극을 불러온 것으로 본다. 김정일은 수명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서 아들에게 후계수업을 시킨다. 자신이 한때 공언했던 3대 세습 불가론은 자취를 감췄다. 북한의 체제가 온갖 무리를 감수하면서까지 권력세급을 이어갈 수밖에 없다는 걸 뜻했다. 이는 정치의 실패다. 경쟁을 통해 권좌에 오르는 절차를 제도화하는 데 실패한 것이다. 제도화의 실패는 대가를 요구한다. 세습체제에서는 선대의 중신들 중에서 엉뚱한 희생양을 낳게 마련이었다. 그 중 하나가 제2인자의 소리까지 듣던 김정은의 고모부 장성택이었다고 라 교수는 적고 있다.

공화국 존속 위한 김일성, 김정일의 승부수


▎2002년 서울의 한국무역협회를 방문한 북한 경제시찰단의 박남기 단장(오른쪽)과 장성택(가운데). / 사진·중앙포토
김정일 “김씨 가문은… 인민들의 충성 대상으로만 남을 것”

김일성, 김정일이 생전에 총신(寵臣)들에게 남겼다는 발언은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 파격을 담고 있다. 증언자들은 현장에 있던 김일성, 김정일 측근에게서 직접 들었다는 얘기를 라 교수에게 옮겼고, 라 교수는 신빙성이 높다고 여겨지는 대목을 추려 원고를 작성했다.(이보다 더한 얘기도 많았지만 정보 제공자의 신분이 노출될 가능성이 있는 증언은 싣지 않았다고 라 교수는 말했다.)

예컨대 김일성 주석은 언제부터인가 건강이 예전만 못하다고 느끼던 시점에 측근들을 불러모아 후계와 체제 문제에 대한 중대한 발언을 남겼다. 다음은 라 교수가 전하는 당시의 정황이다.

“부친인 위대한 수령은 건강에 한계를 느끼기 시작할 무렵, 자신이 가장 믿는 측근 열 명을 내밀히 불렀다. 그리고 그는 손잡이가 은으로 되어 있는 권총 열 자루를 꺼내어 각자에게 하나씩 나눠주었다. 그는 엄중한 태도로 그들에게 일렀다. 만약 자신이 죽은 후 후계자인 아들이 자신의 노선에서 일탈해 함부로 체제 개혁에 손을 댄다면, ‘누구라도 바로 이총으로 그를 사살하라’고 명령했다.”

비록 단서를 달기는 했지만 극단적인 조치를 명령한 김일성의 속내에 대해 라 교수는 다음과 같은 설명을 달았다. 김일성 입장에서 남한이 없었더라면 다른 사회주의 국가들 마냥 개혁·개방을 못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북한은 남한과 체제 경쟁, 정통성 경쟁을 하고 있던 나라다. 개혁·개방을 한다는 것은 남한이 걸어간 길을 뒤늦게 따르는 셈이 된다. 결국 광복 후 남한의 길이 옳았고 북한은 틀렸다는 걸 인정하는 꼴이다. 반세기 가까운 체제 경쟁에서 패배를 자인하는 결과로 이어진다.

라 교수는 김일성이 권력을 독점하고 장악하는 일에만 몰두했을 뿐 합리적인 제도를 통한 승계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고 진단했다. 아들에게 권좌를 물려주는 식으로 가장 중요한 문제를 회피했다는 것이다. 라 교수는 “권력 승계의 합리적인 제도화 없이 어떤 정권도 안정되기 어렵다는 상식이 김일성에게는 별 의미가 없었다”고 기록했다. 이런 승계 문제에 봉착하면서 북한이 지금과 같은 대안이 없는 상황으로 내몰리게 됐다는 게 라 교수의 분석이다.

본인이 부자세습으로 권좌에 오른 김정일은 3대 세습은 무리라고 생각하는 대목이 이 책에 나온다. 어느 날 김정일은 가장 믿을 만한 측근 열 명을 소집했다. 정권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인사들이었다. 그는 그들에게 진지한 말로 다음과 같이 지시했다.

“또 한 번의 세습에 의한 권력 승계는 없다. 김씨 가문은 앞으로 국가의 정통성과 정체성을 담보하는 상징이고 인민들의 충성의 대상으로만 남도록 할 것이다. 실제 나라의 운영은 너희들이 맡아서 해야 한다.”

라 교수가 지인으로부터 이 증언을 들은 때는 2006년이다. 김정은이 이 말을 하던 현장에 있던 측근으로부터 직접들은 얘기를 접한 것이다. 김정일이 ‘국가의 운영은 오늘 여기에 온 당신들이 맡아라. 어떤 방식으로든지 함께 나라를 운영할 방안을 생각해보라’는 뜻으로 이런 말을 했다고 받아들여졌다.

이와 관련해 라 교수는 김일성 가문과 일본 천황가의 공통점과 차이점에 주목한다. 김일성 일가는 일본의 천황가나 마찬가지로 살아있는 ‘신’과 같은 존재다. 김일성 가계는 공민증도, 일체의 법적인 수속도 밟지 않는다는 점에서 일본의 황실과 같다. 김일성 가계는 천황가와 달리 국정의 아주 세세한 분야까지 모든 실권을 장악한다는 게 본질적으로 다른 점이다. 김정일은 가계의 상징성을 강조함으로써 실권을 놓겠다는 의지를 내비쳤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세습왕정이 존속하는 이면에는 권력의 많은 부분을 포기하고 상징적 존재로 변신하는 결단이 자리한다.

김대중, ‘천황가’ 구상에 “그게 될 말인가?”

김대중 전 대통령은 김정일의 천황가 발언을 접하고는 고개를 갸웃했다고 라 교수는 전한다. 사석에서 김정일이 자신의 사후 일본의 천황제와 유사한 제도를 고려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김대중 전 대통령은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게 될 말입니까? 그런 일이 되겠습니까?” 라 교수는 김 전 대통령이 옳았다고 회고한다. 라 교수는 “숙고, 장고 끝에 나온 이야기지만 결과는 아무것도 없었다”면서 “김정일이 자신의 측근들을 부른 그날의 어전 ‘중신 회동’은 반세기 넘게 이어온 정권사의 극적인 클라이맥스이면서, 우스꽝스러운 비(非)사건 혹은 무(無)사건이었다”고 아쉬움을 피력했다.

후계 문제는 북한 내부에서도 초미의 관심사가 아닐 수 없다. 특히 김일성 가계 혹은 최고위층 주변에서는 차기 권력의 향배를 놓고 여러 가지의 모색이 있었다고 관계자들이 증언했다. 후계자 문제에 가장 먼저 관심을 보인 것은 말년의 고영희였다. 김정철·김정은의 생모인 고영희는 2004년 숨을 거둔다. 2000년대 들어 고영희는 “첫째 아들인 김정철을 후계자로 하면 어떻겠는가”라고 의중을 내보였다는 증언도 있다.

후계구도와 관련해서는 독특한 신분의 여성이 등장한다. 라 교수가 만난 전문가들 중에서는 노동신문의 량순 기자가 후계 문제를 거론했다고 전했다. 노동신문의 논설원 겸 본사 정치보도반에서 일하던 량 기자는 미모에 글재주도 뛰어났지만 김정일과도 아주 가까운 언론인이다. 정치보도반은 김정일의 동정을 다루는 부서로 량 기자는 다른 기자들의 접근이 차단된 특종 기사를 자주 터뜨렸다. 수령 숭배에 관한 기사를 써서 김정일의 신임이 돈독했으며 야간 회식에도 초청받았다. 같은 노동신문에 근무하는 그의 남편도 김일성상을 받는가 하면 김정일에게서 자동차를 선물받기도 했다. 량 기자는 ‘쪽잠과 죄기밥(주먹밥)’이라는 기사로 주목을 받는다. 김정일이 앉은 자리에서 잠시 눈을 붙이고 주먹밥으로 식사를 때우면서 현지지도에 임한다는 글로써 큰 반향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량 기자가 처음으로 수령 가문 안에서 김정일의 후계를 세우는 문제를 거론했었다. 그러나 당시 김정일은 후계 문제에 시급한 관심이 없었다. ‘아이들도 너무 어려서 자신이 아직 건강한데 무슨 후계 문제인가’하고 일축하고 말았다. 2000년대 중반까지도 김정일은 후계 문제는 거론하지 말라는 태도였다.”

김정일은 말년으로 가면서 건강 이상설이 꾸준히 제기됐고, 2008년에는 뇌졸중이 발병했다는 관측도 나왔다. 이와 관련해 라 교수가 만난 사람들은 김정일이 의식을 회복하고 외부 활동은 했지만 건강은 최악이었다고 증언했다. 특히 이미 고인이 된 김일성을 마치 생존하는 인물처럼 언급해 주변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

뇌졸중이 발병한 뒤 병석에서 일어난 김정일은 어느 날 함흥에 있는 2·8 비날론 공장 현지지도에 나섰다. 이 공장은 월북자 출신의 화학자 이승기 박사가 김일성의 지시로 만든 공장이다. 석회석을 주원료로 삼아 화학섬유 비날론을 생산했지만 섬유의 질이 떨어지고 전력을 많이 소비하는 통에 가동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하지만 비날론 공장은 김정일의 방문에 즈음해 설비를 정비하고 생산라인을 전면 가동했다. 시찰에 나선 김정일은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제품을 보고 흐뭇해 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동무들 이 비날론을 포장하시오. 수령님께 가져다 보여드리면 얼마나 기뻐하시겠소!”

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아연실색했다. 할 말을 잃고 서로를 쳐다볼 뿐이었다. 병세가 짙어지면서 김정일은 때때로 극과 극을 오갔다. 주변을 공연히 의심하면서 이것저것 앞뒤가 맞지 않은 지시를 했다.

장성택 “(김정일 후계) 막내 아드님이 어떻습니까?”

김정일은 이처럼 뇌줄중에서 어렵게 회복은 했지만 제대로된 활동이 어려운 상황에 직면했다. 그의 참모들은 해외에서 의료진을 초빙했다. 모두 엄격하게 비밀이 보장되는 가운데 이뤄진다. 중국의 한의사들을 불러들였을 당시에는 김정일 병세에 관한 정보 유출을 막고자 가케무샤(대역)도 동원됐다. 라 교수는 당시 상황과 관련된 증언을 다음과 같이 전한다.

“중국에서 한의사들을 불러 들였을 때에는 그를 포함해서 그와 유사한 체형의 유사 질환을 앓는 10여 명의 환자를 얼굴을 가리고 함께 진맥하도록 해서 그의 건강에 관한 정확한 정보가 중국 측에 흘러 들어가지 않도록 했다. 중국에서 온 한의사들은 기본적으로 같은 증상의 환자를 여럿 진찰했지만 그들 중 누가 김정일인지 알 수 없었다. 당연히 김정일의 건강 상태에 관한 제대로 된 정보를 챙길 수도 없었다. 사람들에 따라 증상의 경중 차이가 천차만별이었기 때문이다.”

김정일이 뇌졸중으로부터 의식을 회복한 후 처음 당면한 문제가 후계 문제였다고 라 교수는 밝히고 있다. 라 교수는 다음과 같은 정황을 소개한다.

“김정일은 병상 곁에 근심스럽게 서 있는 사람들, 즉 황순희, 김옥 그리고 정철, 정은, 여정까지 내보내고 김경희 부부만을 남게 했다. 그러고는 바로 ‘혁명의 후계자’를 누구로 해야 하는가 물었다. 김경희는 이때 이미 술과 마약 중독으로 몸과 마음이 쇠약한 상태였다. 그녀는 말없이 남편을 쳐다보았다. 장성택은 평소 김정일이 마음을 두고 있는 쪽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자신도 해외에서 분방한 생활을 보내고 있는 정남이나 유약한 정철보다 정은이 낫다고 생각했다. 그는 어린 정은을 잘 보좌하면서 천천히 자신이 구상한 개혁을 추진할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장성택은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막내 아드님이 어떻겠습니까?’

김정일은 즉각적인 반응은 없었지만 안면에 얼핏 안도와 만족스러운 표정이 서렸다. 한참 만에 김정일이 말했다.

‘그래, 막내를 세웁시다. 그러나 내가 공개하라고 할 때까지 이것은 비밀로 하십시오’”

황장엽-장성택 사제간의 에피소드


▎2012년 11월 김정은 국방위 제1위원장(오른쪽 둘째)과 함께 말을 타고 시찰에 나선 현영철 당시 군 참모장(왼쪽)과 장성택(오른쪽). / 사진·중앙포토
지난해 10월 하태경 새누리당 의원은 황장엽이 2002년 방남(訪南)한 장성택에게 ‘조국과 인민을 위한 결단’을 촉구하는 쪽지를 전달하려 했으나 국가정보원이 막았다고 주장해 파문이 일었다. 이에 대해 김대중평화센터는 성명을 내고 “당시 장성택은 김정일 위원장의 최측근 실세였다”면서 “그런데도 황장엽 전 비서가 ‘북한 권력을 바꾸라’는 내용의 쪽지를 전달하려 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되지 않는다”고 반박했다. 이와 관련해 라 교수는 황장엽이 장성택에게 쪽지를 전달하려 한 게 사실이라는 입장에 섰다.

“10여 년 전 장성택이 대규모 경제사절단을 이끌고 남한을 방문했을 때의 이야기다. 남한에서 망명 생활을 하던 황장엽은 가까이 지내던 탈북 망명 인사를 급히 찾았다. 그리고 그에게 밀봉된 봉투 둘을 주면서 중요한 문제이니 집에 가서 혼자만 열어보라는 말을 했다. 첫 번째 봉투에서는 다른 봉투에 들어 있는 쪽지 하나를 장성택의 시내 방문 같은 기회에 그에게 접근하여 포켓에 넣어 주는 식으로 몰래 전해주라는 말씀이 있었다. 두 번째 봉투에서 나온 쪽지에는 이런 글이 적혀 있었다.

‘장성택, 지금도 늦지 않았다. 조국의 반역자가 되겠는가? 아니라면 남한에 남아라’

물론 이 글은 전달되지 않았다. 설혹 전달이 되었을지라도 그 당시 장성택이 남한에 망명할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그러나 이 일화는 몇 가지 흥미 있는 사실을 시사해준다. 그중 하나는 적어도 황장엽은 북한의 김정일 체제에 관해 본인과 장성택 사이에 상당한 공감의 영역이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생판 엉뚱한 인물에게 그것도 현재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에게 탈북을 권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황장엽, 권력자의 비뚤어진 사생활 윤리에 환멸

황장엽은 국가 권력자들의 사생활 윤리를 접하면서 체제에 대한 환멸을 느낀 것으로 나온다. 라 교수는 “작다면 작은 일이지만 그가 김정일에게 환멸을 느꼈던 일 중의 하나”라며 다음과 같은 대화를 소개한다.

“권력과 사생활의 윤리에 관해서 황장엽은 이런 일화를 이야기해준 일이 있다. 그가 김정일에게 환멸을 느꼈던 일 중의 하나이다. 교통 수단이 부족한 평양에서 흔히 젊은 남자들이 자전거 뒷좌석에 여인들을 태우고 다니는 일이 있었는데 어느 날 이것을 목격한 김정일이 ‘풍기문란’을 이유로 금지시켰다. 황장엽은 마음속에서 자기는 온갖 퇴폐한 일을 일상적으로 하면서 교통 수단이 없는 일반인들의 작은 편의도 금지하는 것에 관하여 반발을 넘어 한심하게 여겼다는 말씀이었다.”

북한의 현실에 답답함을 느낀 황장엽은 그나마 막다른 골목에서 장성택과 교감을 시도했던 것이다.

라 교수는 책의 끄트머리에서 장성택의 죽음을 애석해 하는 이들이 많다고 적고 있다. 개혁·개방을 통해 북한을 정상적인 국가로 이끌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인물이 사라졌다는 이유에서다. 당분간 그 같은 인물이 나오기는 어렵다고 라 교수는 전망한다. 그는 “북한에서 장성택 같은 인물이 나오려면 적어도 10년은 더 기다려야 한다고 말하는 분들도 있다”는 말로 아쉬움을 나타냈다.

- 박성현 기자

201602호 (2016.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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