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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호의 ‘조선왕조 스캔들’(14)] 후대의 비극 부른 세종의 ‘편애’ 

마흔 나이에 이르러 얻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영응대군… 늦둥이 막내아들 위해 최고 성군이 혼인·이혼·재혼 등 비상식 저질러 

신명호 부경대 사학과 교수

▎세종대왕은 긴 설명이 필요없는 조선왕조 최고의 성군이지만 막내아들에 대한 편애로 측근 인사 등에 다소 오점을 남기기도 했다. 드라마 <대왕세종>에서 세종대왕 역의 배우 김상경이 신하들과 정사를 논하고 있다.
세종과 소헌왕후 심씨 사이에는 8명의 아들이 있었고 그들은 8대군이라 통칭됐다. 8대군 중 절반인 4명이 부왕 태종의 승하 후에야 출생했다. 세종의 즉위 후 생모 원경왕후와 부왕 태종이 연이어 승하했기 때문이다.

세종은 태종의 3년상이 끝나는 해부터 소헌왕후와 합방하고 다음해부터 3년간 내리 아들을 봤다. 그렇게 해서 재위 7년째인 1425년(세종 7)에 다섯째 광평대군이 태어났고, 다음해에는 여섯째 금성대군이 태어났으며, 그 다음해에는 일곱째 평원대군이 태어났다.

그런데 평원대군을 본 후 7년 동안 세종과 소헌왕후 사이에 자식이 없었다. 그 사이에 세종은 신빈 김씨와 사랑에 빠져 있었다. 원래 신빈 김씨는 공노비로 내자시(內資寺)의 여종이었다.

이런 신빈 김씨가 궁녀로 입궁하게 된 계기는 세종의 갑작스러운 즉위였다. 신빈 김씨가 13세 되던 해 세종은 22세의 나이로 조선의 제4대 왕이 됐다. 세종은 태종의 셋째 아들이었으므로 세자가 아니었다. 큰형 양녕대군이 태종에게 불신을 받아 폐세자 됨으로써 세자가 됐고, 갑자기 왕위에 올랐던 것이다.

세종의 즉위와 더불어 궁녀 충원이 시급한 문제로 대두됐다. 부왕 태종과 생모 원경왕후가 살아 있어 이들의 궁녀를 빼낼 수 없었던 데다가 폐세자 됐다고 해도 양녕대군을 모시던 궁녀들을 세종과 소헌왕후의 궁녀로 쓸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수많은 궁녀가 새로 충원됐는데 그중의 한 명이 신빈 김씨였다. 처음에 신빈 김씨는 소헌왕후의 지밀궁녀로 입궁했다. 소헌왕후가 일곱째 평원대군을 임신하던 즈음, 세종은 신빈 김씨와 사랑에 빠졌다. 그 결과 평원대군이 태어나던 비슷한 시점에서 세종과 신빈 김씨 사이에도 첫째 아들이 태어났다. 이후 12년 동안 세종과 신빈 김씨 사이에 아들 여섯과 딸 둘이 태어났다.

그 12년 사이에 세종과 소헌왕후 사이에서 태어난 막내아들이 영응대군이었다. 그때가 1434년(세종 16) 4월이었다. 당시 세종은 38세였고 소헌왕후는 40세였다. 조선시대의 기준으로 보면 ‘기적’과 같은 일이었다.

“너는 15세 이전에는 나를 아버지라 불러라”


▎서울 광화문광장에 있는 세종대왕 동상이 마치 ‘눈옷’을 입은 듯하다.
세종의 입장에서 보면 영응대군은 40세 가까이 돼 얻은 막내아들이었다. 말 그대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막내아들이었다. 세종은 이 영응대군의 양육을 다른 사람이 아닌 신빈 김 씨에게 맡겼다. 영응대군은 부왕 세종과 생모 소헌왕후는 물론 신빈 김 씨로부터도 극진한 사랑을 받으며 자라났다. 영응대군 신도비에는 세종이 대군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이렇게 묘사돼 있다.

“영응대군은 나면서부터 얼굴이 수려하고 품성이 총명해 세종께서 기특하게 여겨 항상 무릎 위에 앉히고 즐거워했으며 보호도 극진히 했다. 커서도 총애와 보살핌이 날로 두터워 내려주는 물건이 헤아릴 수 없었다. 음식이 궁궐에 들어오면 세종은 반드시 영응대군에게 나눠주고 먹기를 기다렸다가 잡수시곤 했다. 또 궁궐 밖에 행차할 때는 반드시 데리고 다녔으며, 궁궐 안에서도 잠시도 떨어져 있지 않았다. 이에 앞서 모든 왕자들은 궁중에서 주상을 진상(進上)이라 불렀는데 명령하기를 ‘너는 15세 이전에는 나를 아버지라 부르고 어머니만 진상이라 부르라’ 했으니 영응대군이 사랑을 받음이 이와 같았다.”

조선시대 궁궐에서는 안 좋은 일이 생기면 재액을 피하기 위해 궁궐 밖으로 나가는 일이 종종 있었는데 이것을 피접(避接)이라고 했다. 세종은 영응대군에게 조금의 이상이라도 발견되면 곧바로 피접을 보내곤 했다. 장소는 이순몽의 집이었다. 무과 출신으로 대마도 정벌에서 큰 공을 세운 이순몽을 세종은 크게 신뢰하고 있었다.

본처와의 사이에 아들이 없던 이순몽은 영응대군을 친아들처럼 아꼈다. 당시 이순몽은 큰 부자로 알려져 있었는데 영응대군에게 황금수레, 황금송아지 등을 선물했다. 이렇게 정이 든 이순몽은 영응대군을 수양아들로 삼기까지 했다. 영응대군은 세종, 소헌왕후에 더해 유모 신빈 김씨 그리고 수양아버지 이순몽의 극진한 사랑을 받으며 무럭무럭 자라났다.

영응대군에 대한 세종의 편애는 이순몽에게까지 미쳤다. 주변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세종은 이순몽을 고관대작에 임명하곤 했다. 비록 이런 문제점이 있기는 했지만 영응대군이 태어난 1434년부터 1444년(세종 26) 7월 송복원의 딸 송씨를 막내며느리로 결정하기까지 10년간이 세종에게는 가장 행복한 시절이었다.

당시 세종은 40대의 나이로 무수한 업적을 성취했다. 더불어 8대군 모두 건강하게 자라났다. 그때가 세종에게는 신체적으로 가정적으로 또 국가적으로 득의의 세월이었다. 그 정점이 1444년 7월의 막내며느리 간택이었다.

그러나 그 행복이 영속되지는 않았다. 영응대군과 송씨 사이의 혼례 준비가 한창이던 1444년 12월에 다섯째 광평대군이 창진(瘡疹)을 앓다가 20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이후 세종과 소헌왕후의 행복은 산산조각 나기 시작했다.

광평대군이 창진을 앓을 때 세종은 아들을 살리기 위해 모든 지식과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광평대군의 죽음을 막지는 못했다. 젊은 아들을 잃은 세종과 소헌왕후는 비통에 잠겼다. 그들 사이에 8대군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자식을 잃은 슬픔은 컸다. 세종은 며칠을 잠도 못 자고 식사도 못할 정도로 상심했다.

흉사는 몰려다니는 모양이다. 광평대군이 죽은 지한 달도 채 안 돼 이번에는 일곱째 평원대군이 19세의 나이로 죽고 말았다. 이 와중에 1445년(세종 27) 4월, 세종은 영응대군의 혼례를 거행했다. 막내며느리 송씨는 대방부부인에 책봉됐고, 안국동에 살림 집이 마련됐다.

인사까지 헝클어질 정도로 눈이 흐려지고


▎궁중에서 열리는 조회에 참석하기 위해 이동하는 세종대왕.
광평대군과 평원대군을 연이어 잃은 세종과 소헌왕후는 몹시 상심했다. 특히 소헌왕후가 자리에 눕는 일이 잦아졌다. 당시 세종은 절박한 심정이었다. 광평대군, 평원대군에 이어 소헌왕후와 막내아들 그리고 막내며느리마저 잘못될까 불안했던 것이다.

세종은 지푸라기라도 잡고자 했다. 세종은 소헌왕후와 막내아들 부부의 무사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불교에 매달리기 시작했다. 세종은 유명 사찰에 환관들을 보내 불공을 드리게 했다. 그러나 광평대군이 죽은 지 1년여가 지난 1446년(세종 28) 3월에 소헌왕후는 결국 세상을 뜨고 말았다.

그 즈음 세종은 신미 스님을 알게 됐다. 당시 신미 스님은 불자들 사이에 살아 있는 부처로 존경받던 큰스님이었다. 세종도 신미 스님을 한 번 본 후 깊이 존경하게 됐다. 소헌왕후가 세상을 떠난 후 세종은 영응대군의 무사안녕을 위해 불교에 더 깊이 빠져들었다. 공공연히 ‘나는 이미 부처를 좋아하는 임금’이라고 말하기도 했고, 경복궁 안에 ‘내불당’을 짓기도 했다. 세종은 평정심을 잃고 영응대군을 위해 무슨 일이든지 하려고 했다.

이 같은 세종을 위해 김흔지라는 사람이 금으로 만든 등신불(等身佛) 세 구를 만들어 바치기도 했다. 하나는 세종을 위해 또 하나는 세자를 위해 그리고 마지막 하나는 영응대군을 위해서였다.

크게 감동한 세종은 김흔지를 동부승지에 임명하기까지 했다. 아무런 공로나 능력도 없이 단지 금불상을 만들어 바친 공로로 승지가 되자 사람들은 김흔지를 금불 승지 또는 등신(等身) 승지라 불렀다. 영응대군에 대한 세종의 편애가 측근 인사까지 헝클어뜨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당시 왕실의 관행대로 본다면 세종은 소헌왕후의 3년상이 끝나는 1448년(세종 30) 여름쯤에 재혼하는 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그것은 매우 복잡한 문제를 불러올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이미 53세에 이른 세종이 얼마 살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이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게다가 더 중요한 문제는 정치적인 문제였다. 그것은 세자와 세손 때문이었다. 당시의 세자 문종은 병약했고 세자빈도 없었다. 더불어 1441년(세종 23)에 출생한 세손 단종은 8세에 불과했다. 이런 상황에서 세종이 재혼했다가 얼마 안 돼 승하한다면 세종의 왕비가 왕실의 최고어른이 돼 나라를 좌지우지할 수 있었다. 이것은 후계자인 문종에게 큰 부담이 될 수 있었다.

세종은 왕비를 새로 들이는 대신 후궁인 혜빈 양 씨를 내세웠다. 이미 세종과 혜빈 양씨 사이에는 세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세종은 혜빈 양씨에게 세손 단종의 양육을 맡겼다. 이는 세종 자신이 재혼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자 동시에 자신의 사후에 혜빈 양씨가 왕실의 어른으로서 세손 단종을 양육함과 동시에 보호하라는 의미이기도 했다.

이와 함께 세종은 자신의 죽음을 준비했다. 소헌왕후가 승하한 1446년(세종 28) 3월 이후 3년상을 치르면서 세종의 건강은 더더욱 악화됐다. 세종은 여생을 사랑하는 막내아들 영응대군과 보내고 싶어 했다. 아울러 죽기 전에 영응대군이 아들딸 낳고 행복하게 사는 것도 보고 싶어 했다.

막내아들 위해 며느리까지 내쫓은 지존


▎경기 여주에 있는 세종대왕릉(영릉). 앞쪽으로 정자각이 있고 왼편에 수랏간이 있다.
영응대군과 대방부부인 송씨는 1445년(세종 27)에 가례를 올렸으므로 1448년에는 이미 혼인 3년째였다. 하지만 막내며느리 대방부부인 송씨는 아이를 낳지 못했다. 결국 1449년(세종 31) 6월, 세종은 막내며느리 송씨를 내쫓았다.

그 이유가 실록에는 ‘이때 영응대군의 부인 송씨가 병으로 인해 내쫓기고’라고 실려 있다. 아무런 죄도 없이 단지 병들었기에 쫓아냈다는 것이었다. 쫓겨난 송씨는 친오빠 송현수의 집으로 옮겨 살았다.

세종이 대방부부인 송씨 대신에 맞아들인 막내며느리는 춘성부부인 정씨였다. 1449년(세종 31) 6월 당시 춘성부부인 정씨는 부친 정충경을 여의고 홀어머니와 살고 있었다. 당시 왕실의 관행에 의하면 홀어머니의 딸, 역적의 딸 그리고 악질이 있는 여성은 혼인 대상에서 제외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종이 정씨를 막내며느리로 간택한 이유는 정씨가 효령대군 부인의 친조카였기 때문이다. 세종의 둘째 형인 효령대군은 정역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효령대군 부인의 친동생인 정충경의 딸이 춘성부부인이었다. 세종은 춘성부부인 정씨를 막내며느리로 맞이함으로써 유순한 성격의 효령대군과 그 부인에게도 영응대군을 부탁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 모두 영응대군에 대한 편애에서 나온 결과였고 그래서 당시의 관행과 상식에 맞지 않았다.

이렇게 무리하게 막내며느리 정씨를 들인 그해 겨울에 세종의 건강은 몹시 악화됐다. 당시 세종은 54세였다. 죽음이 멀지 않았음을 직감한 세종은 궁궐을 떠나 막내아들 영응대군의 집으로 피접을 나갔다. 혹시라도 죽게 되면 사랑하는 막내아들 영응대군 집에서 임종을 맞겠다는 뜻에서였다. 영응대군 집에서 임종을 앞둔 세종이 마지막으로 한 일은 단종의 누이 경혜공주의 배필을 결정한 것이었다.

그런데 경혜공주의 배필은 다른 사람이 아닌 춘성부부인 정씨의 남동생이었다. 영양위로 알려진 정종이 그 주인공이었다. 영양위를 간택하고 한 달도 되기 전인 1450년(세종 32) 2월 17일, 위대한 성군 세종은 55세의 나이로 영응대군 집에서 승하했다.

이렇게 보면 죽음을 앞둔 세종은 그 무엇보다도 세손 단종, 막내아들 영응대군, 그리고 세손 단종의 친누이인 경혜공주를 위해 고심했음을 알 수 있다. 그 고심의 결과는 세손 단종을 위해 혜빈 양씨를 내세우는 것이었고, 막내아들 영응대군을 위해서는 신빈 김씨를 유모로 세움과 더불어 춘성부부인 정씨를 부인으로 간택한 것이었으며, 경혜공주를 위해서는 춘성부부인 정씨의 남동생인 영양위를 부마로 간택한 것이었다. 세종은 분명 이것으로 세손 단종과 경혜공주의 안전이 보장되고 또 영응대군의 행복이 보장된다고 믿었을 듯하다.

그러나 이 같은 믿음은 세종의 승하와 더불어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 다른 사람도 아닌 영응대군이 반기를 든 것이었다. 사실 영응대군은 첫 번째 부인 송씨를 몹시 사랑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부왕 세종이 송씨를 쫓아내자 속으로 불만을 쌓고 있었다.

하지만 영응대군은 부왕 세종이 자신을 위해 송씨를 쫓아냈음을 알기에 참았다. 아마도 영응대군은 죽음을 앞둔 세종의 마지막 소원을 이뤄주고 싶었을 듯하다. 즉 세종 생전에 자신의 아들딸을 보여드리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 마음에도 없는 재혼을 했지만 사람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았다. 재혼한 지 겨우 8개월 만에 세종이 승하했던 것이다. 결국 세종은 사랑하는 막내아들 영응대군이 아들딸 낳고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던 것이다.

세종의 3년상이 끝나고 단종이 즉위하자 영응대군은 은밀하게 첫 번째 부인 송씨를 찾기 시작했다. 당시 송씨가 친오빠 송현수의 집에 있었기에 영응대군은 자연 송현수의 집에 왕래하게 됐다.

그런데 영응대군과 송현수 집에 다리를 놓은 사람은 바로 수양대군이었다. 단종이 즉위했을 때 왕실의 최고어른은 수양대군이었다. 수양대군은 부왕 세종이 영응대군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잘 알았다. 또한 영응대군이 첫 번째 부인 송씨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도 잘 알았다. 사실 수양대군에게 영응대군은 막냇동생이고 송씨는 막내제수였다. 영응대군의 처지를 딱하게 여긴 수양대군은 본인이 친구 송현수를 찾는 척하면서 영응대군을 데리고 가서 송씨를 만나게 했다. 이렇게 해서 영응대군과 송씨 사이에 두 명의 딸이 태어났고, 그 소문이 한양에 널리 퍼지게 됐다.

영응대군, 부친 3년상 끝나자 전처와 재결합


▎세종대왕이 소헌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명복을 빌고자 부처의 일대기를 정음으로 번역해 만든 석보상절.
그러자 수양대군은 영응대군을 위해 두 발 벗고 나섰다. 송씨와 다시 재혼하고 춘성부부인 정씨와는 이혼하게 공작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1453년(단종 1) 11월 28일에 왕명에 의해 영응대군과 춘성부 부인의 이혼이 허락됐는데, 그 내용이 실록에 이렇게 실려 있다.

“이조에 명령해 춘성부부인 정씨에게 봉작한 문서를 거두게 했다. 처음에 영응대군이 상호군 송복원의 딸에게 장가들어 부인을 삼았었는데, 부인이 병이 있게 되자, 세종이 이를 폐하고 다시 참판 정충경의 딸에게 장가를 들였다. 그러나 영응대군은 송씨를 잊지 못해 송씨와 잠통(潛通)하고 두 딸을 낳았기 때문에, 정씨를 폐출하고 송씨를 다시 봉해 부인으로 삼았다.”(<단종실록> 권9, 단종 1년(1453) 11월 28일)

춘성부부인 정씨는 1449년(세종 31)에 영응대군과 가례를 올렸으므로 이혼하던 1453년(단종 1)이면 이미 혼인 4년째였다. 그동안 둘 사이에는 자녀가 한 명도 태어나지 않았다. 춘성부부인 정씨에게 문제가 있어서일 수도 있지만 더 큰 가능성은 아무래도 영응대군과의 관계 때문으로 생각된다. 아마도 영응대군은 춘성부부인과의 잠자리를 의도적으로 회피하지 않았을까 싶다. 물론 영응대군의 마음은 온통 대방부부인 송씨에게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혼인 4년 만에 아무런 잘못도 없이 쫓겨난 춘성부 부인은 친정으로 돌아갔다. 이후 춘성부부인은 스스로를 기별부인(棄別夫人) 즉 ‘쫓겨난 부인’이라 부르며 평생을 수절하며 홀로 살았다. 영응대군에 대한 세종의 편애가 춘성부부인의 인생을 이렇게 비극으로 몰아넣은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비극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영응대군과 함께 송현수의 집에 드나들던 수양대군은 1453년(단종 1) 10월에 계유정난을 일으켜 왕권을 탈취했고, 그 다음해에는 송현수의 딸을 단종의 왕비로 간택했다.

그 주인공이 바로 정순왕후 송씨였다. 영응대군이 혼인했다가 이혼했고 또다시 우여곡절 끝에 재혼한 대방부부인 송씨의 친조카가 바로 정순왕후 송씨였던 것이다. 수양대군은 대방부부인 송씨를 통해 영응대군을 장악하고, 나아가 정순왕후를 통해 단종을 장악하고자 했던 것이다. 결국 1455년(단종 3) 윤 6월에 수양대군은 단종의 양위를 받고 왕위에 올랐다.

단종 왕비의 비극적 삶도 세종의 ‘편애’ 결과

이로써 세종이 죽음을 앞두고 고심 끝에 마련했던 모든 조치는 수포로 돌아갔다. 세손 단종을 위해 내세웠던 혜빈 양씨는 단종의 양위와 함께 숙청됐다. 영응대군의 행복을 위해 재혼시켰던 춘성부부인 정씨는 이혼당해 쫓겨났으며 영응대군의 유모였던 신빈 김씨는 세종의 승하 직후 머리를 깎고 출가해버렸다.

또한 세손 단종의 친누이인 경혜공주를 위해 간택했던 부마 영양위 정종은 수양대군을 축출하려다 역모로 몰려 죽었다. 이렇게 세손 단종과 경혜공주의 안전을 위해 또 영응대군의 행복을 위해 마련했던 모든 것들이 수포로 돌아간 것은 물론 관련됐던 사람들도 모두 비극적인 결말을 맞았다.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영응대군에 대한 세종의 편애가 불러 온 파장에 자기도 모르게 휩쓸려 들어간 사람이 또 있었다. 대표적인 사람이 단종의 왕비 정순왕후 송씨였다. 송현수의 딸이자 대방부부인 송씨의 친조카인 정순왕후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단종의 왕비로 간택됐고, 그 때문에 비극적인 인생을 살아야 했다.

14세이던 단종 2년(1454) 봄에 가례를 올린 정순왕후는 단종이 영월로 귀양 가 사약을 받음에 따라 폐위됐다. 갑자기 청상과부가 된 정순왕후 송씨는 영월로 귀양 가는 단종과 동대문 밖에서 헤어진 후 그곳에 초가집을 짓고 살면서 날마다 영월을 바라보기 위해 동망봉(東望峯)에 올랐다.

단종이 세상을 떠난 후에 정순왕후 송씨는 정업원 주지(淨業院 住持)를 자처하며 속세와 인연을 끊었다. 억울하게 비명횡사한 단종의 극락왕생을 빌며 여생을 보낼 생각이었던 것이다. 이 정업원을 무대로 정순왕후 송씨, 경혜공주, 춘성부부인 정씨, 신빈 김씨 등 비극적인 여인들의 여생이 전개됐다.

돌아보면 춘성부부인 정씨, 신빈 김씨, 경혜 공주, 영양위 정종 그리고 대방부부인 송씨, 정순왕후 송씨 등은 근본적으로 세종의 영응대군 편애가 불러온 존재들이었다. 편애로 눈먼 세종은 영응대군을 위해 혼인과 이혼, 재혼을 너무나 비상식적으로 밀어붙였다. 그 결과는 관련자 모두의 불행이었다.

<대학연의> ‘제가지요(齊家之要)’의 첫 번째 항목은 ‘중배필(重配匹)’인데, ‘배우자를 신중히 골라야 한다’는 뜻이다. ‘중배필’에서는 제일 먼저 <시경(詩經)>의 ‘관저(關雎)’라는 시를 제시했는데 이 시는 문왕과 태사(太似)의 만남을 노래한 것이었다.

공자는 ‘관저’를 논평하면서 문왕은 좋은 배우자를 구하지 못했을 때 슬퍼하기는 했지만 상심하지 않았고, 반면 좋은 배우자를 만났을 때 즐거워하긴 했지만 음란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럴 수 있었던 이유는 문왕이 스스로의 몸과 마음을 예법으로 다스렸을 뿐만 아니라 태사와의 만남도 예법으로 다스렸기 때문이었다.

위대한 성군 세종이 이런 이치를 모를리 없었다. 그럼에도 세종은 편애에 눈멀어 막내아들의 혼인·이혼·재혼을 비상식적으로 치르게 됐다. ‘중배필’이라는 면에서는 성군 세종도 이런 실수를 저질렀으니, 필부필부들에게 ‘중배필’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새삼 두렵지 않을 수 없다.

신명호 - 강원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부경대 사학과 교수와 박물관장직을 맡고 있다. 조선시대사 전반에 걸쳐 다양한 주제의 대중적 역사서를 다수 집필했다. 저서로 <한국사를 읽는 12가지 코드> <고종과 메이지의 시대> 등이 있다.

201602호 (2016.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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