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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버럴 아츠의 심연을 찾아서] 세상의 원하는 모든 것을 공유하는 곳 샹젤리제 거리 

 

글·사진 유민호 월간중앙 객원기자, ‘퍼시픽21’ 디렉터
‘비(非) 프랑스’적 요소를 프랑스화해 전혀 다른 모습으로 아름답게 만든 창조물… 11월 파리 테러로 전 세계가 불안에 잠길 때도 혁명정신 깃든 콩코르드 광장은 인산인해

▎개선문 주변은 항상 밝고 환하다. 샹젤리제 거리는 파리에 들르는 사람을 신비한 밤의 여정으로 인도한다.
한 나라의 캐릭터를 규정하는 방법으로 시각적인 것만큼 효과적인 것도 없다. 파리의 에펠탑, 워싱턴의 화이트하우스, 런던의 시계탑, 도쿄의 후지산(富士山) 같은 것들이다. 시각적 이미지를 통해 그 나라의 캐릭터를 압축해서 설명해준다. 한국은 어떨까? 외신에 자주 등장하는 동대문이나 남대문 어디쯤일 듯하다.

눈이 아닌 귀는 어떨까? 눈이 단번에 쉽게 기억된다고 할 때 귀는 천천히 그리고 오래가는 부분이다. 불국사 대웅전 사진과 에밀레종과 같은 관계다. 눈을 통한 이미지처럼 소리를 기준으로 할 때도 나라나 도시에 관한 나름대로의 캐릭터가 존재한다. 노래는 가장 좋은 예가 아닐까? 예를 들어 뉴욕을 생각하면 프랭크 시나트라의 ‘뉴욕 뉴욕’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멜로디 자체도 뉴욕스럽지만, 가사도 뉴욕 분위기에 딱 어울리는 듯하다. 노래 말미의 ‘나는 항상 깨어나고 싶다. 결코 잠들지 않는 이 도시 속에서(I want to wake up, in a city that never sleeps)’와 같은 가사는 뉴욕이 어떤 곳인지 정확히 표현한 명구(名句)처럼 느껴진다.

서울을 노래로 표현하면 어떨까? 글로벌 스타라는 싸이의 ‘강남스타일’이 서울을 상징한다고 말할지 모르겠다. 필자의 경우 그 같은 세대관, 나아가 세계관과는 거리가 멀다. 노래 자체에 대한 호불호가 아니다. 여러 면에서 갑(甲)의 최첨단에 선 동네를 서울의 간판으로 잡는다는 것이 뭔가 달갑지 않다. 부자에 대한 질시나 불만 때문이 아니다. 을(乙)의 대표격인 신림동 달동네 관련 노래를 서울의 얼굴로 내세우자는 계급투쟁적 세계관은 더더욱 아니다. 어디 하나 흠잡을 데 없는 세계적 성형의사가 만들어낸 완벽 미인을 서울의 아름다움이라고 소개하는 듯한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떤 노래가 서울의 얼굴로 받아들여질 수 있을까? 주인공은 ‘서울의 찬가’다. 1969년 패티킴이 불러 대한민국 국민 모두에게 알려진 서울의 찬가가 바로 서울을 상징하는 소리로 와 닿는다. 강남스타일은커녕 강남 자체도 없던 그 시절 모두가 열심히 불렀던 서울시와 시민을 위한 노래다.

‘서울의 찬가’ VS ‘강남스타일’의 서울


▎콩코르드 광장 한복판에 자리한 오벨리스크.
모든 한국인의 기상이 하늘을 향해 한치 오차도 없이 똑바로 올라간 시기를 손꼽으라면 필자는 1960년대라 단언한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시행착오를 거듭하다가 마침내 뭔가 해보려고 모두가 힘을 뭉치던 시기다. 한국군의 베트남전쟁 참전으로 유사 이래 처음으로 평범한 한국인이 외화를 벌어들이기 시작했다. 강남·강북, 좌우, 갑을, 금수저·흙수저에 대한 개념도 없던 때다.

그러나 1970년대 들어 상황이 급변한다. 유신헌법과 함께 반독재투쟁이 시작되면서 나라는 갈라진다. 경제개발에 힘을 쏟는 과정에서 노동자 문제가 대두된다. 본격적인 냉전시대에 들어서면서 나라 전체가 꽁꽁 얼어붙고, 사람들의 마음도 갈라진다. 그 갈등과 후유증은 21세기에 들어선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서울의 찬가가 탄생된 1969년은 사회적 모순과 정치적 갈등이 미미하던 시기다. 1970년대 폭풍전야로 넘어가기 직전의 ‘밝은 한국’을 귀로 확인할 수 있는 노래다. 멜로디는 물론 가사를 봐도 활기차고 희망에 넘친다. 당시의 서울의 모습은 ‘처음 만나서 사랑을 맺은, 정다운 거리 마음의 거리’로 여겨졌다. 학군이나 아파트 투기 때문이 아니라 ‘헤어져 멀리 있다 하여도 내 품에 돌아오라’라는 사랑과 정리(情理) 때문에 서울에 살고 싶었다. ‘종이 울리네, 꽃이 피네’라는 지극히 일상사적인 것만으로도 행복감을 느끼던 시기다. 그런 평범한 사람들의 삶이 녹아든 노래가 바로 ‘서울의 찬가’다. 늘씬한 패티킴은 특유의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건강한 한국을 모두에게 알린다. 서울시민, 아니 한국인 전체가 패티킴의 노래에 열광하고, 자신을 대변하는 노래로 받아들인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따라서 ‘서울의 찬가=1969년 희망속의 한국인’이란 의미로 통할 수 있다.

경제적으로 볼 때 2016년 서울은 1969년보다 최소한 몇십 배 이상 풍족할 듯하다. 그러나 아무리 뛰어난 가수, 작곡가가 나와도 ‘서울의 찬가’와 같은 노래를 부를 수도, 만들어낼 수는 없을 듯하다. 비관적이라 말할지 모르겠지만, 패티킴의 ‘서울의 찬가’는 이미 역사 속으로 사라져가고 있다. 서울은 ‘밤이 오면 심장이 터져버리는 남자, 웬만한 노출보다 ‘야한 여자’로 채워진 욕망의 도시로 변해간 지 오래다. ‘종이 울리네 꽃이 피네’라고 말하면 정신병자 취급을 받을 정도다. 서울이 아니라, 세월이란 것이 그런 변화를 만들어낸 것이다. ‘강남스타일’에 이어 어떤 노래가 서울의 얼굴로 뜰지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서울의 현황을 보면 한층 더 쿨하고 격한 장소로 묘사될 것이란 점이다.

‘오 샹젤리제(Aux Champs-Elysees)’는 필자, 아니 세계 모든 사람이 갖고 있는 프랑스 파리에 대한 청각적 이미지다. 프랑스 파리라고 하면 먼저 ‘오 샹젤리제’로 시작되는 멜로디가 떠오를 듯하다.

시대를 초월해 파리를 상징하는 ‘오 샹젤리제’


▎개선문 주변의 도로에는 차선이 따로 없다. 무질서하게 보이지만 차량 접촉사고는 드물다.
필자가 ‘오 샹젤리제’라는 노래에 특히 관심을 가진 것은 10년 전쯤 워싱턴 프랑스대사관에서 열린 바스티유(Bastille Day)축제에 갔을 때다. 프랑스혁명 직전에 벌어진 바스티유 감옥 공격을 기념한 축제로, 매년 전 세계 프랑스대사관에서 벌어지는 파티다. ‘오 샹젤리제’는 당시 곳곳에서 들려오던 프랑스 샹송 중 하나다. 필자처럼 프랑스어에 무지한 사람들도 중간중간에 나오는 이 노래를 따라 부르면서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노래를 부르던 프랑스 여성에게 다가가 ‘오 샹젤리제’가 마치 프랑스 국가처럼 느껴진다고 필자의 평소 느낌을 전했다. 30대 여성은 빙긋 웃으면서 프랑스인만이 아니라, 세계 모두가 좋아하는 파리와 프랑스 이미지 자체라고 설명했다. 20세기 중반의 노래지만 21세기에도 프랑스인 모두가 즐겨 부르는 노래라는 사실도 알려줬다.

대화를 하다 알게 된 새로운 사실은, 노래 ‘오 샹젤리제’의 출생에 관한 부분이다. 원래 프랑스에서 만들어진 노래가 아니라 수입된 노래, 즉 번안곡이라는 것이다. 영국 그룹 제이슨 크레스트(Jason Crest)가 발표한 ‘워털루 로드(Waterloo Road)’라는 곡을 조 데신(Joe Dassin)이란 미국 가수가 프랑스어로 번안해 부른 노래가 ‘오 샹젤리제’의 탄생 배경이다. 영국에서 미국으로 건너갔다가 프랑스에 상륙해 세계로 알려진 셈이다. 더불어 노래 멜로디 속의 ‘오 샹젤리제’는 감탄사 ‘오(Oh)’와 무관한 관사의 변형인 ‘오(Aux)’를 표현한 것이란 사실도 알게 됐다. ‘오 (아름다운) 샹젤리제’란 의미가 아니라, ‘샹젤리제에 가서’ 또는 ‘샹젤리제에 서서’로 풀이되는 가사라는 것이다. 노래의 정확한 제목은 관사를 붙인 ‘Les Champs-Elysees’라고 하다. 집에 돌아가서 곧장 ‘Les Champs-Elysees’ 노래에 얽힌 내용을 살펴봤다. 여러 가지 놀라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다.

먼저 ‘오 샹젤리제’가 탄생한 해가 1969년이란 점이다. 놀랍지 않은가? ‘서울의 찬가’가 발표된 해와 동일한 시기에 ‘오 샹젤리제’가 탄생한 것이다. 시대 정신이라고 할까? 세상을 대하는 인간의 자세나 정신이 너무도 비슷하다는 느낌이 든다. 1945년 뒤 밀려온 좌우 이념투쟁은 물론, 1960년대 초 알제리 사태를 계기로 극과 극으로 갈려졌던 프랑스가 마침내 안정을 찾으면서 번영과 발전으로 향하던 시기가 1960년대 말이다. ‘오 샹젤리제’의 배경에는 바로 희망이란 프랑스 국민의 기상이 서려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영국인이 만든 ‘워털루 로드’가 미국을 거쳐 ‘오 샹젤리제’로 변신해 나왔을까? ‘오 상젤리에’를 번안해 부른 미국가수 조 데신이란 인물이 정답이다.

조 데신은 뉴욕 브루클린 출신의 유태인이다. 할리우드에서 영화감독으로 일하던 아버지를 따라 어릴 때부터 프랑스에 자주 오간다. 전환점은 1950년 12세 때다. 한국전쟁 발발 이후 4년간 계속된 할리우드 내 반공숙정(反共肅正) 캠페인인 매카시즘(McCarthyism) 때문이다. 아버지가 아메리카 공산당(Communist Party USA) 멤버인 게 드러나면서 할리우드 기피인물로 찍혀 미국 밖으로 추방된다. 이후 가족 모두가 스위스에 정착한다. 조 데신은 국제학교를 다니면서 프랑스어를 공부하게 된다. 이후 미국으로 돌아온 조 데신은 영화 텔레비전 계통에서 일한다. ‘워털루 로드’를 프랑스어로 번안해 대 성공을 거둔다.

영국 노래가 뉴욕을 거쳐 파리로 넘어간 이유


▎마차를 통한 여행은 샹젤리제를 오가는 최고의 사치품에 해당한다. 아랍권과 중국인들이 주된 고객이다.
'오 샹젤리제’가 번안곡임에도 불구하고 원조인 영국보다 프랑스에서 한층 더 큰 인기를 누린 이유는 무엇일까? 노래 자체가 프랑스인 기호에 맞는 멜로디라는 점이 중요하겠지만, 더 큰 이유는 전후 유럽과 미국의 관계를 통해 풀이해볼 수 있다. 키워드는 뉴욕이다. 런던이 아니라 프랑스인이 자유와 풍요의 이상향으로 받아들인 뉴욕발 프랑스어라는 점이 인기를 끈 가장 큰 이유다. 프랑스인에게 미국은 ‘우러러’ 볼 수 있는 이상향인 동시에 아래로 내려다볼 수 있는 ‘만만한’ 나라다. 1776년 미국 독립을 프랑스가 도왔고, 독립 기념 100주년에 맞춰 자유의 여신상을 뉴욕에 보낸 나라가 프랑스다. 1960년대 프랑스는 아직 전후의 영향권에 있었다. 담배·초콜릿·지프차로 무장한, 자유의 여신상의 나라에서 온 젊은 미군에 관한 기억이 채 가시지 않았던 시기다. 자존심 하나로 버티던 프랑스지만, 보통 프랑스인에게 미국은 꿈과 희망의 나라였다. 그 같은 상황 속에서 프랑스의 최고 번화가를 찬미하는 노래가 뉴욕에서 터져 나온 것이다. 조 데신의 노래가 한순간 프랑스 전역에 울려퍼진다.

조 데신이 제국주의 미국의 매카시즘 희생자라는 사실은 프랑스 좌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좋은 명분이 된다. 영혼이 없는 미국산 문화지만, 매카시즘 희생자의 아들이 바친 프랑스 찬미음악이란 점에서 좌우, 이념 관계없이 모두에게 불려진다. 음악 자체가 국경과 이념을 넘어선다고 하지만 사실 그 같은 경우는 극히 찾아보기 어렵다. 아무리 좋은 일본 음악이라도 공산 중국에서 성공하기는 어렵다. 독일 윌리엄 바그너의 링(Ring) 시리즈가 이스라엘에서 공연되기까지는 무려 50년이 걸렸다. ‘오 샹젤리제’는 국경 이념을 뛰어넘어 성공한 대표적인 노래에 해당된다. 파리 프랑스 나아가 전 세계가 읊조리는 노래가 된 가장 큰 이유다.

노래 ‘오 샹젤리제’가 가장 큰 이유겠지만, 파리 샹젤리제 거리를 하나씩 하나씩 살피면서 천천히 걸어가고 싶다고 오래전부터 다짐해왔다. 그러나 파리에 들를 때마다 만난 강한 추위로 엄두를 내질 못했다. 필자는 유럽 여행의 주된 시기를 겨울로 잡고 있다. 여름은 어디에 가도 인산인해고 더불어 호텔이나 레스토랑 예약도 어렵다. 여름 여행비 절반 정도만으로도 겨울의 유럽을 즐길 수 있다. 문제는 추위다. 유럽, 특히 파리의 겨울 추위는 한국과는 맛이 다르다. 누군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서울의 강추위는 따귀를 한 대 맞은 수준의 고통이다. 파리의 추위는 소에게 물린 듯 몸 전체로 파고 드는 냉기다. 습기가 많은 날씨 덕분에 축축한 냉기가 몸 전체를 파고든다. 지구 온난화 덕분이겠지만, 지난해 말과 올해 초의 파리는 영상 5도를 오르내리는 ‘따뜻한 날씨’를 선보였다. 곧바로 파리로 향했다. 샹젤리제의 진수는 형형색색 점등식에 맞춘 크리스마스 시즌에 있다. 낮의 샹젤리제도 있지만 갖가지 네온으로 빛나는 밤의 샹젤리제야말로 프랑스가 전 세계에 자랑하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거리’의 진면목을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



오벨리스크에서 출발하는 샹젤리제 거리


▎프랑스혁명 당시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가 콩코르드 광장에서 처형됐다. 작은 동판은 기요틴 희생자들을 추모한다.
샹젤리제 네온은 매년 초 파리시가 알리는 1년 계획표의 하이라이트다. 언제부터 언제까지 네온 장식을 하는지에 대한 일정을 매년 1월에 발표한다. 2015년 네온 시즌은 11월 13일부터 2016년 1월 11일까지다. 매일 오후 6시부터 다음날 새벽 2시까지 이어졌다. 네온 점등식이나 폐등식은 파리발 연말연시 주요 뉴스로 처리된다. 사실 샹젤리제는 평소에도 어느정도 네온으로 뒤덮여 있다. 연말연시의 경우 주변 건물이나 상가들도 ‘특별 화장’을 하지만, 300본에 달하는 샹젤리제 주변 가로수와 길 중심에 네온을 단다는 점에서 다르다. 네온시즌과 함께 파리 시민이 주목하는 샹젤리에 이벤트는 연말연시에 열리는 크리스마스촌(村)이다. 음식점과 기념품점 같은 간이 가게에서부터 게임시설, 스케이트장 같은 것들이 샹젤리제 주변에 들어선다. 평소에도 전 세계의 사람이 몰리는 샹젤리제지만 네온시즌과 크리스마스촌 개장 시기엔 도로 전체가 인산인해로 변한다.

필자가 샹젤리에에 들른 것은 네온 불빛으로 가득 찬, 연말 오후 7시쯤이다. 지구 온난화 탓인지, 영상 7도 날씨 덕분에 거리 전체가 동대문시장 이상으로 붐빈다. 흔히들 말하는 샹젤리제는 동의 콩코르드광장(Place de la Concorde)에서 서의 샤를 드골 광장(Place Charles de Gaulle)에 이르는, 1.9㎞의 거리를 의미한다. 거리의 폭은 70m 정도로, 전형적인 계획도시하의 거리다. 두 광장에서의 중심은, 동의 경우 이집트에서 갖고 온 23m 높이의 오빌리스크(Obelisk), 서의 경우 개선문(Arc de Triomphe)이다.

1836년 콩코르드 광장에 옮겨진 오벨리스크는 태양신을 상징하는 피라미드의 축소판이다. 하나의 돌로만 만들어진다. 가톨릭의 나라 프랑스 한복판에 이집트 태양신의 상징이 들어서 있다는 것이 흥미롭다. 19세기 제국주의가 맹위를 떨치던 시기, 오벨리스크는 종교적 의미로서보다 세계를 제패한 나라가 갖는 특급 전리품이란 성격이 강하다. 미국·영국·독일·이탈리아 등 서방 열강 어딜 가도 쉽게 만날 수 있는 것이 이집트 최고(最高)의 수출품 오벨리스크다. 개선문은 1805년 나폴레옹의 아우스터리츠 전투(Battle of Austerlitz) 승리를 기념해 세운 건축물이다. 프랑스 혁명군에 대항한 러시아·오스트리아 연합군을 격파한, 프랑스 전사(戰史)의 한 획이 된 승리다. 한때 중단되기도 했지만 우여곡절 끝에 1836년 7월 완공된다. 콩코르드의 오벨리스크는 개선문 완공에 맞춰 옮겨진 것이다.

노래 ‘오 샹젤리제’에서부터 오벨리스크와 개선문으로 이어지는 파리 ‘핵(核)’의 배경을 보면 묘한 공통점 하나를 발견해낼 수 있다. ‘비(非) 프랑스적인 프랑스’다. 앞서 살펴봤듯이, ‘오 상젤리제’는 영국 뉴욕을 거쳐 수입된 번안곡이다. 아름다운 프랑스어를 입혔을 뿐 실체는 전부 비 프랑스다. 오벨리스크 역시 이집트에서 수입된 비 프랑스다. 개선문도 예외가 아니다. 이유는 나폴레옹이 절반의 프랑스인이기 때문이다. 나머지 절반은 이탈리아다. 나폴레옹은 1769년 8월 15일 프랑스 남부이자 이탈리아 서부의 섬 코르시카(Corsica)에서 태어났다. 나폴레옹이 태어나기 1년 전 코르시카의 주인이 바뀐다. 코르시카를 지배하던 제노바 공화국(Republic of Genoa)이 섬 전체를 프랑스 왕조에 넘겼기 때문이다. 제노바는 프랑스와의 무역을 통해 힘을 키운 공화국이다. 동의 베니스 공화국에 맞선, 이탈리아를 대표한 3대 공화국 중 하나다. 그러나 아무리 빨라도 1년 만에 세상이 바뀔 수는 없다. 나폴레옹의 국적은 프랑스로 변했겠지만, 문화·언어는 이탈리아를 기반으로 한다. 나폴레옹의 프랑스어는 이탈리아 액센트에 기초한 거친 발음으로 악명 높다. 평생 고칠 생각도 안 했다고 한다. ‘촌놈’이 그 쓰는 거친 프랑스어 덕분에 군사학교 재학 당시 친구가 거의 없었다는 얘기도 잘 알려져 있다.

나폴레옹의 성공은 그 같은 이류 국민으로서의 열등감에 대한 보상일지 모른다. 19세기 초 열강이던 러시아, 오스트리아를 격파한 장본인은 프랑스인이 아닌 프랑스에 편입된 이탈리아 출신 야심가다. 샹젤리제 거리는 그 같은 비 프랑스로 엮어진 프랑스의 얼굴에 해당된다. 물론 프랑스는 ‘비 프랑스적인 샹젤리제’를 결코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비 프랑스가 프랑스화될 수 있다는 점에 대해 자부심을 가질 뿐이다. 몽마르트르 언덕에 모인 예술가는 프랑스인만이 아닌 전 세계의 화가였다. 아무리 돈을 퍼붓는다 해도 그 같은 공간을 창조해낼 나라는 세계 어디에도 없다고 프랑스인은 자부한다. ‘비 프랑스야 말로 지극히 프랑스적’이라고, 프랑스인들은 입을 모은다.

샹젤리제 거리의 심야 산보는 콩코르드 광장에서부터 시작했다. 콩코르드에서 동쪽으로 1㎞ 떨어진 루브르미술관이 문을 닫기 직전 발길을 옮겼다. 밤에 만나는 오벨리스크는 신비하다. 때마침 보름에 가까운 달도 걸려 있어서 운치를 더해준다. 달빛은 태양이 없으면 탄생될 수 없다. 그러나 하늘 속에 떠 있는 눈부신 태양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달은 똑바로 그리고 깊이 쳐다볼 수 있다. 설령 태양을 본다 해도 길어야 10초 정도지만, 달은 아무리 오래 지켜봐도 지루하지 않다. 태양을 접하는 순간 청각은 마비되지만, 달은 오히려 귀를 더 크게 열어준다. 달에 집중하는 동안 자연의 구석구석에 숨어 있는 예민한 소리가 가슴속에 와 닿는다. 태양이 만들어낸 달이지만, 달은 결코 태양이 연출할 수 없는 새로운 모습을 창조해낸다. 비 프랑스를 프랑스화해서 전혀 다른 모습으로 아름답게 창조해내는 것과 비슷하다.

만약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프랑스가 아닌 이탈리아에 떠돌다 사라졌다면? <모나리자> 그림이 이탈리아에 남아 로마나 밀라노 미술관 어디에 전시돼 있다면? 오늘날 볼 수 있는, 다빈치나 <모나리자>에 대한 뜨거운 관심도 많이 달라졌으리란 상상이 가능해진다. 창조는 머리와 손으로 만들어내는 ‘인벤션(Invention)’ 그 자체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개량하고 스토리텔링을 붙이는 이노베이션(Innovation)도 창조의 의미를 확대시키는 중요한 요소다.

연말연시의 스케이트장을 둘러싼 의문


▎개선문 주변에 위치한 레지스탕스 기념 동판. 쌍십자가는 프랑스 레지스탕스를 상징한다.
지난달 <월간중앙>에 기고했지만, 콩코르드 광장은 프랑스혁명의 비극이 서린 곳이기도 하다. 프랑스혁명의 깃발아래 무려 1만8천여 명이 처형된 장소가 콩코르드다. 원래 루이 15세가 자신의 기마상을 기념하며 만든 공간이지만, 1789년 혁명과 함께 혁명광장(Place de la Revolution)으로 개명되면서 살육전이 시작된다. 반혁명 분자를 처형하기 위해 기요틴이 등장한다. 러시아를 논외로 할 경우 유럽에서 자신의 국왕을 직접 처형한 나라는 단 한 나라, 프랑스다.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가 콩코르드 광장의 기요틴에 의해 사라진다. 기요틴을 통해 공포정치를 벌인 막시밀리안 로베스피에르(Maximilien Robespierre)도 콩코르드 광장에서 이슬로 사라진다. 처형이 이뤄지던 장소는 오벨리스크 바로 밑이다. 국왕과 왕비가 처형된 곳이라 설명하는 작은 동판이 들어서 있다. 사진을 찍으려는 데 대여섯 명의 어린이가 뛰어들어와 논다. 동판 위를 뛰어다니면서 술래잡기를 하던 중, 필자가 사진을 찍으려 주춤거리자 무슨 일인지 궁금해 하면서 모여든다. 누군가가 동판을 읽으면서 “마리 앙투아네트”라 말한다. 다음 행동이 궁금했지만, 아무 일 없다는 듯 곧바로 술래잡기에 들어간다. 피의 역사가 새겨진 끔찍한 곳이지만, 226년이 지난 콩코르드는 아이들의 술래잡기 놀이용 넓은 운동장에 그칠 뿐이다.

콩코르드 광장을 지나 샹젤리제 거리로 진입하자 곧바로 인산인해다. 크리스마스촌을 구성하는 가게들이 촘촘히 들어서 있다. 와인과 피자를 즐길 수 있는 음식점에서부터, 옷가게와 기념품, 어린이용 장난감과 게임 관련 가게들이 늘어서 있다. 2015년 연말은 11월 파리 테러의 흔적이 남아 있던 시기다. 테러에 대한 불안으로 관광객도 절반 정도로 줄어들었던 때다. 그렇지만, 샹젤리제 거리는 예외다. 히잡을 쓴 아랍권 여성도 많이 볼 수 있다. 조금 걸어가니까 스케이트장이 눈에 들어온다. 신발을 포함해 단돈 10유로로 즐길 수 있다. 오전 10시 반에 문을 열어 밤 12시까지 이뤄진다고 한다.

스케이트장은 연말연시 크리스마스촌을 장식하는 중요 놀이터 중 하나다. 파리만이 아니라, 뉴욕·런던·로마 등 서방 어디에 가도 만날 수 있다. 작은 섬 베니스에서조차 연말연시용 스케이트장이 따로 설치된다. 몸을 움직이는 스포츠 시설이 크리스마스촌 한가운데 들어선다는 것 자체가 특이하다. 먹고 즐기는 곳에 스포츠 시설을 세운다는 발상 자체가 특이하다. 한국의 경우는 어떨까? 굳이 찾아내라면, 서울 종로 안국동 근처의 야구 배팅 연습장 정도를 예로 들 수 있지 않을까? 원래 일본에서부터 시작된 것이지만, 크리스마스촌 스케이트장을 흉내 낸 동양판으로 변형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한국 제 1의 관광객이 모이는 곳이 동대문과 명동이다. 거기에 몸으로 직접 때울 수 있는 ‘한국적 스포츠 시설’ 하나쯤 만드는 것도 좋을 듯하다.

크리스마스촌을 지나자 세계 최고 브랜드로 채워진 샹젤리제 부티크들이 눈에 들어온다. 길 반대편에는 길게 줄을 선 행렬이 눈에 들어온다. ‘루이비통(Louis Vuitton)’이란 글자가 크게 새겨진 건물 아래다. 한 무리의 중국인들이 초대형 쇼핑백과 함께 서 있다. 루이비통 행렬은 손님이 많기에 제한하는 데 따른 정체다. 손님이 아니라 매장이 손님을 고르는 식이다.

리도에서 만난 영화 <스타워즈>


▎샹젤리제에서 가장 비싼 레스토랑으로 알려진 푸케스 (Fouquet’s). 1899년 창립 이래 샹젤리제를 대표하는 찻집의 하나다.
필자는 브랜드를 좋아한다. 그러나 아무도 갖지 않는 ‘귀한’ 브랜드를 애용한다. 필자의 경우, 도로에 나갔다가 필자가 소유한 같은 종류의 자동차만 봐도 마음에 어색해진다. 가격이나 유명세가 아니라, 세상에 오직 하나뿐인 브랜드다. 개업 200주년 기념 한정판 가방 100개라면 촉각을 내세우겠지만, 생산 1만여 개를 넘기는 똑같은 가방에 빠지는 심정은 이해하기 어렵다. 모두 똑같은 얼굴로 변해가는 성형 미인 같은 느낌이 든다.

리도(Lido)는 샹젤리제 거리는 몰라도 누구나 한 번쯤 들어온 극장일 것이다. 무려 1150석을 갖춘 극장식 레스토랑이다. 프랑스를 상징하는 ‘캉캉’에서부터 갖가지 춤과 오락을 즐길 수 있다. 연말이라 예약 자체가 불가능하지만, 언젠가 반드시 들러야 할 공간이다. 필자가 주목하는 부분은 기둥 없이 360도 오픈된 파노라마형 무대다. 평소에는 동일한 높이의 공간이지만, 식사에 맞춘 공연이 시작될 경우 관객석이 80㎝ 아래로 내려간다. 무대 아래로 내려간 공간 속에는 300명 정도의 관객이 수용된다. 1인당 150유로의 음식이나 공연도 재미있겠지만, 무대 건축사에 남을 세계적인 시설에 대한 탐방이 리도 방문의 가장 큰 목적이다.

20세기와 21세기 문화·문명의 척도 중 하나로 공연극장과 무대를 빼놓을 수 없다. 세계 최고·최대와 같은 크고 화려한 시설일 필요는 없다. 예술미를 곁들이면서 적어도 건축사에 실릴 만한 창의적인 무대면 된다. 안타깝게도 한국에서 보기 어려운 공간이다. 리도는 식사를 겸한 공연만이 아니라 바로 옆에 영화관도 운영하고 있다. 2015년 겨울의 리도는 미국과 유럽에서도 초인기인 <스타워즈>로 들떠 있다. 초연이 아침 9시30분이지만, 전부 만원이다. 샹젤리제, 리도, 스타워즈. 조화로운 듯, 부조화스러운 듯한 삼각 관계지만, 뭔가 흥미롭고 신선한 조합인 것은 분명하다.

개선문으로 가까이 접어들자 사람들의 수가 줄어든다. 크리스마스촌은 콩코르드 광장을 기점으로 한 동쪽에 모여 있다. 서쪽인 개선문 쪽은 부자들의 거리다. 루이비통 건물 옆에는 샹젤리제를 대표하는 카페 겸 레스토랑이 하나 들어서 있다. 1899년 탄생된, 세계적 명성을 자랑하는 ‘푸케스(Fouquet’s)’다. 커피라도 한잔 마시려 들어갔지만, 기다리는 사람으로 터져 나간다. 자세히 보니까 커피 한잔에 8유로, 작은 빵 하나에 17유로 정도다. 필자가 접한 프랑스 내 카페나 레스토랑 가운데 가장 비싸다. 프랑스인에게 푸케스는 돈과 사치의 상징이다. 100여 년에 걸쳐 전 세계의 수많은 셀리브리티가 들른 곳이다. 프랑스인들은 2007년 5월 대통령선거 당시, 후보자 사르코지가 들른 곳으로 기억하고 있다.

프랑스 지식인들은 헝가리계의 사르코지를 품위나 격과는 거리가 먼, 벼락출세의 상징으로 해석한다. 무식하지만 돈과 권력은 있기에, 가장 비싸고 사치스러운 곳을 좋아한다는 의미다. 그러한 캐릭터를 배경으로 하기에 당선 즉시 ‘푸케스(Fouquet’s)’에서 축배를 들었다는 식으로 해석한다. 필자 같은 외국인에게는 전통과 역사의 전당이지만, 지식인이 보면 프랑스 권위에 대한 ‘원숭이 흉내’ 정도로 해석될 뿐이다. 가격도 그렇지만, 너무 많은 사람이 기다리기에 다음으로 미루며 빠져 나왔다.

샹젤리제 거리의 끝부분인 샤를 드골 광장까지의 산보는 2시간이 걸렸다. 쉬지 않고 걸을 경우 10분이면 된다. 개선문은 보는 이를 압도할 정도로 아름답다. 높이 45m 길이 50m에 달한다. 주변은 기념사진을 찍는 사람들로 만원이다. 개선문은 전체적으로 보면 둥근 문양의 그리스로마 양식을 기초로 한다. 원래 모델은 로마에 있는 타이투스문(Arch of Titus)이다. 1세기에 세워진 승전문으로 로마 포럼(Roman Forum)의 스칼라(Scara) 거리에 들어서 있다. 코르시카 출신답게 자신의 승전문을 로마에서 따온 것이다.

개선문을 통과하는 나라가 세계의 주인공


▎샹젤리제 거리 주변에는 어린이를 위한 오락시설이 많다. 한 세대 전에나 이뤄졌을 법한 싸구려 게임도 즐길 수 있다.
개선문은 나폴레옹만이 아니라 이후 프랑스를 점령한 독일군과 미군의 개선문으로 활용된다. 개선문을 통과하는 나라가 세계의 주인공이란 의미다. 그같은 생각을 읽은 북한은 1982년 파리 개선문보다 10m 더 높은 60m짜리 짝퉁 개선문을 평양 한복판에 세운다.

개선문을 정면으로 하면서 바로 옆에 붙은 건물을 보면 오른쪽에는 시계로 유명한 브랜드 카르티에(Cartier)가, 왼쪽에는 파리 공공약국(Drug Store)이 차지하고 있다. 묘한 조화지만 프랑스를 상징하는 여운이 두 건물을 통해 느껴진다. 바깥에 드리워진 네온 불빛의 색이다. 카르티에는 붉은색, 공공약국은 푸른색과 흰색을 겸한 네온이다. 프랑스혁명의 상징이자, 현재의 국기를 상징하는 빨강, 하양, 파랑의 조화다.

“샹젤리제 거리는, 맑거나 비가 오거나 낮이든 밤이든 원하는 모든 것을 다 얻을 수 있는 곳”이란 가사는 노래 ‘오 샹젤리제’에서 가장 인상 깊은 부분이다. ‘원하는 모든 것’을 공유하는 공간이 바로 샹젤리제다. 프랑스 것만이 아닌 혁명을 포함해, 비 프랑스적인 것도 원한기만 한다면 접할 수 있는 곳. 바로 샹젤리제 거리다.

유민호 - 미국 워싱턴에 있는 에너지·IT 컨설팅 회사 ‘퍼시픽21’의 디렉터. ‘딕 모리스 선거컨설턴트’ 아시아 담당.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방송(SBS) 기자로 일하다가 1994년 일본 마쓰시타정경숙 15기로 입숙해 5년 과정을 마치는 동안 125개 나라를 순회했다. 조지워싱턴 대학 E-Politics 프로젝트 디렉터, 일본경제 산업성 연구소(RIETI) 연구원을 지냈다. <백악관에서 일하는 사람들> <중국 소프트파워> <미슐랭을 탐하다>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201602호 (2016.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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