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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계화제] 위기의 현대상선, ‘구원투수’는 누구? 

‘적통’ 이어받은 MK(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 관심 없다고는 했지만… 

최경호 기자 squeeze@joongang.co.kr
“사업성 없다”는 공식 발표에도 불구 현대차그룹에 이목 집중… 사채권자 채무재조정 없이는 회생 역부족, 6월 중 판가름 날 듯

▎2011년 3월 10일 세종문화회관 세종홀에서 열린 아산(峨山) 정주영 10주기 추모사진전에서 관람을 마친 정몽구 현대차 회장과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이 악수를 하고 있다.
현대그룹이 창사 이래 최악의 위기를 맞았다. 그룹의 기둥인 현대상선이 뿌리째 흔들리고 있는 탓이다.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은 채권단과의 자율협약과 현대증권 매각 등으로 위기를 돌파하겠다는 심산이지만 쉽지 않아 보인다. 현대상선의 부채규모가 약 5조원에 이르는 데다 인수를 희망하는 기업도 나타나지 않는다. 이런 가운데 재계 일각에서는 현대그룹과 ‘한뿌리’인 현대차그룹의 인수론(論)이 사그라지지 않고 있다.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의 15주기를 하루 앞둔 3월 20일. 범현대가(家)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지난해 11월 정 창업주의 탄생 100주년 기념식 이후 4개월 만이었다.

지난해까지는 서울 종로구 청운동에 있는 정 창업주의 생전 자택에서 제사를 지냈지만 올해는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의 용산구 한남동 자택에서 지냈다. 지난해 8월 16일 정 창업주의 부인인 고 변중석 여사의 8주기 제사도 정 회장의 자택에서 진행됐다. 사세 확장, 실적 호조 등에 힘입어 사실상 현대가의 적통(嫡統)을 이어받은 정 회장이 앞으로도 집안의 큰 행사를 직접 챙기게 되리라는 게 재계의 관측이다.

이날 기일에는 정 회장을 비롯해 정상영 KCC 명예회장, 정몽준 아산재단 이사장,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 정몽윤 현대해상화재 회장, 정몽원 한라그룹 회장, 정몽혁 현대종합상사 회장, 정지선 현대백화점그룹 회장 등 50여 명이 참석했다.

재계에서는 정몽구 회장과 현정은 회장의 만남에 주목했다. 그룹 차원의 공식적인 부인에도 불구하고 현대차그룹의 현대상선 인수 가능성이 제기되기 때문이다. 현 회장이 이끄는 현대상선은 최악의 경영위기에 처했다. 사적으로 두 사람은 시아주버니와 제수(弟嫂) 사이다.


▎정주영 명예회장 10주기 학술 세미나가 열린 2011년 3월 18일 서울 플라자 호텔 그랜드 볼룸에서 상념에 잠겨 있는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
어쩌다 이 지경에 이르렀을까


한국기업평가는 4월 8일 현대상선의 무보증회사채 신용등급을 기존 ‘CCC’에서 채무불이행(디폴트) 등급인 ‘D’로 하향조정했다. 한국신용평가도 ‘CCC’에서 ‘C’로 강등했다. 전날 만기가 돌아온 무보증 공모사채 1200억원을 갚지 못한 탓이다.

현대상선은 전날 기한이익이 상실돼 원리금이 미지급되는 사채가 8099억원이라고 공시했다. 기한이익이란 빌린 돈을 만기 전까지 자유롭게 쓸 권리를 뜻한다. 산업은행 등 채권단이 떠안은 부채는 1조2000억원 규모이지만 공모사채 발행 등으로 사채권자들에게 진 빚은 3조6000억원에 이른다.

현대상선의 경영난에 대해 재계 안팎에서는 “자업자득”이라는 비판이 나온다. 재계 한 관계자는 “과거에 은행과 재무 구조개선 약정을 맺었다면 이 지경에는 이르지 않았을 것”이라며 “외부 감시를 받기 싫어한 현대상선이 자초한 일”이라고 꼬집었다.

‘과거’란 2010년의 일을 말한다. 서울중앙지법은 2010년 9월 현대상선 등 현대그룹 계열사들이 신규여신 중단 등 채권단이 내린 제재를 풀어달라며 제기한 결의효력정지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였다.

앞서 외환은행 등 채권단은 현대그룹에 재무구조 개선 약정을 맺도록 압박했다. 2008~2009년 글로벌 금융위기 여파로 현대상선의 부채비율이 치솟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대그룹은 이를 거부한 채 가처분소송을 제기해 약정을 맺지 않았다. 이후 은행 차입금을 줄이고 높은 금리의 회사채를 발행해 운영자금을 마련했다. 은행 차입금을 늘리면 채권단 감시를 받아야 하기 때문이었다. 4월 7일 만기가 도래한 회사채 1200억원도 2011년 4월 이자율 6.05%를 약속하고 발행한 것이다.

외부 감시를 거부한 것은 현정은 회장의 의지와 무관하지 않다. 은행 통제하에서는 2010년 매물로 나왔던 현대건설 인수전(戰)에 뛰어들기 어려웠다. 돈을 빌려 리조트·호텔·저축은행 등으로 사업을 확장하는 것 또한 채권단 통제가 있었다면 실행하기 어려웠다.

불운하게도 현대건설 인수에서 고배를 드는 등 현 회장이 손댄 사업은 대부분 실패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로 현대아산이 추진하던 리조트 사업이 어려워지자 2012년 현대상선(729억원)과 현대엘리베이터(261억원) 등이 유상증자에 참여하면서 계열사들의 부담은 더욱 커졌다.

2012년 현대상선과 현대엘리베이터·증권·로지스틱스 등 계열사 4곳이 남산반얀트리호텔을 인수하기 위해 특수목적 법인인 현대엘앤알에 990억원을 출자했다. 하지만 호텔 사업은 한 차례도 흑자를 내지 못했다. 현대상선은 현대엘앤알 지분 49%(441억원)를 지난해 현대엘리베이터에 254억원을 받고 넘겼다.

아시아~유럽 컨테이너 운임이 2010년 2500달러에서 올해 250달러로 10분의 1수준까지 떨어지는 등 세계적인 해운업 불황도 현대상선을 더욱 궁지로 몰아넣었다. 하는 수 없이 회사채를 발행해 돈을 빌려야 했다. 그런데 2011년 이후 누적된 적자로 신용등급이 떨어지다 보니 최고 10.71%의 고이율로 회사채를 발행해야 했다.

“인수해달라” VS “관심 없다”


▎2001년 3월 25일 정주영 명예회장 영결식에서 고인의 생전 육성이 방송되자 유족들이 눈시울을 붉히고 있다. 왼쪽부터 정몽구 현대차 회장, 정몽근 현대백화점 회장, 정몽헌 현대아산 회장, 정몽준 아산재단 이사장, 정몽윤 현대해상화재 회장.
위기에 빠진 현대상선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현대차그룹은 ‘구원투수’ 1순위로 거론된다. “인수할 의사가 없다”는 공식 입장 표명에도 불구하고 현대차그룹의 현대상선 인수론은 수그러들지 않는다. 현대차그룹 등에 따르면 현대차그룹 계열사인 글로비스를 통해 현대상선 측에서 인수를 제안한 것으로 전해졌다.

“채권단은 현대상선을 현대차그룹에 넘기는 게 유리할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 입장에서는 현대상선 인수가 그룹 경영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판단”이라는 게 현대차그룹의 설명이다.

그럼에도 끊임없이 인수론이 고개를 드는 이유는 현대차그룹과 현대그룹의 관계 때문이다. 두 그룹은 고 정주영 명예 회장의 현대그룹에서 분리됐다. 현대차그룹과 현대그룹은 2000년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과 고 정몽헌 현대그룹 회장 간의 ‘왕자의 난’을 통해 갈라섰다. 정몽구 회장이 현대자동차로 ‘딴살림’을 차려 나가고, 정몽헌 회장이 그룹의 주축이던 현대건설과 현대증권 등을 맡았다. 당시 ‘왕자의 난’은 동생인 정몽헌 회장의 승리로 평가됐다.

하지만 16년이 지난 오늘, 두 그룹의 위치는 뒤바뀐 형국이다. 현대차그룹은 기아차와의 합병, 중국과 미국시장 공략 등을 통해 명실상부한 글로벌 자동차업체로 우뚝 섰다. 반면 현대그룹은 누적된 유동성 위기와 대북 불법송금 사건과 대북 사업 좌초 등을 겪으며 내리막길을 걸었다.

현대차그룹과 현대그룹은 2010년 원조 현대그룹의 종가(宗家) 격인 현대건설 인수를 놓고 일합(一合)을 겨루기도 했다. 초반 열세를 딛고 현대차그룹이 현대건설을 품자 재계에서는 ‘현대그룹의 적통은 현대차그룹이 승계했다’는 평가가 나왔다. 정몽구 회장이 현대건설 인수에 강한 의욕을 보였다는 후문이다.

현정은의 운명은?


▎서울 종로구 율곡로에 위치한 현대그룹 사옥. 사진제공•현대그룹
그러나 정 회장은 현대상선 인수에는 큰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것으로 전해진다. 반면 현정은 회장은 현대상선에 사재까지 출연할 정도로 애정이 깊다. 현대상선은 현대그룹 매출의 70%를 차지하고 있는 기둥에 해당한다. 뿐만 아니라 현대상선은 현 회장의 부친인 고 현영원 회장이 세운 신한해운과의 합병으로 성장한 회사다. 정 회장과 현 회장은 3월 20일 저녁 정 명예회장 15주기에서 자리를 함께했으나 현대상선에 대한 논의는 없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두 그룹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재계 일각에서는 한진해운 사례를 예로 들며 ‘가능성’의 불씨에 주목하고 있다. 한진해운은 2003년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의 동생인 고 조수호 회장의 독자경영 방침에 따라 한진그룹에서 분리됐으나 경영난을 이겨내지 못하다 2014년 한진그룹에 인수됐다.

전업주부이던 현정은 회장이 현대그룹의 수장으로 변신한 것은 2003년 고 정몽헌 회장의 타계 이후다. 이때부터 현 회장의 부침이 시작됐다. 정주영 창업주의 동생인 정상영 KCC그룹 명예회장이 현대그룹 인수 의지를 밝히면서 경영권 분쟁이 발생했다. 이른바 ‘시숙(媤叔)의 난’이었다. 이때 현 회장은 현대그룹이 지주회사 격인 현대엘리베이터의 우호지분 40%를 확보하면서 사태를 정리했다.

하지만 현대그룹의 주력 계열사인 자동차·중공업 등이 계열분리된 것은 물론 그룹의 핵심 계열사인 현대건설이 채권단 관리로 넘어가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

현 회장은 금강산 관광사업 위기로 더 큰 시련을 겪었다. 2008년 금강산 관광객이 피살되면서 대북사업이 존폐의 기로에 서게 된 것이다. 금강산 관광사업은 1998년 정주영 명예 회장이 소떼를 몰고 방북면서 물꼬를 튼 대북사업이다. 현대그룹의 상징과도 같았던 이 사업이 위기를 맞으면서 현 회장도 휘청거렸다.

현대그룹의 기둥인 현대상선도 순탄치 못했다. 현대상선은 그룹 전체 매출의 70%를 차지하고 있는 핵심계열사다. 그런데 2008년 이후 전 세계적인 해운업 불황이 지속되면서 악화일로를 걸었다.

이 같은 난관에도 불구하고 현 회장에 대한 재계의 ‘기대’는 여전하다. 현 회장은 자구 구조조정안을 통해 성과를 거둔 바 있기 때문이다. 그는 현대증권과 현대로지스틱스 등 알짜배기 계열사를 매각하는 강도 높은 구조조정을 택했다. 현대그룹 주요 계열사로는 현대엘리베이터를 비롯해 현대상선, 현대증권, 현대아산, 현대유엔아이, 현대경제연구원, 현대투자네트워크, 현대저축은행, 현대자산운용, 에이블현대호텔 앤리조트, 현대종합연수원 등이 있다.

그 결과 현대그룹은 순환출자 고리에 있던 주요 계열사를 매각하고, 지배구조 개선에 힘써 경영상태가 안정됐다는 평가를 받았다. 현대상선·현대엘리베이터 등 주력 계열사들은 2015년 나란히 흑자를 내며 부채비율을 낮췄다.

현 회장은 지난 2월 유동성 위기에 내몰린 현대상선을 구하기 위해 사재 300억원을 내놓았다. 그러자 현대상선 팀장 이상 간부들도 ‘백의종군’을 선언했다. 이백훈 현대상선 대표는 “저를 비롯한 현대상선 임원, 팀장 등 간부급 사원들은 지금 이 순간부터 현재의 자리에 연연하지 않고 향후 거취와 처우 일체를 이사회에 맡기고자 한다”고 밝혔다.

현대증권 매각을 위한 우선협상 대상자로 KB금융이 선정된 것도 현 회장에겐 오랜 가뭄 끝의 단비다. 금융권에 따르면 KB금융이 제시한 가격은 1조2500억원이다. 이는 알려졌던 1조1000억~1조2000억원보다는 큰 금액이자 2013년 말 우리투자증권 패키지 매각 가격을 넘어선 수준이다. 정부는 우리금융 민영화 차원에서 우리투자증권, 우리자산운용, 우리아비바생명, 우리저축은행을 매각했고, NH농협금융지주는 4개 회사를 1조2000억원에 인수했다.

현대증권 매각으로 현대상선이 쥐게 될 현금은 대출상환금 3700억원을 제하고도 9000억원에 이른다. 이 돈은 채권단 자율협약 중인 현대상선의 회생작업의 마중물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그런 반면 현대상선이 8000억원 규모의 공모사채에 대한 기한이익상실로 채무불이행 상태에 빠지자 일각에서는 법정관리 우려도 제기되고 있다. 현 상태에서 법정관리를 밟는다면 청산 수순에 들어가야 할 것으로 보이는 만큼 사채권자들의 채무재조정 수용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현대상선의 주채권은행인 산업은행은 용선료(用船料) 인하 협상이 마무리되는 대로 사채권자와 채권단이 동일한 수준의 채무재조정을 실시하는 안건을 6월 중 상정할 예정이다. 채권단은 사채권자들이 불참할 경우 채무재조정에 나설 수 없다는 입장이다.

재계 관계자는 “현대증권이 당초 예상을 뛰어넘는 1조2500억원에 매각되긴 했지만 현대상선의 5조원에 이르는 빚을 갚기엔 역부족이다. 뿐만 아니라 회사채·선박금융 등 비협약채권 비중이 높아 채권단 위주의 구조조정만으로는 채무불이행에서 벗어나기 어려울 것”이라고 전망했다.

- 최경호 기자 squeeze@joongang.co.kr

201605호 (2016.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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