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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포커스] 안병광 서울미술관 설립자의 ‘이중섭 사랑’ 

“‘황소’ 그림이 내 인생을 구원했다” 

글 김포그니 기자 pognee@joongang.co.kr / 사진 전민규 기자 jeonmk@joongang.co.kr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화가’ 이중섭 탄생 100주년… ‘황소’를 개인 소장하기까지 파란만장한 스토리도 심금 울려

▎서울미술관은 이중섭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오는 5월 29일까지 ‘이중섭은 죽었다’전을 개최한다. 서울미술관 설립자인 안병광(59) 유니온약품 회장은 “이중섭의 예술정신을 되살리기 위해 이 미술관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화가 이중섭(1916~1956)이 탄생한지 100주년이 됐다. <황소> <소와 어린이> <길 떠나는 가족> 등 수많은 걸작을 남긴 대한민국의 대표 화가다. 그에게 쏟아진 명성과 찬사는 사후에 조명된 것이다. 국내 미술시장의 급격한 부상과 더불어 그의 극적인 인생은 ‘신화’로 남았다.

그동안 이중섭의 작품은 국내 미술시장에서 최고가 경신을 해왔다. 그러나 그의 일생에서 신화적 거품을 걷어내고 들여다보면 이국의 한 여자를 사랑했던 한 남자가 있다. 그는 평생을 가난과 고통에 시달리다 마흔 살 나이에 적십자 병원 311호실에서 쓸쓸히 생을 마감했다.

가족을 지독히 아꼈으며 타지에 있는 두 어린 아들을 그리워한 예술가의 광기는 이제 작품으로만 남았다. 서울 종로구 부암동에 있는 서울미술관은 이중섭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오는 5월 29일까지 ‘이중섭은 죽었다’전을 개최한다. 서울미술관 설립자인 안병광(59) 유니온약품 회장은 “이중섭의 예술정신을 되살리기 위해 미술관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안 회장은 미술계에서 자타가 공인하는 이중섭 ‘마니아’로 통한다. <황소>(1953년 추정 作) 연작을 비롯해 <아이들과 비둘기> <환희> 등 개인 소장가로서 이중섭 작품을 가장 많이 수집했다. <황소>는 2010년 서울옥션 경매에서 35억 6000만원에 낙찰받았다. 그가 <황소>를 전시하기 위해 서울 미술관을 연 것은 미술계에서 유명한 일화다. 안 회장은 “이중섭이 나를 살렸고, 내가 다시 이중섭을 살렸다”고 말했다. 과연 어떤 사연이 담겨 있는 걸까?

말단 사원에서 그룹 회장이 되기까지


▎안병광 회장은 미술계에서 자타가 공인하는 이중섭 ‘마니아’다. <황소>(1953년 추정 作) 연작을 비롯해 <아이들과 비둘기> <환희> 등 개인 소장가로서 이중섭 작품을 가장 많이 수집했다. <황소>는 2010년 서울옥션 경매에서 35억6000만원에 낙찰받았다.
한 해 매출 3000억원이 넘는 제약그룹을 이끌고 있는 안병광 회장은 30여 년 전에는 한 제약회사의 말단 사원이었다. 내성적인 성격 탓에 약을 팔러 병원에 갔다가도 문 밖에서 서성거리다 발길을 돌리는 날이 많았던 시절이다. 입사 초기에는 매출 실적이 늘 꼴찌를 맴돌았다. 쓸모 없는 인간이 된 것 같은 자책감에 사직서를 늘 갖고 다녔다고 한다.

1983년 태풍 포레스트가 들이닥친 날, 한여름의 대낮에 때아닌 폭우가 쏟아졌다. 안 회장은 그날도 미처 팔지 못한 약이 잔뜩 담긴 가방을 품에 안은 채 한 액자가게의 처마 밑으로 몸을 피했다. 그때 우연히 진열대에 비치된 한 그림이 그에 눈에 들어왔다.

“그림 속의 황소가 마치 불을 뿜는 것 같았어요. 그 뜨거운 삶이 마치 이렇게 말을 걸어오는 것 같았지. ‘자네, 좀 더 힘을 내보지 않을 텐가?’”

가게주인에게 작품에 대해 묻자 “그건 진품이 아니라 인쇄물이다. 화가 이중섭의 작품인데 진품을 사려면 고래등 같은 기와집 한 채 값은 줘야 한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황소의 대범한 기세에 한순간에 매료된 그는 가품이라도 갖고 싶은 마음에 주머니에 있던 7000원을 모두 털어 그것을 샀다.

<황소>의 모작을 구입한 뒤로 그의 삶은 달라져갔다. 우선 꿈이 생겼다. ‘저 황소처럼 뜨겁게 살아 성공하자. 그래서 언젠가 진품 <황소>를 손에 넣자’고 스스로에게 주문하듯 되뇌었다.

넘치는 열정을 주체 못해 씩씩거리듯 “너희들 가만 안 둬”라는 듯 외치는 표정의 황소였다. 안 회장의 수줍음 타는 성격도 바뀌었다. 덕분에 제약 판매실적은 껑충껑충 뛰어올랐다. 4년 뒤인 1987년에는 서울의 ‘뜨는’ 부촌이었던 여의도의 시범아파트로 이사할 수 있을 정도였다.

이중섭과의 특별한 인연도 이어졌다. 1950년대 이중섭과 호형호제하는 사이였던 시인 구상(1919~2004년)이 새로 이사온 집의 이웃으로 살고 있었던 것이다. 안 회장은 구상으로부터 천재 화가 이중섭의 불우했던 삶과 애틋한 가족애를 전해들을 수 있었다. 이중섭에게 아내 야마모토 마사코(山本方子, 한국 이름 이남덕)는 평생의 연인이었다. 그녀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그의 절절했던 사랑을 짐작해볼 수 있다.

“당신이 사랑하는 유일한 사람 ‘아고리(이중섭의 일본식 별명)’ 군은 머릿속과 눈이 차츰 더 맑아지고 자신감이 넘치고 넘쳐서 번쩍번쩍 빛나는 머리와 안광으로 제작, 제작-표현 또 표현을 계속하고 있다오. 한없이 살뜰하고 한없이 상냥한 나만의 천사여, 더욱더 힘을 내어, 더욱더 올차게 버텨주시요. 기필코 화공 이중섭 군이 가장 사랑하는 현처 남덕 군을 행복의 천사로 높게, 아름답게, 널리 빛내어 보이겠소.”

백발이 된 아내가 눈물 흘린 까닭


▎1955년 이중섭이 한때 머물렀던 대구 경복여관 2층 9호실을 재현한 모습. 서울 개인전은 성공했으나 작품값을 제대로 수금하지 못해 힘들어 했던 이중섭은 대구 개인전을 또 다른 도약의 발판으로 기대하고 준비했다. / 사진·중앙포토
이중섭의 삶을 이야기해준 구상도 그에 못지 않은 애처가였다. 안 회장은 “치매에 걸린 아내를 햇볕 좋은 등나무 아래로 데려가 담소를 나누는 게 그분의 일상이었다”며 “단 하루도 그 시간을 거른 적이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구상의 사랑이 봄날의 볕이라면 이중섭의 사랑은 타는 듯한 태양이라고 해야 할까?

1937년 이중섭에게 도쿄 유학 시절은 예술 세계의 확장 말고도 또 다른 의미가 있다. 바로 훗날 부인이 되는 마사코와의 만남이 있었기 때문이다. 도쿄문화학원 선후배로 만난 두 사람은 국경을 넘는 사랑 끝에 결혼식을 올렸다. 부부의 연을 맺은 그해 광복을 맞았지만 곧이어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신혼의 남녀는 부산과 제주, 또다시 부산으로 피란길에 올라야만 했다. 이 과정에서 이중섭은 결국 아내와 두 아들을 일본으로 보냈다. 이후 통영, 서울, 대구 등지에서 혼자 머물면서 고독한 작품 활동을 이어갔다.

늘 가난했던 이중섭은 아내에게 값비싼 재물은 건네지 못했지만 글과 그림으로 자신의 마음을 표현했다. 그는 아내에게 1941년부터 2년간 88점의 그림엽서를 보냈다. 이 엽서에는 직접적인 사랑의 구애가 추상적인 그림과 함께 혼재돼 있다.

특히 작품 <우주 01, 03, 04>는 칠월 칠석에 발송된 엽서로 견우와 직녀처럼 서로 다른 나라의 두 사람이 오작교를 통해 하나되는 사건을 추상적으로 그려냈다. <여인과 짐승>은 자신의 사랑을 미지의 힘(전쟁)이 갈라놓은 것에 대한 분노가 드러나 있다.

서울로 온 이중섭은 전시회를 위해 모든 열정을 다했다. 처음 머물렀던 곳은 서울 종로구 누상동 166의 10번지. 이곳에서 그는 작품 활동에만 몰두했다. 이후 마포구 신수동으로 이어진 창작 열정은 가난이 이끌고 온 불안 속에 매몰됐다. 그때마다 그를 다잡게 한 것은 아내에게 엽서를 쓰는 시간이었다.

이중섭이 부인을 생각하며 그렸다는 <환희>를 보자. 구름에 싸인 해를 사이에 두고 암수 두 마리의 닭이 등장한다. 푸른색 수탉과 붉은색의 암탉이 서로 어우러져 춤을 추고 있다. 독특한 구성의 이 작품은 아내를 향한 사랑을 온화하게 표현한 것이다.

2014년 5월 이중섭의 아내 마사코 여사가 서울미술관을 찾아 남편이 죽은 후 처음으로 <환희>를 감상했다. 당시 안 회장은 마사코 여사에게 “이중섭 선생님께서 일본에 계시던 여사님을 그리워하며 그린 작품이라 더욱 소중히 간직해왔다. <환희>는 나의 부부상이기도 하다”라고 말했다. 남편이 생전에 수놓은 깊은 사랑의 실물을 앞에 두고 백발이 되어버린 그의 아내는 한동안 말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를 위해 미술관을 짓다


▎이중섭의 대표작인 <황소>는 그의 외로운 투쟁을 잘 보여준다. ‘소’는 화가의 분신과 같은 존재로 고통, 절망, 분노를 대변함과 동시에 희망과 의지, 힘을 상징한다. / 사진·중앙포토
2010년 6월 안 회장에게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서울옥션 경매에서 이중섭의 작품 <황소>가 등장한 것이다. 35억6000만원. 빌딩 한 채 가격이었다. 안 회장은 “너무 비싸서 구입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이옥경 가나갤러리 대표(현재 서울옥션 부회장)에게 부탁해서 하룻밤만 <황소>를 빌려 집에 두고는 잠도 자지 않고 보고 또 봤다”고 말했다. 결국 안 회장은 자신이 소장하고 있던 <길 떠나는 가족>을 판 돈을 보태 <황소>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젊은 날, 비에 젖은 7000원에 <황소> 모작을 구입한지 27년 만에 이뤄진 일이었다.

안 회장이 <황소>를 얻기 위해 내놓은 이중섭의 <길 떠나는 가족>을 구입해 간 한 인사의 사연도 특별하다. 이 인사는 다름 아닌 <황소>를 경매에 내놓은 주인이었다. 그가 이중섭의 <황소>를 안 회장의 소장품인 이중섭의 <길 떠나는 가족>과 맞바꾼 이유는 무엇일까?

이 인사는 한국전쟁 직후 부산에 있는 르네상스 다방에서 열린 이중섭 전시에서 <길 떠나는 가족>을 보고는 단번에 매료되고 말았다고 한다. 무엇에 홀린 듯이 다방 여주인에게 쌀 한 가마를 내어주고는 이 작품을 구입했지만 <길 떠나는 가족>과의 인연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며칠 후 이중섭이 돌연 그를 찾아왔기 때문이다. 이중섭은 그에게 이렇게 간청했다. “당신에게 작품 <황소>를 줄 테니 <길 떠나는 가족>을 다시 돌려주시겠소? 일본에 있는 내 아내와 아들을 위해 그린 그림이라 도저히 팔 수 없어서 그러오.”

작품 <길 떠나는 가족>에서 이중섭은 아내와 두 아들을 태운 황소의 고삐를 움켜 쥐고 있다. 바지춤이 흘러내린 줄도 모르고 흥에 겨워 앞장서는 가장의 모습으로 그려진다. 안녕을 상징하는 비둘기 한 마리가 이들과 함께하고 있다.

당시 이중섭의 부탁으로 <길 떠나는 가족>을 돌려주는 대신 <황소>를 받은 그는 60여 년 만에 본래 갖고 싶었던 작품을 되찾게 됐다. 이를 두고 안 회장은 “작품과는 인연이 있어야 한다. 때로는 작품이 인생의 스승과 같은 역할을 할 때가 있기 때문이다. 각자 짝을 잘 찾아간 것 같다”라고 말했다.

이중섭의 가족애는 그의 다른 작품에서도 엿볼 수 있다. 한국전쟁 당시 이중섭은 춥고 배고픈 피란지였던 부산을 떠났다. 좀 더 나은 삶을 보장해줄 ‘낙원과도 같은 곳’ 제주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주에서의 삶 역시 부산과 크게 다르지 않은 고달픈 나날이었다. 해초와 게로 연명해야 하는 날이 잦았다.


▎작품 <아이들과 비둘기>. 천진한 모습으로 어울려 노는 자신의 두 아들의 모습을 그렸다. 어려운 시대적 상황을 겪으며 가족과 헤어져 지내야만 했던 이중섭은 자신의 작품에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담았다.(좌) / 작품 <과수원의 가족과 아이들>. 이중섭의 첫 아들은 태어나자마자 원인 모를 병에 걸려 죽었다. 아이를 잃은 슬픔에 빠진 그는 밤새 술을 마시고 이 작품을 그렸다. 아이가 저승에서 외롭지 않도록 여러 명의 친구와 천도복숭아 나무를 함께 그려 넣었다.(우)
살기 위해 너무나 많은 게를 잡아먹어서 그 미안함에 게가 그의 작업 속 중요한 소재가 됐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이중섭은 가족과 함께였기에 건강하고 긍정적인 기운으로 작품생활을 이어 나갔다. 가족과 자연이 주요 모티브가 된 이 시기의 작품에는 이상향으로 나아가고자 했던 이중섭의 낭만성이 흘러 넘쳤다.

1946년 이중섭은 첫 아들을 얻었다. 아이는 그러나 태어나자마자 원인 모를 병에 걸려 죽었다. 아이를 잃은 슬픔에 빠진 그는 시인 구상과 밤새 술을 마셨다. 취기가 가시기 전에 그린 작품이 바로 <과수원의 가족과 아이들>이다. 아이가 저승에서 외롭지 않도록 친구 여러 명과 천도복숭아 나무를 함께 그려 넣었다.

<과수원의 가족과 아이들>은 안 회장이 한때 소장했던 작품이기도 하다. 그러나 2005년 3월 미술경매에 등장한 이중섭의 작품 여덟 점이 위작 파문에 시달리자 안 회장이 ‘이중섭을 다시 살리자’는 취지에서 이 작품을 <통영 앞바다>와 함께 경매에 내놓았다.

안 회장은 “당시 경매에 내놓으면서 이중섭 작품의 시세를 훨씬 웃도는 값을 제시하고는 그 밑으로는 팔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위작 파문이 있었던 시기여서 내가 높은 값을 부르자 다들 놀라는 눈치였다”고 말했다. 현재 <과수원의 가족과 아이들>은 삼성 리움 미술관에서 소장 중이다.

“나는 미치지 않았다”


▎작품 <환희>. 이중섭이 아내를 그리워하며 그린 작품이다. 구름에 싸인 해를 사이에 두고 푸른색 수탉과 붉은색의 암탉이 서로 어우러져 춤을 추고 있다.(좌) / 작품 <싸우는 소>. 이중섭이 병원에서 끊임없이 투병하던 시절에 그렸다. 극렬한 싸움의 분노로 얽혀있는 두 마리의 소를 통해 전쟁의 암운 속에서 우리 민족이 겪어야 했던 수난과 작가 자신의 시련을 그려냈다.(우)
국내 미술업계가 성장하고 화가 이중섭에 대한 국민적 애정이 깊어지면서 그의 대표적인 작품 <황소>에 대한 가치는 나날이 높아진다. 안 회장은 “누군가 <황소>를 80억 원에 사고 싶다고 제의해왔지만 거절했다. <황소>를 위해 ‘외양간(서울 미술관)’을 지었는데 소가 없으면 되겠는가?”라고 말했다.

이중섭이 <황소>를 그렸을 것으로 추측되는 1953년 무렵은 그가 일본에 있는 가족을 만나겠다는 의지가 충만했던 시절이었다. <황소>는 그의 외로운 투쟁을 보여주는 듯 정열적으로 내연하는 에너지로 충만하다.

생전에 이중섭은 “백정과 소도둑도 나만큼 소를 보지는 못할 것이다”라고 자신 있게 말했다. 그만큼 소를 지켜보는 일을 좋아했다. 한번은 소도둑이라는 오해를 받고 경찰에 붙잡혀가기도 했다. 너무 소를 좋아했던 덕에 소를 보지 않고도 그릴 수 있는 경지에 들었다고 한다.

그의 작품에 빈번히 등장하는 ‘소’는 민족에 대한 자각을 일깨워주는 모티브이자 작가의 분신과 같은 존재다. 상황에 따라 절망, 분노를 대변함과 동시에 희망과 의지, 힘을 상징하기도 한다.


▎안병광 회장은 “이중섭은 죽었다”고 말한다. 이중섭의 천재성에 기인한 신화에 집중할 게 아니라 너무나도 고독했던 한 남자의 절절한 가족애와 삶을 들여다보자는 뜻이다. 이제 ‘신화’로서의 이중섭은 죽고 ‘삶’으로서의 이중섭을 되살려야 할 때라고 그는 생각한다.
특히 <황소>는 이중섭의 외로운 투쟁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단단한 몸집에 곧 치받을 듯 수그린 고개가 강인한 인상을 준다. 근육과 살집에서 느껴지는 거침과 속도감은 동양화의 ‘기운생동’하는 필법과 닮았다. 황소 연작 중 또 다른 작품 <피 묻은 소> <싸우는 소>(1955년 作)에 나타난 소는 절망으로 가득하다. 1955년은 이중섭이 병원에서 끊임없이 투병하던 시절이었다.

당시 서울 개인전의 작품 값을 제대로 받지 못해 곤란한 상황이었던 이중섭은 대구에서의 개인전을 새로운 기회로 여겼다. 그러나 포부에 비해 대구 전시는 실패했다. 낙담한 그는 가족에 대한 그리움까지 도져 자학하기 시작했다.

마음의 병은 몸마저 녹슬게 했다. 대구 성가병원에서 시작된 투병생활은 서울 수도육군병원, 성 베드루 신경정신과 병원으로 이어지면서 그를 더욱더 쇠약하게 만들었다. 이때 그려진 두 마리의 소는 기존의 소와는 다르게 치열하고 광기가 가득하다.

<피 묻은 소>에서 보이는 혈흔이나, <싸우는 소>에서 보이는 격렬한 에너지는 그의 다른 소 그림과는 확연히 다르다. 더 이상 가족을 못 보게 될지도 모른다는 좌절감이 절절히 느껴진다. 화면 가득 내연하는 힘으로 몸부림치는 소의 모습이 그려진 <피 묻은 소>, 푸른 색조의 배경 위에 극렬한 싸움으로 인해 분노로 얽혀 있는 두 마리의 소가 등장하는 <싸우는 소>. 이중섭은 전쟁의 암운 속에서 우리 민족이 겪어야 했던 수난과 작가 자신의 시련을 그려냈다.

이 무렵 그는 갖고 있던 자신의 작품을 불태우거나 지인에게 나눠주는 등 이상행동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자신이 정신병에 걸렸다는 주변의 우려를 잠재우기 위해 자화상을 그려 자신이 미치지 않았음을 증명하기도 했다.

신화(神話)보다는 그의 삶에 주목해야


▎작품 <자화상>. 이중섭은 자신이 정신병에 걸렸다는 주변의 우려를 잠재우기 위해 자화상을 그려 자신이 미치지 않았음을 증명했다. / 사진·중앙포토
투병 생활을 정리하고 서울로 온 이중섭은 소격동에 있는 수도육군 병원에서 통원 치료를 하며 작품 활동을 이어갔다. 이후 성 베드루 신경정신과 병원에서의 치료까지 그의 심신은 나날이 피폐해졌다. 그는 말년에 이르기까지 마지막 창작의 불꽃을 이곳 정릉에서 불태웠다.

특히 이 시기 이중섭은 문예잡지 표지나 삽화작업을 주로했는데 이는 서울에서의 생계를 위한 지인의 배려였다. <문학예술> <자유문학> <현대문학> 등의 잡지에 실린 그의 삽화에는 이중섭만의 따스함과 천진난만함, 그리고 쓸쓸함이 묻어나 있다.

가족을 다시 만나고자 하는 의지는 오롯이 살아있었으나 그러기에 육체는 깊이 망가져 있었다. 그는 결국 1956년 9월 6일 오후 11시45분 서대문 적십자병원 311호에서 간장염으로 죽었다.

서울특별시 중랑구 망우동 공원묘지 고유번호 103535번. 이중섭의 묘지가 쓸쓸하게 자리 잡고 있는 곳이다. 화려한 비석이나 추모비 하나 없어 ‘국민화가’라는 말이 무색하다. 그의 유해는 이곳 망우동 공원묘지 이외에도 일본에 있는 부인 야마모토 마사코에게 일부, 그리고 절친한 친구였던 화가 박고석의 손에 들려 그가 마지막으로 살았던 성북구 정릉 청수동 계곡에 일부 뿌려졌다.

안 회장은 “이중섭은 죽었다”고 말한다. 이중섭의 천재성에 기인한 신화에 집중할 게 아니라 너무나도 고독했던 한 남자의 절절한 가족애와 삶을 들여다보자는 뜻이다. 이제 ‘신화’로서의 이중섭은 죽고 ‘삶’으로서의 이중섭을 되살려야 할 때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이중섭이 남긴 그림은 훗날 유약했던 한 청년의 마음을 사로잡아 그를 성공의 문턱으로 이끌었다. 화가는 평생 가난하고 외로웠지만 화가의 그림을 사랑했던 청년은 현재 누구보다도 건실한 가장으로서 가족과 함께하고 있다. 환갑을 눈앞에 둔 그 청년은 “이중섭은 나를 성공으로 이끌어 준 인생의 길잡이였다”고 강조한다. 이중섭을 만나게 된다면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단다. 무슨 일이 있어도 가족과 함께 있길 바랍니다. 더 이상 외롭지 말길 바랍니다.

- 글 김포그니 기자 pognee@joongang.co.kr / 사진 전민규 기자 jeonmk@joongang.co.kr

201605호 (2016.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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