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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중 교수의 ‘그리스 문명의 결정적 순간’(2)] 신화에서 역사를 향한 여정 

“고대 그리스의 황금시대 열었다” 

김승중 캐나다 토론토대 희랍미술고고학과 교수 seungjungkim@gmail.com
특정인물을 공식적으로 찬양하는 것은 도리에 어긋난다고 생각했던 그리스인… 알렉산더 대왕은 서서히 자라왔던 역사의 싹을 활짝 꽃피운 영웅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 서쪽 입구에 자리 잡은 아테나 니케의 신전(Temple of Athena Nike, BC 421~400: 승리의 여신으로서의 아테나). 기둥 사이에 자리 잡은 이오니아식 프리즈(Ionian Frieze)에 그 유명한 마라톤 전투(Battle of Marathon, BC 490)가 새겨져 있다. / 사진제공·김승중
그리스 역사상 최초로 인간세의 일들을 후세를 위하여 체계적으로 기록해야 한다는 개념이 탄생했다. 실로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한 코페르니쿠스적인 모멘트다. 신화 중심의 세계관이 인간의 역사관으로 바뀌었다. 그 순간 고대 그리스 예술의 도약이 이뤄졌다.

기원전 333년 11월 5일, 알렉산더 대왕(Alexander the Great, BC 356∼323)은 마케도니아 병사 4만 명을 이끌고 바로 페르시아 아케메네스 제국(Achaemenid Empire)의 문턱인 이소스(Issos: 현재 터키의 중남부에 시리아와 경계를 둔 하타이Hatay 지방의 도시)에서 대기 중이었다. 바로 이곳에서 23세의 푸릇푸릇한 청년 알렉산더가 페르시아의 마지막 대왕 다리우스 3세(Darius III, BC 380∼330)를 직접 대면하게 된다. 이는 바로 소아시아(Asia Minor, 현재 터키의 서부 지역) 일대를 정복하려고 나선 알렉산더 대왕이 전설의 트로이 부근에 위치한 그라니쿠스(Granicus) 강 지역에서 첫 번째 승리를 거둔 지 2년도 채 안된 시점이었다.

그라니쿠스전에서 페르시아 식민지였던 소아시아 지역의 태수(Satrap)들을 모두 굴복시키고 차례차례로 소아시아의 주요 도시들을 획득한 알렉산더 대왕이, 드디어 그 방대한 영역이 인도 반도까지 이른다는 대제국 페르시아의 입구에 우뚝 서게 된 것이다. 페르시아 제국의 국왕 다리우스 3세는 처음에는 소아시아에 쳐들어 온 새파랗게 젊은 알렉산더를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각 지역의 태수들만으로도 충분히 해결되리라 믿었다. 그러나 그라니쿠스전에서 치명적인 패배를 당하고 나서는, 자신이 친히 출정하여 군대를 지휘하게 된 것이다.

알렉산더는 고작 4만 명에 불과한 병사들을 이끌고 다리우스가 거느린 십만 명이 넘는 페르시아군을 여지없이 격파했다(고대문서들에는 페르시아군이 오십만 명이 넘는다는 기록도 전해오나, 대부분이 과장된 서술이 분명하다고 사계의 학자들은 본다). 이리하여 다리우스 3세는 그가 평생 몸소 지휘했던 전투 중에서 처음으로 이 이소스전(the Battle of Issos)에서 쓰라린 패배를 맛본다.

작품 속에서 생동하는 알렉산더의 자취


▎폼페이에서 출토된 이른바 알렉산더 모자이크. 이소스전(Battle of Issos, BC 333)에서 알렉산더 대왕과 페르시아 제국의 다리우스 3세와의 운명적 만남을 나타낸다. / 사진제공·김승중
한편 이 전설적인 이소스전은 결국 페르시아 제국 전역을 휩쓸고 아프리카 대륙까지 진출하게 될 알렉산더 대왕의 대정복사에서 결정적인 프롤로그였다. 다리우스는 이소스에서 가까스로 탈출에 성공했다. 그러나 그의 왕비, 두 공주, 그리고 왕의 모친 모두가 여기서 포로로 붙잡힌다. 그리고 2년이 지난 뒤에 가우가멜라(Gaugamela: 현재 이라크 북부 모술 Mosul 근처)에서 그는 다시금 알렉산더와 맞닥뜨려 또 한 번 패배의 쓰라림을 겪고, 그 후 1년도 안 되어 암살당하고 만다. 이로써 그 찬란하고 유구한 역사를 지녔던 페르시아 대제국은 결국 허망하게 무너지고 말았다. 이소스에서 처음으로 두 대왕이 대면한 뒤 3년도 채 안되어 페르시아 대제국은 멸망하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은 다채로운 역사적 배경을 알게 되면, 이소스전에서의 알렉산더 대왕과 다리우스 3세의 운명적인 첫 대면의 순간이 왜 이토록 많은 고대 미술가의 상상을 사로잡는 유명한 주제가 되었는지 충분히 이해가 되고도 남을 것이다. 폼페이에서 1831년에 발굴된 알렉산더 모자이크(Alexander Mosaic, BC 1세기경)가 바로 이소스전을 주제로 만들어진 미술품 중 가장 유명하다. 이 모자이크작품은 각가지 다양한 색상을 띤, 200만 개 이상의 대리석 조각으로 이루어진, 가로 5m가 넘는 대형 걸작이다.

고고미술사 학계에서는 이 모자이크가 BC 310년에 필록제노스(Philoxenos of Eretria)라는 그리스 화가가 남긴 원작 회화의 사본이라고 보고 있다. 알렉산더 대왕의 전투가 로마시대 때 폼페이에 사는 호화로운 귀족집안의 마루바닥을 장식했다는 것 자체도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그만큼 알렉산더 대왕의 공적이 몇백 년이 지난 후에도 여전히 칭송의 대상이 되었다는 증거이다. 작품 속에서 생동하는 이 장면을 보라! 스물세 살에 불과한 마케도니아의 한 앳된 청년이 용감히 페르시아 대제국의 무시무시한 왕에 맞서는 장면이 마치 눈앞에 펼쳐지는 듯하다. 날렵하게 창을 놀리며 당당하게 앞으로 진격해 나아가는 알렉산더의 발아래에는 벌써 페르시아 군들이 사방팔방으로 혼란스럽게 쓰러지고 있지 않는가! 손을 뻗치며 놀란 토끼 눈을 크게 뜨고 입을 멍하게 벌린 다리우스는 지금 꼬리를 감추고 뺑소니치기 일보직전이다. 보라! 그가 탄 전차를 끄는 말들은 벌써부터 아연실색하며 휘익 방향을 돌려 그림 밖으로 사라지기 시작하지 않았는가!

알렉산더 대왕이야말로 그리스 역사상 유일하게, 그 어느 신화적인 영웅도 비견할 수 없는 대표적인 영웅이었다. 그는 트로이 전쟁의 찬란한 영웅 아킬레우스(Achilleus)도 따를 수 없는 상상도 못할 정도의 방대한 업적을 단지 10년 안에 수행하였다. 그의 빛나는 청춘, 육체의 아름다움,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BC 384∼322)에게서 교육받은 이성, 그리고 32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한 것 등 모든 사항이 그리스 영웅들의 전형적인 패턴에 딱 들어맞는다. 헤라클레스(Herakles)의 무지막지한 추진력과 신적인 힘, 아킬레우스의 불타는 정열과 뛰어난 전투력, 그리고 오디세우스(Odysseus)의 병법과 전략을 한 몸에 지닌 알렉산더 대왕은 젊은 나이에 죽음을 맞이 함으로써 그의 영웅적 지위를 확고히 다진 것이다. 호메로스(Homeros)의 명작 <일리아드>(Iliad)의 주인공인 아킬레우스가 트로이에서 10년 전쟁의 마지막 전투를 앞두고 싸움을 거부할 때, 그의 어머니인 물의 여신 테티스(Thetis)는 아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네가 지금 싸우지 않으면, 오래도록 행복하고 평화스런 삶이 고향에서 너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허나, 그 편안한 삶 끝에 죽음에 이른 뒤로는 아무도 너를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 네가 트로이 전쟁에 나아가 그리스를 위해 싸워준다면 너는 이 전쟁터에서 비록 죽게 되겠지만, 너의 명성(kleos)은 앞으로 영원히 살아갈 것이다.”(Homer, Iliad 9, 499∼505)

보이는 것은 단지 신과 영웅들의 이야기뿐


▎1. 파르테논 신전에 아직도 그대로 남아 있는 서쪽 면의 메토프(Metope). 말을 타고 그리스인을 짓밟는 아마존(Amazon)의 모습을 볼 수 있다. 2. 사자머리를 쓴 알렉산더 대왕의 모습이 나타난 은전(silver tetradachm). 반대편에는 그의 조상격이 되는 제우스신이 독수리를 들고 옥좌에 앉아 있고, 그 옆에 ‘alexadrou’(번역: ‘알렉산더의…’)라고 찍혀 있다. / 사진제공·김승중
물론 아킬레우스는 비록 자신이 죽음을 앞두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결국은 전투를 택하였다. 발뒤꿈치를 제외하고는 불멸의 신체를 가진 반신 아킬레우스는 그래도 인간적인 죽음을 택하였기에 오히려 참된 영웅으로 승화한 것이다. 알렉산더 대왕 또한 그의 짧고 찬란한 인생을 영웅답게 매듭짓고, 그의 죽음 자체도 신비에 싸인 수수께끼로 전해져서 그는 갈수록 신격화되어 갔다. 고대 그리스의 역사와 문화 전통을 본격적으로 우러러 보던 로마인들에게, 알렉산더 대왕은 그들의 신화에 담긴 전설의 영웅들보다도 훨씬 더 감동적이고 인상 깊은 역사적 모델이었을 것이다. 특히 알렉산더처럼 ‘마그누스’를 이름 뒤에 붙힌 폼페이우스(Gnaeus Pompeius Magnus, BC 106∼48) 등 야심에 찬 정치가들을 비롯하여 많은 로마 황제도 수시로 알렉산더 대왕을 모델로 삼았다는 것은 잘 알려진 바다.

알렉산더도 종종 자신이 남성미의 극치를 지닌 헤라클레스의 후손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제우스가 아닌 헤라클레스를 직접적인 조상으로 모셨다는 것은 그만큼 헤라클레스의 인기를 입증하는 것이다. 영웅이 상징하는 바, 신과 인간의 중개자 역할의 중요성을 나타낸다. 그렇지 않아도 예술로 표현된 알렉산더의 모습은 마치 헤라클레스가 환생하여 나타난 것과도 같이 사자머리를 헬멧처럼 쓰고 있다. 알렉산더가 발행한 동전에도 사자머리 쓴 그의 모습이 찍혀 있는 것을 종종 볼 수 있으며, 이러한 동전은 지금도 중동 지방 여기저기서 발굴되고 있다. 헤라클레스와 닮은꼴인 자신의 강력한 이미지를 그동안 정복한 방대한 제국의 수많은 미개한 이방인에게 전파하기엔 동전만큼 효과적인 매체가 없었기 때문이다.

영웅들의 이야기는 추후에 더 자세히 논하기로 하고, 이제 본격적으로 신화와 역사가 고대 그리스 시대에 어떠한 관계를 가지고 이해되었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사실상 알렉산더 대왕의 경우처럼 역사적인 인물의 실적을 미술품으로 기념하는 관습은 고대 그리스 역사에서는 극히 드문 현상이다. 알렉산더 이전 고대 그리스에서는 마치 인간세에서 일어나는 그 모든 일은 아예 예술로 표현할 수 없다는 아주 엄격한 규범이 있었던 듯, 역사적인 사실을 주제로 한 예술품은 눈을 비벼도 찾아보기 힘들다. 아테네·올림피아·델포스 등 어디를 가도, 또 신전·동상·공공시설 등 고개를 어디로 돌려보아도 보이는 것은 단지 신과 영웅들의 이야기뿐이다. 제우스·아테나·아폴로·아르테미스·아프로디테 등의 올림포스의 신들과, 제우스의 아들 헤라클레스나 포세이돈의 아들 테세우스(Theseus) 같은 반신반인의 영웅들 그리고 그들의 과업만이 공식적인 예술로 표현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스 문명을 총괄하여 대표한다는 그 유명한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Parthenon, BC 447∼432)마저도 사실적인 표현을 피하는 경향이 깊게 새겨진 전형적인 예다. 이 파르테논 신전은 명목상으로는 아테나(Athena) 여신을 숭배하기 위한 전당이지만, 실제로는 페르시아 전쟁(The Persian Wars, BC 492~449)의 승리를 기념하는 정치적인 건축물이다. 페르시아 전쟁이라 함은 알렉산더 대왕이 페르시아를 점령하기 170년 전에, 그리스를 처음으로 침략한 페르시아군을 모든 그리스 도시국가(폴리스, polis)들이 연합하여 물리친 그 대전을 말하는 것이다.

BC 479년 플라태아전(Battle of Plataea)에서 비록 그리스 연합군이 마지막으로 육전의 승리를 거두었지만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는 초토화되었다. 그 이후 30년 동안 아테네인들은 황폐화된 아크로폴리스를 바라보며 페르시아의 야만적인 소행을 되새기며 살았다고 전한다. 그 후 페리클레스(Perikles, BC 495∼429)가 곧 아테네의 정권을 잡게 되고, 그동안 그리스의 도시국가들이 페르시아가 재침할 경우를 대비하여 공동으로 모은 자금을 BC 447년에 몽땅 파르테논 신전 건축비로 충당해버린 것이다. 그 메시지는 명백했다. 페르시아 전쟁의 승리는 곧 아테네의 승리이고, 아테네가 그리스 전체에서 으뜸가는 폴리스이며, 전쟁의 여신 아테나가 보호하는 불멸의 도시라는 것이다.

아테네의 우월성을 찬양한 페리클레스


▎현재 대영박물관의 소장인 파르테논 신전 남쪽 면의 한 메토프. 반인반마 켄타우로스들과 라피트인들의 싸움을 나타낸다. / 사진제공· 김승중
아테네 헤게모니의 불꽃은 밝은 만큼 짧았다. 파르테논 신전 완공 후 1년도 지나지 않은 BC 431년에 펠로폰네소스 전쟁(Peloponnesian War)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이 전쟁은 스파르타(Sparta)와 아테네(Athens)가 따로따로 주도하여 연맹된 각 지역 폴리스 사이의 내전이었다. 전쟁 초기부터 아테네는 전염병에 휩쓸리는 등 불운을 겪다가, 결국 소수의 독재에 의한 정부(oligarchy)가 다스리는 스파르타에게 패배를 당함으로써 아테네 민주주의의 불꽃이 영원히 꺼져버리고 만 것이다.

이 전쟁 초기 전염병의 마수를 피하지 못하고 죽은 인물 중의 한 사람이 바로 파르테논 신전을 건립한 페리클레스였다. 그가 죽기 전에 아테네에서 행한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전사한 장병들의 추모식 연설(Funeral Oration)은 지금까지 생생하게 전해 내려온다. 그 연설은 아직까지도 우리 마음을 흔드는 구절들로 가득하다. 특히 나라를 위해 목숨 버리기를 마다하지 않고 싸운 아들들이 영웅다운 죽음을 맞이하였으며, 그들의 영광은 곧 아테네의 영광이며, 아테네의 평등성·공정성·개방성을 빛냈다고 말한다. 페리클레스는 아테네가 차지하고 있는 최고의 위치와 우월성을 찬양함으로써 그들의 희생의 가치를 한껏 고양시키고, 산 자들에게 죽은 자들의 모범을 계승할 것을 권유한다. 자부심이 넘쳐흐르는 명연설이다.

파르테논 신전을 장식하는 조각상들을 통해 이러한 메시지가 강력하게 전달된다. 특히 동서남북 사면에 나타난 각각 네 가지의 전투가 그러하다. 기둥 위에 끼워 넣은 네모난 양각의 석상들은 도리아 식(Doric Order)의 메토프(Metope)라고 불리는데, 파르테논 신전에는 총 92개의 메토프가 있고, 이는 모두 전투를 나타낸다. 게다가 그 전투들이 하나같이 신화나 전설에 나오는 이야기라는 것이 특징적이다.

동쪽에는 올림포스 신들이 태초의 기간테스(Gigantes)와 전투하는 장면들로 가득하고, 남쪽에는 전설의 부족인 라피트(Lapith)인들과 켄타우로스 (Kentauros)들 사이의 싸움을 표현하고 있다. 서쪽에는 아테네인의 조상들이 테세우스를 앞세워 전설의 아마존(Amazon)들의 침략을 물리치는 장면들이 새겨졌다. 그리고 북쪽에는 반신인 아킬레우스와 같은 영웅들의 대표적인 전쟁, 즉 그리스와 트로이 사이의 전쟁이 상세히 표현되어 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이 4가지의 전투가 공통적으로 나타내는 바가 질서(Order)와 카오스(Chaos)의 대립이라는 것이다. 올림포스신들이 질서와 이성을 상징하는 반면 땅의 여신 가이아(Gaia)의 아들들 기간테스는 혼란과 카오스를 상징한다. 올림포스의 신들이 태초의 신 티탄(Titan)과 기간테스를 이겨내고 난 다음에야 우주의 질서를 확보하고 세상을 다스리게 될 수 있었다고 전한다. 그리고 켄타우로스는 반인반마, 그렇지만 사람보다는 동물적인 요소가 더 강력한 존재다.

역사적인 주제에 광적인 관심 보인 로마 예술


▎BC 450년경에 만들어진 고대 그리스의 도자기에 새겨진 ‘페르시아화’한 아마존들. 화려하게 장식된 독특한 패턴의 긴 바지와 프리지안 모자(Phrygian cap) 등이 그 특징이다. / 사진제공·김승중
라피트인들의 혼인식에서 술을 잔뜩 처먹고 달아오르는 야성을 참지 못하여 신부를 강간하려고 했던 켄타우로스들의 행동은 사회적인 관례와 질서에 완전히 어긋나는 일이다. 게다가 여전사 아마존들은 어떻게 보면 더욱더 문제되는 존재다. 이들 또한 그리스 내에서 엄격하게 지켜지는 남녀간의 사회질서를 어지럽힐 수 있는 위험한 존재이며, 그 무엇보다도 이들은 소아시아 지역에 본거지를 둔 페르시아와 가까운 야만 민족이다.

전설의 트로이인들도 역시 그리스 조상 및 찬란한 영웅들을 상대로 싸운 그리스의 적군이다. 제우스 신의 딸이며 스파르타의 왕비인 헬레네(Helene)를 납치한 관례에 어긋나는 행위의 대가로 트로이는 결국 그리스에게 멸망당하고 말았다. 마치 그리스인들에게 야만적으로 간주되었던 제국 페르시아가 그리스에게 패배한 것이 지극히 정당한 결과이듯이. 결국 그리스의 승리는 올림포스 신들이 지키는 우주의 질서를 상징한다. 그것은 사회적 질서와 관습을 어지럽히는 거만한 휴브리스(hubris, 오만)를 지닌 자들을 처벌한 자연적인 결과일 뿐이다.

그렇지만 파르테논 신전이 페르시아 전쟁의 승리를 기념한 것이라면, 페르시아 전쟁을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않고, 이렇게 신화를 통해 간접적으로 은유한 까닭은 도대체 무엇일까? 페르시아 전쟁 이후 미술품에서 보이는 아마존들의 모습은 점점 ‘페르시아화’ 되어간다. 이때 그들의 옷이며 장비 등이 페르시아군처럼 보이기 시작하고, 갑자기 페르시아인들이 즐겨 타는 말도 타며, 동부 오랑캐들의 주무기인 활을 쏘는 모습도 허다하게 나타난다. 더구나 페르시아가 그리스를 침략한 것과 같이 아마존들이 아테네를 침공했다는 새로운 전설도 이때 새로 등장한다. 다시 말하자면 그리스인들은 역사적인 사건들을 직접 미술로 표현하지 않고, 그 대신 존재하지 않았던 전설을 열심히 꾸며내기까지 하면서 은유했으며 직접적인 표현은 마다한 것이다.

그에 반해서 로마시대의 미술은 역사적인 주제에 거의 광적인 관심을 보인다. 사실적인 초상화가 로마제국 전역에서 널리 유행했고, 공식적인 예술로 황제들의 수많은 업적을 상세히 기록했으며, 로마 전역 방방곡곡에 역사적인 이벤트를 기념하는 사적들을 세웠다. 역사를 기념화하는 현대 서양문명의 전통은 고대 그리스보다는 바로 이러한 로마제국의 관습에서 비롯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민주주의의 발상지이며 철학의 본거지, 그리고 인간의 권리와 가치를 상승시킨 휴머니즘(Humanism)을 탄생시킨 고대 그리스. 그러한 그리스가 어찌하여 인간의 역사보다 상상의 산물인 신화와 전설을 더 중요시했을까?

현재 역사라고 하는 것은 실제와 1대 1의 관계를 가진 사건들의 집합을 말한다. 그리고 역사학자의 역할은 ‘실제로 일어난’ 사건들의 인과관계 등의 패턴을 찾아내서 내러티브(Narrative: 이야기 형식)로 엮어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실존의 여부가 불확실한 신화나 전설 등은 우리는 역사로 치지 않는다. 그러나 고대의 많은 문명은 역사와 신화를 분명히 구분하지 않았고, 고대 그리스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현대 고고학자들은 아직도 트로이 전쟁의 실존여부를 입증하지 못하고 있지만, 그리스인들에게 트로이 전쟁은 틀림없는 역사였으며, BC 8세기경에 쓰여진 호메로스의 대서사시 <일리아드>(Iliad)와<오디세이>(Odyssey)는 그들의 <삼국지연의>였던 것이다.

헤라클레스, 아킬레우스 등은 모두 영웅시대 때 실제로 살아 숨쉬었던 인물들이었다. 호메로스와 동시대를 살았던 헤시오드(Hesiod)가 이러한 영웅시대(Age of Heroes)를 인류 역사의 한 부분으로 설명한다. 그에 의하면, 반신반인의 아름다운 영웅들이 휘젓고 다녔던 ‘영웅시대’는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타락할 만큼 타락한 ‘철’시대를 선행하는 시대다. 물론 그 ‘영웅시대’ 이전에는 ‘동’, ‘은’시대가 있었고, 최초에는 ‘황금’ 시대가 있었다고 한다.

하루아침에 사라지지 않는 신화의 흔적


▎고전주의 시대 미술과 헬레니즘 시대 미술과의 대조. 왼쪽은 폴리클라이토스의 대표작인 ‘디아두메노스(Diadoumenos, BC 440: 머리띠를 묶는 자)’, 오른쪽은 ‘테르메 복서(Terme Boxer, BC 3세기: 로마에서 출토된 헬레니즘 미술의 대표작)’다. / 사진제공·김승중
이러한 세계관을 모두 뒤집고 최초로 신과 영웅을 떠나 인간의 역사를 기록하겠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펜을 든 인물이 바로 ‘역사의 아버지’라고 불리우는 헤로도토스(Herodotos: <역사 Histories>의 작가, BC 484∼425)이다. 그는 소크라테스와 동시대 사람으로 페르시아 전쟁이 한창 일어나고 있을 때 소아시아 지역에서 태어났으며, 일생을 페르시아 전쟁의 수많은 전투와 그 원인들을 파헤치는 데 바쳤다. 특히 그는 그리스는 물론 소아시아, 페르시아 그리고 이집트까지 직접 여행해가며 각 지방의 역사와 관습도 조사하여 기록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헤로도토스의 획기적인 업적은 바로 사건들의 진실 여부를 직접 확인 또는 증명하려고 했으며, 자신이 직접 보고 들은 것만을 기록한다는 철저한 방법론을 제시한 점이다. 그 유명한 헤로도토스 <역사>의 서문에서 그는 이렇게 전한다: “인간세의 수많은 일이 시간이 지남으로써 잊혀져가는 것을 방지하고, 그리스인들뿐만 아니라 그리스인이 아닌 그 밖의 민족들의 훌륭한 업적과 그들의 명성을 길이 남기기 위하여 할리카르나소스(Halikarnassos)의 헤로도토스가 이 탐구기록을 펴낸다”라고.

그리스 역사상 최초로 인간세의 일들을 후세를 위하여 체계적으로 기록해야 한다는 개념의 탄생은 실로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한 코페르니쿠스적인 모멘트다. 그리고 이는 지난 호에 설명한 카이로스(kairos)의 시간관념과도 상통한다. 시공간을 뛰어넘는 신화를 중심으로 한 가치관이 카이로스적인 현재에 중점을 둔 인간의 역사관으로 바뀌는 시점이 바로 BC 5세기, 고대 그리스의 황금시대다.

그러나 예술에 잔재하는 신화의 중요성은 파르테논 신전의 경우에서 보았듯 하루아침에 그 자취를 감추지는 않았다. 그 유명한 그리스 비극의 장르도 그러했다. BC 49년에 최초로 제작된 역사비극(Historical Tragedy), 프리니쿠스(Phrynicus)의 <밀레토스의 멸망>(Fall of Miletos)은 불과 제작 2년 전에 실제로 페르시아에 멸망한 아테네의 동맹국 밀레토스의 이야기였다. 그동안 신화와 영웅의 이야기만을 다루어왔던 장르가 시사적인 내용을 다루게 되었다는 것은 참으로 획기적인 일이었다. 그러나 극장공연에 참석한 아테네인들은 그 사실적인 내용을 차마 감당하지 못하고, 너무나도 감정이 복받쳐서 그 자리에서 모두 울고불고하며 작가에게 1000드라크마(보통사람 3년치의 봉급에 해당한다)의 벌금을 물게 했다고 한다. 그리고 절대로 다시는 그 드라마를 공연하지 못하게 금지시켰다고 한다. 그 뒤로 100년 동안 비극작가들은 주로 신화와 전설을 다루었지만, 가끔 시사적인 내용을 지닌 작품도 드물게나마 볼 수 있다.

역사의 아버지인 헤로도토스도 물론 완벽하지는 못했다. 그가 아무리 과학적인 통찰력을 지니고 ‘탐구’를 하려고 했어도, 그가 쓴 <역사>는 여전히 기이한 설화들과 옛 ‘조상’들의 영웅적인 이야기가 사이사이 기입된 문헌이다. 하지만 역사의 싹은 이미 자라고 있었다. 그보다 20년 후배인 투퀴디데스(Thucydides: <펠로폰네소스전쟁사 History of the Peloponnesian War>의 작가, BC 460∼400)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상세히 기록하면서, 거의 완벽하게 사실적인, 그리고 과학적인 역사를 우리에게 남겼다.

파르테논 신전의 천재 아티스트 피디아스의 일화

그리고 또한 파르테논 신전에서는 볼 수 없었던 페르시아 전쟁의 장면은 20년 뒤에 아크로폴리스에 새워진 아테나 니케 신전(Temple of Athena Nike, BC 421∼400)에 조각되어 있는 마라톤 전투(Battle of Marathon, BC 490)에서 볼 수 있다. 스파르타와의 펠로폰네소스전쟁이 한창 일어나고 있는 와중에 아테네의 사기를 돋우기에는 그 어떤 아득히 먼 전설의 이야기보다는 바로 얼마 전 그들의 할아버지들이 용감히 싸워 조국을 침략한 무자비한 페르시아군을 물리친 이야기가 훨씬 더 효과적이었을 것이다.

그리스 시대 미술이 전반적으로 역사적인 내용을 꺼려하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고대 그리스 민주주의의 핵심적인 이소노미아(isonomia: 평등한 권리)와 그리스인의 미덕인 소프로쉬네(sophronsyne: 절제/중용), 이 두 가지의 개념 때문에 특정인물을 공식적으로 찬양하는 것은 도리에 어긋난다고 생각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조는 BC 5세기 전반에까지 걸쳐 나타난다. 이와 관련하여 그리스의 미켈란젤로로 일컬어지는 파르테논 신전의 천재 아티스트 피디아스(Pheidias, BC 480∼430)에 관한 재미있는 일화가 전해진다. 피디아스가 그가 만든 거대한 아테나 조각상의 방패 장식 속에 정치가 페리클레스와 자기 자신의 얼굴조상을 슬쩍 집어넣었다가 결국 시민들에게 들켜 감옥에 갇혔다고 한다.

반면에 알렉산더 대왕이 헤라클레스의 후손이라 하며 생전에 자신을 그토록 치켜세울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그가 이끌던 마케도니아 왕국이 민주주의 통치의 아테네와 달랐다는 것을 뜻한다. 이 신화적 존재인 알렉산더 대왕이야말로 그동안 서서히 자라왔던 역사의 싹을 활짝 꽃피게 만든 영웅이었다. 알렉산더의 사망 이후 헬레니스틱 시대(Hellenistic Period, BC 323~BC 31)의 미술사에서는 이상만을 추구했던 그 전의 고전시대(Classical Period, BC 480~BC 323)와는 근본적으로 성격이 다른 인간미가 넘치는 새로운 코스모폴리스의 세계가 펼쳐진다. 이때는 이미 그리스의 황금시대를 구가했던 아테네가 그 찬란한 빛을 서서히 잃어가고 있었다. 그럼에도 알렉산더가 개척한 새로운 인류보편의 여정은 헬레니스틱 시대와 로마시대를 거쳐서 우리에게까지 전달되는, 인간적인 개성을 존중하는 개체주의 (Individualism)의 길이었다.

김승중 - 서울대학교 천문학과를 졸업하고 미국에 유학했다. 프린스턴대 천체물리학과에서는 우주론을, 콜롬비아대학 예술사고고학과에서는 희랍미술을 전공해 각각 박사학위를 받았다. 콜롬비아 박사과정에 들어가기 전에는 버지니아대학에서 미술사학 석사코스를 밟았다. 이 시기 다양한 현지발굴 프로젝트에 참여하여 고고학의 생생한 지식을 얻었다. 현재 캐나다 토론토대학교에서 희랍미술고고학을 가르치고 있다.

201605호 (2016.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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