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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 문화기획] 탄생 100주년 가수 이난영의 삶과 사랑 

“글로벌 열풍 K팝에 그녀의 음악혼 스몄다” 

최유준 전남대 HK교수
너무 일찍 태어나 불운했던 한국 대중음악의 시원(始原)… 재즈 보컬리스트로서의 능력도 탁월했던 불세출의 엔터테이너

▎목포 유달산 자락의 이난영 생가 터에 세워진 이난영 흉상. 그는 무대 예술가로서의 기질과 근성에 있어 독보적인 자리를 점한다. / 사진·중앙포토
이난영을 기억한다는 것은 한국 대중음악의 현재와 미래를 전망하는 일, 이난영을 수식할 새로운 이름을 상상하는 일이다. 일제 말기 군국의 시대를 거치지 않았더라면, 이난영의 음악은 한국 대중가요의 새 길을 뚫는 더욱 강력한 절창이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난영은 민요에 능했던 당시 기생 출신 가수들과는 달리 모던하고 재즈적인 음악에 강점을 드러냈다. / 사진·중앙포토
한국대중음악사에서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1935)처럼 복잡하고 모순적인 노래도 없다. 이 노래는 일제강점기에 ‘신민요’의 일종인 ‘향토노래’로서 발표되었음에도, 해방 후 이른바 ‘트로트 왜색(倭色) 논쟁’에서 대표적인 일본풍의 가요로 지목되기도 했다. 논쟁의 와중에도 ‘목포의 눈물’은 특유의 지역적 공간을 나타내는 제목과 가사 내용으로 인해 호남 지역민의 정서를 대변하는 곡으로 널리 인정받았다. 노래의 주인공 이난영이 죽은 뒤 목포에서는 그를 추모하는 의미로 ‘난영가요제’를 개최했으며(1968년에 호남매일신문사 주최로 시작된 이 가요제는 한때 중단되었다가 지금은 문화방송 주관으로 매년 개최되고 있다), 1969년에는 목포시민들의 자발적 참여로 목포 유달산에 ‘목포의 눈물’ 노래비가 건립되기도 했다. 대중가요를 위한 노래비가 세워진 것은 한국 대중음악사상 최초의 사건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한 ‘목포의 눈물’은 1980년대와 1990년대에 호남지역을 연고지로 한 프로야구팀의 응원가로 불렸던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결국 ‘목포의 눈물’은 ‘일본적인 것’과 ‘한국적인 것’, 그리고 ‘호남적인 것’까지 갖추고 있다고 여겨지는 셈이 된다. 물론 여기서 ‘일본적인 것’은 껄끄러운 문제다. 사실상 ‘목포의 눈물’만이 아니라 식민지 시대의 유행가 일반이 20세기 후반 ‘트로트’라는 적잖이 경멸의 뉘앙스가 담긴 장르 명칭으로 불리게 되었는데, 이러한 트로트 일반이 ‘왜색’이라는 주홍글씨를 얻게 되었다. 트로트의 ‘왜색’을 지적하는 음악비평적 근거는 무엇일까?

리듬의 측면에서 한국 전통음악에서는 3박 계열이 주를 이루는 데 반해 트로트는 2박과 4박 리듬이 주로 쓰인다는 점, 그리고 선율의 측면에서 전형적인 트로트 가요의 경우 일본의 전통 유행가인 엔카(演歌/艶歌)와 이른바 ‘요나누키 단음계’를 공유한다는 점이 제시되었다. 한마디로 한국의 트로트는 일본 엔카의 아류라는 뜻이다. ‘목포의 눈물’과 같은 느린 단조 선율에서 이러한 ‘요나누키 단음계’가 나타나는 것은 일본을 통로로 서양의 기능화성을 배운 식민지 조선의 대중음악가들에게 당연한 일일 수도 있다. 단조풍의 음계를 화성적으로 처리하는 것은 장조에 비해 좀 더 어려운데, 당시로서는 일본식의 표준에 따르는 것이 안전했을 것이다.

뽕짝은 ‘왜색’ 아닌 ‘서양색’에 가까운 것


▎목포 유달산의 ‘목포의 눈물’ 노래비. 한국 대중음악 사상 최초의 노래비로 기록된다. / 사진·중앙포토
그보다 앞선 문제는 ‘요나누키 단음계’가 과연 일본 고유의 음계였는가 하는 것인데, 실은 그렇지도 않다. ‘4음과 7음을 뺀다’는 뜻의 ‘요나누키(よなぬき)’라는 용어 자체가 이미 서양식 7음계를 전제한 신조어로, ‘요나누키 단음계’는 동양의 5음계적 선율이 서양식 단조 음계 선율과 화성에 적응하는 서구화 과정에서 생겨난 일반적인 음계 가운데 하나로 분석될 수 있다.

‘요나누키 단음계’는 ‘미야코부시’라는 이름의 음계와 혼용되기도 하는데, ‘미야코부시’라는 용어 역시 19세기 말에 이르러서야 등장한 신조어로서 서양 음계의 영향을 받은 당시의 서구식 창가와 유행가를 의식한 용어였던 것으로 보인다. ‘미야코부시(みやこぶし, 都節)’라는 용어 자체가 ‘도시음계’라는 뜻으로, 반음이 결여된 ‘시골음계’라는 뜻의 ‘이나카부시(いなかぶし, 田舍節)’에 대한 상대적 개념이었다. ‘미야코부시’ 혹은 ‘요나누키 단음계’는 당시 일본인들의 입장에서는 ‘새로운’, 나아가 서양의 단조 화음이 뒷받침된 도시풍의 음조였던 것이다.

결국 식민지 시기 유행가에 ‘왜색’이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해도 그 ‘왜색’은 이미 ‘(서)양색’과 구별하기 어려울 만큼 혼융되어 있다. ‘뽕짝’이라는 별칭을 낳게 한 2박 내지 4박의 리듬도 ‘왜색’이라기보다는 ‘양색’에 가깝다. 그것은 19세기의 케이크워크(cakewalk)나 래그타임(ragtime), 20세기 초반의 폭스트로트(foxtrot) 등에서 기원을 찾을 수 있는 서구 댄스홀 문화의 산물이다. 이는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 사이의 간전기(間戰期) 미국의 음반 산업을 중심축으로 전 지구적 대중음악 문화가 형성되면서 공유케 된 새로운 의미의 음악적 공통 관습(common practice)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요컨대 ‘뽕짝’ 리듬은 일본풍 유행가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1930년대 세계의 유행가에 두루 적용되는 공통의 리듬이었던 셈이다.

이제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은 일본-한국-호남만이 아니라 서양-세계까지 연결하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이 노래의 가사 또한 그렇다. 사실 노래가 만들어지던 당시 목포는 지금과 같은 낙후된 소도시 이미지가 아니라 외래의 선진 문물을 향해 열려 있는 모던한 항구 도시로서의 표상을 갖고 있었다. 목포 출신의 재기발랄한 젊은 여가수 이난영 역시 모든 면에서 이 노래의 주인공이 될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노래 속 이난영의 페르소나인 ‘부두의 새악씨’는 자신의 욕망을 좇아 항구를 떠나고 싶지만, 식민지 조선의 현실은 그녀로 하여금 ‘아롱저진 옷자락’을 여미며 항구에 머물 것을 요구한다. 그것은 어쩌면 가수 이난영의 욕망이 도달하게 될 예견된 좌절의 지점을 복선처럼 그려주고 있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가슴 서늘해지는 블루스 ‘다방의 푸른 꿈’


▎1963년 ‘에드 설리반 쇼’에 출연한 김시스터즈와 이난영. (왼쪽부터)김숙자, 진행자 에드 설리반, 이난영, 김민자, 김애자. / 사진·중앙포토
1960년대 이후 ‘트로트 왜색 논쟁’이 초래한 가장 큰 오해 가운데 하나는 식민지조선의 유행가 전체를 ‘트로트’라는 이름의 한 가지 장르로 뭉뚱그려 보게 된 데에 있다. 해방 전후 음반산업이 침체 상황을 겪은 데다 한국전쟁까지 발발하면서 대중음악의 양식적 단절 내지는 퇴행이 이루어진 점, 이후 미군의 한반도 주둔을 계기로 미국의 대중음악이 직수입되면서 음악청취자들의 취향이 점차 미국화된 것, 1960년대 군사정권에 의해 시도된 광범위한 왜색 문화 일소운동 등 다양한 요인이 결합된 결과다. 이 과정에서 서서히 미국식 팝음악(나중에는 록음악 포함)과 트로트의 이분법적 구분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식민지 시기의 대중음악이 장르 면에서 매우 다양하고 복잡했다는 사실은 간과되거나 무시된 채 모조리 트로트라는 이름으로 정리된 것이다.

사실상 식민지 조선의 대중음악을 한 가지 장르로 종합하는 것은, 예컨대 1990년대의 한국 대중음악을 단 하나의 장르로(정태춘과 서태지, 신해철 등이 보여주었던 음악적 차이를 가리지 않고 뭉뚱그려) 묘사하는 것만큼이나 불합리한 일이다. 이난영은 이러한 불합리한 장르 구분에 의한 직접적 희생자였다. 해방 이후 한국의 대중들에게 이난영은 ‘목포의 눈물’을 처량하게 노래한 식민지 시기의 트로트 가수로만 기억되곤 했다. 그녀가 ‘아리랑’과 같은 ‘신민요’는 물론, ‘명랑한 젊은 날’과 같은 발랄한 ‘만요(漫謠)’를 비롯하여 ‘재즈송’과 ‘블루스’풍의 음악까지 매우 폭넓은 음악적 양식을 소화했다는 사실은 이상하리만큼 감춰졌다.

해방 직후 그녀의 남편 김해송이 제작한 대규모 악극 <카르멘>이나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주연 배우로 활약했다는 사실도 한국전쟁 이후 쉽게 잊혀졌다.(한국전쟁 와중에 김해송의 납북이라는 불행한 사고가 없었다면, 그가 이끈 K.P.K악단이 한국 최초의 뮤지컬 전문극단으로, 이난영은 한국 최초의 성공한 뮤지컬 배우로 기록되었을지도 모른다)

이난영은 다재다능이라는 면에서 식민지 조선의 대중가수들 가운데 발군이었다. 1935년 당시 최대발행 부수의 대중잡지였던 <삼천리>에서 실시한 레코드가수 인기투표 결과 여가수 부문에서 이난영이 3위로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1위와 2위인 왕수복과 선우일선은 모두 기생 출신 가수였다. 이난영은 기생 출신이 아니었던 만큼 ‘민요’와 ‘신민요’에 능했던 기생 출신 가수들보다는 좀 더 모던하고 재즈적인 음악에 강세를 보였고, 실제로 그러한 음악을 지향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녀가 같은 오케레코드사 소속의 작곡가이자 가수 겸 연주자였던 김해송과 비교적 이른 나이에 결혼하게 된 것(이난영이 스물한 살 되던 1936년 12월 24일에 결혼)도 두 사람 사이의 인간적 교감만이 아니라 김해송이 추구한 재즈풍의 음악과 이난영의 음악적 지향이 공명을 이루었던 탓도 있을 것이다.

식민지 조선의 음반시장이 정점에 이르던 1939년과 1940년 사이에 이난영은 당시 평균적 수준을 훌쩍 뛰어넘는 세 곡의 두드러지는 재즈풍의 곡을 발표한다. 스윙재즈 양식의 ‘바다의 꿈’과 블루스가 가미된 ‘다방의 푸른 꿈’, 그리고 경쾌한 집시스윙 양식의 ‘항구의 붉은 소매’다. 이난영은 ‘바다의 꿈’과 ‘항구의 붉은 소매’에서 의미 없는 음절로 선율을 흥얼거리는 일종의 ‘스캣(scat)’까지 선보이며 재즈 보컬리스트로서의 능력을 과시한다. 두 곡 모두에서 스윙 반주에 맞추어가는 리듬감이 탁월하며 고음역과 저음역을 오가며 음색을 조율하는 방식이 여타의 유행가를 부를 때와는 상당히 다른 모습을 보인다.

특히 큰 인기를 얻었던 <다방의 푸른 꿈>은 중일전쟁 기간 일본의 블루스 음악 유행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이난영의 남편 김해송이 작곡했다. 이 시기 일본식 블루스는 일반적으로 미국 본토의 블루스와 양식적 유사성이 많지 않았던 반면, ‘다방의 푸른 꿈’은 오히려 일본식 블루스보다 상대적으로 미국적 블루스의 향취를 더 많이 자아낸다. 블루스 특유의 반음 내린 3음(블루노트)을 쓴 김해송의 파격적 선율구사와 더불어 이를 잘 소화해낸 이난영의 가창력이 합작해낸 결과다.

매력적인 비음, 정교한 음정 구사력


▎김해송·이난영 부부의 자녀들은 김시스터즈(앞줄)와 김브라더즈를 만들어 활동했다. / 사진·중앙포토
김해송과 이난영을 중심으로 한 재즈풍의 음악에 대한 추구가 이 시기 이후에도 계속 이어질 수 있었다면 한국대중음악의 역사는 상당히 다른 면모를 보였을 것 같다.(적어도 식민지 조선의 대중음악을 ‘트로트’라는 한 가지 장르 용어로 부르면서 예외 없이 ‘왜색’이라는 낙인까지 찍는 일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1941년 일본이 태평양전쟁에 돌입하고 총력전 체제를 강화하면서 이난영을 포함한 식민지 조선의 음악인들은 한마디로 재앙을 맞게 된다. 이 시기부터 일본은 태평양 전쟁의 ‘적국’으로 규정한 미국과 관련된 모든 대중문화를 검열하고 금지했다. 1941년 이후부터 해방이 될 때까지 이난영은 더 이상 재즈 양식의 노래를 부를 수 없었고 1942년에는 ‘小林玉順’이라는 일본식 이름으로 창씨개명을 해야 했다. 그리고 전쟁 참여를 독려하는 군국가요를 부르는 일을 거부하지 못했다.

이난영은 비음이 섞인 매력적인 목소리와 함께 정교한 음정 구사력을 갖추고 있었는데, 이는 라이브 무대에서의 그녀의 철저한 자기관리와 치열한 연습 습관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1930년대 식민지 조선의 주요 레코드사는 전속 가수들만이 아니라 전속 악단을 거느리고 레코드 홍보를 겸하여 순회공연을 다녔다. 이난영이 전속계약을 맺고 있던 오케레코드사는 특히 이러한 순회공연에 많은 힘을 쏟았다. 전속가수들과 전속악단으로 구성된 대규모 공연단의 순회공연 장소는 한반도 전역은 물론 만주일대까지 미쳤다. 공연단의 일원으로서 이난영과 김해송 부부 역시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공연 무대에 동반 출연했는데 재즈와 즉흥연주에 능했던 김해송의 활약이 두드러졌던 것으로 전해진다.

1939년경 오케레코드 공연단 규모는 매우 커져서 ‘오케그랜드쇼단’이라는 공식명칭을 쓰고 있었다. 오케그랜드쇼단 내에 독립적으로 활동하는 그룹들이 있었다는 점이 특기할 만하다. ‘CMC 밴드’, ‘오케싱잉팀’과 더불어 김해송이 포함되었던 ‘아리랑보이즈’가 오늘날 보이그룹의 효시라면, 이난영이 포함되었던 ‘저고리시스터즈’는 한반도 최초의 걸그룹이라 할 수 있다.

오케그랜드쇼단은 1939년 3월에 일본 순회공연까지 성사시키는데, 이 과정에서 ‘조선악극단’이라는 이름을 쓰게 된다. 조선악극단의 일본 공연에는 이난영도 참여했다. 일본 현지에서 조선악극단이 일본 영화 <사려깊은 부인(思ひつき夫人)>에 특별출연하여 공연 장면의 일부가 짧게나마 기록되었는데, 영화 속 공연장면을 보면 C.M.C 밴드를 지휘하는 작곡가 손목인을 비롯하여 김정구, 고복수, 남인수, 이난영 등이 노래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영상 속에서 밴드 연주자들을 제외한 무대 위의 단원들은 모두 한복 차림이며 신민요풍의 노래를 부르고 있다. 해외공연이라서 더욱 ‘조선적인 것’을 강조할 필요가 있었겠지만, 이 시기의 대중음악가들은 모두 전통 민요에도 능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들은 오늘날과 같은 식으로 말하자면, 퓨전국악이나 월드뮤직 장르의 뮤지션이기도 했던 것이다.

이난영은 레코드가수로서 세상에 알려졌지만, 열여섯의 어린 나이로 태양극단에 입단했을 때부터 무대예술가로서 성공하고픈 꿈이 있었고 배우로서의 기질도 다분했다. 해방 직후 그녀는 남편 김해송의 K.P.K악단 무대를 통해 십대 때부터 꿈꿔왔던 배우의 꿈을 이루어내는 듯했다. 김해송이 이끄는 K.P.K악단은 19세기 말과 20세기 초반 미국의 초기 뮤지컬과 흡사한 방식으로 공연을 시도했던 것 같다. 처음에는 버라이어티쇼와 레뷔 등 삽입 단막극이 주를 이루었지만, 점점 장편 뮤지컬 작품이 시도되는 일이 잦아졌다. 하지만, 1950년에 발발한 한국전쟁은 모든 것을 한순간에 날려버렸다. 설상가상 김해송이 북한군에 의해 납치되어 북으로 가는 길에 죽게 되면서, 이난영은 7남매를 포함한 대가족의 생계를 가장으로서 책임져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이 무렵부터 이난영은 자신의 딸들을 ‘김시스터즈’라는 이름의 걸그룹으로 키워내기 시작한다. 전쟁 중이던 1951년경 부산으로 피란 온 이난영이 미군 위문공연을 다니던 때부터 10대 초반의 어린 나이의 김시스터즈는 어머니의 조련을 받아 무대에 서기 시작했다. 알려진 바대로 김시스터즈는 오래지 않아 미국 라스베이거스 무대로 진출하여(이때 멤버들 가운데 큰 언니 영자를 대신하여 이난영의 친오빠 이봉룡의 딸이었던 민자가 합류한다) 상당히 큰 성공을 거둔다. 이난영의 주도면밀한 기획 아래 노래 실력만이 아니라 춤 실력과 다양한 악기연주 등의 실력 등을 갖추고 있었던 그들은 무대 위에서 보여줄 것이 많았다. 비틀스가 미국을 강타할 때 교두보가 되었던 ‘에드 설리번 쇼’에 무려 스물두 번이나 출연했을 만큼 김시스터즈는 대중음악인으로서의 실력을 인정받았다.

김해송, 남인수와의 비극적 사랑

주로 미국대중음악의 히트곡에 대한 커버송들과 함께 ‘동양적’이거나 이국적인 이미지를 뒤섞어갔던 김시스터즈의 미국 공연 활동은 대중예술의 창조성이라는 측면에서는 큰 점수를 주기 힘든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한국전쟁 직후의 열악한 상황에서 단기간에 미국 라스베이거스 무대에서 흥행성을 인정받을 만한 공연 능력을 키워낼 수 있었다는 사실을 과소평가해서도 안 된다. 그것이 김시스터즈 멤버들의 타고난 역량에 기인하기만 한 것도 아니다. 김시스터즈의 성공의 이면에는 그들의 부모인 이난영과 김해송을 비롯한 식민지 조선의 대중음악가들이 가꾸어온 음악적 역량과 초기 대중예술의 노하우가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쌓여온 역량이 반세기 후 케이팝의 보편적 호소력이 만들어지는 밑거름이 되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김시스터즈가 미국에서 승승장구하는 동안 한국에서의 이난영은 몰락하고 있었다. 일제강점기 오케레코드사의 동료가수였던 남인수가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던 것도 이 무렵부터인데, 기혼자였던 그가 불륜의 관계 맺기를 감행했던 것은 이난영이 겪었을 모종의 상실감에 동정심을 느꼈기 때문이었으리라 짐작한다. 이난영 또한 연하의 남인수에게 의지하고 매달렸으며, 불치병을 앓고 있던 그를 헌신적으로 보살피기도 했다. 하지만 세간의 화제를 뿌리고 불륜에 대한 사회적 비난의 시선을 받으면서도 유지되던 이들의 애정관계 역시 1962년 남인수의 죽음으로 짧게 매듭지어졌다.

같은 해 12월에 이난영은 김시스터즈의 초청으로 미국에 가서 라스베이거스의 무대에 함께 서기도 하고 ‘에드 설리번 쇼’에 함께 출연하기도 했지만, 8개월 정도 지속되었던 미국생활을 접고 1963년 8월 돌연 귀국했다. 그녀는 국내에서 ‘김보이스’ 등의 이름으로 연예활동하고 있었던 세 아들들의 음악적 전열을 정비하여 그해 11월에 ‘김브라더스’라는 이름으로 미국에 진출시킨다. 이제 한국에서 홀로 남은 것이나 다름없었던 이난영의 삶은 이후 1년 남짓 유지되다가 1965년 4월 11일 서울 회현동의 자택에서 마무리되었다. 사인은 공식적으로는 ‘심장마비’로 기록되었지만, 자살 가능성도 적지 않아 보인다.

이난영이라는 이름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

대중매체에서 젊은 연예인들이 나이든 선배 연예인들에게 ‘선생님’이라는 존칭으로 부르는 것을 보면서 종종 어색한 느낌이 들 때가 있다. 그러한 존칭의 부여가 존경심의 발로라기보다는 전성기를 지난 대중예술인들을 과거 속으로 봉인하는 가식적 예우의 방식처럼 느껴지곤 해서다. 대중가수 이난영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일 또한 ‘이난영 선생님’이라는 어색한 존칭을 대하는 것처럼 껄끄럽다. 이난영은 그저 ‘이난영’일 때 가장 빛날 수 있지 않을까?

이난영은 시대를 초월한 보편적 호소력을 가진 목소리의 가수라는 면에서 그녀와 동시대를 살았던 샹송의 에디트 피아프, 파두의 아말리아 로드리게스, 재즈의 빌리 홀리데이에 필적할 만하지만, ‘샹송’이나 ‘파두’, ‘재즈’와 같이 그녀를 수식할 음악의 명칭이 없다는 사실은 적잖이 치명적이다. ‘트로트’가 그 이름을 대신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물론 한국의 초기 대중음악가들이 처한 식민적 상황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트로트’ 대신 ‘케이팝’은 또 어떨까? 여전히 고개가 갸우뚱거려진다.

그렇기 때문에 이난영이 기념할 만한 인물인가 하는 물음은 과거 자체보다는 오히려 현재나 미래에 대한 물음이 된다. 즉, 그 물음은 오늘날 한국의 대중가수나 대중음악인들에게 얼마만큼의, 그리고 어떤 식의 가치를 부여할 것인가에 대한 물음이며, 한국의 대중음악이 어떻게 독창성과 자율성을 획득할 수 있는가에 대한 성찰적 물음이기도 하다.

한반도 최초의 대중가요가 무엇인가 하는 물음에 대한 답변은 흔히 셋으로 갈린다. 윤심덕이 부른 <사의 찬미>(1926), 이정숙이 부른 <강남달(낙화유수)>(1929), 그리고 이애리수가 부른 <황성옛터(황성의 적)>(1932)다. <사의 찬미>는 최초의 레코드 히트곡이라는 점에서 꼽히지만 번안곡이기 때문에 실격이라면, <강남달>은 창작곡이긴 하지만, 양식적으로 창가와 동요에 가깝다. 양식적인 면에서 유행가로서의 차별성을 보이는 것은 <황성옛터>이니 엄밀히 말하자면 한국의 대중음악사는 1932년경부터 시작되는 셈이다. 이난영이 십대의 어린 나이로 일본에서 태양극단의 막간무대 가수로 활동하다가 오케레코드사의 이철 사장에게 발탁되어 전속가수가 된 해가 1933년이니, 그녀 또한 한국 대중음악사의 출발점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대중가수의 전형(典型)을 형성했다는 측면에서는 이난영과 함께 한국의 대중음악사가 출발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30년대는 초국가적 음반산업을 통해 일상 문화의 차원에서 글로벌과 로컬의 첨예한 만남이 시작되던 시기, 전통적인 것과 새로운 것(서양적인 것)이 치열하고 만나 섞이는 모더니티의 음악적 실험이 이루어지던 시기다. 대중음악 형성기의 상황은 전 지구적 음악시장이 새롭게 열리고, 전통음악계의 새로운 혼종 실험이 활발하게 진행되는 21세기의 현 상황과 무척 닮아 있다.

이난영이 100년 후에 태어났다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을 해본다. 보편적 호소력을 갖춘 타고난 목소리와 국제적 감각을 갖춘 폭넓은 음악적 스펙트럼, 무대예술가로서의 기질과 근성, 그녀는 너무 일찍 태어나 불운의 세기를 살아갔던 것은 아닐까. 필자를 포함한 한국인은 아직까지 한국의 대중음악인을 기억하는 방법, 그들을 존중하는 방법을 알지 못한다. 이난영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것은 그 방법에 대한 모색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이난영을 기억한다는 것은 한국 대중음악의 현재와 미래를 전망하는 일, 이난영을 수식할 새로운 이름을 상상하는 일이다.

- 최유준 전남대 HK교수

201605호 (2016.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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