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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취재] ‘25년 미스터리’ 미인도 위작 논란 

‘천경자 미인도’에 비친 한국 미술계의 추한 얼굴 

유길용 기자 yu.gilyong@joongang.co.kr
91년 논란 당시 천 화백 지적 묵살하고 감정위원들 ‘감’으로 진품 판단… 감정 근거 대부분 사실과 다르고 과학분석에서도 위작 증거 드러났다

▎천경자 화백(왼쪽)이 “내 자식이 아니다”라고 했던 <미인도>(오른쪽)가 25년 만에 수장고를 나왔다. 진위 여부를 가리기 위해서다. 위작 논쟁은 검찰과 법원에서 판가름 날 전망이다.
“기자님 어느 부서에서 근무합니까?”

천경자 화백의 위작 논란이 일고 있는 미인도를 취재하면서 한 미술계 인사로부터 대뜸 이런 질문을 받았다. “사회부입니다”라고 대답하자 “기자님이 그림을 압니까? (미인도를) 직접 봤습니까?”라는 물음이 돌아왔다. 다분히 권위적이었다. 미술계의 현실이 그렇다. 비전공자, 혹은 미술계와 무관한 사람의 의견을 인정하지 않는 독선이 팽배해 있다. 심지어 또 다른 미술계의 저명한 평론가는 “검사나 판사가 그림을 구별할 전문성이 있다고 보느냐”고도 했다. 미인도 논쟁이 25년째 종지부를 찍지 못한 배경에는 이처럼 미술계의 폐쇄성이 깔려 있었다.

25년 전인 1991년 4월, “미인도는 내가 그린 게 아니다”라는 고 천경자 화백의 선언으로 미인도 위작 논쟁이 시작됐다. 작가 본인이 안 그렸다고 했는데도 여전히 미술계에서 ‘미인도’의 공식 제작자는 ‘천경자’로 돼 있다. 천 화백의 차녀 김정희씨는 미인도를 어머니의 작품으로 규정한 국립현대미술관과 관련된 주장을 편 미술평론가 정모씨 등을 저작권법 위반과 사자(死者)명예훼손 등의 혐의로 검찰에 고소한 상태다. 이 사건은 서울중앙지검 형사6부가 맡아 수사 중이다. 한 미술계 인사는 “화랑협회와 국립현대미술관을 중심으로 한 미술계의 현재 분위기로는 법정에서 위작으로 판결 나더라도 인정하지 않을 정도다. 25년 동안 고수해왔던 (천 화백의 작품이란) 입장이 무너진다면 미술계의 자존심과 신뢰에 심각한 타격을 입기 때문이다”라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의 말대로 미인도 위작 논쟁은 진위 여부를 떠나 천 화백의 유족과 미술계의 팽팽한 자존심 싸움으로 치닫고 있다. 화랑협회와 국립현대미술관이 그 선두에 있다. 국내 미술계를 지탱하는 두 기둥이다. 화랑협회는 미술품의 유통과 보급을, 현대미술관은 한국 미술의 권위와 정통성을 가졌다. 미인도 위작 논쟁은 바로 이 두 기관의 존재 이유에 대한 ‘생사’를 가를지도 모른다. 25년 전 진작 판정을 내놓은 두 기관이 지금까지도 종전 입장을 고수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천 화백의 의견 배제한 채 ‘진작’ 결정


▎고 이경성 전 국립현대미술관장(왼쪽)과 고 김창실 전 화랑협회장(오른쪽)은 천 화백과 더불어 미인도 위작 논쟁의 주역이다. 핵심 인물들은 없지만 그들이 남긴 증언과 관련 기록은 위작 논쟁을 재검증하기에 충분하다.
취재 과정에서 만난 미술계 인사들은 미인도 위작 논쟁에 대해 한결같이 신경질적인 반응을 나타냈다. “옛일을 끄집어 내서 지금 어쩌란 말이냐”는 식이다. 원로 대우를 받는 평론가 A씨는 사견을 전제로 “당사자들이 다 죽고 없는데 어떻게 진실을 규명하느냐”고 말했다. A씨가 말한 당사자들이란 처음 논쟁이 불거졌던 1991년 당시 인물들이다. 천경자 화백(2015년 작고)과 이경성 당시 국립현대미술관장(2009년 작고), 김창실 당시 화랑협회장(2011년 작고)이다. 바르토메우 마리 현재 국립현대미술관장도 최근 언론과 인터뷰에서 “작가가 없어서 위작 결정을 내리기가 어렵다”고 했다.

A씨와 마리 관장의 발언이 ‘당사자들의 증언 부족’을 의미한다면 이는 사실과 다르다. 천 화백과 이 전 관장, 김 전 회장의 발언들은 당시 언론 기록을 통해 충분히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과학적 분석 기술은 1991년 당시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발전했다. 1991년의 감정위원회 결정 근거를 과학적으로 분석해 비교하면 될 일이다.

본지는 위작논쟁이 시작된 1991년과 권춘식 씨의 위작 주장으로 논쟁이 재점화한 1999년, 천 화백의 사망으로 논란이 재조명된 2015년 이후의 관련 기록들을 모아 사실 관계를 분석했다. 그 결과 천 화백의 작품이라는 주장에 수많은 허점이 확인됐다. 천 화백이 위작이라고 판단한 구체적인 지적들은 묵살됐다. 미인도의 출처가 의심되는 정황들도 발견됐다. 미인도 위작 논쟁은 미스터리에 가까웠다.

우선 1991년 국립현대미술관과 화랑협회 산하 감정위원회가 미인도를 천 화백의 작품으로 본 주요 근거는 이렇다. ▷양식적 특징의 동일성(흰 꽃, 나비, 검은 머리카락) ▷위작 모델 그림의 시간적 모순(미인도는 1980년에 현대미술관에 이관, 천 화백이 지목한 원본 모델은 1981년작) ▷안료 분석 결과 동일 ▷미인도 액자가 천 화백의 단골 표구사인 동산방화랑 제작품. 이는 91년 4월 12일 이경성 국립현대미술관장이 기자회견에서 밝힌 내용들이다. 이 관장은 “1980년도에 미술관 전문위원이었던 오광수 씨가 진품이 틀림없다고 확인했다”고도 했다. 김창실 화랑협회장도 당시 기자회견에서 “감정위원 전원 만장일치로 천 화백의 작품이라고 의견을 모았다”며 “전문가들의 ‘감’에 의한 안목감정 결과”라고 밝혔다.

미술관 측이 제시한 양식적 특징은 천 화백의 주장에 대한 반박이다. 천 화백은 당시 언론과 인터뷰에서 “머리카락을 검정색으로만 칠하지 않고, 나비를 그린 적은 있지만 그림이 워낙 작아서 들어가지 않았을 것이며, 꽃 모양도 미인도처럼 투박하게 그리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그런데 이 주장이 ‘천 화백이 나비와 흰 꽃을 그린 적이 없고, 머리를 검게 칠하지 않는다’는 식으로 왜곡된 것이다. 천 화백의 사위이자 서양화가인 문범강 조지타운대 교수는 “그림을 구성하는 소품이 같다는 게 어떻게 진품의 근거가 될 수 있겠나? 베껴 그렸으니 당연히 같을 수밖에 없는데 진품 결정을 억지로 끼워 맞추려다 보니 자기 모순에 빠진 것이다”라고 말했다.


▎천 화백의 차녀 김정희 미국 몽고메리대 미술과 교수와 그의 남편 문범강 미국 조지타운대 미술과 교수는 국립현대미술관장과 미술평론가 등 위작 논쟁 관련 인물들을 검찰에 고소했다.
‘과학적 분석을 거쳤다’는 발표도 왜곡됐다. 국립현대미술관이 당시 국립과학수사연구소와 한국과학기술원(KIST)에 각각 서명의 필적감정과 안료분석을 의뢰한 것은 사실이다. KIST 분석에서 천 화백이 사용하는 안료와 미인도의 안료가 동일하다는 결과도 나왔다. 미술관 측은 여기까지 언론에 발표하면서 ‘과학적으로도 진품임이 입증됐다’는 논리를 폈다.

그러나 고의로 누락한 중요한 정보가 있었다. 국과수는 비교 샘플이 부족해 감정이 불가능하다고 통보했다. KIST도 안료의 성분은 같지만 당시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것이어서 미인도의 진품 근거는 될 수 없다고 단서를 달았다. 이는 두 기관이 미술관에 통보한 공문을 통해 확인된다. 미술관 측은 이 같은 결과를 당시에 공개하지 않았다. 진품이란 결정의 근거가 흔들리기 때문이다.

천 화백이 “나는 ‘7’자를 이렇게 쓰지 않는다”고 했던 말도 ‘(제작연도를) 숫자로 쓰지 않는다’는 뜻으로 왜곡돼 “천 화백의 다른 작품들에도 아라비아 표기가 있었다”는 반박의 소재가 됐다. 천 화백을 찾아온 미술관 관계자들에게 천 화백이 “액자를 갈아 끼우니 좀 그럴 듯해 보인다”고 한 말도 “천 화백이 진품이라고 인정했다”고 와전됐다. 국립현대미술관은 지난해 11월 국회에 제출한 미인도 위작 논란 관련 경과보고서에서도 ‘미술관 직원들이 작가를 방문해 위작주장이 착오에 의한 것이었다는 내용의 말을 청취했다’고 보고했다. 기자가 보고서에 명시된 방문 직원인 박래경 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관에게 직접 확인한 결과 이는 허위로 밝혀졌다. 천 화백의 큰딸 이혜선씨는 “미인도를 당대 어머니의 작품들과 비교해 가장 자세히 분석한 사람은 어머니 자신뿐이었다. 시중에 나도는 그림이 많지 않아 다른 사람들은 비교하고 싶어도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1990년 금성출판사가 발간한 도록 <한국근대회화선집>에는 이경성 당시 국립현대미술관장이 편집위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이 책(장우성/천경자편)에는 ‘나비와 여인’이란 이름으로 미인도가 수록돼 있다.
미술품 감정의 첫 번째 원칙은 ‘작가의 의견을 최우선으로 존중한다’이다. 그러나 당시의 감정 결과는 천 화백의 의견을 전혀 반영하지 않았다. 감정위원회가 스스로 원칙을 깨뜨린 이유가 뚜렷하지 않다. 심지어 천 화백의 수제자였던 이모 씨(한국화가)도 감정 결과에 동의했다며 천 화백을 구석으로 몰아붙였다. 그러나 당시 미술관 고위 관계자들이 이씨에게 동의를 강요했다는 당사자의 증언이 지난 2월 방영된을 통해 처음 공개됐다.

미술관장 편집 참여한 화집에 작품 제목 바뀌어


▎91년에 천 화백을 만나러 왔던 이인범 당시 국립현대미술관 학예관이 남긴 메모(왼쪽). ‘이 위작품을 저희가 갖게 된 것은… 그 과정에서 심의과정이 없었습니다’라고 적혀 있다. 천 화백의 친필(오른쪽 위)과 위조가 의심되는 현대미술관의 ‘미술작품 복제발간승인서’.
천 화백이 미국으로 떠난 뒤 미술계에서 나온 주장들은 점입가경이었다. ‘천 화백이 치매에 걸려 그림을 못 알아본 것’이라는 인신공격성 루머까지 나돌았다. 국립현대미술관 출신의 미술평론가 J씨는 “미인도 액자 뒷면에 동산방화랑의 표구 일련번호가 있다”고 주장했다. 이는 91년 당시에도 나오지 않았던 내용이다. 이것 역시 허위로 밝혀졌다. 감정위원으로도 참여했던 박주환 전 동산방화랑 대표는 91년에 방영되지 않았던 방송 인터뷰에서 “액자 뒤에 써있는 숫자는 표구 일련번호가 아니라 목공소에서 짝을 맞추기 위해 적은 것에 불과하다”고 밝혔다. J씨가 위의 주장을 할 당시는 이 영상이 공개되기 전이었다. J씨는 천 화백 유족에 의해 허위사실에 의한 사자명예훼손 혐의로 검찰에 고소된 상태다.

또 위작논란이 시작되기 1년 전인 1990년 금성출판사에서 발간한 <한국근대회화선집> 중 ‘장우성/천경자편’에 미인도가 실려 있다는 점을 근거로 J씨는 “화집에 미인도가 실린 것을 천 화백이 몰랐을 리 없다”고도 주장했다. 이것 역시 화집에 천 화백에 대한 평론을 쓴 박래경 전 학예관에게 확인 결과 사실이 아니었다. 천 화백은 박 전 학예관과 한 번 인터뷰를 응했을 뿐 책 편집 과정에 참여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이 책의 편집에는 이경성 관장이 참여한 것으로 확인됐다. 이 관장은 이 전집의 편집위원이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이 책에는 그림의 제목이 ‘미인도’가 아니라 ‘나비와 여인’으로 되어 있다. 91년 4월 12일 국립 현대미술관이 배포한 보도자료에는 ‘미인도’의 명제에 관한 설명이 나온다. 미술관 측은 ‘작품의 명제는 ‘80년 4월 30일 당시 문화공보부로부터 작가명, 명제, 제작년도, 규격 등 작품의 내역과 함께 문서로 통보된 이래 변경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그런데 이보다 1년 전에 출간된 책 속에는 이름이 달랐던 것이다. 미인도 위작 논쟁 관련 고소사건을 담당하고 있는 배금자 변호사(혜인법률사무소)는 “미술관장이 편집위원으로 참여한 책 속에 미인도의 이름을 다르게 기재한 이유를 밝혀내는 게 위작 논란의 열쇠가 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미인도가 처음 세상에 공개된 1990년 제1회 움직이는 미술관 사업을 진행하면서 국립현대미술관이 천 화백으로부터 받았다는 ‘미술작품 복제발간 승인서’(90년 8월 31일)도 위조 가능성이 크다. 승인서에는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청춘의 문>(1968년)과 <미인도>(1977년)의 내역과 천 화백의 한자 이름, 도장, 주민번호 등이 적혀 있다. 천 화백의 자녀들(이혜선·김정희)이 기자에게 제공한 천 화백 친필과 비교하면 차이가 뚜렷하다. 천 화백의 주민번호도 잘못 적혀 있다. 자기 주민번호를 틀리게 적는다는 건 상식에 어긋난다. 이희일 국제법과학감정원 원장은 “펜글씨를 배운 공공기관 직원의 필체로 보인다”고 말했다. 또 “미인도의 작품내역은 나중에 기재됐을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같은 시점에 작성됐다면 줄 간격이 일정해야 하는데 미인도의 내용만 기울어져 있는 것이 미심쩍다는 것이다. 이 원장은 “나중에 덧붙여진 내용은 기존의 문장과 평행을 이루지 않는 특징이 많이 나타난다”고 설명했다. 이 원장은 국방부 과학수사연구소에서 25년간 근무한 문서감정 전문가다.


▎미인도는 <장미와 여인>과 구도와 몸의 형태, 눈, 코, 입의 배치 각도 등이 놀랍게 일치한다. 머리 위에 얹은 꽃잎은 <바리의처녀>와 유사하다. 미인도와 천 화백의 작품들을 컴퓨터그래픽 기법으로 비교 분석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검찰에 제출된 분석보고서 일부.
국립현대미술관이 지금까지 이 문서를 한 번도 공개하지 않았다는 점도 석연치 않다. 천 화백의 서명과 도장이 찍힌 이 승인서는 미인도의 존재를 천 화백이 알고 있었다는 결정적인 증거다. 그런데 왜 미술관 측은 자신들에게 유리한 이 문서의 존재를 숨겨왔던 것일까? 박래경 전 학예관은 “91년 당시 미술관에 근무할 때 작가들에게 받은 저작권 동의서 여러 장이 한 사람 글씨로 돼 있다는 얘길 들었다. 그 얘길 듣고 ‘미술관 운영이 이래도 되나’ 하는 생각을 했었다”고 전했다. 누군가 허위로 승인서를 만들었을 가능성을 뒷받침한다.

본지가 입수한 국립현대미술관의 1980~90년대 소장작품 목록과 도록집에서 미인도의 존재는 딱 한 줄뿐이다. 1983년에 펴낸 ‘소장작품목록 제1집’에서다. 이후 미술관은 소장작품도록 1집(1986년)과 2집(1990년)을 연달아 펴냈는데 여기에도 미인도는 나오지 않는다. 미술관이 제1회 움직이는 미술관 사업(1990년) 출품작으로 내놓았을 만큼 가치가 있는 그림을 도록조차 남기지 않은 것은 수수께끼다. 결국 1980년 부터 1990년까지 10년 간 미인도란 그림의 형태는 베일에 싸여 있던 셈이다.

과학분석 결과도 위작 가능성에 무게


잠잠했던 위작 논쟁은 1999년에 재점화했다. 검찰의 고서화 위조단 수사 과정에서 위조범으로 붙잡힌 모작 화가 권춘식 씨가 “미인도는 내가 그렸다”고 자백한 것이다. 위조범이 나타났으니 진위 여부를 원점에서 재검토하는 게 당연했다. 그러나 국립현대미술관과 화랑협회는 “권씨의 말을 믿을 수 없다”고 맞섰다. 권씨가 주장하는 위작 연도(1980년대 초)와 그림이 미술관에 이관된 연도(1980년)가 달라 신빙성이 떨어진다는 이유였다. 일부 평론가는 “위작범의 말 한마디에 놀아날 필요가 없다”며 재조사의 필요성 자체를 부정했다. 이때도 다른 작품들과 정밀 분석은 이뤄지지 않았다.

권씨는 기자를 만나 “아는 사람이 천 화백의 그림 3점(달력과 복사본으로 기억)을 가져와 그려달라고 했다. 그래서 꽃과 나비, 얼굴 형태를 각각 다른 그림에서 본떠 미인도를 완성했다”고 말했다. 그는 “천 화백은 가는 붓으로 물감을 여러 겹 쌓아 두껍게 그리는데 그렇게 하면 시간이 무척 오래 걸린다. 난 단기간에 완성해야 했기에 두꺼운 붓으로 쓱쓱 칠해서 그림을 제작했다. 한 3일 정도 걸린 것 같다”고 설명했다.

천 화백의 증언과 권씨 등의 증언, 관련 자료들을 토대로 문범강 교수는 컴퓨터그래픽 전문가의 도움을 얻어 미인도를 과학적으로 분석했다. 미인도와 당대 천 화백의 작품들을 구도와 색감 등으로 비교했다. 지금까지 위작논쟁 역사에서 첫 시도다. 이 보고서는 검찰에도 제출됐다.

본지는 이 보고서를 입수했다. 보고서는 천 화백의 작품과 미인도의 미학적 차이를 객관적으로 보여준다. 우선 질감의 차이가 큰 것으로 나타났다. 천 화백의 작품들이 여러 색깔의 물감을 덧입혀 두텁고 다양한 색감을 연출하는 반면 미인도는 단색 물감으로 처리돼 입체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미인도 어깨선의 경우 색칠을 하다가 만 것처럼 채색 아래 검은 윤곽선이 드러났다. 이는 천 화백의 그동안 작품에선 전혀 볼 수 없는 것이다.


▎미인도의 나비는 날개 모양과 점의 모양, 개수까지 거의 일치한다. 또 천 화백은 코끝을 흰색으로 처리해 입체감을 주는 반면 미인도(가운데)는 정반대로 어둡게 칠해 움푹 꺼진 듯해 완성도의 차이를 보인다.
머리카락의 표현 기법도 큰 차이가 있다. 과거 권씨를 변호하며 천 화백의 작품 세계에 천착해온 박형상 변호사는 “천 화백은 헤어디자이너로도 손색없을 만큼 그림마다 머리 모양을 다르게 표현했다”며 “머리카락의 색깔이 단조롭지 않고 자연스럽게 구부러지는 섬세한 머릿결 표현이 천 화백 작품의 백미 중 하나인데 미인도는 검정색으로 덕지덕지 칠해서 수준 차이가 확연하다”고 지적했다.

미인도의 구성요소들을 하나씩 떼어 분석한 결과는 더욱 결정적이다. 우선 미인도의 눈과 코, 입술의 간격과 기울어짐, 얼굴 등 신체의 구성은 1981년작 <장미와 여인>과 거의 완벽하게 일치했다. 이희일 국제법과학감정원 원장의 지적도 동일했다. 이 원장은 “예전부터 미인도 위작 논쟁에 관심이 있어서 미인도와 <장미와 여인>을 색을 빼고 윤곽선만으로 겹쳐서 비교해봤다. 그랬더니 모든 비율이 거의 일치했다. 먹지에 대고 베낀 수준이었다”고 말했다. 미인도가 <장미와 여인>의 모작일 것이란 주장은 천 화백이 맨 처음 내놨었다. 그런데 당시엔 미인도의 이관 시기(1980년)와 <장미와 여인> 제작 시기(1981년)가 맞지 않아 인정받지 못했다.

머리 위의 갈기진 풀잎 모양과 꽃(플루메리아)의 모양은 <바리의 처녀>(1974)와 흡사했다. 이 꽃은 천 화백이 즐겨 그렸던 것인데 미인도와 같이 스케치에 불투명 채색하는 화풍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건 1981년부터였다. 이전까지는 스케치 선을 살리면서 담채(농도가 옅은 채색기법)로 색을 입혔다. 문 교수는 “꽃과 잎의 구도를 <바리의 처녀>에서 차용하면서 꽃잎의 채색 기법은 1979년 이후 작품을 흉내 낸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미인도의 나비는 <고>(1974)에서 천 화백이 그린 것과 날개 속 점박이 무늬까지 똑같다. <고>에서도 나비를 여인의 어깨에 얹었는데 미인도는 그 구도까지 판박이다.

분석보고서는 “작가 의견이 무시됐고, 동시대 작품과 미학적 비교 분석이 전혀 이뤄지지 않았으며, 과학기술 수준이 낮아 제대로 감정이 이뤄지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이 같은 근거들을 바탕으로 미인도가 1981년 이후에 등장한 천 화백의 작품상 구도와 기법을 모방했을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있다. 문 교수는 “객관적인 사실에 근거하지 않고 미인도를 천 화백의 진작으로 판단한 것은 화가에 대한 미술권력의 폭력에 가깝다”며 “만약 미인도가 1980년에 미술관에 입고된 이후부터 움직이는 미술관 사업에 출품되기 전까지 10년 사이에 바꿔치기 됐다면 여러 가능성이 생긴다”고 말했다.

바꿔치고, 늘리고, 베끼고… 위작 방법 상상 초월

‘설마 바꿔치기가 가능할까’ 싶지만 실제로 그림을 위조하는 방법은 일반인들의 상상을 초월한다. 그리고 아직도 음성적으로 횡행하고 있다는 게 업계 관련자의 전언이다. 미인도를 위작했다면 몇 가지 방법이 동원됐을 거라고 그는 귀띔했다. 위조 방법은 대개 네 가지로 압축된다. ▷끼워 넣기 ▷늘리기 ▷베끼기 ▷바꿔치기 등이다. 위작이 인정 받으려면 작가의 작품 도록에 오르거나 전시회에 출품되는 등의 ‘이력’이 필요하다. 전시회나 도록에 슬쩍 그림을 끼워 넣고 ‘○○전시회 출품작’, ‘○○도록 삽입’ 등의 ‘신분세탁’을 하는 것이다. ‘늘리기’는 주로 동양화에서 사용되는 수법이다. 가로로 긴 동양화의 특성을 이용해 진품 옆에 위작을 이어 붙여 그림 크기를 늘린다. 그림 가격이 호당 사이즈로 결정되기 때문에 이렇게 늘린 그림은 가격이 껑충 뛴다.

베끼기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원작에 기름종이를 대고 베껴서 이를 다시 먹지에 대고 그리는 방법이 있고, 배접 화선지처럼 여러 겹의 종이를 붙인 그림은 물에 살짝 불려 뒷 부분을 떼면 그림의 흔적이 흐릿하게 나타나는데 여기에 덧칠을 해서 쌍둥이 모작품을 만드는 방법이 있다. 이는 미인도에는 해당하지 않는다.

어느 한 순간에 미리 준비된 위작을 원작과 바꿔 넣는 게 바꿔치기다. 미인도가 베끼기-바꿔치기-끼워넣기 과정을 거쳐 ‘진작’의 이력을 갖게 됐을 가능성은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 업계 관련자는 “표구를 하거나 전시를 위해 이동하는 등 그림이 바뀔 기회는 얼마든지 있다”고 말했다. 사건을 수사 중인 검찰도 이런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조사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미술계는 침묵한다. 검찰 수사를 지켜보자는 입장이다. 국립현대미술관도 자체 조사를 진행하는 한편 검찰수사에 적극 협조하겠다고 밝혔다. 현대미술관 관계자는 “자체 조사에서 꽤 성과가 나오고 있다”면서도 “구체적인 내용은 아직 밝힐 수 없다”고 말했다. 국립현대미술관은 미인도를 검찰에 제출했다. “위작이란 증거가 나오면 겸허히 수용하겠다”는 국립현대미술관과 화랑협회의 25년 전 입장이 유효하기 위해서는 먼저 극복해야 할 것이 있다. ‘니들이 그림을 알아?’라는 식의 아집과 독선이 바로 그것이다.

- 유길용 기자 yu.gilyong@joongang.co.kr

201607호 (2016.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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