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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논쟁] 조영남 대작(代作) 스캔들의 원죄 

“아름다움의 실현 위해 노력하는 작가들에 대한 모독” 

케이트 림 아트플랫폼아시아(APA) 대표
개념미술가들, 어리둥절한 작품에 현학적 질문과 억지 명제를 결합해… ‘개념이 미술작품의 핵심’이라며 관객을 비판한 진중권 평결(評決) 무효화해야

▎미술 작품 활동을 활발히 해온 가수 겸 방송인 조영남 씨가 2011년 서울 청담동 자택 작업실에서 자신의 작품을 설명하고 있다. / 사진·중앙포토
한국 미술계는 지금 대작(代作)과 위작(僞作) 스캔들로 세간의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다. 가수 겸 방송인인 조영남이 다른 화가들에게 화투 그림을 대신 그리게 한 뒤 자신의 그림으로 판매한 것에 대해 검찰이 불구속 기소했다. 천경자 화백의 <미인도> 위작 여부를 둘러싸고는 고인의 딸이 국립현대미술관장 등을 사자명예훼손, 저작권법 위반 등으로 고소했고, 검찰이 그림을 넘겨받아 위작 여부에 대한 판정을 내릴 예정이다.

두 사건을 비교해볼 때 흥미로운 점이 있다. 위작에 대해서는 전문가·비전문가들이 한목소리로 사기라고 비판하지만, 대작에 대해서는 전문가라고 하는 사람들과 일반인들 사이에 사기성 여부에 대한 생각이 크게 다르다는 사실이다.

일단 조영남 자신이 “작가가 아이디어를 주고 조수가 대작을 하는 것은 현대미술계의 관행”이라며 자신의 행위를 방어했다. 뜻밖에 조영남 옹호자로 나선 사람은 진보적 비평가로 잘 알려진 진중권 동양대 교수였다. 진 교수는 “작품의 핵심은 콘셉트(concept)이며 작가가 몇 퍼센트를 개입하여 작품을 만들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면서 “이번 사건은 현대미술의 논리를 전혀 모르는 일부 언론이 선동을 했고, 현대미술 논리에 무식한 대중이 흥분한 것”이라고 규정했다. 법조계도 대체적으로 사기죄가 성립한다고 보고 일반인들도 상식적으로 사기라고 생각하는데, 미술전문가라는 사람들은 이 상식이 잘못된 것이라고 말한다. 과연 그럴까.

필자가 보기에 문제의 핵심은 진 교수의 조영남 변론이 미술에 대한 진 교수 개인의 시각이 결코 아니라는 현실에 있다. “미술의 핵심은 개념이다. 작가가 어떤 솜씨를 보이는가는 중요하지 않다”라는 명제는 현재 대다수의 현대미술 비평가가 공인하고 옹호하는 ‘개념미술(conceptual art)’의 핵심 철학이자 현대미술에 대한 자신들만의 정의(定義)이다. 진 교수가 굳이 맹렬하게 나서지 않아도 수많은 현대미술사와 미술비평이 담고 있는 미술 담론은 총체적으로 조영남의 행위를 옹호한다.

미술비평가들의 주류가 개념미술 스캔들의 주역

개념미술론은 일반인들이 예술에 대해 갖는 상식과 정면으로 어긋난다. 음악과 비교해보자. 지금 국내에서 음악방송 프로그램 <복면가왕>이 큰 인기를 끌고 있는데, 개념미술 논리를 적용하면 “작곡가만 진짜 예술가이고 가수는 조수에 불과하다”고 얘기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청중들이 진짜로 감동하는 것은 같은 악보라도 그것을 창의적으로 소화하여 자신만의 독특한 음색을 통해 자신의 독보적 존재감을 실현하는 가수의 능력에 있다. 이렇게 실현된 가수의 존재는 청중이 감동적이고 아름다운 음악을 경험할 수 있게 하는 가교(架橋)가 된다. 만약 음악비평가가 작곡가만 진짜 예술가라고 얘기한다면 그는 음악계에서 즉각 추방당할 것이다.

유독 현대미술계에서만 일반인들의 상식이나 다른 예술에서는 통하지 않는 이상한 논리가 담론을 장악하고 있다. 많은 비평가가 개념미술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고, 점점 더 많은 미술가가 개념미술에 입각해서 창작활동이라는 것을 하고 있다. 이제 이들에게 개념미술론을 부인하는 것은 자신의 존재기반을 부인하는 것과 동일하게 됐다.

그래서 조영남의 대작 자체를 비판하지 못한다. 진중권 교수가 구차하게 “조영남에게 죄가 있다면 노동착취 뿐”이라고 얘기한 것도 그 연장선상이다. 필자는 따라서 이번 사건에 대해 ‘조영남 대작 스캔들’이 아니라 ‘개념미술 스캔들’이라고 이름을 붙이고 싶다. 이 스캔들은 계속 벌어져왔고 지금도 벌어지고 있다. 미술 비평가들의 주류가 이 스캔들의 주역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모르거나 숨죽이고 있을 뿐이다.

개념미술론의 근원지는 1960년대 말 뉴욕이었다. 극도로 저항적인 소수의 작가가 미술이 형태나 물질에 관한 것이 아니라 개념이나 의미에 관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나아가 전통적인 미술 형태인 회화나 조각이 갖는 심미적 스타일, 형태성, 재료의 특성 같은 요소들을 미술의 영역에서 추방하는 작품을 전시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작가의 물리적 개입이 나타나는 작품을 혐오하고 거부하였다. 이들은 팔 수 있고 소장할 수 있는 미술품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미술이란 무엇인가를 질문하는 미술”, 다시 말해 “미술 자체를 비판하는 미술”이 자신들의 관심이라고 강조했다. 이러한 비평을 할 수 있는 온갖 방법은 그 형태와 관계없이 다 미술이라고 정의하였다.

따라서 관객에게 비판적 질문을 던지는 전략에 활용되는 다양한 것이 미술의 범위에 합류했다. 그중에 대표적인 것이 일상 생활용품으로 쓰이는 ‘기성품(ready-made)’이었다. 작가가 직접 노력하여 만들지 않았어도 작가의 비판적 질문, 즉, 개념을 던지는 목적을 담고 있다면 기성품도 응당 미술작품이 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우리가 현대미술 전시장에서 흔히 기성품들을 보게 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개념미술론에서 연유한다. 개념미술론에 의하면 그 기성품은 개념의 메신저이고 따라서 미술품인 셈이다.

개념미술적 비평가들은 개념미술의 선구자로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을 꼽는다. 뒤샹은 1917년 가게에서 산 남자의 소변기를 ‘Fountain(분수)’이라는 제목을 달아 뉴욕 전시회에 내놓으려고 했다가 거절당했다. 뒤샹은 대신 사진을 찍어 짧은 글을 써서 잡지에 실었다. 전시회 측에서 “당신의 작품은 비도덕적이고 천박하며 남을 베낀 것이다. 그것은 표절이다”라며 거절했다는 것을 인용하면서 “자기 손으로 그것을 만들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작가가 그것을 선택한 것이고 거기에 제목을 달아 놓음으로써 일상용품으로서의 성질이 없어지고 새로운 생각이 창조된 것이다”라고 반박했다.

강렬한 반응 얻어내려는 작가들의 욕망 실현


▎개념미술 선구자 마르셀 뒤샹은 가게에서 구입한 남자의 소변기를 ‘Fountain(분수)’이라는 제목으로 전시회에 출품했다. 사진ㆍ중앙포토
1960년대 개념예술운동의 대변인 역할을 했던 조셉 코수스(Joseph Kosuth)는 <철학을 따르는 미술(Art after Philosophy)>이라는 책에서 뒤샹이 미술이 무엇인가를 새롭게 생각하게 한 최초의 작가라며 그의 기성품이 미술의 성격을 바꿔놨다고 주장했다. “이 소변기가 미술 작품이라고 가정한다면 어떨까요? 과연 이런 것도 미술 작품이 될 수 있을까요? 한번 생각해봐요”라는 도전적인 질문을 관객에게 던진다면 소변기조차도 미술 작품이 될 수 있다는 궤변이었다. 그 이후 어떤 것이든 개념만 있다면 미술로 간주되고 전시될 수 있다는 극단적인 미술이론이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개념만 있으면 아름답건 추하건 어떤 것과도 결합할 수 있다는 새로운 미술이론은 충격적인 물건을 내놓아 관객으로부터 강렬한 반응을 얻어내려는 작가들의 욕망을 실현하는 매우 좋은 방법이 되었다. 뒤샹과 가장 유사하다고 평가받는 이태리의 개념미술가 마우리치오 카텔란(Maurizio Cattelan)은 박제된 말의 몸통을 전시장 벽 위에 매달아 놓았다. 아니 벽 속으로 처박아놓았다고 해야 더 맞다. 왜냐하면 말의 머리는 전시장 벽 속에 파묻혀 있기 때문이다.


▎데미안 허스트는 포름알데히드를 채운 거대한 유리상자 안에 진짜 상어를 넣어 전시했다. 사진ㆍ중앙포토
영국 개념미술의 총아(寵兒)인 데미안 허스트는 포름알데히드를 채운 거대한 유리상자 안에 진짜 상어를 넣어서 관객의 시각과 마음을 폭력적으로 흔들어 놓았다. 관객들이 “왜 이런 것이 미술일까?”라고 아무리 질문을 하고 비판해도 “썩지도 않고 살아 있지도 않은 경계에 있는 존재”라는 개념이 비평적 조명을 화려하게 받는다. 조셉 코수스는 아예 ‘미술’, ‘물’, ‘이미지’, ‘의미’, ‘정의’, ‘가치’, ‘보편적인’ 같은 단어의 정의가 나와 있는 부분의 사전을 사진으로 찍어서 전시장에 걸어 놓으면서 그 단어들의 사전적 정의를 읽어보는 것이 미술 감상이라고 억지를 부렸다.

개념미술에서는 이렇듯 개념이 절대적 우위를 지니기 때문에 관객들이 뒤샹의 소변기를 아무리 뚫어져라 쳐다보고 그 앞에서 서성거려봤자 그건 바보 같은 짓이다. 작가가 그런 물건을 관객 앞에 왜 미술품으로 제시했는지를 파악해야 한다.


▎브루스 노먼 작품 <인류학/사회학(카메라를 마주보고 있는 린드>. 모니터, 영사기 등 시각적인 자극뿐 아니라 청각적 자극까지 전해주는 작품이다. 사진ㆍ중앙포토
따라서 개념미술은 언어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작품을 보고 느끼는 것보다 작품에 대한 설명을 열심히 듣고 읽어야 한다. 개념에 대한 설명과 분석을 소화해내는 것이 미술 감상의 기본으로 요구된다. 예를 들어 브루스 노먼(Bruce Nauman)은 “장미는 이빨이 없다(A rose has no teeth)”라는 말을 새긴 납으로 만든 사각형 판을 나무에 매달아 놓고 미술작품이라고 했다. 토니 고드프리(Tony Godfrey)라는 유명한 비평가가 내놓은 현학적 해설을 보자.

“‘장미는 이빨이 없다’라는 구절은 철학자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의 책 <철학적 탐구(Philosophical Investigations)>에서 따온 것이다. 브루스 노먼은 철학자의 분석을 사람들이 예상하지 못하는 뜻밖의 문맥에 갖다 놓음으로써 문맥과 표현이 작품의 의미로 화(化)하게 만들었고, 또한 ‘이게 무슨 뜻이지?’, ‘이게 사실일까?’, ‘이게 사실이라는 것을 우리가 어떻게 알지?’와 같이 진리를 거론하는데 있어서 문제되는 것들을 집중조명한다.”

나는 이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전혀 알 수가 없다. 억지로 갖다 붙였다는 생각 밖에는 들지 않는다. 정상적인 이성과 판단력, 감성을 가진 사람이 “장미는 이빨이 없다”라고 새겨진 사각형판을 보고, 작가가 그런 철학적이고 난해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고 알아채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그 사람은 과연 자신이 미술 감상을 했다고 느낄까?

많은 개념미술가는 어리둥절한 작품에 현학적 질문과 억지 명제를 결합시킨다. 자신들이 자랑하는 대로 작가의 손솜씨를 부리지 않는 무특색, 무표정의 메모 쪽지, 사진, 지도, 도표, 비디오, 물건 등을 내놓지만, 그것은 관객들에게 차가운 난해함과 거리감을 내뿜는다.

언어 의존성은 개념미술의 토대이지만 조금만 들여다보면 공허한 토대일 뿐이다. 미술은 기본적으로 시각(視覺)예술이다. 개념미술은 미술의 핵심 전달수단을 시각에서 언어로 바꾸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언어로 어떤 의미를 전달하려고 그렇게 애쓴다면 언어를 매개체로 활용하는 문학가, 문화비평가, 인문학자, 사회과학자들의 영역으로 옮겨 좀 더 본격적으로 치열하게 자신의 개념을 천착해나가는 것이 올바른 일이다.

미술 전달수단으로써의 ‘언어’의 한계


▎미술품 대작(代作) 사건 피의자로 6월 3일 춘천지검 속초지청에 출두한 조영남 씨.
미술가들 중 그 분야의 전문가만큼 깊이 있게 사유하고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개념미술가들이 던진다고 하는 사회적 메시지가 많은 사람에게 유치하거나 어리둥절하게 받아들여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굳이 개념미술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전시의 영역에 남아 있으려고 하는 것은 아마추어 사회학자가 자신이 쓴 논문을 미술관에 갖고 와서 전시하겠다는 말과 다를 바 없다.

개념미술에 대해서는 그 어느 누구보다도 현업에 있는 많은 미술가가 강하게 회의를 표명한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미술 전달수단으로 ‘언어의 한계’를 얘기한다. 제로(Zero) 그룹의 창시자인 하인츠 막(Heinz Mack)은 최근 한 인터뷰에서 개념미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나의 미술은) 이성에 완전히 의존하고 수학처럼 모든 것을 통제하려고 하는 개념미술과는 거리가 아주 멀다. 나는 그들에게 ‘너희들은 아주 빈곤하다. 왜냐하면 세계는 훨씬 더 풍부한 곳이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사실 인간이 느끼는 것은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풍부하다. 예술은 그 느낌에 즉각적으로 호소하는 것이다. 많은 미술가는 언어로 축소된 미술관(觀), 언어로 축소된 세계관이 포옹할 수 없는 영역을 보여주고 느끼게 해주는 것이 미술의 본령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좋은 예술품이라고 느끼는 것 중에서 언어로 완전히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없다.

대부분의 작가가 고민하고 씨름하는 영역은 언어의 옷을 입은 개념이 아니다. 이들은 개념미술의 기본 강령 자체가 실제 작업과정 속에 부딪히면 곧 허물어지는 이론적 판타지(fantasy)라는 사실을 몸으로 느낀다. 창작이란 곰곰이 논리적으로 따져 완성된 개념을 실행에 옮기는 것이 아니다. 작가들의 내면에 있는 어떤 것들이 구체적인 작업 과정을 거쳐 변화·발전하면서 최종 결과물이 나온다. 처음에 생각한 방향대로 갈수도 있지만 방향이 바뀔 수도 있다. 재료의 선택을 놓고 고민하고, 의외의 발견과 어려움에 부딪히면서 애초의 미술적 의도와 현실간의 긴밀한 상호작용 속에 얻어지는 하나의 물리적 성취다.

이 과정에서 작가의 정신적, 육체적 개입이 강도 높게 투여된다. 원래 생각과 계획은 수정되기도 하고, 때론 자신의 미술적 이기심을 버리기도 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관객이 전시장에선 직접 보지 않는 작가들의 미술적 고민이다. 창작을 하는 다른 장르의 작가들이 공유하는 예술적 고민이기도 하다. ‘우리동네 음악대장’으로 전 국민을 열광하게 만들었던 하현우는 ‘복면가왕’으로 있는 동안 하루 두 시간밖에 잠을 자지 못했다고 말한다. 그의 치열한 고민과 노력은 이미 만들어져 있는 악보라는 ‘개념’을 청중에게 감동적으로 전달하는 데에 거의 전적으로 투입됐고 청중들은 그 결과물에 환호했다. 그러나 개념미술적 비평가들은 이런 고민과 노력에 대해 가치를 두지 않고 심지어 ‘수(手)작업’이라고 폄하한다.

대다수의 관객도 개념미술에 대해 부정적이라고 할 수 있다. 관객이 미술작품 앞에서 느끼는 것은 어떤 개념에 대한 분석적 접근을 통한 논리와 이성이 아니라 ‘지각(perception)’의 영역이다. 인간 지각을 자극하는 것은 미술 작품이라는 물리적 실체 안에 담긴 여러 요소인 형태, 색깔, 선, 재질적 특성, 촉감, 크기 등의 절묘한 접합과 구성이다. “작가가 어떻게 이런 구성 관계를 포착해서 이렇게 실현했을까?”를 느끼며 놀라고 감동받는 것, 이것이 작가와 관객 간의 ‘소통(communication)’이다. 이 소통은 작품 앞에서의 다양한 느낌, 기억의 파장, 연상, 은유적 의미, 일상에서 경험하지 못하는 특별한 분위기 등의 총합으로서 개념이 가져다 줄 수 없는 삶의 활력을 자극한다.

그렇지만 현대미술의 담론에서는 개념미술적 비평가들이 갈수록 전횡을 부리고 있다. 그들은 따분하게 미술품의 구체적인 내용을 놓고 미술애호가들만을 상대로 얘기하기보다 미술품을 통해 사회적, 철학적 이슈를 거론하면서 다른 문화·사회 비평가의 반열에 오르기를 더 바라는 듯하다. 그런 얘기를 하는 것이 언론의 관심을 끌기에도 더 좋다. 작가들 중에서도 힘들게 ‘수작업’을 연마하기보다 쉽게 머리만 써서 미술품을 내놓는 것이 편하기도 하고 주목받기에 더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그 과정에서 현대미술은 미술애호가들로부터 갈수록 괴리된다. 작가이자 이론가로 활동하고 있는 프레일겐(Fre Ilgen)은 개념미술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지각 기능에 호소하지 않고 개념을 이성적으로 섭취하는 기능에 호소하는 작업이라고 강조한다. 그리고 전시장을 찾는 관객의 미술에 대한 일반적인 기대와 관객이 요구하는 감성적 경험을 무시하는 미술작품을 비평가들이 계속 비호하고 미술 제도권에서 홍보하는 것은 결국 미술을 관객으로부터 더욱 고립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지적한다.

개념미술의 허구성에 입다무는 작가, 비평가들

안타까운 것은 많은 작가가 개념미술의 허구성을 느끼면서도 그것을 밖으로 표출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개념미술은 이미 현대미술로서 체계를 갖췄고 전 세계에서 풍부한 비평적 조명을 받고 있다. 언론에서도 그 비평가들의 얘기를 별 여과 없이 그대로 전달한다. 이런 상황에서는 비평가들 중에서조차 용기 있게 개념미술에 대해 비판적인 얘기를 꺼내기 힘들다.

그런데 미술작가들이 자기가 실제로 느끼는 것과 비평이 다르다고 해서 뭔가 잘못된 것 아니냐는 얘기를 어떻게 감히 꺼낼 수 있다는 말인가. 심지어 자신의 작업이 혹시 개념이 부재하여 비논리적이고 비이성적으로 보이지 않을까 불안해하는 작가들도 있다. 작가들이 작품을 전시하려면 비평가들로부터 좋은 평을 받아야 한다. 공공미술관에서 전시를 결정하는 심사위원에 비평가들이 많이 들어가 있다. 작가들은 이들의 심기를 건드리기는 것을 자제한다. 비평가들의 전횡에 숨죽일 수밖에 없다.

조영남 대작 사건이 조영남 개인에게만 초점이 맞춰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현대미술계의 전체적인 문제를 본격적으로 재조명하고 대안을 찾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개념이 미술작품의 핵심이라고 지적하며 관객의 무지를 비판한 진중권의 평결(評決)을 무효화하는 것은 시각적 아름다움의 실현을 위해 노력하는 작가들과 그런 작품들을 전시장에서 만나기를 원하는 미술 애호가들의 열망이다. 철학적 질문 몇 개, 특별한 정보 몇 개를 짜깁기하여 내뱉는 것이 미술이 아니라는 사실을 관객과 대부분의 작가는 말없이 의식하고 있다.

개념미술적 비평가들 사이에서 매우 높이 평가받는 헤럴드 스즈먼(Herald Szeeman)이 기획한 ‘태도가 형태가 될 때(When Attitudes Become Form)’라는 개념미술 전시에는 “머리 속에서 살아라(Live in Your Head)”는 부제가 붙어 있다. 비평가는 머릿속으로 살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대다수의 관객과 미술가들은 머리만이 아닌 “몸과 마음”으로 살아가는 현실 속의 인간들이다.

케이트 림(Kate Lim) - 아트플랫폼아시아(APA) 대표이며 큐레이터이자 미술 저술가이다. APA 제1회 국제포럼 <아시아의 반(反)개념예술: 예술작업으로의 복귀(Fracturing Conceptual Art: The Asian Turn)>(2016년)을 주최했다. (영문 출판, 2014년 Books Actually, Singapore)을 저술했고 2015년부터 코리아타임즈(The Korea Times)에 미술칼럼을 기고하고 있다.

201607호 (2016.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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