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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획] 비틀스는 왜 ‘현대의 고전’이 되었나? 

세상과의 불화를 불멸의 음악으로 승화하다 

강헌 음악평론가
모든 것을 다 태워버릴 듯한 1960년대의 시대적 에너지… 1960년대를 음악적 황홀경으로 가득한 시대로 만든 비틀스

▎비틀스의 마지막 앨범 <애비로드(Abbey Road)>의 재킷 사진. 비틀스는 조지 마틴과 함께 다시 한 번 뭉쳐 절정의 기량을 발휘했다. 강력한 로큰롤과 사랑스러운 발라드, 팝 오케스트라가 골고루 섞인 명반이다. / 사진·중앙포토
클래식에 바흐와 모차르트가 있다면, 팝에는 비틀스가 있다. 비틀스의 불멸성은 새삼스러운 헌사가 아니다. 그런데 올해 그 현상은 더 뜨겁다. 아마도 올해 3월 풀려 공개된 음원 때문일 것이다. 비틀스의 전기 영화가 재개봉되었고, 이들을 그대로 흉내 낸 헌정 공연으로 전 세계 200만 명이 관람한 뮤지컬 <렛잇비>도 한국 관객을 찾았다. 비틀스는 왜 현대의 고전이 되었는가? 국내 비틀스 연구의 대가 강헌 음악평론가가 비틀스 불멸성의 역사적 배경을 심층 탐구했다.

예술의 영역이 아무리 개별적인 취향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세계임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루드비히 판 베토벤이 서구 클래식의 음악사의 영원한 챔피언임은 자명하다. 그리고 동시에 우리는 20세기부터 시작한 세계 대중음악의 역사를 상징하는 단 하나의 대표자로 비틀스를 호명하는데 별다른 이견은 없을 것이다.


▎지휘자 레너드 번스타인은 비틀스가 작곡한 음악을 슈만의 창의성과 동등하다는 놀라운 평가를 내렸다. / 사진·중앙포토
18세기 말부터 19세기 초반이 천년 서구 클래식 음악사의 정점이었다. 모차르트와 하이든이 커리어의 정점에 도달하고 이들의 뒤를 이어 유럽의 문화수도 격인 빈에 베토벤이 등장한 시기다. 거기에 슈베르트와 슈만, 멘델스존과 쇼팽이 젊음의 향연을 펼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세계 대중음악사에서 새로운 음악 문화의 결정적인 변곡점은 1960년대다.

1960년대는 김지영의 책 제목이 말하는 것처럼 ‘이상의 시대, 반항의 음악’이라는 한마디로 요약되는 젊음의 연대기다. 로큰롤을 앞세운 팝음악이 모든 장르의 예술문화를 지배하며 가장 강력한 파괴력을 분출했던 시기이기도 하다. 대중음악과 거의 비슷한 행보를 보인 20세기 문화의 총아인 영화마저도 이 10년간만은 대중음악이 분만하는 영향력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한다. 모든 것을 다 태워버릴 듯한 이 1960년대의 시대적 에너지가 비틀스를 낳았다. 영국 리버풀 노동자계급 가문 출신의 4명의 청년은 다시 1960년대를 음악적 황홀경으로 가득한 시대로 만들었다.

데뷔 앨범 [Please Please Me](1963)를 공식적인 활동의 시작으로 본다면 비틀스는 1970년까지 고작 8년간 활동했을 뿐이다. 정규 앨범도 13장에 불과하다. 이들과 거의 같은 시기에 데뷔하여 이른바 ‘영국의 침공(Brittish Invasion)’의 양 날개 역할을 했던 롤링 스톤즈가 아직까지 현역으로 남아 있는 것을 감안한다면 비틀스는 그야말로 1960년대에 한정된 하나의 음악적 사건인지도 모른다.

13억 장 판매고는 영원히 깨지지 않을 듯


▎비틀스 멤버 조지 해리슨은 패티 보이드와 결혼해 파란만장한 사랑의 길을 걸었다. / 사진·중앙포토
하지만 이들은 이 짧은 시간 동안 모든 것을 이루었다. 비틀스가 기록한 무려 20곡의 빌보드차트 넘버1 히트 싱글 기록은 ‘로큰롤의 황제’ 엘비스 프레슬리의 17곡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팝의 황제’ 마이클 잭슨도 생애 내내 넘보지 못했던 것이고, 디바 머라이어 캐리만이 18곡을 기록하며 비틀스 바로 아래에 랭크되었을 뿐이다.

아직도 꾸준히 팔리고 있지만 영국의 비틀스 음반사인 EMI는 비틀스의 음반이 2000년대 초반까지 약 13억 장의 판매고를 올렸다고 발표했다. 음악시장이 디지털 음원 시대로 바뀐 상황을 감안한다면 이 기록은 아마도 영원히 깨지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비틀스의 이 음반 판매고가 상징하는 또 다른 의미는 음반산업의 역사가 개막한 이후 역대 팔린 모든 클래식 음반의 판매고를 추월했다는 점이다. 클래식계의 수퍼스타인 베를린 필의 수장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 2억 장을 돌파하는 기염을 토했지만(팝 뮤지션으로 2억 장 이상 판매고를 올린 이는 15명이다) 비틀스는 자신들만의 시장의 스코어로 클래식계 전체를 간단히 제쳐버렸다. 대중음악에 대한 클래식음악계의 오만방자한 비하의 시선과 거들먹거렸던 태도를 상기한다면 비틀스는 그 자체가 클래식 음악에 대한 팝음악의 ‘피니시블로’가 된 셈이다.

물론 당연한 얘기지만, 시장의 논리만으로 대중음악의 질적 우위를 증명할 수는 없다. 하지만 비틀스의 최대 문제작인 1967년의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가 전 세계의 음악팬들을 강타했을 때, 카라얀과 더불어 클래식 음악계를 양분하고 있었던 뉴욕 필하모닉의 상임지휘자이자 작곡가인 레너드 번스타인은 “50년 뒤에 음악사가들은 1960년대가 비틀스의 시대라고 기술할 것임이 틀림없다”고 말했다. 사실상의 팝음악의 승리와 클래식음악의 패배를 담은 선언을 하며 비틀스의 작곡은 슈만의 창의성과 동등하다는 놀라운 평가를 내려 클래식 음악팬들을 놀라게 했다.(이에 비해 카라얀은 이미 세계적 대세인 팝음악에 대해 초지일관 노코멘트의 자세를 유지했다)

클래식계의 자유주의자 레너드 번스타인의 이러한 진술은 지극히 개인적인 견해다. 그러나 적어도 비틀스의 등장 이후 어떤 클래식 이론가도 팝음악의 예술적 열등성을 정당화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침묵으로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엘비스 프레슬리가 우리의 스승”


▎20세기부터 시작한 세계 대중음악의 역사를 상징하는 단 하나의 대표자로 비틀스를 호명하는 데 별다른 이견은 없다. / 사진·중앙포토
비틀스의 음악사적 불멸성의 핵심은 판매 차트의 수많은 신기록보다도 바로 여기에 있다. 해산된 지 반세기가 되어가는 이 시점에서도 이들의 음악은 세대의 유행과 취향을 넘어 끊임없이 소비된다. 이들은 이미 현대의 고전이 된 것이다.

고전은 하나의 예술적 전범이며, 다시 말하자면 보편성을 지닌 표준을 그 자체에 품고 있어야 한다. 도대체 이 네 명의 20대 청년은 어떻게 이러한 예술적 성취를 이뤄낸 것일까? 그리고 그 예술적 성취의 내용은 무엇인가? 이것을 얘기하기 위해선 우리는 앞서 언급했던 ‘영국의 침공’의 시점으로 돌아가보아야 한다.

영국의 침공이란 비틀스를 위시한 영국의 록 밴드들이 팝음악의 맹주인 미국을 장악한 1960년대 중반의 사건을 말한다. 하지만 이 말은 결과에 대한 진술일 뿐이다. 역설적으로 들리겠지만 ‘영국의 침공’은 이미 1950년대에 진행된 유럽에 대한 ‘미국 문화의 공습’을 전제한다. 엘비스 프레슬리를 위시한 미국 백인 로커들, 그리고 리틀 리처드와 척 베리 같은 흑인 리듬 앤블루스의 후예들이 전후의 유럽 십대들을 사로잡았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오래건만 리버풀에도 미군 공군기지가 여전히 주둔하고 있었고, 여기서부터 흘러나온 이 반항의 음악은 곧바로 십대들의 마음을 대변하는 언어가 되었다. 비틀스의 첫 두 앨범에는 이들이 경배했던 미국 뮤지션들의 트랙이 절반 가까이 채우고 있다. 이들이 자신의 곡만으로 앨범을 완성하는 것은 세 번째 앨범인 [A Hard Dayr’s Night](1964)부터다.

존 레논이 “엘비스가 나타나기 전까지 어린 시절 내게 영향을 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라고 말했을 만큼 엘비스 프레슬리는 비틀스 멤버들을 완전히 매혹시켰다. 폴 매카트니 역시 이렇게 말했다. “바로 그 사람이었다. 그가 바로 구루(guru)였고 우리가 기다려오던 구세주였다.”

이들은 노예농장의 블루스로부터 기원하는 미국 흑인음악의 그림자가 진하게 깔린 1950년대의 ‘핫’한 음악을 수용했다. 여기에다 유럽 백인의 음악적 감수성을 혼합해 가장 보편타당한 결론을 도출해 내었다. 이들은 이 흑-백, 미국-유럽의 콜라보레이션을 통해 먼저 영국 젊은이들의 마음을 훔쳤고, 이들에 앞서 어떤 영국의 뮤지션도 성공하지 못했던 미국 시장을 장악했으며 나아가 거의 전 세계 젊은이의 감정을 지배하기에 이른다.

이 콜라보레이션은 비틀스의 음악적 스펙트럼을 무한대로 확장시키는 동력으로 작용한다. 처음 이들은 단순히 ‘엘비스 프레슬리빠’로 시작한 로큰롤 풋내기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조지 해리슨이 인도의 초월적인 음악문법을 시타르를 통해 공수하고 폴 매카트니는 이들의 프로듀서 조지 마틴의 어시스트로 유럽의 클래식적 전통을 자신의 록음악에 접목시킨다.(‘Yesterday’의 1주제 반복부터 등장하는 현악4중주의 유려한 결합을 보라.) 투 톱 중 한 명인 존 레논은 시대의 문제의식을 담은 밥 딜런적인 문학적 가사와 극단적인 사이키델릭 사운드를 자신들의 심장 안에 이식하는 데 결정적으로 공헌한다.

폴은 존의 초등학교 후배이며 조지는 폴의 고등학교 후배다. 존이 만든 고교 밴드에 폴과 존이 연이어 합류하면서 비틀스의 역사는 시작한다. 얼치기 아마추어 고등학교 스쿨밴드의 일원이었던 이들의 예술적 성장은 정말이지 경이로운 마법처럼 보인다.

만약 이들이 1964년의 미국과 전 세계를 경악에 가까운 환호성으로 몰아넣은 [I Want to Hold Your Hand] 수준에서 멈추었다면(물론 그 정도도 대단하다!) 당시 이들에게 적대적이었던 비평가들이 퍼부었던 비난, 곧 이들은 고등학교 여학생 지갑이나 터는 ‘오-예~’ 밖에 모르는 ‘오-예 밴드’로 끝났을 것이다. 그저 한번 반짝하고 사라진 더벅머리의 아이돌 밴드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을 것이다. 당시의 언론들의 기사를 한번 살펴보자.

<헤럴드 트리뷴>은 “75%의 홍보, 20%의 헤어스타일, 5%의 경쾌한 노래”라고 논평했고, 일부 보수인사는 “비틀마니아는 일시적인 현상이며 곧 사라질 것”이라고 예측했다. 반면 <뉴스위크>는 “비틀스는 긍정적인 매력을 주고 아이들에게 울분을 토해낼 기회를 제공한다”면서 “그들은 귀엽고 안전하다. 겨우 ‘네 손을 잡고 싶어’라고 요구할 뿐이지 않은가”라고 평가했다.

하지만 비틀스가 다른 그룹과는 본질적으로 차원이 다른 밴드라는 것을 증명하는 데엔 1년도 채 걸리지 않았다. 데뷔 때부터 이들은 이미 훌륭한 로큰롤 밴드이자 최고의 보컬 그룹이었다. 존 레논과 폴 매카트니, 조지 해리슨 등은 모두 뛰어난 작곡자들이자 유능한 가수였다. 당시 존은 낮은 화음을 담당했고 폴은 높은 음, 조지는 중간 음을 맡았는데, 이는 미국 흑인 보컬그룹을 빼고는 거의 없었던 형태다. 다시 말해 이들은 록밴드의 연주자이면서 보컬 그룹의 보컬리스트이고 동시에 밥 딜런처럼 노랫말과 멜로디를 스스로 만들어내는 역사상 최초의 싱어송라이터 그룹이었던 것이다.

여기에 다섯 번째 비틀스 멤버인 매니저 브라이언 엡스타인과 EMI 산하 팔로폰에서 클래식 기획을 담당했던 프로듀서 조지 마틴이 합세하며 최강 진용이 되었다. 브라이언 엡스타인이 돌연사하는 1968년까지는 적어도 이들의 팀플레이를 능가할 수 있는 예술가 그룹은 단연코 존재하지 않았다. 이런 팀플레이 속에서 이들은 눈부신 음악적 진화를 끊임없이 조직한 것이다.

록적이면서도 아름다운 선율의 명곡들


▎오노 요코와 결혼한 비틀스 멤버 존 레넌. 비틀스와 존 레넌을 언급할 때 오노 요코는 영원한 애증의 아이콘으로 남아 있다.
비틀스는 일천한 역사를 지닌 팝음악의 지난 역사적 성과들을 종합했고 그것들을 새로운 차원으로 발전시켰다. 비틀스의 음악적 영감은 기본적으로 로큰롤과 모타운 팝, 리듬앤블루스 같은 미국 흑인음악에서 가장 중요한 초석을 다졌다. 고성을 지르며 빠른 속도로 블루스를 연주했던 리틀 리처드와 스스로 곡을 쓰고 기타를 연주하면서 노래까지 불렀던 척 베리는 이들의 우상이었다. 코스터스, 드리프터스 같은 흑인 남성 보컬그룹의 환상적인 보컬 하모니는 하나의 추가 옵션이었다.

비행기 사고로 아깝게 요절한 미국의 백인 로커 버디 홀리도 이들에게 깊은 영감을 주었다. 딱정벌레를 연상시키는 비틀스라는 그룹 이름도 버디 홀리의 백밴드 크리켓츠(The Crickets: 귀뚜라미들)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다. 척 베리와 마찬가지로 기타를 연주하며 노래하는 싱어송라이터의 재능과 밴드 형식이 비틀스의 귀감이 되었다. 컨트리 남성 듀오 에벌리 브라더스의 코러스 하모니 역시 비틀스가 자신들의 전범으로 삼은 하나의 중요한 모멘텀이다. 뿐만 아니라 비틀스는 제리 고핀과 캐롤 킹 콤비로 대변되는 뉴욕 브릴빌딩의 달콤하고 서정적인 틴팬앨리 팝까지 수용한다. 그 덕분에 이들은 록적이면서도 아름다운 선율이 있는 여러 명곡을 배출할 수 있었다.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비틀스에게 결정적인 비약의 영감을 제공한 사람은 동시대의 라이벌이자 동지인 포크뮤지션 밥 딜런일 것이다. 존 레논의 말을 들어보자.

“정확히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그 즈음 나는 개인적인 감정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내 자신을 표현하려고 노력했다. 그걸 깨닫게 도와준 이가 딜런이었다. 토론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가 부르는 노래를 듣는 것만으로 그렇게 됐다. 그 뒤 나는 객관적인 측면이 아닌, 주관적인 견지에서 곡을 쓰게 되었다.”

1962년부터 1965년까지 그들이 작곡한 76곡 중에서는 74곡이 사랑 노래였지만, 1966년부터 1970년까지 만든 120곡 중에서는 겨우 38곡이었다. 사랑타령 대신 그들은 현대 사회의 소외감이나 철학적 도피, 페미니즘, 반문화, 약물의 효과, 어린 시절 리버풀의 기억, 거의 공산주의자처럼 보일 수도 있는 급진적인 정치 견해 등을 노래하기 시작했다. 엘비스 프레슬리처럼 성공하고 싶었던 이들 청년에게 밥 딜런이라는 동년배의 새로운 사도가 이들에게 동어반복적인 대중음악의 클리쉐(진부한 메시지)로부터 벗어나게 해 준 것이다.

‘지배의 논리’와 좌충우돌하다


▎1964년 미국 마이애미의 훈련장에서 비틀스와 만난 알리. 왼쪽부터 폴 매카트니, 존 레넌, 링고 스타, 조지 해리슨과 알리. / 사진·중앙포토
비틀스와 밥 딜런의 교감은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쌍방적이었다. 비틀스의 음악적 탐구는 통기타와 하모니카를 맨 밥 딜런에게도 새로운 전환을 강렬하게 이끌었다. 이 두 팀 간의 역사적 이인삼각 경주는 대중음악사의 가장 빛나는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다. 밥 딜런은 자신이 비틀스로부터 받은 영향을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콜로라도로 차를 몰고 가는 도중 라디오에서 비틀스 노래를 들었다. 톱10 히트곡 중 여덟 곡이 그들 것이었다. 비틀스는 예전에 그 누구도 하지 못했던 일을 하고 있었다. 그들의 음악은 정말 굉장했다. 많은 사람은 비틀스 음악을 두고 ‘10대 지향적이며 머지않아 사라져버릴 거품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나는 그들이 지속적인 파워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또한 그들이 앞으로 음악이 나아갈 방향을 정확히 제시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하여 그는 1965년 통기타 대신 일렉트릭 기타를 매고 록 밴드를 대동한 채 무대에 오른다. 이른바 포크록 시대의 개막을 알린 것이다. 밥 딜런으로부터 대마초를 배운 비틀스도 데뷔 시절부터 입었던 단정한 모즈족(Mods, 모더니스트의 약자) 패션 수트를 벗어 던지고 장발의 불량한 히피족으로 변화한다. 이들은 시장의 정상에 섰지만 결코 세상의 논리에 순응하지 않았다. 세상의 주류 논리와의 불화야말로 비틀스의 불멸성을 이루는 두 번째 질료다. 다시 말해 1964년까지 이들은 성공에 목마른 연예인(entertainer)의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이들의 코디는 단정했고 표정은 순진했다. 하지만 이듬해부터 이들은 순식간에 불량 청년이 되었으며 뒷골목의 철학자가 되었다. 그리고 지배 논리와 좌충우돌하기 시작한다. 가장 큰 파문은 역시 존 레논의 기독교 비하 발언일 것이다. 1966년 3월 4일 존 레논은 <이브닝 스탠더드>지의 (자신들에게 우호적인 기자) 모린 클리브와 비공식 자리에서 이야기를 나눴다.

“기독교는 무너질 것이다. 사라지고 움츠러들 것이다. 나는 그런 것을 가지고 논쟁하고 싶지 않다. 내 말이 맞고 그렇다는 것이 증명될 것이다. 지금 우리는 예수보다도 더 인기 있다. 로큰롤과 기독교 중에 어떤 게 먼저 사라질지는 알지 못한다. 예수는 옳지만 그의 제자들은 우둔하고 평범하다. 내게 있어서 기독교를 파멸시키는 것은 기독교를 왜곡하는 그들이다.”

이 인터뷰는 영국에서는 그리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미국의 매체에 옮겨지면서 폭동에 가까운 분란이 일게 된다. 존 레논은 시니컬하게 사과했지만 전혀 진정성이 없었다. 저열한 주류 저널리즘의 논리에 신물이 난 이들은 록 밴드에 가장 중요한 콘서트 투어와 TV쇼도 전면적으로 포기하고 스튜디오 속으로 은둔한다. 비틀스는 음반을 홍보하는 다른 대체수단을 찾아야 했다. 공연하기도 싫고 TV에 출연하고 싶지도 않았던 이들은 스튜디오에서 연주하는 장면을 필름으로 찍어서 방송국에 보내는 방법을 택했다. 그것은 바로 뮤직 비디오의 전신이었다.

스튜디오에 틀어박힌 이들은 대중음악 사상 초유의 실험에 도전한다. 이것은 콘서트의 부르주아적 허세에 염증을 느낀 클래식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가 스튜디오 녹음만으로 자신의 활동을 한정지은 또 다른 사례와 묘하게 교감한다.

대중과 평단 모두의 열정적 반응 얻은 ‘페퍼상사’ 앨범


▎영국 리버풀에 있는 비틀스 스토리 뮤지엄. 재즈 등 새로운 미국음악이 빠르게 소개된 항구도시 리버풀은 비틀스 탄생의 모태가 되었다.
[Rubber Soul]과 [Revolver]라는, 아마도 록음악 사상 가장 위대한 앨범으로 꼽히기에 충분한 두 개의 걸작 앨범을 연이어 발표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예술적으로 여전히 배고픈 스튜디오의 사자였다. 그들의 마스터피스(masterpiece, 걸작)가 될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 앨범이 탄생하는 데엔 하나의 작은 자극적인 도전이 있었다. 바로 비치 보이스의 저주받은 걸작 [Pet Sounds] 앨범이 비평가들과 록 마니아들의 절찬을 이끌어내었기 때문이다. 사실 비치 보이스는 비틀스의 라이벌이라기엔 너무 미약한 존재였고 이들의 음악은 밴드의 이름처럼 그저 낙관적인 캘리포니아의 서프 사운드(surf sound)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 밴드를 이끄는 귀재 브라이언 윌슨은 더 이상 소녀 팬들의 환호에 영혼 없는 손키스나 날려대는 아이돌 스타가 아니었다. 그는 진지한 음악가로 인정받고 싶은 열망이 컸고 (결코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아마도 비틀스처럼 되고 싶었을 것이다) 그 열망의 결실이 바로 [Pet Sounds]였던 것이다.

스튜디오에 들어간 지 8개월 만인 1967년 6월 1일 비틀스는 드디어 괴상하고 외우기 힘든 긴 타이틀을 지닌 새 앨범을 발표한다. 이 앨범은 이미 발표하기도 전에 예약으로만 밀리언셀러를 기록하고 있는 중이었다. 앨범이 공개되자 기대는 경악으로 바뀌었다. 이것은 각 트랙이 2분 내외인 기존의 록 앨범이 아니었다.

차트에서는 실패한 [Pet Sounds]와는 달리 ‘페퍼상사’ 앨범은 흥행과 평단 모두의 열정적인 반응을 획득한다. ‘가상밴드’라는 아이디어에서 착안해 만든 이 작품은 서커스 음향 효과, 음악홀 장치, 브라스밴드, 낭만적 발레, 초현실 소리 집합체 등의 각종 레코딩 기술이 집약된 스튜디오 앨범의 결정판이었다. 새로운 사운드와 스튜디오 기술, 일련의 음악효과를 결합할 목적으로 비틀스는 땀부라, 시타르, 오르간, 여러 종류의 피아노 등 엄청난 양의 악기를 연주했으며 앨범을 녹음하는 데만 네 달을 썼다.

키치적인 유니폼을 입은 네 명의 초상 아래엔 대마초로 보이는 풀들이 보이고 멤버들의 초상 뒤론 마릴린 먼로와 칼 마르크스 등의 인물 사진들이 빼곡히 깔려 있었다. 기괴한 음반 재킷을 열면 어떤 말로도 정의할 수 없는 다종다양한 음악의 만화경이 펼쳐진다.

타이틀과 같은 오프닝 곡 ‘페퍼 상사’는 왁자지껄한 관객들의 소음과 함께 서커스의 시작을 알리고, 링고 스타가 노래하는 두 번째 곡 ‘With A Little Help from My Friends’가 영국의 음악홀 양식과 미국 리듬 앤 블루스로 연주한다면 연이은 ‘Lucy in the Sky with Diamonds’는 약물과 사이키델릭적 환각의 세계로 우리를 초대한다.

또 조지 해리슨이 인도 음악가들과 합작한 ‘Within You Without You’는 인도 전통선율인 라가의 깊은 세계로 안내한다. 후반부에 40인조 오케스트라가 4배로 확장되는 클래식적 접근이 돋보이는 ‘A Day in The Life’는 5분 39초에 이르는 긴 러닝타임 동안 “난 오늘 신문을 읽는다, 난 오늘 아침에 일어났지” 같은 일상적 이야기들을 통해 장엄하게 현대인의 소외감을 말한다.

이 앨범의 분위기는 당시의 시대정신이었던 히피와 약물, ‘사랑의 여름’이었다. 그러나 사운드 측면에서 비틀스는 록 음악의 형식을 부분적으로 파괴함으로써 록 청중뿐 아니라 클래식 청중과 전 세계의 많은 연령층이 음반을 듣게끔 할 수 있었다. 확실히 가장 야심 찬 비틀스 작품이었으며 음악적으로 최상의 완성도를 보여준 예술품이었다.

하지만 기나긴 스튜디오 작업은 폴 매카트니와 나머지 세 멤버 간의 불화를 서서히 진행시킨다. 분열은 이제 필연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비틀스는 이 걸작 앨범 뒤에도 세 장의 위대한 앨범을 연이어 발표하는 믿을 수 없는 저력을 과시한다.

특히 밴드의 두 예술적 맹주 존과 폴의 음악적 자존심은 이미 폴의 ‘Penny Lane’과 존의 ‘Strawberry Fields Forever’를 거의 동시에 완성시켰을 때부터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두 사람 모두 자기의 곡이 싱글의 뒷면에 묻히길 원하지 않았고, 결국 따로따로 발매해서 자기들 작품끼리 차트에서 경쟁하는 해프닝을 낳기도 했다. 막내이지만 밴드의 리드 기타리스트인 조지 해리슨의 문제는 좀 더 심각했다. 존과 폴이 합세해 조지 해리슨을 노골적으로 탄압한 것이다. 두 리더는 조지 해리슨의 곡이 앨범에 수록되는 것을 원치 않았기에 조지의 곡은 두 곡 이내로 제한받았으며 기타 연주에도 사사건건 간섭해대기 일쑤였다.

독자적으로 설립한 애플사의 도산이 팀 해체 불러


▎비틀스의 빌보드와 UK 싱글차트 1위곡 27곡을 수록해 3천만 장 이상 판매된 앨범 <1>. / 사진·중앙포토
당시 총리였던 보수당의 알렉 더글라스 흄은 비틀스를 일컬어 “영국 최고의 수출품이며 채무 상환에 큰 도움이 되었다”고 속물적으로 치하했지만 밴드는 구심력을 잃고 나날이 와해되어 갔다. 1968년의 더블 앨범 작업 시에는 아예 스튜디오에서 서로 마주치는 것도 피하는 최악의 상황으로 치달았다. 이제 비틀스는 각자의 솔로곡을 담는 용기에 지나지 않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후기 앨범들이 오늘날에도 위대한 걸작으로 칭송받는 것은 이 세 명의 싱어송라이터들이 음악예술가로서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정점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멤버 간의 분열이 밴드의 해체로 이어지는 과정에서의 결정타는 바로 이들이 독자적으로 설립한 애플사의 도산이다. (비틀스의 광팬이이었던 스티브 잡스가 자신의 회사 이름으로 애플을 쓴 것은 유명한 얘기다)

런던의 예술 중심지로서 구상한 이 애플사(Apple Corps Ltd.)는 매니저 브라이언이 죽기 전 매카트니가 주도해 세웠고, 1968년 5월 15일 존과 폴은 미국 NBC TV의 투나이트 쇼에 출연해 애플사의 설립을 공식 발표했다. 애플을 통해 비틀스가 계획했던 것은 한마디로 ‘재능은 있으나 돈은 없는’ 언더그라운드 예술인들을 후원함으로써 그들이 돈 앞에서 무릎 꿇지 않게 하도록 돕는 이상적인 기업체였다. 그 의도대로 비틀스는 회사를 설립한 뒤 곧바로 영화, 출판, 연극, 미술, 의상 디자인 등 런던에 있는 각계각층의 여러 예술가를 만났고 그들에게 돈과 기회를 줬다.

“처음 시작했을 때 우리는 열여덟 살이었고 부자가 되고 싶었다. 노래를 해서 부자가 될 수 있다면 모든 걸 잊을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 우리 자신을 위해 더 이상 할 일이 없다. 그래서 돈을 모으려 애쓰기보다 차라리 서구 공산주의 같은 사업 복합체를 설립한다. 단지 우리를 위해서가 아니라 공공의 이익을 위해 애플을 완전한 사업체 또는 조직체로 만들고 싶다. 우리는 그에 필요한 돈이 있다. 그래서 이제 우리가 매주 1백만 파운드를 버는 동안 겨우 2파운드밖에 벌지 못하는 무명작가들이 정당한 제 몫을 받을 수 있도록 그 돈을 투자하고 싶다.”

폴 매카트니의 이러한 입장은 진정 어린 것이었지만 브라이언이 제 세상으로 가고 없는 상태에서 이들이 경영에 참여한다는 것은 거대한 붕괴를 예견하는 것이었다. 그들의 생각은 냉혹한 시장에서 한마디로 ‘미션 임파서블’에 가까웠다. 비틀스는 순진했고 애플은 너무나 이상주의적인 사업체였다. 의도는 순수했으나 애플사를 세운 것은 비틀스에 있어 최악의 결정이었다. 이로 인해 비틀스는 비단 금전적 손해를 본 것에 그치지 않고 탄탄했던 그룹의 협력관계까지 깨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세계 대중음악사의 가장 빛나는 ‘지나간 미래’


▎1964년 개봉된 영화로 2014년 다시 디지털로 제작된 비틀스 영화 <하드 데이즈 나잇>의 한 장면. / 사진·중앙포토
나중에 존 레논은 “우리는 절대 우리의 레이블(애플)을 시작하지 말았어야 했다. 너무 많은 문제가 생겨났다”라고 말했지만 이미 때늦은 후회였다. 이들이 발굴한 메리 홉킨스는 차트의 정상에 올랐고 배드 핑거 또한 비틀스의 후계자로 칭송받았지만 거기까지였다. 방만한 경영은 곧바로 도산으로 이어졌고 밴드는 풍비박산 났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애플 프로젝트야말로 비틀스 불멸성의 또 하나의 얼굴이다. 비록 결과는 실패로 끝났지만 이들은 자본주의 세상에서의 자신의 예술이 자본과 시장의 노예가 되는 것을 행동으로써 거부했다. 나아가 자신들의 성공이 무명의 가난한 신예들에게 사다리가 되어야 한다는 진보적인 인식으로 진전했음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이것이야말로 위대한 패배이며 여전히 지금-여기에서도 유효한 숭고한 문제의식인 것이다.

그룹이 해산한 뒤 매카트니와 레논, 해리슨, 링고 스타는 솔로 아티스트로서도 좋은 성과를 거두었다. 해리슨은 1970년 말 무려 세 장의 LP로 이루어진 걸작 음반 [All Things Must Pass]를 발표했다. 이 앨범은 비틀스 멤버가 낸 독집으로는 최초로 미국 차트 1위를 차지했으며, 크리슈나를 찬양한 싱글 [My Sweet Lord] 역시 빌보드 싱글 차트를 4주간 제패했다.

이 앨범을 통해 자신의 음악적 역량을 마음껏 선보인 조지 해리슨은 인도 음악과 제3세계에 대한 그의 관심을 이어갔다. 1971년 8월 1일 해리슨은 ‘시타르 구루’ 라비 상카르와 함께 방글라데시 내전의 희생자들을 돕기 위한 공연 ‘콘서트 포 방글라데시(Concert For Bangladesh)’를 주최했다. 에릭 클랩튼, 밥 딜런, 링고 스타, 리온 러셀 등 초호화 뮤지션이 총출동했던 이 거대한 록 앙상블은 자선공연이라는 위대한 선례를 록 역사에 남겼다. 또 사랑과 평화라는 1960년대 정신을 회복하면서 음악의 힘과 긍지를 보여준 행사였다. 이러한 기획이 애플 정신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것은 굳이 부연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 최초의 자선 콘서트는 주최자이자 호스트인 조지 해리슨이 ‘Bangla Desh’라는 곡으로 대미를 장식했다. 연주 실황은 세 장짜리 LP로 묶여 출시되었고 그 뒤로 1980년대의 ‘라이브 에이드’처럼 세계 각지에서 우후죽순처럼 벌어진 수많은 기금 마련 자선콘서트의 기원이 되었다.

진보적인 음악 활동을 정력적으로 펼치다 정신이상자의 총이 맞아 사망한 존 레논과 암으로 세상을 떠난 조지 해리슨…. 폴과 링고는 아직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지만 이들도 곧 그의 옛 동료들의 곁으로 날아갈 것이다. 지금도 이들의 미공개 음원은 발굴되고 있으며, 영화나 다큐멘터리 연극 같은 다양한 서사 장르를 통해 다시 태어나고 있다. 비틀스의 음악은 현재진행형이며 세계 대중음악사의 가장 빛나는 ‘지나간 미래’였다.

강헌 - 1962년 부산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와 같은 대학교의 음악대학원 음악학과에서 음악이론을 전공했다.1991년 <김현식론> 이후 한국 대중음악에 관한 비평을 25년간 썼다. 들국화 헌정 앨범 및 노무현 추모 앨범 등의 프로듀서를 맡았고 <검열 철폐 기념 콘서트 자유>를 만들었다. 저서로 <전복과 반전의 순간> <명리-운명을 읽다>가 있다.

201607호 (2016.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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