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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이슈] ‘브렉시트’ 영국정치의 행로(行路) 

캐머런의 국민투표 카드 보수당에 부메랑이 되다 

박소영 국제부장 park.soyoung@joongang.co.kr
보수당 내 우파의 목소리 커지고, EU 탈퇴 주장하는 영국독립당의 정치적 위상 키운 꼴… ‘얼음 여왕’으로 불리는 메이 신임총리의 정치력과 대외 협상력에 ‘기대감’ 커져

▎영국 내 이민자 갈등이 결국 국론 분열을 낳았다. 나이절 패러지 영국독립당 대표는 국민투표 캠페인 기간 시리아 난민들의 모습을 담은 포스터를 사용했다. ‘인종주의를 부추기는 나치식 선전’이라는 비난이 쏟아졌지만 EU 탈퇴파에는 강한 인상을 남겼다.
“당신에게 의회의 신임이 있다.”

7월 13일 버킹엄궁.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이 테리사 메이(60)에게 건넨 말이다. 메이가 영국 제 76대 총리에 공식 취임한 순간이었다. ‘철의 여인’ 마거릿 대처가 1990년 총리에서 물러난 지 26년 만에 영국에 여성 총리가 탄생했다. 76번째이자 여성으론 두 번째 영국 총리다.

메이는 다수당 대표 자격으로 버킹엄궁을 방문해 여왕을 알현하고 관례에 따라 여왕의 손에 입을 맞췄다. 영국 일간지 <텔레그래프> 등에 따르면 메이는 1956년 잉글랜드 남부 이스트본의 영국 국교회 목사의 딸로 태어났다. 교구의 신자들을 돕는 아버지의 영향으로 12세 때 정치인이 되기로 결심했다. 명문 옥스퍼드 대학에서 지리학을 전공했다. 이슬람권 최초의 여성 총리를 지낸 베나지르 부토와는 대학 친구다. 부토의 소개로 남편 필립과 만나 1980년에 결혼했다.

대학 졸업 후 영국은행 등 금융업계에서 활약했다. 97년에 세 번째 도전 끝에 하원의원에 첫 당선, 정계 진출의 꿈을 이뤘다. 뚝심 있고 예리하기로 정평이 난 메이는 보수당 내에서 두각을 나타냈고, 야당 시절에는 당의 요직인 ‘그림자 내각’의 각료를 역임하기도 해 당내에선 일찌감치 총리후보로 점쳐졌다.

대처 전 총리가 타협을 허용치 않는 정치를 구사해 ‘철의 여인’으로 불린데 비해 메이는 자신의 생각을 잘 드러내지 않고 정치인들과 잘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얼음 여왕(the Ice Queen)’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

“나는 점심식사를 하면서 남의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의회 바(bar)에서 술을 마시지도 않는다. 감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일도 별로 없다. 나는 눈 앞에 있는 내 일을 할 뿐이다.” 6월30일 보수당 대표선거 연설에서 그가 한 말이다.

강경한 이미지로 알려져 있지만 의외의 면모도 찾아볼 수 있다. BBC에 따르면 메이 총리의 취미는 요리다. 본인 스스로 “100권의 요리책을 갖고 있다”고 말한다. 또 화려한 구두와 패션을 즐겨 종종 표범무늬 구두를 신고 등장해 시선을 끈다.

메이는 원래 유럽연합(EU)에 회의적인 입장으로 알려져 있다. 캐머런 내각에서 내무장관을 지내며, 이민과 테러대책을 6년간 담당했다. 메이는 불법 이민자들에게 “돌아가라. 돌아가지 않으면 체포하겠다”며 자발적인 귀국을 촉구하는 선전차량을 전국에 돌게 하는 등 이민자들에게 엄격한 자세를 보여왔다.

하지만 6월 23일 국민투표 때는 캐머런 총리의 뜻에 따라 영국의 EU 잔류를 지지했다. 이런 그가 새 총리가 되자 탈퇴 파 의원들 사이에서는 향후 영국의 브렉시트 계획에 차질이 빚어지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왔다. 이에 대해 메이는 “영국은 EU 탈퇴를 결정했다. 우리는 이를 성공시킬 것”이라며 국민투표 결과를 존중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1975년 국민투표 때는 67.2%가 EC 잔류 선택


▎EU 탈퇴진영의 승리가 확정된 6월 24일, 런던에서 지지자들과 환호하는 패러지 대표.
과거 최저임금제도에도 반대했던 그지만 이번엔 노동자들의 권리를 보호하겠다고 한다. 또 과거엔 테러 용의자들의 강제 송환이 어렵다며 ECHR(유럽의 인권조약)를 탈퇴, 파기할 것을 주장했었다. 그러나 이번엔 당내 화합을 우선해야 한다며, 자신의 뜻을 철회할 것이라고 밝혔다. 과거 대처 총리는 만성적인 경제침체에 의한 ‘영국병’을 뜯어고치고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그리고 2016년, 영국은 ‘EU 탈퇴’라는 어려운 과제 앞에 섰다. 메이 신임 총리가 영국을 어떻게 이끌게 될지, 전 세계가 그를 주목하고 있다.

6월 23일 실시된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국민투표는 72.2%라는 높은 투표율을 기록했다. 그리고 ‘유럽연합(EU) 탈퇴’라는 충격적인 결과를 남겼다. 탈퇴 1741만742표(51.9%), 잔류 1614만1241표(438.1%). 126만9501표차였다. 정계와 여론조사 회사, 도박사이트의 분석가들도 예상치 못한 결과였다.

잔류와 탈퇴 사이에서 국민은 크게 양분됐다. 다음 날인 24일 진보계열의 신문인 는 아직 최종 결과가 나오지 않은 상황에서 1면에 여러 조각으로 나뉜 영국 지도를 게재하며 ‘분열된 나라(A nation divided)’라는 제목을 달았다.

이민자 증가와 규제뿐인 EU에 강한 불만을 갖고 있는 영국시민들도 마지막 순간엔 현실적인 판단을 할 것으로 믿었다. 하지만 영국인들은 경제적 타격을 각오하면서까지 유럽연합을 탈퇴해 아무런 제재 없이 영국으로 유입되는 이민자들을 막겠다고 결정했다.

청교도혁명의 주인공 올리버 크롬웰의 의회파가 국왕파를 물리치고 찰스 1세를 처형한 것은 1649년이다. 하지만 11년 후 찰스 2세가 즉위하고 영국은 공화제에서 왕정제로 돌아왔다. 영국의 정치를 아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영국인에게는 Revolution(혁명)이 아닌 Evolution(진화)의 유전자가 있다”고 말한다. 1000년에 걸쳐 타국의 침략을 받지 않은 영국의 강인함은 국왕의 권력을 제한하는 형태로 발전해온 의회 정치에 의한 ‘정치의 안정’이었다. 성숙한 간접민주주의와 보수당과 노동당이 팽팽하게 힘겨루기를 하는 양대 정당제가 영국에 질서와 안정을 가져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섬나라이면서 대영제국의 영화를 기억하는, 그러면서도 오랜 기간 미국과 특수한 관계를 유지해온 영국은 EU의 28개 회원국 중 EU와의 유대감과 소속의식이 가장 약한 나라였다. 다만 EU 탈퇴를 주장하는 세력이 결코 다수를 차지하지는 않았다. 양당 중 여당인 보수당과 야당인 노동당에는 각각 일정 규모의 EU 반대파가 있었으나, 정권을 움직일 만큼의 세력을 형성하진 못했다.

영국이 EU의 전신인 EC(유럽공동체)에 가입한 것은 1973년. 75년에 EC 잔류여부를 묻는 국민투표가 실시됐는데, 67.2%의 압도적 다수가 잔류를 희망했다. 결과는 이번 국민투표와 마찬가지로 법적 구속력은 없었으나 국민들은 잔류를 결정했다.

캐머런, 직접민주주의 함정에 빠지다

당시 국민투표가 문제가 되지 않은 것은 ‘잔류’라는 결과가 나왔기 때문이다. 국민투표는 결과가 50대 50으로 둘로 나뉘는 경향이 있다. 즉 절반 가까운 사람은 결과에 불만을 갖는다는 얘기다. 하지만 현상유지의 결과가 나오면 대체로 불만을 제기하는 목소리가 대체로 약해지는 경향이 있다. 당시와 이번 국민투표의 차이가 여기에 있다.

사실 41년 만에 이뤄진 이번 국민투표는 영국과 EU 사이에 긴박한 현안이 있어서가 아니다. 전적으로 영국의 국내정치, 나아가 여당인 보수당의 당내 권력싸움 때문에 하게 됐다. 보수당 내 EU 회의파 의원들의 발언이 강해지자 이들의 세력을 억제하려는 데이비드 캐머런 등 보수당의 주류파가 꺼내든 카드였다. 당 대표인 캐머런 총리는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먼 친척이며, 명문대 출신의 영국 정치인 중에서도 손꼽히는 금수저다. 친척 중에는 금융계에서 활약하는 사람이 많고, 그 역시 부와 명성을 가졌다.

원래 이런 부류의 인물은 과격한 언동으로 대중을 현혹하는 포퓰리스트와는 거리가 멀다. 그럼에도 캐머런은 포퓰리스트들의 전매특허인 ‘국민투표’ 카드를 사용했다.

‘국민투표’가 민의를 직접 정치에 반영한다는 긍정적인 측면을 부정하긴 어렵다. 간접민주주의가 제 기능을 못하게 된 지금의 상황에 이런 직접 민주주의 제도는 때론 매력적으로 비치기도 한다.

한편에서 직접민주주의는 극히 위험한 측면이 있다. 무엇보다 다양한 의견이 공존하는 여론을 억지로 흑백으로 가른다는 점에서 사회에 균열을 야기한다. 투표결과는 그때그때 시민감정에 치우치기 쉽고, 의도적으로 상대방을 공격하는 도구로 쓰이기도 한다. 포퓰리스트들이 국민투표를 즐겨 사용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대표적인 정치인이 나폴레옹과 히틀러였다는 사실은 이 제도의 약점을 드러내는 것이다.

영국에 국민투표의 전통은 거의 없다. EC 잔류 여부를 묻는 1975년의 투표가 첫 경험이었다. 이후 지역 주민투표는 있었지만, 국민투표는 2011년 선거제도를 둘러싸고 한 차례 실시됐을 뿐이다. 2014년 스코틀랜드 독립을 묻는 주민투표도 지역투표였다. 다시 말해 국민투표가 캐머런에게 익숙한 정치방식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캐머런이 이런 위험한 측면을 이해하지 못하고 너무 안이한 선택을 한 것은 아닐까.

보수당은 대기업과 엘리트 층, 영국의 전통을 자랑스러워하는 순수 영국인 층이 지지기반이다. EU 문제는 그러나 이 두 계층을 둘로 분열시켰다. 전자는 EU 단일시장에서 유입되는 저임금 동유럽 이민자들을 이민을 노동력으로 확보할 수 있다는 관점에서 EU에 남아야 한다는 잔류파이고, 후자는 자신을 세계화의 피해자로 인식하고 이민자들이 사회문제를 일으킨다고 생각하는 탈퇴파의 성향이 강하다. 이 분열에 편승해 특히 후자 계층에서의 지지를 둘러싸고 보수당 내의 우파와 좌파, 그리고 영국독립당이 정쟁을 벌이게 된 것이다. 캐머런 총리는 극단적인 국민투표 방식을 통해 영국민은 EU 잔류를 희망하고 있음을 대내외에 천명하고, 보수당 우파의 반발을 잠재우려고 했다. 그러나 잠잠해질 것으로 보였던 탈퇴파의 목소리는 점점 커져갔다. 비교적 진보적인 정책들을 내는 야당인 노동당의 표밭에서도 탈퇴파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영국의 여론을 EU 탈퇴 쪽으로 몰고 간 정당이 바로 영국 독립당(UKIP)이다. 2006년 당 대표에 취임한 나이절 패러지 대표는 전형적인 포퓰리스트다. 직접 시민들에게 다가가 EU와 이민을 적으로 규정하고 공격한다. 여기에 포퓰리스트 특유의 경쾌함도 갖췄다.

‘미치광이 집단’, ‘숨은 인종차별주의자 정당’ 등으로 불린 영국독립당과 패러지가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돌아보면 이번 국민투표의 경위와 배경을 이해할 수 있다. “보통 시민이 승리했다.” “독립국가, 영국에 태양이 떠올랐다.” 탈퇴파의 승리가 확정된 6월 24일 아침, 영국독립당의 패러지 대표는 의회 앞 광장에서 이렇게 열변을 토했다.

“내가 EU 탈퇴운동에 참가한 지 25년이 지났다. 첫 하원 선거에서 164표를 얻는데 그쳤던 내가 이번에는 1700만 이상의 표를 모았다.” 그는 브렉시트 국민투표 결과에 대해 “보통 영국인의 승리다. 거대한 은행과 정·재계에 맞서는 국민의 승리”라고 규정했다.

패러지 대표를 둘러싼 지지자들이 영국 국기를 흔들었다. 패러지는 “지금도 여전히 보통 시민과 기존 정치권 사이에 큰 괴리가 있다. 정치인들은 너무 돈이 많다. EU 이민자들의 유입으로 사람들의 생활이 어떻게 변했는지를 이해하지 못한다. 이민문제가 이번 국민투표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강조했다.

영국독립당(UKIP) 포퓰리스트 패러지의 등장


▎영국에 여성 총리가 탄생한 것은 마거릿 대처 이후 26년 만의 일이다. 대처 전 총리가 ‘철의 여인’이었다면 메이 총리는 ‘얼음 여왕’으로 불린다.
분명 이번 국민투표에서 가장 큰 이슈는 이민자 유입 문제였다. 과거 제2차 세계대전 후 부족한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서인도제도 등으로부터 이민을 받아들였던 영국은 결코 반 이민 감정이 강한 나라가 아니다. 대영제국 시절 전 세계에 식민지를 둔 역사를 통해 보더라도 인도계와 파키스탄계, 아프리카계, 아시아계 등 다양한 지역 출신의 이민자 후손들이 함께 생활하고 있다.

이렇듯 이민자에 익숙한 나라인 영국에서 최근 수년 새 이민이 가장 큰 사회문제가 된 것은 2004년 동유럽국가 10개국이 EU에 가입하면서다. EU의 솅겐조약은 역내에서 사람과 물건, 서비스의 자유로운 왕래를 보장한다. 폴란드와 체코, 헝가리, 슬로바키아 등 10개국이 신규 회원으로 가입했을 때 다른 EU 국가들은 대부분 일정기간 유예기간을 설정했다. 그러나 영국은 유예기간을 설정하지 않고 이들 국가의 이민자들을 무제한으로 받아들였다. 국제어인 영어를 쓰는데다 동유럽지역 국가에 비해 임금이 높아 이민자들에게 영국은 매력적인 국가였다.

영국을 찾아오는 이민자는 매년 증가했다. 이민자들은 영국 노동자들이 하기 싫어하는 일들을 대신하고, 저임금으로 열심히 일했다. 동시에 영국인과 마찬가지로 의료와 학교, 주택, 공공 서비스의 혜택을 받고 있다. 특히 2008년 세계금융위기 이후 긴축재정 정책을 추진하는 영국에서는 공공서비스 비용이 삭감돼 생활이 힘들어진 국민들은 EU 이민자들에 대한 반발이 강해졌다. 저임금으로 일하는 이민자들이 국내 임금수준을 더 낮추고 있다는 불만도 제기됐다.

“이민자가 늘어서 생활을 점점 어려워지는데 정치인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영국인들의 불만에 기존 정당은 좀처럼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사람과 물건, 서비스가 자유롭게 왕래하는 EU의 대원칙을 무너뜨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더군다나 이민에 대한 부정적인 목소리 자체가 정치권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기성 정치권은 우리 말을 들어주지 않는다”는 국민들의 반정부 감정이 점차 고조됐다.

EU 탈퇴를 요구하는 주장이 그간 하나의 목소리로 모아지지 않은 이유가 있다. 대놓고 이야기할 수 없는 이민문제에 관한 영국인들의 속내다. 영국인들은 인종차별과 관련된 발언을 극히 삼간다. 영국에서 누군가를 사회적으로 매장시키려고 한다면 그에게 인종차별주의자라는 꼬리표를 달면 된다고 할 정도로 영국에서 인종차별은 금기시되고 있다.

그러면서도 영국의 가장 심각한 사회문제를 꼽으라면 누구나 이민문제를 거론한다. “이민자가 쇄도하면서 부동산 가격이 급등했다. 일반인은 주택을 구입할 수 없다”, “병원 진료 예약이 어려워졌다”는 등 불만 내용도 다양하다. 이런 문제들은 신규주택 건설을 막는 경관규제나 국민의료제도가 원칙적으로 무료이기에 벌어지는 측면도 있다. 반드시 이민자 증가를 원인으로 꼽을 수만은 없다. 하지만 “이민이 우리의 생활을 압박하고 있다”는 견해가 설득력을 얻고 있는 게 현실이다.

영국인들이 꼽는 가장 큰 문제가 바로 EU 역내의 인간의 자유로운 이동이다. 영국 정부 통계국에 따르면 전체 인구 약 6000만 명인 영국에는 2014년 말 현재 300만 명의 EU 시민이 거주하고 있다. 이중 200만 명이 2004년 이후 영국에 정착한 이들이다. 2015년 한 해 동안 증가한 순 이민자수(출국한 사람과 입국한 사람의 차이)는 약 33만 명. 이중 18만 명이 EU 시민이다. 순 이민자수는 매년 증가추세다.

특히 2004년 회원국으로 가입한 폴란드와 2014년까지 이민규제가 이뤄졌던 루마니아와 불가리아(2007년 가입)와 같은 동유럽 이민에 대한 경계심이 특히 강하다. 그들이 영국인의 일자리를 빼앗고, 공공서비스를 압박한다고 여기는 것이다.

캐치프레이즈는 ‘반(反) 이민’, ‘EU탈퇴’


▎브렉시트 국민투표를 앞두고 영국 국민은 크게 양분돼 있었다. 최종 결과 발표 전 1면에 ‘분열된 나라(A nation divided)’라는 제목을 게재한 영국 신문.
영국의 기성 정치 시스템에서 영국독립당의 존재는 크게 이목을 끌지 못했다. 이민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을 갖는 것은 식자층이나 기성 정치권에서 보면 ‘다양한 가치관을 인정하는 영국’의 상식에서 벗어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때 영국인들에게 “이민자들을 꺼리는 그 마음 안다. 어떻게든 해보겠다”며 손을 내민 정당이 영국독립당이다. EU를 탈퇴해 무제한으로 입국하는 EU 이민자들의 유입을 막겠다는 공약을 내걸었다.

영국독립당의 결성은 1990년대로 거슬러올라간다. 91년 마스트리히트 조약에 반대하는 런던 스쿨오브 이코노믹스의 앨런 스케드 교수가 설립한 ‘반연방주의동맹’이 모체다. 93년에 지금의 영국독립당으로 이름을 바꿨다. 영국독립당은 유럽의회와 지방의회에서 의석을 냈지만 하원의원 선거에서는 번번이 고배를 마셨다. 패러지 대표도 1997년 유럽의회 선거에서 당선, 지금까지 유럽의회 의원신분을 유지하고 있다.

패러지는 당 대표에 취임하면서 ‘EU 탈퇴’라는 하나의 이슈를 잡았다. 그리고 이민자를 줄이고 감세 등 보수정당이 낼 만한 정책들을 내놓기 시작했다. 당시 캐머런 보수당 대표는 영국독립당을 “이상한 모임, 미치광이집단, 숨은 인종차별주의자 정당”이라고 불렀다. ‘이민자를 줄인다=인종차별주의자’로 해석한 것이다. 다양한 인종이 공존하는 영국에서 ‘인종차별주의자’는 상대방을 모욕하는 가장 강한 표현 중 하나다. 캐머런 보수당 대표가 영국독립당을 비난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패러지는 과거 보수당원이었으며, 이 무렵부터 보수당 우파 세력의 지지를 받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한차례 당 대표에서 물러났던 패러지는 2010년 또다시 당 대표에 복귀했다.

선거를 통해 확인된 사실은 영국독립당 지지층이 백인이며, 교육수준이 낮은 블루컬러 노동자 계층이라는 것이다. 영국독립당은 더욱 확고한 지지를 받기 위해 국정운영보다는 지방의회에서의 의석 확보에 주력하기 시작했다.

영국독립당 지지자들은 이번 국민투표에서 탈퇴에 투표한 계층이다. 기성정치권에 반발하고 있으며, 노동당의 오랜 지지계층이기도 하다. EU로부터 몰려오는 이민자들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는 이들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보수당 우파(교육 수준이 높은 부유층)에도 영국독립당 지지자가 있었다.

2014년 영국독립당은 지방의회에서 35석을 늘린 163석을 확보했다. 그리고 전국적인 주목을 받게 된 같은 해 5월 유럽 의회선거에서는 11의석을 늘린 24석을 차지했다. 영국에 할당된 총 의석수 73석 중 가장 많은 의석을 차지해 보수당을 누르고 제 1당이 됐다. 브렉시트를 주장하는 정당이 유럽의회에서 제 1당이 된 것은 매우 이상한 일이지만, 영국인들의 반 EU정서가 이 시점에서 이미 확인됐다고 할 수 있다. 다만이 시점에 영국이 정말로 EU를 탈퇴할 것이라는 상상은 그 누구도 하지 못했다.

야당인 노동당 내에서도 영국독립당을 지지하는 여론이 확산됐다. 영국독립당을 라이벌로 적대시한 정당이 보수당이었는데, 이 무렵 보수당 소속 의원 2명이 영국독립당으로 당적을 옮기는 ‘사건’이 발생했다. 진보파인 캐머런으로서는 반EU 감정이 강한 대처 전 총리를 신봉하는 당내 우파 장로들의 압박을 더욱 받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2015년 총선거를 앞두고 캐머런은 “보수당이 단독 과반 정권을 확보하면 EU 탈퇴를 묻는 국민투표를 하겠다”고 선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여당 내 우파의 불만세력을 누그러뜨리고 세력을 키우고 있는 영국독립당의 지지층을 무너뜨리기 위해 ‘브렉시트 국민투표’ 카드를 만지작거리는 전략이 유효하다고 판단했다. 예상대로 캐머런은 지난해 총선에서 승리했고, 보수당은 예상 밖의 압승으로 정권의 임기를 늘릴 수 있었다. 동시에 국민투표가 공론화됐고, 찬반양론을 가열시켰다.

여성 총리 메이, 메르켈 총리 등과 브렉시트 협상


▎브렉시트의 또 다른 주역인 보리스 존슨 전 런던시장은 7월 13일(현지시간) 테리사 메이 총리에 의해 신임 외무장관으로 지명됐다. 사진은 지난 5월 데이비드 캐머런 당시 총리가 존슨 전 시장의 브렉시트 지지 연설을 듣는 모습.
한창 주가를 올리던 영국독립당이지만 2015년 5월 총선에서 1석을 차지하는데 그쳤다. 패러지 대표도 낙선했다. 영국 하원선거는 비례대표제 없이 650석 전원을 소선거구로만 뽑는다. 한 표라도 많이 얻는 후보가 승리하는 시스템이다. 독립당 후보들은 390만 표(전체의 13%)를 얻고도 단 1석을 확보하는 데 그치는 불운을 맛봐야 했다. 950만 표(30%)의 노동당이 232석을 확보한 것과 비교하면 패러지 대표가 ‘승자독식’ 선거시스템을 강하게 비난할 만하다. 패러지는 “국민의 군대(People’s army)가 많이 동원됐는데도 1개 의석밖에는 얻지 못했다. 지금의 선거 시스템이 얼마나 비민주적인지를 보여주는 사례”라고 주장했다.

패러지 대표의 낙선을 놓고 기성 정당과 유명 칼럼니스트들은 “역시 영국독립당은 별 볼일 없다”는 식의 평가를 했지만 독립당을 지지한 390만 명의 유권자는 영국 선거 시스템에 의문을 품게 됐다. 패러지 대표는 국민투표 캠페인 기간에 시리아 난민이 대거 유럽으로 향하는 사진에 ‘Breaking Point(한계점)’이라는 단어를 표기한 포스터를 제작해 활용했다. 전쟁을 피해 시리아에서 도망쳐 나온 사람들이 유럽을 가득 메운다는 메시지였다. ‘잔혹하고 비정한 처사’라는 비난에도 불구하고 EU 반대파에는 강한 인상을 남긴 장면이었다.

패러지와 함께 브렉시트 운동을 이끈 또 한 사람이 보리스 존슨 전 런던시장이다. 런던시장을 연임하고 런던올림픽을 성공시킨 장본인이기도 하다. 차기 총리로까지 거론됐던 그는 브렉시트의 후폭풍으로 보수당 대표 경선에 불출마를 선언했다. 캐머런 총리와는 이튼 스쿨과 옥스퍼드 대학 동문인 엘리트다. 미국 뉴욕에서 태어났고 벨기에 브뤼셀에서 자랐다. 그의 아버지는 EU 집행위원회에서 일했고 유럽의회 의원을 지냈다. 그 자신은 <더타임스> <텔레그래프>에서 기자로 일하다 2001년 정계에 입문했다. 남동생도 그처럼 보수당 의원이다. 이번 국민투표에서 그를 제외한 가족들은 모두 잔류에 표를 던졌다. 평소 튀는 언동으로 ‘영국판 트럼프’라는 별명을 얻었다.

존슨은 브뤼셀 특파원 시절 EU의 관료주의를 비난하는 기사를 연일 쓴 것으로 유명하다. 그가 구사했던 것이 소위 말하는 ‘싱글 이슈 저널리즘’이다. “EU는 콘돔 사이즈까지 통일시킨다”, “EU가 무선청소기의 흡입력도 규제할 것”이라는 사실무근의 기사들을 스캔들처럼 연일 써댔다. 그가 쓴 많은 기사가 사실과는 거리가 있다는 비난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단순 명료한, 알기 쉬운 기사로 화제가 됐다. 그의 EU에 대한 부정적인 기사 스타일은 훗날 영국언론들이 쓴 반 EU 기사의 교과서가 됐다.

패러지 대표의 부인은 독일 출신이다. 그가 자신을 가리며 “결코 반유럽주의자가 아니다”라고 주장하는 근거다. 영국의 브렉시트를 성사시킨 영국독립당의 다음 행보는 무엇일까. 패러지 대표는 승리선언 연설에서 “반EU 정서를 다른 유럽 국가로 확산시키고 싶다. 프랑스와 이탈리아 등 국민투표를 원하는 국가는 더 있다”고 밝혔다.

영국 집권 보수당은 테리사 메이 내무장관을 새 총리로 세웠다. ‘철의 여인’ 마거릿 대처가 1990년 총리에서 물러난 지 26년 만에 다시 등장한 여성총리다. 메이 신임 총리는 영국의 EU 잔류파다. 그는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 등 EU 지도자들과 브렉시트 협상을 벌이게 된다. 패러지 대표는 최근 데일리 <텔레그라프>와의 인터뷰에서 “EU 탈퇴협상을 할 새로운 총리 체제하에서 보수당 정권에 어떤 형태로든 협력하고 싶다”고 말했다. 영국 정계에서 영국독립당이 지금 이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것임에는 틀림없다.

- 박소영 국제부장 park.soyoung@joongang.co.kr

201608호 (2016.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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