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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교연구] ‘거인(巨人)’ 안중근 vs 창조된 캐릭터 사카모토 료마 

모두가 버거워하는, 시대를 앞서간 두 인물 

유민호 월간중앙 객원기자·‘퍼시픽21’ 디렉터
후학 양성, 무력(총) 중시, 비즈니스를 통한 대의 추구 등 삶의 궤적 닮은꼴… 석탄 사업가 안중근, 일본 최초의 주식회사 설립자 료마가 꿈꾼 혁명은?

▎(왼쪽)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안중근 의사를 담은 엽서. 무명지 절단은 암살을 맹약하는 오랜 관습이다 . / (오른쪽)일본 메이지유신의 산파역인 사카모토 료마는 내년에 사후 150주년을 맞이한다 .
1853년 6월 3일, 현재의 도쿄(東京)인 에도(江戸) 앞 바다에 미국 페리 제독의 흑선(黒船)이 등장한다. 당시 일본 배의 경우 아무리 커도 10m를 넘기지 못했다. 흑선은 쇠로 만들어진 것은 물론, 30m 길이에다 증기 동력을 갖춘 전천후 기선이다. 1842년 난징(南京)조약 이후 중국이 외세에 넘어갔다는 얘기는 일본인 모두가 알고 있던 구문(舊聞)이다.

중국에 이어 일본이 서양의 식민지가 될 것이란 소문이 퍼져나가면서 열도 전체가 패닉 상태에 빠진다. 대혼란을 통해 얻어진 결론은 천황이다. 도쿠가와(徳川) 막부정권이 가진 실권을 교토(京都)에 머물던 천황에게 집중시켜 외세에 대항하자는 발상이다. 이른바 존왕양이(尊王攘夷) 운동으로, 이후 메이지유신(明治維新)으로 진화된다. 1868년, 막부정권이 넘어가고 메이지 천황이 최고 실권자로 등장한다. 천황을 중심으로 한 정치·경제·사회·문화 각 분야에서의 경천동지할 변혁이 한순간에 이뤄진다. 1876년 조선에서 이뤄진 강화도조약은 메이지유신으로 단련된 일본 근대화의 첫 번째 외교 작품에 해당된다.

일본 역사상 첫 신혼여행을 떠난 신식 남성


▎도쿄 긴자의 토산품 가게 앞에 전시돼 있는 료마의 조형물. 일본식 복장이지만 게다가 아닌 구두를 즐겨 신은 신식 남성이 료마다.
한국·일본 두 나라의 근대사는 제로섬게임에 해당된다. 일본이 세계로 나서는 동안, 한국의 추락과 비극은 끝없이 이어진다. 일본의 군사·경제력이 태평양으로 확대되는 동안 한국의 고통과 수난은 전 세계 모두로부터 철저히 잊혀진다. 일본이란 나라의 햇빛이 세상을 비추는 동안 한국의 현실은 앞을 볼 수 없는 암흑시대로 점철됐다. 그 같은 역사는 1945년 8월 15일까지 이어진다. 한국인에게 8월 15일이 광복절, 즉 빛을 찾은 날이라 불리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한·일 근대사를 연구하는 사람치고 메이지유신에 주목하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왜일까? 일본은 독자적·주체적 입장에서 근대화에 성공할 수 있었는데, 왜 한국은 자력이 아닌 식민지 체제로 20세기를 맞이해야만 했던가? 메이지유신은 그 같은 질문에 대한 궁극적인 답 중의 하나다.

민족주의 관점에 선 사람이라면, 제국주의 일본의 무력 때문에 한국의 주체성이 상실됐다고 말할 듯하다. 틀린 것은 아니지만, 전부라 보기도 어렵다. 자생적·내재적 근대화 논리도 좋지만, 메이지유신 같은 엄청난 대변혁이 한국 사회에서 찾아보기 어려웠다는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일본 때문에 당했다는 사실도 맞긴 하지만, 일본이 마수를 뻗치기 전에 왜 미리 준비를 못했는가 하는 문제도 좌시할 수 없다. 메이지유신을 연구하고 칭찬한다고 해서 친일이 되는 것도 아니고, 근대화에 무심했던 19세기 한국을 비판한다고 해서 반(反)민족이 되는 것도 아니다. 비교하고 공부하는 자세는 개선·개혁을 위한 전제에 해당된다.

메이지유신을 이야기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은 누구일까? 한국의 경우 각자의 관심사에 따라 다르겠지만, 일본인의 경우 대체로 한 인물로 집약된다. 사카모토 료마(坂本竜馬, 이하 료마)다. 시대의 풍운아로 알려진 료마는, 제자백가 시대라 불러도 좋을 메이지유신 당시 군웅할거의 대표 주자에 해당된다. 임진왜란이라고 할 때 이순신 장군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과 마찬가지다.

료마에 관한 얘기는 일본의 문학·영화·텔레비전·만화·애니메이션 등 문화 전반에 걸쳐 등장한다. 료마에 관한 유물이나 사적·기록 같은 것들은 주기적으로 나타나는 신문·방송의 발굴 기사다. 지난 5월에는 료마가 마지막까지 갖고 있던 진검(眞劍)이 세상에 알려져 화제가 되기도 했다. 시대나 역사 스토리로서만이 아니라, 비즈니스·검도·여행 심지어 연애사와 관련해 등장하는 주인공이 료마다. 료마는 일본 역사상 처음으로 결혼을 기념해 신혼여행을 떠난 신식 남성이기도 하다. 역사책에 등장하는 위인으로서만이 아닌, 시대를 앞서간 핫 트랜드 캐릭터로 받아들여진다.

따라서 료마 스토리는 특별한 시기나 계절에 국한되지 않는다. 47명이 전원 할복 자살하는 추신쿠라(忠臣蔵)의 경우 연말 연초에 등장하는 국민 사극이지만, 료마 스토리는 1년 365일 언제든지 어딘가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대중 엔터테인먼트 중 하나다.

필자의 판단이지만, 일본인이 받아들이는 역사상 인기 스타 1위는 전국시대 당시 3걸인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가 아닐까 싶다. 전국 통일의 기반을 마련한 주인공이면서도 자신의 심복에게 배신당해 혼노지(本能寺) 안에서 불에 타 숨진 비극적 영웅이다. 조선을 침략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와 에도 막부시대를 연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는 바로 노부나가 스스로가 발굴해 키운 ‘잔가지’에 불과하다.

일본인에게 료마는 노부나가에 버금가는 캐릭터로, 역사상 인기 스타 1, 2위를 다투는 인물이다. 노부나가가 그러하듯 료마에 대한 국민적 관심은 인간적 매력에서 비롯된다. 후보자 가운데 함께 맥주를 나누고 싶은 사람은? 미국 대통령 선거 캠페인 기간 동안 나타나는 인기도 측정지수 중 하나다. 얼마나 훌륭하고 위대한지가 아니라, 보통사람들이 쉽게 이해하고 따를 수 있는 인간적 매력에 관한 질문이다.

15세기 노부나가와 더불어 19세기 료마는 그 같은 질문에 대한 답으로 가장 먼저 등장하는 인물이다. 국사(일본사)에 관한 부분만이 아니라, 친구·남성·청년으로서 함께 얘기하고 싶은 캐릭터가 료마다. 21세기 문제를 논의할 때도 ‘과연 료마라면?’이란 가정 아래 얘기를 풀어나간다.

시바 료타로, 료마를 발굴·데뷔시키다


▎사무라이의 상징은 칼이다. 료마는 칼을 버리고 총과 대포 군함으로 서방을 상대해야 한다고 믿은 사무라이다.
료마에 관한 얘기를 꺼낸 이유는 올해 일본 문학계의 최대 이벤트 중 하나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일본 곳곳에서 열리고 있는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郎) 사후(死後) 20주년 기념회가 주인공이다. 시바 료타로는 토지의 박경리와 같은 대하(大河) 역사물 작가에 비견될 수 있을 듯하다. NHK를 비롯한 일본 방송과 신문은 시바 료타로 사상이나 문학세계에 관한 특별 이벤트를 연중기획 시리즈로 내보내고 있다.

잘 알려져 있듯이 시바 료타로는 메이지 유신을 전후한 일본 근대사와 전후 일본의 모습과 방향에 관한 글을 남겼다. 양적으로 엄청나다. 1996년 이후 20년이 흘렀지만, 아직까지도 미발표 원고가 발굴되고 있다.

료마와 시바 료타로와의 접점은 <료마가 간다(竜馬がゆく)>라는 장편시대소설에 있다. 1962년 6월부터 1966년 5월까지 신문에 연재된 글로, 이후 8권으로 완간된 역사소설이다. 역사적 사실에 기초를 하되, 상상력을 동원해 료마의 캐릭터를 극적으로 재구성한 글이다.

필자 주변의 일본인 친구 가운데 시바 료타로의 소설을 읽지 않은 사람은 극히 드물다. 한국에도 번역됐기 때문에 50대 이상이라면 한 번쯤 들어봤거나 접했던 소설일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료마라는 인물에 관한 이미지와 캐릭터의 출발점에 관한 부분이다. 결론적으로 얘기하자면, 료마라는 인물은 시바 료타로 소설에 의해 탄생된 새로운 캐릭터라는 사실이다. <료마가 간다>라는 소설이 탄생되기 전까지만 해도 료마는 19세기 등장했던 수많은 지사(志士) 중 한 명에 불과했다. 시바 료타로는 ‘제자백가 중 한 명’에 그치던 료마를 발굴해 데뷔시킨 작가다.

따라서 료마가 메이지 근대사의 영웅으로 등장한 것은 1970년대다. 일본이 고도성장기에 들어서고 자신감을 회복하던 시기에 등장한 신일본인 캐릭터인 셈이다. 19세기 나타난 청년 지사에 대한 시바 료타로의 작가적 집념과 상상력의 결과가 료마 탄생의 배경이다. 시바 료타로 사후 20주년 기획 시리즈와 관련해 료마의 이름이 빈번하게 등장하는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다.

암살은 료마를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다. 1836년 1월생인 료마는 1867년 12월 10일, 교토의 허름한 간장 판매소 2층 건물에서 암살된다. 만 31세 때다. 오우미야(近江屋)사건으로 알려진, 일본 역사상 가장 유명한 암살 스토리 중 하나다. 주목할 부분은 암살자가 누구인지는 149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베일 속에 가려져 있다는 점이다. 여러 가지 추측이 있지만, 그 모두로부터 암살 위협을 당하면서 살아간 시대의 선구자가 바로 료마라는 것이다.

기원전 4세기 고대 그리스 문학가 메난드로스(Menan dros)는 자신의 희곡에서 “신이 사랑하는 사람은 일찍 세상을 떠난다(Those whom the gods love die young)”라고 말했다. 료마만이 아니라 인류역사를 앞으로 끌고 간 수많은 인물의 공통점 중 하나로 ‘조사(早死)’가 떠오른다. 파란만장한 삶과 더불어, 세상과 일찍 연을 끊은 비극적 풍운아의 궤적이 바로 료마를 19세기 최고 인기스타로 만든 가장 큰 이유가 아닐까?

료마 암살의 배경은 여러 가지 설로 풀이된다. 그 결론은 모두가 버거워하는, 시대를 너무 앞서간 인물이란 점으로 귀착된다. 거목이 대지 한가운데 뿌리박고 있을 경우 다른 잡목들이 들어설 틈이 없다. 사실 료마는 메이지유신을 목격하지 못한 채 세상을 뜬다. 메이지유신의 기점이 되는 메이지 천황의 원년(元年)은 1868년 10월 23일이다. 료마가 암살되고 나서 10개월 뒤 메이지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료마는 메이지유신의 1등공신으로 받아들여진다. 왜일까? 막부체제를 무너뜨리고 메이지 천황 구도로 전환될 당시 결정적인 역할을 한 두 사건의 주인공이 료마이기 때문이다. 1866년 3월의 삿초동맹(薩長同盟)과 1867년 11월의 대정봉환(大政奉還) 두 사건이 그 전환점이었다.

메이지유신의 핵, 삿초동맹과 대정봉환


▎료마는 사진찍기를 좋아했다고 한다. 암살 직전에 찍은 것으로 알려진 료마의 마지막 인물 사진.
삿초동맹은 막부의 권위와 무력을 추락시킨 사건으로, 사츠마(薩摩)와 초슈(長州) 사이의 군사동맹을 의미한다. 지도로 보면 사츠마는 규슈(九州)지방 최남단으로, 현재의 가고시마(鹿児島)현이다. 초슈는 현재 혼슈(本州) 서쪽의 야마구치(山口)현에 해당한다.

삿초동맹은 당시 적대관계에 있던 두 현을 반(反)막부 동맹으로 전환시킨 대사건이다. 사츠마는 원래 막부를 지지하던 온건파 개혁의 중심에 해당된다. 초슈는 반(反)막부 세력의 중심으로, 무력을 통한 천황제 옹립을 주창했다. 막부는 사츠마를 통해 규슈 정벌을 명한다. 료마는 사츠마의 규슈 공격을 중단시키고, 나아가 반막부 천황제 옹립을 근간으로 하는 삿초동맹을 창조해낸 중재자다. 물과 기름의 관계이던 사츠마, 초슈를 화해시킨 것은 물론, 반막부 동맹으로 전화시킨 일등공신이 바로 료마다.

대정봉환은 료마가 암살되기 한달 전인 1867년 11월 이뤄진 일본 근대사의 쾌거 중 하나다. 삿초동맹으로 인해 막부의 힘과 권위가 땅에 떨어지면서 막부 스스로가 천황에게 전권을 넘긴 사건이다. 에도막부 15대 쇼군(將軍)인 도쿠가와 요시노부(徳川慶喜)가 자신의 모든 실권을 메이지 천황에게 자진헌납한 것이 대정봉환의 핵심이다. 천황파와 막부파로 갈려 일본 전국이 내전 직전까지 간 것이 대정봉환이 이뤄질 당시의 상황이다.

세계 역사를 보면, 체제 전환 당시 나타나는 공통점으로 ‘엄청난 피’를 무시할 수 없다. 프랑스혁명이나 러시아혁명처럼 자신의 왕을 처형한 극단적인 변신이 아니라 하더라도, 구체제와 신체제 사이의 갈등은 평범한 사람조차도 피의 역사로 몰아세운다.

일본 근현대사는 그 같은 피의 역사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나라다. 260년 막부정권이 ‘비교적’ 평화롭게 천황제로 전환됐기 때문이다. 대정봉환 이후 친막부파에 의한 반란도 일어나지만, 대세는 이미 천황에게로 기운다. 톰 크루즈가 주연한 영화 <라스트 사무라이>는 당시의 극적인 상황을 그린 작품이다. 천하를 호령하던 막부는 하루아침에 관군에서 반군으로 바뀐다. 12·12 사건 이후 한국에서도 유행을 했지만, ‘이기면 관군, 지면 역적(勝てば官軍,負ければ賊軍)’이란 말도 대정봉환을 전후해 유행한다.

대정봉환을 둘러싼 료마의 역할은 절대적이다. 대정봉환 기획안을 만든 주인공이 료마이기 때문이다. 료마는 막부 측에 천황제로 갈 경우에도 생존과 권력 유지가 가능하다고 말한다. 일단 전권을 넘긴 뒤, 이후 천황의 이름으로 간접 통치할 수 있다는 의미다. 무력을 앞세운 초슈의 반대로 결국 막부의 권력 장악 시도는 무위로 끝나게 된다. 결과적으로 대정봉환은 무혈에 의한 정권이양이 된다. 삿초동맹과 대정봉환을 통한 천황제 확립은 료마가 아니면 그 누구도 할 수 없었던 메이지유신의 핵에 속한다.

그러나 료마는 엄청난 두 사건이 마무리될 순간에 암살된다. 역사를 창조해낸 일등공신으로 새로운 시대를 위한 꿈을 실현시키려는 바로 그 순간에 세상을 떠난다.

료마의 배경, 즉 출신 성분은 료마를 근대화 당시 최고의 스타로 통하게 만드는 이유 중 하나다. 한국식으로 말하자면, 료마는 금수저나 갑이 아닌 흙수저에다 을의 위치에 서 있다. 하급 사무라이 출신이기 때문이다. 료마의 고향은 투견으로 유명한 토사견의 도시로, 에도시대 당시 남부지역인 토사(土佐)다. 토사견이 그러하듯 강하고 끈질긴 것이 토사 출신 남성의 특징이다. 현재는 규슈 바로 위에 붙은 시코쿠(四國)의 고치(高知)현에 해당된다.

토사는 상급 사무라이와 하급 사무라이의 벽이 심한 곳이다. 나무로 만든 신발인 게다(下駄)는 일본인의 이미지 중 하나다. 원래 게다는 상급 사무라이만이 신을 수 있는 신분의 상징이다. 료마는 게다가 아니라, 짚신을 신어야만 하는 중·하급 정도 신분에 불과하다. 그 같은 신분의 벽을 피해, 26세 때이던 1862년 3월 이동허가증 없이 에도로 떠난다. 당시 무단이탈은 사형에 처해질 만한 중죄였다.

일본 최초의 국제 비즈니스맨


▎흑선을 통해 무력시위를 한 미국은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은 채 도쿄에 상륙한다. 사무라이를 중심으로 한 여론은 막부를 매국노라고 불렀다
에도와 료마와의 인연은 그가 17세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검도 수련을 위해 간 것이다. 숙명적인 조우라 볼 수 있겠지만, 난생 처음 타향생활을 하는 동안 에도 앞바다에 뜬 흑선을 목격한다. 변화에 가장 민감한 나이에 서방의 힘과 일본의 한계를 목격하게 된다.

이후 고향으로 돌아오지만, 토사는 더 이상 료마의 꿈과 이상을 보듬어주지 못했다. 평생 2류 인간으로 살기보다 새 시대를 위한 삶을 위해 에도로 다시 떠난다. 이후 료마가 암살되기까지 4년 9개월 동안 일본 전역을 오가며 역사 무대의 한복판에 서게 된다. 고향을 등진 흙수저 을의 입장이지만, ‘천황을 중심으로 한 강한 일본’이란 자신의 신념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친다.

토사를 떠난 료마가 정착한 곳은 현재의 고베(神戸)다. 1864년 5월 막부 이름으로 세운 해군조련소(海軍操練所)가 주무대다. 료마는 해군력이야말로 국력의 원천이라고 믿었다. 해군제일주의 논리는 10대에 본 흑선의 위력과 더불어, 태평양을 눈앞에 둔 고향에서의 기억에 기초한 당연한 상식이다.

배를 만들고 군사력을 키울 수 있는 구체적인 지식과 지혜를 얻기 위해 막 출범한 해군조련소에 들어간다. 고베 해군조련소는 원래 막부의 자금에 의해 세워진 곳이다. 그러나 내면으로 들어가면 반막부 존왕파의 중심지로 자리 잡는다.

우여곡절 끝에 세운 지 1년 만인 1865년 문을 닫게 되지만, 료마는 현장에서 얻은 지식과 경험을 곧바로 재활용한다. 해군조련소를 떠나는 순간, 일본 최초의 주식회사라 불리는, ‘가이인다이(海援隊)’라는 사설 영리조직을 결성한다. 자금은 사츠마의 실력자들이 제공된다. 료마의 지식과 경험을 높이 샀기 때문이다. 종합상사 형태의 조직으로 발전된다. 료마는 총사장에 해당되는 가이인다이 대장이다. 무역, 투자, 수입, 출판, 간척, 교육, 증기기관차 기술 개발, 우편 등 거의 모든 사업에 손을 댄다. 무기 수입도 그중 하나이다.

지사로서의 료마는 일본 최초의 국제 비즈니스맨으로서 통한다. 세계지도를 보면서 장사를 하는, 실무형 비즈니스 감각을 통해 일본 개혁에 나선 것이다. 료마의 업적인 삿초동맹과 대정봉환은 그 같은 비즈니스 거래를 통해 얻게 된 전국적 네트워크의 결과물이기도 하다.

원래부터 존왕파로 막부 타도에 앞서지만, 비즈니스를 통해 돈과 인맥을 쌓아가면서 세력을 확장해나간다. 영국에서 최신 무기를 수입해 사츠마와 초슈에 공급하는 과정에서 지역 내 최고실권자와 만나 허심탄회하게 얘기를 나눌 수 있게 된다. 사츠마와 초슈에서의 영향력을 발판으로 막부 중심부까지 영향력을 넓히게 된다.

암살당하기 직전 료마의 인적 네트워크는 메이지유신의 핵심 인물들로 채워져 있다. 간단히 말해 료마를 통할 경우 일본 최고 실력자와 지사 모두에게 통할 수 있게 된다. 가이 인다이 대장은 암살될 당시 료마가 갖고 있던 공적 타이틀이기도 하다. 지사로서가 아니라, 비즈니스에 특화한 장사꾼의 얼굴이 료마의 진짜 모습인지 모른다.

대동아전쟁은 비즈니스를 통한 이익 극대화 전쟁


▎조선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중국 하얼빈역에서 안중근 의사에 의해 피격되기 직전의 모습
비즈니스에 기초한 관계나 인적 네트워크는 일본 역사를 공부할 때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중요한 ‘상수’다. 유교 국가인 한국의 경우 거대담론이나 대의명분을 논할 때 비즈니스와 분리하는 경향이 강하다. 비즈니스가 들어가면 공사간 혼돈이 생길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일본의 경우는 조금 다르다. 비즈니스를 통해 서로간의 물적 기반을 튼튼히 한 상태에서 ‘큰일’에 나서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제2차 세계대전을 보자. 일본에서 제2차 세계대전은 두 개의 이름으로 나뉘어져 있다. 태평양전쟁과 대동아전쟁이다. 미국을 상대로 한 것이 태평양전쟁, 아시아권을 대상으로 한 것이 대동아전쟁이다.

여담이지만, 일본 우익은 태평양전쟁은 졌지만, 대동아전쟁에서는 결코 지지 않았다고 강변한다. 제2차 세계대전은 만주와 중국을 발판으로 한 대동아전쟁에서 시작됐다. 태평양전쟁은 대동아전쟁에 반대하는 미국을 잠재우기 위해 벌어진 것이다. 1941년 12월의 진주만 기습공격은 태평양전쟁의 출발점이다.

주목할 대목은 대동아전쟁의 의미다.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필자가 보면 비즈니스가 대동아전쟁의 키워드에 해당된다. 시골 출신 군부와 독점적 자본축적에 나선 재벌이 벌인, 군경(軍經) 유착관계가 바로 대동아전쟁의 배경에 있다. 군부가 아시아 지역 점령에 나서는 순간 곧바로 따라 나선 곳이 재벌들이다.

예를 들어, 괴뢰정권 만주국을 보자. 군부와 재벌이 주인공이다. 군부를 대표하는 육군 관동군의 무력을 바탕으로, 재벌을 대표하는 만주철도와 만주공업지대가 만주국의 양대 산맥이다. 촌놈 군부의 허세를 뒷받침해주는 ‘돈’이야말로 일본이 전쟁에 돌입하게 된 이유 중 하나다. 대동아공영론과 같은 거창한 슬로건이 아니라 비즈니스를 통한 이익 극대화 역사야말로 일본사 이해의 첩경이라 볼 수 있다.

아무도 상대해주지 않는 하급무사 료마가 막부와 지방 실권자와 직접 담판에 나설 수 있게 된 것은 바로 돈의 관계에서 비롯된 것이다. 메이지유신을 만들어낸 지사 료마가 일본 최초의 주식회사 창설자라는 것은 우연이 아니라 필연에 해당된다.

안중근은 한국 근대사를 통틀어 료마와 가장 비슷한 이미지의 인물이다. 한국사에서 안중근은 조선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저격한 영웅에 해당된다. 일본을 적대시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공존공영할 대상으로 받아들이는 동양 평화론과 같은 사상을 창조해낸, 세계사적 차원에서 한국의 변화를 모색한 시대의 선각자로도 통한다. 필자가 주목하는 부분은 지사·의사·열사로서의 안중근에 한하지 않는다. 민족의 이름으로 적의 우두머리를 처단한 의사 안중근이란 점이 주된 관심사는 아니다. 하얼빈(哈爾濱)에서 이토를 쓰러뜨린 ‘의사 안중근’이 아니라, 시대를 고민하던 평범한 인간의 고독한 삶의 흔적이 관심 영역이다. 암살되기 전까지의 료마의 행적과 겹치는 부분이 너무도 많기 때문이다.

이승만, 김구, 안중근의 고향 황해도 해주


▎중국 여순 감옥에서 옥중 유언을 남기는 안중근 의사.
먼저 주목할 부분은 안중근의 고향인 황해도 해주다. 황해도 해주는 한국 근현대사의 중심처럼 느껴진다. 한국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과 상하이(上海) 임시정부 수반인 김구도 황해도 해주 출신이기 때문이다. 이승만이 1875년, 김구는 1876년, 안중근은 1879년 황해주 해주에서 태어난다. 세 사람 모두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지만, 삶의 마지막도 극적이다. 이승만은 하와이 망명, 김구는 암살, 안중근은 사형이다. 각자의 삶의 궤적은 달라도, 세 사람의 공통점은 근대화에 뒤처진 조선을 똑바로 세워 번듯한 나라로 만들자는 부분에 있을 듯하다. 안중근은 그 같은 일념으로 모든 것을 던진 사람이지만, 셋 가운데 가장 먼저 세상을 뜬다.

안중근의 고향을 료마에 연결시킨 이유는 황해도 해주와 료마의 고향 토사가 갖는 공통점 때문이다. 황해도 해주는 중국과, 토사는 태평양을 뛰어 넘어 미국과 대면하는 바다의 도시다. 외세가 밀려오던 당시의 상황을 감안하면 해주와 토사는 외부의 변화에 가장 민감하게 대응한 지역이라 볼 수 있다. 안중근은 1879년생, 료마는 1836년생이다. 두 사람의 시대적 배경은 43년 차(差)에 이른다. 한 세대를 뛰어넘은 긴 시간이지만, 당시 세계를 대하는 한·일간 세계관이나 환경을 고려할 때 두 사람의 활동 시기는 거의 동시대처럼 와 닿는다. 안중근과 료마의 청년기는 위기의식과 시대적 사명감으로 점철됐을 듯하다. 바다를 낀 고향은 당시 세계를 대하는 두 사람의 상황인식을 한층 더 치열하게 만든 주된 요소다.

27세 안중근이 사재를 털어 삼흥(三興)학교와 돈의(敦義)학교를 세운 점도 료마의 행적과 너무도 비슷하다. 고향을 등진 뒤 고베로 달려가 활동한, 28세의 료마가 힘을 쏟은 해군조련소(海軍操練所)가 비교 대상이다. 비록 1년 만에 문을 닫지만, 료마는 조련소 교장에 해당되는 숙두(塾頭)로 있으면서 후학양성에 주력한다. 안중근도 자금난으로 학교운영을 계속하지 못한다. 교육을 통해 한국과 일본이 가진 약점을 극복하자는 것이 두 사람의 공통점이다.

일찍부터 무(武)에 주목한 두 사람의 세계관도 너무도 비슷하다. 안중근은 어릴 때부터 총을 다뤘다. 구식 한문공부보다 총을 들고 사냥을 하는 것을 한층 더 좋아했다고 한다. 료마의 경우 일찍부터 검도 공부에 주목하지만, 고향을 등지면서 가슴에 품고 다닌 것은 스미스왓슨 32구경 6연발 권총이었다고 한다. 암살 당시에도 권총을 갖고 있었지만, 2.5초 만에 이뤄진 두 자객의 기습공격으로 인해 저항조차 하지 못했다. 칼이나 활로 상징되는 전근대적 무기가 아닌, 최신 기술을 통한 방어와 공격만이 자존의 지름길이란 사실을 안중근과 료마는 일찍부터 알고 있었다.

안중근과 료마의 공통점으로 필자가 가장 눈여겨본 것은 비즈니스 부분이다. 료마는 국제무역에 밝은 장사꾼의 얼굴을 한 메이지의 지사다. 안중근은 두 개의 학교를 세운 직후인 28세 때 석탄 비즈니스에 나선다. 장소는 대도시 평양이다. 자금난으로 실패를 하게 되지만, 명분만이 아니라 비즈니스를 통해 대의를 실행하려는 남다른 노력이 돋보인다. 20세기초 중국과 미국에서 활동하던 한국인 독립운동가 가운데 비즈니스에 주목한 사람은 극히 일부분이다. 돈이 아니라, 대의를 생명으로 내세우는 것이 한국 지식인의 특징 중 하나다. 보급선 없이 전선을 확대해가는 식이다. 안중근은 그 같은 종래의 한국적 세계관과 다른 각도에서 근대화 실천에 매진한 실사구시형 인물이다.

안중근은 1910년 3월 26일 사형에 처해진다. 뤼순(旅順) 형무소다. 이토의 사망일자인 26일에 맞춰 사형이 집행된 것이다. 정치범이 아닌, 사적 원한에 따른 살인범으로 처리해 처형된다. 확신범이 저지르는 정치범으로 분류할 경우 사형 언도가 어려울 수도 있기 때문에 단순 살인범으로 몰아간 것이다. 안중근은 마지막까지 자신은 일본과 전쟁을 벌이다 체포된 군사포로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목숨을 구걸하지는 않았다. 법원에서 사형이 선고된 뒤 5일 내로 공소할 수도 있었지만, 아예 포기한다. 살기 위해 일본인에게 손을 벌리기보다 진리와 정의를 실천한 순교자로서 길을 선택한다.

인간 안중근에 관한 다양한 재발견과 재발굴 기대


▎순국 105주년과 광복 70주년을 맞아 지난해 5월 서울 화랑로 육군사관학교에 세워진 ‘안중근 장군’ 동상.
료마는 숨지기 이틀 전 자신의 친구로부터 암살범이 투입됐다는 얘기를 듣는다. “이미 죽음을 각오한 이상 무서울 것이 없다.” 료마가 던진 답이다. 안중근의 수감 행적의 대부분은 일본인을 통해 전해지고 있다. 당시 변론을 맡았던 관선 변호사와 사형 당시 동행한 간수 같은 사람들이다. 당시 안중근을 접한 일본인들은 안중근을 료마와 같은 메이지유신 당시의 지사로 받아들였다고 한다. 비록 이토를 살해한 적이지만, 자국의 독립과 자존을 위한 투쟁은 메이지유신 당시 청년지사들의 대의와 일치하기 때문이다.

내년은 료마 사후 150주년이 되는 해다. 올해 시바 료타로 추모제에 이어 내년에는 료마에 관한 각종 이벤트가 일본 전역에서 진행될 것이다. 앞서 살펴봤듯이 료마는 시바 료타로에 의해 발굴되고 재창조된 신일본의 캐릭터에 해당된다. 이토를 처형한 지사, 동양평화론을 역설한 대사상가가 안중근의 전부는 아닐 것이다. 관련 글을 읽을수록 인간적 매력이 느껴지는, 다시 그 시대로 돌아가 청년 안중근의 고뇌와 의지를 함께하고 싶어지는 인물이 안중근이다. 영웅·의사 이전에, 열심히 세상을 살다 간 고독한 지식인의 얘기를 들어보고 싶다. 인간 안중근에 관한 다양한 각도의 재발견과 재발굴이 앞으로도 계속되길 기대한다.

- 유민호 월간중앙 객원기자·‘퍼시픽21’ 디렉터

201608호 (2016.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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