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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중 교수의 ‘그리스 문명의 결정적 순간’(5)] 디오니소스의 고향, 테베에서 그린 신화 속 영웅들 

인간의 자식 디오니소스는 어떻게 올림포스의 신이 됐나 

김승중 캐나다 토론토대 희랍미술고고학과 교수
태어나기도 전에 부활해 두 번 태어난 비극적인 존재… 나면서 죽음의 절차를 이미 거쳤고, 죽음의 경계에 다시 도전한 인간의 영웅
미래를 바라보는 예언적인 신탁의 신 아폴로가 신성한 기운으로 하늘과 상통하는 반면, 동물적이고 무한정한 본능과 감정을 중요시하는 디오니소스는 술의 힘으로 땅과 교류한다. 그는 미래보다는 죽음과 상통하는 신이다.


▎델피 성역의 윗부분에 위치한 극장은 BC 4세기경에 지어졌지만 로마시대에 이르기까지 계속 사용되고 수리한 흔적이 남아 있다. 바로 밑에 있는 아폴로 신전과 함께 장엄한 협곡을 내려다보고 있다.
바람 한 점 없는 무더운 그리스의 땡볕 아래 주르르 땀방울이 흘러내리는 이마를 닦으며 곡괭이로 퍽퍽, 땅을 능숙한 움직임으로 찍는 학생들을 보며 나는 마음이 뿌듯해진다. 고대 그리스의 전설적인 도시국가 테베 영역의 발굴현장에 토론토 대학(University of Toronto)의 학생들을 데리고 와서 작업을 시작한 지 3주째에 접어들었다. 교수 노릇을 시작한 뒤 처음으로 학생들을 이끌고 발굴작업을 시작하는 터라 나는 무척이나 조마조마했다. 그래서 내가 가르친 그리스 미술 과목을 듣던 학생들 중 활동적이면서 성실한 모범생들만을 골라 팀을 조성했다. 선정된 학부생들이 물론 똑똑하고 공부를 뛰어나게 잘하는 학생들이지만, 실제로는 고고학의 ‘고’자도 모르며, 발굴경험이 전혀 없고, 그리스라는 나라에는 발도 디뎌보지 못한 학생이 대부분이었다.

더군다나 토론토 대학에서는 도서관에 처박혀 공부만 하던 젊은이들한테 새벽 5시 반에 일어나서 매일 땡볕 아래에서 ‘막노동’을 해야 한다는 내 경고는 막연하게만 들렸던 모양이다. 활기찬 얼굴로 현장에 도착한 학생들이 발굴을 시작한 지 일주일이 지난 뒤에 대부분이 울상이 되어버렸다. 온몸이 쑤시고, 허리가 빠지는 것 같고, 손바닥에 물집이 터져 피가 나고, 인생 처음으로 이런 고통을 겪는 것 같다며 나에게 하소연하였다. 그런 학생들을 데리고 그들의 사기를 돋우기 위해 2시간 거리에 있는 아폴로 신전으로 유명한 델피(Delphi)로 견학을 갔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인 델피는 역시 두말할 나위 없이 그리스에서 가장 웅장한 사적 중 하나이다. 외진 파르나소스(Parnassus)의 남쪽 산자락에 자리 잡은 델피는 범그리스적인(pan-hellenic) 성소로 올림피아(Olympia), 코린트(Corinth), 그리고 네메아(Nemea)와 더불어 그리스의 4대 성역으로 꼽힌다. 올림피아에서 개최되는 올림픽 경기(Olympic Games)와 같은 규모의 모든 고대 그리스의 도시 국가가 참가하는 운동경기가 이 네 곳에서 돌아가며 매년 열렸다. 그래서 한 곳에서는 각각 4년마다 한 번씩 행해졌다. 델피의 경기는 아폴로의 신탁에 따라 피티아 제전(Pythian Game: BC 586년부터 4년마다 한 번씩 행해졌다. 혹설에는 BC 582년부터 열렸다고도 한다)으로 불리었다. 지난 번에도 언급했듯이 이러한 성역의 페스티벌에는 드라마와 춤과 같은 공연이 빠질 수가 없었고, 그를 위한 그리스 전형의 극장도 가파른 경사를 이용하여 대담하게 협곡을 바라보게 지어졌다.

땅의 ‘배꼽’ 옴팔로스(Omphalos)를 지키는 괴물 피톤(Python: 대지의 여신 가이아Gaea의 자식)을 물리친 아폴로 신을 숭배하는 델피 성소는 물론 그의 신탁(Delphic oracle)이 가장 유명했고, 아폴로 신탁을 전달하는 여사제를 피티아(Pythia)라고 불렀다. BC 7세기경부터 로마시대에 이르기까지 대대로 아폴로 신전의 사제로 신탁을 전달하는 확고한 역할을 한 피티아는 일종의 무당이다. 환각작용을 일으키는 김을 들이마시고 신들린 상태에서 모호한 시적인 구절을 전달했다고 추정된다.

“그대가 강을 건너면 위대한 제국이 멸망할 것이다”


▎그리스의 테베 근처 발굴작업을 하는 토론토 대학 학생들의 모습. 테베의 영역에 출입하기 위해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풀어야 했다는 오이디푸스를 떠오르게 한다.
델피의 신탁은 고대 그리스 역사상 절대적으로 인정되었으며 수많은 고대 그리스의 문헌에 유명한 델피 신탁의 예들이 전해진다. 그중 제일 잘 알려진 일화로서는 헤로도토스(Herodotos)가 전하는 소아시아 국가 리디아(Lydia)의 왕 크로이소스(Croesos, BC 595∼546)의 이야기가 있다. 델피 신탁이 가장 정확하고 권위가 있다고 판명한 크로이소스는 페르시아 제국을 침략하기 전에 피티아한테 신탁을 청구하였다고 한다. 그의 대답은 “그대가 강을 건너면 위대한 제국이 멸망할 것이다”이었고, 이를 긍정적으로 해석한 뒤 페르시아를 침략한 크로이소스는 처절한 패배를 겪는다. 결국 그 ‘위대한 제국’은 페르시아가 아닌 바로 크로이소스의 왕국이었던 것이다!

우리가 그동안 살펴본 신화의 이야기 중에서도, 델피 신탁의 중요성을 입증하는 헤라클레스의 일화가 수많은 조각상과 도기화로 표현돼 있다. 이 이야기는 헤라클레스가 신탁을 청구하고 거절당했을 때 분에 차서 델피 신탁의 상징인 삼각대(Delphic Tripod)를 훔치려다 아폴로에게 들키고 나서 삼각대를 놓고 싸우는 장면인데, 잘 살펴보면 바가지 엎은 모양의 옴팔로스가 헤라클레스 발 밑에 보일 것이다. 이는 바로 델피가 배경이라는 것을 나타내고, 과감한 헤라클레스는 올림포스의 신과 대면해서 싸우는 엄청난 휘브리스(hubris)를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비록 제우스신이 이 싸움을 말려야 했고, 헤라클레스는 결국에 옴팔레 여왕(Queen Omphale)의 종으로 들어가야 하는 벌을 받았지만, 우리는 또한 신을 거역하는 헤라클레스의 대담성을 존경하지 않을 수 없다.

고대 그리스 사회에서 가장 권위 있는 신탁을 찾아 방방곡곡에서 수많은 이가 순례를 하며 예물과 희생동물을 바쳤고, 피티아 제전에 참여하기 위해 각각의 도시국가가 정기적으로 모여 행사를 치렀다. 그러한 의미에서 델피는 진정한 범 그리스적인 성소(panhellenic sanctuary)이다. 각각의 도시국가가 자신의 월등함을 선보이기에 델피보다 더 좋은 곳이 없었던 것이다. 델피 성역의 문턱에서부터 시작하여 아폴로 신전을 거쳐 꼭대기의 극장에 이르기까지 지그재그로 형성된 이른바 성스러운 길(sacred way)을 따라 걸어가면, 다른 도시국가들이 지어놓은 건물과 기념건조물 등을 지나게 된다.

다수의 기념 석상이나 비석 등을 비롯하여 비교적 작은 건조물도 있는 반면, 대리석으로 지어진 멋진 건물도 즐비하다. 이들은 주로 트레저리(treasury: ‘금고’라는 뜻으로 여기서는 건물 자체를 지칭)라고 하는데, 도시국가에서 신탁에 도움을 받고 감사의 뜻으로 세운, 정식으로 받치는 보물이나 예물들을 보관하는 곳이었다. 그래서 건물 자체가 더욱 아름답고 사치스러울수록 그 도시국가의 넘쳐나는 부를 상징했던 것이다. 서로 경쟁이라도 하듯, 너도나도 전 도시국가보다 더 아름다운 트레저리를 세우려고 한 것으로 보인다.

델피의 트레저리 중 가장 잘 알려져 있는 것은 물론 아테네의 트레저리(Athenian Treasury)다. 건축양식은 그리스의 대표적인 도리아 양식(Doric order)을 선보이며, 그 모양새와 건축 스타일이 몇십 년 뒤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에 지어질 파르테논(Parthenon) 신전을 비롯한 많은 건물의 직접적인 전범이 되었다. 특히 아테네 트레저리의 경우는, BC 490년에 마라톤 전투(Battle of Marathon)에서 페르시아 침략군을 물리친 후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건물이라는 설이 유망하다. 범 그리스적 영웅 헤라클레스의 12과업과 아테네 고유의 영웅 테세우스(Theseus: 아테네의 왕 아에게우스Aegeus의 아들이며 아틱 전설의 위대한 영웅)의 과업들을 나란히 장식으로 새긴 뜻도 이에 따라 생각해볼 만하다.

마라톤 전투는 물론 그레코-페르시아 전쟁사(the Greco-Persian Wars)로 볼 때 결정적인 전환점이고 그리스 땅에서의 첫 승리이다. 그러나, 이 전투는 뒤에 다른 플라테아 전(Battle of Plataea, BC 479)이나 살라미스 전(Battle of Salamis, BC 480)과 같이 그레코-페르시아 전쟁을 절대적 승리로 이끌어준 전투가 결코 아니다. 하지만 아테네가 주도하여 싸운 전투이기 때문에 아테네로 볼 때는 가장 중요한 전투였다. 전 그리스에게 오랑캐를 무찌르는 승리를 안겨준 결정타가 마라톤 전투였다고 과시했다. 그때까지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아테네 고유의 영웅 테세우스를 앞세워, 온 지역의 가장 대표적인 영웅 헤라클레스와 동등한 입장으로 추켜세우는 논리는 마라톤 전투를 중요시하는 아테네의 정치적 전략과 상통한다.

테베가 낳은 영웅 올림포스의 신, 디오니소스


▎1. 델피의 성스러운 길(Sacred Way) 아래쪽에 위치한 아테네의 보물 창고인 트레저리(Athenian Treasury). / 2. 테베를 중심으로 한 베오시아(Boeotia)와 테베사람들이 세운 트레저리(Theban Treasury). 거의 온전히 보존된 아테네의 건물과는 달리 건축기반만 보존돼 있다. 그 앞에 보이는 달걀 모양의 석조물은 바로 땅의 배꼽인 옴팔로스(Omphalos)다.
무척이나 세련된 건축물인 아테네의 트레저리 앞에 무르팍에도 안 닿는 한 건물의 하부구조가 처량하게 놓여있다. 이것은 바로 테베사람들이 지은 트레저리(Theban Treasury)인데, 그 자그마한 건물의 흔적 자체가 어찌나 반가운지, 테베에서 발굴 작업을 하는 나를 비롯한 학생들 모두가 마치 고향사람을 만난 듯이 손뼉을 치며 감탄했다. 하물며 옛적에 그 멀고 험한 길을 순례한 테베인들은 자기 도시국가가 세워 놓은 번듯한 건물을 바라보았을 때 얼마나 뿌듯했을까? 지금은 고작 2만 명이 거주하는 자그마한 마을 같은 도시이지만, 깊은 전통이 서린 역사의 고향 테베에서 발굴 작업을 한다는 사실이 피곤으로 지치기는 했지만 푸릇푸릇한 젊은이들의 마음을 기대와 프라이드로 부풀어오르게 하였던 것이다.

고대 그리스 시절의 테베라는 곳은 지금 우리에게는 경주나 혹은 지린성의 환런(桓仁)-지안(集安) 지역과도 같은 곳이다. 찬란한 전통을 자랑하는 도시국가 테베는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한때 신화 속의 많은 영웅을 배출했던 곳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 유명한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와 <오디세이>를 비롯한 트로이 전쟁의 모든 이야기를 전하는 6개의 서사시를 우리는 에픽 싸이클(Epic Cycle: 일리아드와 오디세이를 제외한 나머지 4개의 서사시는 우리에게 온전하게 전해지지 않는다)이라 한다.

그와 동등하게 테베 사이클(Theban Cycle, BC 8∼BC 6세기경으로 추정)이라는 것이 있다. 바로 이 테베를 배경으로 하는 4개의 서사시인데, 이 모두가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전해지고 있지 않지만, 기원전 5세기 소포클레스와 유리피데스를 비롯한 많은 극작가가 테베 사이클에 전해지는 이야기들을 다루었다. 이것이 바로 다름 아닌 그 유명한 오이디푸스와 그 후손들의 이야기인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를 돌발적으로 살해하고 테베의 왕이 된 오이디푸스보다도 더 저명한 테베 출신 인물이 바로 다름아닌 올림포스의 신, 디오니소스이다.

지난달에 디오니소스가 그리스 극의 수호신으로서 담당하는 역할을 주로 논하였다. 그렇지만 뭐니뭐니해도 그는 ‘술의 신’이다. 우리는 이미 술의 힘과 그리스의 드라마가 어떻게 연관될 수 있는지를 생각해보았다. 술의 기운이 한껏 발휘된다고 하는 것은 마치 다른 영혼이 술을 마신 사람의 정체성을 점유하는 것 같다고 가정해보면, 드라마에서 연기를 하는 모습과 별다름이 없다. 술에 취한다는 것 자체를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그들의 영혼이 디오니소스 신의 기운으로 가득 찬다고 생각하였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신들렸다’는 것이다. 엔투지아즘(enthusiasm, 열광)이라는 말의 어원은 엔투지아스모스(enthousiasmos), 즉 신(theos)으로 들어감(en-)이다. 입신(入神)의 경지인 것이다.

극장에서 관람하는 비극이나 온갖 종류의 페스티벌 등 디오니소스가 주관하는 행사들은 널리 퍼져 있었다. 그 어느 무엇보다도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일상적으로 중요한 일은 이른바 심포지움(Symposium), 즉 나날이 행하는 술 파티였다. 플라톤이 남긴 유명한 저서 <심포지움>(BC 385∼370)이 다름아닌 이 술 파티에서 일어난 대담을 적은 것이다. 심포지움이라는 용어가 현대사회에서 술 파티라는 개념과 전혀 거리가 먼 ‘학회’의 뜻을 가지게 된 이유가 바로 플라톤의 문헌의 특징적 대화방식 때문인 것이다. 더군다나 플라톤의 저서가 술 파티에서 ‘사랑’을 주제로 한 논쟁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그 말의 현대적 사용법의 아이러니를 생각지 않을 수 없다.

심포지움이라는 술잔치에 관하여 자세히 살펴보면, 무척이나 재미있는 고대 그리스의 다양한 생활과 사고방식을 탐색할 수 있다. 이에 관한 본격적인 이야기는 다음 회에 하기로 하고, 이를 준비하기 위하여 남은 여백에는 테베의 주인공, 그리고 심포지움의 호스트인 디오니소스에 관해서 논하기로 하자.

그는 왜 ‘두 번 태어난(twice-born)’ 존재가 되었나


▎테베의 숙소에서 디오니소스를 주제로 한 부게로(William-Adolphe Bouguereau)의 유화 (‘The Youth of Bacchus’, 1884)를 배경으로 저녁식사를 하는 학생들.
디오니소스가 테베에서 태어났다는 것부터가 다른 올림포스의 신들과의 차이점이다. 디오니소스는 제우스신과 테베의 창시자 카드무스(Cadmus)의 딸 세멜레(Semele) 사이에서 태어났고, 이는 엄격히 말하자면 디오니소스가 다른 영웅들처럼 인간 어머니를 둔 반신반인이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디오니소스는 분명하고 온전한 신이다. 그렇다면 왜 그를 제외한 11명의 올림포스의 신들과는 달리, 홀로 인간인 어머니를 둔 디오니소스가 절대적인 신의 신분으로 승진했을까? 그만큼 그가 특별하다는 것이 아닐까.

모든 신화나 구비전래가 그렇듯이 그 내러티브는 단일하지 않고, 여러 가지 ‘버전(version)’이 전해 내려오기 십상이다. “고대 작가 누구누구가 전하는 바에 의하면…”이라는 문구가 허다할 정도로 우리는 같은 신화적 인물에 관한 한 수없이 다른 버전의 이야기들을 자주 듣는다. 디오니소스의 경우도 물론 예외가 아니다. 전해 내려오는 바에 의하면, 질투심이 강한 제우스의 부인 헤라(Hera)의 꾀로 인해 세멜레는 제우스의 본래 모습을 목격하는 즉시 불타 죽었다. 이때 제우스가 세멜레 뱃속에 있는 태아를 그녀가 죽기 일보 직전에 구출하여 자신의 허벅지 안에다가 꿰매 넣어서 길렀다고 한다.

그래서 결국에는 아버지인 제우스 허벅지에서 직접 태어났다는 것이다. 또 다른 설에 의하면 디오니소스는 원래 제우스와 페르세포네의 사이에서 난 아들이었는데 역시 헤라의 질투로 인해 어렸을 때 타이탄들에 의해 찢어 죽임을 당한다. 그러나 타이탄들이 미처 심장을 먹지 못했을 때 제우스는 그 심장을 낚아채어 세멜레가 먹게 하여 임신시켰다.(혹설에는 제우스가 세멜레의 자궁에 디오니소스의 심장을 이식시켜 임신시켰다고 한다) 하여튼 디오니소스는 이렇게 해서 다시 태어나게 된 것이다.

어떤 버전을 믿더라도 디오니소스라는 인물은 태어나기도 전에 부활한 존재인 것이다. 그래서 그를 흔히 ‘두 번 태어난(twice-born)’ 존재라고 일컬었다. 인간의 피가 흐른다 할지라도, 그는 제우스신의 몸에서부터 직접 태어났거나, 죽었다가 다시 태어난 존재로서 인간의 절대적 한계인 죽음이라는 절차를 이미 거친 단계의 존재다. 그래서 그는 나중에 자신의 어머니인 세멜레를 하데스(Hades: 저승을 거느리는 제우스의 동생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여 저승 자체를 일컫는 말)까지 가서 구출해내어 하늘로 승천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제우스도 오가지 못하는 저승을 넘나들 수 있는 디오니소스는 경계가 확실한 신들의 존재보다도 오히려 인간적인 요소 때문에 더더욱 유연한 본질을 지닌 것이 아닐까.

디오니소스와 같이 죽음의 경계에 도전하는 또 하나의 인물이 있는데 다름아닌 영웅 중의 영웅 헤라클레스다. 산 채로 자기 자신을 분신한 그도 일종의 부활 승천을 했다. 그 역시 반신반인 출신이다. 하데스의 영역인 저승은 다른 신들이 관여하지 못하는 구역이었기에 오히려 인간적인 요소를 지닌 헤라클레스나 디오니소스가 성공적으로 다녀올 수 있었던 것 같다. 이 두 인물은 이 방면에서 그리스의 영웅이나 신들 중 특별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리고 하데스를 무사히 다녀오기 위해서 둘 다 특별한 엘레우시스의 미스터리 컬트(Eleusinian Mystery Cult)에 입회해야 했고, 그 의식을 치르고 나서만이 저승에 들어설 수 있었다고 한다.

미스터리 컬트라고 하는 것이 보통 컬트(cult: 보편적인 종교의 용어로는 어느 지정된 대상 숭배의 예식이다. 현대의 사이비 종교라는 의미가 전혀 없다)와는 달리, 그 예식이 비밀로 행해지고 입회하지 않으면 그 내용을 공개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어느 문헌에도 기본적인 것 외에는 적혀지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제일 유명하다는 엘레우시스 미스터리 컬트에 대해서는 여신 데메테르(Demeter)와 그녀의 딸 페르세포네(Persephone)의 컬트라는 것 외에는 거의 아는 바가 없다. 엘레우시스(Eleusis)에서 발견된 도기화의 장면들에서 횃불을 들고 있는 여인들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그 컬트 예식이 밤 동안에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그 컬트가 죽음이나 저승과 관련이 되었다는 것도 알고 있다.

물론 하데스 신이 낚아채어 자신의 신부로 삼았기 때문에 저승의 여왕이 되어버린 페르세포네(데메테르의 사랑하는 딸)의 이야기를 알면, 두말할 것 없이 저승의 문턱에서 왜 페르세포네의 컬트가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지는 상상하기 힘들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어머니이며 곡식의 여신 데메테르가 제우스에게 간절하게 소원하여 딸을 지상으로 다시 데려오게 된 이야기도 들어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신의 제왕 제우스도 어쩔 수 없이, 이미 저승의 음식인 석류알을 6개나 먹어버린 페르세포네를 6개월 이상 이승으로 데려올 수 없었다. 해마다 봄이 오는 까닭은 딸이 저승에서 돌아올 때 곡식의 여신 데메테르가 기쁨에 넘쳐서 모든 식물을 되살리는 환생의 시간이기 때문이다.

끈질기게 살아남은 디오니소스의 정신


▎1. 헤라클레스와 아폴로가 델피의 삼각대를 놓고 싸우는 장면을 표현한 양각석상.(오른쪽 부분) / 2. 델피 성역의 초점인 아폴로 신전. 여기가 바로 그 유명한 델피의 신탁이 이뤄졌던 곳이다.
미스터리 컬트라 하면 디오니소스 자신의 미스터리 컬트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고대 그리스 때부터 로마시대까지 디오니소스의 미스터리는 무척이나 유행한 모양이다. 물론 우리가 정확히 아는 정보는 많지 않지만, 술과 광란, 그리고 성적인(?) 또는 에로틱한(?) 요소 등이 결합된 집단 행사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로마 공화국 시대 때 선포된 유명한 상원칙령(the senatus consultum: BC 186년에 로마 상원이 통과시킨 법령. 로마의 입장에서 보면 바카날리아는 외국의 종교문화였고, 또 국내적으로도 그 컬트를 빙자한 범죄조직이 성행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이 바로 이 바카날리아(Bacchanalia: 로마와 이탈리아에 있어서의 디오니소스의 컬트행사)를 금지시키는 법이었고, 어느 누구도 디오니소스의 사제로 행사를 주최하면 사형의 벌을 받게 될 것이라는 엄청나게 심각한 처벌을 제시한다.

얼마나 제압하기 힘든 광란적인 행사였으면 법적으로 금지 시켜야 했을까? 로마시대의 사학자 리비우스(Titus Livius, BC 59∼AD 17)가 전하는 바에 의하면, 이때 이태리 전역에 바커스(Bacchus: 디오니소스를 칭하는 로마시대의 라틴어)의 컬트가 탄압을 받기 시작했고, 수많은 사람이 처형당했으며, 처형을 면하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자도 많았다고 한다. 고발하는 사람에게는 상을 내리기도 했다. 나치군들이 유대인을 찾아내어 잡아가는 그러한 전격적인 탄압을 떠오르게 한다. 그러나 디오니소스의 정신은 끈질기게 살아남았다.

와인을 중심으로 한 디오니소스의 컬트, 그 모든 종교적인 그리고 사회문화적인 디오니지안 이상(Dionysian Ideal)은 아폴로신이 상징하는 이성적인 철학(Apollonian Ideal)과 상반되는 개념으로 생각할 수 있다. 질서(order)와 카오스(chaos)는 어떻게 보면 동전의 양면처럼 인간에게 공존하는 이성과 감성의 본질을 나타내는 것이다. 두 형제 아폴로와 디오니소스는 각각 이러한 인간의 본질의 양면성을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미래를 바라보는 예언적인 신탁의 신 아폴로가 신성한 기운으로 하늘과 상통하는 반면, 동물적이고 무한정한 본능과 감정을 중요시하는 디오니소스는 술의 힘으로 땅과 교류를 하며 미래보다는 죽음과 상통하는 신이다.

그리하여 헤라클레스와 더불어 디오니소스를 ‘크토닉(chthonic)’한 존재라고 부르는데, 이는 바로 땅과 지하의 세계와 연관이 있다는 뜻이다. 디오니소스와 아폴로가 상징하는 상반되는 정신은 마치 동양의 음양론과 구조적으로 비슷한데, 이러한 이론을 근대에서 처음으로 체계화한 이가 다름아닌 독일의 유명한 철학자 니체(Nietzsche, 1844∼1900)다. 그의 미학적 이론이 처음으로 등장하는 저서는 <비극의 탄생>(Die Geburt der TragOdie aus dem Geiste der Musik, 1872)이고, 여기서 그는 그리스 비극이 아폴로적 이성과 디오니소스적인 감성이 조화를 이루는 데에서 그 참된 본질을 찾으며, 이러한 퓨전이 서양 문화의 토대를 이뤘다고 본다. 디오니소스의 본능적이고 감정적인, 직접적 체험 위주의 요소가 가득한 그리스 비극은 아폴로적인 즉 이성적인 거리감에 의해서만 이해가 된다는 것이다.

다시금 우리는 테베로 돌아와 비극 중의 비극, 에우리피데스의 <박카에>(Euripides’ Bacchae: BC 405년 제작)를 소개하면서 본편을 매듭짓기로 하겠다. 이 작품은 고대 그리스극뿐만 아니라, 연극의 기나긴 역사상에서도 으뜸간다는 평판을 지닌 작품이다. 지난달에 소개한 극작가 에우리피데스는 BC 5세기 말 인물로 고대 그리스 3대 극작가 중 막내에 해당하는 인물이다. 그의 선배격인 에스퀼러스(Aeschylus)와 소포클레스(Sophocles)의 비교적 전통적이고 권위적인 스타일을 마다하고 센세이션을 중시하며, 개인의 심리적인 고뇌 등을 웅장하게 다룬 작가로 잘 알려져 있다. 동시대 희극작가들의 풍자에 따르면, 에우리피데스는 그 당시 새파란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작가였다. 나이가 든 구세대는 ‘개똥 같은 문장력과 권위가 없이 까불어대는’ 이 극작가의 인기를 한탄하면서 “이 시대가 앞으로 어찌 될꼬” 하며 혀를 찼다고 한다. 참으로 2500년이 지난 지금도 이런 측면에서는 하나도 변한 것이 없다는 느낌이 든다.

테베의 왕족에 가장 참혹한 벌을 내리다


▎유리피데스의 <박카에>(Euripides’ Bacchae)에서 다루는 주제로 테베의 왕 펜테우스(Pentheus)의 결말을 표현한 도기화 (BC 5세기 초의 작품).
에우리피데스의 <박카에>는 아테네의 시티 디오니지아 페스티발(City Dionysia)에서 BC 405년에 1등을 차지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에우리피데스 사후에 공개된 그의 마지막 작품인데, 바로 디오니소스 컬트의 시원의 모습을 다룬 이야기다. 테베의 왕 펜테우스(Pentheus)와 그의 어머니 아가베(Agave)가 디오니소스로부터 천벌을 받는 내용이다. 이 작품의 구도 속에서 디오니소스는 자신이 직접 등장인물로 출연한다. 코러스도 전과는 달리 해설자만의 역할을 하지 않고, 연극의 내러티브에 직접 참여한다. 이 모든 파격이 현대적인 감각에 더 가깝다는 사실이 주목된다.

막이 오르면서 우리는 디오니소스의 독백을 듣는다. “제우스의 아들인 나 디오니소스는 이곳 테베 땅에 와있노라. 나를 낳아준 것은 카드모스의 딸 세멜레였고, 그때 번갯불이 산파 노릇을 했지….” 테베 출신인 디오니소스는 고향에서 자신이 제우스신의 아들이 아니라는 소문이 퍼지고 있다며, 자신의 이종사촌 동생인 펜테우스에게 이를 증명하고 테베 사람들에게 자신의 컬트를 소개하기 위해서 돌아왔다고 선포한다. 극이 전개되면서 우리는 점점 상승하는 복수의 기운을 느낄 수 있고, 결국 디오니소스는 테베 사람들이 자신을 믿지 않는 것에 대한 대가로 테베의 왕족에게 가장 참혹한 벌을 내리게 된다.

디오니소스의 어머니 세멜레가 헤라의 꾀로 죽임을 당했고, 두 번을 태어나야 했던 그는 제우스의 지시로 뉘사 산(Mount Nysa)에서 님프(Nymph: 물과 관련된 요정의 일종)들 밑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헤라의 눈을 피하기 위해 님프들은 디오니소스를 여자아이처럼 꾸며서 키웠다고 한다. 너무 커져서 더 이상 남자아이라는 것을 숨길 수 없을 때까지 여장을 했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청소년 시절까지 여자로 자랐다는 것이 아닌가? 그렇지 않아도 BC 4세기부터는 디오니소스의 석상이 많은 경우에 중성적인 특징을 띠고 있는 경향이 두드러졌다. 동양의 음과 양의 개념이 여성과 남성의 본질로 인식되었던 것처럼, 아폴로의 이성과 디오니소스의 감성적 본능 또한 각각 남성과 여성의 본질과 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에우리피데스의 <박카에>에서도 여장을 하는 모티브가 있다는 것이 흥미롭다. 디오니소스가 테베에 돌아오기 전에 아시아 전반을 돌아다니며 여신도들을 모아 컬트를 형성했다고 한다. 그를 키워준 님프들이 첫 신도들이었고, 그 이후 가는 곳마다 여인들을 개종시켜 이른바 바칸테스(Bacchantes: 디오니소스를 따르는 여신도들)로 만들었다고 한다.

메이나드(Maenad)라고도 불리는 이들은, 한마디로 말해 디오니소스적 광기에 찬 여인들이다. 이들은 집과 가족을 버리고 문명을 떠나 산 속을 헤매면서 술에 취해 춤을 추고 날고기를 뜯어먹으며 디오니소스를 섬기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테베 왕실이 디오니소스의 컬트를 금지시켰다는 소식을 듣고, 디오니소스는 몸소 그의 이모인 아가베와 자매들을 바칸테스로 만들었고, 펜테우스에게 그들의 행동을 목격하기 위해서는 여장을 하라고 권한다.

나무 위에 숨어서 지켜보던 펜테우스는 바칸테스들에게 발각되고, 그의 결말은 불행하게도 여지없이 처참했다. 정신이 나간 그녀들은 펜테우스가 산 속의 사자라고 인식한 나머지 그의 몸을 갈기갈기 찢어 죽여버리고 만다. 펜테우스의 머리를 사냥한 트로피처럼 튀르소스 지팡이에 꿰어 가지고 당당하게 들고 도시로 돌아오는 아가베는 곧 정신을 차리고 보니 자신의 손으로 아들을 살해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치가 떨리는 이 마지막 장면으로 무시무시한 디오니소스의 힘을 새삼 되새기며 <박카에>의 막은 내린다.

이러한 광란, 광기, 광열(狂熱), 광정(狂情), 광포는 입신(入神, 엔투시아스모스)의 극단적 표현이다. 이러한 열정적 파토스에 대해 냉정한 로고스를 제시하려고 노력한 사람이 플라톤이었고, 또 아테네의 철학자들의 대체적인 경향이었다. 그래서 플라톤의 로고스는 모든 것에 대해 지나침이나 모자람이 없는 중용(to metrion)의 이상을 지향한다. 그러나 플라톤의 로고스는 지나치게 드라이한 기하학주의로 흘렀다. 그의 이데아론은 디오니소스 컬트에 대한 극단적 반동으로 이해될 수도 있는 것이다. 한국의 사드(THAAD) 배치는 아폴로적인 것일까, 디오니소스적인 것일까? 갑작스러운 사드 배치 결정은 펜테우스를 찢어 죽이는 아가베의 행동과 그리 달라 보이지 않는다. 하여튼 국제역학의 밸런스를 무시한 이러한 광열의 결단으로 한민족의 비극적 정조는 짙어만 가고 있는 것이다.

비극은 인간의 모든 가능성을 노출시키는 거울


▎로마시대의 사르코파거스 (Sarcophagus, 석관)는 흔히 디오니소스 축제인 바카날(Bacchanal)을 주제로 장식됐다. 디오니소스를 생시에 섬기면 저승에서도 행복함을 만끽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하여튼 이같이 노엽고 무자비한 모습의 디오니소스는 에우리피데스 고유의 창작으로 간주되어야 할 것이다. 많은 이가 이에 대해 극작가가 디오니소스의 컬트를 비판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경향도 있다. 디오니소스는 실은 자비로운 보호자와도 같은 존재이며, 저승을 넘나드는 그의 성격 때문에 죽음을 관리하는 신이기도 하다. 다시 말하자면, 생전에 디오니소스를 따르면 저승에서도 한없이 흐르는 술에 흠뻑 취하여 황홀한 천상의 기쁨을 누리고 영원한 행복함을 만끽할 수 있다고 한다. 그를 ‘구세주’적인 인물이라고 보기도 하기 때문에 이러한 광란의 바킥 컬트는 디오니소스 신성의 본질에 위배된다고 해석하는 것이다. 그러나 에우리피데스는 디오니소스적 현상에 대하여 긍정이나 부정의 판단을 내리지 않는다. 평화와 광포, 미소짓는 우아함과 악마적인 파괴는 인간 존재의 본질에 내재하는 양면성이기 때문이다. 비극은 인간의 모든 가능성을 노출시키는 거울일 뿐이다.

그런데 디오니소스처럼 구원론적(soteriological) 성격을 가진 존재로서 인류사에 가장 많이 회자되는 인물은 뭐니뭐니해도 나자렛의 예수다. 재미있는 사실은 디오니소스와 예수가 가진 공통점은 신기할 정도로 많다는 것이다. 인간의 어머니를 둔 것부터, 죽음을 이겨내는 부활의 테마로써 종교 조직의 핵을 형성한 사태에까지, 그리고 와인이 성찬의 실체변화(transubstantiation)의 중심이 되는 재미있는 테마에 이르기까지, 분석할 분야는 너무도 많다. 이에 관해서는 독자들이 직접 고민해볼 것을 권한다. 디오니소스와 불교와의 연관도 간다라 미술을 통해 다음 달에 잠깐 살펴보기로 하겠다.

테베에서 우리의 발굴현장은 포세이돈(Poseidon)의 성소이지만, 새로운 발굴 작업이라 아는 것은 적고 할 일은 많다. 우리가 가야 할 길이 너무도 먼 것이다. 학생들과 나는 모두 허리가 쑤신다. 손목이 시려도, 테베의 주말 밤에 드디어 선선해진 산들바람을 맞으며 온 동네 사람들과 함께 광장에서 와인 한잔을 들이킨다. 디오니소스의 탄생지인 이곳 테베에는 아직도 그의 컬트가 살아 있다. 우리는 그 생동하는 기운을 새삼 피부로 느끼고 있는 것이다.

김승중 - 서울대학교 천문학과를 졸업하고 미국에 유학했다. 프린스턴대 천체물리학과에서는 우주론을, 콜롬비아대학 예술사고고학과에서는 희랍미술을 전공해 각각 박사학위를 받았다. 콜롬비아 박사과정에 들어가기 전에는 버지니아대학에서 미술사학 석사코스를 밟았다. 이 시기 다양한 현지발굴 프로젝트에 참여하여 고고학의 생생한 지식을 얻었다. 현재 캐나다 토론토대학교에서 희랍미술고고학을 가르치고 있다.

201608호 (2016.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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