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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주의 인류의 ‘등대(燈臺)’를 찾아서(7)] 멕시코의 천재화가, 프리다 칼로(Frida Kahlo) 

“발이 왜 필요하지? 내게는 날개가 있는데!” 

장석주 전업작가
끈질긴 불행을 작품의 열정으로 승화시킨 여류(女流)의 비극적 삶… 하얀 캠퍼스에 피의 여로(旅路), 고통의 축제를 그리다

▎프리다 칼로의 작품 <부러진 척추>(1944년). 그녀가 겪은 끔찍한 사고의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그림이다. 벌거벗은 상반신에 드러난 척추는 정형외과용 코르셋으로 조여진 채 간신히 지탱돼 있다. 눈에서는 하얀 눈물이 점점이 흐른다.
“나는 붕괴 그 자체”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던 압도적인 절망을 생명의 의욕으로 바꾼 여자가 있다.

이 비장한 스토리의 주인공은 바로 멕시코의 천재화가 프리다 칼로(1907~1954)다. 그녀는 자신의 생을 두고 “한 세기 분량의 고통이 지속됐다. 거의 이성을 잃을 정도로”라고 회고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피의 격렬함으로 뒤범벅된 죽음이 드리워진 나날을 불꽃같이 연소하며 55점의 자화상과 수많은 작품을 남겼다.

스스로 붕괴라 일컬었던 그녀의 삶을 들여다보면 고통이 절로 느껴진다. 여자의 가녀린 몸으로 전 생애에 걸쳐 32번의 외과수술을 감당해야만 했다. 스물한 살이 됐을 무렵 스물한 살 연상의 남자와 사랑에 빠져 결혼해 세 번 임신하고 그때마다 유산을 겪어야만 했다.

아이가 탄생하지 못했듯 그녀의 사랑도 순탄치 못했다. 남편 디에고가 자신의 여동생과 바람을 피우는 것을 목격해야만 했고 이 상처는 곧바로 이혼으로 이어졌다. 말년에 이르러서야 남편의 간곡한 요청에 따라 재결합에 이르렀으나 이 또한 그녀에게 안정감을 가져다주지 못했다.

신체의 고통, 사랑하는 이의 배신, 불임 등이 생애 전체를 집어삼켰다. 대개 사람은 이런 불행 앞에는 가만히 무릎 꿇고 비참한 생을 살다 간다. 그러나 프리다는 달랐다. 어떠한 불행에도 그녀의 날개는 좀처럼 꺾이지 않았다.

한 세기 분량의 고통에 맞서 싸우다


▎프리다 칼로(왼쪽)와 디에고 리베라(오른쪽).
프리다는 “비극은 사람이 가진 가장 우스꽝스러운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녀는 파도처럼 연이어 닥쳐오는 불운에 맞서 아마존의 여전사(戰士)같이 싸웠다.

불의의 사고로 쇠막대가 뼈를 부러뜨렸지만 불행의 바닥에 거꾸러진 제 삶을 기어코 일으켜 세웠다. 끈질긴 불행을 사랑의 에너지로 바꾸며 자신만의 길로 나아갔던 프리다. 그녀의 삶은 한마디로 피의 여로(旅路), 태양을 향한 춤, 그리고 고통의 축제였다.

프리다의 자화상 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품은 <벨벳 드레스를 입은 자화상>(1926, 캔버스에 유채)이다.

하얀 이마와 안면을 가르는 경계선, 새가 날개를 펼친 것 같은 굵고 검은 눈썹-눈썹은 그 형태의 완강함으로 차라리 검은 날개를 양쪽으로 활짝 펼친 새 같다-, 그 아래 형형하게 번득이는 검은 눈동자, 기이할 정도로 긴 목, 자주색 벨벳 옷에 감싸인 상체가 이 모든 것을 떠받친다.

이 자화상 속의 얼굴은 불행으로부터 유린당했지만 이를 관조하며 의연하게 버텨낸 자의 평온을 보여준다. 프리다의 다른 그림과 마찬가지로 이 작품도 자전적 경험을 바탕에 두고 있다. 그녀는 평소 자신처럼 ‘희생자’를 즐겨 그렸다.

그러면서도 프리다는 작품을 통해 여성성과 남성성이 배합된 중성적인 인간을 표현해내기도 했다. 가녀린 여자였지만 사회적 활동을 왕성하게 펼친 사실이 이를 방증한다. 프리다는 열세 살 때 멕시코의 청년 공산당에 입당해 활동했다. 이때 형성된 정치적 신념은 그녀가 죽을 때까지 이어진다.

프리다가 남긴 일기장에는 빨강, 파랑, 노란색의 잉크로 쓰인 단어, 짧은 문구, 그림, 낙서가 어지럽게 적혀져 있다. 1947년 11월 7일, 혁명기념일(러시아의 볼셰비키혁명 기념일)에 적힌 문장은 유독 인상적이다. “디에고, 나는 혼자예요”라는 서글픈 그녀의 고백이었다.

몇 년이 흐른 1953년 3월 일기에는 “나는 디에고를 사랑한다”고 적혀 있다. 이 일기장에는 잉크, 연필, 크레용으로 그린 그림 74점도 실려 있다. 즉흥적인 자기감정의 표출로 얼룩져 있다.

프리다에게 일기장은 고통을 노래하는 수수밭, 검은 수의(壽衣), 감정의 맥동이 날뛰는 캔버스, 춤추는 실루엣을 위한 원형 광장이다. 일기의 많은 부분이 맥락 없이 이어지는 시와 능수능란한 이야기로 채워져 있는데 이것을 읽다 보면 그녀가 매우 뛰어난 직관과 언어감각을 가진 시인이었음을 알 수 있다.

자, 범인(凡人)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프리다의 곡절 많은 생애를 천천히 탐험해보자. 프리다는 멕시코 혁명기인 1907년 7월 6일 멕시코시티 교외 지역인 코요아칸의 아옌데 가(街)와 런던 가(街) 사이의 작은 방에서 태어났다.

인생을 통째로 바꾼 첫 번째 사고


▎셀마 헤이엑이 주연한 영화 <프리다>의 한 장면. 비운의 천재화가 프리다 칼로는 타고난 재능으로 죽음이 드리운 나날을 불꽃같이 연소하며 55점의 자화상을 비롯해 수많은 작품을 남겼다.
그녀의 가계(家系)는 꽤나 복잡하다. 조부모는 헝가리 출신이고 결혼 뒤 독일로 이주했다. 독일의 바덴바덴에서 여러 자녀가 태어났는데 그중의 한 명이 그녀의 아버지 길레르모 칼로다. 길레르모는 1872년에 태어나 1891년 멕시코로 이주한 유대계 독일인이었다. 생전을 은판 사진기로 작업하는 사진작가로 활동했다.

그는 멕시코로 이민해 멕시코 여자와 결혼했다. 길레르모는 본처가 죽자 멕시코 미초아칸 원주민 혈통의 독실한 가톨릭 신자 마틸데 칼데론 곤살레스와 결혼해 프리다를 낳았다. 이에 대해 프리다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아버지는 본처가 젊은 나이에 죽자 내 어머니, 마틸데 칼데론 곤살레스와 결혼했다. 그녀는 12명의 형제 중 한 명이었다. 내 외조부 안토니오 칼데론은 멕시코 미초아칸 원주민의 혈통이며 나의 외조모 이사벨 곤살레스는 스페인 장교의 딸이었다.”

1936년 작품 <나의 조부모, 부모, 그리고 나>(금속판에 유채)는 프리다의 여러 혈통으로 복잡하게 뒤얽힌 가계도를 잘 보여준다.

화면 중앙에 결혼예복을 입은 부모를 배치하고 그 앞에 벌거벗은 여자아이 한 명이 서 있다. 이 여자아이의 손에는 외조부모와 친조부모의 초상이 연결된 탯줄을 상징하는 붉은색 리본이 쥐어져 있다.

프리다의 고통은 여섯 살 무렵에 시작됐다. 이때부터 척추성 소아마비를 앓기 시작했고 9달 동안이나 병상에 누워 있어야만 했다. 소아마비의 후유증으로 오른쪽 다리가 더디게 자라났다. 병약한 이 다리는 건강한 왼쪽 다리와는 달리 가늘고 쇠약해져 갔다.

본래 명랑소녀였던 프리다는 질병의 영향 탓에 우울증이 자주 나타나는 폐쇄적 성격으로 바뀌게 됐다. 이 무렵 어린 프리다는 가상의 소녀와 강렬한 우정을 경험하기 시작했다.

“당시 내 방의 유리창은 아옌데 가를 향해 나 있었고 첫 번째 창문에는 언제나 김이 서렸다. 거기에 손가락으로 문을 하나 그렸다. 그리고 그 문을 통해 상상 속으로 들어갔다.”

프리다는 이 상상의 세계에서 한 쾌활한 소녀를 만났다. 이 소녀는 소리도 내지 않고 날렵하게 움직였다. 때로는 무게가 전혀 없는 것처럼 춤을 추기도 했다. 프리다는 상상 속의 소녀를 졸졸 따라 다녔고 소녀가 춤을 추는 동안 자신의 비밀스러운 고민을 털어놓았다.

그 상상의 기억은 오래갔다. 서른네 해가 지난 뒤 프리다는 이렇게 그 시절을 회고했다. “그 소녀와 얼마나 함께 있었느냐고요? 아주 잠깐 동안, 혹은 몇 천 년 동안이었을지도…. 그때마다 나는 행복했어요.”

프리다는 열다섯 살 때 의사가 되기 위해 멕시코 국립예비학교에 입학했다. 이 국립예비학교는 전교생이 2000명에 달했는데 이중 여학생은 35명에 불과했다. 이곳에서 그녀는 남자친구 아리아스를 만났다. 프리다는 독서광이었던 그를 만나 좋은 영향을 받았다.

기쁨도 잠시 1925년 9월 17일 프리다는 끔찍한 사고를 당했다. 이 사고로 프리다는 평생 육체라는 짐을 짊어지게 됐다. 삶의 지평을 가로지르는 고통의 족쇄에 채워지게 된 것이다. 스페인과의 독립전쟁 기념일이던 그날 오후 프리다는 남자친구와 함께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도중 전차와 충돌하는 사고를 맞닥뜨렸다.

압도적인 불운이 한 여대생의 생을 순식간에 삼켜버렸다. 전차 내부의 철제 막대가 부러져 튕겨 나왔다. 그 반동으로 철제 막대는 프리다의 옆구리를 뚫고 골반을 관통했다. 그녀는 고통을 느낄 새도 없이 몸에서 분수처럼 솟구치는 피를 뒤집어쓴 채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손써볼 틈도 없이 순식간에 커다란 불행이 그녀를 삼켰지만 신의 가호로 목숨은 부지할 수 있었다. 사고의 결과는 참혹했다. 골반 뼈는 세 동강 났고 요추와 쇄골이 부서졌다. 왼쪽다리에서는 골절이 열한 군데나 발견됐다. 오른발은 탈구된 채 몇몇 마디가 부러졌다.

중상을 입은 채 병원에 후송된 그녀는 수없이 많은 외과수술을 받아야 했다. 이 과정에서 프리다는 소름 끼치는 통증을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참아냈다. 이후 약 1년 동안 병원에 머물며 척추 교정용 코르셋을 착용한 채 회복을 기다려야만 했다.

의사의 꿈을 접고 화가의 길을 걷다


▎프리다 칼로의 <작은 원숭이가 있는 한 자화상>(1945년). 이 무렵 프리다는 미국 보스턴에서 열린 현대 멕시코 화가전에 출품해 화제를 불러모았다.
이 사고는 그녀의 생에 어떤 전환을 가져왔다. 망가진 몸으로 의사가 될 수는 없었다. 결국 프리다는 의사의 꿈을 접고 화가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병상에 부착시킬 수 있는 특수 이젤을 만들었다. 평소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던 그녀를 위한 배려였다. 프리다는 병상에 부착된 이젤에 캔버스를 올려놓고 천장에 달린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캔버스에 담으며 지루한 시간을 보내곤 했다.

훗날 프리다는 죽기 직전 “평생 두 번의 큰 사고를 겪었다”고 회고했다. “나는 평생에 걸쳐 두 번 큰 사고를 당했다. 첫 번째는 어린 시절 버스를 타고 가다가 겪은 교통사고였고 두 번째는 디에고와의 만남이었다.” 그만큼 화가 디에고 리베라와의 만남은 프리다의 불행한 운명을 결정짓는 ‘대형사고’였다.

프리다는 멕시코 교육부 청사의 벽화작업 중이던 화가 디에고를 찾아갔다. 당시 프리다의 나이는 열여덟 살에 불과했다. “여보세요, 잠깐 사다리에서 내려와 보세요.” 그녀는 민족주의 성향의 유명화가 디에고에게 자신의 그림 석 점을 보여주며 이렇게 말했다.

“나는 놀러 온 게 아니에요. 먹고 살기 위해 일해야 해요. 그림 전문가인 당신의 의견을 듣고 싶어요. 허영심으로 그림을 그릴 시간은 없어요. 내게 좋은 화가가 될 가능성이 있는지 살펴봐주세요.”

디에고는 그녀의 열정과 재능을 단번에 알아봤다. 그는 그녀에게 그림을 계속 그리라 주문했다. 이 과정에서 두 사람은 급속도로 사랑에 빠져버렸다. 프리다는 디에고의 요청으로 교육부 청사의 벽화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노래> 시리즈 중 하나인 <반란>의 모델이 되기도 했다. 대중에게 무기를 나눠주는 혁명의 여자전사였다.

1929년 8월 21일 프리다는 스물한 살이 되던 해 디에고와 결혼했다. 이때 디에고의 나이는 프리다보다 스물한 살이 더 많은 마흔두 살이었다. 이렇게 프리다는 디에고의 세 번째 아내가 됐다.

당시 프리다는 디에고에 대해 이렇게 썼다. “매 순간 그는 나의 아이다. 날 때부터 내 아이, 매순간, 매일, 나의 것이다.” 디에고가 태양이라면 프리다는 그 태양을 바라보고 자라는 나무였다.

“당신이 태양인 나무를 목마른 채로 두지 말아요. 당신의 씨앗을 품었던 나무를. ‘디에고’, 사랑의 이름이여.”

그러나 디에고는 프리다를 사랑하면서도 끝없이 달아났다. 결국 크고 작은 불행은 이어졌다. 결혼 이듬해 프리다는 임신했지만 골반기형으로 인해 얼마 못 가 유산하고 말았다. 불운이 여전히 그녀를 뒤따라 다녔지만 디에고를 향한 프리다의 사랑만은 늘 뜨겁게 타올랐다.

프리다는 디에고의 열정을, 손과 발을, 배가 불룩하게 튀어나온 뚱뚱한 몸을, 풍부한 상상력과 즉흥적인 행위를, 그가 가진 모든 것을 아무 조건 없이 사랑했다.

“그 어떤 것도 당신의 손과 비교할 수 없어요. 그 무엇도 당신의 녹색 눈빛과 비교할 수는 없죠. 내 육체는 매일 당신으로 인해 충만합니다. 당신은 밤의 거울, 맹렬한 섬광, 비옥한 땅입니다. 당신의 품은 나의 쉼터이지요.”

프리다의 사랑은 거침이 없었고 마를 줄 몰랐다. 프리다는 여전히 디에고를 사랑했다. 두 사람이 결혼한 지 18년째인 1947년 1월 22일 수요일의 일기에 그녀는 이렇게 적었다.

“모든 사랑으로 당신을 사랑합니다. 당신께 숲을 드립니다. 그 숲에는 제가 가진 것 중 가장 좋은 게 가득한 별장이 있습니다. 당신이 만족하기를 바랍니다. 비록 늘 당신에게 터무니없는 외로움과 다채롭지 못한 사랑만을 주었지만….”

프리다는 제 영혼 속에 디에고를 품고 용서했다. 때문에 이런 문장을 쓸 수 있었던 것이리라.

“나는 배아이자 어린 싹이며 그것을 낳은 첫 번째 잠재적인 세포다. 나는 가장 오랜 태초부터 ‘그(디에고)’이다. 그리고 가장 오래된 세포이다.”

<프리다와 디에고 리베라>(1931년, 캔버스에 유채)라는 작품은 그녀가 디에고와 나란히 선 모습을 보여준다. 왼쪽의 디에고는 넉넉한 풍채로 푸른색 셔츠에 정장 차림을 하고 있다. 그의 왼쪽 손에는 팔레트와 붓이 쥐어져 있다.

그의 오른쪽에는 상대적으로 자그마해 보이는 프리다가 서 있다. 프리다는 두 줄로 된 목걸이를 한 채 발까지 내려오는 녹색의 긴 원피스를 입고 있다. 어깨 전체를 감싸고 허리 아래까지 흘러내린 붉은 스카프가 강렬한 인상을 준다.

디에고와 프리다는 손을 꼭 잡고 있다. 프리다는 자신에게 건강이 있다면 그에게 모두 주고 싶다고 말했다. 아울러 제 젊음도 모두 그에게 주고 싶다고도 했다. 프리다의 디에고를 향한 사랑은 그 무엇으로도 말릴 수가 없었다. 그것은 압도적인 격렬함으로 채워진 사랑이었다.

불행은 고통으로, 고통은 그림으로


▎영화 <프리다>에서 연출된 프리다와 남편 디에고의 모습. 그녀는 남편으로부터 예술적 영감을 받아 화가로 성장했다. 그러나 남편의 잦은 외도는 프리다를 고통의 구렁텅이로 빠뜨렸다.
프리다는 디에고로부터 예술적 영감을 빨아들이고 정치적인 영향도 받았다. 그 결과 그녀는 공산주의에 깊숙이 빠져들었다. 침대 머리맡에 철학자 마르크스, 정치가 레닌과 스탈린의 초상화를 붙여놓고 날마다 그것을 들여다보기도 했다.

1930년 프리다는 디에고와 함께 미국으로 건너갔다. 디에고가 록펠러재단의 의뢰를 받아 뉴욕센터의 벽화를 제작하던 중 러시아 정치가 레닌의 얼굴을 그려 넣은 게 문제가 돼 얼마 안가 멕시코로 돌아와야만 했다.

그 무렵 그녀는 두 번째 임신을 했지만 또다시 골반 기형으로 유산하고 만다. 불운은 끝이 없었다. 1932년 어머니가 폐암으로 사망한 것이다. 어머니를 잃었다는 슬픔에 빠진 프리다는 세 번째 아이를 임신하면서 잠시간 행복을 꿈꿨지만 이마저도 실패하고 만다.

프리다가 유산으로 지쳐있을 무렵 디에고는 그녀의 막내 동생인 크리스티나와 불륜에 빠졌다. 그 사실을 뒤늦게 알고 큰 충격을 받은 프리다는 한동안 극심한 고통 속의 나날을 보내야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고독의 시간을 갖던 그녀에게 인생에서 잊기 힘든 운명의 상대가 찾아왔다.

망명 생활로 떠돌던 러시아 혁명가 레온 트로츠키였다. 1937년 레온 트로츠키 부부가 오랜 망명생활 끝에 디에고의 도움으로 멕시코에 망명해 프리다의 집에 머물게 됐다. 이 무렵 프리다는 트로츠키와 짧은 연애를 했고 그에게 <레온 트로츠키에게 헌정하는 자화상>을 그려 선물하기도 했다. 이 그림에서 프리다는 공단 드레스를 입고 어깨에는 숄을 걸치고 있다. 손에 트로츠키에게 바치는 편지와 꽃다발을 들고 있는 모습에서 트로츠키를 향한 그녀의 마음을 엿볼 수 있다.

트로츠키는 프리다에게 매혹됐으나 관계는 오래가지 않았다. 가정이 있던 트로츠키가 같은 해 여름 그녀의 집을 서둘러 떠났기 때문이다. 아마도 가정이 있던 남자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판단이었을게다.

1940년 프리다가 뉴욕과 파리로 전시여행을 떠난 사이 트로츠키는 스탈린이 보낸 자객에 의해 처참하게 살해되고 말았다. 그 일로 크게 상처받은 그녀에게 또다시 비보가 날라 왔다. 그녀의 정신적 스승이었던 아버지의 사망 소식이었다.

남편의 외도에 맞선 그녀의 동성애 관계


▎프리다의 대표작 중 하나인 <작은 사슴>(1946년). 몸통은 사슴의 형상이고 얼굴은 프리다다. 그녀는 그림을 통해 제 몸에 새겨진 상처와 생이 감당하는 고통의 실상을 드러냈다.
이어진 불행으로 프리다는 비통한 슬픔에 잠긴 채 미국 보스턴에서 열린 현대 멕시코 화가전에 작품을 보냈다. 이 시기에 그려진 작품 <뿌리>(1943년, 금속판에 유채), <부러진 척추>(1944년, 캔버스에 유채), <작은 사슴>(1946년, 캔버스에 유채) 등을 통해 그녀의 내면을 엿볼 수 있다. <뿌리>는 멕시코의 광활한 대지 위에 비스듬히 누운 여자를 그린 작품이다. 대지 위로 흘러내리는 검고 탐스러운 머리카락이 인상적인 이 그림 속의 여자는 프리다 자신이다.

이 여자의 심장이 있는 가슴에는 녹색 식물이 자라나 여자의 몸과 대지를 휘감으며 줄기를 뻗어내는데 그 줄기 끝에는 잎사귀들이 무성하다. 대지를 덮고 있는 짙은 녹색의 잎사귀를 보면 잎맥에서 뻗친 붉은 실핏줄이 대지에 뿌리내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프리다는 제 존재의 근원이 멕시코의 대지와 연결되어 있음을 이 그림을 통해 보여줬다. 또 다른 작품 <부러진 척추>는 그녀가 겪은 끔찍한 사고의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벌거벗은 상반신에 망가져 있는 척추는 정형외과용 코르셋으로 조여진 채 간신히 지탱돼 있다. 얼굴과 몸통에는 작은 못이 무수히 박혀 있다. 프리다의 눈에서는 하얀 눈물이 점점이 흐르고 있다.

작품 <작은 사슴>은 좌우에 회랑의 열주(列柱)같이 아름드리나무가 서 있고 그 중심에 쫓기는 사슴 한 마리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몸통은 사슴의 형상이고 얼굴은 프리다의 것이다. 이 작은 사슴의 목과 등에는 화살 아홉 개가 박혀 있다. 이렇듯 프리다는 그림을 통해 제 몸에 새겨진 상처와 생이 감당하는 고통의 실상을 드러냈다. 그리고 산다는 것은 그 상처에서 벗어나려는 지난한 제의(祭儀)였음을 암시하고 있다.

1949년 디에고는 또다시 바람을 피워 프리다를 낙담하게 만들었다. 이번 외도의 상대는 프리다의 친구이자 디에고의 모델이었던 마리아 펠릭스라는 유명 배우였다. 디에고는 마리아와 미국으로 밀월여행을 다녀오기도 했다.

이 무렵 프리다가 그린 <디에고와 나>(1949년, 캔버스에 유채)는 디에고의 외도로 말미암은 프리다의 절망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이 자화상에서 특이한 점은 검은 갈매기가 양 날개를 펼친 듯한 모양의 검은 눈썹 사이에 디에고의 초상을 그려 넣었다는 것이다.

이 디에고의 이마 한가운데에는 눈동자 한 개가 더 있다. 여기에 비친 프리다의 표정은 디에고를 향한 분노와 상심 때문에 웃음 한 점 없이 경직돼 있다. 프리다의 커다란 양쪽 눈에서는 눈물 두어 방울이 떨어지고 있다.

디에고의 외도에 대한 분노는 방황으로 이어졌다. 프리다는 제 본성 깊이 감추어져 있던 양성애적 성향을 자각했다. 여자와 염문을 뿌리며 외도를 일삼는 디에고에 맞서 그녀도 동성애 관계를 맺기도 했다. 하지만 디에고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결국 프리다는 디에고의 외도에 크게 낙담해 이혼을 결심하게 됐다. 이때 그녀는 “우리의 이혼에는 어떤 감정이나 경제적인 것, 예술적인 갈등 따위는 없다”라고 했다. 이혼 후 프리다는 우울증에 사로잡혀 술을 마시지 않고는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주로 코냑을 마셨는데 날마다 마시는 양이 한 병에서 두 병으로 점차 늘어났다. 다행인지 그림을 향한 열망은 더 커졌지만 잦은 음주와 불규칙한 생활로 인해 건강은 더욱 나빠졌다.

프리다를 놓치고 후회의 날을 이어갔던 디에고는 이 무렵 프리다에게 다시 접근했다. 그녀와의 재결합이 그의 목적이었다. 그녀는 차갑게 디에고의 간청을 무수히 거절했으나 끈질긴 그의 성화를 이겨내기는 어려웠다.

결국 그녀는 전 남편에게 조건부 결혼을 제안했다. 프리다가 내건 두 개의 조건은 바로 재정적 독립과 성관계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살고 싶다”


▎프리다의 작품 <미겔 N. 리라의 초상>(1927년). 10대 시절 프리다의 자유분방함이 담긴 표현주의적 색채가 잘 나타난다. 이 무렵의 그녀는 교통사고를 당해 의사의 꿈을 접고 화가의 길을 선택했다.
두 사람은 새로운 출발을 기념해 다시 결혼식을 올렸다. 디에고의 생일이 있는 12월이었다. 그러나 재결합은 행복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1950년대로 접어들면서 프리다는 또 다른 불행과 직면하게 됐다. 오른발에 회저병이 생긴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녀는 알고 말았다. 자신이 서서히 죽음에 다가가고 있다는 것을.

1953년 4월 프리다의 건강 상태가 악화되자 멕시코 미술협회는 프리다의 회고 전시회를 기획했다. 이때 그녀는 거동조차 할 수 없어서 침대에 누운 채 전시회에 참석해야만 했다.

이 전시회는 멕시코에서 크게 화제가 됐다. 언론은 천재적인 여자화가의 회고전을 무게 있게 다뤘고 관람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전시가 끝난 뒤 얼마 지나지 않은 7월 프리다는 병원에서 입원해 오른쪽 다리를 무릎까지 절단하는 수술을 받았다.

그녀는 절단수술을 받은 뒤 의사가 권한 심리치료의 일환으로 자신의 발을 그리는 작업에 몰두했다. 이때 그려진 그림 속에서 그녀의 발은 피가 위로 솟구치고 엄지발가락 일부는 절단돼 있었다.

발 주변에는 보행자, 발레리나, 건강한 평화, 혁명, 스탈린 만세, 디에고 만세 따위의 글자들이 거친 필체로 적혀져 있다. 또다시 불행은 찾아왔다. 발가락 절단 수술에 이어 골수 이식 수술마저 받아야만 했다. 이 과정에서 세균 감염이 일어나 재수술을 받았다. 그녀는 투병생활에 대해 담담히 회고했다.

“일년을 앓았다. 일곱 번의 척추수술. 파릴 박사가 나를 살렸다. 그는 내게 삶의 기쁨을 되돌려주었다. 아직 휠체어에 앉아 있다. 언제 다시 걸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나는 석고로 된 코르셋을 갖고 있다.

그것은 나를 무시무시한 양철 깡통으로 만들지만 척추를 지탱하는 데 도움을 준다. 통증은 없다. 단지 만취한 듯한 피로가, 당연하게도 자주 절망이 찾아온다. 절망은 그 어떤 단어로도 정의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살고 싶다.”

삶에 대한 의지는 작품 활동으로 표현됐다. 프리다는 “벌써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파릴 박사에게 선물할 작은 그림이다. 모든 정성을 담아 그리고 있다. 난 그림에 욕심이 많다. 무엇보다도 내 그림을 공산주의 혁명에 쓸모 있는 무언가로 바꾸고 싶다”고 말했다.

그녀의 고백은 이어진다. “하지만 지금까지 나는 내 모습을 정직하게 그린 적이 없다. 내 그림이 당에 이바지한 바도 없다. 내게 허락된 건강과 긍정적인 요소 하나하나까지 혁명에 기여할 수 있도록 전력을 다해 싸워야만 한다. 그것이 살아야 할 진짜 이유.”

프리다는 디에고를 사랑했다. 그뿐만 아니라 철학자 맑스, 경제학자 엥겔스, 정치가 레닌과 스탈린, 마오쩌둥의 유물론적 변증법을 신봉했다. 공산주의 사회라는 새로운 세계에 대한 전망을 하나의 이상으로 품었다.

한쪽 다리를 절단한 뒤에도 일기장에 “발이 왜 필요하지? 내게는 날아다닐 날개가 있는데”라고 적었던 강인한 여자이자 천재화가. 그만큼 정신적으로 의연하게 불행을 버텨낸 인간은 역사적으로도 드물었다.

1954년으로 접어들면서 프리다의 상태는 더욱 나빠졌다. 더 이상 그림을 그릴 수가 없을 정도로 종일 끔찍한 통증에 시달리다가 다량의 약물을 삼켜야만 했다. 그녀는 이 괴로움을 끝낼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생(生)은 끝났으나 사랑은 남았다


▎1937년 오랜 망명생활 끝에 멕시코에 정착했다가 비극적인 최후를 맞은 러시아 혁명가 트로츠키(왼쪽에서 둘째)는 한동안 프리다의 집에 머물렀다. 이 무렵 프리다는 그와 짧은 연애를 했다.
1954년 4월, 그녀는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살을 기도했지만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그리고 석 달이 지난 1954년 7월 13일 프리다는 집에서 조용히 눈을 감았다. 47년 동안 불행으로 얼룩진 생애는 비로소 막을 내렸다.

운명을 예측했는지 프리다는 죽기 전날 디에고와의 결혼 25주년을 기념해 사둔 반지를 남편에게 건넸다. 이것은 사랑하는 이들이 치르는 일종의 작별 의식이었다. 프리다는 디에고를 사랑이 가득 담긴 눈으로 바라봤다.

“나 때문에 울지 말아요! 그래요, 당신 때문에 울어요!”

프리다는 일기장의 마지막에 “행복한 퇴장이 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기를 바란다”라고 적었다.

그녀가 누운 관은 뚜껑 없이 별과 낫, 망치가 그려진 붉은 기로 덮여 있었다. 관은 그 상태로 화장장으로 옮겨졌다. 디에고는 그 장례 절차를 침울한 가운데 묵묵히 지켜봤다.

생(生)은 끝났으되 사랑은 그렇게 남았다.

장석주 - 전업작가. 충남 논산 출생. 1979년 조선일보·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와 문학평론 당선으로 등단했다. <월간문학> 신인상(1975년)과 해양문학상(1976)을 수상했다. ‘고려원’ 편집장을 거쳐 청하 출판사를 운영했다. 지금까지 시집, 비평집, 인문서 등 70여 권을 펴냈다. 대표 저서로 <일상의 인문학> <마흔의 서재> <철학자의 사물들> 등이 있다.

201608호 (2016.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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