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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가탐방] 박 대통령 비서실장 출신 인사들의 3인3색 행보 

청와대 수석 출신 당대표 시절에 우린 뭘 하지? 

박성현 기자 park.sunghyun@joongang.co.kr
현역의원들 만나 다독이는 김기춘 “나라 잘되는 것은 국민 모두의 염원”
1기 수석들과 산행하는 허태열 “성공한 대통령 평가받는 게 내 운명”
침묵과 잠행으로 일관하는 이병기 “청와대 시절 언급 적절치 않아”


▎박근혜 정부 3년 반 동안 허태열·김기춘·이병기(사진 왼쪽부터) 등 3명의 대통령 비서실장이 청와대를 거쳐 나갔다.
이정현 새누리당 신임 대표는 4·13 총선 직후인 지난 5월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으로부터 뜻밖의 초청을 받았다. 김 전 실장이 총선 당선을 축하하는 의미에서 식사를 대접하고 싶다는 제안을 해온 것이다. 새누리당 당선인 122명 가운데 호남 지역구에서 승리를 일군 이 대표(전남 순천)와 정운천 의원(전북 전주을) 두 사람만 초대한 축하 자리였기에 더욱 그랬다. 이 대표는 청와대 홍보수석 시절 김 전 실장과 함께 박근혜 대통령을 보필한 핵심 참모 출신이기도 하다.

총선의 여운이 채 가시지 않은 이 자리에서 김 전 실장은 “새누리당 공천으로 호남 지역구에서 당선돼 지역주의 극복에 참 큰일을 했다”고 격려하면서 두 의원에게 “수고했다”는 인사를 건넸다고 정운천 의원이 전했다. 나아가 김 전 실장은 “두 분은 여러 가지 도전에 직면한 우리나라에 보배 같은 존재가 될 것”이라는 취지의 덕담도 보탰다고 한다.

이 대표는 총선 다음날, 새누리당 당대표 경선 도전 의사를 밝혔다. 이때만 해도 그의 승리를 예상하는 이는 그리 흔치 않았다. 이런 정황을 염두에 둔 것인지는 확실치 않으나 김 전 실장은 새누리당 내에서 두 의원의 독특한 입지와 역할을 눈여겨봤음은 분명해 보인다.

정 의원에 따르면 김 전 실장은 자신을 정치일선에서 물러난 신분으로 규정했다고 한다. 김 전 실장은 “나는 2선에 있는 사람”이라며 “정치 일선에 있는 여러분들이 신념과 소신을 갖고 국가를 위해 꿋꿋이 일해주면 좋겠다”고 주문했다는 것이다. “본인이야 세력화를 통해 어떤 일을 도모할 입장은 아니지만, 경제가 잘 돌아가고 국민이 편안한 나라가 돼야 한다는 신념은 여전했다. 김 전 실장에게서 국가에 대한 사명감, 소명감 같은 걸 느꼈다”고 정 의원이 말했다.

세 사람은 박근혜 정부가 성공해야 나라가 발전하고 정권 재창출도 가능하므로 함께 노력해야 한다는 데 인식을 같이했다고 한다. 비록 몸은 청와대를 떠나왔지만 마음은 박근혜 정부를 성심껏 뒷바라지하겠다는 김 전 실장의 의지가 와 닿았다고 정 의원은 돌이켰다.

박근혜 정부 들어 대통령 비서실장직을 거쳐 간 인물은 허태열, 김기춘, 이병기 등 3인이다. 세 사람 모두 공직은 물론이고 눈에 띄는 대외 활동을 자제하는 등 잠행(潛行)으로 일관하는 게 공통점이다. 현 정부의 전직 대통령 비서실장들이 세인의 시야에서 사라진 셈이다.

그나마 국회의원 등 정치인 물밑접촉을 통해 국정의 외곽에서 힘을 보태는 이가 김기춘 전 비서실장이라고 할 수 있다.

김 전 실장은 앞서의 이정현·정운천 의원과는 별개로 유민봉·곽상도·민경욱 의원 등 청와대 비서실 출신 국회의원과도 교분을 다지는 것으로 전해졌다. 곽상도 의원은 “세부적인 대화 내용은 밝히기 어렵지만 김 전 실장이 박 대통령을 모신 비서실 출신 의원들과 식사를 하는 자리를 가졌다”고 말했다.

김기춘, 주변국 4강 대사 부임설에 “전혀 낭설”


▎2015년 1월 박근혜 대통령의 신년 기자회견을 듣고 있는 김기춘 당시 비서실장(왼쪽 넷째). 박 대통령은 이날 김 실장에 대해 “사심이 없는 분”이라고 말했다.
사실 김 전 실장의 정치인 접촉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대통령 비서실장 시절에도 현역의원과의 교류가 잦은 편에 속했다. 2014년 초만 해도 국회 상임위별 새누리당 소속 의원들과 돌아가면서 오찬을 했고, 이를 “소통 친교 차원의 행사”라는 설명이 뒤따랐다. 또 4·13 총선 국면에서는 나경원·민경욱·이상휘 등 새누리당 후보의 선거 사무실, 유세현장 등을 격려 방문하기도 했다.

20대 국회 원구성에 즈음해 새누리당 의원들과의 접촉면을 넓혀가는 것과 관련해 김 전 실장은 <월간중앙>과의 전화 통화에서 “특별한 용무가 있어서라기보다는 평소 교분 있는 분과 당선을 축하하는 식사를 했을 뿐”이라며 확대 해석을 경계했다. 그는 “어떠한 정치행위를 한 것도 아니며 정치와는 관계가 없다”고 선을 그었다.

의원들과의 만남에서 박 대통령의 임기 후반 국정운영에 힘을 보태야 한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고 들었다.

“아니다. 나는 지금 밖에 있는 사람인데 국정운영 관련 얘기를 하겠나. 그저 친분관계로 만난 것이다.”

여러모로 형편이 어려워지는 나라 걱정을 하지 않았나?

“나라가 잘 돼야 한다는 것은 국민 모두의 염원 아닌가. 나도 선거를 해봤기에 선거에서 고생한 분들을 위로하는 의미에서 식사를 했을 뿐이다.”

한때 김 전 실장이 주변 4강국의 한 대사로 부임한다는 얘기가 돌았다. 여권에서 심도 있게 논의됐으나 막판 결정과정에서 보류됐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김 전 실장은 “전혀 낭설”이라며 “그저 조용히 여생을 보내는 입장인데 그런 말을 하는 건 적절치 않다”고 일축했다.

허태열, “1년 반 남은 기간 동안 새 일 도모 안 해”


▎2013년 당시 허태열 비서실장이 청와대에서 열린 수석비서관회의에서 이정현 정무수석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김 전 실장 말대로 그는 보수의 원로로서 후배 정치인들을 다독거리는 역할을 하는지도 모른다. 정운천 의원도 “김 전 실장에게서 후배들을 따뜻하게 격려하고 힘차게 이끌어주는 옛날 정치 원로로서의 풍모를 느낀다”고 말했다. “요즘은 세상이 각박해서 그런지 (후배가 선배를 이끌어주는) 그런 문화가 많이 퇴색했는데 김 전 실장은 그런 향기를 내뿜는다.”

김 전 실장은 우병우 청와대 민정수석을 발탁한 인물로도 알려져 있다. 검찰 내 마당발로 통하는 김 전 실장의 정치권 나들이는 본인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정치적 해석을 낳게 마련이다. 그를 최근 만나본 여권의 한 인사는 “김 전 실장은 박 대통령에 대한 충성심과 청와대 재임 당시의 장악력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며 “그의 일련의 행보는 총선 후 흔들리던 여권의 안정화에 기여함은 물론 임기 후반기에 언제든지 활용 가능한 지렛대나 ‘빅카드’로서의 여지도 남긴다”고 평했다.

박근혜 대통령의 ‘1호 비서실장’을 지낸 허태열 전 비서실장도 정중동(靜中動)의 삶을 산다. 2013년 8월 청와대에서 물러난 허 전 실장은 박근혜 정부 1기 청와대 수석들과 한두 달에 한 번 정도 만난다. 요즘도 한 번에 3~4명, 어떤 때는 7~8명이 함께 산행을 한다고 국정기획수석을 지낸 유민봉 의원이 전했다. 청와대 초대 참모들의 모임이라고 해서 ‘청초회(靑初會)’라 불리며 국회에서는 이정현 새누리당 대표(정무수석), 유민봉·곽상도(민정수석) 의원 등이 이 모임 출신이다. 허 전 실장은 청초회 모임과 관련해 “젊은 사람들이 더욱 분발해 박근혜 정부의 성공에 힘을 보태자는 취지”라고 설명했다. 곽 의원은 “허 전 실장이 대외 활동은 많지 않지만 예전에 함께 일한 동료·후배들과 친밀하게 교류한다”고 했다.

박근혜 정부에서는 성균관대 출신의 약진이 두드러졌다. 전·현직 총리 3인(정홍원·이완구·황교안)이 모두 성대 출신이고 청초회도 성대 출신이 대세다. 허 전 실장도 성대 출신이다. 모교인 성대에서 석좌초빙교수로 활동하는 허 전 실장은 2학기엔 10회 안팎으로 학부생 특강을 한다. 학교 선배이자 사회 선배인 그가 후배들에게 들려주는 인생론이 주제다. “학창시절, 젊은 시절을 반추하면서 후학들에게 조언하고 교훈을 전하는 강의”라고 허 전 실장은 덧붙였다.

4·13 총선을 앞두고선 그의 광폭(廣幅) 행보가 보수 진영의 안테나에 잡힌 적도 있었다. 여권 소식통에 따르면 허 전 실장은 당시 보수 성향의 원로, 지인 등과 만나 총선 후 여권의 진로와 결속에 관한 의견을 나눴다고 한다. 나아가 허 전 실장이 총선 후 정국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리라는 인상마저 남겼다는 것. 이 소식통은 “허 전 실장이 집권 후반기 국정운영과 차기 대선에서의 여권 경쟁력 강화에 중추적 기능을 하는 게 아니냐는 관측이 돌 정도로 그의 보폭이 빨랐다”면서 “심지어 청와대의 오더를 받고 깃발을 들 채비를 한다는 말까지 더해졌다”고 귀띔했다. 하지만 얼마 뒤 그가 활동을 접는 통에 주변에서도 의아해 했다는 후문이다.

허 전 실장은 이에 대해 “그건 과장된 얘기”라며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나는 운명적으로 박 대통령이 성공한 대통령이라는 평가를 받도록 해야 한다. 정부에 도움이 될 일이 있으면 홍보하고, 정부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이들에게 이해를 돋우는 일을 하는 것일 뿐이다. 무슨 거창한 계획이 있어서 그런 건 전혀 아니다. 대통령 비서실장을 지낸 입장에서 누가 문의해오면 응답은 해야 하지 않나?”

자신을 둘러싼 이러쿵저러쿵 소문은 말 그대로 “상상력을 보탠 얘기들”에 불과하다고 그는 말했다. 박근혜 정부 남은 임기 1년 반 남짓한 기간에 뭔가 새로운 일을 도모하기 보다는 후방에서 조용히 성원하는 게 자신의 직분이라는 말이다.

상대적으로 근황이 조용한 쪽이 지난 5월까지 청와대 살림을 책임졌던 이병기 전 대통령 비서실장이다. 박근혜 정부 들어 주일대사에 임명된 그는 국정원장, 대통령 비서실장 등늘 권력의 심부(深部)에 자리했다. 핵심 요직으로 승승장구한 그의 최근 동선은 물음표로 남아 있다. 그는 평소 취재진의 전화, 문자를 잘 받아줬다. 하지만 최근 들어서는 그런 연락마저 사양할 때도 있다. 그는 퇴임 직후 “청와대를 나간 대통령 비서실장이 내부의 얘기를 전하는 건 적절치 않다”고 말한 바 있다. 어떤 식으로든 자신이 언론에 오르내리는 건 원치 않는다는 입장도 함께 피력하기도 했다.

“대통령이 안 불러주니까 (비서실장은) 안 움직이는 것”


▎이병기 전 대통령 비서실장(왼쪽)은 박근혜 정부에서 주일대사, 국정원장, 대통령 비서실장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박근혜 정부의 전직 대통령 비서실장은 하나같이 자세를 낮추고 절제된 행보를 보인다. 튄다는 느낌을 주는 법이 없다. 이는 역대 정부의 대통령 비서실장들이 퇴임 후 펼친 화려한 대외 행보와는 사뭇 다른 풍경이다. 이명박 정부의 류우익 초대 대통령실장은 청와대를 나와 주중대사와 통일부장관으로 일했고, 정정길 대통령실장도 한국학중앙연구원장으로 공직생활을 이어나갔다. 노무현 정부 또한 김우식 대통령 비서실장이 부총리 겸 과학기술부장관으로 발탁되는 등 국무위원으로도 대통령과 호흡을 함께했다.

현 정부의 전직 대통령 비서실장들은 공직은 고사하고 불가피한 접촉 외에는 정치권과도 거리를 두려는 기색이 역력하다.

예전의 대통령 비서실장들은 단순히 대통령의 명(命)의 출납을 담당하는 데 그치지 않고 국가 정책의 기획에서 추진, 집행, 평가까지 관여했고, 나아가 일반 국민들의 일상적인 삶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대통령 비서실장론>, 함성득 지음)는 평가를 받아왔다. 하지만 박근혜 정부의 대통령 비서실장은 대통령과의 면담도 자유자재로 이뤄지지 않아 권능과 역할이 예전만 못하다는 분석도 나온다.

한국대통령학연구소 부소장인 임동욱 한국 교통대 행정학 교수는 “비서실장을 권능과 활동반경에 따라 실세형, 정무형, 관리형, 그림자형으로 나눈다면 박근혜 정부의 경우 대부분 눈에 띄지 않는 그림자형에 가깝다”고 했다. 그는 이어 “실질적인 업무는 수행하면서도 존재 자체가 드러나지 않는 비서실장에게 파워가 실리기는 어려운 것”이라고 말했다. 박근혜 정부의 비서실장 출신 인사들의 존재감이나 영향력은 다분히 제한적일 수 밖에 없다는 진단이다.

그 연장선에서 현 정부 대통령 비서실장은 퇴임 후에도 그림자형에 머문다는 게 임 교수의 해석이다. 그는 “대통령의 정치철학을 누구보다 잘 아는 전직 대통령 비서실장을 국정에 활용하지 않고 묵히는 건 국가적으로 손해”라고 지적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영원한 비서실장’이라 불리는 박지원 국민의당 비대위원장은 “대통령이 안 불러주니까 안 움직이는 것 아닐까”라며 전직 비서실장들의 잠행 이유를 추론했다. 대통령 비서진 중에서 집권여당 대표가 배출되는 요즘, 비서실을 총괄하던 전직 비서실장 주변은 정적만 감돈다.

- 박성현 기자 park.sunghyun@joongang.co.kr

201609호 (2016.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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