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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권 86세대의 변천사] 경쟁관계 접어든 86세대 앞날 ‘강한 자만 살아남는다’ 

 

추인영 기자 chu.inyoung@joongang.co.kr
DJ가 영입한 전대협 4인방, 정치에 집단 입문했지만 결국 제갈 길 떠나... 2010년 조직화 실패 끝 변화 시도 “시대과제 해결은 집단 아닌 정치인 개인의 몫”

▎우상호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가 5월 8일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당 원내부대표단을 소개하고 있다. 왼쪽부터 이재정 원내대변인, 이훈·유동수·문미옥·김병욱·백혜련 원내부대표, 우상호 원내대표(기준), 박완주 원내수석부대표, 박정·강병원·송기헌 원내부대표, 기동민 원내대변인. 박 원내수석부대표와 기 원내대변인은 우 원내대표의 전대협 후배들이다.
내년이면 87년 체제가 들어선 지 30주년이 된다. 87년 민주화운동의 주역이었던 386 세대(나이 30대·학번 80년대·출생연도 60년대)는 이제 50대로써 제도권 정치의 중심으로 부상했다. 하지만 학생운동권 출신을 대표하는 인물 중 하나인 더불어민주당 우상호 원내대표는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집단으로서의 386은 실패했다”고 선언했다. 30대 청년에서 50대 중년이 된 이들은 흘러간 세월을 반영하듯 각자의 방식대로 진화했다. 이들의 정치 행로를 들여다보면 ‘각자도생’, ‘적자생존’이라는 말이 더 어울리는 듯하다.

386은 ‘80년대 학생운동을 했던 정치인’이라는 의미로 고유명사처럼 됐다. 386에서 486으로, 그리고 586으로 불리다가 이제는 ‘86세대’로 통한다. 우 원내대표는 “‘80년대에 학생운동을 했던 사람’의 통칭이 아니라 총학생회장을 했거나 그에 준하는 역할을 했던 사람들”이라고 규정한다. 삼엄한 군부독재 시절, 민주화를 외치며 반독재 투쟁에 나섰던 이들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결은 다르다.

송영길 의원(연세대)은 85년 서울대 총학생회장이던 김민석 민주당 대표가 초대 의장을 맡았던 전국학생총연합(전학련) 출신이고, 강기정 전 의원은 85년 전남대에서 전학련 산하 투쟁조직인 삼민투쟁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했다. 이인영(고려대)·우상호(연세대) 의원은 87년 1기 의장과 부의장으로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을 이끌었다. 우 원내 대표가 “386은 한 번도 하나인 적이 없었다”고 말하는 이유엔 이처럼 다양한 출신도 자리한다.

386 중에서도 특히 전대협의 존재는 남다르다. 김대중 총재가 직접 영입하고 키운 인물들이라서다. 서양호 두문정치 전략연구소장은 전대협 출신 정치인들에 대해 “김대중의 ‘새 피 수혈론’에 의해 개별 명망가 형태로 들어왔지, 자수성가한 케이스는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 때문에 이들에겐 정치적, 도덕적으로 항상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왔다는 평가도 나온다. 박성민 민 컨설팅 대표는 “기대가 커서 실망이 큰 거지, 86그룹이 다른 세력보다 역량이 없다거나 비도덕적이진 않다”고 말했다.

86세대의 정치권 진출은 2000년부터 본격화됐다. 전대협 세대가 김대중 당시 총재의 새천년민주당에 영입돼 처음 16대 총선에 출마했을 때다. 김대중 전 대통령과 전대협 세대는 이한열 열사를 통해 이어졌다. 김 전 대통령은 6월 민주 항쟁 결과 가택연금이 해제돼 정치활동을 재개할 수 있었다. 전대협은 이한열 열사의 장례 절차를 논의하는 자리에서 전국적인 대학생 대중조직 건설을 결의하며 결성됐다. 당시 이들의 정치권 진출은 집단적이었지만 전대협 1기 의장이었던 이인영 의원이 비례대표를 제안받은 게 그 시초였다고 한다.

정치권 집단 입문 시초는 ‘이인영 비례대표’ 제안


▎1987년 6월 12일 명동성당 안에서 사흘째 농성시위를 벌이던 학생과 시민 350여 명이 본당 앞 잔디광장에 모여 비폭력 시위를 다짐하는 집회를 하고 있다.
2000년 총선을 앞두고 김대중 총재의 특보단장으로서 새천년민주당 공천을 주도하던 정균환 전 의원은 이인영에게 비례대표를 제안했다. 정 전 단장과 이인영 의원은 오래전 기억을 더듬어 이 같은 취지의 대화를 했다고 밝혔다.

▷정균환= “이인영씨가 청년 그룹을 묶어주는 역할을 해줄 적임자입니다. 비례대표로 출마해주세요.”

▷이인영= “비례대표는 하지 않겠습니다. 지역구에 나가겠습니다.”

▷정균환= “아니, 이번 선거 때는 유세를 같이 해주고 지역구는 다음에 출마하면 되지요”

▷이인영= “아닙니다. 지역구에서 제 힘으로 싸워보고 싶습니다. 저와 함께 활동했던 청년들도 다같이 공천을 주십시오.”

정 전 단장은 <월간중앙>과의 통화에서 “비례대표를 한 뒤에 지역구에 나가라고 수차례 설득했지만 이인영 의원이 끝까지 지역구를 고집했다”며 “이 의원의 고집이 너무 세더라”라고 혀를 내둘렀다. 이 의원은 “비례대표로 무혈입성을 하는 것보단 지역구에서 맞붙고 싶었다. 혼자 정치를 하는 것보다 학생운동을 같이 했던 동지들과 함께 정치를 하면 훨씬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렇게 영입된 청년들은 전대협 출신의 이인영(서울 구로 갑)을 비롯해 우상호(서울 서대문갑), 임종석(서울 성동), 오영식(비례대표) 등이다. 높은 기대감 속에 출발했지만 결과는 참패. 4명 중 살아 돌아온 사람은 임종석이 유일했다.

86세대는 17대 국회에서 새 시대를 열었다. 열린우리당 당선자 152명 중 초선만 108명인 초선 돌풍 속에 86세대만 20명이 넘었다. 전대협에서도 1기(이인영)·2기(오영식)·3기(임종석) 의장을 포함해 12명이나 국회에 진출했다. 당시 전대협 동우회 전문환 회장은 “우리 사회의 비판 세력이 17대 총선을 계기로 중심 세력으로 변모했다”고 자평했다.

하지만 세간의 기대와는 달리 이들은 중심 세력으로 자리 잡지 못했다. 김근태·노무현·정세균 등을 중심으로 각자 다른 길을 걸었다. 이기우·이인영·이철우 의원은 민주평화국민연대(민평련)의 김근태계로, 강기정·오영식·최재성 의원은 정세균계로 분류됐다. 김태년·백원우·서갑원·이광재 의원은 친노무현계의 길을 택했다. 이에 대해 신율 명지대 교수는 “우리나라의 정당구조가 기본적으로 젊은 세대들이 힘을 모아 개혁하기에는 역부족이기 때문에 당내 권력에 순응적인 모습을 보였다”며 “공천 같은 현실 문제에 부닥쳐보니 본인들 스스로가 정치권력화 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 같은 비판 속에 86세대는 통합민주당 간판으로 나선 18대 총선에서 씁쓸한 성적표를 받아들어야 했다. 18대에 살아남은 86세대는 송영길·최재성·조정식·서갑원 정도였다. 전대협 출신 중에선 최재성 의원이 유일한 생존자였다. 70년대 반독재 투쟁의 간판급 인사였던 김근태·유인태·한명숙 의원까지 고배를 마셨다. 손학규 대표는 “중산층과 서민을 위한 정당으로서 충분한 대안을 제시하지 못했다”고 자책했다.

김호기 연세대 교수는 당시 한 대담에서 “1987년 이래 정치 담론을 지배했던 민주화 시대의 마감을 알리는 선거”라고 규정했다. 신율 교수는 “(북한과의 관계 개선을 지향하는) 노무현 정부 때 북한이 핵실험을 했다는 자체가 국민들에게는 너무 충격이었다”며 “친노·운동권들의 ‘내가 하는 건 선이고 반대 쪽은 악’이라는 이분법적 접근에 대한 국민들의 반감도 있었다”고 설명했다.

이들은 절치부심 끝에 19대 국회에서 대거 생환했다. 특히 2010년을 정점으로 재기에 성공한 듯했다. 민주당의 10·3 전당대회에 출마한 이인영 의원은 같은 전대협 출신인 최재성 의원과의 단일화 실패에도 불구하고 4위를 기록해 지도부에 입성했다. ‘빅 3’(손학규·정동영·정세균)와 맞붙은 상황에서 거둔 기대 이상의 성적이었다. 이 최고위원이 얻은 6453표와 최재성 의원이 얻은 4051표를 합치면 3위를 한 정세균 전 대표(1만256표)를 넘어설 정도였다. 같은 해 치러진 지방선거에서 86세대의 약진도 두드러졌다. 송영길 인천시장, 안희정 충남도지사, 이광재 강원도지사 등이 탄생하면서 ‘86의 시대’를 예고했다.

진보행동에서 더미래로 또 다른 ‘변신’


▎2010년 10월 4일 국회에서 열린 민주당 최고위원회의에 신임 지도부가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왼쪽부터 이인영·정동영 최고위원, 손학규 대표, 박지원 원내대표, 천정배 최고위원. 이 의원은 빅3(손학규·정동영·정세균)와의 쉽지 않은 표 대결에서 4위로 지도부에 입성해 486 세대 선두주자로 나섰다.
이런 여세를 몰아 86세대는 정치권 진출 이후로는 사실상 처음으로 조직화를 시도했다. 민주통합당 내 86세대가 주축이 돼 ‘진보행동’을 결성한 것이다. 당내 전대협 출신 소모임이던 ‘삼수(셋째 주 수요일)회’를 ‘민생 중심, 현장 진보’를 기치로 확대한 결사체였다. 진보행동에는 19대 국회의원 25명(강기정·김기식·김민기·김재윤·김태년·김현미·박수현·박완주·박홍근·오영식·우상호·유은혜·윤호중·은수미·이상직·이언주·이인영·정호준·조정식·최재성·홍익표·김승남·김성주·진성준)과 원외의 김영춘·백원우·이기우·신동근·최인호·임미애·오중기 등 총 44명이 참여했다. 대부분 김대중 정부 때인 2000년 총선과 노무현 정부 때인 2004년 총선을 통해 정치권에 진출한 인사들이다.

하지만 진보행동은 오래 가지 못했다. 2012년 대선 패배가 결정적이었다. 이듬해 3월 자진 해체라는 초강수를 뒀다. 2013년 3월 19일 진보행동은 ‘진보행동의 성찰과 민주당 혁신방안 토론회’를 열고 “지도부를 맡은 선배 정치인들의 당직 요청에 많은 486 정치인들이 합류하면서 우리는 당권파나 특정계로 분류됐다”며 “내부 문제를 극복하려는 노력보다 당시 주류 집단의 논리를 대변하거나 변호하는 역할을 맡게 됐다”고 고백했다. “기존의 정치문법을 배웠고 기존의 관행을 혁파하는 데 주저했다”, “독자적인 색깔과 브랜드를 형성하지 못하다보니 다양한 목소리를 당에 투영하는 통로의 역할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같은 반성도 쏟아져 나왔다.

박성민 대표는 86세대에 대해 “이들이 쟁취한 독재 타도와 직선제 쟁취라는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최대 성과가 30년 전에 머물러 있다는 게 문제”라고 지적했다. “30년 전 히트곡 하나 갖고 7080(가요 프로그램)에 나오는 가수”라는 비유대로 “개혁이나 혁명을 주도하는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의미다. 박 대표는 “국민은 투쟁적이고 강경한 이미지에 실망한 게 아니다. 말만 강경하게 하고 실제로 사회적 변화를 이끌어내진 못했다는 게 문제”라며 “조직화된 힘을 정당으로 결합시키지 못하고 파편화시킨 책임이 있다”고 말했다.

86세대에 대한 비판은 고착화된 이념의 문제로도 이어진다. 더민주의 싱크탱크인 민주정책연구원 이범 부원장은 2015년 7월 15일 ‘복지, 486의 알리바이’란 제목의 온라인 칼럼에서 “야권 486이 보여준 무기력의 가장 중요한 원인은 사상적 업그레이드 없이 잔존하는 사상으로 버틴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했다. “보수는 2000년대 (정권 교체로 인해) 엄청난 쇼크를 받고 사상운동을 전개한다. 원래 한국의 보수는 ‘친일’과 ‘독재’라는 지적 앞에서 꼬리를 내릴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지만 뉴라이트는 ‘경제’와 ‘반공’을 중심으로 가치 체계를 뒤집어놨다. 한국의 보수는 자신이 도덕적으로 옳은 일을 한다는 자신감이 부족했는데 뉴라이트 사상운동 이후 자신의 과거와 현재에 대해 도덕적 자신감을 가지게 됐다.”

안철수 등 전문가 부류가 86세대 경쟁 자극


▎민주통합당 486 정치인 모임 ‘진보행동’은 2013년 3월 19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토론회를 열어 486 모임 해체를 선언했다.
이런 평가를 인정하면서 스스로 해체한 진보행동은 2015년 3월 변화를 모색했다. ‘더좋은미래’의 결성이다. 김기식·남인순·박완주·박홍근·배재정·신경민·우원식·유은혜·은수미·이목희·이학영·진선미·진성준·홍익표·홍종학·김성주·김승남·김현미·박수현·우상호·이인영·윤관석 의원 등 22명이 참여했다. 더좋은미래와 진보행동의 멤버십은 그 구성에서 차이가 있다. 더미래의 구성원은 86세대가 다수지만 특정 계파로 분류되는 인사는 모두 제외했다. 우 원내대표는 “시민운동 출신, 학생운동 출신, 민청련(민주화운동청년연합) 출신 등이 경제민주화, 보편적 복지를 중심으로 노동중심 경제구조를 고민하면서 한데 묶였다”고 했다.

더미래는 당시 의원들이 1000만원씩 출연해 설립한 더미래연구소의 재단법인 등록을 마치고 대선공약 개발 등 연구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20대 국회 들어서도 강훈식·권미혁·기동민·김영호·김현권·도종환·신동근·안호영·오영훈·위성곤·이재정·정춘숙·제윤경 의원이 새로 가입하는 등 세를 키우고 있다. 20대 국회 낙선자 8명을 포함하면 전·현직 국회의원만 총 34명이다.

의원 수로만 보면 86세대의 전성기는 이번 20대 국회다. 역대 어느 국회보다도 20대 국회에 가장 많이 진출했다. 전대협에서 활동했던 의원만 10명에 달하고, 86세대 전체로는 이들이 대거 진입했던 17대 국회보다 더 많다.

하지만 이들은 “우리는 누굴 조직적으로 밀기 위해 모인 적이 없다”고 입을 모은다. 2014년 이인영 의원이 전당대회에 출마했을 때 86세대 중 이 의원을 도운 사람은 일부였다. 올해 8·27 전당대회에선 ‘강자’로 꼽혔던 송영길 의원이 예상을 뒤엎고 컷오프 됐다. 우 원내대표도 “진보행동을 해체한 후로는 86세대가 집단적으로 누군가를 도운 적이 없다. 내가 원내대표에 출마했을 때도 86세대는 나를 돕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를 두고 “386이 득세하던 시대로부터 몇 명만 살아남았다”는 평가가 나온다. 86세대의 막내격인 한 관계자는 “86세대가 분화하면서 각자 경쟁관계와 긴장관계가 형성됐다”며 “새로운 시대정신을 읽기 위해 민생문제에 집중하면서 운동권 이미지를 빼기 시작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우 원내대표는 19대 국회에서 미래창조과학방송통신위원회 간사를 맡아 통신비 인하 문제에 천착했고, 이인영 의원은 환경노동위원회 간사를 맡아 기업·노동 현장방문에 공을 들였다.

새 시대에 적응하지 못하면 도태된다. 적자생존의 법칙은 정치권도 예외가 아니다. 86세대에 속하는 한 국회의원 보좌관은 “이들을 자극한 건 2010년 서울시장 선거에서 돌풍을 일으킨 안철수 같은 전문가 그룹의 등장”이라고 말했다.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지는 않았더라도 자기 영역에서 성공해 공익적 활동을 하며 인지도를 쌓은 부류다. 새로운 것을 보여주지 못하고 과거의 영광에 안주하는 기존 86세대에 대해 실망한 국민들이 이런 정치인들을 통해 희망을 찾는다는 것이다.

20대 국회의원의 면면을 보면 같은 86세대라도 살아온 삶의 궤적과 정치 입문 경로는 제각각이다. 80년대 학생운동을 했던 이철희 의원은 “이제 정치 세대로서나 정치 그룹으로서나 86은 없다고 본다”고 말했다. “80년대의 시대적 과제는 민주화였다. 지금은 논란의 여지를 차치하고 민주화는 어느 정도 해결됐다”는 이유에서다. 이 의원은 “경제민주화가 됐든, 복지가 됐든 지금 시대에 맞는 숙제를 정치권에서 어떻게 풀어내느냐의 문제는 집단이 아닌 정치인 각자의 몫이 됐다”고 말했다.

- 추인영 기자 chu.inyoung@joongang.co.kr

201609호 (2016.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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