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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인물] 영화 <인천상륙작전>의 실제 주인공 함명수 전 해군참모총장 

“우리 목숨보다는 작전 성공이 우선이었다” 

글 박지현 기자 centerpark@joongang.co.kr / 사진 장진영 기자 artjang@joongang.co.kr
서울인민위원장 이승엽의 고향 영흥도가 첩보대의 베이스캠프, 북한군 등으로 위장한 뒤 정보 빼내… “팔미도 등대 전투 통해 인천 탈환했다는 것은 사실과 달라. 적이 없는데 전투가 있었겠나?”

▎인천상륙작전은 노르망디 상륙작전과 비교될 만큼 세계적인 작전으로 인정받았다. 비밀첩보 ‘X-RAY’작전은 인천상륙작전 성공의 밑거름이 됐다는 평가를 받았다. 함명수 전 해군참모총장(당시 소령·가운데) 이 이끈 16명의 해군첩보부대원의 공로가 컸다. 뒤 사진은 미 7보병사단 32보병연대가 인천에 상륙하는 모습.
“인천으로 가는 길을 자네가 열어주게.”(맥아더 장군)

“인천에서 기다리겠습니다.”(장학수 대위)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키기 위한 비밀 첩보 ‘X-RAY 작전’을 그린 영화 <인천상륙작전> 대사의 일부다. 평단(評壇)의 일부 혹평에도 불구하고 8월 14일 기준 600만 관객을 돌파하며 흥행가도를 달리고 있다. 영화는 지금부터 66년 전에 일어났던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됐다.

6·25 전쟁이 발발한 지 2개월 만인 1950년 8월 24일 새벽, 어선 백구(白鷗)호는 덜컹거리며 인천 영흥도 십리포 해안에 닿았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청년 17명이 몸을 낮춰 배에서 내렸다. 함명수 소령이 이끄는 해군 첩보부대원들이었다. 이들은 영흥도를 비롯해 월미도·인천에 잠입해 북한군 해안포대의 위치와 수·규모·병력배치 등의 정보를 빼내 맥아더 사령부에 보고했다.

훗날 이 작전은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성공의 밑거름이 됐다는 평가를 받았다. 당시 함명수 소령과 작전 중 전사한 고(故) 임병래 소위, 고 홍시욱 삼등병조(하사) 등 3명은 미국이 외국군에 주는 최고훈장인 은성무공훈장(Silver Star)을 받았다. 17명의 소규모 부대에서 3명이나 은성무공훈장이 수여된 건 미군 역사에서도 이례적인 일이라고 한다.

함명수(88) 제독은 일제 강점기였던 1928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최고 수재들이 갈 수 있었던 평양사범학교에 입학했다. ‘6·25 전쟁의 영웅’ 백선엽(96) 장군이 함 제독의 이 학교 7년 선배다. 함 제독은 17세 어린 나이에 수학 교사를 마다하고 군인의 길을 택했다. “나라를 지키는 군대가 있어야 나라가 강해진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1946년 2월 해군사관학교 전신인 해군병학교에 1기로 입교해 해군 소위로 임관했다. 전장(戰場)에서 혁혁한 공을 세우던 그는 36세가 되던 해 7대 해군참모총장에 올랐다.

2008년 9월 건군 60년을 맞아 군인정신의 표상으로 추앙받는 명장 18명이 선정됐다. 육군 6명, 해군 5명, 공군 3명, 해병대 4명 등 18명 가운데 현재 생존해 있는 사람은 공정식(91) 전 해병대사령관(6대)과 함 총장뿐이다.

<월간중앙>이 8월 10일 서울 해군호텔에서 함명수 전 해군참모총장을 만나 인터뷰했다. 귀만 조금 들리지 않을 뿐 미수(米壽)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그는 정정했다. 반세기가 더 지난 일이지만 그날의 작전을 잘 기억하고 있었다.

<인천상륙작전> 영화를 보면서 소감이 남달랐겠다.

“영화가 알려지면서 연락이 많이 왔다. 시간이 많이 흘렀지만 마음은 흐뭇하다. 많은 사람이 인천상륙작전은 유엔군이 한 것으로만 안다. 하지만 작전이 성공하기까지 한국군의 희생이 컸다. (영화가) 그 사실을 알리는 계기가 된 것 같아 기뻤다.”

작전명 ‘X-RAY’는 직접 명명한 것인가?

“그렇다. 적진을 엑스레이 사진을 통해 보는 것처럼 자세히 보겠다는 의미였다.”

어떻게 해서 작전에 투입됐나?

“1950년 8월 12일 손원일 제독(초대 해군참모총장)에게 첩보임무를 부여받았다. 인천상륙작전에 필요한 정보를 수집하라는 임무였다. 한국해군첩보활동은 한국 지리와 언어·문화를 잘 아는 한국인들만이 할 수 있었다. 두 발로 뛰어야 하는 휴민트(Human Intelligence)였다.”

팀은 어떻게 꾸렸나?

“해군 정보국장을 맡고 있던 나는 첩보 임무를 받으면서 특수공작대 해양공사팀 선임장교 김순기 중위, 임병래 소위, 장정택 소위를 불러서 3개 팀을 꾸렸다. ‘2~3일 안에 당신이 신임하는 하사관 네댓 명을 선발해 첩보대 특공대를 조직하라’고 했다.”

팀원을 미혼자로만 구성하라고 했다던데.

“생환을 장담하기 어려운 특수작전이라 기혼자들을 투입하기에는 부담이 컸다. 작전이 누설될 위험도 있었다. 약혼녀가 있었던 장정택 소위는 (약혼녀에게) 아무런 연락을 하지 못하는 바람에 파혼당하고 말았다.”

극비, 또 극비… 도착할 때까지 부대원도 몰라


▎1. 인천상륙작전 성공 후 국군이 기념행진을 하고 있다. / 2. 영화 <인천상륙작전>은 비밀첩보부대의 이야기를 그렸다. 배우 이정재(장학수 대위 역)는 실제 작전에서 전사한 고(故) 임병래 소위 역할을 맡았다.
부대원들은 8월 18일 출발하기 전, 부산 자갈치시장에 모여 소주를 나눠 마신 후 머리카락과 손톱·발톱을 깎아 사물함에 보관했다. 함 제독은 도착할 때까지 임무와 목적지를 알리지 않았다. 근해에 이르러서야 첩보부대의 임무를 알려줬다.

떠나기 직전의 심정은 어땠나?

“살아 돌아올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가 아니었다. 목숨을 잃더라도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당시 열혈 청년 모두가 그랬다. 풍전등화의 상황이었다. 대한민국이 살아남을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였다.”

영흥도 도착까지 배로 일주일이나 걸린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가 탄 백구호는 군함이 아니라 일반 어선 화물선을 개조한 첩보선으로 정보함이다. 자폭용 폭약도 배 밑바닥에 설치돼 있었다. 적에 발각되지 않으려고 천천히 움직였기 때문에 시간이 걸렸다.”

도착하자마자 충격적인 보고를 받았다는데.

“북한이 그해 6월 28일 서울을 점령한 이후 서울인민위원회 의장(서울시장)으로 임명한 이승엽의 고향이 영흥도였다. 섬에 이승엽의 친척이나 그를 아는 사람이 많았을 것 아닌가. 호랑이굴에 들어온 셈이었다. 보고를 받자마자 아찔하더라.”

그래도 임무를 되돌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영흥국민학교 교실을 본부로 첩보대원들은 인천 등지에 흩어져 잠입했다. 김순기 중위, 임병래 소위 팀은 인천에서 북한군 보안서원으로 일하던 권상우 씨와 김정국 씨를 포섭해 협조를 받았다. 다른 곳에서 피난 온 권씨와 김씨의 친척 등으로 가장했다. 함 제독은 본지와 인터뷰를 통해 처음으로 권씨와 김씨의 이름을 공개했다.

작전은 어떻게 진행됐나?

“김순기 중위는 인천경비부에서 근무할 때 권씨를 정보원으로 활용한 인연이 있었다. 권씨는 주먹을 꽤나 잘 쓰는 건달 출신이었다. 권씨와 김씨가 가짜 통행증을 만들어줬고 대원들이 월미도 해안도로 보수 공사장과 방어진지 구축 공사장에 북한 인부로 위장취업 하도록 도와줬다.”

숙식은 어떻게 해결했나?

“첩보부대의 공로는 사실 인천시민과 영흥도 주민들에게 돌려야 한다. 빈집들에 배치해서 탄로나지 않도록 해줬을 뿐 아니라 먹고 자는 문제도 해결해줬다. 인민군 차량 감시를 위해서 야산의 다리 밑에서 잘 때도 먹을 것을 갖다 주기도 했다.”

맥아더 사령부에 보고하는 내용들은 무엇이었나?

“인천시내를 출입하는 병력, 물자, 항만 경비상태 등이었다. 예컨대 ‘월미도 해안에 4문의 고사포와 400명의 병력이 있다. 소월미도에 25정의 기관총과 5문의 포가 있다. 인천항 부두 안벽 참호진지에는 1개 중대 병력이 있다’는 식으로 보고했다. 정규군이 타고 올라야 할 안벽(岸壁)은 자기 키보다 얼마나 높은지 목측(目測)한 뒤 ‘키보다 손으로 몇 뼘 높다’ 등의 정보로 전달했다. 그래서 인천상륙작전에 사다리와 그물이 동원이 됐던 것이다.”

영화에서는 팔미도 등대에서의 전투를 통해 인천을 어렵게 탈환하는 것으로 나오는데 그것도 사실인가?

“아니다. 팔미도 등대에는 인민군이 없었다. 8월 20일 캐나다 구축함 애서배스칸호의 병력이 이미 팔미도 등대 통신시설을 다 파괴해놓았다. 적이 없는데 무슨 전투가 있겠나. 9월 3일과 9일 이미 두 차례 유진 클라크 대위 팀이 팔미도에 정찰을 다녀왔다. 9월 15일 팔미도에 적이 들어왔다고 하는데 사실이라면 한국 해군의 책임 문제가 된다.”

“먼저 떠난 전우들 앞에서는 할 말이 없다”


▎1. 함명수 제독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측근이기도 했다. 1965년 여름 경남 진해 별장에서 휴가 중인 박정희 대통령(오른쪽)과 함명수 제독(가운데). 왼쪽이 김종필 전 총재다. / 2. 1966년 베트남전쟁 당시 함명수 전 해군참모총장이 주월 한국군을 시찰하고 있다.
영화에서는 ‘X-RAY’ 작전에 장학수 대위(이정재 역)로 분한 임병래 소위와 홍시욱 하사가 전사했다. 실제로는 인천상륙작전을 이틀 앞둔 9월 13일 첩보부대의 철수 명령이 떨어졌지만 잔무 처리를 위해 첩보대원 6명이 남겨졌다. 그때 허를 찔렸다.

X-RAY팀이 영흥도에 주둔해 있던 것을 탐지한 인민군 중대 병력이 9월 14일 영흥도로 쳐들어왔다. 임병래 소위를 비롯한 첩보부대원 6명과 청년 의용대원 30여 명이 북한군 400명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첩보부대원들은 2시간 가까이 북한군을 유인하면서 십리포 해안에 다다랐다. 적에 포위된 임 소위와 홍 하사는 자결을 택했다.

당시 대학 1학년 의용대군이던 고 임승렬 씨는 1983년 11월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당시 목격한 내용을 증언했다. “민간인인 나와 몇 사람은 숲 속에 숨었는데, 임병래 소위와 홍시욱 병조는 이제 마지막이라 판단했던가 봐요. 홍 병조는 소총으로 적을 사살하다가 총구를 가슴에 대고 발가락으로 방아쇠를 당겨 자결합디다. 임 소위도 45구경 권총으로 적 3명을 거꾸러뜨리고 권총을 이마에 대고 자결하고요. 두 분은 자결 직전에 모두 대한민국 만세를 외칩디다.”

함 제독은 두 사람의 이야기가 나오자 목이 멘 듯 말을 잇지 못했다. 떨리는 목소리를 감추려고 애써 허탈한 웃음을 보이기도 했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지만 전장에서 희생한 전우 앞에서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마지막에 그렇게 스스로에게 총구를 겨눠야만 했을 때 무슨 생각을 했을까, 적의 총성이 들리고 내몰릴 때 어떤 심정이었을까 떠올리면 아직도, 참….”

임병래 소위는 어떤 사람이었나?

“과묵하고 침착한 친구로 기억한다. 인천으로 향하는 배에서 중령 계급장을 전달받았는데 나는 ‘적진에 가는데 뭔 소용인가’ 싶어 바다에 던졌다. 임 소위가 옆에서 보다가 ‘국장님 그거 돈 주고 산 것’이라며 아쉬워했다. 일부러 임시계급장을 사서 전달했던 것이었다.”

두 사람이 인천상륙작전의 첫 전사자들이었나?

“아니다. 앞서 미 해군의 희생이 있었다. 9월 13일 인천해역에 집결한 아군이 예비작전을 개시했다. 히긴스 제독이 지휘하는 함포지원전대가 총알받이 작전을 펼쳤다. 항공모함에서 발진한 함재기가 인천 해안 지역을 폭격했고 북한은 일제히 포문을 열어서 20분 만에 아군의 구축함 3대가 피격됐다. 덕분에 북한군의 해안포대의 정확한 위치를 알게 됐다. 거기서 미 해군 스웬슨 중위가 전사했다. 인천상륙작전 최초의 사상자였다.”

우리 군 최초 응징작전 ‘몽금포 작전’에서 총상 입어


▎1. 함명수 제독은 당시 작전에서 자결한 두 부대원(임병래 소위, 홍시욱 하사)을 떠올리면 아직도 눈물이 난다고 회고했다. / 2. 1948년 충무공 캡틴(대위) 시절. 함명수는 1949년 우리 군 최초의 북한 응징작전으로 알려진 ‘몽금포 작전’에도 참여했다. / 3. ‘X-RAY’ 작전을 지휘할 당시 함명수 소령.
함명수 제독은 6·25전쟁이 나기 전인 1949년 8월 17일, 당시 해군 작전국 정보과장(소령)으로 이른바 ‘몽금포 작전’을 진두지휘해 전과를 올린 적이 있다. 북한에 빼앗긴 미 군사고문단장 윌리엄 로버츠 준장의 전용보트를 탈취하거나 폭파하는 임무였다. 전승을 거뒀지만 함 제독은 적함에 오르다 총상을 입어 다리를 잃을 뻔했다. 지금도 그의 걸음걸이가 불편한 이유다. “갑자기 어떤 놈이 뒷다리를 야구방망이로 때리는 기분이 들면서 바다에 떨어졌다. 운이 좋았지. 그래도 지금 90세를 바라보는 노인치고 나만큼 씩씩하게 걷는 사람도 없을 걸.”(웃음)

몽금포 작전은 우리 군 최초의 대북 응징작전이었지만, 그동안 역사적 평가를 받지 못했다. 북한이 몽금포 작전 때문에 6·25가 발생했다고 주장해왔기 때문이다. 지난해 9월 인천 월미공원에 전승비가 건립되며 몽금포 작전은 비로소 평가를 받았다. 함 제독은 그를 구출한 공정식 전 해병대사령관(6대)과 함께 지난 4월 을지무공훈장을 받았다.

함 제독은 술을 ‘다룰 줄’ 아는 애주가다. 요즘 한국인이 즐겨 마시는 ‘폭탄주’는 영국 해군의 ‘폭뢰(Depth Charge: 잠수함 잡는 수중폭탄)’에서 유래했는데 함 제독이 처음으로 한국에 소개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영국 해군은 머그컵에 위스키잔을 투하해 일종의 칵테일을 제조했는데, 위스키 잔이 들어가면 머그컵 가득 기포가 뽀글거리며 올라오는 모양이 폭뢰의 투하와 비슷하다고 붙여진 이름이다.(인터뷰가 끝난 뒤 함 제독은 저녁식사 자리에서 맥주잔에 소주잔을 빠뜨리며 한국형 ‘폭뢰주’를 직접 제조해 보였다)

함 제독이 현역시절부터 자주 인용했다는 말을 덧붙이며 인터뷰를 마쳤다. “장병들의 용전분투에 경의를 표한다. 우리는 싸워야 할 적을 잘 알고 있다. 싸워야 할 장소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언제인지는 모른다. 시간의 주도권을 잡으려면 전투준비를 고도로 높여야 한다. 평시에 힘든 훈련을 많이 해야 전시에 피를 적게 흘릴 수 있다. 평시출한유다(平時出汗有多)하니 전시출혈유소(戰時出血有少)라.”

- 글 박지현 기자 centerpark@joongang.co.kr / 사진 장진영 기자 artjang@joongang.co.kr

[박스기사] ‘X-RAY 작전’ 결행한 해군첩보부대 UDU는? - “적에게 잡히면 자결이 원칙”


▎1. 적의 신분으로 위장해 수중침투 훈련 중인 첩보부대 특수요원들. / 2. 1992년 임형신 당시 첩보부대 요원이 단시간 내 적을 사살하는 특수살상무술(살무도) 시범을 보이고 있다. / 3. 해군첩보부대 UDU 마크.
영화 <아저씨>에서 원빈 역… 적진에 투입돼 정보수집·납치·암살·테러 등 비밀업무 수행

‘X-RAY’작전에 투입된 해군첩보부대는 어떤 곳일까. 대한민국 북파(北派)부대로 알려져 있는 해군첩보부대 ‘UDU(Underwater Demolition Unit)’는 국군정보사령부에 소속돼 첩보임무를 수행하는 비밀 특수요원이다. 육군과 해군에만 존재하는 첩보부대는 국군정보사령부로 통합되면서 육군 HID는 ‘특수정보부사관 육상’으로, UDU는 ‘특수정보부사관 해상’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현재는 ‘국방부 소속 특수요원’으로 불린다. 2010년 이후 비공개 요원 모집으로 전환했다. 영화 <아저씨>에서 원빈이 연기했던 것이 바로 UDU 장교다. 8월 5일 인천 중구에 위치한 ‘UDU 동지회’에서 첩보부대원 출신 임형신(47·36기) 경남대 연구위원을 만나 UDU 관련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인천상륙작전> 영화제작의 자문을 맡기도 했다.

UDU는 세간에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렇다. 비밀을 요하는 첩보부대이다 보니 전시는 물론, 평시에도 비밀 임무를 수행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화 <인천상륙작전을> 통해 알리기 위해 첩보사 자문을 맡았다. 남파공작원은 들어봤어도 북파공작원은 많이 들어보지 못했을 것이다. UDU는 정규전 병력이 들어가기 전, 첩보공작차원에서 첩보전과 대북응징보복작전에 투입되는 부대다. 1946년 3월 1일부로 해군에 정보과가 생기면서 첩보활동이 시작됐다.”

UDU 요원은 어떻게 양성되나?

“비공개로 모집하고 6개월의 SEAL(육·해·공) 특수전과 첩보 교육을 받아 양성된다. 연 1회, 평균 10여 명 요원이 배출되는 최정예 부대로 휴가·외출·외박도 없고, 계급장도 없다. 항공기, 잠수함, 각종 고가의 첩보장비, 적성 무기, 해외교육 등 요원 1인당 투입되는 비용은 막대하다. 생활은 매우 엄격했다.”

어떻게 입대하게 됐나?

“89년에 나는 중국 무술인 우슈 국가대표 선수였다. 90년 베이징아시안게임 출전을 앞두고 ‘물색관’을 만났다. 머리를 깎지 말고 오라고 했다. 차에 올라타니 선글라스 낀 사람들이 있었고 고개를 숙이라고 하더라. 어떤 부두에 당도해 배를 타니까 섬에 도착했다. 그때부터 생활화 훈련 등 ‘밀봉교육’을 받았다.”

적진에 침투하게 되면 목숨이 위태로울 수도 있을 텐데.

“교육받을 때 ‘절대 포로가 되지 말라’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는다. 기밀누설의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첩보부대는 ‘적에게 피포(被捕) 시 조국의 명예를 위해 죽음을 택한다’는 것이 원칙이다. 또 우리 공작원들을 적진 근해까지 데려다주는 안내 요원들이 있는데 발각 시 아군이라 하더라도 가장 먼저 사살해야 한다. 북한 강릉 잠수함 침투사건에서도 볼 수 있다.”

부대가 공식적으로는 해체된 것 아닌가?

“그렇지 않다. 가장 오랜 부대 창설 역사와 대북 첩보임무를 지금도 유지하고 있다. 다만 임무와 구체적 편제편성을 밝힐 수 없을 뿐이다. 1953년 정전협정 때문에 부대 존재를 공식적으로 부인할 수밖에 없었다. 전사자들은 항상 ‘unknown(미상·未詳)’으로 기록됐다. 우리는 부대원들의 공로를 알리고자 월미도에 충혼탑을 세우고 지원보상을 마련하는 데 노력했다. 2004년 노무현 정부 때 ‘특수임무 수행자 보상에 관한 법률’이 제정됐다. 앞으로도 ‘특수임무유공자 예우법’에 따라 조국을 위해 특별한 희생을 하고 중요한 임무를 맡았던 해군 첩보부대의 공헌이 국민들에게 기억되기를 기대한다.”

201609호 (2016.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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