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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 리더십 연구] 1할 타자에서 명감독 반열에 오른 염경엽 넥센 감독 

“관리보다 관심 보이면 선수는 스스로 성장하죠” 

이창호 야구전문기자·스포츠평론가 river2000@naver.com
무명선수 출신으로 구단 프런트 거쳐 현대·LG·넥센에서 코치 경험 쌓은 뒤 2013년 3대 사령탑에… 어떻게 하면 10년 고생하고 50년 행복할 수 있을지, 선수 스스로 성공사례 찾아 본받도록 유도해

▎염경엽 넥센 감독은 현역 시절(1991~2000년) 10년간 통산 896경기에서 타율 0.195, 5홈런, 110타점에 그친 평범한 선수였다. 하지만 사령탑에 오른 2013년부터 지난해까지 팀을 3년 연속 포스트시즌에 진출시키는 등 지도자로서 진가를 발휘하고 있다.
전국이 가마솥처럼 펄펄 끓던 8월 5일 오후 프로야구 넥센 히어로즈의 홈구장인 고척 스카이돔 1층. 선수단 출입구로 깔끔한 차림의 염경엽(49) 감독이 들어온다. 금테안경에 갸름한 얼굴, 그리 크지 않은 키, 다소 마른 체형만 보면 옷을 좀 입을 줄 아는 ‘이웃 아저씨’다. 입가에 엷은 미소를 머금으면 지천명(知天命)을 눈앞에 둔 ‘차가운 승부사’가 아니다.

염 감독은 야구장에 가장 먼저 오고 가장 늦게 간다. 젊은 선수들과 함께 꿈과 희망을 만들어가려면 지도자로서 솔선수범해야 한다는 생각을 행동으로 보여준다. 치밀한 준비를 위한 일상의 반복이다. 결과는 그 다음이다.

야구계에서는 그를 ‘염갈량’으로 부른다. 삼국지의 제갈량처럼 지략이 뛰어나다며 팬들이 붙여준 별명이다. 감독실의 소파 앞 탁자 위엔 자오위핑(趙玉平)이 제갈량의 지략을 통해 조직 운영과 용인술을 분석한 <마음을 움직이는 승부사 제갈량>이란 책이 놓여 있다. 열성 팬이 보내준 선물이란다. 집무용 책상의 오른쪽 벽에는 ‘소통(Communication), 열정(Passion), 역동(Dynamic), 젊음(Youth)’이란 4개의 단어가 적힌 대형 사진이 걸려 있다. 들고 날 때마다 스스로 다짐하는 잠언(箴言)이라고 한다.

염경엽은 프로선수로서 빛을 보지 못했다. 스타가 되지 못하면 시나브로 잊히고 사라지는 것이 세상사다. 염경엽은 청소년대표 정도를 했을 뿐, 야구선수로서 이렇다 할 족적을 남기지 못했다. 프로선수는 유니폼만 입어봤을 뿐 ‘우등생’이 아니었다.

그런 그가 요즘 지도자로 주목받고, 인정받는다. 이광환·김시진 전 감독에 이어 2013년 넥센의 3대 사령탑으로 지휘봉을 잡은 이래 지난해까지 3년 연속 팀의 포스트시즌 진출을 이끌어냈다. 2014년에는 플레이오프를 거쳐 한국시리즈까지 진출하는 ‘돌풍’을 연출했다. 첫 챔피언을 꿈꾸었으나 분루를 삼켜야 했다.

리더십 첫째 덕목은 ‘개인능력 극대화’


▎1994년 잠실구장에서 열린 LG-태평양의 경기. 유격수 염경엽이 LG 송구홍의 2루 땅볼 때 1루 주자 김재현을 포스아웃시킨 뒤 1루에 던져 병살을 노리고 있다.
지난해에 강정호가 메이저리그 피츠버그 파이어리츠로 떠난 데 이어 올해는 4번 타자 박병호마저 미네소타 트윈스로 진출했다. 거물 자유계약선수(FA)를 모두 잡지 않았다. 특급 마무리 손승락은 롯데로 떠났다. 공수의 주축이었던 유한준은 kt행을 결정했다. 마운드의 핵심인 한현희와 조상우는 부상으로 이탈했다. 올해는 시즌이 시작되기도 전부터 악재가 겹쳤다. 모두 넥센의 하위권 추락을 예상했다. 하지만 팀은 8월 현재 3위를 달리고 있다. 4년 연속 포스트 시즌 진출이 무난할 듯한 페이스다.

2008년 재정난으로 해체한 현대 유니콘스를 인수한 ㈜서울 히어로즈의 기업 가치는 해마다 치솟는다. 미래가 있는팀, 목표의식이 뚜렷한 선수가 중심이 되는 ‘자율야구’가 염경엽 감독의 꿈이다.

“관리와 관심은 다르다. 얼핏 보면 비슷한 것 같지만 과정에서 결과까지 아주 다르다. 요즘 젊은 선수들에겐 끊임없이 관심을 보여주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가정에서도 마찬가지 아닌가. 세상은 변했다. 지금 잡초 같은 생명력을 기대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다.”

염경엽은 자신의 선수 시절을 되돌아볼 때마다 ‘관리(管理)’라는 단어를 떠올린다. 1950~60년대생들을 ‘철저하게 관리받던 세대’라고 규정한다. 운동선수들은 더 심했다. 모든 면에서 집단이 먼저였다. 팀이 방향을 정하면 개인은 무조건 틀에 박힌 방식대로 따라갔다. ‘사람을 통제하고 지휘하며 감독한다’는 관리의 사전적 의미에 맞춘 행위만 있었다. 스스로 알아서 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염경엽은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광주 서석초등학교부터 충장중-광주일고-고려대를 거치는 동안은 물론이고 1991년 태평양 돌핀스에 입단해서 2000년 현역 은퇴할 때까지 겪었던 지도자들은 자기 위주였다. 야구기술만을 주입하는 데 치중했다.

“과거 지도자들은 목표의식을 심어주고, 하고자 하는 마음을 일깨워주고, 성공에 대한 확신을 심어주는 경우가 드물었다. 그저 야구만 잘하면 된다는 식이었다. 모든 것이 그런 시대였던 것 같다. 그러나 이젠 다르다. 선수와 팀이 함께 성장해야 한다. 개인의 능력을 극대화하면 자연스럽게 조직의 힘도 강해진다. 마지못해 따라오는 선수는 성장에 한계가 있다. 지도자가 진실한 마음으로 소통해야 하는 이유다.”

염경엽은 능동적인 훈련과 역동적인 게임을 위해 ‘배려와 관심’을 강조한다. 스스로 ‘염경엽식 리더십의 키워드’라고 말한다. 프로는 자신을 위해 자기 발전에 힘을 쏟고, 조직 속에서 인정받고, 가치를 높여가는 이들이다. “프로다운 프로를 만들려면 지도자는 늘 진실한 마음으로 관심을 갖고, 믿음을 주고, 배려해야 한다”고 설명한다.

‘관심(關心)’은 어떤 것에 마음이 끌려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다. 통제하고 지휘하는 것이 아니다. 선수가 나가야 할 뚜렷한 방향을 제시해 동기를 부여하면서 시간 낭비를 막는 것이다.

“내가 선수 생활을 할 때는 대부분 스프링캠프에 가면 말년 병장이 제대를 기다리며 달력 날짜를 지우는 것과 똑같이 했다. 훈련이 끝난 저녁에는 그저 쉬기 바빴다. 미래에 대한 계획도 없고, 방향도 없었기 때문이다. 감독이나 코치가 시키는 대로 훈련하고 돌아오니 피로만 쌓였다.”

눈치 보느라 바쁜 시절이었다. 자율은 꿈도 꾸지 못했다. 힘만 들었다. 재미없었다. 경험이 그런 염경엽을 바꿔놓았다. 과거에 머물지 않았다. 엄격한 관리가 아닌 진심 어린 배려와 관심으로 개인능력을 최대한 향상시키는 것이 지도자의 첫째 덕목이란 믿음을 키웠다.

이런 야구철학을 코치들과 함께 실천하다 보니 넥센 선수들은 스스로 동기를 만들어가면서 성장하고 있다.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빅리거가 된 강정호나 박병호를 보면서 열심히 하면 부와 명예를 모두 거머쥘 수 있다는 목표의식까지 갖게 됐다. 염경엽의 배려와 관심이 넥센 선수들을 춤추 게 한다.

벤치로 밀려난 뒤 ‘절박감’ 속에서 찾은 실낱 꿈


▎현대 유니콘스 시절의 염경엽 감독. 수비와 주루 센스에 비해 허약한 방망이가 아쉬웠다.
염경엽은 프런트 직원을 지낸 사령탑이다. 2000년 은퇴한 뒤 2007년까지 현대 유니콘스에서 매니저와 운영팀장, 코치를 맡았고, 2008년부터 2009년까지 LG 트윈스에서 스카우트와 운영팀장을 역임했다. 8년여의 ‘직장생활’은 또 다른 경험이었다. 서류 작성 등 조직에서 일하는 방법을 배웠고, 인사관리의 기본을 익혔다. 기획력도 생겼다. 분석능력도 좋아졌다. 코치로 현장에 복귀했을 때 자신만의 무기로 삼을 만했다.

1996년 4월 13일 인천 도원구장. 현대와 LG의 시즌 개막전이 열렸다. 주전 유격수는 인천고를 졸업하고 계약금 2억 8000만원에 입단한 신인 박진만. 1991년 고려대를 졸업하면서 태평양 돌핀스에 입단해 그동안 주전 자리를 지켰던 염경엽은 벤치로 밀려났다.

“늘 그라운드에서 애국가를 듣다가 더그아웃에서 전광판을 보는 순간 ‘아, 이제 그만둘 때가 왔구나’라고 느꼈다. 자존심도 상했다. 그렇다고 곧바로 모든 것을 결정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염경엽은 신혼이었다. 첫딸까지 얻었다. 가족에 대한 책임감 때문에 준비 없이 유니폼을 벗을 수 없었다. ‘남편의 위치에 따라 아내와 딸의 사회적 대우도 달라질 텐데’라고 생각하니 소질만 믿고 노력하지 않았던 지난날이 후회스러웠다.

“야구인생을 돌이켜보니 한심했다. 기회가 왔을 때 더 노력했어야 했다. (김)기태나 (이)종범이는 어릴 때부터 능력이 남달랐는데도 손바닥이 까지도록 노력하면서 실력을 키워 프로에서도 스타가 됐다. 나는 노력형이 아니었다. 절박함이 부족했다. 뒤늦게 깨달았지만 시간을 되돌릴 수 없었다. 선수로서 기회가 점점 줄어들 테니 차근차근 지도자 준비를 하자고 마음먹었다.”

염경엽은 캐나다 이민을 선택했다. 어린이 야구교실을 열고, 메이저리그 토론토 블루제이스에서 야구 연수를 받고, 캐나다산(産) 단풍나무로 만든 방망이를 국내에 수출하는 사업을 하면서 생계를 이어간다는 구체적인 계획까지 세웠다.

그러나 뜻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이주공사의 일처리 미숙 탓이었다. 대사관에선 다시 이민을 신청하려면 7년을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마음을 다시 고쳐먹었다. 백업선수라도 좋으니 프로 생활 10년은 채워보자. 어차피 실패한 야구인생이지만 통산 1000경기는 채우자. 하지만 그마저도 여의치 않았다. 10년은 채웠지만 통산 9시즌 동안 896경기에 나가 타율 0.195를 기록하는 데 그쳤다. 1000경기까지는 104경기가 부족했다.

“과거에는 야구도 슬렁슬렁 봤지만 선수로서 재도전하는 과정에서는 분석적으로 경기를 관전하려고 애썼다. 그렇게 3년 가까이를 보내자 내 눈이 마치 스캐너가 된 것 같았다. 상대 선수들의 습관까지 훤히 보이기 시작했다. 각종 분석자료를 코치에게 알려 선수를 지도하고, 전술을 짜는 데 활용하도록 했다.”

염경엽의 관찰력과 분석력이 선수단과 구단에도 알려졌다. 그런 인연으로 구단에서는 그에게 2년 정도 프런트 직원으로 일한 뒤 코치로서 지도자 생활을 이어가도록 권유했다. 어차피 통산 1000게임 출전의 꿈이 희미해졌으니 제2의 야구인생을 준비하자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는 2000년 시즌을 끝으로 은퇴를 결심했다.

염경엽은 선수로서 한 번, 프런트 직원으로서 세 번 등 모두 네 차례 한국시리즈 우승을 경험했다. 1998년 현대가 LG를 4승2패로 꺾고 처음으로 정상에 설 때 주전이 아니었다. 인천 연고구단 최초로 정규시즌 1위까지 차지해 통합 챔피언이 됐지만 염경엽은 이미 박진만에게 밀렸다.

염경엽은 2004년을 잊지 못한다. 현대는 2003년에 이어 2년 연속 한국시리즈 우승에 도전했다. 운영팀장으로서 전력 보강을 지휘하고 결과를 기다리는 마음은 선수 때와는 다른 설렘으로 가득했다. 3승3무2패로 앞선 상황에서 잠실구장에서 삼성과의 한국시리즈 9차전이 열렸다. 염경엽은 우승을 확정하면 곧바로 열릴 축하연을 준비해야 했으니 경기 후반이 진행될 때 잠실 롯데호텔로 달려갔다.

‘염경엽의 아이들’, 미래는 오늘 준비하는 것


▎1. LG 운영팀장 시절의 염경엽 감독. 선수단과 함께 스프링캠프에 참가한 염 감독이 타자들에게 배팅볼을 던져주고 있다. / 2. 2013년 12월 프로야구 골든글러브 시상식장에서 김기태 LG 감독 (현 KIA 감독)과 나란히 앉은 염경엽 감독. 체력이 약했던 탓에 고등학교를 4년이나 다닌 염 감독은 입학 기준으로는 김 감독의 1년 선배이지만 같이 졸업한 동기생이다.
“가을비가 주룩주룩 내리고 있었다. 정신 없이 호텔로 가서 축하연 준비상황을 점검하고 기다렸다. 잠실구장에 있던 직원들이 우승 소식을 알려왔지만 기쁨보다 허탈함이 앞섰다. 호텔 바깥 모퉁이에 쪼그리고 앉아 담배를 한 대 피우는데 눈물이 나더라. 이게 뭔가. 다시 유니폼을 입고 싶은 생각이 간절해졌다.”

하지만 그의 뜻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프런트를 거쳐 지도자를 약속받았지만 쉽지 않았다. 사표는 번번이 반려됐다. 결국 구단 직원으로 6년을 보냈다. 현대는 2007년 현대 하이닉스의 지원을 받지 못했고, 한국야구위원회(KBO)의 위탁 경영을 받다가 결국 해체됐다.

“운영팀장은 야구단의 3인자 격이다. 선수단 구성과 관리에서 중심 역할을 한다. 나름대로 권력이 있는 자리다. 감독이나 코치·선수는 물론 청소나 주방을 담당하는 계약직 직원까지도 관리하고 계약하면서 많은 깨달음을 얻었다. 베풀었다고 뭔가 되돌아오길 바라지 말고, 힘이 있다고 휘두르려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염경엽에겐 2006년 초 선수단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이종욱 문제’가 골칫거리였다. 1999년 선린정보고를 졸업할 때 2차 2순위로 지명한 이종욱은 영남대를 거쳐 2003년 입단했다. 그러나 외야에는 자리가 없었다. 바로 상무에 입단했다가 군복무를 끝내고 돌아왔지만 여전히 주전과는 거리가 있었다. 방출할 도리밖에 없었다.

“그냥 내칠 수 없었다. 우리 팀에는 자리가 없지만 성장 가능성이 있는 선수라서 안타까웠다. 그래서 두산 스카우트와 운영팀장에게 연락해 데려가도록 다리를 놓았다.”

이종욱은 두산에서 확실하게 자리를 잡았다. 국가대표로서 눈부신 활약을 펼쳤다. 올시즌 NC 다이노스에선 베테랑다운 모습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염경엽은 2008년 LG의 스카우터로 자리를 옮겼다. 오지환·정주현·채은성·문선재 등이 염경엽 스카우터가 발굴해낸 ‘LG의 미래’다. 현재보다 미래 가치를 높게 평가해 선택한 선수들이다. 선수와 코치, 프런트를 거치면서 구단의 가장 큰 자산은 선수고, 선수는 목표를 갖고 성장할 수 있어야 한다는 원칙을 세웠다.

염경엽은 LG에서 수비코치로 현장에 복귀하는 등 4년을 보냈다. 김시진 감독이 2009년 넥센의 사령탑을 맡으면서 염경엽에게 코치로 합류할 것을 권했다. 하지만 염경엽은 선뜻 응할 수 없었다. 어려울 때 받아준 구단을 다른 기회가 왔다고 나 몰라라 곧바로 떠날 수 없었다. 결국 2012년에야 작전 주루코치로 넥센에 복귀했다.

넥센은 기존 구단들과 다르다. 기업이 곧 야구단이다. 모기업이 없다. 운영 자금은 자체적으로 광고를 유치하고, 입장 수익을 높이고, 기타 사업을 벌여 끊임없이 돈을 끌어들여야 한다. 현실적인 경영이 불가피하다. 상품 가치를 극대화한 선수를 다른 구단에 양도하면서 많은 이적료를 받는 것은 정당한 경영 행위다.

2015년 강정호에 이어 올해는 박병호를 메이저리그로 보냈다. 강정호는 500만2015달러, 박병호는 1285만 달러 등 총 1785만2015달러의 이적료를 벌어줬다. 약 200억원의 수익을 창출했다.

“넥센의 운영 방향은 분명하다. 현실적인 운영을 할 수밖에 없다. 감독은 구단 방침을 최대한 맞추는 것이 바람직하다. 강정호나 박병호의 메이저리그 진출은 일찌감치 합의한 사항이었다.”

치밀한 대안 찾기, “우리는 흔들리지 않는다”


▎8월 5일 경기 전 고척 스카이돔 감독실에서 타순을 고민하고 있는 염경엽 감독.
구단 방침이 정해지자 감독은 대체 선수를 찾기에 나섰다. “3~4년 전만 해도 메이저리그에 갈 수 있는 내야수는 SK 최정이지 넥센 강정호가 아니었다. 그러나 우리는 강정호와 면담을 통해 꿈을 심어줬고, 본인의 노력으로 꿈을 이뤘다. 강정호를 보내면서 박병호도 가능하다고 판단했다. 두 선수의 성공은 젊은 후배들에게 새로운 롤모델을 만든 셈이다.”

염경엽은 강정호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김하성을 찾아내 다듬었다. 타선의 중심인 박병호의 공백은 트레이드를 통해 해결했다. 두산에서 윤석민, 삼성에서 채태인을 데려왔다. 손승락과 유한준이 FA로 떠나는 것을 대비해 구원투수로는 김세현, 외야수로는 고종욱을 일찌감치 낙점해 검증했다. 염경엽은 ‘준비된 대안’으로 전력 누수를 막았다. 일찌감치 올해 페넌트레이스에서 선전할 수 있는 밑거름을 뿌린 덕분이다.

넥센의 시즌 개막은 다른 팀보다 빠르다. 한 해의 시작은 정규시즌 개막인 4월이 아니라 스프링캠프가 문을 여는 2월이다. 스프링캠프가 열리면 매일 최고의 컨디션으로 훈련하고, 경기하는 자세를 갖도록 주문한다. 각자의 역할도 미리 미리 알려준다. 자율적으로 맡은 바 책임을 다하라는 의미다.

“우리는 가을 훈련을 아주 많이 한다. 부문별로 부족한 것이 있는 선수들을 집중적으로 훈련시키면서 기량을 끌어올린다. 그리고 2월 스프링캠프가 시작되면 자율적으로 최고의 컨디션을 만들게 한다. 트레이닝 코치나 선배들과 상의해 어린 선수들도 자유롭게 쉴 수 있도록 한다. 억지로 훈련하면 부상이 따라올 수 있다.”

넥센은 올시즌 투수 ‘신재영’이란 히트상품을 내놓았다. 염경엽은 경찰청에 입단하기 전 앞으로 선발 요원으로 키울 재목이라고 알렸고, 퓨처스 리그에서 충분한 경험을 한 덕에 올 시즌 벌써 두 자릿수 승수를 올리면서 연착륙하고 있다.

“그동안 야수 쪽에선 분명한 목표를 갖고 노력한 선수들이 나타났다. 서건창·김민성도 처음부터 뛰어난 선수는 아니었다. 그러나 뚜렷한 목표의식을 갖고 스스로 피나는 노력을 한 끝에 정상급 선수로 성장했다. 이런 모델을 보면서 고종욱·김하성·박정음이 주전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투수는 야수보다 결실이 늦어지고 있다. 올해 비로소 신재영이 새로운 본보기로 떠오르고 있다.”

올해 스프링캠프에서 넥센 선수들은 전문가들의 낮은 평가에 개의치 않았다. 넥센의 야구 문화, 넥센만의 분위기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겉모습만을 보고 내린 평가라 여겼다. 선수들은 스스로 3위 정도는 할 수 있다면서 의기투합했다. 넥센 특유의 ‘자율야구’가 자리 잡았다고 모두 공감한다.

염경엽은 2013년 넥센의 지휘봉을 잡으면서 2014년을 우승에 도전할 최적기로 판단했다. 작전·주루코치로서 김시진 감독과 함께하면서 파악한 선수들의 능력과 팀의 조화를 감안한 것이었다. 투수력은 다소 약해도 이 정도의 타력이라면 일을 낼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러나 결과는 실패였다.

“역시 단기전에선 투수가 중요하다는 걸 새삼 느꼈다. 우승 기운도 받아야 한다. 방망이는 한계가 있었다. 눈앞의 성적보다 팀의 미래를 준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챔피언의 꿈은 반드시 이뤄야 할 절대 가치다.”

그해 넥센은 LG와 치른 플레이오프에서 3승1패로 승리하고 팀 창단 이후 처음으로 한국시리즈에 진출했다. 그러나 삼성 라이온즈에 2승4패로 밀리고 말았다. 소사와 밴 헤켄이 원투펀치를 맡고, 한현희와 조상우 등이 필승 불펜, 손승락이 마무리를 책임졌다. 타선에선 강정호·박병호·이택근·유한준이 주축이었다. 그럼에도 역부족이었다.

“2014년의 실패, 2017~2018년에 설욕한다”


▎염경엽 감독이 경기 중 타점을 올린 채태인과 주먹을 부딪치고 있다. 오른쪽은 염 감독의 광주일고 2년 선배인 이강철 수석코치.
염경엽은 한국시리즈에서 대권 도전에 실패한 뒤 눈물을 흘렸다. “나도 모르게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보다도 더 큰 서러움이 북받쳐 올랐다. 그만큼 우승이 간절했다. 감독이 된 뒤로 계속 포스트시즌에 진출했지만 앞으로 한국시리즈 우승을 언급하기는 쉽지 않을 듯하다. 하지만 2017~2018년쯤에는 우승 재도전이 가능할 정도로 좋아질 것으로 예상한다.”

자신의 향후 거취에 대해서도 그는 조심스러운 입장이다. 계약직 감독의 숙명이다. 포스트시즌의 기회를 소홀하겠다는 것이 아니다. 당연히 우승에 도전한다. 8월초 다소 팀성적이 소강상태에 빠져 있을 때 염 감독을 다시 만났다. 그는 “지금 페이스가 좋지 않다. 비 때문에 경기를 다하지 못한 것이다행스러울 정도다. 그냥 했더라면 연패에 빠질 뻔했다”고 엄살을 떨었다.

8월 17일 현재 넥센은 3위를 달린다. 의외가 아니다. 당연한 일이다. 훈련을 경기처럼, 경기를 훈련처럼 하는 것이 몸에 밴 선수들이 야무지게 똘똘 뭉친 결과다.

넥센은 세밀함에 강한 그들만의 야구를 한다. 한 베이스를 더 달리고, 1점을 지켜내는 야구의 중요성을 모두가 잘 인지하고 있다. 타석에서 볼 1개, 수비에서 타구 1개의 중요성을 잘 안다. 사소한 부분까지도 소홀히 하지 않으니 팀은 더 단단해졌고, 어떤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 ‘색깔 있는 야구’를 한다.

염경엽은 틈날 때마다 선수들에게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이야기한다. 10년 고생하고 50년을 행복할 수 있다고 가르친다. 스스로 성공사례를 찾아내 본받을 수 있도록 분위기를 이끈다. 최근에는 젊은 선수들에게 <마시멜로 이야기>를 읽어보라고 권한다. 편한 편집으로 쉽게 접근할 수 있지만 메시지가 강한 책이다. 프로선수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란 설명이다.

‘염갈량’ 염경엽은 윗사람의 칭찬보다 아랫사람에게서 존경받는 지도자이고 싶어한다. 배려와 관심을 받고 성장한 선수들이 진정한 프로가 될 수 있다고 믿는다. 소질만 믿고 노력하지 않는 ‘1할 타자’로 회한이 남았기에, 구단 직원으로 조직문화를 익히면서 혼자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걸 잘 알기에 후배들의 험한 길을 열어주는 야구선배의 길을 걷는다.

- 이창호 야구전문기자·스포츠평론가 river2000@naver.com

201609호 (2016.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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