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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환영의 종교 이야기 ⑤] 기도란 무엇인가 

신을 향한 부탁 아닌 내 영혼의 갈망 

김환영 중앙일보 논설위원, 정치학 박사
리서치센터(PRC) 조사에 따르면 美 무신론자·불가지론자 중 6%는 매일, 11%는 매주 또는 매달 기도해… 일부 회의론자는 “환자가 진짜 약으로 믿어 좋은 반응 나타나는 것과 같은 위약효과에 불과” 주장

▎한 대학의 간호학과 학생들이 환자 치료 중 감염된 동료 간호사의 쾌유를 빌며 기도하고 있다. 학생들의 뒤로 ‘간호사의 상징’인 나이팅게일이 1853년 크림전쟁 당시 환자를 돌보는 모습의 디지털 액자가 보인다. / 사진·중앙포토
16~18세기 계몽주의 시대 이후 많은 사상가나 학자가 종교의 종언을 자신 있게 예측했다. 그들의 ‘예언’은 일부 들어맞는 측면이 있다. 특히 유럽에서 그리스도교는 빈사 상태다. 하지만 여전히 종교는 무시할 수 없는 세력이다. 아프리카·중국 등 신앙인의 수가 오히려 느는 곳도 많다. 종교는 ‘미개 지역’에서만 늘고 ‘문명 지역’에서는 망하고 있다고 반응할 수도 있겠지만, 우리는 종교의 상당한 기여에 힘입어 어제의 ‘미개 지역’이 오늘과 내일의 ‘문명 지역’이 된 사례를 왕왕(往往) 목격한다.

종교가 잘 없어지지 않는 이유는 종교의 핵심 중 하나인 기도의 효험을 많은 사람이 체험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도보다는 어쩌면 참선이 더 중요한 불교와 달리 그리스도교에서는 기도의 비중이 압도적이다. 독일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1483~1546)는 이렇게 말했다. “숨쉬지 않으면 살아 있을 수 없는 것처럼, 기도하지 않으면 크리스천이 아니다.” 실제로 미국인의 75%는 매일 혹은 매주 기도한다. 그중 매일 기도하는 사람은 50%다.

지구상에서 종교가 사라진다고 하더라도 사후세계에 대한 관념과 더불어 종교의 핵심 중 하나인 기도만은 살아남을지도 모른다. 여론 조사에 따르면 놀랍게도 종교가 없는 사람, 무신론자 중에서도 기도하는 사람들이 있다. 강경한 무신론자라면 “당신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라는 말을 듣고 기겁하거나 불쾌한 반응을 보일 것이다. 하지만 퓨리서치센터(PRC)의 조사에 따르면 미국 무신론자·불가지론자 중 6%가 매일 기도한다. 11%는 매주 혹은 매달 기도한다.

신과 나누는 쌍방향 대화


▎길병원 뇌과학연구소 관계자가 기능성자기공명영상(fMRI) 장치를 이용해 마가 스님의 두뇌 활동을 검사하고 있다. / 사진·중앙포토
기도란 무엇인가. 우리 표준국어대사전을 찾아보자.

“인간보다 능력이 뛰어나다고 생각하는 어떠한 절대적 존재에게 빎”이라고 돼 있다. 기도의 용례로는 다음 문장들이 적혀 있다.

● 어머니는 부처님께 아들의 합격을 간절히 기도하고 계셨다.

● 두 분 내외가 내내 건강하시길 하느님께 기도하겠습니다.

● 어머니는 집 나간 형이 돌아오기만을 천지신명께 기도했다.

● 그녀는 남편이 건강하게 돌아오게 해달라고 달님에게 기도했다.

● 그 소녀는 앞으로 자신이 유명한 가수가 되도록 도와 달라고 모든 신에게 기도하고 잠자리에 들곤 했다.

이 예문들을 중심으로 ‘기도란 무엇인가’를 따져보자. 기도란 무엇인가. 그리스도교 신비가이자 수도원 개혁가로 유명한 아빌라의 성녀 테레사(1515~1582)는 이렇게 기도를 정의했다. “기도는 다른 게 아니라 하느님과 우정 관계를 맺는 것이다.” 친구 사이란 무엇일까? 친구란 그 무엇보다 서로 말벗이 돼주는 게 아닐까. 미국 침례교 목사 빌리 그레이엄은 이렇게 정리했다. “간단히 말해 기도는 여러분과 하나님이 양방향 대화를 나누는 것이다.”

우리의 현실 생활에서는 기도가 어떤 뜻일까? 우리 국어사전의 정의에 따르면 기도는 결국 ‘빎’이다. 그렇다면 빎, 빈다는 것은 또 무엇인가? 국어사전에는 “바라는 바를 이루게 해달라고 신이나 사람, 사물 따위에 간청하다”라고 나와 있다. 여기서 사람이 ‘바라는 바’는 육체와 마음의 건강, 무병장수가 기본·핵심이겠지만, 사람마다 ‘바라는 바’는 아주 다양하다. 그래서 다음 질문을 해본다.

우리는 무엇을 기도하는가? 무엇을 비는가? 우리는 합격·건강을 기원하며 기도하고, 집 나간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도하고, 아이돌 가수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이러한 표준국어사전 용례만 봐도 기도에는 상당한 기복 성향이 발견된다. 많은 종교 지도자가 ‘청탁’ 형태의 기도에 반대한다.

인도 민족운동 지도자 마하트마 간디(1869~1948)는 이렇게 말했다. “기도는 부탁하는 게 아니다. 기도는 영혼의 갈망이다. 기도는 매일 자신이 약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빈민·병자·고아, 죽음을 앞둔 환자들을 위해 평생을 헌신한 공로로 1979년 노벨평화상을 받은 테레사 수녀(1910~1997)도 다음과 같이 비슷한 말을 했다. “기도는 부탁하는 게 아니다. 기도는 자신을 하느님의 수중(手中), 하느님의 섭리에 내맡기는 것이며, 우리의 가슴 깊은 곳으로부터 들려오는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다.” 간디와 테레사 수녀는 왜 “기도는 부탁하는 게 아니다”라고 말했을까.

‘손이 발이 되도록’ 빌었던 한민족


▎수능시험을 앞둔 자녀를 위해 사찰을 찾아 기도를 올리고 있는 어머니들.
기복 기도는 신(神)의 공의(公義)나 과학과 충돌한다는 입장이 있다. 예컨대 자식이 좋은 대학 가게 해달라고 비는 것은 결과적으로 다른 사람의 자식은 떨어지라는 말이라는 것이다. 신은 편파적일 수 없다는 것이다.(사실 인간은 신의 본모습을 알 수 없다. 실은 신이 상당히 편파적인 존재인 것은 아닐까)

또 어떤 기도는 과학의 법칙이 멈춰서는 기적이 일어나야 성취될 수 있다. 러시아 소설가 이반 투르게네프(1818~83)는 이렇게 말했다. “어떤 사람이 무슨 기도를 하건 그는 기적을 기도하는 것이다. 모든 기도는 결국 이런 말이다. ‘전지전능한 신이시어 2 곱하기 2가 4가 아니게 해주소서.’”


▎서울 용산구 이태원동 이슬람교 서울중앙성원에서 기도하고 있는 이슬람 신자들.
예수님은 기복 기도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을까? 생각하기에 따라 대조적인 내용이 신약성경에 담겨 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너희가 기도할 때 믿고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받을 것이다.”(마태오의 복음서 21:22) “믿고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라고 했으니 자녀들의 대학진학이나 득남, 아내의 직장 승진 같은 것을 위해 기도해도 된다. 하지만 여기서 ‘믿고’라는 단어를 무시할 수 없다. 우선 믿음이 강해야 기도가 이뤄진다는 뜻으로 읽히지만, 부차적인 해석이 가능하다. 기복 기도를 하더라도 ‘믿음’의 테두리에서 하라는 뜻이 담겨 있는 게 아닐까.

한편 예수님은 “너희의 아버지께서는 구하기도 전에 벌써 너희에게 필요한 것을 알고 계신다”(마태오의 복음서 6:8)라고도 했다. 굳이 기복 기도를 할 필요조차 없는 것이다. 믿음이 있는 삶을 살면 신(神)이 알아서 다 챙겨주는 것이다.

우리는 누굴 위해 기도하는가? 이 질문은 사실 ‘우리는 무엇을 기도하는가’와 관련이 깊다. 우리는 주로 ‘나’를 위해 기도하고 아들 같은 내 피붙이, 아내와 남편, 부모, 친한 사람들을 위해 기도한다. 하지만 이는 인지상정(人之常情) 아닐까.

나와 전혀 무관한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 북한 사람들, 전쟁의 참화에 시달리는 모든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자칫 나를 ‘위선’에 빠트릴 수 있다. 원수를 위해 기도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기도 대상을 계속 확장해나가는 게 신앙의 성숙을 가능하게 한다는 사실은 확실해 보인다.

우리는 언제 기도하는가? 위의 용례에 나오는 가수 지망생 소녀는 잠자리에 들기 전에 기도했다. 이슬람의 경우에는 기도 시간을 정해놨다. 기도는 사실 때를 가리지 않는다. 우스갯소리에 나오는 것처럼 기도할 때 담배 피는 것은 불경스럽지만, 담배 필 때마저 기도하면 칭찬받을 만한 일이다.

우리는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가? 아들의 합격을 기도한 어머니처럼 간절히 기도해야 하지 않을까? 우리 한민족은 간절히 기도해온 민족이다. 기도할 때 손을 비비는 습관이 있다. ‘손이 발이 되도록’ 빈다.

그렇다면 길이는? 오래 기도하는 게 좋을까? 마르틴 루터는 “기도는 짧을수록 좋다”고 했다. 루터의 신앙 대상인 예수님도 주기도문을 제자들에게 가르치며 짧게 핵심만 간단히 기도하라고 명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너희는 기도할 때 이방인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해야만 하느님께서 들어주시는 줄 안다. 그러니 그들을 본받지 마라.”(마태오의 복음서 6:7~8) 한편, 주기도문에 대해 미국의 제28대 대통령 우드로 윌슨(1856~1924)은 이런 말을 남겼다. “주기도문에서 첫 번째 청원은 일용할 양식이다. 굶주린 사람이 신을 경배하거나 이웃을 사랑할 수는 없다.”

혈압 강하 등 육체적 건강에도 특효


▎천주교 부제 서품식(副祭 敍品式)에 참가한 신학생들이 미사 도중 예수를 본받아 살겠다는 의미로 바닥에 엎드려 기도하고 있다.
심지어 독일 가톨릭 신비사상가 요하네스 에크하르트(1260년께~1327년께)는 “만약 여러분이 평생 ‘고맙습니다’ 말고는 다른 기도를 한 게 없더라도 그것으로 충분하다.” 개신교에서 사용하는 주기도문은 50단어다. 50단어를 한마디로 줄이면 ‘감사합니다’가 아닐까.

우리는 누구에게 비는가? 우리는 부처님·하느님·천지신명·달님에게 기도한다. 그리고 혹시 빠진 대상이 있는지 걱정돼 하느님·예수님·부처님을 따지지 않고 ‘모든 신’에게 기도하는 사람들도 있다. 물론 내가 믿는 대상이 아닌 ‘다른 신’에게 기도하는 사람들을 혐오하고 무시하며 ‘미개인·야만인’ 취급하는 분들도 있지만.

누구에게 비느냐에 따라 기도의 효험이 달라질까. 다른 종교뿐만 아니라 같은 종교 안에서도 종파가 다르면 ‘저쪽은 가짜다, 허구다’라고 생각하기 쉽다. 현대과학은 이 문제에 대해 뭐라고 말할까. 또 기도의 효과를 과학적으로 검증할 수 있을까?

미국 철학자·심리학자 윌리엄 제임스(1842~1910)는 “최고의 고민 해결법은 기도”라고 했다. 왜일까? 덴마크 철학자·신학자 쇠렌 키르케고르(1813~1855)가 해답을 준다. “기도는 신을 바꾸는 게 아니라 기도하는 사람을 바꾼다.” 신이 있건 없건, 기도는 사람을 좋은 방향으로 바꾼다.

30권의 책을 저술한 듀크대의 해럴드 케이니그 정신의학 교수는 기도하면 병에 걸리지 않고 걸리더라도 빨리 낫는다고 주장한다. 1500건의 의학 연구를 분석한 후에 내린 결과다. 보다 종교적이고 보다 기도를 자주하는 사람들이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더 건강하다.(상반된 연구도 있다. 기도는 특히 요즘 사회에 만연한 분노를 완화시키는 효과가 있는데 어느 종교를 믿는지, 얼마나 자주 종교의식에 참가하는지, 얼마나 자주 기도하는지는 상관없다) 또 기도하는 사람은 면역체계가 더 강하고 혈압이 더 낮다. 스트레스를 잘 받지 않고 보다 희망적·낙관적이다. 우울증이나 불안감에도 잘 빠지지 않는다. 기도는 심지어 시각·청각장애에도 효과가 있다.

현대과학은 기도가 뇌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한다. 기도하는 사람의 뇌를 스캔해보면 뇌의 상태가 바뀐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하느님은 어떻게 여러분의 뇌를 바꾸는가>를 집필한 펜실베이니아대 의대 앤드루 누버그 교수(신경과학)는 10여 년 넘게 종교적인 사람들의 뇌를 스캔하고 있다.

누버그 교수에 따르면 기도나 명상을 수행하는 수녀·승려 등 종교인의 뇌는 자아와 관련된 두정엽(頭頂葉)이 검게 나타난다. 자아와 관련된 뇌의 부분이 작동을 멈춘 결과다. 불교에서 말하는 “자기를 잊고 있는 상태”인 몰아(沒我)가 과학적으로 근거가 있다는 게 밝혀진 것이다. 누버그 교수는 이렇게 부연 설명한다. “수학이건 자동차 경주건 미식축구건 신이건 무엇이든지 그것에 여러분이 집중하면 그것은 여러분의 현실이 되며 뇌의 신경연결망에 입력된다.”

물론 모든 과학자가 케이니그 교수나 누버그 교수의 주장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 기도의 과학은 다른 과학분야에 비해 역사가 짧다. 걸음마 단계다. 뇌과학 자체가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초반이다. 신석기 시대까지 올라가는 침술에 대해서도 서양 의학은 회의적이다. 침술을 ‘유사과학(類似科學, pseudoscience)’이라고 보는 경향이 강하다. ‘사이비’ 과학이라는 것이다.

행동 뒷받침돼야 ‘진짜 기도’


▎무속인이 벌이는 굿판을 지켜보는 자녀들이 부모의 백수(白壽)를 빌고 있다.
기도의 과학에 대해서도 회의론자들은 다각도로 비판한다. 기본적으로 기도는 과학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본다. 그들은 사탕을 먹을 때도 뇌가 바뀐다고 지적한다. 뇌는 사람이 어떤 활동을 하든 항상 바뀐다는 것이다. 실험 설계가 잘못됐다는 지적도 꾸준히 제기된다.

특히 타인을 위한 중보기도(Intercessory Prayer)의 연구에 대한 비판이 쏟아졌다. 정부 예산으로 즉 국민의 혈세로 중 보기도 연구가 수행됐다는 점이 특히 도마에 올랐다. 비판 캠프에 따르면 이런 연구는 또 위험할 수도 있다. 일부 연구에 따르면 중보기도를 받은 대상 환자들의 상태가 오히려 더 나빠졌다.

기도의 효험이 어느 정도 밝혀진 경우에 대해서도 비판자들은 이를 위약효과(僞藥效果, placebo effect)로 설명한다. 위약효과는 “속임약을 썼을 때 환자가 진짜 약으로 믿어 좋은 반응이 나타나는 일”이다. 사실 기도의 효과가 있더라도 그러한 효과는 신이나 불교에서 말하는 해탈의 세계의 존재여부와는 무관한 문제일 수 있다.

게다가 기도 효과 연구를 일부 과학자만 반대하는 게 아니다. 일부 신앙인 또한 그러한 연구가 신을 시험하는 것이라며 반대한다. ‘신은 자신을 시험하려는 시도를 무력화하기 위해 엉뚱한 실험 결과가 나오게 만들 것’이라는 주장까지 제기했다. 이러한 회의론에 대한 재반론이 있다. 너무나 많은 사람이, 특히 치료를 위해 기도하고 있기 때문에 기도가 건강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하는 것은 학자의 의무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강조할 게 있다. 기도만으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행동이 기도를 뒷받침해야 한다. 미국 노예제 폐지운동가 프레더릭 더글러스(1818~95)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자유를 위해 20년 동안 기도했는데 내 다리로 기도하기 전까지는 기도에 대한 그 어떤 응답도 얻지 못했다.” 감리교회의 창시자 존 웨슬리(1703~91) 또한 “행동이 있는 곳에 기도가 있다”고 했다.

개신교 신자였던 전태일 열사(1948~1970)는 1970년 8월 9일자 일기에서 “하나님! 긍휼과 자비를 베풀어주시옵소서”라고 기도했다. 뭔가 개인적인 복은 구하지 않았다. 전태일은 기도와 행동을 모두 실천한 것이다.

김환영 - 중앙일보 심의실장 겸 논설위원. 외교부 명예 정책자문위원. 단국대 인재 아카데미(초빙교수), 한경대 영어과(겸임교수), 서강대 국제대학원(연구교수)에서 강의했음. 서울대 외교학과 학사, 스탠퍼드대 중남미학 석사, 스탠퍼드대 정치학 박사. 쓴 책으로 <마음고전> <세계사의 오리진을 만나다> <세상이 주목한 책과 저자> 등이 있다.

201609호 (2016.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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